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0일 화요일

신군부는 정말 몰랐을까 김재규가 총 쏜 이유를

[5공 전사 - 깊이 보기](2)신군부는 정말 몰랐을까 김재규가 총 쏜 이유를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0·26, 혁명인가 사건인가
<b>김재규, 너무 빨랐던 재판과 처벌</b>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맞은편에 앉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이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의 권력장악과 제5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총성’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는 200여쪽에 걸쳐 ‘10·26’의 전모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군복을 입고 있는 김재규 육군 중장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재규, 너무 빨랐던 재판과 처벌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맞은편에 앉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말이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의 권력장악과 제5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총성’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는 200여쪽에 걸쳐 ‘10·26’의 전모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군복을 입고 있는 김재규 육군 중장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산케이 칼럼니스트 시바다 미노루는 ‘한국, 총격과 위기의 55일’이라는 글에서 김재규의 최종진술에 대해 비판하면서 김재규가 주장하는 민주회복혁명의 허구성을 낱낱이 규명했다. … 첫째 김재규가 민주회복혁명을 목적으로 한 혁명가라면 그 혁명은 계획적인 것이어야 한다. … 둘째 만약 김재규가 일찍부터 민주회복혁명을 목표로 했다면 왜 과거 중정부장 재직 시 유신체제의 지주였다고 할 수 있는 긴급조치 9호를 보완하기 위하여 긴급조치 10호를 선포하도록 주장했을까? 셋째로 김재규의 민주회복혁명 이론은 그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반체제 변호인들의 영향이 작용한 이론으로 보여진다.”(791~792쪽)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는 ‘한국: 평온유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재규에게 배후가 있음을 시사하고 박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았으면 부마사태 등의 소요가 확대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783쪽) 
<제5공화국 전사(前史)>(5공 전사)가 전하는 10·26사건 관련 외신보도 동향이다. 10·26이 없었다면 신군부가 들어서지 못했기에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신군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정권의 정당성 시비가 생길 수 있는 사건이기에 신군부는 서둘러 처리했다. 그리고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도록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고, 관련자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김재규는 10·26사태 후 민주회복을 위해 박 대통령을 시해했노라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10·26사건은 그가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면 철저한 2중 성격의 위선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 이런 사람이 민주회복 운운하며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은 전후 논리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에 불과한 것이다.”(597쪽) “김재규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임이 밝혀져 암살의 유형에 새로운 형태를 추가한 셈이다.”(576쪽)
<5공 전사>는 김재규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을 저질렀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5공 전사> 속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흥미로운 몇 가지 내용들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 우선 이 사건이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전문 관료들과 군부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예춘추에는 ‘박 대통령은 왜 시해되었는가?’라는 야마까와 아끼오의 글이 실렸다. 박 대통령의 앞길에는 스스로 대통령에서 물러나거나 혁명에 의해 타도되는 방법밖에 없다는 1973년 미 상원 외교위원회가 발표한 풀브라이트 보고의 결론 부분과 한국의 박 대통령은 향후 8년 임기를 모두 마치기 전에 쿠데타로 쫓겨날 것이라는 1976년 말경 미 CIA 간부 도널드 글랙이 카운터 스파이지에 기고한 글을 인용하면서 박 대통령의 시해를 당연한 결과로 보았다. 그는 대통령 시해의 배경을 테크노크라트들과 혁명주체세력 간의 대립이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확대되었고, 권력 내부에서의 권력투쟁과 측근의 충성심 경쟁이 이런 재앙을 불러왔다고 강조했다.”(784쪽)
“10·26, 김재규 이중성격이 부른 우발적 단독범행”이라 기술하면서 경제정책 둘러싼 권력 대립·한미관계 회복 목적 거론 
부마항쟁 소요 막기 위한 ‘거사’ 해석도…실종 상태 김형욱을 ‘비명횡사’라 적은 집필진, 어찌 알았을까
1978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오일쇼크와 함께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한국 경제가 또 한번 위기에 부딪힌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의욕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가 중복투자와 과잉투자로 그 부담이 커졌고, 1970년대 말 중동으로부터 들어온 달러를 이용한 재벌의 부동산 투자는 또 다른 위기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더해 미국이 한국의 보호무역 철폐를 주장하면서 한국 정부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청와대는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대통령 직속 경제과학심의위원회에 경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지시했다. 1979년 초부터 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는 전면 시장개방이 필요하며, 더 이상 재벌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계속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점진적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모델의 전면적 청산이냐 아니면 점진적 변화냐의 갈림길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일본인 기자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도 의문이지만, 이러한 갈등이 유신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매우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안정화 계획으로 알려진 정책 전환은 10·26까지 실행되지 않았고,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김재익 경제수석에 의해 실행됐다.
김재규와 관련자들 대부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에 전말을 밝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근에는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근거로 10·26사건은 하나의 민주화 혁명이었다는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유신체제 반대투쟁의 선봉에 섰던 장준하가 생전에 김재규와 함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었다는 주장이다. 김재규는 법원에서의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 정권에 의한 국민의 희생 방지를 박정희에게 총을 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조사 과정에서 그가 “중정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군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녹지사업이란 명목으로 기금을 뿌려왔었다”는 사실과 박정희를 제거하는 계획을 1979년 6월부터 은밀하게 구상했다는 <5공 전사>의 내용은 김재규가 무언가의 목적을 갖고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거사계획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방대한 조직세력보다는 단독범행이 성사의 첩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703~704쪽). 
