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2일 일요일

앞당겨진 3차 남북정상회담…‘북-미 교착’ 돌파구 찾아라

앞당겨진 3차 남북정상회담…‘북-미 교착’ 돌파구 찾아라

등록 :2018-08-13 05:00수정 :2018-08-13 10:10


북미회담 불씨 살린 2차회담처럼
비핵화 협상 뚜렷한 진전 없자
남북 ‘가을 이전’ 만남 필요성 커져
당국자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회담”

북 공화국 70돌·유엔총회 개막 등
9∼10월 바쁜 일정 감안 가능성도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려 경기 시작에 앞서 ‘판문점 선언 그리고 다시 만나다’라는 주제로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려 경기 시작에 앞서 ‘판문점 선언 그리고 다시 만나다’라는 주제로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북 정상이 이르면 이달 말 평양에서 3차 정상회담을 열 것으로 알려지면서, 예상보다 이른 ‘조기 정상회담’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3차 정상회담은 5·26 2차 정상회담처럼 ‘정세 돌파’를 위한 회담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정부 고위 소식통들은 “남북 사이에 그동안 상당한 물밑 협의를 통해 시기와 장소는 뜻을 모았지만, 의제 등은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듯하다”고 전했다. 한 정통한 소식통은 “(북-미 관계 진전 등) 환경이 갖춰져 회담을 한다기보다는,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회담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고 짚었다.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두고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의 진전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애초 합의한 ‘가을’보다 서둘러 만날 필요성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앞서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적대적 관계 해소에 합의한 바 있으나, 북쪽의 핵·미사실 시설 폐기와 미군 유해 송환, 한-미의 연합 군사훈련 유예 조치 외에는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미국은 비핵화의 첫 조처로 현재 보유 중인 핵·미사일 시설 목록을 요구하고 있고, 북쪽은 체제안전 조처로 종전선언을 먼저 요구하면서 양쪽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3차 회담은 힘겨루기 중인 북-미 사이를 한국이 오가며 ‘오해’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나름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북-미가 서로의 요구를 앞세우며 6·12 북-미 정상회담 합의 이행이 난항에 빠진 만큼, 문 대통령이 다시 중재력을 발휘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현재로선 남북, 북-미 관계를 진전시킬 방안이 뚜렷이 마련된 것은 아니라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지만, 일단 교착 국면인 현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는 데에 남북 정상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 정상은 지난 5월26일 판문점에서 2차 ‘번개회담’을 통해, 당시 취소될 뻔했던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를 되살린 바 있다.
이와 함께 남북 정상은 9월, 10월에 집중된 국내외의 바쁜 일정을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9월9일은 북한이 대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돌’로, 북은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치를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이날을 평창 겨울올림픽과 함께 “민족적 대사”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 위원장으로선 9·9절을 앞두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필요하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월11~1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초청했다. 문 대통령은 애초 불참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할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9월18일부터는 미국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개막하는 등 문 대통령의 외교 일정도 빼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문 대통령은 실무진에게 ‘가을 평양 방문’이라는 판문점 선언 합의와 관련해 “가을이라는 문구상 표현에 얽매이지 말고 8월말까지로 폭을 넓혀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보협 기자, 이제훈 선임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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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국민연금 논란

