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오르내릴 때마다 “숫자 보고 정치하지 않는다” “지지율 등락에 일희일비 않는다”고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로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할 때도, ‘조국 사태’로 지지율이 급락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최근 이어진 지지도 추락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집권 4년차, 총선 압승 100일도 되지 않아 나타난 ‘추세적 하락’이란 점에서 자칫 ‘레임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위기감 탓으로 보인다. 여권은 무엇보다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30대마저 이탈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민심은 왜 등 돌리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한국갤럽 조사를 기준으로 7주째 하락했다. 7월 3주 지지율은 46%로, 올해 최고점을 찍었던 5월 1주에 견줘 25%포인트 하락했다. 20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부정평가(51.0%)가 긍정평가(44.8%)를 앞질러 ‘데드크로스’ 현상까지 발생했다. 국정 지지율은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2주 이후 최저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율도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낮다.지지율 하락 배경에는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의혹,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등 지난 4월 총선 뒤 끊이지 않은 여권발 악재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최근 급격한 민심 이반은 신뢰를 잃어가는 부동산 정책과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및 이에 대한 여권의 부적절한 대처 등이 맞물리면서 가속화됐다. 충북 청주시와 서울 반포동에 아파트 2채를 갖고 있던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서울 아파트가 아닌 청주 아파트를 처분한다’고 밝힌 것은 최악이었다. 부동산이 삶의 근간이 되는 주거의 문제라는 점 때문에 민심이 더욱 크게 흔들린다는 진단도 나왔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부동산 이슈는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미래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권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부동산으로 들끓던 민심은 ‘박원순 사태’로 폭발했다. 여권 관계자는 “박 시장이 성추행 의혹을 받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점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이후 사건을 대하는 여권의 태도가 지지자들마저 등 돌리게 했다”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이해찬 대표의 ‘××자식’ 발언이 상징적인 장면이다. 민심이 어떤 상태인지, 박 시장 성추행 의혹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시선이 어떤지에 대해 여권이 감을 잃었다는 것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실제 ‘박원순 사태’와 관련해 당의 대응 기조를 정하려 할 때마다 젊은 당직자와 보좌진 그룹과 의원 그룹 간 견해차는 상당했다. 한 의원 보좌관은 “사태 초기부터 아무리 조언을 해도 먹히지 않았다. 의원 대부분이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전날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한 이원욱 의원은 ‘내로남불’식 대처를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에 대한 청년층의 분노를 ‘가짜뉴스’ 탓으로 돌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고발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에 실망한 국민은 공정함을 잃은 것에 실망했고, 내로남불식 태도에 실망했다”고 지적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여권, 돌파구는? 조국·윤미향·박원순 사태를 잇따라 겪은 여권에선 ‘인연과 의리에 이끌리지 말고’ 단호하게 조기 수습에 나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기류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내놓아 민심을 달래고, 개혁 과제 처리에 집중해 지지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는 것이다.여권 관계자는 “‘조국 사태’ 때만 해도 ‘검찰개혁’이라는 정책 이슈가 맞물려 있어 버틸 여력이 있었다. 이번 위기는 ‘권력형 성범죄’라는, ‘찬반’으로 나눌 수 없는 이슈에서 비롯된 위기이기 때문에 심각하다. 하루빨리 단호한 대책을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에 소속된 한 의원도 “당이 발표한 대응책은 은폐 의혹을 받는 서울시에 진상조사를 떠맡기는 모양새다. 더 단호하게 대처해야 국민들의 화가 풀릴 것”이라며 “부동산 문제도 당·정·청 혼선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개혁 입법을 통해 지지자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핵심 지지층’에 의지하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 행태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콘크리트 지지층도 악재가 계속되면 무너진다는 사실을 박근혜 정부가 보여주지 않았느냐”며 “안희정·오거돈·박원순까지 3명의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이 같은 사안으로 물러났는데 정권 차원의 사과가 없다. 이슈를 대하는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창선 박사는 “여권 내부에 위기경보를 발송하고 민심에 부흥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며 “부동산은 주무 장관을 교체해서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김원철 서영지 기자 wonchul@hani.co.kr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2008년 8월 3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작가 솔제니친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의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적지 않은 작품이 번역되어 읽혔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제니친은 전체주의체제하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체제의 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하고,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을 증언하기 위해서 비타협적으로 싸운 불굴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솔제니친은 단순한 반공 작가가 아니었다. 1974년 <수용소 군도>가 국외에서 발간된 직후, 소련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추방된 뒤 미국에서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반서구적(反西歐的) 언동은 물론이고, 실제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비교적 초기에 쓴 중편소설 〈마트료나의 집〉이 특히 그렇다.