‘10·26’을 보도한 1979년 11월5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 표지(왼쪽 사진). <5공 전사>는 실종과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혹을 낳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미 ‘비명횡사’했다고 적었다(오른쪽).
‘10·26’을 보도한 1979년 11월5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 표지(왼쪽 사진). <5공 전사>는 실종과 사망을 둘러싸고 온갖 의혹을 낳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미 ‘비명횡사’했다고 적었다(오른쪽).
<5공 전사>는 김재규의 행동에 ‘거사’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10·26이 민주화를 위한 거사였음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적화 방지’와 ‘독재로 인해 안 좋아진 한·미관계의 회복’을 중요한 이유로 밝히고 있는데, <5공 전사>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기 직전 김재규는 그를 말리는 부하 직원에게 “오늘 하지 않으면 안보누수 때문에 안돼”라고 말했다(614쪽). 
우선 ‘안보누수’는 무엇을 말하는가? <5공 전사>가 주목한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부산, 마산의 소요사태가 현지의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어 평온을 회복할 즈음 서울을 위시한 전국 각지의 대학가에서는 산발적인 학내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 그러나 시민들이 가세하지는 않았다.”(565쪽) 중앙정보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자료에 근거해 서술된 <5공 전사>는 부마항쟁이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전개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부마사태는 지금까지 있었던 학생시위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소요사태였다. 부마사태는 교련, 한일회담 등 종래의 정부 시책을 반대하고 나선 학생데모와는 달리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초동단계부터 정권타도와 민주회복을 표방하고 있었다. 또 학생시위를 방관하던 시민들이 이에 가세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특히 부산 일원에서의 데모 양상은 계엄군에 의해 일단 해산된 후 시내 타 지역으로 이동해 또 다른 소요를 일으키는 등 독특한 시위 방법이었다. 야간에는 불량배들까지 가세해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방화하는 등 도시 게릴라식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469~570쪽)
부마항쟁을 조사하면서 일부 신민당과 통일당 등 야당 당원들이 시위에 가담했다는 정보는 있었지만, “수사 결과 불순배후조직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국민 저변에 팽배해 있던 대정부 및 정치 경제적 불만을 학생데모가 폭발하도록 점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군중심리가 크게 작용하여 사태가 확대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점도 주목된다(572~573쪽). 그렇다면 김재규의 거사는 ‘반(反)혁명 전략’이었던 것인가? 부마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경우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고, 1978년 이란과 1979년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반미혁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독재자를 제거해 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인가? 이는 <5공 전사>에 실려 있는 10·26사건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5공 전사 - 깊이 보기](2)신군부는 정말 몰랐을까 김재규가 총 쏜 이유를
이와 관련,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김재규가 최후진술에서 밝힌 ‘한·미관계의 회복’ 문제다.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김재규나 한국의 다른 인사에게 박 정권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든지 또는 우리가 박 대통령 제거를 용인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월28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를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여러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김재규는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을 막고 한·미관계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나? 
<5공 전사>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정치공작에 적극 나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거사’를 민주화혁명으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공 전사>에는 유정회 출신의 국회의장 선출 과정, 야당의 전당대회와 김영삼 총재의 제명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이 중앙정보부 요원뿐 아니라 박 대통령까지도 만나 신민당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하고 토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본연의 임무”는 “국내 정치 문제”이며,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 영역을 침범하자 결국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5공 전사>는 결국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 스스로가 비극을 자초했다는 것으로 10·26사건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박 대통령 자신이 ‘인간인 이상 나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고 77년 봄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집권 말기에 그가 범한 우는 유신체제를 구축하여 정치부재, 행정력 지상의 현상을 초래하게 한 데 덧붙여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의 인선에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582~583쪽)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었지만, 권력의 핵심기관으로서 이런 악습의 온상은 주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그리고 중앙정보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이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과 권력의 핵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사리사욕이었다.”(585쪽)
박정희가 선택한 측근들의 사리사욕으로 유신체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5공 전사>는 실종된 김형욱이 죽었다는 사실도 적고 있다. “결국 만리타국에서 비명횡사로 최후를 맞았”다고(589쪽). 그의 실종은 알려져 있지만 죽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5공 전사>를 쓴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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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210600055&code=960100#csidx3c2c652d2e6c70b924ea50aff58e548 