시장원리 확대가 아닌 총체적 대안으로 국민 설득해야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8.08.13 09:29
지방선거 직후만 해도 ‘1당’의 시대가 오는 분위기였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해지면서 심상찮은 분위기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국정 수행의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준은 아니다. 이전의 70%대 지지율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전 정권 파행의 반사이익이 상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40%를 넘는 수준이었다는 걸 돌아보면, 비록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계층도 훼손된 국가적 기능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수치에 반영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이 제1야당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당분간 지켜볼 대목이다. 자유한국당은 파행적 국정운영의 당사자로 ‘집권 자격’의 문제를 의심받고 있다. 2020년을 경유하면서 야권 전반이 이런 저런 정계개편의 과정을 거치게 되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성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진보정당인 정의당으로 일부 지지층이 이동한 측면이 눈에 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 이후에 기존의 진보적 유권자층을 넘어 중도층 일부까지 정의당을 지지하는 흐름이 강화된 것으로도 보인다. 정책과 노선을 둘러싼 본격적 논쟁이 시작되면 조정 국면은 피할 수 없을테지만 향후의 정치 지형이 중도적 정부 여당과 진보적 야당이라는 구도로 재편된다면 한국 정치 전반에는 그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정치 세력 간 지형의 변화가 유권자 층의 변화와 일치하느냐는 두고 볼 문제다. 현대정치에서 반복되는 교훈은 정치 세력 간 관계의 변화를 유권자들의 성향 변화와 혼동할 경우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 파국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지금처럼 보수야당의 범야권과 진보-중도적인 범여권의 대결구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한국 유권자들의 이념지형이 중도 대 진보로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문재인 정권 들어 눈에 띄게 빈번해지는 ‘신호’들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암호화폐, 남북단일팀, 입시제도, 난민, 전기요금 누진제 등에 대한 논란이 그렇다. 불만에 찬 대중이 바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시장원리의 확대인 것 같다. 앞서의 쟁점에서 두드러진 요구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고 노력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보잘 것 없는 보상에 만족해야하고, 그 이상을 바라는 ‘무임승차자’는 응징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느닷없이 ‘국가주의’ 프레임을 들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접근법은 국가가 나서서 격차를 해소하는 인위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들은 민간 자율에 맡기는 ‘자율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율주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제기한 정치철학과는 관계가 없고,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정책 노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시도가 당장 어떤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적어도 분명한 건 김병준식 접근법이 어쨌든 지금의 정치적 한계 내에서 우파가 취할 수 있는 정공법에 해당할 수는 있다는 거다. 굳이 자유한국당이 내세우고 있어서 반향이 없는 것이지, 메시지 자체는 무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나 한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7월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연금 급여인상 사회적 논의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런 구도는 반복되고 있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가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과 가입 연령 상향을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반발이 커지는 걸 보면 그렇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의 안은 저출산 고령화로 연기금 고갈 시점이 애초 계산보다 빨라졌다는 평가를 근거로 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 사회가 복지제도로 감당해야 할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꼭 국민연금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이 조건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따졌을 때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도록 설계돼있다. 이런 조건을 종합하면 연기금의 고갈은 어느 시점이든 예정돼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점을 경과하기 전에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의 변경 등이 불가피하다는 게 지금까지 되풀이 되어 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도발전위의 안을 놓고 연금을 더 많이 더 오래 내라는 것이냐는 반발이 나오지만, 국민연금의 특성상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 내면 돌려받는 액수가 늘어나는 측면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그 외에 이런 저런 쟁점이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더 내고 더 받느냐, 덜 내고 덜 받느냐의 문제로 수렴된다. 만일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이 대목에서 이뤄져야 한다. 덜 내고 덜 받는 방식이 선택된다면 이를 보완할만한 다른 복지제도의 강화와 노동조건의 변화도 함께 고려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발은 이런 논의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크게 나누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연금을 꼬박꼬박 내왔고 노후보장을 기대하고 있는데 연금 지급 연령을 늦추면 상대적으로 손해라는 중장년층의 반발이다. 다른 하나는 연기금 고갈로 국민연금의 혜택을 아예 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위해서 연금을 내겠느냐는 상대적으로 젊은층의 반발이다. 이 두 가지 정서가 뒤섞여 ‘국민연금 폐지론’으로 분출되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대로 국민연금을 없애버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국민연금의 절반을 부담해 온 기업이다. 국민연금의 틀을 벗어나 각자도생하면 살아남는 것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다. 즉, 국민연금 폐지론은 시장원리 강화 요구라는 맥락으로 봐야 한다. 심지어 자영업자들은 이런 구도 안에서조차 소외된 채로 ‘국민연금 폐지론’에 심정적 동의를 표하는 상황이다.
당장 국민연금 기금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수익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일이다. 연기금 수익률 제고의 고전적 논리는 좀 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라는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란 얘긴데, 금융자본 입장에선 좋은 얘기지만 국민이 낸 연금을 투자에 함부로 동원한다는 비판과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보도하는 것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을 정파적 방식으로 소화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보수언론의 ‘공포마케팅’은 국민연금 폐지론에 불이 붙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데, 요즘에는 한 발 더 나가는 분위기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익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이것이 연기금 고갈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전주로 이전해 인력이 이탈한 게 문제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은 다수의 국민들이 현실의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시장원리 확대에서 찾고 보수세력이 이를 추동하며 정부 여당의 중도적 부위는 이에 무력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보적인 정치가 적절한 총체적 대안을 내놓고 호소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쏠릴 수 있다. 일희일비 하거나 조급해하는 게 아니라 흔들림 없는 장기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1945년 태평양전쟁, 2018년 태평양지배체제

[개벽예감 310] 1945년 태평양전쟁, 2018년 태평양지배체제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8/13 [09:2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해마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강점에서 해방된 날이다. 일왕 히로히또(裕仁)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詔書)’라는 문서를 읽어 내려간 녹음방송을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 녹음방송을 일제의 항복선언이라고 알고 있지만, ‘조서’에서 항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서’는 어려운 한자말로 작성되었을 뿐 아니라, 1940년대의 저급한 라디오방송 송출기술 때문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지 청취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 방송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조서’가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러했으니 항복이라는 단어가 ‘조서’에 들어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문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서’에는 일왕 히로히또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게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할 것을 일본제국정부에게 지시하였다고 서술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가 ‘조서’에서 언급한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뜻한다. 하지만 당시 포츠담선언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일본 국민들은 일왕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를 읽어내려간 일왕 히로히또의 녹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이 머리를 숙인 장면이다. '조서'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 '조서'에는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유일한 대목이었다. 일제가 도꾜만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해군 미주리함 함상에서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로부터 73년이 흘렀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그 전쟁을 오늘 다시 논하는 까닭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과 불행의 화근인 한반도 분단을 태평양전쟁 종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73년 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된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제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7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2월 15일부터 점령지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금하면서 그냥 전쟁이라는 말만 쓰도록 조치하였다. 얼마 뒤부터 미국은 그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 전쟁명칭은 굳어져버렸다. 

