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이재만·안봉근, 국정원 특활비 받은 혐의 긴급체포

이재만·안봉근, 국정원 특활비 받은 혐의 긴급체포

등록 :2017-10-31 09:34수정 :2017-10-31 10:44


이병기 전 비서실장, 남재준·이병호 전 국정원장
조윤선 전 정무수석 자택도 압수수색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3인방' 중 한 명인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이 긴급체포돼 3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3인방' 중 한 명인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이 긴급체포돼 3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검찰이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국가정보원 간부들로부터 뒷돈을 상납받은 혐의를 포착해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양석조)는 31일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 간부들이 특수활동비 가운데 수십억원을 청와대 쪽에 상납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안봉근(51)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과 이재만(51)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체포했다. 또 이병기(7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자택 등 10여곳에 대한 압수수색도 실시했다. 남재준(73)·이병호(77) 전 국정원장, 조윤선(51)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자택도 이번 압수수색에 포함됐다.
검찰은 최근 화이트 리스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간부들로부터 안 전 비서관과 이 전 비서관에게 뒷돈을 상납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수사를 하던 중 단서를 포착해 수사에 착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향후 검찰은 청와대로 흘러들어 간 돈의 사용처에 수사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이 돈이 청와대를 거쳐 선거자금이나 정치자금 등으로 유용됐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박근혜(65) 전 대통령에 대한 추가 수사 및 기소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양진 서영지 기자 ky0295@hani.co.kr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3인방‘ 중 한명인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이 긴급체포돼 3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3인방‘ 중 한명인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이 긴급체포돼 3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1)

