2014년 7월 13일 일요일
'창살없는 감옥' 보안관찰법
[친절한 통일씨] '보안관찰법' 들여다보기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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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13 18: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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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위 일심회 간첩단 사건에 연루, 징역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최기영 씨가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재수감, 노역형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형을 살고 나온 이들이 출소 후에는 '보안관찰법'이라는 또 다른 법에 따라 '잠재적' 범죄자의 처분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현재 보안관찰법 대상자는 2천여 명으로 이 중 40여 명이 피보안관찰자로 선정, 국가의 감시 속에 살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아우 격인 제2의 악법이라고 불리는 '보안관찰법'은 어떤 내용이고 이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회안전법'의 대를 이은 '보안관찰법'
보안관찰법은 유신시대인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을 대체해, 1989년 제정됐다. 사회안전법은 크게 보안감호처분, 주거제한처분, 보호관찰처분을 지녔는데, 이 중 인신을 구속하는 보안감호처분과 사실상 기능과 효과 면에서 유명무실했던 주거제한처분을 폐지하는 대신 보호관찰처분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해 보안관찰법으로 바뀌었다.
보안관찰법은 '특정범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하여 보안관찰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을 유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특정범죄는 내란목적살인죄 등 내란과 관련한 형법, 쿠데타 등 군형법, 국가보안법 위반을 대상으로 하며, 형기 합계가 3년 이상인 자 혹은 일부 집행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를 '보안관찰처분대상자'로 선정한다.
즉, 내란죄나 국가보안법 등을 어긴 이들은 출소 후 자동으로 보안관찰처분대상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안관찰대상자가 되었다고 모두가 보안관찰법상 피보안관찰자로 집중 관찰 대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안관찰해당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 재범의 방지를 위한 관찰이 필요한 자가 피보안관찰자로 선정된다.
피보안관찰자로 선정되면, 보안관찰처분결정을 고지받은 때에 주거지 관할 경찰서장에게 자신의 위치를 신고해야 한다. 또한, 매 3개월 마다 그리고 주거지를 이전할 경우, 또한 해외여행, 혹은 10일 이상 주거를 이탈해 여행하려면 관련 사항을 신고해야 한다.
심지어 가족, 교우관계, 재산상황, 직업, 학력, 경력, 종교 및 가입한 단체까지 신고항목에 들어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관할 경찰서장은 보안관찰부를 작성.비치해 매월 1회 이상 피보안관찰자의 동태를 관찰해 그 결과를 기재해야 한다.
이를 두고, 창살만 없지 감옥에서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피보안관찰자는 영원히 낙인을 찍히고 살아야 하는가. 법에 따르면 '보안관찰처분심의위원회'의 심사를 2년 마다 받아야 한다. 해당 위원회에서 피보안관찰자를 보안관찰대상자로 분류하거나 다시 피보안관찰자로 선정할 수 있다. 2년마다 자신의 신분이 국가에 의해 심의.결정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보안관찰대상자가 다시 피보안관찰자로 분류될 수도 있어, 2천여 명의 보안관찰대상자 모두가 언젠가 피보안관찰자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보안관찰법망을 피해갈 수 없는 이들이 2천여 명이나 된다고 할 수 있다.
'피보안관찰자'가 보안관찰법에서 면제되는 방법이 있다. 법령에 따라 △준법정신이 확립되어있고, △일정한 주거와 생업이 있으며, △대통령령이 정하는 신원보증이 있다면, 보안관찰법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일정한 주거와 생업이 있고 신원보증까지 받는다고 하더라도 해당 인물의 준법정신 확립 여부는 사상검증에 해당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국가기관 판단에 맡겨야 하므로 사실상 '보안관찰법'에서의 해방은, 시쳇말로 '죽어야 끝난다'.
'창살 없는 감옥' 피보안관찰자들의 삶
2002년 작성된 국가인권위원회의 '보안관찰대상자 인권 침해 실태'를 통해 피보안관찰대상자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출소 직후부터 경찰들이 1달에 1~3번 정도 담당 경찰관이 집으로 찾아와 신고하라며 "출소신고를 거부하고 검찰의 출석요구에도 불응하는 등 협조적이지 않으면 불리할 줄 알아라. 다른 대상자들은 다 신고했는데 왜 당신만 특별하게 구느냐. 이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것 하나 없다"는 등의 고압적인 자세로 대했다. 그래도 출소신고를 하지 않으니까 1차례의 경고장을 보내왔으며, 며칠 후에는 3명의 형사가 타자기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신고양식서 작성을 요구했다. -7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8년 출소.
