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8일 토요일

환경 파괴에 앞장서는 제주 시조신 모시는 ‘삼성사재단’


‘제주 전역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석산개발’
임병도 | 2016-10-09 09:54:50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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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삼성혈 앞에서 석산개발 반대 시위를 벌이는 송당리,덕천리 청년들 ⓒ홍수복

요새 송당리 청년회장 홍수복씨는 아침마다 밭에 나가지 않고, 제주 시내에 위치한 삼성혈로 출근합니다. 평생 살아온 마을 땅 인근에 대규모 채석장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석산 개발이 이루어지는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23번지의 토지 소유주는 (재)고양부삼성사재단(이하 삼성사)입니다. 제주의 신화를 보면 삼을나 삼신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이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하면서 ‘탐라왕국’으로 발전했다고 나옵니다.
삼신인이라 불리는 고씨,양씨,부씨 등이 제주의 뿌리를 지키며 시조신을 모시겠다고 만든 재단이 삼성사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삼성혈을 관리하는 곳도 삼성사입니다. 제주 성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씨,양씨,부씨이기에 삼성사가 보유한 제주 토지만 해도 엄청납니다.
삼성사는 제주 전역에 소유한 토지를 임대하거나 판매하는 식으로 막대한 이윤을 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재단 소유 땅 30만 평 규모 일대에 석산개발을 하기 위해 S산업과 임대료와 별도로 토석료 명분으로 1㎡당 1,500원씩 받기로 MOU를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송당리 청년회장 홍수복씨가 비가 와도 삼성혈 앞에서 석산 개발 반대 시위를 하는 이유가 삼성사재단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살기 위해 모인 마을, 석산 개발이 벌어지면 떠날 수도’
아이엠피터가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처음 온 것은 2010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송당리는 제주 사람조차 거의 들어올 일이 없는 오지마을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공항에서 택시를 타면, 평생 제주에 살았다는 기사들조차 송당리는 처음 와본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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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주민들은 마을 토지와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기부 등으로 빌라 2동을 세워 폐교 위기의 마을 초등학교를 살렸다.

2011년 요셉이가 송당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전교생이 4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해있을 때 앞장서 학교를 살린 것은 마을 주민들이었습니다.
송당리는 마을 소유의 토지와 동네 주민들의 쌈짓돈을 탈탈 털어 12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빌라 2동을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건축했습니다.
방 3개짜리 빌라의 임대료가 월 5만 원에 불과하다 보니 초등학교 자녀를 둔 가정이 전국에서 왔습니다. 15명 이상의 아이가 전학을 오고 30명 이상의 인구가 마을로 이주했습니다.
농촌 학교가 폐교가 되고 마을에 젊은이들이 떠나는 현상이 송당리에서는 반대가 됐습니다. 공유경제를 통한 농촌 마을과 시골 초등학교의 대안이 되는 모델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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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개발이 벌어지는 삼성사재단 소유의 땅과 송당리 마을은 직선거리로 불과 1km 떨어졌다. 채석장이 운영되면 환경 파괴는 물론이고 교통사고 등의 위험성은 증가하게 된다. ⓒ네이버지도, ‘우리나라 석산개발의 문제점’ 전북 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석산 개발이 송당리 인근에서 벌어진다는 말에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시골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주했던 학부모들도 걱정이 많습니다.
특히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먼지나 폭발 등의 소음 등으로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거나, 차량 통행조차 드물었던 마을에 덤프 트럭 등이 다니다가 행여 아이들이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송당리는 목장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채석장의 발파로 인해 가축의 임신이 잘되지 않거나 죽은 송아지나 망아지가 태어나는 피해 사례를 보면, 송당리 인근 목장들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됩니다. 채석장 부지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농가들은 벌써부터 먼지 등으로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주 전역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석산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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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제주지역 환경단체들은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선흘 곶자왈 지역 토석 채취사업을 중단을 촉구했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제주 조천읍 선흘리 곶자왈은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토석채취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석산 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람사르 습지이자 제주도 지방기념물 10호인 동백동산이 이어지는 숲입니다. 많은 시민들과 환경단체가 반대했지만, 2015년 9월 토석 채취 허가 승인이 났습니다.
석산 개발은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폭주 기관차와 같습니다.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채석장은 20년 넘게 운영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각종 소음과 먼지 등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석산 개발 운영 기간이 끝나 이제는 안심하고 살 수 있으리라는 마을 주민들의 생각은 업체가 신규 석산개발 허가를 신청하면서 무너졌습니다.
제주의 골재는 대부분 산지에서 토석을 채취하는 ‘산림골재’ 방식으로 생산됩니다. 제주에서 건설붐이 벌어지면서 시멘트 물동량은 2006년 48만9000톤에서 2014년 106만3000톤으로 증가했습니다. 골재 채취량도 2007년 105만8000㎥에서 2014년 208만7000만㎥로 늘어났습니다.
건축만을 위해 제주 전역의 자연을 파괴하는 석산 개발이 꼭 필요한 사업인지 원점부터 고민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제주 지역의 무분별하고 과열된 건축을 잠시 멈추자는 주장은 골재가 부족하니 석산 개발을 허가해야 한다는 경제 논리에 밀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연을 파괴해야 멈출지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기부금? 임대료? 5천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삼성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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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리 인근 동복리의 채석장, 삼성사재단은 이 일대 쓰레기 매립장 예정 부지를 팔았다.

석산 개발을 위해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땅을 임대해준 삼성사는 이미 구좌읍 동복리 채석장에 조성되는 쓰레기 매립장과 소각장 부지를 팔기도 했습니다.
동복리 매립장,소각장 부지는 도유지 24만 8702㎡이고 삼성사재단 소유의 땅이 3만5141㎡입니다. 12%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삼성사는 이 땅을 판매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구좌읍 동복리에 이어 송당리까지 삼성사는 재단 소유의 땅을 무분별하게 팔거나 임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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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삼성사재단의 기부금 모금액 현황. 동복리사무소에서 5천8백만 원을 기부했다

2015년 삼성사재단의 기부금 목표액은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금액은 5천만 원을 훌쩍 넘긴 5천9백5십9만 원이었습니다. 3명이 삼성사에 기부했는데,두 사람이 합쳐 80만 원이었고, 나머지는 동복리사무소 이장 정모씨가 낸 돈입니다.
동복리 이장 정모씨는 동복리에 조성되는 신규 폐기물 처리장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관련기사:관심 끈 구좌읍 동복리 이장선거)
동복리 이장 정모씨가 왜 삼성사에 5천만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을까요? 삼성사 소유의 막대한 땅에 대한 임대료일까요? 아니면 순수한 동복리 주민들의 기부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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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송당리 마을에 걸려있는 석산 개발 반대 현수막