‘맥아더 동상 화형식’ 이적 목사 구속

‘맥아더 동상 화형식’ 이적 목사 구속인천지법, 집시법‧특수재물 손괴 등 혐의 영장 발부
▲ 사진 : 이적 목사 페이스북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에 올해 두 차례 화형식을 벌인 평화협정운동본부 반미실천단장 이적 목사가 지난 20일 구속됐다.
통신사들에 따르면, 인천지방법원 김한성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0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특수재물 손괴, 일반물건 방화 등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 목사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신문을 열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목사는 지난달 23일 새벽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아래 돌탑 일부에 불을 지르고, ‘맥아더에서 트럼프까지 신식민지체제 지긋지긋하다’는 글귀를 적은 현수막을 내걸고 불법 집회를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아 왔다.
이 목사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 화형식이라는 일종의 퍼포먼스이지 방화 의도는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는 앞서 지난 7월에도 맥아더 동상 화형식을 갖고 집회를 했다가 집시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바 있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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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거사위 "검찰총장은 강기훈에게 사과해야"

18.11.21 11:05l최종 업데이트 18.11.21 11:07l





강기훈 재판 당시의 강기훈과 그가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은 김기설의 유서
▲ 강기훈 재판 당시의 강기훈과 그가 대필했다는 혐의를 받은 김기설의 유서
ⓒ SBS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위원장 김갑배, 아래 위원회)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 정권의 수사방향 지시 ▲ 증거 은폐 ▲ 감정 과정의 위법성 ▲ 가혹행위 및 피의사실 공표 등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결론 내고,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강기훈에게 직접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또 2009년 이 사건의 재심개시가 결정된 이후 검찰의 방어적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사건 발생 직후 정권의 부당한 압력이 검찰총장의 지시사항으로 전달됐고 그에 따라 초동수사의 방향이 정해지면서 무고한 사람을 유서대필범으로 조작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라며 "검찰은 과오를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현 검찰총장이 강기훈에게 직접 검찰의 과오를 사과할 필요가 있다"라고 발표했다.

이어 "검찰은 (사건 당시) 피의사실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단정적 주장을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대다수 국민뿐만 아니라 법원으로 하여금 잘못된 예단을 갖게 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했다"며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대한 개선을 권고한다"라고 설명했다.