전쟁명칭에 전쟁목적이 비껴있다. 미국이 그 전쟁에서 노린 목적은 일제를 패망시키고 태평양을 장악하여 그 대양을 자국이 지배하는 ‘미국해(American Sea)’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모두 점령할 전쟁능력을 갖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야욕은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1897년에 하와이왕국을 병탄한 미국은 당시 서태평양을 지배하던 에스빠냐(스페인이라는 미국식 국호를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정식 국호를 써야 함)를 상대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Guam)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권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1941년 12월 1일 일왕 히로히또는 전시각료회의에서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에 따라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 새벽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라는 지명은 진주만이 아니라 진주항으로 번역해야 함)을 기습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지배권에 도전하였다. <요미우리신붕> 2018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의 진주항 기습공격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2월 7일 오후 8시 30분경 일본 총리 도조 히데끼(東條英機)는 “(일본은) 이미 이겼다”고 떠들어대며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망상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일본점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전략목표는 일본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미 필리핀과 괌을 점령하고 서태평양 남부해역을 장악한 미국은 일본점령을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일본점령은 1951년 9월 8일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군의 무기한 일본주둔으로 변형되었다. 태평양지배체제는 지난 73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다.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일본의 진주항 기습공격으로 선제타격을 받은 미국은 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점령을 태평양전쟁의 전략목표로 확정하였다. 그 비밀군사회담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Franklin D. Roosevelt, 루즈벨트라는 한국식 발음표기는 오류)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캐나다 퀘벡시에서 만난 퀘벡비밀군사회담(Quebec Secret Military Conference)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조섭 스탈린이라는 발음표기는 미국식으로 왜곡된 것)도 퀘벡비밀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소련군과 독일군이 격렬하게 싸운 쿠르스크전투(Battle of Kursk)가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처칠은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Mackenzie King)도 비밀회담에 참석시키려고 하였지만, 로저벌트가 반대하는 바람에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의 전략자원(석유, 철강, 식량)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쟁전략, 일본렬도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2년 8월에 공동으로 작성한 ‘일본을 타파하기 위한 평가와 계획(Appreciation and Plan for the Defeat of Japan)’이라는 제목의 전쟁계획서에는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렬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목표로 정해졌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캐나다 퀘벡시에서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 중에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이 의전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도 그 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유럽전선의 전황이 복잡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고, 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일본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전쟁목표료 정하였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당시 미영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에서는 독일이 항복하면 1년 안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 사이에서 대일전쟁전략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미국군에는 육군과 해군만 있었고, 공군은 없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에 대한 해상봉쇄와 공중폭격을 주장하면서, 중국 샹하이(上海)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 항공기지들을 점령하여 일본렬도를 폭격하기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략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그런 전략은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명손실을 불러올 뿐이라고 반대하면서, 대규모 공격력으로 일본렬도를 직접 타격하는 전략을 꺼내놓았는데, 전략논쟁은 결국 육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미국군이 일본렬도에 상륙할 수 있는 지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일본렬도 서남부에 있는 규슈(九州)남부 해안지대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렬도 중앙부에 있는,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간또(關東)지방 해안지대였다. 그래서 미영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을 두 단계에 걸쳐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먼저 규슈를 점령하여 그 지역의 항공기지들을 장악한 다음, 그 항공기지들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의 지원을 받는 25개 사단이 도꾜만(東京灣)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었다. 규슈점령작전을 올림픽작전(Operation Olympic)이라고 불렀고, 도꾜만상륙작전을 코로닛작전(Operation Coronet)이라고 불렀다. 규슈를 점령하는 올림픽작전 개시일은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되었고, 도꾜만에 상륙하는 코로닛작전 개시일은 1946년 3월 1일로 예정되었다.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5년 11월 1일과 1946년 3월 1일로 예정한 전쟁일정을 대폭 앞당겨야 하는 사정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북쪽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로저벌트, 쓰딸린, 처칠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얄타회담에서 쓰딸린은 독일이 항복하는 경우 2~3개월 뒤에 대일전쟁을 개전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유럽전선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일전쟁을 벌일 원동지역(Far East라는 지명에서 Far는 멀다는 뜻이므로 극동지역이 아니라 원동지역으로 번역해야 함)으로 이동시키려면 2~3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쓰딸린이 대일전쟁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불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일본점령이라는 전쟁목적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태평양전쟁 말기의 상황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4월 1일부터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의 한 장면이다. 미국 해병대 전투원들이 지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려면 규슈 남부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삼고 일본 혼슈를 폭격해야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오끼나와부터 먼저 점령해야 하였다. 미국군은 오끼나와전투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고, 수많은 전투장비를 잃으며 82일 동안 악전고투했다.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그 약속이행에 따라 소련군은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까지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한 미국은 규슈점령을 예정일보다 크게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미국의 욕망을 따라주지 않았다.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하려면 우선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해야 했고,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면 이오섬(硫黃島)부터 점령해야 했다. 이오섬은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km 떨어진 태평양에 떠 있는, 면적이 2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사정이 급해진 미국군은 얄타회담이 끝난 날로부터 8일이 지난 1945년 2월 19일 이오섬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0일이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그 섬에서 미국군은 고전하였다. 미국군이 병력 110,000 명과 각종 전투함선 500여 척을 동원하여 공격한 이오섬전투는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무려 36일 동안이나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군 6,821명이 전사하였고 21,865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20,129명이 전사하였고, 1,08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조급증에 사로잡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국군 B-29 폭격기 344대가 3시간 동안 도꾜에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거대한 폭탄화염 속에서 100,0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징용으로 그 지역 군수공장에 끌어간 조선인 10,000여 명도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무차별 폭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계속 버텼다. 