학살과 전쟁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0.30 15:12
  • 댓글 0
어렸을 적 영화를 통해 접한 미국은 언제나 세계평화의 수호자였다. 소련의 음모를 아슬아슬하게 저지하고, 궤변이나 늘어놓는 테러리스트들을 보기 좋게 제압했으며 심지어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구했다. 그리고 간혹 미국 대통령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전 인류를 위함’이라며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하기야 대통령이 람보가 돼서 테러리스트를 모두 제압하는 판국에 핵미사일 버튼이야 현실 ‘고증’이 매우 충실한 편이었다.
아무리 영화라도 자신을 ‘세계평화의 수호자’, ‘인류의 히어로’로 자처하는 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도취지만 문제는 이런 유아적 자기도취가 현실에 반영됐을 때다. 특히나 이 유아적 주체가 14.58조 달러의 GDP를 자랑하고, 전 세계 군비의 절반 가까이 지출하며(6261억 달러), 전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가진 국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독일의 ‘천년 제국’ 등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제국은 이와 비슷한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
이번에 읽게 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는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세계평화의 수호자 미국’과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과연 미국은 인류의 히어로인가?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여느 제국들과 다름없는 제국에 불과한가?
미국의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를 읽고, 1장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2장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3장 미 제국의 중동·아프리카 침탈사, 4장 미 제국의 동남아·태평양 침탈사까지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연재한다.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고, 추가로 인용의 경우는 겹따옴표(“ ”)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1)학살과 전쟁
“하루는 3,000명에 달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고, 여자는 강간한 뒤 죽였다. 달아나는 아이는 창을 던져 죽이거나 붙잡아 사지를 잘라 죽이고, 일부는 끓는 비누에 삶아 죽였다. 또한, 개를 풀어 그들을 돼지처럼 몰아 죽이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낚아채 그들이 끌고 온 개에게 먹이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한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거나 목을 베는 내기를 하고, 바위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22)
-1552년 라스카사스 신부 <원주민 사회의 파괴에 대한 소고>-
1492년 10월12일 콜럼버스 일행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19) 그들의 상륙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유럽인들에게는 마치 유토피아의 현존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개척하고 정복했고 그 결과 번성했다. 신이 부여한 운명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가 마음껏 실현되는 공간,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는 법이라 유토피아의 발견은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살던 약 1억 명의 원주민들은 급격한 절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일례로 콜럼버스가 “상륙할 당시 25만 명이던 카리브해 아이티섬의 타이노족은 불과 50년 만에 5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23) 집단적인 원주민 학살이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다.
▲ Massacre of Indian women and children in Idaho(1868)
원주민 말살 ‘신의 이름으로’
1991년 1월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 아버지 부시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95p) 그로부터 12년 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하기 직전 국가 각료회의에서 마찬가지로 기도했다. 어찌 보면 집안 내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침략과 학살에서 ‘신’을 찾는 것은 원주민 학살 때부터 대대로 이어진 미국의 전통이었다.
- 피쿼트족 대학살 : “1637년 5월 영국군과 청교도 이주민들은 한밤중에 피쿼트족 마을을 습격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500명을 몰살하고 생포한 자들은 노예로 팔았다.” 당시 지휘관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이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의 몸은 불꽃 속에 타오르고, 피는 흘러 작은 내를 이루었다. 불꽃이 삼키는 그 광경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으며, 더욱 끔찍스러운 것은 시신이 타는 냄새였다. 그러나 승리는 달콤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그리도 놀라운 일을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27)
- 샌드크리크 사건 : 1864년 11월 콜로라도 지역 주둔군은 샤이언족과 아라파호족을 학살한다. 당시 로키산맥 주변의 금광을 찾아 몰려든 백인들을 위한 일이었다. 학살을 지휘한 콜로라도 주둔군 사령관 존 쉬빙턴 대령은 “하느님이 세운 나라에서 인디언을 죽이는 일은 정당하며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원주민 남녀노소 약 600여 명을 도륙했다.(29)
이 외에도 원주민 말살 정책은 다양했다. 원주민들의 전통신앙을 금하고 불응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원주민의 언어를 금하고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강제이주법(lndian Removal Act)을 근거로 원주민을 백인 주거지에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3만의 체로키 인디언 중 8000여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1만 명의 나바호족도 추위와 질병으로 1천여 명이 사망했다.(31)
이러한 원주민 말살 정책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었다. 이 정신은 이후에도 이어져 중남미에서, 중동에서, 아시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꾸준히 반복되었다.
▲The Delaware Regiment at the Battle of Long Island(1776)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혹자는 이렇게 절규하기도 한다. 미국은 본래 위대한 나라였는데 후대가 그것을 잘 계승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한 정신은 미국의 위대함의 뿌리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은 그 위대한 정신을 투쟁으로 실현한 당당한 건국신화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와 평등의 수호자이며, 이점에서 미국은 이전의 제국과 다르다. 미국의 건국신화는 그간 미국인들 스스로에게 큰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자긍심은 자긍심으로 끝나야지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자기도취로 전락해선 곤란하다. 이 점에서 우린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독립전쟁 : 백인 이주민들은 본국(영국) 정부의 보호정책 덕분에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국 정부가 농산물을 수매해주고, 프랑스 등 다른 수입 농산물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 과정에서 이주민들이 본국 국민보다 소득이 더 높아졌다. 여기에 식민지 확보에서 소모한 전비 보충이 겹치면서 영국 정부는 세금을 높이게 된다. 그러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대규모 선박 소유업자이기도 한 존 핸콕은 배에 가득 싣고 온 와인을 밀반입한다. 1773년에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775년 벙커힐 전투로부터 9년간 이어진 전쟁은 영국의 적대행위 포기선언으로 마치게 된다.(38~40)
미국은 독립전쟁을 부당한 대영제국에 맞선 해방전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대영제국에 맞선 군중들이 본래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이라면 모를까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임을 생각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차지하려고 자국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린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41)
- 남북전쟁 : 부당한 중앙정부에 맞섰다는 건국이념은 지방정부들을 더욱 강력하게 했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남북은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다. 북쪽은 공업 우선 정책과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남쪽은 자유무역과 노예제를 찬성했다. 링컨은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내전을 각오하면서까지 관세장벽을 높였다. 이에 맞서 1861년 2월7일 연방을 탈퇴한 7개 주는 남부 동맹을 출범한다. 1861년 7월 북군의 침공으로 62만 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부상자를 낸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이 길어지자 링컨은 1863년 1월1일 북미 전역의 흑인 노예를 해방한다고 발표한다.(46~54)
노예해방선언과는 별개로 링컨 개인은 인종적, 계급적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휴머니스트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해방선언 후 북군이 조직한 20만 명의 흑인부대는 백인부대의 총알받이로 취급된다. 백인 남성은 300달러를 지불할 경우 징집을 면제해주는 법안도 공포한다.(55) 이전 상원선거에서 링컨은 “나는 모든 백인과 마찬가지로 백인종이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데 찬성합니다.”(51)라고 말했는데, 백인종 안에서도 부자들이 좀 더 우월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걸 깜빡한 듯하다.
말하자면,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모두 해방과 인권을 위한 숭고한 전쟁이 아니라 백인 상류층들의 “권력 쟁탈전”(57)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원주민 학살이 ‘신의 이름’을 빌렸지만, 결코 숭고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학살부터 전쟁까지 미 제국은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제국에 의해 흘릴 피에 비하면 글자 그대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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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 내내…국방장관들 ‘댓글공작’ 승인·주도 드러났다

