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0일 수요일

미일 신밀월시대 개막-글로벌 동맹으로 진화

미일 신밀월시대 개막-글로벌 동맹으로 진화

2015. 05. 20
조회수 65 추천수 0
  아베 일본 총리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던 날인 4월 28일을 맞춰서 미국을 방문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일점령의 기본목표를 수정한 것이다. 전후 미국의 대일정책의 기본 목표는 ‘비군사화’와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추구했던 미국의 정책은 1947년 4월 평화헌법 제정으로 현실화되었다. 전쟁을 포기하고, 무력을 가지지 않으며 교전권을 부인하는 9조는 평화헌법의 핵심이다.
1.jpg
 일본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이즈모 헬기호위함. 명칭은 호위함이지만 실제론 경항공모함이다

글로벌 동맹으로 진화한 미일동맹

  하지만 국제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소 갈등으로 냉전이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났으며 6.25 전쟁이 발발했다.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목표로 했던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은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목표로 바뀌었다.
  그 결과 1952년 4월 28일 미일안보조약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4월 28일에 맞춰서 아베는 미국을 방문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 국방장관들은 뉴욕에서 미일 안전보장위원회를 개최(4.27)하여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은 미군과 자위대의 협력과 역할분담을 규정한 정부간 문서이다. 1978년에 만들어졌고(가이드라인 78) 1997년 한 차례 개정(가이드라인97)되었다. 이번에 18년 만에 재개정(가이드라인 15)된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정부간 문서이므로 그 차제로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 일본은 가이드라인에 따른 자위대의 역할을 법적으로 부장하기 위해서 자위대법이나 주변사태법과 같은 관련 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표> 가이드라인 변화 과정과 변화 내용

가이드라인78(제정)
가이드라인 97(1차 개정)
가이드라인 15(2차 개정)
적용상황
일본 유사시
평시
평시
주변사태시
영향사태시
유사시
일본 유사시
3국 피습시
일본 재난시


  이번에 두 번째 개정된 방위협력지침으로 미일동맹은 글로벌 동맹으로 변화하였다. 자위대는 일본과 주변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미군과 함께 진출하여 지구방위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차대전 직후 일본의 비군사화를 목표해서 평화헌법을 제정했지만 일본의 비군사화는 이미 철회된 지 오래다. 이미 그동안 지속적으로 무력화 조치가 취해진 평화헌법도 이번 미일방위협력 지침 개정으로 크게 퇴색하고 있다.
미일 안보조약과 미일 가이드라인 제정
  1951년 체결되고 1952년 발효된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통치 아래서 만들어졌다. 일본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미군은 일본에 대한 외부 공격시 방어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당시에는 자위대가 없었으므로 일본의 군사역할은 명시하지 않았다. 1960년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신안보조약)에는 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능력 발전과 일본 유사시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공동방위를 명시하였다. 자위대의 군사 역할을 강화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후 1978년에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제정(가이드라인 78)하여 자위대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1960년에 개정된 미일신안보조약에는 5조에서 일본에 대한 제3국의 공격이 발생하는 ‘일본유사시’를 상정하고 미국의 군사적인 대응을 정리하고 있다.  6조에서는 ‘극동유사시’를 상정하고 이 경우 미일의 방위협력을 약속하고 있다. 
미국은 1970년에 들어와서 동아시아에서 미군철수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소련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그 결과 1978년에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78) 제정으로 이어졌다.  미일안보조약 5조에 따른 일본 유사시와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를 상정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세부적인 역할을 규정했다. 미일 신안보조약의 이행을 위한 방침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라인 78’에서 일본 유사시에 대해서는 무력공격을 미군과 자위대가 연합하겨 격퇴한다는 내용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극동유사시에 대해서는 상호합의한다는 원칙에만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자위대의 역할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a2.jpg
 미군과 합동으로 상륙훈련을 준비하는 일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대 보통과(보병)대원들