‘송당리,덕천리 석산반대 추진위’는 “삼성사재단은 비영리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생태습지 버들못이 포함된 땅에서 돈을 목적으로 석산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라며 석산 개발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삼성사 측은 ‘단순히 땅만 임대해준 것이다’라며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채석장 부지를 임대해 수익을 올리려는 (재)고양부삼성사재단은 ‘고씨가 먼저다. 아니다, 양씨가 먼저이다’라며 제주의 시조를 따지는 논쟁으로 재판까지 하고 있는 재단입니다. (관련기사: 50년 싸움 제주 삼성혈 고양부 합의 ‘결렬’) 4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역사만큼이나 삼성사가 제주 도내에 보유한 땅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의 시조신을 모시면서 제주의 뿌리라고 자처하는 삼성사는 삼성혈을 평화와 번영의 상징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을 위협하고 제주의 환경 파괴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채석장 부지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는 삼성사가 제주의 시조신을 섬기며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삼성사가 제주의 시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마와 오곡 종자를 통해 탐라왕국의 농경 생활을 시작했던 그 뜻을 제대로 헤아려야 합니다. 시조신에 대한 제사만큼이나 제주의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일도 미래의 후손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158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진순의 열림 | 고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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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향기로운 가족
‘세월호의 의인’ 민간잠수사 고 김관홍
아내 김혜연이 말하는 ‘세월호의 기억’
잠수사들이 일당 백만원을 받고 시신 한 구당 500만원의 인센티브를 받는다”는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이 보도되었을 때에도, 잠수사들은 산소를 공급하는 생명줄에 목숨을 매달고 수심 40미터 아래의 외로운 주검을 찾아 검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인터넷도, 신문, 방송도 닿지 않는 바지선에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새우잠을 자면서 그들은 잠수의 기본규칙도 어겨가며 하루 네댓번씩 아이들을 찾아 심해로 내려갔다. 차가운 물속에서 공포에 질려 뒤엉킨 시신을 더듬어 품에 안아 올리는 동안, 그들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잠수병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과 ‘돈 벌러 갔다’는 주변의 오해, 법적인 문책뿐이었다. 결국 지난 6월17일 세월호의 의인으로 불리던 김관홍 잠수사는 오랜 트라우마와 후유증에 시달리다 심장 쇼크로 세상을 떴다. 그에겐 38살의 아내와 11살(라은), 9살(다은), 7살(효)짜리 세 자녀가 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묻는다. “다른 데선 사고 나도 거의 다 구조하던데 우리나란 왜 그래? 우리나라엔 그렇게 사람이 없어?”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뭐라고 답할 것인가. 안방 벽면에 붙은 가훈 ‘참 향기로운 가족’ 앞에 김혜연씨와 세 자녀가 손을 맞잡고 서 있다. 지난달 28일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씨를 만났다. 글 이진순 풀뿌리실험실 ‘와글’ 대표,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을 깨우고 미처 피하지 못해 희생당한 학생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딸이 말했다.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나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김혜연씨는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얘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을 깨우고 미처 피하지 못해 희생당한 학생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딸이 말했다.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나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김혜연씨는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얘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저는 잠수사이기 이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제가) 애국자나 영웅은 아니에요….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김관홍 잠수사의 증언.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2015년 12월16일)
살려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던 아이들을 품고 세월호가 뒤집어졌을 때, 우리 사회 부패와 무능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밑장을 드러냈다. 배에 버리고 나온 304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한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은 ‘사상 최대의 사기극’으로 끝났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민간잠수사들의 공이었다. 참사가 나고 7월10일 일방적인 수색중단 통지를 받을 때까지 희생자 292명의 시신을 수습해 올린 것은, 해경도, 해군도 아닌 단 25명의 민간잠수사들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지난 6월17일, ‘세월호의 의인’으로 불려온 김관홍 잠수사가 숨진 채 쓰러져 있는 걸 가족들이 발견했다. 11살, 9살, 7살 삼남매가 학교에 가려고 엄마와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전날 밤 아버지가 삼남매에게 주려고 사온 초콜릿 세 개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장하고 자랑스런 일을 한 아버지가 팽목항 앞바다를 다녀온 뒤 점점 폐인이 되어간 이유를, 이 뻔뻔하고 치졸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그래도 끝까지 가슴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김관홍 잠수사의 부인 김혜연(38)씨를 찾아볼 용기를 낸 건, 김관홍을 모델로 한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가 출간되고, 부인이 운영하는 꽃집의 상품권과 책을 한데 묶어 파는 패키지 상품이 출시되었단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누군가 올린 블로그에, 부인이 운영하는 화원 ‘꽃바다’(fbada.com)의 명함이 실려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한 번도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유가족인데, 인터뷰를 청하는 게 무례는 아닐까? 인터뷰 요청은 조심스러웠다. 망설임 끝에 부인은 인터뷰를 허락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지난달 28일, 그녀가 알려준 주소지로 찾아갔다.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의 아담한 빌라였다.
굵고 짧게 살고 싶다던 남편
“이렇게 굵고 짧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이 화분은 자기 거라고, (화원 할 때) 어디 팔지 말라고 했죠.”
인삼 모양이지만 그보다 훨씬 굵고 튼실하게 생긴 뿌리가 흙을 뚫고 솟아올라 있었다. 남편이 특별히 좋아했다는 ‘와인쥐손이’ 화분을 바라보며 김혜연이 말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 가득한 앞 베란다 창틀에 작은 화분들이 오종종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남편이 애지중지했던 ‘좀백자단’이며 ‘꿩의다리’ 같은 낯선 야생화 이름이 적힌 화분이 아이들 점프하며 뛰어노는 트램펄린 옆에 놓여 있었다.
-인터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언론 접촉은 피하셨던 것 같아요. 장례식 기사에 실린 사진에도 얼굴은 가리고 나오셨던데요.
“지금 큰애가 사춘기거든요. 4학년 딸이요. 엄청 예민할 때라, 아이들도 인터넷을 다 보니까 조심스러웠어요. 지금은 많이 안정이 돼서 제가 인터뷰하는 거, 자기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꿈이 기자로 바뀌었대요.(웃음) 사회부 기자를 하고 싶대요.”
다섯 식구의 세월호 기억목걸이.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섯 식구의 세월호 기억목걸이.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안방에는 삼남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아이 욕심이 많았다. 두 살 터울로 삼남매를 낳고도 더 낳자고 해서, 부인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 삼남매와 함께한 가족사진 속의 김관홍은 다부지고 옹골찬 체격이 그가 좋아하던 야생화 뿌리를 닮았다.
-고양시에 사시는 줄 알았는데, 거긴 화원만 있는 건가요?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쯤 돼요. 전에 살던 집은, 야생화 키우는 하우스 안에 살림집을 겸한 거였는데, 신랑이 거기서 안 좋은 일을 겪고 보니 계속 살기가 어려웠어요. 아이들이 안 봤으면 모르겠는데 아침에 아빠 쓰러진 걸 거기서 다 같이 봤고. 여자 혼자서 야생화 관리하는 것도 힘에 부치고요. 보안도 허술하고….”