더욱 다급해진 미국은 오끼나와(沖繩)공격을 서둘렀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는 이오섬전투보다 훨씬 더 격렬하였다. 미국은 오끼나와전투에 육군 102,000명, 해병대 88,000명, 해군 18,000명을 동원하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군 20,195명이 전사하였고 55,162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77,166명이 전사하였고 7,0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오끼나와전투에서 미국군은 구축함 12척, 상륙함 15척, 전투기 768대, 전차 225대를 잃었다.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독일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할점령되었다. 그와 달리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지 않고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영토였던 한반도에 분할점령선으로 그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는데, 쓰딸린의 약속에 따르면 소련군은 1945년 7월 초순에, 아무리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에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소련군이 원동지역에 집결하기 전에, 그리고 여름철 일본렬도에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서둘러 규슈를 점령해야 하였으므로, 1945년 7월 초에 규슈상륙전을 예정하였다. 당시 미국의 전쟁기획자들은 규슈 남부에 있는 35개 해안구역에 상륙하여 규슈 면적의 3분의 1을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다른 한편, 당시 일본의 전쟁기획자들은 일본군이 결사항전으로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면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는 ‘게쯔고작전(決号作戰)’을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해군연합함대 참모장 우가끼 마또메(宇垣纏)가 규슈에 주둔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5항공함대는 오끼나와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는 자살공격전술로 미국군 상륙함을 격침시켰었다. 1945년 7월 당시 10,000대 이상의 각종 군용기를 보유한 일본군은 규슈해안에 접근하는 미국군 군함 400척 이상을 자살공격전술로 격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945년 3월부터 규슈의 전투부대를 대폭 증강했는데, 만주, 조선, 북부 혼슈(本州)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켜 3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14개 사단 900,000명 대병력을 배치해놓고 미국군 상륙에 대비하였다.   

일본군이 만주, 조선, 북부 혼슈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켰으니, 소련군은 만주와 조선반도를 파죽지세로 공격할 수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렬도를 거쳐 혹까이도(北海道)에 상륙하고 곧바로 북부 혼슈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매우 허술한 방어선밖에 없는 혹까이도를 1945년 8월 말까지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그 작전계획이 실행되면, 일본이 소련에게 항복하게 될 것이고, 소련군이 일본의 중심부를 점령할 판이었다. 소련군이 일본을 점령하는 것은 미국에게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핵폭탄개발사업에 참가한 기술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진행된 핵폭발시험 직후 현장에서 잔해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을 누가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였던 미국은 원래 규슈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혼슈를 폭격하고, 도꾜만에 상륙하려고 하였던 작전계획을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둘렀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원동지역에 집결한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지나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은 일본점령기회를 소련에게 빼앗길까봐 조바심하며 규슈상륙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이 규슈에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고 규슈상륙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미국은 핵폭탄개발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미국과 영국이 핵폭탄개발에 상호협력하기로 공약한 퀘벡합의(Quebec Agreement)를 채택하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끌어들인, ‘튭 얼로이즈(Tube Alloys)’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을 1941년 8월 30일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핵폭탄개발사업은 1942년 8월 13일 미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일제가 규슈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계획부터 서둘러 검토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어느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표적위원회(Target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표적위원회는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핵폭탄이 완성되면, 일본의 주요도시들을 핵폭탄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있으므로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표적위원회가 정한 핵폭탄투하대상목록에는 도꾜(東京), 요꼬하마(橫浜), 교또(京都), 히로시마(廣島), 고꾸라(小倉), 니이가다(新瀉) 등이 포함되었다.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누가 먼저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두르던 중, 1945년 7월 16일 핵폭발시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이 핵폭탄개발을 서두르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의 중심부로 남하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아직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태양의 힘을 끌어들인 무기’라고 불렀던 첫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기 6시간 전, 태평양 북서부에 있는, 괌(Gua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산섬 15개로 이루어진 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의 열세번째 섬 티니안(Tinian)에 건설된 활주로에서 B-29 폭격기 세 대가 이륙하였다. 한 대에는 핵폭탄이 실렸고, 다른 한 대에는 핵폭발측정기구들이 실렸고, 또 다른 한 대에는 관측기재와 사진촬영기가 실렸다.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4.4초 동안 낙하하다가 지상으로부터 58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원래는 B-29 폭격기 탑승자들이 고공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이오이하시(相生橋)라는 다리를 향해 낙하했어야 하는데, 바람에 밀려간 핵폭탄은 그 다리에서 240m 떨어진 도병원(島病院) 상공에서 낙하하다가 폭발하였다. 

히로시마 핵폭탄투하로 민간인 126,000여 명과 일본군 20,000여 명이 몰살당하는 핵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인 30,000여 명도 목숨을 잃었는데, 조선인 희생자들 가운데는 의친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군 중좌가 된 리우(李鍝)도 있었다. 

일제는 히로시마가 날아갔는데도 항복하지 않았고,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날, 이미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싸워온 조선의 항일전쟁은 조국해방전투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역사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전황을 알 수 있다.  

