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2일 금요일

박근혜·국정원 '불법 공화국'에서 주권을 실현할 '무기'

박근혜·국정원 '불법 공화국'에서 주권을 실현할 '무기'
[프레시안 books] 국순옥 <민주주의 헌법론>


어느새 우스개로 다가오지만,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고 내내 부르댄 정치인이 있다.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농민과 노동자가 '법질서'를 지키는 공권력에 맞아죽은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당시 이른바 '야당' 대표였던 그 정치인은 되레 자신이 집권하면 '흔들리는 법질서부터 바로 세우겠다'고 호언했다. 마침내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당선되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고, 불법 선거 자금 혐의까지 불거졌다. 그럼에도 당사자인 박근혜는 물론, 법질서를 바로 세우자는 데 용춤을 추어온 독과점 언론사들도 언죽번죽 시치미를 떼고 있다.

생게망게한 나라꼴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주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님을 사무치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적잖은 이들이 실망을 넘어 좌절하고 있는 까닭이다.

절망이 감도는 '진지'를 재구축하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우리에게 '무기'가 될 책이 나온 것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다. 신간 <민주주의 헌법론>(아카넷, 2015년 4월 펴냄)은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고 부르대는 정치인들, 그들 앞에 헌법 제1조를 외친 주권자들이 두루 정독해야 할 책이다. 전자에게는 성찰의 기회를 주고, 후자에게는 주권 실현의 무기가 될 이 책의 저자는 '명망'을 좇는 사람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법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그것을 사회에 구현하는 데 앞장서온 학자들에겐 명성 높은 스승이다.

인하대학에서 헌법학을 강의하며 대학원 안팎에서 숱한 법학자를 길러낸 국순옥 명예교수(이하 저자)는 '민주법학의 스승'이자, 그 '민주주의법학연구회'가 올곧게 '법학운동'을 펴나가는 길에 변함없는 나침반이다. 법학자들 사이에 저자의 논문들은 "언제나 치열하게 벼려낸 논리를 꼼꼼히 다듬은 문장으로 빚어낸 명문"으로 회자된다. 바로 그 명문들을 제자들이 모아 <민주주의 헌법론>에 담았다.

'민주법학의 스승'이 주권자들에게 건네는 '무기' 
ⓒ아카넷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저자의 글은 '민주주의와 헌법 실천' 들머리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 헌법은 자본주의헌법의 계보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근대자본주의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틀은 물론 현대자본주의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들도 아울러 담고 있다."

두 문장이지만, 헌법에 대한 우리의 접근 수준을 단숨에 높여준다. 대한민국 헌법이 '자본주의 헌법의 계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환기시켜줄뿐더러 '자유주의적 기본 틀'은 근대 자본주의 헌법이고, 현대 자본주의 헌법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개량주의적 성과들'을 담고 있다는 진실을 깨우쳐준다. 이어 개량주의적 성과들 또한 "투쟁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근대자본주의헌법과 현대자본주의헌법은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는 이질적 범주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성립한 자본주의헌법의 역사적 현상형태들에 불과하다. 근대자본주의헌법이 신흥부르주아계급의 주도 아래 전개된 반봉건투쟁의 산물이라면 현대자본주의헌법은 노동자계급이 선봉에 선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다." 

그 맥락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부르주아계급이 미처 성장하기도 전에 몇몇 강단 출신 지식인이나 관료 출신 지식인이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헌법을 밑그림 삼아 이리저리 엮어놓은" 것으로 "1948년의 우리 헌법은 우리 현실과 거리가 먼 일종의 초현실주의 추상화나 다름없었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왜 제1조부터 철저히 무시당해 왔는가를 직시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긍정적 의미를 평가하는 데 인색하진 않다. '강단 헌법학 비판'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격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반쪽 해방 공간에서 적지 않은 산고 끝에 태어난 1948년 헌법이 진보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고 분석한다. "진보주의 이념을 떠받쳐주는 사회변혁적 해방 잠재력이 아직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 "민주주의적 계몽 기획으로 우뚝 서야 할 1948년 헌법이 걸어간 길"은 아쉽게도 진보주의 이념을 하나씩 털어내는 "고난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단순한 법학 교양을 넘어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새 지평을 열어준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손꼽을 것"으로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발적 추동력인 부르주아계급의 원초적 결락 현상"을 든다. 