-장례 치르고 이리 옮긴 거군요.
“네. 화원도 정리하고 지금은 인터넷 주문받는 일만 해요.”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그에게 화환을 주문하는 전화가 간간이 걸려왔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엄마 혼자 밖에 나가 일하기가 힘들어, 집에서 인터넷으로 화환이나 꽃바구니를 주문받고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 화원은 부인이 하시던 건가요?
“둘이 같이 했죠. 시아버지가 야생화 농장을 하세요. 애기아빠가 원체 꽃 만지고 분재 만지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해서 일찌감치 ‘난(蘭) 자격증’도 따두었대요. 난 재배하는 전문가 자격증. 전 야생화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한테 배웠지요.”
-그럼 화원은 남편이 열자고 한 거예요?
“막내 태어나고 나서 시아버지가 권하셨어요. 이젠 아이도 셋이나 되니 바다에 나가서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
-그래서 잠수사 그만두고 화원만 하려고 했나요?
“그건 아니고요.(웃음) 바다를 버리지는 못하죠. 어차피 겨울에는 바다 일도 없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꽃이나 분재를 키우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인은 바다에 대한 남편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난 것도 스킨스쿠버 교실에서였다. 김혜연은 실내 강습을 겨우 마친 초급생이었고 남편은 이미 스킨스쿠버 경력 10년 차의 전문가였다. 바다가 좋아서 같이 다니다가 정 많고 실속 안 차리는 그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렸다. 2005년, 만난 지 삼 년째 되는 날 둘은 결혼했다. 김혜연의 나이 스물여섯, 김관홍은 서른두살이었다.
카드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산업잠수사로 전업하겠다고 했을 때도 김혜연은 반대하지 않았다. 레저스포츠로 하는 잠수가 아니라 바닷속에서 용접이나 교각 작업을 하는 일이라 고되기는 할 테지만, 잠수 경력이 오랜 남편이 위험을 피하는 데 있어서는 베테랑이니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10년간 산업잠수사 일을 하면서 잠수후유증으로 크게 고생해본 적이 없었다. 세월호 희생자 수습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잠수경력 20년의 베테랑 남편
오랫동안 공들인 큰 계약 앞두고
4월이라 화원은 한창 바쁠 때인데
‘그렇게 원하면 가도 좋다’ 하니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가더라
해경들은 따로 밥해주는데
처음엔 컵라면 몇 개밖에 없다더라
잠수 도중 호흡 끊어져 병원 실려가
약속 안 지키는 사람들 지켜보며
현장에서 돌아와 더 힘들어해
안방에는 삼남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아이 욕심이 많았다. 두 살 터울로 삼남매를 낳고도 더 낳자고 해서, 부인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안방에는 삼남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아이 욕심이 많았다. 두 살 터울로 삼남매를 낳고도 더 낳자고 해서, 부인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생업을 접고 왜 거기를 갔을까
-잠수사 경력이 꽤 오랜 편이죠?
“한 20년 되죠. 산업잠수사를 한 것만도 10년이니까, 그 전부터 다 합치면….”
-그 정도 경력이면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
“이게 들쑥날쑥해서 매달 똑같지가 않아요. 일당제로 하는데, 보통은 하루 100만원쯤 하고요. 하루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기본이 50(만원)이에요. 큰 작업은 월 단위로 끊어서 계약을 맺어요. 그렇게 하고 다시 몇 달간 쉬면서 몸을 회복하는 기간을 가지죠.”
-세월호 구조 현장에선 잠수사들한테 어떻게 일당을 지급해 줬어요?
“일당 받기로 하고 간 건 아녜요. 처음부터 자원봉사자로 간 거기 때문에 계약서를 쓰고 일당을 정하고 그런 건 없었대요. 아마 계약서 안 쓰고 일한 유일한 경우가 될 거예요. 그러다가 5월에 잠수사(고 이광욱 잠수사) 사망 사고가 난 뒤부터 계약서를 쓰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세월호 현장으로 가기로 할 때 부인께 상의하던가요?
“그 무렵에 큰 공사 계약을 앞두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공들여온 장기 사업이었는데 그건 액수도 크거니와, 그 일을 하고 나면 그다음 일이 연결, 연결되기 때문에 굉장히 큰 사업이었죠. 근데 그 계약을 며칠 앞두고….”
-거길 안 가고 세월호로 간 거예요?
“계속 전화가 왔었어요. 먼저 내려가 있는 아는 잠수사들한테서. 저는 물론 못 가게 하고 싶었죠. ‘거기 5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다는데 왜 꼭 당신이 가야 돼?’ 하니까, ‘500명이 있어도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안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해경도 못 할 거라면서….”
-그래서 동의하셨나요?
“며칠 동안 마음을 못 잡고, 뭘 해도 건성으로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눈치였어요. 마침 4월이라 화원은 한창 바쁠 때인데, 마음이 벌써 떠버렸으니 여기 있으나 없으나 똑같겠다 싶어서 ‘그렇게 원하면 가도 좋다’고 했죠.”
-좋아하시던가요?
“그 말 떨어지자마자 당일로 바로 내려가던데요.(웃음)”
-생업을 접으면서까지 세월호로 달려가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대체 뭘까요?
“애가 셋이잖아요.”
-네?
“우리도 애를 셋 키우는 부모니까요. 처음에 제가 말렸던 것도 애가 셋이라 위험한 걸 하지 말라고 그런 거였는데, 하루 이틀 지나고 보니, 안타까운 부모 마음은 우리도 (세월호 유가족과) 똑같은 거더라고요. 처음엔 애들 때문에 말리다가 결국 애들 때문에 가라고 했어요.”
“애들이랑 사이사이 껴서 같이 잤는데, (세월호 이후로) 방에서 식구들이랑 안 자고 거실에서 따로 자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힘들어서 피했던 거예요.” 큰딸이 아빠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번호만 바꿔서 물려주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애들이랑 사이사이 껴서 같이 잤는데, (세월호 이후로) 방에서 식구들이랑 안 자고 거실에서 따로 자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힘들어서 피했던 거예요.” 큰딸이 아빠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번호만 바꿔서 물려주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흔치 않은 큰일거리도 포기하고, 한창 바쁜 꽃집도 아내한테 맡겨두고, 김관홍은 맹골수도 세월호 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4월23일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예상대로, 작업 가능한 현장의 잠수인력은 7~8명에 불과했고 5월10일이 넘어서야 25명이 겨우 채워졌다. 말로는 민·관·군 합동 작전이었지만, “해경 잠수부는 선체에 진입할 능력도, 장비도 없는 상태라” 선체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는 건 온전히 민간잠수사들의 몫이었다. 산소탱크를 메고 갈 만큼 통로가 확보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표면공급식’(바지선에서 수중의 잠수사에게 호스를 통해서 공기를 전달하는 방식) 잠수를 했다. 공기를 전달하는 생명줄이 꼬이거나 걸려도 안 되고, 바지선 위의 스태프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라 능숙한 산업잠수사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5월6일에 이광욱 잠수사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어서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매일 전화를 했는데 처음에는 먹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먹을 거라곤 컵라면 몇 개밖에 없다고, 보급품이라고 왔는데 여자 팬티가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필요한 물건은 택배로 부쳐주기도 했어요.”
-체력소모가 극심한 일을 하면서 식사도 제대로 못했단 말이에요?
“해경들은 따로 밥해주는 데가 있었는데, 그걸 같이 먹지 못했대요. 4월30일 지나서야 정상적인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얘기하는데 자기 쓰러져서 죽을 뻔한 거 아냐고, 잠수 도중 호흡이 끊어져 병원에 실려가서 입원도 3일간 했었다고 하더군요. 퇴원하곤 바로 또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처음부터 못 내려가게 할걸, 후회하지 않았어요?
“후회하죠. 왜 가라고 했을까…. ‘다른 잠수사들도 있는데 왜 당신이 하냐?’는 소리도 했어요. 팀 짜서 같이 갔던 잠수사들도 며칠 못 견디고 돌아왔는데, 당신도 다른 분들한테 맡기고 그냥 나오라고.”
-그러니 뭐라던가요?
“자기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그러죠.(웃음)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던 사람이라, 다들 자기처럼 할 거라고 사람을 믿었던 거죠. 오히려 거기(세월호 수색 현장) 있을 때보다 나와서 더 힘들어했어요. 그렇게 앞뒤가 바뀌고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 보면서….”
남편은 7월10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색 작업을 변경하기로 하고 현장 작업 종료를 문자 한 통으로 통지한 것에 격렬히 분노했다. 292명을 꺼낸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현장에서 나가라고 하고 그 뒤 3개월간 2구밖에 인양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자원활동 하러 내려간 민간잠수사들을 돈 벌러 온 언딘 소속 사설업체 잠수사라고 오도하는 걸 보면서, 해경의 무리한 지시로 이광욱 잠수사가 목숨을 잃었는데 그 법적인 책임을 민간잠수사 공우영(현재 1심 무죄 선고, 2심 계류 중)씨에게 떠넘기고, 정작 책임져야 할 해경 관계자는 승진하는 걸 보면서, 사람에 대한 김관홍의 믿음, 세상에 대한 김관홍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는 해양경찰청장 명의로 우편 배달된 감사장을 이빨로 뜯어 찢어버렸다.
