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초고령화' 옥천의 현실

 홀몸노인 등 지역사회 대책 시급, 옥천 치매안심센터 중심으로 사례 관리

20.12.01 07:30l최종 업데이트 20.12.01 10:1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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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최근 5년 사이 옥천군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 및 그 비율
ⓒ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외곽에 사는 80대 A씨는 매일이 불안하다. 혼자 지내는 집에 자꾸 도둑이 들기 때문. 건넛방에 누군가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마당에 찍힌 낯선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둑이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기를 여러 번. 하지만 도둑을 잡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도둑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치매를 앓는 A씨가 도둑이 든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상행동을 감지한 이웃들과 보건소 측의 협조로 A씨는 치매 검사와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 면에 사는 80대 B씨는 온 집안과 마당 가득 물건을 쌓아둔다. 가만히 살펴보면 '도대체 저걸 어디에 쓸 수 있을지 모를'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치매와 함께 저장강박증세를 보이는 B씨의 사연을 듣고, 지역 봉사단체가 나서 한바탕 대청소를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B씨의 마당은 마을 구석구석에서 주워온 고물로 다시 메워졌다.

농촌 지역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치매 환자 수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 치매환자가 7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초고령화 사회로 돌입한 충북 옥천 역시 매년 치매 환자가 늘고 있다. 옥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치매 환자는 2015년 11.03%에서 2019년 12.06%까지 1%가량 더 늘었다(중앙치매센터, 전국 및 시도별 치매유병현황).
     

치매 진단을 받은 주민 중 중등도‧중증 환자 비중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2015년 기준 최경도 환자 243명, 경도 577명, 중등도 358명, 중증 216명이던 것에서 2019년에는 최경도 299명, 경도 711명, 중등도 441명, 중증 266명으로 상승세에 있다. 고령화가 심해지다 보니 치매 환자 수가 높아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하지만 그만큼 지역사회 안의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고민이 깊어진다. 

지난해 옥천읍 가화리에 문을 연 옥천군치매안심센터는 ▲ 치매 조기검진 ▲ 상담 ▲ 사례 관리 ▲ 예방 교육 및 홍보 ▲ 치매 가족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치매 검진의 경우 60세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보통 2년 주기로 실시하지만 옥천은 1년 단위로 검진을 시행한다. 지역 고령화가 심한 만큼 치매 환자의 조기 발견을 위한 것. 현재 센터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사례 관리 역시 빠질 수 없다. 사례 관리는 보호자나 가족이 없어 돌봄을 받기 어려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대상자별로 필요한 지원서비스, 지역사회 의료 및 복지제도를 연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치매 환자 역시 이런 사례 관리를 통해 발굴된 것.

옥천군보건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옥천군 내 홀몸노인은 4193명으로 이 중 친인척이 거의 없어 외부의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2839명에 달한다. 홀몸노인의 비중이 높은 만큼, 치매 환자 사례 관리 역시 지역에서는 더욱 중요한 서비스일 수밖에 없다. 현재 옥천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사례 관리 대상자는 약 290명. 이 가운데 절반이 홀몸노인에 해당한다.

'기억지키미' '실버건강지도사' 양성해 인력난 해소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치매안심센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상담 중인 모습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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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  충북 옥천군 치매안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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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담당자 1명이 70명 이상의 대상자를 관리해야 하는 셈. 대상자의 집을 찾아 환경과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한 상황은 아닌지, 별도의 지원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지 등을 확인한다. 치매 정도에 따라 방문 횟수는 달라지지만 양호한 경우 두 달에 한 번 꼴로 방문하는 일정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코로나19로 현장 방문이 어려워졌다. 현재는 전화나 마을 이장, 부녀회장 등을 통한 확인으로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례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옥천군보건소 건강관리과 치매관리팀 노승원 주무관은 "치매환자가 증가하면서 사례 관리 대상자가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그만큼 담당자 1명이 맡아야 하는 대상자 수가 늘어나는 부담이 있다"며 "치매 특성상 담당자가 오랫동안 속속들이 잘 알아야 효과적인 관리나 지원이 가능한데 인력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관리팀 강은주 팀장 역시 "담당자 4명이 관리하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라며 "특히 면 지역에 대상자가 많아 거리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 그나마 지역사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있어 어려움을 덜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례 관리라는 게 단순히 잘 계시는지 확인하는 수준이 아닌, 직접 냉장고도 열어보고 집안이나 주변 환경은 어떤지, 약을 제대로 챙겨먹고 있는지, 식생활의 질 등 현장에서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치매안심센터는 이 같은 인력의 어려움을 지역 주민 연계 활동을 통해 풀고 있다. 기존 지역봉사단체 외에 '기억지키미'나 '실버건강지도사' 등을 양성해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이 높은 봉사자를 키워내고 있는 것.