혹 '부르주아계급'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기 검열이나 '경계'에 들어갈 독자를 위해 서평자가 '각주'를 달고 싶다. 부르주아는 서구의 시민혁명을 일으킨 계급으로 말뜻 그대로는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토지에 기반을 둔 중세 시대에 상인과 공인들은 성 안에 살았다. 그들 "근대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서구의 신흥부르주아계급은 그 뿌리가 봉건사회 해체기의 독립 자영 소생산자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건사회의 신분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이들 독립 자영 소생산자층은 반봉건투쟁에서 몸과 마음을 다진 자유의 전사로서 평등 그리고 독립의 인격주체로 홀로서기를 열망한 자유주의 이념의 고전적 화신들이었다. 그들은 신흥부르주아계급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근대자연법이론의 세례를 통하여 이념적 자기 정립과 윤리적 자기 도야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밑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은 "국가 주도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 전략의 그늘 아래에서 양적 성장을 거듭한 천민부르주아계층"이다. 

서구 부르주아계급과 달리 한국의 천민 부르주아층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미래를 주체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치적 상상력이나 윤리적 지평조차" 기대할 수 없다. 그 차이는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어떤 성명을 내놓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 스스로 신분제도에 맞선 혁명의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한국의 상공인계급은 "근대자본주의헌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헌법의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대 냉소주의적 무관심을 보이거나 국외자의 입장에서 시종 방관자적 자세를 보였다.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유리한 군부독재에 대해 그들의 태도는 '방관자'를 넘어선 '부역자'였다. 비단 과거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오래 역임한 박용성이 대학 이사장이 되어 강행한 '기업식 학사 개편'에 교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 놓은 것은 저들이 얼마나 천민적인가를 2015년 오늘에도 생생하게 입증해준다.

근대 자본주의 헌법의 고갱이에 대해서도 무지한 한국 상공인들이 현대 자본주의 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인 사회권적 기본권을 어떻게 여길지는 불을 보듯 명확하다. "천민부르주아계급의 자본 축적 활동과 모순관계에 있는 노동 관련 기본권에 대한 적대적 반응"이 그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이 노동 관련 기본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삼성의 경영을 '위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천민 부르주아층의 인식이 이미 한국 사회에 폭넓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 부재의 헌법"으로 출범한 헌법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무릇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일차적 관건이다. 이 책은 우리의 헌법 현실과 헌법 실천을 날카롭고 깊이 있게 제기한다. "자본주의헌법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자본주의헌법의 담지자인 부르주아계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주체 부재의 헌법으로 출범"한 "헌법 현실에서 헌법 실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사회적 실체를 탐색하는 것은 이 책의 실천적 미덕이다. 

그 "헌법 실천의 주체"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놓여 있다. "우리 헌법이 담고 있는 현대자본주의헌법의 개량주의적 성과들을 사회 발전의 디딤돌로 지켜나가는 것"과 "천민부르주아층을 대신하여 우리 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틀을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더욱 다져나가는 것"이 그것이다. 저자는 개념적 인식이 사고의 지평을 얼마나 확대해주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대안 헌법 이론'에서 "1987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 실천 주체들의 등장"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 뒤 전개된 현실에 저자의 분석은 냉철하다.

노동자계급이 헌법 현실에 발 딛고 스스로 헌법 실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찾은 저자는 "헌법 실천 주체의 외연이 생산활동 영역의 노동자에서 생산활동 영역 밖의 노동자로 확대된"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까지 단결권의 행사가 금기시되어온 사회 각 생활영역, 예컨대 교육현장 언론매체 의료사업장 등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조직 열기가 한껏 고조"되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뒤를 이은 김영삼 정권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탈을 쓰고 억압적인 노동정책을 폈고, 1997년 끝 무렵 밀어닥친 "금융환란의 무거운 짐을 노동자계급이 고스란히 떠안음으로써 모처럼 물오르기 시작한 노동자계급의 헌법 실천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았다고 분석한다.

헌법 실천의 또 다른 주체로 제시한 학생운동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냉엄하다. "대학생 활동가 집단들의 관념적 급진주의"가 "우리 헌법 현실은 묶음표에 가두어놓고 추상적 관념의 세계에서 유리알놀음을 즐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는 비판은 사뭇 서슬 푸르다. 저자는 "우리 헌법 현실의 뒷전에서 이념 과잉의 공상헌법 수필만 엮어내는 데 골몰"하기보다 "우리 헌법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분석의 결과를 헌법 실천적 대안으로 구체화"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시민운동이 헌법 실천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스스로를 무계급 또는 초계급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민운동 특유의 허위의식"을 지적한다. 그 결과로 "시민운동 단체들의 헌법 실천적 개입에서 부르주아적 생활세계의 중심 무대인 소비생활 영역의 기본권이 주로 호명의 대상이 되고 생산활동 영역과 관련된 기본권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분석한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는 근대화 기획의 첫걸음" 

헌법 실천의 주체로 노동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을 짚은 저자는 "민주주의를 기본권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기본권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시민사회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중심이 되는 기본권은 기본권 일반이 아니라 기본권 담지자 시민들의 사회적 교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사소통의 자유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사소통의 자유는 지배적 기본권 담론에서도 역시 대문자 주제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표현의 자유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포함된다. 이처럼 시민사회적 민주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고리로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전진을 계속할 때, 우리는 마침내 근대화 과정의 문턱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적 기본권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아직도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는 근대화 기획의 첫걸음으로 자리매김하여도 좋을 것이다."