[단독]MB 정부 내내…국방장관들 ‘댓글공작’ 승인·주도 드러났다

정제혁 기자 jhjung@kyunghyang.com
입력 : 2017.10.31 06:00:03 수정 : 2017.10.31 06:02:18

ㆍ2008년 ‘광우병 촛불’ 때 기무사 앞세워 불법 활동 시작
ㆍ2009년 안보 이슈 본격 활동…2010년 사이버사로 이관
[단독]MB 정부 내내…국방장관들 ‘댓글공작’ 승인·주도 드러났다
‘이명박(MB) 정부 청와대’가 군사정권 시절 민간인 사찰과 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친 국군 기무사령부(옛 보안사령부)를 국내 정치에 개입시킨 사실이 확인돼 파문이 커지고 있다.
기무사는 청와대 지시로 ‘국정운영 관련 일일 사이버 검색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한 이래 전방위 댓글 공작을 벌이는 등 이명박 정부 내내 정치에 개입했다. 기무사와 사이버방위사령부 불법 정치활동 배후는 청와대였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석구 기무사령관(왼쪽)이 30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군사법원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석구 기무사령관(왼쪽)이 30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군사법원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 2008년, 청와대 지시 정치 개입 
30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확인한 기무사 자체 진상조사 보고 문건(2017년 10월9일) 내용을 보면, 이명박 정부 때 기무사의 정치 개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기무사가 청와대 지시로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2008년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린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24일 청와대에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을 신설했다.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은 대통령 직속 ‘청와대 사이버 컨트롤타워’의 한 축으로, ‘인터넷 토론방 내 악성 게시물 대응 및 정부 시책 옹호글 게재’ 등을 주요 업무로 하는 ‘국정 관련 인터넷공간 통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다.
그 뒤 청와대는 7월18일 기무사에 “국정운영 관련 사이버 검색 결과 주기적 보고”를 지시했다.
기무사는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 승인을 얻어 “반정부·좌익세력 활동, 국방·안보 주요 이슈 등이 포함된 ‘일일 사이버 검색 결과’를 보고”했다. 
■ 2009년, 본격적인 댓글 공작 
둘째 시기는 기무사가 본격적인 댓글 공작을 벌인 2009년이다. 문건에는 “안보 이슈 적시 대응”을 명분으로 “2처에 사이버분석과 신설 및 예하 부대원 사이버 대응 요원으로 운영”이라고 돼 있다.
사이버분석과는 공개 첩보를 수집하는 검색계,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분석계, 퍼나르기 등 댓글 활동을 하는 대응계 등 3개 계로 편성됐다. 이와 동시에 예하 부대에 250~300명 규모의 사이버 대응 요원을 운영했다. “사령부(대응계)에서 지정한 공개 자료를 퍼나르거나 지지 댓글 작성”이 업무였다. 이 조직의 명칭은 ‘스파르타’로 알려졌다. 문건은 “‘스파르타’는 공식 조직이 아니라 심리전에서 승리하자는 취지로 사용된 용어”라고 했다. 
이 기간에 기무사는 용산 참사 때 경찰 지지 댓글(2월), 전방부대 근무 장병 주소 이전 헌법소원 지지 활동(2월), 북 광명성 발사(4월)와 핵실험(5월) 시 북 위협 전파 및 비난 사설 게재 등의 활동을 벌였다. 
■ 2010년 이후, 정치 개입 
셋째 시기는 사이버방위사령부가 창설된 2010년 1월 이후다. 기무사가 수행하던 사이버심리전 업무는 사이버방위사령부로 이관됐고, 기무사 관련 조직은 축소됐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대응계는 사이버분석과를 축소한 사이버안전과에 편입돼 천안함 사건, 북한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된 댓글 활동을 벌였다. 
기무사는 2010년 12월 댓글 부대인 사이버안전과 대응계를 보안계(군기 유출 차단), 해외계(해외홍보), 대북계(방첩근원 발굴, 장병 오염 방지) 등 3개 계로 구성된 사이버첩보분석과로 확대 개편했다. 
이 중 청와대의 ‘G20 해외홍보를 위한 군 어학자원 활용방안’ 지시에 따라 군 어학자원 24명을 선발해 2010년 1월부터 운영한 G20 해외홍보팀(홍보계)은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가 끝났음에도, 청와대 요청으로 이명박 정부 임기말인 2012년 3월까지 운영됐다. 대북계의 경우 2011~2012년 “SNS상 북·종북세력 활동 양상 및 영향력 분석 등 대응방안 제시” 활동을 했다고 문건은 밝혔다.