기억지키미는 관련 교육을 이수 받은 봉사자가 주 1회 대상자를 만나 인지변화 관찰, 치매예방체조, 간단한 학습지 풀이 등을 진행하는 활동이다. 실버건강지도사의 경우 지난해 기본교육과정과 올해 심화교육과정을 이수한 주민이 대상자와 함께 교구 수업, 인지능력 확인 및 인지 강화 수업을 진행한다는 게 기본 계획.

강은주 팀장은 "혼자 사시거나 부부 모두 치매인 경우, 부부 중 한 명이 치매인 노인 부부 세대 등에 대한 실제적인 보호와 돌봄 지원을 위해 지난해와 올해 준비 중인 게 실버건강지도사"라며 "11월에 2기 기본과정과 함께 심화 과정을 추가로 실시하고 우선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가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외에 치매 조기 검진을 비롯해 경도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라며 "이 시기에 확실한 예방과 관리가 중요한 만큼 센터 차원에서도 관련 활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 치매에 대해 아직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지만, 주민들께서도 센터를 부담 없이 찾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주 1회 어르신들 만나며 돌봄 문제 돌아보게 됐어요" http://omn.kr/1qrlw

월간 옥이네 2020년 11월호(통권 41호)
글·사진 박누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옥이네> 1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옥천

일제강점기,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창고(오구라)'

 (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생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발언 같다. 하지만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은 “아마도 문화부 장관이 오구라를 오쿠라로 잘못 언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부는 “장관 발언을 보도자료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장관이 잘못 발언했든 아니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오’라고 해서 ‘대창(大倉)’을 ‘오오쿠라’로 읽었지만 지금은 표기법이 바뀌어 그냥 ‘오쿠라’라 한다. 그래서 원래 ‘오구라’로 읽는 ‘소창(小倉)’과 헷갈리게 됐다.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큰 창고’와 ‘작은 창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창’이든 ‘소창’이든, ‘오쿠라’든 ‘오구라’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귀중한 한국문화재를 가져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이다.

그러고보면 오쿠라의 ‘대창(大倉)’은 큰 창고, 오구라의 ‘소창(小倉)’은 작은 창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큰 창고’인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인가. 딴은 그렇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구한말 부산에 진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한 오쿠라는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특히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답시고 철거한 경복궁 자선당(세자의 침전) 건물을 통째로 뜯어갔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경기 이천 향교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도 가져갔다. 오쿠라는 그렇게 반출한 자선당 건물과 석탑, 유물 등으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을 꾸몄다. 오쿠라슈코칸의 조선실에 진열된 미술품이 3692점이나 됐고 서적도 1만5600여권에 이르렀다.

하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자선당을 비롯한 슈코칸의 진열관이 모두 소실되었다. 오쿠라가 모았던 고려자기 등이 모두 불에 탔고, 석조물(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만이 남았다. 1996년 겨우 살아남은 자선당의 유구만이 반환되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쓸어간 남의 나라 문화재를 화재로 잃어버린 오쿠라의 죄상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죄를 어지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작은 창고’의 묻지마 싹쓸이 수집

그렇다면 ‘작은 창고’(小倉)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가. 그 역시도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문화재를 쓸어간, 악명이 높은 자이다. 오구라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행’을 택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던 자들이 한국행 배를 탄 것이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막 개발붐이 일어난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수완을 발휘한 오구라는 곧 전국의 전기사업을 통합 경영하면서 재력가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떼돈을 모은 오구라가 눈길을 돌린 분야는 바로 문화재 수집이었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 중에 조선의 발굴 및 고미술품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문화재 수집 동기를 밝혔다.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실제로 오구라가 한국문화재 수집을 위해 2000만엔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투자한 돈의 10배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꼬박꼬박 제 돈 주고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그것을 팔아넘긴 한국인들의 잘못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러나 오구라의 행적을 추적하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우선 오구라는 특정분야 문화재를 집중 구입한 수집가들과 달랐다. 장르불문, 출처불문으로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묻지마 싹쓸이’ 수집이었다. 불교문화재와 도자기, 목칠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까지….