탈냉전기의 미국 세계전략과 일본의 역할

 1997에는 방위협력지침이 개정(가이드라인 97)된다. 일본은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서 일본의 대외팽창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일본에게는 미일협력의 구도를 활용하면 일본이 독자적인 대외팽창이라는 주변국가들의 의혹과 불만을 해소하는 데 유리하다. 반면에 미국은 일본과 책임분담을 통해서 안보비용을 절감하고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이드라인 97’의 배경은 1996년에 발표된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에서는 미일 안전보장의 범위를 아시아 태평양지역으로 확대하고 이를 위한 두 나라의 협력방안을 제시했다. 탈냉전기에 미국의 세계전략 수립에 있어서 일본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다. 미일 신안보선언의 기초는 조셉 나이가 1995년에 작성한 ‘나이 이니셔티브’ (Nye Initiave)이다. 조셉 나이는 미일동맹의 역할을 ‘대소봉쇄’에서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로 전환’할 것을 주문했다. 재정적자를 겪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탈냉전 이후 세계전략을 추구하는데 든든한 조연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셉 나이의 구상은 일본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미일 신안보공동선언과 1997년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015년에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꿈꾸는 아베의 적극적 평화주의와 접목하고 있다. 오바마와 아베가 미일정상회담에서 ‘동맹의 전환’을 강조한 것도 나이 구상의 부활이자 강화이다. 나이 구상으로 미일가이드라인이 개정(가이드라인 97)되었다면, 나이 구상의 부활은 가이드라인 2차 개정(가이드라인 15)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가이드라인 1차개정과 주변사태

  ‘가이드라인 78’에서는 미일 신안보조약 5조에 따른 일본 유사시에 대한 대응만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에 대해서는 원칙적 합의만 있다. 가이드라인 97은 바로 6조에 따른 극동유사시 자위대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가이드라인 97에서는 이것을 ‘주변사태’라고 하고 있다. 즉 가이드라인 97은 평시, 유사시, 주변사태시 라는 3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각각의 상황별로 미일 군사협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가이드라인 97은 가이드라인 78에서 일본 유사시에 중점을 두고 있던 것을 주변사태를 강화하는 변화가 생겼다. 주변사태시 40개 항목으로 자위대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의 공해상에서 활동, 기뢰제거, 선박검사, 탄약수송 등으로 집단적 자위권행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나이구상과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에 따른 것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주변사태의 범위이다. 가이드라인 97에서는 주변사태를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사태의 본질은 대만해협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여론은 가이드라인 97이 자위대의 아시아 재침략을 보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오래전부터 한반도 유사시를 전제해 일본인 구출 및 난민 수용문제 등을 검토해 왔다.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63년의 미쓰야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965년 6월 오카다 가쓰오 의원이 자위대통합막료회의의 ‘63년도 방위도상연구 실시계획(미쓰야 연구)’를 폭로했다. 당시 폭로된 내용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인데 자위대 출동과 일본 총동원 체제 수립을 내용으로 한다.
1983년부터 일본에서 시작된 ‘극동사태연구’는 극동사태가 일본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경우 일본이 작전 중인 미군에 협력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이다. 그 대상지역이 필리핀, 일본, 한국, 대만이 포함되나 일반적으로 극동사태라고 할 경우 한반도 유사시를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라인 97에서 주변사태를 명시한 것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일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작전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가이드라인 97에서 주변사태를 구체적으로 명기한 이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1999년에 주변사태법을 제정했다. 주변 사태 발생시 미군에 대해 후방지역 지원과 수색 및 구조 지원 등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주변사태법 역시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해 일본이 응급조치 차원에서 개입한다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일본 영향’ 사태와 2015 미일 가이드라인 2차 개정