다만, 기본권 중심의 민주주의 사고가 지나친 나머지 탈민주주의적 "기본권 물신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자기 한정"이 필요하다는 경계도 잊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헌법 실천', '강단 헌법학 비판', '대안 헌법 이론' 중심으로 짚어보았지만, 풀어쓰면 각각 책 한 권이 될 수 있는 주제와 내용을 압축적으로 서술한 논문들이 가득하기에 갖춰두고 틈틈이 정독하기 좋을 책이다. 예컨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와 "수평적 확장"을 제시하는 저자의 차분한 제안은 '헌법 실천'에 나설 때 유념할 개념이다. '사법권력'과 '사회국가'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우리 의식을 고양시켜준다. 민주 시민은 물론 언론인과 법조인들이 탐독해야 할 이유다. 로스쿨과 법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훌륭한 학습 교재다. 강단 헌법학을 비판하고, 대안 헌법 이론을 제시한 저자의 책에는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헤겔, 칼 슈미트,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상을 깊이 있게 분석한 논문들이 실려 있다. 

내용과 문체가 두루 빼어난 저자의 명문들을 책으로 펴내는 데는 민주법학 후학들의 힘이 컸다. 실무를 맡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김종서 편집위원장은 책 들머리에서 "몇 년 전 연구소로의 전환 시도가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좌절된 이후 상당히 정체되었다고 할 수 있는 민주법연"에 이 책의 출간이 "어떤 신선한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민주법학이 '좌절된 뜻'을 이참에 구현한다면, 그것은 법학자들만의 진지는 아닐 성싶다. '법대로'를 외마디로 질러대는 이 '불법 공화국'에서 희망을 만드는 참호 아닐까.

*2010년 7월 31일 첫 호를 내고서 5년간 이어온 '프레시안 books'가 새 단장을 위해서 한두 달의 휴식 기간을 가집니다. 그간 '프레시안 books'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좋은 책을 공들여 쓴 서평으로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프레시안 books'는 더 적극적으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에 나설 예정입니다. 

천안함의 진실, 어디에서 건질 것인가

역사는 당신들 셋보다 신상철을 기록할 것
천안함의 진실, 어디에서 건질 것인가
김갑수 | 2015-05-23 08:50:1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역사는 당신들 셋보다 신상철을 기록할 것
- [다시 역사를 논한다] - ⑥
천안함의 진실, 어디에서 건질 것인가
117년 전인 1898년 2월 15일,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순양함 메인호의 폭발 원인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밝혀진 사실은 모두 사고 후의 것들인데, 미군 266명이 사망했다는 사실, 미국은 이것을 스페인의 기뢰 공격으로 인한 폭발로 몰아붙였다는 사실, 스페인은 이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부정한다는 사실, 사고 당시 기뢰 폭발이었으면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물기둥이 없었다는 사실.
하지만 당시의 미국 정치인과 언론과 시민 대다수는 스페인의 공격 때문이라고 믿었거나 주장했다는 사실, 미국 사회에 “메인 호를 리멤버하라”는 구호가 유행했다는 사실, 이를 기화로 미국은 대 스페인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 결과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지 필리핀을 먹었다는 사실, 이어서 미국은 일본에 조선을 먹으라고 부추기며 대폭적인 지원을 했다는 사실 등이다.
이로부터 66년이 지난 1964년 8월 4일 미국 존슨 행정부는 북베트남에서 미군 구축함 매덕스와 터너조이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두 구축함은 북베트남 연안 12해리 이내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아주 궂은 날씨에, 주위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한 척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을 건수 잡아 북베트남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했다.
다시 이로부터 54년이 지난 2010년 3월 26일, 한국의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했다. 천안함 역시 메인 호처럼 아직도 사고 원인이 미궁 속에 있다.
역시 밝혀진 것은 모두 사후의 사실들,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 6명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사고 원인을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단정했다는 사실, 북한은 이것을 부정해 오고 있다는 사실, 어뢰 폭발이면 당연히 있었어야 할 물기둥이 목격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다.
지금 미국인에게 117년 전 메인 호의 폭발 원인이 뭐냐고 물으면, 태반이 메인 호가 뭐냐고 되묻는다고 한다. 그들은 메인 호 자체를 ‘리멤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다르다. 일부는 미국의 자작극이라 하기도 하고, 일부는 사고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반면 스페인의 기뢰 공격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수라는 점이 아니라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얼간이 또는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래 한국인들은 훗날 어떤 소리를 듣게 될까?
 “천안함 폭침 때 북한 잠수정이 감쪽같이 몰래 들어와서 천안함 공격 후 북한으로 도주했다.”(문재인, 2015. 3.25)
“나는 천안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박원순, 2011. 10.10.)
 “북한의 폭침 만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재명, 2014. 3.26)
이명박, 박근혜, 김무성 등의 천안함 발언은 더 이상 진실의 영역을 축소하지는 못한다. 어차피 그들만의 ‘반공 언어’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박원순, 이재명 등의 발언은 이 땅에서 진실의 영역을 대폭 축소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아마도 이들의 발언은 동족에게 범죄자의 누명을 씌운 민족 배신 행위로 기록되지는 않을는지. 확신하건대 역사는 이들 셋보다 신상철의 이름을 명예롭게 거명할 날이 필경 오고야 말 것이다.
지난 2013년 상영된 <천안함프로젝트>에 출연한 신상철 진실의길 대표. 사진=아우라픽처스
지금 미국인에게 통킹만 사건을 물으면 십중팔구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대답한다. 주요 관련 인사들의 폭로와 비밀문서의 공개 때문이다. 미국이 베트남에 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 내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반전운동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트남과 관련된 미국의 음험한 진실들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베트남의 진실들을 하나하나씩 알아차렸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1945년 8.15 이후 주한미군정의 문서들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한국의 사례에 유추하여 베트남의 사례를 읽은 것이다.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도 이 과정에서 출간되었다. 우리는 천안함의 진실을 어디에 유추하여 건질 것인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218 