“저희는 돈을 벌러 간 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도우러 간 것이지. 양심적으로 간 게 죕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한테 벌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 2015년 9월15일)
한 구씩 달래서 가슴에 품고 나온 아이들
현장에서 나온 뒤 그의 몸과 마음은 한없이 허물어져 갔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생전 처음으로 아이에게 매를 들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오고, 어깨 회전근막이 파열되고, 잠수사에게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골괴사(뼈에 혈액 공급이 되지 않아 뼈조직이 죽어가는 잠수병의 일종) 진단도 받았다. 다시 잠수사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대리운전 기사가 되었고, 정부에서 약속한 치료비가 나오지 않아 집에는 빚이 쌓여갔다.
-프로 잠수사로 잠수병의 위험을 잘 아시는 분이….
“다른 데서 일할 때는 30분 일하고 6시간 쉬고, 안전규정에 따라서 일을 하니까 몸에 해가 될 게 없죠.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하루에 네댓 번씩 잠수를 했으니까요.”
세월호 선체에 내려가 희생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들이 작업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배가 가라앉고 물이 들이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목도한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은 극심한 공포와 낮은 수온과 수압에 의해서 아주 고통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한 구 한 구 얽혀서, 저희 손으로 한 구 한 구 달래가면서, 한 구 한 구 안아서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 2015년 9월15일)
시신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부둥켜안고 있는 경우도 있고 손을 꼭 잡고 얽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좁은 통로와 장애물들을 통과해서 나오려면 그 어깨와 손을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줘. 한 명만 데리고 나가고 곧 돌아올게. 엄마아빠 보러 같이 가야지.”
잠수사들은 아이들을 그렇게 달래가면서 한 구씩 인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 몸에 최대한 밀착해서 꼭 끌어안고 나오는 방식으로.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낸 292명의 희생자들은 모두 그렇게 인도되었다.
“선내에서 발견한 실종자를 모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모시고 나온다! … 산 사람끼리 껴안을 때보다 다섯 배 이상 힘을 줘야 해…. 끝까지 포옹을 풀어선 안 되는 건 기본이고, 이동 중에 실종자의 몸이 장애물에 부딪쳐 긁히거나 찢긴다면 여러분은 평생 그 순간을 후회할 거다.”(김탁환, <거짓말이다> 33쪽)
-남편이 그런 얘긴 안 하던가요?
“몰랐어요. 저도 책을 읽기 전까진 ‘애들을 안고 나왔다’는 걸 몰랐어요. 제게 밖에서 있었던 얘길 많이 하는 편인데, 제가 충격받을까봐 그랬는지 시신 수습하는 과정에 대해선 일체 얘기하지 않았어요. 이따금씩 길에서 아디다스 줄무늬 추리닝 입은 아이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요. 거기 아이들 3분의 2가 저 추리닝을 입어서 자긴 학교 체육복인 줄 알았다고 농담식으로 얘기했는데… 늘 수습하지 못한 9명이 눈에 밟힌다고 했죠.”
-김관홍씨가 다른 데서 인터뷰하신 것 보니까, 그 일 이후로 ‘아내나 아이를 포옹할 수 없었다’고 하셨던데.
“그것도 전혀 몰랐어요. 원래 아이들을 잘 안아주고 몸으로 놀아주는 사람이었어요. 애들이랑 사이사이 껴서 같이 잤는데, (세월호 이후로) 방에서 식구들이랑 안 자고 거실에서 따로 자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힘들어서 피했던 거예요.”
문자 한 통으로 수색 종료 통지
‘돈 벌러 왔다’ 오도하기도
생전 처음 아이들에게 매질하고
매일 밤 고통 속에 술 마시기도
해경청장 감사장 찢어버렸다
‘애들 안고 나왔다’는 것 몰라
평소 몸으로 놀아주던 남편은
아내·아이 안아주지 않았다
아빠 핸드폰 갖고 싶다는 큰딸
아내는 남편 번호 지우지 못해
엄마는 의인이 되는 게 좋아?
-남편이 세상 뜬 지 석 달이 넘었네요. 남편이 없다는 걸 실감하시나요?
“아니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신랑이 바다로 가면 서너 달 떨어져 있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왔다 가고, 그렇게 10년을 살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어디 장비 메고 나간 것만 같아요. 며칠 전까지도 남편 핸드폰을 갖고 있었거든요. 핸드폰의 번호를 정리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이리 전화해줄 사람이 이젠 없구나.”
큰딸이 아빠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번호만 바꿔서 물려주었다. 부인은 아직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남편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 아이들한텐 뭐라고 하셨어요?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어요. 언론에서는 자살이다 뭐다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건 아니고요. 워낙 오랫동안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서 심장 기능이 무척 약해진 상태였어요. 원래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인데 괴로우니까 술 먹고 잠을 청하고, 안 되면 수면제도 먹고 했기 때문에… 조그만 충격에도 심장이 버티질 못하는 거죠. 그날 밤도 ‘4·16 연대’ 사람들 만나고 와서 곧바로 잠들지 못하고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그래도 잠을 못 자니까 수면제도 두 알 먹은 거죠. 요즘 한 알로 안 돼서 양을 늘렸거든요. 약물중독은 아니고 경찰 부검 결과도 심장이 안 좋아 생긴 쇼크사래요.”
-김탁환 작가가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한 소설 <거짓말이다>를 내놓으면서 이례적으로 긴 작가의 말을 썼는데, 그 이유가 “고인의 자녀들이 이다음에 커서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의인이었는지 알게 하고 싶었다”고 밝히셨어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나요?
“대략은… 더 자세히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요.”
-애들이 자라서 그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전모도 알게 되고 나서, ‘아빠가 그렇게까지 하실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며칠 전에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 다 깨우고 미처 피하지 못해서 희생당한 학생 있었잖아요. 뉴스에서 그분 어머니 인터뷰하는 거 보면서 저희 딸이 묻더라고요. ‘엄마는 저게 좋아?’ 하고요.”
-엄마는 저게 좋냐…?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그게 좋냐고요. 자기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고요.”
-(한숨) 그래서 뭐라 하셨어요?
“그건 아빠의 선택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얘기했어요.”
-끝으로, 제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너무 포장해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단순 무식하지만 정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그리고 애아빠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도, 시체 수습하면서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 농담처럼 얘기 던지는 분들도 있고 그랬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순수한 마음에 간 거라고 밝혀주세요.”
-네. 그대로 쓰겠습니다. 애들은 어리고 아직 젊으신데….
울컥하는 마음에 가슴속 말이 뛰쳐나왔지만, 그 뒷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38살 아직 너무나 젊은 나이, 김혜연은 이제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맹골수도 해역보다 혼탁하고 거친 세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짐을 나눠 지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위로나 동정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한동안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인사랍시고 겨우 찾아낸 말이 해놓고도 한심했다.
-앞으론…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이 많아질까요? 세상이 이런데… 우리 애들은 좀 살 만한 세상이면 좋겠어요.”
김관홍 잠수사가 세상을 뜬 뒤, 7월1일자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강제 종료되었고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일명 ‘김관홍잠수사법’(세월호참사 피해지원특별법 개정안: 민간잠수사를 세월호 피해자로 포함시킴)은 아직 논의조차 안 된 채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녹취 심지연