 2015년 4월에 2차 개정된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15)의 가장 큰 특징은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위기 시’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유사시는 일본 유사시, 제3국 피습시, 일본 재난 발생시라는 3개 상황으로 세부화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즉 ‘가이드라인 15’는  평시,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시, 일본 유사시, 제3국 피습시, 재난시로 세분화했다. 그리고 각 시기별로 정보, 감시정찰, MD, 해상안보, 군사훈련, 재난구호  등 미일 공동 대비책을 마련했다.
  주변사태를 삭제하고 이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시로 대체한 것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이 섬)에서의 중국과의 분쟁을 상정함과 동시에서 궁극적으로 자위대의 역할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다. 미군 가는 곳에 자위대가 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처럼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사태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 97때는 주변사태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숨겼으나 이번에 주변사태는 지리적 개념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가이드라인 97’ 이후에는 주변사태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법과 미일 물품 상호제공협적(ACSA)를 개정했다. ‘가이드라인 15’ 이후 도 마찬가지로 일본은 국내법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 개정과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5월 14일 각의에서 통과된 법안은 자위대법, 무력 공격사태 법, 주변사태 법,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등 10개 법안의 개정을 일괄한 ‘평화안전법 제정비 법안’과 국제 분쟁에 대처하는 타국군의 후방 지원을 수시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법안인 ‘국제평화지원법안’ 등 2개다. 이에 앞서 아베는 지난 4월 미국 상하원연설에서 8월까지 법적 정비를 마치겠다고 해서 일본 의회로부터 월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새롭게 제정하는 법은 ‘국제평화지원법’이다. 이 법은 자위대가 외국 군대의 지원을 용이하게 해준다. 아울러 자위대의 해외파병에 대해서도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에 영향을 주는 사태 발생시에 자위대가 손쉽게 세계로 나갈 수 있게 하는 법안인 것이다.
  한반도 유사시에 자위대가 한국의 영역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중요 영향 사태법에서 ‘영역국가 동의’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유사시에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고, 미군은 일본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국가 동의’ 규정은 집단 자위권 관련법인 무력공격사태법 개정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이번 지침은 무엇보다 북핵위협을 넘어 중국의 부상 등 근본적인 안보환경 변화에 맞춰 미일간 중장기적 협력 방향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아태 재균형 정책의 틀 속에서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역할 증대 요청에 일본이 적극 부응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정부가 가이드라인 제정과 미일 신밀월시대 개막이 가지는 엄중한 정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은 주변사태를 일본에 영향을 주는 위기로 확장해서 한반도에 일본이 미군 지원 명목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한미일 3국 군사협력을 강화해서 글로벌 동맹으로 확대하여 한국이 제3국의 분쟁에 개입할 소지가 커졌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개입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과 한국이 동맹에 연루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갈등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시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의 충돌 가능성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미일의 충돌에 한국의 연루 가능성,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한미일 3국 군사력의 공동작전 가능성 △주일미군과 함께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 진출 가능성 등 4가지 문제가 대두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창수(코리아연구원 원장)

북, 한미일에 “임전태세 있다” 경고


국방위원회 정책국 “미사일 다종화 경량화 정밀화 지능화”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5/20 [20: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은 핵타격 수단이 다종화 경량화 소향화, 지능화, 정밀화 되었다며 한미일은 임전태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연합뉴스 등 국내 주요언론들은 20일 북 언론을 인용 조선국방위원회가 정책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자신들의 핵 타격 수단이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정정당당한 자위력 강화 조치에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조선국방위원회 정책국대변인 성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따라 움직이는 기구,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포기한 기구로 전락했다고 맹비난했다.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우리의 핵 타격 수단은 본격적인 소형화, 다종화 단계에 들어선지 오래며 중단거리 로켓은 물론 장거리 로켓의 정밀화, 지능화도 최상의 명중 확률을 담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주장했다.

정책국 대변인은 "지난 5월8일 성과적으로 진행된 우리 전략잠수함의 탄도탄 수중시험발사는 조선의 군력 강화에서 최절정을 이룬 일대 장거"라며 "세계가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 환호하고 격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변인 성명은 그러나 미국과 일본, 남한의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고 저들에 대한 가장 엄중한 도발이며 따라서 처절함을 감수하게 대응하고 국제적인 공조 분위기를 돋구어 제제와 압박의 도수를 높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성명은 유엔 안보리를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따라 움직이는 기구, 공정성과 형평성을 줴버리고(내버리고) 주권 존중의 원칙,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스스로 포기한 기구"라고 몰아부쳤다.

대변인 성명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시험발사에 대해 "그 누가 '도발'이라고 걸고 들고 '중지'하라고 고아댄다고(떠든다고) 하여 포기할 일이 아닌 우리의 정정당당한 자위력 강화 조치이며 합법적인 주권행사"라고 피력했다.

성명은 계속해 "진짜 도발이라면 남의 땅에 침략무력을 끌고와 우리 '수뇌부 제거'와 '평양 점령'을 노리고 벌리는 미국의 화약내 풍기는 전쟁연습소동이며 진짜 위협이라면 핵타격 수단을 들이밀어 벌리는 공공연한 핵공갈 소동"이라고 미국을 지목했다.

이어 "미국과 온갖 불순 적대세력들의 위협과 공갈이 계속되고 침략과 제도전복의 날강도적인 책동이 노골화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나라의 국방과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 계획을 더욱 힘차게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미국과 일본, 남한을 '불구대천의 원쑤'로 규정하며 "제도전복을 꿈꾸는 침략자들의 준동을 짓 부시고 민족의 존엄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우리의 위력한 타격수단들이 정면과 익측뿐 아니라 등 뒤의 임의의 장소에서도 명중탄을 안길 임전 태세에 있다"고 경고를 이어 갔다.
 