출소한 지 1년 1개월이 지난 후, 출소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집 앞에서 11시가 넘은 늦은 밤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작은 체구의 여성인 나 한 사람을 붙잡으려고 형사 두 명이 양팔을 붙들고 이웃들이 다 보는 데서 경찰서로 끌고 갔다.-3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8년 출소.
출소신고를 거부하고 있을 때, 여권신청을 한 적이 있는데 거부당했다. 그래서 외교통상부에 왜 여권신청이 안 되는지 이유를 물으니, 검찰에서 출국금지 신청을 해놓았다고 했다. 검찰에서는 "보안관찰법상 신고의무 불이행으로 재판 중이라서 불허됐다"고 했다. 그러나 신고의무 불이행의 최고형은 벌금 100만 원 또는 2년 이하의 징역밖에 안 되는데, 이 건으로 출국금지를 하는 것은 결국 정치보복의 성격을 갖는 과잉한 처사라고 생각한다.-4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9년 출소.
출소 후 목장에 가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가량 되었을 때, 담당 형사가 목장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경찰이 목장 주인에게 "이 사람은 사상이 불순하고, 독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해서 쫓겨난 적이 있다.-7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85년 출소.
담당 경찰이 내가 출소한 직후에 장인어른을 만나 내 상황을 다 이야기해서 처가댁으로부터 부인과 이혼을 요구받았으며, 결국 부인과 서류상 이혼을 한 적이 있다.-5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86년 출소.
한 번은 담당 경찰이 언니집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 "O동 O호에 보안관찰자가 있으니 주시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형부와 언니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경찰이 자꾸 찾아와서 내가 거기에 머물기가 곤란했다.-4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7년 출소.
이 뿐만 아니라 피보안관찰자 재심 당시 보안관찰심의위원회에 작성된 내용은 피보안관찰자의 사상을 사전에 재단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다음은 보안관찰처분 결정 내용이다.
"현 거주지는 민가와 떨어져 있어 인적이 드물고 경북 OO소재 OO자연휴양림에서 강원도 OO방면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간첩 접선 및 침투 간첩 은신, 우회침투, 간첩 거점 화보 등이 용이하고.."-6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8년 출소.
"부 OO이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하여 처형당하고, 형이 일본 거주 중 자진 월북하는 등 연고관계도 불량하며.."-50대 초반, 보안법 위반, 1991년 출소.
이는 2002년에 작성된 보고서로 현재 상황과 다소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최기영 씨의 사례에서 보면 피보안관찰자들의 삶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최기영 씨 부인에 따르면, 최 씨는 출소 후 피보안관찰처분자로 선정, 거주지 신고 등의 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 최 씨에게 검찰은 100만 원의 벌금을 내렸고, 이후 소송을 통해 벌금 80만 원의 행정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자, 검찰은 통장계좌를 압류하고 끊임없이 출두명령을 했고, 이후 경찰에 소환, 현재 약 16일의 노역처분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회사 근처에서 강제연행하거나, 강압 속에서 벌금을 내야 했던 사례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피보안관찰자들이 경찰의 감시 속에 살고 있다.
사회안전법의 대표적 희생자이자 보안관찰법 폐지를 주장했던 서준식 씨가 <한겨레>(1989.8.30)에 기고한 글은 '보안관찰법'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득한 옛날 사건을 다시 문제 삼아 그 사람의 속마음을 법관도 아닌 사람이 심판하고 일제시대나 다름없는 형태로 경찰감시 밑에 두는 것이 폐지된 사회안전법상의 보호관찰처분인데 이에 더해 보안관찰법은 새로 번듯한 벌칙규정까지 두어가며 국민의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를, 아니 더 기본적인 사람을 만날 권리마저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엄청난 전쟁과 오랜 독재정치를 겪어온 이 불행한 나라에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선량한 사람들 투성이다"
급변하는 주변국 정세, 한국만 갈팡질팡
[새록새록 단상 536] -목적성이 뚜렷한 한반도 주변국 외교와 한국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4/07/13 [12:0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지난 북경에서 진행된 한중 정상회담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중국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과 외교를 하는데 한국은 그저 대북 압박 선전 기회로만 대하는 것 아닌가 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자주민보
7월 11일 서울주재 일본대사관에서 자위대 창설 60돌 기념행사를 진행한데 대해, 보수단체와 진보단체들이 간만에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한다.