그렇게 모은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거액으로 도굴품 마구 사들인 죄

물론 오구라가 도굴을 주도했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구라는 도굴범들의 장물을 너무도 후한 값을 치르고 긁어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오구라는 경산의 한 농부가 들고온 ‘청자 죽작문주전자’(대나무와 참새 그린 주전자)를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20칸짜리 기와집 가격이 4000원 정도였다니 농부가 받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원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농부가 고향에 가서 떠벌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체포됐다가 오구라와의 대질 끝에 풀려났다는 일화가 회자됐다.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니 모든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오구라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고령의 가야 고분 300여 기를 파헤친 악명높은 도굴꾼은 장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때 개당 2원씩 샀다는 ‘굽은옥’(곡옥)의 양은 두 되가 넘었다. ‘후하게 쳐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에 오구라는 “물건만 많이 가져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개성경찰서장을 지낸 나가타(永田) 경시(총경급)는 개성 근무 당시 장물로 압수한 고려청자 5점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둔갑시킨 뒤 이를 오구라에게 팔았다. 니가타는 10만원을 부른 평양 골동품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부르는 대로 다 준’ 오구라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주 계림보통학고 교장인 지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의 일화도 기막히다. 지바는 일요일마다 건장한 학생 몇몇을 불러 모은 뒤 미리 보아둔 신라 고분을 대놓고 도굴했다. 지바는 이 도굴품을 교장 관사에 옮겨두고 경주경찰서장과 오구라에게 연락하여 “유물 좀 보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 오구라는 한밤중에 술을 사들고 찾아왔고, 마음대로 값을 계산한 뒤 경찰서장과 지바 교장에게 얼마씩 나눠주고는 유물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교장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을 도굴에 동원했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오구라 같은 자가 이렇듯 광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싹쓸이했으니 엄청난 수의 유적이 파괴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악순환이 초래됐던 것이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라진 금관총 유물 어디갔나 했더니

그런 탓에 절대 다수의 ‘오구라 유물’ 명칭에는 ‘전(傳)’자가 붙어있다. 출토지가 어디인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어디 어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傳)하는 유물’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전(傳)’자가 붙는 유물의 결정적인 흠은 ‘출처, 즉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물의 출토지와 출토상황 등을 모르는 유물로는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 유물’은 문화유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구라 유물 중 ‘전(傳) 금관총 유물 일괄’이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다. 여기서 사상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유적조사 전문가들이 신고한지 3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경험이 없는 경주 지역 조사원들이 불과 4일 만에 발굴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 상당수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구라 유물’ 중에 있는 ‘전 금관총 출토유물’은 ‘금제수식’과 ‘금제흉식금구’, ‘금제도장구’, ‘곡옥’(굽은옥), ‘청령옥’(유리구슬옥) 등이다. ‘금제수식’은 금관테의 둘레나 귀고리에 붙인 중간장식이다. ‘금제흉식금구’는 장식에서 몇가닥으로 늘어진 구슬을 고정하려고 일정간격으로 끼운 부속구이다. ‘금제도장구’는 칼의 손잡이나 몸통에 돌려감은 얇은 금판이다. 모두 완성품의 부품들인데, 금관총 발굴 때 누군가 슬쩍 훔쳤다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장물이었을 것이다.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왜 유물 앞에 ‘전(傳)’자가 붙었나 했더니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금관(전 경남)과 금동관 2점(전 경주 및 전 울산), 금동관모(전 창령) 등도 모조리 ‘전’자가 들어가 있다.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이중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 양식인 ‘초화형(草花形)’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령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과 비슷하다”면서 “국내에 온다면 국보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또한 ‘전 창녕 금동관모’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경남 창녕 또한 오구라의 집중 표적이 된 듯하다.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다수의 창령고분군이 도굴로 거의 내용물을 잃었는데 그 부장품들은 대구 오구라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의 소장품이 됐다”(우메하라의 <조선고대묘제>, 1972년)고 밝혔다.

‘창녕’이라면 최근 도굴분 밑에 가려있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된 무덤(63호분)에서 금동관 등 금제유물이 쏟아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을 가리킨다. 오구라 유물 중 ‘전 창녕’ 출토품은 ‘금동관모’ 외에도 ‘금동제조익형관식’(새날개모양관장식) 등이 있다. 둘 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에는 무자비한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다. 도굴을 조장한 오구라 등이 고분군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장물들을 수중에 넣었다는 얘기다. ‘전 동래 연산리 출토 유물’과 ‘경주 입실리 출토품’도 1920~30년대 마구잡이 도굴로 흩어진 뒤 오구라의 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밖에 ‘전 경주 출토품’으로 표기된 ‘견갑형 동기’는 현재까지 오구라 유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청동기에는 두마리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마리는 등에 화살이 꽂혀있다.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고종이 썼던 익선관은 왜?