명예욕에 설 자리 잃은 '무시무시한' 광주 이야기


15.05.22 21:42l최종 업데이트 15.05.22 21:42l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현장 보고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 재발간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화, 인권운동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요 기록물이 절판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재발간 되지 못하고 있다. 영문판의 번역편집자인 설갑수씨가 영문판 재발간과 관련한 소회를 보내왔다. [편집자말]
기사 관련 사진
▲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설갑수 옮김, 1999)'.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책을 한 번은 읽는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10일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 넘어>, 1985)가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책을 다른 나라말로 옮길 기회가 온다면, 개인에게는 큰 기쁨이리라. 나는 그 기쁨을 1999년에 누렸다.

그해 5월, 나와 내 친구 닉 마매타스(Nick Mamatas)는 함께 <넘어 넘어>를 번역해 '광주일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아래 <광주일지>)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놨다. 이 책은 당시 미국 UCLA대학에서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로 출판되었다.

<넘어 넘어>는 한국에서 출간되자마자 금서가 됐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당시 저자 명의를 빌려준 소설가 황석영부터 책을 출간한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까지 모두 체포해 버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이 무서워했던 책. 그러면서, 전두환 자신도 읽어봤다는 책. 그 후 합법 비합법으로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책이 <넘어 넘어>다.

올해로 <넘어 넘어> 출간 3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넘어 넘어>가 금서이던 1980년대, 그리고 베스트셀러였던 1990년대가 이 책의 황금기였다. 반면 최근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를 두고 아쉽고 민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주주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제 더 늦기 전에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물의 실명을 쓸 것이고, 존칭은 생략하겠다(관련기사 : "밖에선 <죽음을 넘어~> 영문본 절판...").

커밍스, 촘스키, 샤록을 흔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이야기'

<광주일지>를 번역하게 된 개인사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 듯하다. 내가 <넘어 넘어>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이 나온 1985년 5월,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반 친구였던 최경송이 목사였던 부모님이 몰래 돌려보던 책을 자기도 읽었다며 무시무시한 책에 대해 얘기해줬다. 그 무시무시한 책이 <넘어 넘어>였다.

5월 광주항쟁에 대해 풍문 정도를 들었던 내가 던진 첫 질문은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많이 죽였겠네"였다. 그런데 경송이의 대답은 당시 나에게 충격이었다. "아니, 대학생들은 다 도망가고, 노동자들만 죽었어." 몇 주 후, 우연히 책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앞에서 말했듯이 <넘어 넘어>는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물론, 그 '뒤흔들린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넘어 넘어>가 기록한, "군인들이 나라 지키라고 준 총으로 제 나라 백성 쏴 죽이고, 똑똑하고 정의롭게 보이던 대학생들은 도망가고 민중이 최후에 남았던" 광주항쟁의 진실은 한국의 한 세대를 뒤흔들어 버렸다. 내 친구 최경송은 지금도 경기도 과천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저러해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그리고 서점에 갈 때마다, 아쉬움이 생겼다. 1990년대 초, 중국의 천안문 항쟁 직후라서, 서점에는 천안문 학살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록부터, 분석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아시아에서는 적어도, 광주항쟁이 현대 민중항쟁의 원조 격인데, 천안문 항쟁처럼 국제 사회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해외 언론에 한국 민주화와 광주항쟁이 재조명을 잠시 받을 때, 나는 <넘어 넘어>를 번역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또한, 1995년 5월 당시 진보월간지 <말>이 <넘어 넘어>를 실제 집필한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재의(당시 광남일보 논설위원)였다는 기사를 보도했다(이재의가 주도적 역할은 한 것은 사실이나, <넘어 넘어>를 그가 단독 집필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 다루겠다). 그해 12월, 당시 <말>의 미국 통신원이었던 김민웅 목사(현 경희대 휴마니타스 교수)를 통해 이재의와 연락이 닿았고, 풀빛출판사와 영어판 판권 계약을 했다.