러시아-중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하바롭스크 부근에 임시군사기지가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격전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은 1942년 7월 22일 그 군사기지에서 소련원동군, 동북항일련군 중국인부대와 함께 국제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소련원동군은 3국 국제연합군을 독립88여단 또는 8461보병특별여단이라고 불렀다. 조선인으로 편성된 국제연합군 제1지대는 김일성 지대장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3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을 두만강 국경일대와 함경북도 북부지역에 출동시켜 일본군을 타격하는 습격전, 정찰활동, 지하정치활동을 계속하면서 조국해방전투를 준비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8일에도 비가 내리는 밤에 두만강을 도하하여 함경북도 웅기군 최북단에 있는 토리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중국 훈춘(琿春)현 남별리와 동흥진도 습격하였다. 이튿날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새벽,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두만강을 도하한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은덕, 새별, 남양, 회령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 11일 19시 함경북도 웅기만에 상륙하고 서수라항으로 진격하였으며, 이튿날에는 함경북도 라진만에 상륙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첫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9일 나가사끼에 두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직후 폐허로 변한 시가지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략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전투를 개시한 1945년 8월 9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였다. 원래 미국은 1945년 8월 11일 기따규슈(北九州) 후꾸오까(福岡)현 고꾸라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예정하였는데, 소련군이 만주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전황에 놀라 투하날짜를 이틀 앞당겼다. 핵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고꾸라 상공에 도착하였을 때, 지상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투하대상을 식별할 수 없었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접근하였다. 그래서 B-29 폭격기는 나가사끼로 기수를 돌렸다. 오전 11시 1분,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7초 동안 낙하하다가 원래 정했던 투하대상에서 약 3km 벗어난 정구장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나가사끼 핵폭탄투하로 약 4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약 60,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핵폭탄제조기술자로 근무했던 미국 육군 소장 케네스 니콜스(Ken D. Nichol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군의 일본상륙전에 사용하기 위해 핵폭탄 15발을 제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핵폭탄제조사업을 총지휘한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의 보좌관이었던 육군 대령 라일 씨먼(Lyle E. Seeman)은 미국군이 일본상륙전을 개시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될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이 태평양사령부를 창설한 때는 1947년 1월 1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1945년 8월 말까지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소련군은 혹까이도에 상륙했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지 않고 일본을 분할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처음부터 핵무력으로 건설되었고, 지난 73년 동안 핵무력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두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밀려왔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이 그것이다.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공격을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2017년과 2018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계속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 2018년 5월 2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4월 중국은 남중국해 난사(南沙)군도에 건설한 세 개의 인공섬에 대함순항미사일 잉지(鷹擊)-12B와 지대공미사일 훙치(紅旗)-9B를 각각 실전배치하였다고 한다. 잉지-12B의 사거리는 550km이고, 훙치-9B의 사거리는 230km다. 중국은 그 인공섬들 가운데 메이지자오(美濟礁)에는 군사통신기지와 전자전기지도 건설하였다. 남중국해 시사(西沙)군도에 있는 융싱섬(永興島)에는 중국의 정규 항공편이 개설되었고 거주민과 주둔부대를 위한 해수담수화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국은 2017년 한 해 동안 ‘항해의 자유 작전’을 벌이면서 구축함과 정찰기를 남중국해에 계속 들이밀었고, 나중에 사정이 급해지자 B-1B 전략폭격기까지 들이미는 소동을 일으켰으나, 중국의 남중국해군사기지 건설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2018년 4월 12일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항공모함, 이지스구축함, 핵추진잠수함을 비롯한 각종 전함 48척과 조기경보기, 전략폭격기, 전투기, 공중급유기를 비롯한 각종 작전기 76대와 해군병력 10,000여 명이 동원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열병식을 진행하였다.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해상열병식을 직접 사열하고 훈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4월 12일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남중국해에서 진행된 중국인민해방군 해상열병식을 사열하고 훈시하는 장면이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커다란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73년 묵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미국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을 방치하면,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무너질 판이다. 미국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에 전력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게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과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을 상대로 3자동시대결을 벌일 능력이 없다. 조선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여 양자대결을 하는 수밖에 없다.  

2017년 12월 28일 미국은 백악관이 발표한 ‘아메리카합중국의 국가안보전략’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인도양-태평양전략(Indo-Pacific Strategy)을 천명하였고, 2018년 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는 미국이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에게는 대결정책을, 조선에게는 협상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들이다.  

2018년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의 경제침략을 표적으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는데, 미중무역전쟁의 본질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미국의 패권대결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에 맞서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은 동중국해지배권을 놓고 미국을 상대로 더 심각한 패권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대결할 것이다. 미일동맹의 강공에 홀로 맞서는 중국은 조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대조선정책이 급변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고 하는데, <아사히신붕> 2018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20 조중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을 교체되면 미국군이 조선반도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 회담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는데,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이란 조선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상호협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워싱턴포스트> 2018년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미국군을 한국에 계속 배치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미국군 지휘관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설명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5월 1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존 켈리(John F. Kelly) 비서실장이 강하게 만류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켈리 비서실장 사이에서 열띤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보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때가 2018년 2월 9일에 개막된 평창동계올림픽 이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월 중에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기로 결정한 직후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조미정상회담과 주한미국군 철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대결하려면 조선과의 대결을 멈추고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기 이전의 정세를 반영한 고정관념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지금, 그런 고정관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언제가도 실현될 수 없는 조선의 국가핵무력 해체라는 뜻이 아니라,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여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명분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 명분을 언제,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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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돗물 파동, 4대강 비극의 전주곡

[산 강과 죽은 강⑭] 4대강 독립군 낙동강 탐사 취재를 마치며


등록 2018.08.13 07:53수정 2018.08.13 07:53
대구 월성교 아래로 내려가자 숨이 막혔다. 성서공단이 쏟아낸 오폐수의 악취 때문이다. 시궁창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가 뒤섞여 눈도 시큰했다. 다행히도 오폐수는 낙동강 지천인 대명천으로 곧장 흘러가진 않았다. 이 물은 차집관로에 모여 성서하수종말처리장으로 보내지는데, 1m 높이의 시멘트 차수벽을 세워 대명천의 물과 분리했다.
▲ 좌측의 성서산단의 오폐수 차집관로에 오폐수들이 가득 차 있고, 그 너머로 낙동강의 지천인 대명천이 보인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차집관로 안의 오폐수는 악취가 진동했다. 이 오폐수는 아래 이동통로를 통해 성서하수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비만 오면 이 오폐수가 차집관로를 넘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오폐수는 차수벽 위쪽에서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이곳이 넘친다면? 성서공단의 오폐수는 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지 않고 1300만 영남인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이 지난 6월 25일 찾아간 이곳, 식수원 보호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은 너무 허술했다. 