또 "수사기관의 위법행위를 주요한 원인으로 재심개시가 결정된 사건의 경우 그에 대해 기계적으로 불복하고 과거의 공방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재심절차에 임하는 관행은 중단돼야 한다"라며 "재심절차에 관한 검찰권 행사의 준칙을 재정립하고 현재 운영 중인 '상고심사위원회'에서 과거사 재심개시 결정이나 재심 무죄 판결에 대한 불복여부를 심의하도록 하는 등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고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 수사 가이드라인 제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검찰이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중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필했다고 조작한 사건이다. 검찰은 자살방조죄 혐의로 강씨를 기소했고 강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권고에 따라 재심을 청구한 강씨는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법무부는 지난 2월 위원회를 만들고, 이 사건을 포함해 검찰에 의해 발생한 의혹 사건 12건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강씨를 비롯해 당시 수사팀 검사 3명, 검찰총장, 대통령 비서실장, 국과수 문서감정인 등의 진술을 청취하고 수사 및 재판기록, 진상조사 기록, 국회 회의록, 자료집, 단행본, 언론 보도자료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고 밝혔다.

위원회가 재조사한 내용은 ▲ 정권에 의한 수사방향 지시 ▲ 수사진행 중 증거 은폐 ▲ 감정 과정의 위법성 ▲ 수사 중 가혹행위 및 피의사실 공표 ▲ 재심과정에서 검찰권 행사의 문제점 등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정권에 의한 수사방향 지시'와 관련해 위원회는 "당시 긴급하게 개최된 '치안관계장관회의'에서 분신정국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나온 직후 검찰총장이 분신의 배후를 철저히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라며 "사건 발생 직후 전격적으로 수사팀이 서울지검 강력부에 구성되고 사건 발생 하루, 이틀 사이에 유서대필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라고 발표했다.

이어 "유서의 필적과 김기설의 필적이 동일한지에 대한 감정회보가 도착하기도 전에 강기훈을 용의자로 특정했다"라며 "이러한 점을 종합해볼 때 사건 발생 초기 분신의 배후에 대한 수사라는 가이드라인이 수사팀에 전달됐고 이는 당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수사진행 중 증거 은폐'와 관련해 위원회는 "수사 초기 확보된 김기설의 흘림체 필적이 감정에 회부되지 않고 기록에도 편철되지 않았다"라며 "수사 초기 감정 의뢰된 전민련(김기설이 소속됐던 재야 조직) 업무일지에 대한 필적 감정 결과, 업무일지 작성자가 여러 명이라는 것을 간과한 오류가 드러났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수사를 진행했다"라고 밝혔다.

또 "분신자살 사건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으로 확인해야 할 변사자의 동선이나 신나 구입경위 등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라며 "이러한 점을 종합해볼 때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사는 자살방조의 범죄사실 입증에 불리한 증거는 은폐하고 유리한 증거만 선별해 감정을 의뢰하는 등 객관의무를 위반했다"라고 지적했다.

'감정 과정의 위법성'과 관련해 위원회는 "이 사건 필적감정은 감정 대상물의 선정, 감정 절차, 감정 결과의 회신 등 대부분 절차가 규칙을 위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감정의 내용도 전문가의 감정이라고 보기에 부족하다"라며 "특히 이번 재조사 과정에서 (과거사위가) 전민련 수첩 실물을 직접 조사함으로써 수첩 절취선에 대한 국과수 감정이 부실했음이 확인돼 당시 검찰이 김기설의 전민련 수첩이 조작된 것으로 본 것은 부당하다고 결론내렸다"라고 강조했다.

'수사 중 가혹행위 및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해 위원회는 "강기훈, 참고인, 관계자들이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공통되게 진술하고 특히 당시 수사검사도 가혹행위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의 존재를 인정했다"라며 "2002년 발생한 서울지검 강력부의 가혹행위치사 사건처럼 1991년 이 사건의 수사 당시에도 11층 특별조사실에서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기소 이전에 이 사건에 대한 위법한 피의사실 공표가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다"라고 덧붙였다.

'재심과정에서 검찰권 행사의 문제점'과 관련해 위원회는 "이 사건 재심개시 결정 후 검찰은 줄곧 과거 공권력이 남용되던 시절의 수사 관행을 두둔하고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매도하던 과거의 입장을 반복했다"라며 "검찰은 재심과정에서 과거의 입장을 고수하며 피해자와의 공방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반성 위에 중립적으로 공판 사무를 수행하고 과거 검찰권 행사의 문제점을 성찰해 피해자의 권리와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반성적인 진실추구자로서 재심절차에 임해야 할 것이다"라고 권고했다.