오구라의 유물 가운데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몇 점이 보인다. 익선관과 당의, 치마 등 조선왕실 최고위층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다. 실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오구라 유물 목록에는 ‘익선관(임금의 곤룡포에 쓰는 관모)=이태왕소용품’이고, ‘당의, 치마, 속곳 등=이왕비 소용품’이라는 기록이 나란히 발견됐다. ‘이태왕’은 고종(재위 1863~1907)을, ‘이왕비’는 순종(재위 1907~1910)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유물들이 대체 언제 오구라의 수중에 넘어갔을까. 동아일보 1924년 10월19일 기사에서 실마리가 잡힌다.

“덕수궁에 보존된 왕실유물이 땅으로 새었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사라져서 재작년에 남은 물건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재고품 목록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점차 없어졌다.”

나라 잃은 지도자의 유품마저 유물 사냥꾼의 손아귀 안에 잡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오구라 유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 금동일광삼존불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 등 93건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 각종 고려자기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은 물론이고 소반과 주칠장까지 다방면의 문화유물을 긁어 모았다. 회화에도 손을 뻗쳐 겸재 정선과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강세황, 이인문, 김홍도, 변상벽, 장승업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물들도 소장했다. ‘괴물 불가사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해방되자 자기 집 마루밑에 숨기고간 유물

오구라는 해방 되기 10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긁어모은 유물을 야금야금 일본으로 옮긴다.

그중 고운무늬청동거울(정문경)과 고려청자 등이 일찌감치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아마도 도굴품 거래의 증거가 되는 유물을 일본으로 옮겨 혐의를 피하려 했을 것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오구라는 트럭 한 대를 국립부여박물관까지 몰고와서 “소장 문화재를 나에게 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단다. 그러자 박물관의 일본인 관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니 부여박물관 물건은 나라의 재산인데 어찌 당신한테 팔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그러자 오구라가 했다는 말이 기막히다.

“지금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구라는 마지막까지 한국문화재를 쓸어모으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의 유물들은 ‘적산문화재’으로 한국측에 귀속될 처지였다. 오구라는 눈물을 머금고 700~800점을 대구부(시)에 기증했다. 그러나 오구라는 다 주지 않았다. 트럭 7대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고도 상당수 문화재를 700평에 달하는 대구의 저택 마루 밑과 천장에 숨겨두었다.

200여점의 유물은 과수원을 갖고 있던 심복(최창섭)에게 맡겨놓았다. 오구라는 최창섭에게 “10년 후에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쫓겨가던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기 재산을 땅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1964년 5월27일 옛 오구라 저택의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유물 142점이 전기공사 도중 발각됐다. 이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됐다. 그런데 오구라는 “142점이 아니라 500여점을 마루 밑에 묻어놨다”느니, “소장품 중 8할을 대구에 두고왔으니 행방이라도 알고 싶다”느니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한 오구라 유물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은 어찌 됐을까.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올 때의 나이는 76살이었다.

모든 생활의 기반이 한국에 있었던데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오구라는 결국 수집한 문화재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오구라는 1964년 당시로서는 천수를 다한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구라 유물 중 남은 1030건의 한국문화재가 1981년 국립도교박물관에 기증된다.오구라 유물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한국측이 반드시 가져와야 할 ‘반환목록’에 올랐다. 1958년 4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오구라 컬렉션이 개인소장품이라지만 대부분이 도굴품이고 일본의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면서 “가치나 중요도로 비춰볼 때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정부는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총독부가 오구라의 유물 반출을 방관 혹은 허락한 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구라 컬렉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소장품(사유재산)”이라면서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끝내 1965년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반환문화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지금 국립도쿄박물관이 갖고있는 오구라 유물은 1030점에 이른다. 이중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무려 39건이다. 그중 절대 다수가 출처, 근본을 잃어버린채 남의 나라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놓여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환을 요구해야 할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국내에서 ‘오구라컬렉션’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떤지 모르겠다.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한국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쓸어간 자의 유물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세탁해주는 셈이 아닐까. ‘오구라 도굴품’ 혹은 ‘오구라 도굴조장품’ 쯤으로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또하나 일본정부는 ‘개인소장품’이어서 반환이 난색을 표했단다. 그렇다면 1981년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소장품’이 아니다. 정부차원이라면 얼마든 반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 아닌가.