후티반군 구형미사일 한 방에 미 신형 함선 격침

후티반군 구형미사일 한 방에 미 신형 함선 격침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10/08 [04:4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후티반군이 UAE해군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미해군 HSV-2 Swift 고속 삼동선을 격침시키는 모습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예멘의 사바(saba)뉴스 3일 보도에 따르면 후티반군이 쏜 대함미사일에 아랍에미리트가 임대하여 예멘전쟁에서 사용하고 있는 미해군 고속 삼동선 HSV-2 Swift를 격침시켰다고 보도하였다. 이번 후티반군의 공격으로 함선의 많은 병사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고속 삼동선은 전투보다는 주료 지휘함이나 수송선 등으로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운용하는 장비이다.

특히 삼동선 형태의 배바닥으로 물의 저항을 줄여 시속 50노트(92.6 km/h)의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으며 스텔스 선체에 스텔스도료를 발라 레이더 포착을 어렵게 하는 등 첨단 기술이 적용되었다.

▲ 미 해군 고속 삼동선 HSV-2 Swift ,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선으로 이용하거나 수송선으로 활용하는 군함이다. 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적지 않읕 크기이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니 미 해군의 첨단기술이 적용된 HSV-2 Swift가 후티반군의 레이더에 그대로 포착, 단 한 발의 스틱스 대함미사일(실크웜일 수도 있음) 미사일을 얻어맞고 그대로 화염에 휩싸여 불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6일 모 블로그에서 침몰한 선체를 인양했다며 관련 사진을 공개했는데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수리해서 재사용은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 후티반군의 북한제 스틱스 대함미사일(추정)에 격침되었다가 인양한 HSV-2 Swift 미 해군 고속 삼동선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이란에서 복제 생산한 중국제 C-802 지대함 미사일에 당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동영상을 잘 보면 미사일 하단의 보조로켓이 함께 점화되어 날아가다가 떨어져나가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스틱스계열 미사일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후티반군이 쏜 대함 미사일이 미 해군 고속 삼동선 HSV-2 Swift를 향해 날아가면서 보조로켓을 떨어뜨리는 모습, 하단 보조로켓으로 초기 가속력을 내는 대함미사일이 바로 스틱스이다.     © 자주시보

P-15 테르밋 (러시아어: П-15 "Термит") 대함미사일을 나토에서 SS-N-2 스틱스라 부르는 데 속도가 아음속으로 미사일 치고는 좀 느리고 사거리도 40KM 밖에 나가지 않지만 워낙 파괴력이 커서 한 발만 맞아도 치명상을 당하는 무기이다.
특히 이 미사일은 많은 양의 화약과 함께 로켓 추진을 위한 액체연료로 많이 담고 있는데 목표 타격 당시 남아있는 이 연료까지 가세하여 화염을 일으키기 때문에 피격당할 경우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게 되고 불타면서 결국 침몰하게 되며 침몰하지 않더라도 화염에 많은 인명피해를 당하게 된다.

이를 중국과 북이 복제 개량생산하여 실전배치 했고 북은 이란에 관련 기술을 넘겨 주어 이란에서 이를 복제생산(면허생산)하여 중동 각지의 반미 진영에 공급하는 미사일로 알려져있다.

이 스틱스 미사일의 폭탄무게를 줄이고 터보제트엔진으로 바꾸어 사거리와 속도를 높인 미사일을 실크웜이라고 나토에서는 부르는데 이 실크웜도 스틱스의 형태는 거의 같아 야간에 날아가는 모양만으로는 구분하기는 어렵다.