정부, “화해치유재단 해산하고 사업 종료”

일본 정부 출연한 10억엔 반환은 추후 과제로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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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1  1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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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화해치유재단 출범식. 왼쪽부터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 3번째 김태현 재단 이사장. [자료사진-통일뉴스]
여성가족부(장관 진선미)가 21일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법적 절차를 밝아나가겠다고 밝혔다.
2015년 12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 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2016년 7월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이 2년 4개월만에 공식 해산절차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가 출연한 재단기금 10억엔(약 103억원) 처리 문제는 추후 과제로 남겼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1월 9일 정부는 화해치유재단에 대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등 국민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처리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면서 외교부와 함께 의견 수렴과 관련부처 협의를 거쳐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추진하고 재단사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청문 등 관련 법적 절차를 밟아가게 된다.
10월말 기준 57억 8천만원이 남은 재단기금에 대해서는 “지난 7월 편성된 양성평등기금 사업비 103억원과 함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관련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합리적인 처리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외교부는 10억엔 반환을 위한 협의를 진행할 방침이나, 일본 측이 반발하고 있어 실제로 반환될지는 미지수다.
진선미 장관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아래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다양한 의견수렴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재단의 해산을 추진하게 되었다”면서 “여성가족부는 앞으로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명예.존엄회복을 위한 정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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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문재인 대통령, 월남 패망하는 모습 보고 희열 느꼈다?
임병도 | 2018-11-21 08:49:59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11월 5일 전광훈 목사와 태극기 집회 주최 측 등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퇴진을 위한 국민총궐기대회 사전행사를 열었습니다.
이날 전광훈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간첩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전 목사는 “문 대통령은 간첩인 신영복을 제일 존경한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 월남 패망하는 모습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고 자서전에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광훈 목사의 이런 주장은 지난 대선 토론회 때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주장했던 발언과 유사합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수.우익 커뮤니티와 카톡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월남 패망에 희열을 느꼈다는 합성 이미지나 이야기가 계속 돌아다닙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자서전은 2011년 발간된 ‘문재인의 운명’입니다. 보수, 우익이 주장하는 내용은 2부 인생 중 대학, 그리고 저항이라는 부분에 나옵니다.
그런데,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희열을 느꼈다는 부분이 홍준표, 전광훈 목사의 주장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글의 원문을 보면 “적어도 글 속에서나마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읽는 나 자신도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국 패전이나 공산주의의 승리에 대한 희열이 아니라 리영희 선생의 글에 희열을 느낀 것입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대학교 1, 2학년 무렵 잡지에 먼저 논문 1, 2부가 연재되고, 3학년 때 책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접한 리영희 선생 논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과 제국주의적 전쟁의 성격, 미국 내 반전운동 등을 다뤘다. 결국은 초강대국 미국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끼리 하숙집에서 은밀히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돼 있었고 명쾌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을 무조건 정의로 받아들이고 미국의 주장을 진실로 여기며 상대편은 무찔러 버려야 할 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겨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과 책을 통해 본받아야 할 지식인의 추상같은 자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것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진실을 억누르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나중에 월남패망 후 ‘창작과 비평’ 잡지에 베트남전쟁을 마무리하는 논문 3부를 실었다. 그러니 월남패망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사이에 두고 논문 1, 2부와 3부가 쓰여진 셈이었다. 그 논리의 전개나 흐름이 그렇게 수미일관 할 수 없었다. 1, 2부는 누구도 미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시기에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패망을 예고했다. 3부는 그 예고가 그대로 실현된 것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면서 결산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글 속에서나마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읽는 나 자신도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재인의 운명 중에서)
‘문해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장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사용함으로써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며, 자신의 지식과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 대표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한국인의 고급 문서해독력은 OECD 평균 이하’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전문직이나 지도층 역할을 하려면 4.5급의 문해력을 갖춰야 하는데 한국인은 8.1%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였거나 보수, 우익 집회를 이끄는 목사라면 최소한 책을 읽고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월남 패망에 희열을 느꼈다고 주장합니다.
보수,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이 말하기 전에 본인들의 문해력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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