“전범국의 군대 창설 기념식을 전쟁 피해국 도심 한복판에서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물론 형식적으로는 자위대가 구일본제국군대와 다르고 정의도 보통 군대와는 달랐다. 그런데 최근에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고삐가 풀리는 등 점점 군대로 전쟁기계로 줄달음치는 판이라 그따위 행사가 눈꼴사나울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본 자료에 의하면 “유사시”라는 개념은 1950년대 자위대에서 나왔다 한다. “평화헌법”의 제한 하에서 자위대는 대외전쟁을 언급할 수 없었기에 “반도유사시”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얼버무렸는데, 이제는 반도에서의 전쟁까지 포함하여 대외전쟁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일본 아베정권의 변신에 공개적으로 환영을 표시한 건 미국과 호주이다. 미국은 중국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일본을 앞잡이쯤으로 내세워 싸움을 붙여볼 속셈이 내비치므로 이해된다. 그런데, 호주 총리 토니 애벗이 8일 내방한 아베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중뿔나게 아베와 현재일본 지어는 구일본군이 “영용히 싸웠”노라고 그 “정신”까지 찬양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20세기 세계의 여러 전쟁들에 빠진 적 없다는 호주에서 총리가 일본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하여, 한국의 어느 언론은 한국의 뒤통수를 쳤다고 표현했는데, 토니 애벗이 반한표현은 하지 않았으므로 단순한 뒤통수운운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토니 애벗이 공정성을 강조하고 외부의 모두와 사이 좋게 지내려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발언이 중국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곧 중국과도 친하게 지내려 한다고 표명했다. 중국정부는 아직까지 크게 떠들지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2차 대전시기 구일본군이 호주에 떨어뜨린 폭탄이 진주만에 떨어뜨린 폭탄보다 많았다는 세부까지 언급하면서 과거를 망각한 토니 애벗을 질책했고, 구일본군의 용감성(?)은 호주 백인미녀들을 강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왔으리라는 풍자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토니 애벗이 화해를 구하는 발언에는 그따위 “친구”가 필요없다고 냉대했다.
일본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한 건 물론 중국이다. 7월 7일에는 일본과의 전면전쟁도화선으로 된 “7.7사변” 5돌도 10돌도 아닌 77돌을 최고위층간부들이 모두 참석하여 기념하면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사변발생지점부근에서 연설했고, 타이완의 “총통” 마잉쥬(馬英九)도 “항정승리 및 타이완광복기념특별전람”에 참석하여 댜오위도(조어도, 일본이 센카쿠열도라고 주장하는 곳)영토를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7.7사변”으로 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이뤄졌고 8년 뒤에 항일전쟁이 승리했으므로, 당년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계승자들이 기념하는 건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일명 “루커우챠오쓰뺀(盧溝橋事變)”이라고도 불리는 “7. 7사변”으로 전면전쟁이 일어난 뒤, 일본은 3개월 내에 중국을 먹어버린다고 자신만만했었다. 헌데 장기전쟁으로 발전했고 8년 뒤와 12년 뒤의 최대승리자가 중국공산당이었으므로 전후 일본에서는 오만가지 설들과 논들이 난무했다. 이긴 자는 말이 없고, 진 자는 말이 많다던가. 7월 6일 일본군의 이동경과와 대렬편성세부까지 따지면서 중국군의 이상한 자극으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중국공산당이 음모궤계를 부리어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런 부류의 설들이 타이완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참으로 해괴한 변종해석을 낳았다. 일본군이 중국공산당을 구하기 위해서 “7.7사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가만 있으면 쟝제스(蔣介石, 장개석)이 공산당을 소멸하고 중국을 통일해서 중국이 강해지면 일본에 위험하므로 선제공격차원에서 사변을 일으켰다나. 그따위 설들이 또다시 대륙으로 퍼져서 사이비역사학자들이 앵무새노릇을 하는데, 한국 전문가들이나 언론특파원들도 분석 없이 들은 풍월을 외우곤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한국 모 언론의 베이징특파원은 항일전쟁 전에 중국공산당이 궤멸직전에 있었으므로 지금 항일전쟁을 언급하는 효과가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확실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1937년의 중국공산당은 1934년경의 30만 당원, 30만 군대와는 비길 수 없었으나, 그래도 수만 명 당원, 수만 명 군대롤 보유했고, 1927년 무장투쟁을 시작할 때보다는 실력이 훨씬 강했고 필승의 투지가 차넘쳤다. 