한편 조선은 지난8일 잠수함 미사일을 발사를 한후 사출 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한국과 미국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드러나는 정전체제의 민낯


 국제여성평화걷기와 유엔사의 ‘DMZ 관할권’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승인 2015.05.20  23:53:08
트위터페이스북
  
▲ 국제여성평화걷기 참석자들이 평양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초 계획했던 대로 '판문점' 통과의사를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의미 있는 첫 행사는 오는 24일 국제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WCD) 참가단의 판문점 통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유엔군사령부(유엔사)와 한국 정부는 판문점이 아니라 개성을 거쳐 경의선 육로를 차량으로 이동해 줄 것을 권유하고 있지만.
노벨평화상 수상자 메어리드 맥과이어를 포함한 30여 명의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은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판문점을 통해 DMZ를 넘기로 결정했다”고 분명히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WCD 참가단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정전체제를 넘어 판문점을 오간 사람들
미국, 스웨덴, 일본 등 다양한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과 해외동포들로 구성된 WCD 참가단이 판문점을 통해 내려올 경우 진풍경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판문점은 인도적 신병인도나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한 통일운동가의 일방적 귀환 외에 이같은 평화행진이 이뤄진 적은 없기 때문이다.
보통 표류해온 남북 어민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는 경우가 가장 많고, 1993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송환에 이어 6.15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송환됐고, 2005년 10월 2일 비전향장기수 정순택 유해가 북측 유가족에게 인도되기도 했다.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했던 문익환 목사는 중국과 일본을 거쳐 귀국해 구속됐지만 전대협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과해 내려와 곧바로 구속됐다.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을 다녀온 박용길 장로와 6.15 10주년 평양행사에 참가한 한상렬 목사,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 참가한 노수희 범민련남측본부 부의장 등이 판문점을 거쳐 돌아와 구속됐다.
이 외에도 1959년 <프라우다> 평양지국 이도운 기자가 귀순해왔고, 가장 유명한 귀순사건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기습 귀순한 이수근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다. 2012년 10월 북한 병사가 전방부대 초소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이른바 ‘노크 귀순’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3년 10월 25일에는 월북했던 남측 주민 6명을 북측이 판문점을 통해 인계해주기도 했다.
정전체제의 민낯, 유엔사의 DMZ와 JSA 관할권
  
▲ ‘Women Cross DMZ’는 국내외 여성 평화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3월 11일 뉴욕에서 '국제여성평화걷기'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처음부터 DMZ를 도보로 횡단하겠다고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WCD 참가단은 19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이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전쟁의 가장 상징적인 잔재”라면서 “대표단이 판문점으로 DMZ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유엔사 측에 거듭 요청했다.
WCD 측은 이 행사를 기획할 때부터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인 5월 24일 판문점을 걸어서 통과하겠다는 구상을 세웠고, 지난 3월 11일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구상을 밝힌 뒤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20일 “유엔사와 우리 정부가 협의해 판문점 보다는 경의선 육로를 통해 내려오면 좋겠다고 WCD 쪽에 권고했다”며 “판문점은 정전체제를 관리하는 곳이지 민간인들이 출입하는 곳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우발적 사건이라도 안전 문제가 될 수 있는 민감한 곳인데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비무장지대(Korean Demilitarized Zone, DMZ)는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의해 성립된 지대로, 군사분계선(MDL)에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의 범위로 설정되어 있다.
정전협정 제1조(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⑽항에는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이, 이북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책임진다”고 명기돼 있다. 즉, DMZ 남측 구역은 유엔사가 관할하고 있는 실정.
더구나 이들이 통과하길 희망하는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에 속한다. JSA는 한반도의 정전상태를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유엔사측과 북한.중국측으로 구성) 운영을 위해 군사분계선상(MDL)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지대다. 유엔사의 직접 관할하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엔사측은 남북 철도연결 사업 당시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지점에 대해 행정권인 관리권(adminstration)을 남측에 이양했지만 관할권(jurisdiction) 마저 넘긴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고, 지금도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경의선 육로 통과자들의 명단이 유엔사에 통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엔사 관계자는 19일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출입하는 문제이며, 유엔사는 관할구역인 DMZ를 건너는 상황에 대해서만 관여한다는 입장”이라며, “한국 정부의 승인이 났을 때 유엔사는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유엔사와 남측 정부가 WCD 참가단의 판문점 통과를 꺼리는 이유가 유엔사 모자를 쓴 주한미군에 의해 이곳의 관할권이 행사되고 있다는 ‘정전체제의 민낯’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대두되고 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사가 남측 관할권이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남북이 군사적 대치 상황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여성평화걷기, 평화체제 서막 여나
  