기무사의 댓글 공작은 윗선에 보고됐다. 문건은 “동 기간 중 통수권 보필과 주요 안보 이슈 관련 댓글 활동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로 사안에 따라 내부 보고 또는 상부 보고”라고 밝혔다. 

첫째 시기는 기무사가 청와대 지시로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2008년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린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24일 청와대에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을 신설했다.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은 대통령 직속 ‘청와대 사이버 컨트롤타워’의 한 축으로, ‘인터넷 토론방 내 악성 게시물 대응 및 정부 시책 옹호글 게재’ 등을 주요 업무로 하는 ‘국정 관련 인터넷공간 통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다.
그 뒤 청와대는 7월18일 기무사에 “국정운영 관련 사이버 검색 결과 주기적 보고”를 지시했다.
기무사는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 승인을 얻어 “반정부·좌익세력 활동, 국방·안보 주요 이슈 등이 포함된 ‘일일 사이버 검색 결과’를 보고”했다. 
■ 2009년, 본격적인 댓글 공작 
둘째 시기는 기무사가 본격적인 댓글 공작을 벌인 2009년이다. 문건에는 “안보 이슈 적시 대응”을 명분으로 “2처에 사이버분석과 신설 및 예하 부대원 사이버 대응 요원으로 운영”이라고 돼 있다.
사이버분석과는 공개 첩보를 수집하는 검색계,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분석계, 퍼나르기 등 댓글 활동을 하는 대응계 등 3개 계로 편성됐다. 이와 동시에 예하 부대에 250~300명 규모의 사이버 대응 요원을 운영했다. “사령부(대응계)에서 지정한 공개 자료를 퍼나르거나 지지 댓글 작성”이 업무였다. 이 조직의 명칭은 ‘스파르타’로 알려졌다. 문건은 “‘스파르타’는 공식 조직이 아니라 심리전에서 승리하자는 취지로 사용된 용어”라고 했다. 
이 기간에 기무사는 용산 참사 때 경찰 지지 댓글(2월), 전방부대 근무 장병 주소 이전 헌법소원 지지 활동(2월), 북 광명성 발사(4월)와 핵실험(5월) 시 북 위협 전파 및 비난 사설 게재 등의 활동을 벌였다. 
■ 2010년 이후, 정치 개입 
셋째 시기는 사이버방위사령부가 창설된 2010년 1월 이후다. 기무사가 수행하던 사이버심리전 업무는 사이버방위사령부로 이관됐고, 기무사 관련 조직은 축소됐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대응계는 사이버분석과를 축소한 사이버안전과에 편입돼 천안함 사건, 북한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된 댓글 활동을 벌였다. 
기무사는 2010년 12월 댓글 부대인 사이버안전과 대응계를 보안계(군기 유출 차단), 해외계(해외홍보), 대북계(방첩근원 발굴, 장병 오염 방지) 등 3개 계로 구성된 사이버첩보분석과로 확대 개편했다. 
이 중 청와대의 ‘G20 해외홍보를 위한 군 어학자원 활용방안’ 지시에 따라 군 어학자원 24명을 선발해 2010년 1월부터 운영한 G20 해외홍보팀(홍보계)은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가 끝났음에도, 청와대 요청으로 이명박 정부 임기말인 2012년 3월까지 운영됐다. 대북계의 경우 2011~2012년 “SNS상 북·종북세력 활동 양상 및 영향력 분석 등 대응방안 제시” 활동을 했다고 문건은 밝혔다.

기무사의 댓글 공작은 윗선에 보고됐다. 문건은 “동 기간 중 통수권 보필과 주요 안보 이슈 관련 댓글 활동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로 사안에 따라 내부 보고 또는 상부 보고”라고 밝혔다. 