<넘어 넘어>는 번역하기에 녹록한 텍스트가 결코 아니었다. 운동권 글투답게, 대부분 문장에서 주어는 생략되었고, 수동태가 태반에, 과장된 어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생생한 분위기를 영어권 독자들이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이 복잡한 과정에서 탁월한 편집자 마매타스의 역할은 매우 중대했다. 작업 초기에는 번역 문장 하나하나를 두고 서로 다퉜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를 몇 차례, 그러면서 몇 가지 원칙이 정해졌고, 작업은 신속히 진행됐다. 이 과정 탓인지, 마매타스는 그 후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편집자·소설가로 진로를 바꾸었고, 현재 버클리에 있는 출판사의 책임 편집자다.

번역 작업의 속도가 붙었으나, 일의 심적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도 <넘어 넘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구타'일 것이다. 같은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영어 어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군인이 민간인을 구타했다"라는 말을 수없이 다른 낱말로 옮겨 써야 했다. 통닭구이, 원산폭격 등 광주 시위대가 거리에서 당한 고문도 옮기기 힘든 부분이었다. 직역 대신 의역으로 고문을 묘사하려니, 희생자가 직접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몸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슴 벅찬 순간이 더 많았다. 나는 번역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새로 나온 광주항쟁 관련 자료를 통해 사실 확인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광주일지>는 주석도 많고, 이재의의 동의로 본문을 다시 쓴 부분도 있다. 그런 탓에 <넘어 넘어>의 80%가 <광주일지>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주석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경 시민군이 전남대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LMG 기관총에 대한 것이다. 그날, 계엄군 발포 직후,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12층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기관총은 계엄군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4층 도청건물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였다. 항쟁 나흘 만에, 시민들이 처음으로 확보한 전술적 고지였던 셈이었다. <넘어 넘어>는 시민군이 도청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그것이 계엄군의 후퇴를 재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통해 그것은 잘못된 기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시민군은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것은 위협용이었다. 나는 기관총을 쏘지 않아서 광주가 더 위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기관총을 쐈다면, 계엄군도 피해를 보았겠지만, 도청 주변의 시민들도 총탄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였다. 항쟁 첫 나흘 동안, 공격하는 계엄군과 방어하는 시민의 폭력성은 계속 격화되고 있었다. 쌍방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유리한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상황을 더는 악화시키지 않은 것은 시민들이었다.

애초 폭력의 피해자였던 이들이 유리한 상황에서 스스로 사용할 수 있었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이 무기를 든 이유는,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정당방어였다는 사실을 발포하지 않은 기관총은 증언하고 있었다.

번역이 마무리된 1996년, 미국과 영국의 여러 출판사들에 원고를 보내 출판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첫 반응은 한결같았다. 도대체 이런 사건이 언제 있었으며, 이 학살이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시카고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넘어 넘어>가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한국학의 대표적 교수로서 보증하는 편지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그때까지, 커밍스와 나의 관계는 그가 연사로 나온 콘퍼런스의 청중으로서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다. 커밍스가 나를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커밍스는 출판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줬고, 책의 편집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 조언 중에 하나가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서문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왕이면 그 서문을 커밍스가 썼으면 좋겠다고 민망하게 매달렸다. 커밍스는 그 뻔뻔한 청을 흔쾌히 받아줬다.

그뿐만 아니었다. 커밍스는 MIT(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의 놈 촘스키(Noam Chomsky)를 소개해 줬다. 원고를 읽은 촘스키는 몇 차례 미국 출판사들에 <광주일지> 출판 필요성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줬다. 또한 <광주일지>에 한국의 독재 정권을 계속 지원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글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도 해줬다.

촘스키의 충고를 따르는 일은 뜻밖에 쉽게 풀렸다. 같은 해,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탐사기자인 팀 샤록(Tim Shorock)이 광주항쟁 당시 미국 국무부와 주한 대사관 사이에 오간 전문,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을 정보공개법으로 입수, 폭로한 것이다. 샤록에게 <광주일지> 원고를 보낸 며칠 후, 그의 신문사로 전화했다. 그리고 체로키 파일에 기반을 둔 원고를 부탁했다. 샤록은 <광주일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하겠노라는 밋밋한 답을 줬다.