▲ ‘2015 Woman Cross DMZ 한국위원회’는 4월 23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행사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신변안전보장을 못 받더라도 여성들은 걷는다”고 선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WCD 한국위원회 실행위원인 안김정애 평화여성회 상임대표는 “오늘 통일부측의 요청으로 면담을 가졌지만, 통일부는 여전히 경의선으로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했다”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판문점의 상징성이 중요하다”고 재강조했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WCD 국제공동대표단은 이미 어제 오후 북한에 들어가서 전혀 연락도 안 되고, 취할 방법도 없다”며 “그들은 원하는 대로 판문점으로 올 것 같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WCD한국위원회는 이들이 내려오는 24일 버스 2대를 이용해 판문점으로 마중나가기 위해 유엔사측에 명단 제출을 추진 중이다.
안김정애 상임대표는 “여성이 평화체제의 주체가 돼 정전체제를 깨는데 의미가 있다”며 “유엔사와 정부는 우리가 원하는 바람대로 해주길 원한다”고 촉구했다.

2013년 8월 오토바이를 타고 경의선 육로를 통과한 뉴질랜드인 5명이나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 진행됐던 국제오토랠리(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는 모두 경의선 육로를 이용했다.
따라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국제여성평화운동가 30여명이 처음으로 판문점 MDL(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은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WCD 참가단에 해외동포들은 포함돼 있지만 남과 북의 여성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더구나 남북 당국과 민간은 6.15공동행사와 8.15공동행사 개최 장소를 두고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가는 것을 환영하며, 광복 70주년 을 계기로 남북의 민간과 당국도 남북을 오가며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길 기대해 본다.

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제2민주화, 5월광주 - 6월항쟁 힘으로˝
[특집 대담 ①] 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기사입력 : 2015.05.18 03:51  |  최종수정 : 2015.05.19 17:52 페이스북  트위터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가 광주민중항쟁 35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5월 18일 문을 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횃불로 살아 있는 그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홈페이지의 첫 번째 기사로 함세웅 신부(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자유언론실천재단 고문)와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대담을 싣는다. 김 이사장이 묻고 함 상임대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2회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암흑 속 횃불’ 광고로 유신독재 대대적 고발 

▷김종철(이하 김) : 올해로 5월 광주민중항쟁이 3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해주실까요?

▶함세웅(이하 함) : 그날의 ‘광주’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은 민중의 용감한 투쟁인 동시에 민족사의 비극이자 참사였습니다. 저는 1987년 6월항쟁 직전에 한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서강대 3학년인 청년이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전국을 여행하다가 광주 망월동묘역에 갔답니다. 그는 13살 된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렇게 어린 학생이 총탄을 맞아 숨진 것을 알았을 때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겠지. 나는 저 중학생보다 10년이나 더 살았구나.’ 그 청년은 묘지 앞에서 깊은 묵상을 하면서 그 중학생을 항쟁의 대열로 이끈 어떤 신비한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성당을 찾아가 고백성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수도자와 사제의 권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 청년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은 바로어린 학생의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5월 광주의 정신은 십자가의 힘과 같다고 믿으면서 신자들과 함께 망월동묘역 참배를 계속했습니다. 신자들도 그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는 숙연해지더군요.

전두환 일파는 망월동묘역을 없애려고 갖은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같은 그곳을 군사독재의 힘으로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지방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들과 기쁨과 희망을 함께하셨습니다. 망월동은 한국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광주는 고난의 땅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부활, 희망의 횃불이기도 합니다.




▷김 :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과 이념을 오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하면 좋겠습니까?