첫째 시기는 기무사가 청와대 지시로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2008년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린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24일 청와대에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을 신설했다. 홍보기획관실과 국민소통비서관실은 대통령 직속 ‘청와대 사이버 컨트롤타워’의 한 축으로, ‘인터넷 토론방 내 악성 게시물 대응 및 정부 시책 옹호글 게재’ 등을 주요 업무로 하는 ‘국정 관련 인터넷공간 통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다.
그 뒤 청와대는 7월18일 기무사에 “국정운영 관련 사이버 검색 결과 주기적 보고”를 지시했다.
기무사는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 승인을 얻어 “반정부·좌익세력 활동, 국방·안보 주요 이슈 등이 포함된 ‘일일 사이버 검색 결과’를 보고”했다. 
■ 2009년, 본격적인 댓글 공작 
둘째 시기는 기무사가 본격적인 댓글 공작을 벌인 2009년이다. 문건에는 “안보 이슈 적시 대응”을 명분으로 “2처에 사이버분석과 신설 및 예하 부대원 사이버 대응 요원으로 운영”이라고 돼 있다.
사이버분석과는 공개 첩보를 수집하는 검색계,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분석계, 퍼나르기 등 댓글 활동을 하는 대응계 등 3개 계로 편성됐다. 이와 동시에 예하 부대에 250~300명 규모의 사이버 대응 요원을 운영했다. “사령부(대응계)에서 지정한 공개 자료를 퍼나르거나 지지 댓글 작성”이 업무였다. 이 조직의 명칭은 ‘스파르타’로 알려졌다. 문건은 “‘스파르타’는 공식 조직이 아니라 심리전에서 승리하자는 취지로 사용된 용어”라고 했다. 
이 기간에 기무사는 용산 참사 때 경찰 지지 댓글(2월), 전방부대 근무 장병 주소 이전 헌법소원 지지 활동(2월), 북 광명성 발사(4월)와 핵실험(5월) 시 북 위협 전파 및 비난 사설 게재 등의 활동을 벌였다. 
■ 2010년 이후, 정치 개입 
셋째 시기는 사이버방위사령부가 창설된 2010년 1월 이후다. 기무사가 수행하던 사이버심리전 업무는 사이버방위사령부로 이관됐고, 기무사 관련 조직은 축소됐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대응계는 사이버분석과를 축소한 사이버안전과에 편입돼 천안함 사건, 북한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된 댓글 활동을 벌였다. 
기무사는 2010년 12월 댓글 부대인 사이버안전과 대응계를 보안계(군기 유출 차단), 해외계(해외홍보), 대북계(방첩근원 발굴, 장병 오염 방지) 등 3개 계로 구성된 사이버첩보분석과로 확대 개편했다. 
이 중 청와대의 ‘G20 해외홍보를 위한 군 어학자원 활용방안’ 지시에 따라 군 어학자원 24명을 선발해 2010년 1월부터 운영한 G20 해외홍보팀(홍보계)은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가 끝났음에도, 청와대 요청으로 이명박 정부 임기말인 2012년 3월까지 운영됐다. 대북계의 경우 2011~2012년 “SNS상 북·종북세력 활동 양상 및 영향력 분석 등 대응방안 제시” 활동을 했다고 문건은 밝혔다.

기무사의 댓글 공작은 윗선에 보고됐다. 문건은 “동 기간 중 통수권 보필과 주요 안보 이슈 관련 댓글 활동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로 사안에 따라 내부 보고 또는 상부 보고”라고 밝혔다. 