<참고자료>

김동현·김삼대자·남은실·오다연·오영찬·이순자·이원복·이한상·정다움·최연식, <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유랑의 문화재>, 학연문화사,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12책), 2005

황수영 편,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이순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1-2>, 하늘재 2002~2003

오늘은 '코로나 전쟁' 발발 1주기...종군기자가 돌아본 '인간과 인간의 전쟁'

 [코로나 1년 성찰과 희망 찾기] ①

우리는 지난 1년간 코로나19에 얼마나 잘 대처해왔는지를 살펴보고 코로나가 일상이 된 현실을 어떻게 현명하게 타개해나갈지를 성찰해야 한다. 정치가 과학을 무시하거나 과학 위에 군림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코로나19에 잘 대처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 시대에 나타난 인간의 군상들은 어떠했는지 톺아보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 불안에 빠진 사람들을 겨냥해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제품과 상품을 파는 장사꾼들과 이들의 홍보꾼으로 전락한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도 다시금 되짚어야 한다. 방역 우선이란 무기를 앞세워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일은 없었는지 살피는 것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성찰이다.


코로나가 바꾼 세상과 앞으로 바꿀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 지에 대한 통찰과 분석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 그리고 각자도생과 각국도생이 아니라 국제협력을 바탕으로 코로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코로나가 지구를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냉철하고 과학적으로 톺아보고 이를 토대로 코로나 일상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개인과 국가, 세계가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코로나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1. 코로나 전쟁 1년, 종군기자의 주마간산기(走馬看山記)


 

1년 만에 6천2백만 명 확진, 145만 명 사망


 

2019년 12월 1일 인간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와 맞닥뜨렸다. 전문가들은 최초의 코로나19 환자, 즉 제로 환자(Patient Zero)가 2019년 12월 1일에 나왔다고 보고 있다. (Huang, Chaolin; Wang, Yeming; Li, Xingwang; Ren, Lili; Zhao, Jianping; Hu, Yi; Zhang, Li; Fan, Guohui; Xu, Jiuyang; Gu, Xiaoying; Cheng, Zhenshun; Yu, Ting; Xia, Jiaan; Wei, Yuan; Wu, Wenjuan; Xie, Xuelei; Yin, Wen; Li, Hui; Liu, Min; Xiao, Yan; Gao, Hong; Guo, Li; Xie, Jungang; Wang, Guangfa; Jiang, Rongmeng; Gao, Zhancheng; Jin, Qi; Wang, Jianwei; Cao, Bin (February 2020). "Clinical features of patients infected with 2019 novel coronavirus in Wuhan, China". The Lancet. 395) 

나중에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SARS-CoV-2)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중국은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이란 신종 감염병이 등장했을 때처럼 자신들이 미지의 병원체한테서 공격 받은 사실을 숨겼다. 병원체의 은밀한 침입을 눈치 채지 못한 인간은 이들의 치명적 공격에 쓰러지는 사람이 잇달아 나오고 나서야 새로운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치명타를 가할지에 대해 당시 중국은 예상하지 못했다.


 

1년 만에 6200만 명이 넘는 인류가 코로나19에 걸렸다. 사망자는 145만 명이 넘는다. 한두 명의 감염자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아무 장애물 없이 마구 밑으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 분명하다. 그 끝이 언제가 될지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인간의 몸에서 개체수를 불리는 것은 신의 손이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신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코로나 발발 1주기를 맞아 여전히 불안해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불확실성에 있다.


 

중국 최초 보고, WHO 팬데믹 선언 모두 늦어 위기 자초


 

세계보건기구(WHO)는 3월 11일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병, 즉 팬데믹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이 자신의 국가에서 치명적인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국가들에 드러내는 공표가 늦었던 것처럼 팬데믹 선언 또한 상당히 늦었다.