그가 원고를 다 읽을 즈음 다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샤록의 목소리가 의외로 흥분되어있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광주일지> 원고 읽으며, 많이 울었다. 특히, 접대부들이 '부상자를 위한' 헌혈을 거부당하자 통곡하는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체로키 파일에 대한 원고를 써주겠다." 솜씨 좋은 저널리스트답게, 샤록은 체로키 파일을 항쟁 10일 기간으로 재구성한 값진 원고를 써줬다.

그렇게 <광주일지>가 1999년에 세상에 나왔다.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넘어 넘어>가 한국의 많은 젊은이를 흔들어버린 것처럼, 마매타스, 커밍스, 촘스키, 그리고 샤록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이 제기한 인권, 민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에 이들이 감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사 관련 사진
▲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이 내년 5월 간행된다. 지난 1985년 5월 초판 간행 당시 책의 표지와 수첩의 모습 (팜플릿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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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집필자 못 정해 <넘어 넘어> 증보판 무산... 사적 공명심의 피해자는?

이제는 다소 어렵고, 다소 민망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난해 7월, <넘어 넘어> 출간 당시, 전청연(광주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회장이었던 정상용과 이재의의 주도로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가 결성됐다. 책 발행 35주년인 올해에 증보판을 내기로 하는 게 목적이었다(관련기사 : "5·18 폄하 예상은 했지만 박근혜정부 들어 극심").

알려진 대로, 1985년 당시 <넘어 넘어>는 황석영 명의로 나왔다. 유명인사 이름으로 나와야 집필진과 <넘어 넘어> 프로젝트를 추진한 전청연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의 생각이었다. 이재의는 <광주일지> 서문에서 이 부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출판사는 여러 유명인사에게 이름을 빌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은 황석영 혼자라고 했다. 황석영은 육필증거를 만들기 위해, 타자본 <넘어 넘어>를 원고지에 베껴 썼다.

이재의의 서문에 따르면, <넘어 넘어> 집필은 조양훈, 최동술과 같이한 공동작업이었다. 자료수집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영어판 <광주 일지>에 적어도 그 두 사람을 공동저자로 넣는 게 옳았다. 저자를 황석영에서 이재의로 바꾼 이유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복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넘어 넘어>의 많은 부분은 소준섭(현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이 1981년 수배 중 광주에서 쓰고, 이듬해에 지하 출간한 <광주백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사실상 <넘어 넘어>의 뼈대가 <광주백서>인 것이다. 그러나 1985년 <넘어 넘어> 집필과 출판에 관여했던 사람 누구도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소준섭은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 참가를 고사했다.

결국, 30주년 증보판은 나오지 못했다. 대표필자를 정하지 못해, 증보판 발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게 광주시 인권 옴부즈맨이자 간행위 실무자인 안종철의 전언이다. 전두환의 엄혹한 독재 속에서도 나왔던 책이, 30년 지난 공적 다툼에 30살 생일상도 못 차려 먹고 있다. 알려지는 게 두려워 유명인사 이름을 빌려 간신히 나온 책이 뒤늦게 이름 내고 싶은 사람들 다툼에 복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심정도 이해한다. 공이 있으면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책이 복간된 후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서로 공명심에 치우치다 보니, 소준섭 같은 이의 공헌을 인정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내 언사가 지나친가? 나도 이 처참한 상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사적 공명심의 피해는 <광주일지>도 입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이재의에게 다음을 수차례 간곡히 부탁했다. 책은 비영리 기관에서 나왔고, 그 누구도 경제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책의 영속성을 위해, 광주의 적당한 기관이 저작권 계약을 통해 <광주일지>를 발행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내가 들은 풍문은 광주에서 <광주일지> 해적판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그 풍문이 사실임을 2005년 한국 방문 시, 광주시 관계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필요해서 몇 부 찍어서 해외에도 보냈다"고 했다.