▶함 : 민주화를 향한 연대의식으로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 일파에 맞서 떨쳐 일어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이 과감하게 쿠데타에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항쟁 기간에 광주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거기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것이 광주공동체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남한의 5천만 겨레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광주 정신’을 물려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이 그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립하거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현재 제일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보이는 자세도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기간에 국정원과 보훈처,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이 저지른 선거부정이 명백히 드러났고,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에 대해 시민 28만여명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정원장 원세훈이 구속되었는데도 소수를 빼고 많은 국민이 침묵했습니다. 이것은 권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물려받은 박근혜를 응징하고 제2의 민주화를 이루는 과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40여년 동안 민주·민족·민중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일꾼들과 뜻을 한데 모아 지난 3월 24일 민주주의국민행동 발기인대회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3·1운동 때의 투지를 이어받고, 미군정과 야합한 이승만의 독재를 물려받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후예들인 현재의 집권세력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단을 구실로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수구보수세력을 척결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더 부유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추방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체제를 이룩해야 합니다. 저는 제2의 민주화운동이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황새 부상 크게 보도… 학생데모는 안 실려” 

▷김 :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것은 언제인가요?

▶함 : 1973년에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노농정권을 세우려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사건 모두 중앙정보부가 살인적인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속된 분들의 가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심한 일은 언론이 그런 사실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박 정권은 그해 7월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혐의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을 구속했습니다. 지 주교님은 구속되기 직전에 유신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셨는데 그 사실조차 신문과 방송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의 속성을 잘 모르던 저는 얼마 뒤에야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간부나 직원이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이나 제작에 일일이 간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저항하는 언론인들은 ‘남산’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고문이나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제단 총무와 대변인을 맡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새가 다치면 신문 사회면 머리에 나오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1단기사도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성당에서 기자들을 만나면 특히 KBS 기자에게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곤 했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감시를 하는 중앙정보부원이나 사복경찰도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참담한 현실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고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정보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저와 동료 사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부터 동아일보에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김 : 그런 현상을 깨뜨리려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이 그해 11월 12일 일으킨 제작거부 운동을 기억하시는지요?

▶함 : 네,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바로 그 전날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 주교좌 성당들에서 일제히 인권회복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하고 사제, 수도자, 교우와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은 그 기도회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 11월 12일자 석간 1면에 사진을 곁들여 5단으로 보도하거나 사회면 머리에 올리고 동아방송 뉴스에도 맨 앞에 내보내라고 편집국장과 경영진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거절하자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농성을 하면서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날 하루가 지난 뒤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는 인권회복기도회가 크게 보도되었지요.




동아일보·방송 기자들 자유언론 투쟁 지원

▷김 :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박 정권이 저지른 만행이 보도되기 시작한 뒤 구속자 가족들의 호소,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와 개신교의 목요기도회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는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1974년 12월 하순부터 중앙정보부를 통해 동아일보사에 대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지로 변하게 된 동아일보 광고면에 격려광고가 실리면서 놀라운 민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제단은 그때 동아일보에 많은 격려광고를 실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는 무엇이었습니까?

▶함 : 12월 31일자 동아일보 8면 전체를 차지한 ‘암흑 속의 횃불’이라는 광고입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비롯해서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 등 박정희 유신독재의 실체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내용이었지요. 당시 언론은 물론이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렸으니 박정희가 보고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 광고를 싣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 문안을 보여드렸더니 이런 내용이 어떻게 신문에 나가겠느냐고 걱정하시더군요. 그러나 정작 ‘암흑 속의 횃불’이 나온 동아일보를 보시고는 매우 놀라시면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특집대담②]에서 계속)



▲ 김종철 이사장(좌)과 함세웅 신부(우)가 대담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김종철 이사장〉

"'나쁜 놈 병원에서 내보내라' 우익 민원 때문에"


15.05.20 20:28l최종 업데이트 15.05.20 20:28l



기사 관련 사진
▲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세월호 사고 1년. 특별법 시행령 시행과 인양에 대해 정부와 유가족 및 시민의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진실규명을 외치는 시민들은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피해자 가족 당사자들의 심경은 어떨까. 지난해 7월 14일부터 46일간 단식을 하며 싸운, 세월호 사고 희생자 고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 뜨거운 여름날 사선을 넘나들며 진실을 외친 유민 아빠를 17일 안산시 부곡동 자택 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미운 게 많아질 것 같아요.
"미운 거 많죠.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현실이 미워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건데. 돈을 이야기하다니요. 이렇게 궁지로 몰아가는 현실이 슬퍼요."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해하는 시민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뜻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니까요. 1년이 지난 지금 저렇게까지 버티면서 훼방을 놓는 것을 보면 분명하잖아요. '(정부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틀림없다.' 그런 (생각)."