▲ 러시아의 kh-35, 우란 대함미사일, 북도 똑같은 미사일을 최근 공개한 바 있다.     ©자주시보

▲ 이란의 대함미사일, 중국의 C-802 대함미사일을 복제했다고 한다., 아래에 보조로켓이 없다.  중국의 C-802도 북의  KH-35 우란계열 대함 미사일과 형태가 같기 때문에 이란이 중국이 아니라 북의 것을 복제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중국은 미사일과 같은 핵심무기는 잘 수출하지 않는다. 영토분쟁을 많이 격고 있어 자국의 핵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북은 미사일을 오래 전부터 제3세계 각국에 마구 수출해왔다. 심지어 탄도미사일인 스커드미사일까지도 적지 않게 수출해왔으며 이를 공개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최근에 이 실크웜도 여전히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해 요격미사일이나 기관포에 요격될 우려가 있다며 더욱 속도가 빠른 작고 길쭉한 대함미사일을 주로 개발하여 사용한다. 그것이 중국의 C-802대함미사일이고 북도 일명 KH-35 대함미사일이 이런 형태이다.

하지만 북은 이런 신형 대함미사일도 개발하여 실전배치를 하고 있지만 구형 실크웜이나 스틱스계열의 미사일도 계속 업그레이드를 시켜가며 사용하고 있다. 특히 북은 레이더 교란기술이 뛰어나 상대 함선 지역 일대를 모두 레이더재밍무기로 교란시킨 후 이 미사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미사일의 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상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당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진행 중인 예멘 전쟁이 그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예멘전쟁에서 후티반군은 구 예멘 반미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이런 미사일 무기를 이용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최신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등 엄청난 활략을 하고 있다.
최신구축함은 위상배열레이더에 첨단 대공미사일과 기관포 등 미사일 방어무기를 수없이 장착하고 있는데 그런 사우디의 최신형 구축함도 후티 반군의 스틱스 미사일에 당해 바다에 침몰한 바 있다.

특히 후티 반군은 야간에 이 스틱스 대함미사일을 이용한 공격을 자주 가했는데 야간이라 더욱 그것을 탐지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 북의 스틱스 대함미사일(실크웜일 가능성도 있음) 발사 훈련 장면, 목표물을 명중하는 동영상을 보니 그 파괴력이 거대한 섬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났다. 항공모함도 이 미사일 한 발만 맞아도 성치 못할 것 같았다.     ©자주시보

▲ 후티 반군이 사우디 군함을 향해 발사하는 스틱스 미사일(실크웜일 가능성도 있음), 아래쪽에서 보조 로켓이 떨어져나가는 모습이 선명하다.     ©자주시보

▲ 후티반군이 사우디 군함을 공격하는 실전 유튜브 동영상에서 목표물로 나오는 사우디 최신형 스텔스 구축함, 헬기착륙장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선체가 완전 스텔스형이며 최신 위상배열레이더를 설치한 최근 구축함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동영상 장면이다.     ©자주시보
▲ 2015년 12월 5일, 후티반군 미사일 공격에 두동강이 나서 침몰하는 사우디 군함을 보도하는 이란 파르스 국영통신, 헬기를 탑재할 수 있는 크기의 적지 않은 군함이다.     ©자주시보

▲ 후티 반군에게 파괴된 사우디 군함 목록     ©자주시보
  
미사일이 발전한 현대전에서는 대형 장비가 오히려 죽음의 대형 공동묘지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대형장비를 값싼 미사일 한 발로 완파시켜버리고 있어 더욱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이번에 격침된 미 해군 고속 삼동선 HSV-2 Swift도 1억달러나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격침시킨 미사일은 600달러 정도라고 한다.

3일 사나 통신에 따르면 이번 공격으로 더욱 자신감을 얻은 후티반군은 예멘 인근 해역을 지나가는 친미 하디 정부군이나 이를 지원하는 사우디 등 아랍연맹군, 미군 함선들을 보이는 족족 모조리 격침시켜버리겠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한편 5일 미국의소리 방송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예멘 정부(하디 정부)를 보호하려는 동맹국(아랍에미리트) 군함에 대한 반군의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다며 "예멘의 후티 반군은 지난 주말 홍해와 아덴만을 연결하는 밥 알-만데브 해협에 있던 아랍에미리트연합 군함에 로켓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 예멘 후티 반군이 미 해군 수송선을 격침시킨 아덴만 인근 밥 알-만데브 해협, 빨간 풍선은 이먼 고속 삼동선을 파괴한 위치     © 자주시보

예멘 전쟁은 결국 북에 수없이 많이 생산 배치되어 있는 재래식 무기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내년에 더 이상 북의 핵개발을 두고 볼 수 없다면 전쟁을 일으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는 내부자 폭로가 나오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 정권 교체, 한민구 국방장관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포 특수부대 창설 등 북을 심각히 자극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이란 말을 쉽게 꺼낼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첨단 무기가 북의 구형 무기에 저렇게 맥없이 당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만 있으면 북과 전쟁을 해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한반도 긴장고조를 막고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남북대화에 나서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내년 3.1절 ‘남북해외 연석회의’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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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07  17: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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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호 남북해외 공동토론회 남측 단장과 7일 중국 선양 칠보산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내년 3월 1일 개최를 목표로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남.북.해외 제정당.단체.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를 추진하기로 남북해외 대표단이 7일 합의했다.
6,7일 양일간 중국 선양(심양) 칠보산호텔에서 열린 ‘10.4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에 남측 단장으로 참석한 임상호 6.15남측위 공동대표는 7일 낮 현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7일 오전 계층, 부문별 실무모임 직후 임상호 단장은 “좀더 폭넓게 연석회의를 3월 1일 정도로 한번 해보자고 잠정적으로 결정됐다”며 “가능하면 남이나 북, 국내에서 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해외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7일 오전 중국 선양 칠보산호텔에서 남북해외 연석회의 추진 관련 남북해외 협의가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임상호 단장과 이승환, 한충목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연석회의 추진기획단’ 위원과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남해외 제정당단체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 양철식 부위원장, 김성혜 위원, 림용철 6.15북측위 학술분과위 부위원장, 그리고 ‘조국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남북해외 제정당단체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 해외측준비위원회’ 신필영 명예위원장과 손형근 부위원장, 조선오 사무국장 등은 칠보산호텔 3층 회의장에서 연석회의 관련 실무협의를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전날 공동토론회 결과를 담은 공동결의문에서 남북해외 대표들은 “우리는 그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각계 접촉과 교류를 복원시키고 전민족적 통일회합으로서의 연석회의를 반드시 실현하여 남북관계 개선과 나라의 평화, 자주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구체적 시점을 적시하지는 않았다.
  