이날 4대강 독립군은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앞의 낙동강에 핀 녹조를 확인한 뒤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대명천의 월성교로 갔다. 4대강 사업 이후 매년 녹조의 농도가 짙어지는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근 과불화화합물 유출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대구 수돗물 사태는 비극의 식수 대란의 전주곡일 뿐이다. 

[녹조의 원인] 오폐수를 댐으로 가두다

성서공단오폐수 차집관로의 말단부와 연결된 대명천은 한눈에 봐도 건강한 하천의 모습은 아니었다. 바닥이 새까맣다. 그 위에 탁한 잿빛 강물이 고였다. 장화를 신고 물속을 내딛자 물컹했다. 썩은 펄을 발로 헤집으니 메탄가스를 머금은 물방울이 치솟으면서 악취가 터졌다. 군데군데 붉은 빛을 띤 물속을 들여다보니 이상한 생명체가 바글바글했다. 부영양화의 지표생물인 물벼룩이었다. 
▲ 심각히 부영양화된 대명천의 모습. 이 썩은 강물이 낙동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 잉어 한 마리가 썩은 강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심각히 부영양화된 곳에서 출연하는 지표생물체인 물벼룩류의 모습.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이곳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굳이 측정기를 들이대지 않아도 사람의 오감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최악의 수질 상태. 그 원인은 우수관로와 오수관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은 잘못된 하수관리 시스템 때문이다.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빗물(우수)이 성서공단에서 내뱉는 오폐수와 섞여 1m 시멘트 턱을 흘러넘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난 6월 대구에 10mm 가량의 비가 내렸을 때에 이곳을 확인했는데 차집관로에서 빗물과 섞인 오수가 흘러넘쳐 대명천으로 그대로 유입되고 있었다. 오폐수는 강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갔다. 이 물은 4대강 사업 때 만든 달성보로 갇혀 하원유원지 쪽 낙동강에서 보면 가축 분뇨 같은 검은 이물질이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이런 오염물질들이 달성보 바닥에 쌓인 시커먼 펄속에서 켜켜이 쌓여서 썩고 있다. 달성보는 중금속 섞인 오폐수의 저장고인 셈이다.
▲ 지난 6월 채 10밀리의 비가 오지도 않은 날 차집관로를 넘어 빗물과 뒤섞인 오수가 그대로 대명천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흘러넘친 오수는 대명천을 통해 낙동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최근 달성보에서 목격되는 '녹조라떼' 현상은 당연한 것이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녹조가 창궐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만 이럴까? 낙동강 유역의 대도시는 대개 비슷하다. 대구만해도 성서공단, 달성산단 등 5곳의 산단이 있다. 박근혜 정권 때에 달성 국가산단까지 들어섰다. 낙동강을 따라 농공공단도 부지기수이다. 곳곳에 낙동강의 수질을 위협할 지뢰밭이 산재해 있다.    

[취수원 이전] 낙동강을 포기하겠다?

대구는 부산경남 식수원의 상류에 있다. 대구시도 우오수관로의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일까? 대구시 물관리과의 한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구시는 낙동강 관리를 위한 특별한 활동은 하고 있지 않다. 대구시가지를 관통해 금호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금호강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금호강은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수질이 개선됐다. 문제가 된 성서산단의 우오수관로 분리사업은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해나갈 것이다."

그는 "현재 대구시의 우오수관로 분리율은 40%선"이라면서 "우오수관로 분리사업에는 대략 3조 원의 예산이 든다"고 밝혔다.

우오수관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급하게 추진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3조 원은 지방자치단체로서는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때에 4대강 사업에 쓴 30조 원의 1/10에 불과하다. 4대강 사업 추진본부는 약 4조 원을 들여 강물 속의 인을 제거하는 총인처리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 차집관로 안의 오폐수와 대명천의 수질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대명천이 심각히 부영양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정작 오염물질을 사전에 차단할 우오수관 분리 등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4대강 사업의 본질은 강 정비가 아니라 한반도대운하 1단계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30조 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4대강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이런 우오수관리분리사업과 같은 근본적이고 시급한 공사에 투입했더라면 낙동강 수질은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명박씨는 강의 흐름을 막아 수질을 악화시키는 대규모 댐을 세웠다. 수심을 6m로 파면서 강물을 정화시키는 모래와 자갈을 퍼냈다. 낙동강에 산재한 크고 작은 습지도 밀어버렸다. 결국 오염원을 그대로 둔 채 강물의 자연정화 시스템을 통째로 발라낸 셈이다. 매년 낙동강 녹조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시가 내놓은 해법은 취수원 이전이다. 강정고령보 바로 위에 있는 대구의 취수원을 구미산단 위쪽인 해평취수장 쪽으로 옮기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부산경남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물을 먹는 대구시가 지금의 낙동강을 포기하고 취수원을 이전하겠다는 것은 이기적 주장으로 비칠 수 있다.