기사 관련 사진
▲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 단식 이야기를 해볼게요. 회복은 많이 되셨나요?
"46일 단식했어요. 회복기간 즉 복식기간을 단식기간의 두 배 들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90일 넘게 해야 하는데. 40일 정도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요."

- 민원이요?
"나쁜 놈이 병원에 있다고, 내보내야 한다고. 우익단체 어르신 같은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계속 병원에 전화를 했나봐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병원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왔죠. 뭐."

- 후유증이 심하시겠네요. 
"하루 한 끼 정도밖에 못 먹어요. 속이 안 좋아서요. 그리고 피곤을 많이 타요. 하루 외출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돼요. 얼마 전부터는 힘들어지면 그냥 자고 싶은 생각만 들기도 해요. 올해 1월부터인가, 유민이가 꿈에 가끔 나오거든요. 예전에는 꿈에 나온 적이 없었어요. 꿈에 안 나오면 좋은 데로 간 거라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척 그리웠거든요. 꿈에 유민이가 웃으면서 다가와서 폭 안겨요. 잠에서 깨면 울고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 그리웠던 유민이를 만났으니까요."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어... 1월부터 유민이가 꿈에 나와"

기사 관련 사진
▲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유민양의 책상.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 유민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아이였나요?
"큰딸 유민이는 혼자인 저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했던 보호자였어요(기자 주 : 김영오씨는 유민 엄마와 이혼했다). 제가 해준 2만9천 원짜리 (휴대전화) 요금제도 비싸다고 1만9천 원짜리로 바꾼 아이. 수학여행 갈 때도 연락하지 않고 갔어요. 알면 아빠가 용돈 부쳐줄 거 뻔히 아니까. 용돈을 받으면 십 원 한 장 안 쓰고 저금을 할 정도로 알뜰했고, 수학을 잘해서 (제가) 은행원이 되라고 했죠.

마음이 고와서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 유민이 동생한테 들었는데요, 한번은 집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종이로 걷어내서 바깥에 날려주면서 '좋은 데로 가라' 그랬대요."

- 유민이랑 가까웠나요?
"같이 못 살아서 아빠가 밉기도 했을 텐데, 만나면 항상 꼭 붙어 있었어요. 가끔 명절 때나 시골(고향)에 가면 삼겹살 파티 같은 것을 했거든요. 제가 고기를 구우면 뒤에서 꼭 안고 있던 아이예요. 저희 6남매 중에 그런 자식을 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참 많이 부러워했어요. 유민이랑 동생이랑 제 왼쪽 오른쪽 팔에 끼고 잠들곤 했죠."

- 유민이가 바다에서 언제 올라왔죠?
"(지난해) 4월 25일 164번째요. 깨끗하게 올라왔어요. 그런데 많이 야위어있더라고요. 두 달 전 명절 때 봤을 때 분명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우리 유민이가 살이 올라서 보기 좋다'고 했거든요. 혹시 배 안에서 며칠 더 살아 있었을까봐, 고통스러웠을까봐 마음 아파요."

기사 관련 사진
▲  단원고 2학년 10반 교실.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건 무엇인가요?
"많죠. 그 중에서도 저는 대통령이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UDT가 왔을 때 해경청장이 상부에서 승인이 안 떨어져서 투입 못 시킨다고 했어요. 총리가 내려왔을 때도 그랬어요. 자기는 힘이 없다고. 그러면 승인을 내줘야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대통령이라는 거잖아요. 7시간 동안 무엇을 했기에 골든타임 다 놓치고,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냐는 거예요."

- 개인적으로 어떤 점이 제일 속상하세요?
"저를 나쁜 아빠로 보는 거요. 왜 저를 배제하려고 하는지, 왜 저를 정치적으로 보려 하는지요. 대통령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요, 정치인들은 신뢰를 잃었어요. 저는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저는 뭐가 먼저인지 아는 사람이에요. 처음으로 얻은 정규직 직장도 잃었어요. 노가다를 하면 어때요? 저는 다 해봤어요. 두렵지 않아요.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꼭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리고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한마디면 돼요."

세월호 사고 1주기에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다행이었다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 학생들이 찾아와 10년 후 자신들이 정치인이 돼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에 희망을 봤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시행령을 반대하며 광화문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 절뚝이면서도 끝까지 "같이 가자. 함께해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