큰 충격이었다. 그 광주시 관계자의 말은 결국 제 공명심에 책 좀 찍어 여기저기 뿌렸다는 말 이상은 아니었다. 사실, 비영리 기관과 정식계약을 맺고 책을 발행하는 것과 해적판 제작 사이의 생산비 차이가 얼마나 나겠는가? 자신의 명예와 광주의 전통을 갉아먹는 광주시 관계자의 단견에 두고두고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주로 대학교재로 매년 200부 이상 팔리던 <광주일지>는 2006년 UCLA의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가 중단됨에 따라 절판됐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출판사를 구해보려고 몇 번 마음을 먹었으나, 그뿐이었다. 한마디로 흥도 안 나고, 환멸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광주항쟁에 감화를 받아서 번역과 기고에 참여한 3명의 미국인 앞에 면이 서지 않았다. 물론 우리 4명은 <광주일지> 발간 전후로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서인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By Lee Jai-eui/ Translated by Kap Su Seol and Nick Mamatas, 1999 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의 저작권자인 설갑수(46)씨. 그는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 중이며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ESG Research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다.
ⓒ 설갑수

"국회도서관 소장 5·18 기록물 영문판도 해적판... 기가 찼다"

최근 박원석 정의당 국회의원이 <광주일지> 재발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지난 5월 13일, 뉴욕에 잠시 들린, 박 의원의 비서관 조태근과 재발간 문제를 의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조 비서관이 국회도서관에서 대출해 가져온 <광주일지>도 해적판이었다. 일단 떠돌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이란 게 해적판이라지만, 다시 한 번 기가 찼다.

박원석 의원은 <광주일지> 재발간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할 기세다. 다시 한 번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책의 영속성을 고려한다면, 그 방법이 최선은 아닌 듯하다. <넘어 넘어>이건 <광주일지>건, 그 주인은 광주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광주의 책임 있는 공적 기관이 이 두 기록물을 맡아, 영속성을 보장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관련기사 : 광주의 진실,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역사기록물을 개인들이 맡고 있으니, 잡음만 많고, 보존도 안 된다. 물론 책임 있는 기관이 나서준다면, 나를 포함한 <광주일지> 집필진 4명은 그 보전의 당사자이자, 시민의 한 사람으로 힘을 보탤 것이다.