북, “미제 쓸어버릴 것” 경고

북, “미제 쓸어버릴 것” 경고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7/10/31 [06: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은 미국을 쓸어 버리겠다고 강경 발언을 이어 갔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북이 미국과의 강경 대치를 늦추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전민족비상대책위원회’ 명의로 미국을 쓸어버리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고발장을 냈다.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북침핵전쟁연습반대 전민족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30일 조선반도를 핵전쟁마당으로 전락시켜온 미제의 만고죄행을 고발한다는 공동고발장에서 지금 조선반도에는 미제의 극단한 반공화국전쟁광란으로 말미암아 당장 핵전쟁이 터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정세가 조성 되고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통해 밝힌 고발장은 내외신들은 냉전이 절정에 달하였던 1962년의 카리브해 위기이래 최대위기핵전쟁의 시계바늘이 막바지 순간에 다가서고 있다고 커다란 우려를 표시하고 있으며 세계의 이목은 일촉즉발의 핵전쟁위기가 감돌고 있는 조선반도에 집중되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어 조선반도가 오늘과 같이 세계최대의 열점지역으로 되고 있는 것은 결코 미국이 떠들어대고 있는 북 핵위협 때문이 아니며 그 근원은 전적으로 미제의 극악무도한 대조선 침략정책과 핵전쟁도발책동에 있다.”며 그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단체는 오늘 우리 공화국은 다종화된 핵무기들과 지구상의 절대병기로 불리는 초강력수소탄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태평양작전지대의 미제침략군기지들은 물론 미국본토를 초토화 할 수 있는 강 위력한 중장거리 전략 탄도로켓들과 전략잠수함탄도탄대륙간 탄도 로켓까지 보유한 세계적인 핵 강국군사강국으로 위용 떨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발장은 남측을 향해 남조선당국이 미국의 핵전쟁광란의 희생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제라도 침략적인 외세와 친미굴종의식과 결별하고 민족공조의 길로 나와야 한다.”고 충언했다.

아울러 남조선의 각계층과 국제사회는 조선반도핵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알고 미국의 위험천만한 핵전쟁책동을 단호히 반대 배격해 나서야 한다.”며 일부 나라들이 정의의 우리 핵과 침략적인 미국의 핵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 무슨 쌍중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조선반도핵문제의 본질과 인과관계자위의 핵과 폭제의 핵을 가려보지 않는 무책임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당당한 핵보유국인 우리 공화국의 전략적 지위를 깨끗이 인정하고 부질없는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을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미제가 핵무기로 우리 민족을 위협공갈하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으며 민족공동의 전략자산평화와 통일번영의 보검인 우리의 핵 억제력은 미국의 침략과 핵전쟁책동이 완전종식 될 때까지 더욱 억척같이 다져지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발장은 끝으로 전체 조선민족은 조선반도를 핵전쟁마당으로 전락시켜온 미제의 만고죄행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철천지원수백년숙적 미제를 쓸어버리고 겨레의 삶의 터전이고 보금자리인 조선반도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한편 조.미 대결이 첨예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동북아 순방이 조만간 이어지게 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이루어질지 더욱 복잡하게 꼬일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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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시간'

조작된 '대통령 최초 보고' 시각
세월호 침몰 시작 시각도 수상하다

17.10.30 20:05l최종 업데이트 17.10.31 09:43l




4.16세월호참사국민조사위원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연구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국민조사위는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세월호 팩트리포트'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팩트리포트⑤] 세월호 참사 1보 전한 앵커의 '눈물'...

'10시 최초 보고'라는 것은 의심받고 공격되어야 하는 대상이지 결코 명백하고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 여러 면에서 의심스러운 '10시 최초 보고'를 청와대가 주장하는 데는, 대통령이 최초 보고받은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가 침몰해 버렸기 때문에 손쓸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대통령의 최초 인지 시점을 최대한 늦추어 놓았다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 <세월호참사 팩트체크>, 190쪽

이미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에서는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10시에 최초 보고받았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이야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0월 12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참사 당일 대통령에게 보고된 최초 상황보고서의 시간이 원래는 오전 9시 30분인데 사후에 오전 10시로 조작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세월호 참사에는 여러 가지 '시간'들이 등장한다. 검찰 공소장에 적혀 있는 사고 시각 8시 48분, 단원고 학생의 최초 119 신고시각 8시 52분, 1등 항해사가 제주 VTS에 최초로 신고한 시각 8시 55분, 최초 언론보도 시각 9시 19분, 현장 출동세력 가운데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초계기 CN-235(B703)의 도착 시각 9시 26분, 해경 헬기 B511호의 도착 시각 9시 27분, 현장 지휘함의 역할을 맡았다는 해경 경비정 P123정의 도착시각 9시 35분, 세월호가 완전침몰했음을 알리는 EPIRB신호 발신시각 10시 30분, 최초 전원구조 오보 11시 1분 등.   