이에 대해서는 외부인사인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우 부부의 책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때문에 궤멸직전은 헛소리에 불과하고, 10년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섬멸하지 못한 국민당이 갑자기 공산당을 없앤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근거들을 다 들려면 너무 많아서 이쯤에서 줄이는데, 역사에 대한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게 그릇된 정보를 조금 아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미주, 중국, 호주와 달리 한국은 일본의 변화에 찬성도 반대도 분명히 하지 못한다. 오히려 일본이 조선(북한)과 급격히 가까워진다면서 “한미일공조”에 금이 생길까 걱정타령을 한다. 유치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냉전시대와 다르고 냉전 후의 20여 년과도 다르다. 냉전 뒤 두루뭉술하게 덮어두던 모순들이 첨예해지면서 국익중심으로 표면화되는 게 현실이다. 일본의 경우 중국을 경계하면서 중국주변의 나라들과 관계를 밀접히 하려는 건 아베정권의 국책이다. 인디아(인도), 호주,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거래가 대표적인데, 중국, 러시아와 사이가 아주 나빠진 상황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완화하는 건 전략적 의의를 갖는다. 조일수교 담론 수십 년 동안에 일본은 아쉬울 게 없다는 삐딱한 자세를 보여왔으나, 이제 와서는 조선에 도움을 바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국가관계의 정상화는 국제적으로 제창하는 바이니 외부의 누가 뭐라고 반대한다고 해서 파기될 일이 아니다. 관건은 이런 기회를 두 나라 정치가들이 어떻게 잡느냐이다. 물론 조선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조일교제와 수교가 “한미일공조”를 파탄시키는 효과도 낳을 수 있겠지만, 사실 남북관계개선이 전제로 된다면 그따위 공조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이 일본의 돈 몇 푼을 바라고 일본에 붙는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금액까지 제시하나, 필자가 이해하는 조선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고, 일본 또한 거액의 돈을 대번에 내놓을 정도로 우둔하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경제이해보다 정치적인 관계개선이 우선이고 조선이 자주의 원칙을 지키리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인들은 “글로벌시대”를 곧잘 운운하지만 반도의 절반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잘 모르고, 또 지나치게 좁은 시각으로 국제정치를 대하곤 한다. 시진핑 주석의 월초 한국방문을 놓고 일부 사람들은 청와대 현주인의 성공을 부각시키면서 대북압박승리를 자축하고, 일부 사람들은 한중정상회담이 실패라고 혹평한다. 표정과 악수방식 따위 세부에 집착해서 갖가지 풀이를 하는 분석(?)방식들도 예전 그대로였다. 허나 한국의 적잖은 사람들이 시진핑의 서울행을 되새김할 때 시진핑은 “7.7사변”을 활용하여 대내, 대외에 풍부한 메시지를 전했고, 중순에는 쿠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남미 4국을 방문하게 된다. 또한 그보다 조금 앞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이미 현지시간 11일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 등 지도자들을 만났고, 350여 억 달러에 이르는 소련 시키의 채무를 90% 면해주고, 나머지 10%는 반년에 1번씩 10년 동안에 갚는다고 합의했다. 조선에 대한 100억 달러 채무의 90% 면제보다 더 큰 조치이다. 100억 달러나 350억 달러가 많아보이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벌이는 천연가스분쟁에서 걸핏하면 수십 억 달러가 오가는 것에 비해보면 별거 아니다. 지난 채무를 받을 가망이 적은 상황에서는 아예 면제함으로써 관계를 돈독히 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보다 유리한 국제지위를 가지는 게 낫다는 게 러시아 지도자의 판단일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뒷동산”으로 불리는 남미에 가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아직 모르지만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리는 시진핑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반도가 자그마한 일부만 차지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때문에 그의 서울방문을 놓고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 러시아, 조선, 일본, 미국의 요즈음 움직임을 살펴보면 목적성이 뚜렷하고 일관성이 돋보인다. 헌데 한국에서는 장관 몇을 바꾸는 것마저 난항을 거듭하고(어쩌면 그처럼 오점투성이들만 후보로 지정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팽배하다. 누구한테 붙어먹으면서 재미를 보던 예전과 다른 지금 세상에서, 남북관계개선만이 돌파구일 텐데 북의 제의를 거부만 하니 답답하다. [2014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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