흔히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수구 정권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기 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방치하지는 않았을까?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80년 광주라는 집단기억을 우리 스스로가 지우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가녀린 민주주의 전통 앞에 사랑은 저버리고, 명예와 이름만 찾는 우리네 마음속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미 오래 전에 금지곡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기만 한 광주항쟁 35주년 주간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IS가 장악한 고대도시 팔미라에 대해 당신이 몰랐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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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YRA
고대 사막 유적이 있는 도시 팔미라가 IS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라 사라즈 박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역사를 지우고 유물을 팔아 치우려는 강경한 전투원들이 세계 문화 유산을 파괴할까봐 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팔미라의 높은 크림빛 기둥에서 아주 가까운, 악몽의 장소인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를 향했다.
사라즈와 같은 많은 시리아 인들에게 있어 팔미라(아랍어로는 타드모르라고 한다)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적 유명 장소일 뿐 아니라 아사드 정권 하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압제의 가장 큰 상징이기도 하다. IS가 시리아 정권을 몰아내고 팔미라를 점령할 때 국제적 관심은 팔미라의 고대 역사에 쏠렸지만, 사라즈는 현대에 팔미라에서 자행된 잔인함이 간과되었다고 말한다.
“타드모르는 끊임없는 고문과 공포다.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다.” 현재 시카고에서 살며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사라즈는 스카이프를 통해 월드포스트에 이야기했다.
시리아의 전 대통령 하페즈 아사드 시절,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타드모르 군사 교도소는 즉결 처형과 대학살로 악명 높았다. 그의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집권하고 난 뒤 2001년에 –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 이곳은 문을 닫았다. 정말로 닫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에 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전쟁이 터진 뒤, 시리아 인들은 타드모르가 다시 열려 반체제 인사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 아사드 대통령 시절, 휴먼라이츠워치(HRW)가 199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1980년에 단 하루에 최소 500명 이상의 재소자가 학살 당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며 이곳을 ‘죽음과 광기의 왕국’이라고 불렀다. 2001년의 암네스티 보고서에서는 재소자들이 ‘외부 세상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하며, 이 교도소가 ‘재소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 모욕, 공포를 줄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다고 했다.
고문 기술로는 걸어놓은 타이어에 죄수 매달기, 막대기와 케이블로 전신 구타하기, 억지로 척추를휘게 만드는 금속 장치인 ‘독일 의자’에 묶어 놓기 등이 있었다.
시리아의 여러 감옥에서 12년을 보내며 그 중 9년을 타드모르에서 지낸 사라즈는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자신이 혐오하는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포스트에 따르면 IS 전투원들이 타드모르 재소자들을 풀어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월드포스트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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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0일에 IS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IS와 시리아 정부군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전투를 벌이며 검은 연기가 치솟는 모습. ⓒAP
“이건 자유 세계의 폐단이다. 만약 다에쉬가 타드모르를 자유롭게 했다면, 자유 세계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다에쉬는 IS의 아랍어 별명이다.
국제인권감시기구 중동-북아프리카 부회장인 나딤 호우리 역시 시리아의 억압의 상징인 타드모르의 문을 연 것이 IS라는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다.
“잔혹한 지배를 벗어나 다른 잔혹한 지배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가 전화로 말했다.
U.N. 인권고등판무관 대변인인 라비나 샴다사니는 목요일에 제네바에서 시리아 정권은 IS가 몰려오는데도 정부 세력이 팔미라를 떠날 수 있게 될 때까지 민간인들이 팔미라를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고 말했다. IS가 팔미라에서 저지를 범죄에 대한 깊은 우려도 표명했다.
“IS가 팔미라에서 집집마다 뒤지며 정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 팔미라에서 최소 14명의 민간인이 처형 당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로이터에 한 말이다.
팔미라를 점령한 IS는 민간인 수만 명을 총부리 앞에 두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시리아 곳곳의활동가들을 통해 전쟁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영국의 반전 그룹 시리아 인권 감시 단체에 따르면, 목요일 기준으로 그들은 시리아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5월 17일에 이라크의 요충지 라마디를 장악한 뒤 불과 사흘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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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0일 IS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IS 대원들이 홈스와 팔미라를 잇는 길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전투 중에 몸을 숨기고 있다. ⓒAP
매체에서는 2,000년 된 유적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지만, 사라즈는 그곳에 얽힌 자신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지금도 고문 받던 친구들의 비명과 벽의 핏자국을 기억한다. 그는 감옥에 갇혀 낭비한 그의젊은 시절의 여러 해, 마음을 다 앗아가는 공포와 참담한 권태를 잊을 수가 없다.
21세의 대학생이던 사라즈는 1984년에 시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1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이 수감된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 하페즈 아사드가 정치적 목적으로 정치범 1,000명 이상을 석방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성인 남성이었다. 신분증도, 직업도, 인생도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옮긴 뒤였다. 그는 다행히 미국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12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들은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서 다시 만났다. 사라즈의 가족 역시 사라즈처럼 훨씬 늙어 있었고, 그는 가족들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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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즈 박사가 시리아 정보국에 끌려가 악명 높은 타드모르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해의 사진
“눈물이 고인 걸 보고 내 가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겐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사라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메꾸려고 하바드와 노스웨스턴 등에서 공부했지만, 타드모르는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 그는 시리아 정권이 죄값을 치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제 50대가 되었지만 타드모르 교도소의 마당,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또 한 차례의 고문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던 기억이 지금도 문득 떠오른다. 그때 생긴 흉터가 지금도 그의 몸에 남아있다.
그는 아사드 정권이 민간인들에게 통폭탄(barrel bomb)을 투하하는데,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은 IS 거점만 공격한다며 바샤르 아사드를 공격하지 않는 서방세계를 비난했다.
“내 생각엔 그건 위선이다. 시리아 인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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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4일에 찍은 사진. 다마스커스에서 북동쪽으로 215km 떨어진 고대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 전경. 시리아의 전설적인 그레코-로만 오아시스 유적 팔미라에 마지막으로 여행자가 찾아온 것은 시위가 시작된 지 6개월 후인 2011년 9월이었다. 가장 최근에 찾아온 것은 폭력과 약탈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러 시리아 인들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세계 문화 유산이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유적은 중요하다. 유적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IS가 장악했다고 해서 타드모르에 관심을 갖지만, 홈스나 다마스커스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건 정말 한심한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글과 사진들이 전부 사실이면 어쩌나, 시리아 정권 세력이 퇴각한 뒤에도 아직 타드모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 사라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남아 있는 재소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데일리 비스트’에서 팔미라의 반 아사드 조정 위원회 회원이라고 설명한 칼레드 옴란은 정권 측이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사용해 팔미라를 요새화해서 IS를 막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데일리 비스트’에 “재소자들을 태운 버스 10대 정도가 전선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목요일에는 트위터에 확인되지 않은 글이 돌았다. IS 대원들이 레바논 인 이십여 명을 포함한 타드모르의 재소자들을 석방했다는 내용이었다. 월드포스트가 직접 사실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 트위터 사용자들은 타드모르에 정말 아직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재소자들이 있었다면 IS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
베이루트에 있는 호우리는 타드모르 등의 군사 교도소에서 연락이 두절된 가족들의 정보를 수십 년 째 기다리는 레바논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때였다면 예전에 억류되었던 사람들의 가족들이 교도소로 달려갔겠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 생길지 불확실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는 증거물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집단 무덤과 재소자 파일 정보는?”
사라즈는 타드모르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채 아직 남아 있는 재소자들이 있다면 IS에 합류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내가 석방되었을 때, 난 소련이 붕괴했다는 것도 몰랐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다른 세상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풀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방에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US 월드포스트(The World Post)의 중동 전문기자 소피아 존스가 쓴 'Palmyra, ISIS' Latest Conquest, Has Dark History Of State Torture And Abuse'(영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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