이 많은 시간들이 모두 진실일까? 일단 대통령 최초 보고시점은 10시가 아니라 9시 30분이었음을 말해주는 자료가 발견되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대통령 최초 보고시점을 9시 30분에서 10시로 '조작'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시간들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역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세월호참사에서 이야기되는 대부분의 시간들은 팩트로 확정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 또는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들이다. 완전한 진상규명 이전까지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래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있어 중요한 몇 가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오전 9시 19분
: 언론의 최초 보도시각 
: 청와대, 국정원, 안행부의 최초 인지 시각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19분, YTN은 정치 관련 보도를 하던 중 세월호 관련 최초 속보를 자막으로 내보낸다. "진도부근 해상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최초로 세월호 관련 보도를 접하는 순간이다(여전히 오전 7시 20분 KBS 속보 자막 의혹도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최초 보도라고 '주장되는' 순간이다).
 YTN 최초 자막 보도 캡처 사진
▲  YTN 최초 자막 보도 캡처 사진
ⓒ YTN

YTN이 최초로 보도했다는 9시 19분은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청와대, 국가정보원, 안전행정부가 모두 이 보도를 보고 세월호참사를 최초 인지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쟁쟁한' 국가기관들이 한 목소리로 9시 19분에 최초 인지했다는 주장은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단원고 학생이 기울어진 세월호에서 119(전라남도 소방본부 119종합상황실)에 전화한 시각이 8시 52분이고, 이 전화를 목포해경에 연결한 시각이 8시 54분이다. 세월호 선원이 제주 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 신고한 시각은 8시 55분이고, 세월호의 한 승객이 112(전남경찰청 112종합상황실)에 신고한 시각은 8시 56분이다. 이렇듯 8시 50분대에 소방, 해경, VTS, 경찰이 최초 인지를 한 것이다.

계속해서 목포해경은 9시 2분경 상황보고서 제1보를 발신하고, 9시 3분경 전남 119상황실은 핫라인을 이용하여 3함대 지휘통제실에 상황을 전파한다. 군이 최초 인지를 한 것이다. 9시 5분에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보고를 받고, 9시 10분 해경에 중앙구조본부가 구성된다. 9시 15분 해작사(해군작전사령부)를 통해 합참(합동참모본부)과 국방부가 상황을 접수한다. 

정리하면 9시 15분까지 소방, 경찰(이상 안행부 소속), 해경, VTS(이상 해수부 소속), 3함대, 해작사, 합참, 그리고 국방부가 모두 세월호참사를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행부 소속기관인 119가 최초로 참사를 인지하였고, 역시 안행부 소속 기관인 경찰도 인지를 하였는데, 안행부는 TV에서 보도하기 전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소속 기관인 119, 112로 신고가 빗발치고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TV 보고 최초 인지했다는 대한민국의 재난관리 책임기관 안전행정부. 또 한해 조 단위의 예산을 사용하고 청해진해운과는 오래 전부터 특수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역시 TV 보고 최초 인지했다는 대한민국의 정보기관 국가정보원.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에서 모든 정보가 결집되는 곳이고, 심지어 당일 오전 8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실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지만 역시 TV 보고 최초 인지했다는 대한민국 청와대. 이를 우리가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석연치 않은 YTN의 세월호 침몰 최초 보도

여기서 생겨나는 또 하나의 질문. 그렇다면 YTN은 어떻게 최초로 보도를 할 수 있었을까? 참사 당일 오전 9시 13분경, 육상경찰의 한 간부가 평소 알고 지내던 YTN 광주지국의 기자에게 전화를 하여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며 안부를 묻다가, 다음과 같이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동생, 큰일 났네. 진도에서 500명이 탄 여객선이 조난당해서 침몰하고 있다네. 인천에서 제주도 가는 배라는데 수학여행 학생들도 많이 타고 있다고 해서 걱정이네. 한 번 알아보소." 