그동안 대구 취수원 이전 불가 주장을 해온 계명대 생명과학부 김해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

"대구시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 대구만 깨끗한 물 먹고 부산경남은 똥물 먹으라는 소리와 같다. 대구가 취수원을 상류로 이전하는 순간 낙동강 중류의 수질은 엉망이 된다. 대구시가 책임 있는 행정을 편다면 독일처럼 대구 산단의 하류에 취수원을 둬야 한다."

▲ 대구 취수원 이전을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구미 시내 곳곳에 걸려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낙동강네트위크 임희자 공동집행위원장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동강이 그나마 지금과 같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취수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물을 먹지 않으면 영산강 꼴이 난다. 취수장을 주암호로 옮긴 뒤 영산강의 수질은 4-5급수로 전락했다. 농공용수로도 쓸 수 없다. 1300만 영남인의 식수원으로 낙동강을 달리할 식수원이 없는 상황에서 낙동강을 되살려서 영남인 전체가 안전한 수돗물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상한 대구시] 수돗물 대란까지 정치적 이용

대구시는 집요했다. 수돗물 사태도 취수원 이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4대강 독립군이 낙동강을 탐사보도할 당시 내 전화통은 불이 났다. 대구 수돗물에서 미량 검출된 과불화화합물로 촉발된 대구 수돗물 대란 사태 때문이다. 구미산단에서 과불화화합물 누출 사고가 터지자 대구시민들은 1991년 페놀 사태의 악몽을 떠올렸다.

생수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는 등 대구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공식 사과를 했지만, 해법은 10년 전부터 주장했던 취수원 이전이다. 대구시장과 같이 자유한국당 소속인 경북도지사도 가세했다. 정치적으로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소속의 구미시장을 협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과연 구미시의 하수관리도 전날 4대강 독립군이 대명천에서 목격했던 대구시의 엉성한 하수처리시스템과 비슷할까? 지난 6월 26일 구미산단에 있는 구미하수종말처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과불화화합물로 촉발된 대구 수돗물 파동의 진원지였다. 구미하수처리장의 한 담당자는 구미산단의 오폐수가 모이는 차집관로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낙동강을 끼고 들어선 구미국가산단의 전경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구미하수종말처리장의 차집관로는 처리장 안에 있다. 즉 하수들이 빗물과 분리된 관로를 따라 이곳으로 다 모이는 것이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구미산단의 우오수관로 분리율은 99%이다. 빗물이 모이는 우수관로 말단에 완충저류시설까지 있다. 오염물질이 많을 수밖에 없는 5mm까지의 초기 우수는 이곳에서 차집해서 처리한다. 하지만 폐수의 중금속이나 화학물질은 이곳에서 처리할 수 없다. 이곳은 미생물 재제를 이용해서 BOD 등 6개 항목을 관리한다. 하수를 2급수 정도로 처리해서 낙동강으로 내보내고 있다." 

대구시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허점도 있었다. 그는 "산업체에서 폐수를 완벽하게 처리해서 내보내야 한다"면서 "하수종말처리장은 폐수를 처리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폐수 처리는 산업체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기에 관리감독이 중요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잘 정비되어 있을까? 구미산단은 폐수를 방출하는 양을 기준을 1~5종 사업장으로 나뉘어 있다. 폐수를 많이 방출하는 규모가 큰 1~2종 공장 73곳은 경상북도가 관리하고, 나머지 3~5종 공장 600여 개는 구미시가 관리한다.

하지만 이 업무를 담당하는 경상북도 환경방재과 공무원은 5명에 불과하다. 1, 2종 업체를 관리하는 경상북도의 한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명이 돌아가면서 업체를 관리한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업체를 방문해서 현황을 점검한다. 수질 감시 항목표가 있는데 이를 중점적으로 체크한다. 가끔은 불시에 현장 점검을 실시한다."

불시에 현장을 덮치고 1년에 한 번 정도의 점검으로 제대로 된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폐수 처리를 사실상 전적으로 업체의 자발성에 맡기고 있는 셈이다. 구미시의 산업체 하수 처리 관리감독 시스템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우오수관조차 분리하지 않고 배출하는 대구시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았다.   

[달성보 녹조] 치명적인 맹독 함유

4대강 독립군은 지난 6월 26일 구미산단의 하수처리 시설을 살펴보기 전에 낙동강 달성보 위 선착장을 찾았다. 대명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지 않았을 때였다.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져서 녹조가 창궐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낙동강엔 녹조띠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악취도 올라왔다.
▲ 달성보 위 낙동강 바닥에서 퍼올린 썩은 펄과 그 안에서 나온 수질 최악의 지표생물인 붉은깔따구의 모습.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가슴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강 속으로 들어갔다. 콘크리트 포장이 끝난 곳에 이르자 갑자기 발이 쑥 들어간다. 펄이었다. 물컹물컹한 펄이 발아래 촉감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삽으로 펄을 떠서 물가로 나오니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 최악 수질 4급수 지표종인 붉은 깔따구 유충과 실지렁이가 꿈틀거렸다.

환경부는 "4급수의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고, 접촉하면 피부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녹조는 독이다. 대구시의 허술한 오폐수 정화 시스템 등으로 인해 낙동강에 창궐하는 남조류 마이크로시스티스는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맹독성 물질을 품고 있다. 지난 2016년에 방한했던 일본 구마모토보건대 다카하시 토루 교수는 "낙동강의 조류독소는 청산가리 100배 수준의 맹독이고, 물고기 체내와 녹조 물로 농사지은 농작물에도 농축된다"고 말했다. 