 

감염병 퇴치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아니 전쟁이다. 초전에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공격자들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인다. 특히 상대방이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19는 실은 자신이 침입한 인간이란 숙주 몸 안에서 본격적인 증상을 나타나게 만들기 전에 이미 다른 숙주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의 놀라운 특성을 감염병이나 바이러스 전문가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증상 감염자를 인간 집단에서 구별해 이들이 타인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코로나, 비장의 무기인 무증상 전파에 초토화


 

이런 능력을 지닌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인간이 승리하기는 정말 어렵다. 코로나19는 이미 오래 전에 일일생활권이 된 지구촌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중국을 벗어나 인근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 유럽 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3월부터 코로나 유행이 본격화했다. 유럽은 6백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선페스트, 즉 흑사병이 이탈리아에 상륙해 불과 4~5년 사이(1347~1351년)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아픈 역사를 지녔다. (<전염병과 역사> 셀던 와츠 지음, 태경섭,한창호 공역, 모티브 북, 2009.) 코로나19는 그 전파 속도가 흑사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각 나라는 공포와 불안의 나날을 보냈고 지금도 2차 대유행을 겪고 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등 북미와 브라질 등 중·남미, 인도 등 세계 곳곳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코로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가 마비되고 의료체계가 붕괴됐다. 병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숨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수많은 주검들이 집단 매장됐다. 병원이나 장례식장에 안치할 수 없는 주검들을 냉동 트럭에 보관하거나 길거리에 방치하는 나라들도 속출했다.


 

기저질환자와 노인에 치명적, 사망자 급증


 

코로나는 특히 기저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약한 노인 등에게서 치명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의료 선진국이자 복지 선진국이었던 유럽의 많은 나라는 이미 고령사회여서 특히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브라질, 인도 등 개발도상국 또한 치명적 감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미비와 열악한 의료 자원과 체계로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행 초기 우한에서 걷잡을 수 없이 코로나가 확산하자 1천만 명이 넘는 도시 전체를 봉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에서도 도시 전체를 봉쇄하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검역차단(콰란틴)이 이루어졌다.


 

세계 각 나라는 자국에서 코로나가 유행하는 것을 막거나 줄이기 위해 아예 국경을 폐쇄하거나 사실상 문을 걸어 잠그는 강력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사실상 세계 관광이 중단됐다. 국가 간 인적 교류도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스포츠 교류 등은 사실상 멈췄다. 사람이 아닌 물건과 상품의 교역만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올림픽 연기, 외국 관광 사라지고 마스크 사회 도래


 

감염병 때문에 올림픽 대회가 연기됐다. 내년에 열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세계 각 나라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 잠자거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만 제외하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일상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외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 공공장소를 드나들거

나 대중교통을 타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려면 QR코드를 찍거나 출입명부를 작성해야만 한다. 건물을 출입하려면 먼저 열화상카메라 앞에 서야 하고 여기서 체온이 37.5도 이하가 되어야 한다. 수업도 유행 정도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다. 특히 음식점과 관광산업 등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배달 문화 등 비대면 사회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인공지능과 정보통신, 로봇 등 새로운 산업기술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각 나라들은 이런 기술 개발과 발전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다.


 

코로나 전쟁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과학적인 방역 전략을 제때 세우고 이를 국민들이 잘 실천해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감염병 유행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잘 갖춘 국가 또는 신속하게 준비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혼란을 적게 겪고 있다. 베트남, 뉴질랜드, 대만, 한국, 일본 등이 그런 나라에 속한다.


코로나, 개인 자유 구속과 국가주의 강화란 과제 던져


 

코로나 1년이 인류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는 여전히 짙다. 또 코로나가 우리에게 던진 여러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 약자와 안전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들은 감염과 사망 위험뿐만 아니라 실직과 소득 감소의 위험이 높은 영순위 집단들이다.


 

이들의 보호와 방역뿐만 아니라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는 역으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강화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코로나 일상 시대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표준인지 논란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대는 혼돈의 시대다. 무엇이 우리가 좆아야 할 표준인지 성급하게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 국가에서 표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을 다른 나라가 그대로 본떠 시행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중국과 한국, 미국, 유럽 국가들이 지닌 국가 정체성과 인권 존중, 민주주의 수준, 문화와 역사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잘 작동된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잘 작동할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전쟁, 지난 1년은 인간과의 싸움


 

지금까지의 코로나 전쟁, 즉 1년간 치른 전쟁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었다.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안종주, 동아앰엔비, 2020.) 그동안 코로나 확산 방지는 바이러스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 즉 인간의 행태에 달려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가 본격 나오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는 2년차부터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과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병행하는 과도기를 거쳐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때는 코로나 전쟁이 바이러스와의 정면 승부가 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이 승리하면 인간과의 싸움 때 나타났던 비대면 등 많은 문화와 행태가 바뀔 것임이 분명하다. 서서히 코로나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 희망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필자 안종주는 최근 코로나 사태를 분석한 책으로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낸 저자입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1301503300417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