경찰이 기자에게 전화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하는 상황에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며 안부를 묻다가" 이야기했다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여겨진다. 또 경찰이 직무상 취득한 기밀사항을 공식적인 보도자료가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흘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경찰의 최고 수장, 경찰청장이 참사를 최초 인지한 시각이 9시 29분이라는 점이다. 8시 56분경 세월호 승객의 신고로 상황을 파악한 전남 112상황실은 9시 7분경 전남청장(전라남도 지방경찰청장)에게 문자로 상황을 보고하고, 전남청장은 9시 29분경 경찰청장에게 전화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YTN 기자에게 전화한 경찰간부는 세월호 관련 소식을 자신의 최고지휘부에게 보고도 하기 전에 언론사 기자에게 먼저 비공식적으로 흘린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청장은 국정조사 기관보고에 출석하여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정리하면, 9시 19분 YTN이 최초 보도를 할 수 있었던 경위 자체가 일단 석연치 않다. 그리고 그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보도된 속보를 보고 참사를 최초 인지하였다는 청와대, 국정원, 안행부의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오전 8시 35분
: 청와대 상황보고서에 적혀 있는 사고발생 시각

또 국가안보실 상황보고서 1보에는 인상적인 '시각'이 하나 등장한다. 이 시각은 조작 전의 보고서이든 조작 후의 보고서이든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바로 사고 일시가 2014년 4월 16일(수) 8시 35분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각을 10시로 조작하여 헌재에 제출한 국가안보실 상황보고서 1보
▲  시각을 10시로 조작하여 헌재에 제출한 국가안보실 상황보고서 1보
ⓒ 청와대

 조작되기 전 국가안보실 상황보고서 1보
▲  조작되기 전 국가안보실 상황보고서 1보
ⓒ 청와대

아직까지 세월호의 정확한 침몰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로 그 침몰원인을 밝혀내려고 인양된 세월호를 조사하는 선체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 활동 중인 것이다. 그런데 침몰원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심지어 정확한 사고 시각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는 8시 48분, 49분 정도를 침몰 시작 시각으로 간주하지만 이 역시 아직 확정적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시각 이전을 세월호 참사 발생 시각으로 가리키는 자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상황보고서마저 사고 시각을 8시 35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래에서는 일반적인 사고 시각 이전의 시각을 가리키는 자료들 중에서 '공문서들'만을 나열해 보겠다. 

■ 8:00
 SBS화면에 잡힌 안전행정부, 소방방재청 상황보고서
▲  SBS화면에 잡힌 안전행정부, 소방방재청 상황보고서
ⓒ SBS

 <뉴스타파>가 보도한 한국해운조합 인천지부 사고보고서(2014.06.24.)
▲  <뉴스타파>가 보도한 한국해운조합 인천지부 사고보고서(2014.06.24.)
ⓒ 뉴스타파

안전행정부, 소방방재청 상황실이 작성한 <진도해상여객선 침몰사고 상황보고>에서도, 그리고 한국해운조합 인천지부의 사고보고서에도 사고시각은 8시 정각으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해운조합 인천지부의 보고서는 사고 당시 세월호 조타실에 있었던 1등 항해사나 3등 항해사와 직접 통화를 한 기록까지 표기되어 있는데, 사고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인 사고 시각이 8시로 표기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8:25 
 <뉴스타파>가 보도한 진도군 상황실의 상황보고서(2014.04.18.)
▲  <뉴스타파>가 보도한 진도군 상황실의 상황보고서(2014.04.18.)
ⓒ 뉴스타파

진도군청 상황실이 작성한 '세월호 여객선 침몰 상황보고서'라는 문서에는 사고시각이  8시 25분경으로 표기되어 있다. 

■ 8:30 
 <세계일보>가 2014년 4월 21일자로 보도한 '08:10 “해경인데 연락안된다”… 긴급상황 몰랐나' 기사에 언급된 '국립해양조사원 항행경보'
▲  <세계일보>가 2014년 4월 21일자로 보도한 '08:10 “해경인데 연락안된다”… 긴급상황 몰랐나' 기사에 언급된 '국립해양조사원 항행경보'
ⓒ 세계일보 화면캡처

해양수산부 산하 국립해양조사원은 오전 10시쯤 '항행경보 제14-155호'를 긴급 발령하는데, 그 내용에 사고 시각이 오전 8시 30분경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고 시각을 오전 8시, 8시 25분, 8시 30분으로 표기한 공문서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보고된 상황보고서 1보에는 사고 시각이 오전 8시 35분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의 계기 되어야

최근 청와대의 발표로 이전 정권이 상황보고서 보고시각을 조작한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제 왜 조작을 하였는지, 누가 조작하였는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조작을 하였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대통령 최초 보고 시간 조작 확인은 세월호참사에 있어 존재하는 다른 시간들 역시 얼마든지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여러 시간들을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얼마든지 '조작'되었을 수 있는 것으로, 잠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월호참사 시간 조작은 궁극적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