▲ 6일 중국 선양 칠보산호텔에서 '10.4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임상호 단장은 회의 분위기에 대해 “지금 정세가 정세인 만큼, 이대로 계속 간다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다”며 “남북해외가 어떻게 긴장국면을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평상시보다 더 깊은 고민을 갖고 임했다”고 밝혔다.
또한 “해외 분들, 특히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본 분들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남다른 바람을 느꼈고,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해온 분들도 민족공멸의 위기 상황에 절박한 마음으로 연석회의를 같이 준비하고 오셨다는 걸 느꼈다”고 전했다.
문제는, 아직 추진기획단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남측이다. 북측과 해외위는 연석회의 준비위를 구성하고 적극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임상호 남측 단장이 6일 공동토론회 모두에 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울산진보연대 상임대표와 6.15울산본부 상임대표를 맡아 오랫동안 진보운동진영에 몸담아온 임 단장은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히려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가 좀더 노력해야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처음으로 남북해외 공동행사의 단장을 맡았다는 임 단장은 “전체 구성원들의 생각을 제대로 대표해서 전달할 수 있는가 많이 부담스러웠다”며 “다행스럽게도 다들 평상시에 참여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한편, 7일 오전 칠보산호텔에서 진행된 각 계층 부문별 실무협의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오갔지만, 남측 정부가 민간교류를 전면 금지하고 있어 성사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석민 6.15노동본부 집행위원장은 “올해 서울에서 개최키로 합의됐던 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내년 5월 1일 개최를 목표로 다시 추진키로 했다”며 “남북이 합의했던 일제의 침략만행과 재무장화를 규탄하는 반일토론회를 조속히 개최하는 노력을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 '10.4선언 발표 9주년 기념 남북해외 공동토론회'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상은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은 “11월 평양에서 통일농민 추수한마당을 개최하자고 논의했다”고 밝혔고, 황철하 6.15경남본부 집행위원장은 “내년 4월 평양국제마라톤대회에 초청하고 참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손동대 6.15청학본부 집행위원장은 “북측이 지난 9월 제안한 청년학생 대회합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남북해외 모두가 노력키로 했다”고 말했다.
최진미 6.15여성본부 집행위원장은 “올해 열기로 합의했던 남북여성대표자 상봉모임과 평양에서의 남북해외 대규모 상봉모임을 연내에 꼭 이뤄보자고 했다”며 “만약 실현되지 못 하면 내년 제일 선참으로 여성들 상봉모임을 이뤄내 남북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이루는데 여성들이 절반의 역할을 꼭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깔려 있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0월 07일 금요일 제472호
활성 단층대 위에 놓인 경주는 요즘 계속된 지진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관광객도 크게 줄어든 것 같다. 온통 학생들로 들썩이던 수학여행의 계절인데도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등의 주변이 한산하다. 음식점 주인들은 한숨만 쉬고 숙박업소마다 빈 객실이 넘쳐난다. 경주를 한국의 대표 관광도시로 키우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재의 광경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일정은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인 10월24일에 경주 보문관광단지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해 4월6일 1단계 개장을 완료한 상태였던 보문단지를 다시 점검·시찰하러 간 것이다.

한국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공사에서 당시 개발이사로 재직 중이던 고 최귀남씨는 그날 대통령을 보문단지 현장에서 영접한 사람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전날 대통령이 보문단지에 뜬다는 전갈을 받은 뒤 밤차를 타고 경주에 도착해 대통령 맞을 준비를 했다. 박정희는 다음 날 오후 3시쯤 나타나 보문단지 순시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상가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색조 하나하나, 식재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나아가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을 때를 대비해 야외극장을 활용할 여러 가지 프로그램 개발과 쾌적한 휴양지, 다시 찾는 휴양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경주개발동우회 <그래도 우리는 신명 바쳐 일했다> 121쪽, 고려서적, 1998).

ⓒ영상역사관
1973년 7월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세 번째)이 경주 지역 유적 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박정희는 대통령 재임 기간 툭하면 경주를 찾았기에 이 방문이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겨우 이틀 전에 보문단지를 방문한 박정희의 행적은 자신이 만들고 집착했던 작품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필연 같은 우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주를 향한 박정희의 꿈은 매우 담대한 것이었다. 천년 수도에 포진한 신라 시대 문화재를 관광산업과 접목해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박정희 자신이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입안했으며,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 10월26일까지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측면에서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일종의 산업 육성 차원에서 경주 개발을 추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절실히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튼실하게 깔려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경주를 시작으로 설악산·제주도·한려수도 등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만 다른 관광지와 달리 경주 개발에는 ‘국민정서 함양’이라는 목적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삼국 통일 정신을 본받아 남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등 신라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이렇게 정권의 정치적·산업적 의지가 복잡하게 얽힌 경주 개발 계획의 중심부에 보문단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관광산업 육성 의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다. 1978년 11월27일 오전 8시20분, ‘대망의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해 100만 번째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미국 여성 바버라 존슨(당시 59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KAL 005편으로 김포공항에 들어왔다가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바버라 존슨이 실제로 1978년의 100만 번째 외국인 관광객은 아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교통부와 관광공사가 홍보 효과 극대화를 위해 해당 항공기 승객 가운데 미국인 여성을 미리 선정해놓았다. 당시 외국 관광객 가운데 절대다수를 점하던 일본인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연합뉴스
1979년 10월11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 보문단지에 주한 외교사절들을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2000명 외국인 손님에 긴장한 1979년 경주


이토록 ‘관광입국(觀光立國)’에 대한 열망이 거셌으니, 제28차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 및 제19차 워크숍(1979년 4월 중순 개최) 유치에 성공했을 때 한국 정부와 관광업계가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은 연례 국제행사인 PATA 총회를 1965년에 이미 한 차례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관광산업을 보는 한국 측의 시각이 달라지고, PATA 총회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한국이 유치한 1979년 총회의 경우, 참가단 규모가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됐다. 당시까지 한국은 이 정도의 인원이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단 한 번도 개최해본 적이 없었다. PATA를 준비하는 자세와 열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그것에 못지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PATA 대회의 장소는 두 군데로 확정됐다. 4월16~18일 총회는 서울에서, 4월20~21일 워크숍은 경주에서 열렸다. 경주 워크숍 장소가 바로 보문관광단지였다. 지금은 ‘육부촌’이라 불리는 경북관광공사 관할 ‘컨벤션센터’다.

물론 경주 개발 계획이 처음부터 PATA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PATA의 한국 개최가 확정된 것은, 경주 개발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6년 4월21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5차 PATA 총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PATA는 경주 개발 계획, 특히 보문단지 조성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대회를 코앞에 둔 4월6일, 보문단지가 1단계로 서둘러 부분 개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시 사정을 회고하면서 고 최귀남 국제관광공사 개발이사는 “1979년 초순경 공정에 쫓기는 모든 관계자가 이곳저곳에서 바삐 움직이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자욱한 먼지에 덮인 보문관광단지는, 포성이 연달아 터지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1979년 2월6일 교통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성공적인 PATA 회의 개최를 위해 정부 각 부처나 관광공사가 적극 협조하여 회의를 잘 치르도록 하라’고 당부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78년까지만 해도 골조 공사 단계였던 보문단지 내 컨벤션센터와 상가가 대회 직전에 완공되었다. 경주조선호텔과 경주도큐호텔도 PATA 회의 직전 문을 열 수 있었다.