일본 신슈대학의 박호동 교수와 함께 조사 분석한 낙동강 도동서원의 녹조 시료에선 무려 456ppb나 되는 조류독소가 검출됐다. 세계보건기구의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조류독소의 먹는 물 음용기준치가 1ppb다. 기준치의 456배나 되는 맹독이 우리가 마시는 낙동강 물 속에 들어 있다. 

기준치에 한참 밑도는 미량의 과불화화합물이 검출된 것에 대해 구미시를 공격한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는 대구 취수원에서 독극물에 가까운 맹독성 조류가 대량으로 창궐하는 녹조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국제적인 먹는 물 기준으로만 봐도 과불화화합물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녹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게다가 대구시는 우오수관 분리 등 녹조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다. 과불화화합물 사태에 대해 구미시를 공격했던 대구시는 녹조가 창궐할 때마다 전화를 걸어 대책을 물으면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조류가 덜한 3-4미터 깊은 곳에서 취수를 하고 고도정수처리를 하고 있으니 괜찮다."
▲ 달성보에 핀 짙은 녹조라떼. 조류독소를 포함하고 있는 남조류가 대량으로 증식을 하고 있다. 독조라떼라 불러야 한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리 고도정수처리를 해도 100% 완벽한 것은 없다. 독소의 일부를 거르지 못할 가능성은 0%가 아니다. 또 조류의 농도가 높아지면 이를 해결하려고 염소 투입량을 늘린다. 이는 물속의 유기물과 결합해 총트리할로메탄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든다. 물론 기준치 이내로 관리하고 있지만 조류농도가 높아질수록 발암물질의 양도 증가한다.

결국 낙동강에 설치한 8개의 '4대강 댐'을 그대로 둔다면 악순환의 반복이다. 대안은 영남인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을 살리는 방법밖에 없다.

[제언] 낙동강을 살리는 길

3박 4일간의 낙동강 탐사 취재를 마친 뒤의 소감을 요악하면 세가지다. 첫째, 댐의 수문을 모두 열어서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 수문만 연다면 강물은 스스로 물을 정화하는 모래와 자갈을 낙동강에 실어 나를 것이다.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렸던 습지도 다시 형성될 것이다. 

이번 탐사 취재 때 4대강 독립군이 대명천에서 목격한 대구시의 우오수 처리방식은 사실상 '오폐수 무단 방류 시스템'이다. 식수원인 낙동강에 인접한 산업단지를 철저히 관리하고, 최근 환경부가 도입하려는 폐수 무방류 시스템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폐수를 무한 반복해 재사용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 낙동강 협곡에 들어선 영풍제련소. 1~3공장이 연속해서 2~3킬로미터에 걸쳐 들어서 있다. 이로 인해 낙동강의 수질이 오염되고, 주변 산지가 산성화되어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마지막으로 낙동강 최상류에 있는 영풍제련소와 같은 기업도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 영풍제련소는 낙동강 상류의 원수를 비소, 카드뮴, 납, 아연 등 각종 중금속으로 오염시키고 있다(관련 기사 : 낙동강 협곡을 감싼 수상한 화학약품 냄새).

4대강 독립군 탐사취재를 마친 뒤 낙동강에서 달성보에서 만난 임희자 낙동강네트워크 공동집행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줄 것으로 희망했다. 국민의 안전한 물보다 시급한 현안은 없다. 하지만 경상도 단체장과 지역민 일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시급한 과제를 뒤로 미루는 것 같다. 국민의 목숨보다 더 중한 가치는 없다. 문재인 촛불 정부는 일부 반대가 있더라도 시급하고 근본적인 낙동강 수질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낙동강은 1300만 국민의 목숨줄이다."

111년 만의 폭염이라고 언론이 매일 떠들고 있는 요즘, 나는 거의 매일 낙동강에 나간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죽은 강'이다. 4대강 사업에 부역했던 자들이 아직도 요직을 꿰차고 있다. 지난 정권 때에 이들은 '국책 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농민과 어민을 4대강에서 쫓아냈던 자들이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도 4대강 사업에 적극 찬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농민들을 부추기며 '농업용수 부족' 등을 내세워 간혹 열렸던 수문조차 닫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낙동강을 걸으며 절망한다. 금강과 영산강은 수문을 열어 살아나고 있지만, 죽은 낙동강을 '산 강'으로 복원하는 길은 아직도 멀다. 녹조 곤죽처럼 질식해가는 낙동강을 보면 아직도 수문을 계속 닫아거는 4대강 부역자들의 손이 그 속에 꽈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아 분노가 치민다.    
▲ 대구취수장이 있는 강정고령보 상류의 칠곡보에도 짙은 녹조라떼가 폈다. 칠곡보 위에 구미광역취수장이 있다. 조류독소 문제에 있어서 구미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4대강 현장탐사-영화 만들기에 후원을 
정수근 기자를 비롯한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은 지난 6월21일부터 금강과 낙동강을 탐사 취재했습니다. 또 오마이뉴스는 4대강 사업을 소재로 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 가입으로 정수근 기자와 4대강 독립군을 응원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기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활동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낙동강을 다니며 4대강사업의 밑낯을 고발해왔습니다. 4대강 재자연화는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