4월16일부터 진행된 PATA 총회와 워크숍의 참가단 규모는 역대 최대인 43개국 2424명(국내 대표 499명 포함)에 달했다. PATA 총회 역사상 참가 인원 2000명을 최초로 넘긴 성공적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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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펭귄이 첫번째 알을 버리는 이유

‘방랑자’ 펭귄이 첫번째 알을 버리는 이유

조홍섭 2016.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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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배 남극해 영역 이동 중 알 낳을 준비, 과부하가 부실한 첫째 알로
나중에 진화한 장거리 이동이 초래한 진화 ‘부적응’, 생식체계 고치기보다 쉬워

p1_Jerzy Strzelecki _Macaroni_(js)1.jpg» 노랑색 눈썹이 독특한 마카로니펭귄. 가장 개체수가 많은 왕관펭귄의 하나로 두 개의 알 크기 차이가 심한 종이기도 하다. Jerzy Strzelecki, 위키미디어 코먼스

황제펭귄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남극해에는 왕관처럼 휘날리는 멋진 노랑색 눈썹과 수수께끼의 방랑 생활로 눈길을 끄는 펭귄이 산다. 뉴질랜드 근해 등 남극해에 서식하는 왕관펭귄속 펭귄이 그들로 마카로니펭귄 등 6종이 있다.

알을 한 개만 낳는 황제펭귄과 달리 이들은 2개를 낳는데, 처음 낳는 알은 나중 알보다 절반까지 작은 극심한 크기 불균형을 나타낸다. 어미 펭귄은 처음 낳은 작은 알을 어김없이 둥지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드물게 부화에 성공하더라도 작은 새끼는 보살핌을 받지 못해 죽고 만다.

p3_Didier Descouens_마카로니펭귄.jpg» 마카로니펭귄의 알. 첫째 알의 무게는 두번째 낳는 알의 62%에 지나지 않는다. Didier Descouens, 위키미디어 코먼스

결국 버릴 알이라면 왜 굳이 낳을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하나만 제대로 낳아 잘 길러내는 편이 유리하지 않을까. 왕관펭귄속 알의 이런 크기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두고 1960년대부터 논란이 계속돼 왔다.

여러 가설이 나왔다. 예비용으로 낳았다는 설이 있다. 알이나 새끼를 잃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란 설명이다. 실제로 첫째 알이 크기는 작아도 부화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둥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란 주장도 있다. 왕관펭귄은 번식지에 돌아오면 부지런히 알부터 낳는데, 남보다 먼저 번식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첫째 알을 낳는다는 설명이다.

p2_Andrew Shiva.jpg» 바다를 헤엄치는 마카로니펭귄. 왕관펭귄 무리는 남빙양의 바다를 떠돌며 겨울을 난다. Andrew Shiva, 위키미디어 코먼스

1990년대부터 왕관펭귄의 방랑 기질에 초점을 맞춘 가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넓은 바다를 헤엄치면서 남극의 겨울을 나는데, 6개월 동안 돌아다니는 바다의 영역이 200만㎢, 곧 한반도 면적의 10배에 이른다.

글렌 크로신 캐나다 댈하우지대 교수와 토니 윌리엄스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대 생물학자는 이런 장거리 이주로 인한 부담이 부실한 첫번째 산란으로 이어졌다는 가설을 주장해 왔는데, 이번에 자신들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p5_Ben Tubby-Rockhopper-Colony.jpg» 남아메리카 포클랜드 섬에 있는 바위뛰기펭귄 번식지. 먼 바다에서 번식지를 향해 헤엄치는 동시에 알을 만드는 것으로 밝혀졌다. Ben Tubby,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들은 과학저널 <왕립학회보 비(B)> 4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2개의 알을 낳는 펭귄 16종을 대상으로 한 기존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첫째 알과 둘째 알의 무게 차이와 번식지에 도달해서 알을 품기까지의 기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장거리 이동을 하는 왕관펭귄속의 펭귄에서만 알 크기의 차이가 나타났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선뿔펭귄(Eudyptes sclateri)으로 처음 81.6g짜리 알을 낳은 뒤 두번째엔 그 2배 가까운 150.9g의 알을 낳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카로니펭귄도 처음 알 무게가 둘째 알의 62%에 그쳤다.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첫째 알과 둘째 알의 크기 차이가 클수록 번식지에 도착해 알을 낳기까지의 기간이 짧다는 현상이었다. 펭귄의 알에 노른자가 만들어지는 데는 약 15일이 걸린다. 그런데 왕관펭귄속의 펭귄들은 번식지에 도착하고 나서 15일이 되기 훨씬 전에 알을 낳는다. 로열펭귄은 10일, 마카로니펭귄은 10.5일 만에 산란했다.

다시 말해 왕관펭귄은 먼 바다에서 미처 번식지에 도착하기 전에 알의 노른자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얘기다. 왕관펭귄은 다른 펭귄보다 2배나 빠른 하루 72㎞의 속도로 번식지로 돌아오는데, 막대한 에너지가 드는 헤엄치기와 알 만들기를 동시에 하려니 자연히 알이 부실하다게 된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우리의 연구결과는 중첩된 이주와 생식이 왕관펭귄의 알 생산에 압박을 가해, 두 가지가 많이 겹칠수록 처음 나은 알과 나중 나은 알 사이의 크기 차이가 커진다는 가설이 옳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p4_Arjan Haverkamp_북방바위뛰기펭귄.jpg» 동물원의 바위뛰기펭귄. 여전히 처음은 작고 나중엔 큰 알을 낳는다. 진화가 일으킨 부적응 상태이다.Arjan Haverkamp,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렇다면 왜 왕관펭귄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쓰지도 않을 첫째 알을 포함해 알을 두 개 낳는 방식을 고수해 왔을까. 사육장의 왕관펭귄도 자연 상태에서보다 알 크기 차이는 작지만 두 개의 알을 낳는 것으로 보아 이런 형질은 유전적인 뿌리를 지닌다.

연구자들은 가능하면 알을 일찍 낳는 형질이 처음부터 펭귄에 강한 선택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알을 일찍 낳는 개체일수록 번식 성공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환경변화에 따라 펭귄들은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나중에 진화된 형질은 불가피하게 이동과 산란 준비가 겹치는 과부하를 불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말하자면 진화는 왕관펭귄에게 깔끔하고 완벽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 셈이다. 생식구조를 뜯어고쳐 알을 하나만 낳게 하는 것보다는 처음 낳는 알을 포기하는 쪽이 훨씬 쉽고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rossin GT, Williams TD. 2016 Migratory life histories explain the extreme egg-size dimorphism of Eudyptes penguins. Proc. R. Soc. B 283: 20161413.
http://dx.doi.org/10.1098/rspb.2016.1413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