혁명 후 러시아 오지(奧地) 풀뿌리 농민들의 삶에 관한 이 뛰어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 전승되어온 러시아의 심오한 정신적·사상적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추진한 집단농장화로 인해 러시아의 옛 농민공동체가 어떻게 철저히 파괴되었는가를 암시하면서, 농민들이 집단농장의 일개 타율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농민으로서의 심리와 정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지만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사나운 늑대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도, 러시아 사회의 오래된 ‘거룩한 바보’의 전통, 즉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철저히 겸허한 정신이 끝끝내 살아 있음을 작가는 발견한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지만 아직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희생의 습관이 몸에 밴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존재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데다가 늙고 병든 이 '바보'에게 ‘마트료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녀가 만물을 품 안에 기르는 어머니―대지(大地)를 표상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마트료나'는 '마티'에서 왔고, 러시아어에서 ‘마티’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저작 속에서 러시아 농민이나 농민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농민에 관한 일을 묘사하거나 언급할 때 그의 어조는 매우 날카롭고 강렬하다. 예를 들어, <수용소 군도>는 혁명의 과정과 혁명 후 소련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조리, 잔혹함, 비극적 사건들을 엄청난 치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기록한 방대한 기록이다. 그렇게 기록된 사건의 하나로, 1932년 모스크바 근교 집단농장에서 다섯 명의 농민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기막힌 것이었다. 그날 집단농장에서 다른 농민들과 함께 풀베기 공동작업을 끝낸 뒤에 이들 다섯 명이 농장에 남아서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키우는 말에게 먹이려고 따로 풀을 베어서 갖고 간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솔제니친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드러내는 극도의 분노이다. "만일 스탈린이 이 다섯 농민 이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만으로 그는 극형에 처해졌어야 마땅하다"라고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 범죄가 한둘이 아닌데도, 특히 이 농민들의 죽음에 관련해서 솔제니친이 이토록 강경한 태도를 드러낸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러시아 옛 농민공동체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애정이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특히 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던 농촌의 협동적 자치조직, 즉 '젬스트보'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지식인들이 흔히 들먹이는 솔제니친의 이른바 '슬라브주의'라는 것도 실은 이러한 자치적 협동성의 생활기반 위에서 생을 영위하던 옛 러시아 농민의 세계를 옹호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부활시키고 싶다는 갈망에 깊이 관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이와 같은 농민공동체는 따져보면 모든 인간다운 삶의 토대 중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나 작가로서 솔제니친의 위대성은 그가 평생 유지했던 강인한 정신적 에너지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에너지는 바로 이 농민적 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향수나 갈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충전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집단농장의 풀을 개인적 용도를 위해서 베어 갔다고 해서 사형을 당한 농민들의 이야기에서 좀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즉, 그 이야기는 무엇보다 소비에트사회주의체제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체제는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인간성에 반하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집단농장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집단농장화는 농민의 심리와 정서를 아예 무시하는 폭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력이라는 견지에서도 소농 중심 경제가 우월하다는 유력한 학문적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를 표명한 당대의 저명한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등의 지식인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8년에서 1933년까지 강행된 집단농장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사회적 갈등과 비극적인 대기근과 그에 따른 엄청난 인명 손상이었고, 그 궁극적인 결과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자체의 붕괴였다.
물론 소비에트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스탈린의 폭압통치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압제체제의 근간에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소비에트의 이상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결국 산업화와 생산력 제고를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환원되어버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요체가 생산수단의 국유화였다. 그 결과 농촌은 단지 도시와 공장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유리된 채 집단농장의 한갓 노동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생산력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일차적으로 효과적인 산업화 혹은 경제성장의 도구로 인식되는 순간, 국가가 독점적인 자본가가 되고 인민은 전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마는 기형적인 사회주의체제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근대적 발전사관의 덫
돌이켜보면, 현대 사회주의운동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주도해왔던 맑스주의 자체 속에 이미 사회주의의 기형적인 발전을 예고하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우선, 사회주의가 성립하려면 먼저 물질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맑스 자신의 논리가 그러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이러한 논리에 이미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함”을 겨냥하는 운동으로 왜소화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나아가서, 여기에 내포된 역사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이며 단계론적인 관점은 결과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비서구 민중공동체에 대한 공격과 침탈을 정당화하는 매우 위험한 논리로 이어지고 만다.
1857년과 58년에 걸쳐 일어났던 인도 민중의 대대적인 봉기에 대해서 영국 식민당국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을 때,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인도의) 이 목가적인 마을공동체들이 '동양적 전제주의'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문제는 이러한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원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그 운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국의 죄악이 무엇이건, 영국은 그런 혁명을 위한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였다.
이렇게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맑스의 논리는 "아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오늘날 일본 보수우파의 논리나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를 미화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그룹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렇게 해서 비록 한정된 논리에서일지라도 오늘날 한일 우익 논객들이 뜻밖에도 맑스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 있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핵심은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맑스를 단순히 근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맑스에게도 '자본주의 근대'는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단계로서 긍정하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근대'를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근대'를 허용해야 할 잠정적인 기간이 과연 얼마 동안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과연 어떤 수준까지 발전해야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줄 객관적인 척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역사법칙에 의해서 언젠가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렇게 되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토록 강조한 '과학'과는 상관없이,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맥락에서 또 희극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오키나와(沖繩)에서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떤 글에서 자신이 아는 일본의 한 젊은 맑스주의 운동가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 젊은이는 일본 자본주의가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아직 미숙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혁명적 수준까지 자본주의가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지금까지 하던 운동을 접고, 대기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희극들이 발생하는 것은 서구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뿌리 깊은 ‘근대적 미신’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생존의 궁극적 테두리인 우주와 자연은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갈 뿐인데도, 서구 근대문명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세워 직선적인 진보를 끝없이 추구·확대해왔고, 그 과정에서 생태적·사회적·인간적 한계는 계속해서 무시되어왔다. 근대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재생 순환적인 태양에너지 체계의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땅속 깊숙이 묻혀 있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및 기타 지하자원을 채굴하여 마구잡이로 사용하자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이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문명이 영속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옛날 도쿠가와(德川)막부 말기 개국 초에 일본에 와 있던 영국 공사가 당시 일본의 석탄 생산이 전근대적이어서 일본에 기항하는 영국의 선박에 원활한 연료공급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 나머지 막부의 관리에게 근대적인 석탄 채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막부의 담당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일본의 석탄은 우리 세대에만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전형적인 '비근대인'의 세계관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운동 세력 대부분이 지금까지 파행을 거듭해온 것도 결국 이러한 발전사관의 덫에 걸려온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통설에 대부분 굴복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안이 없다’는 구호 밑에 강화되어온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것보다 어쩌면 더 지독한 전체주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감세, 노동유연화, 규제철폐, 민영화, 자유무역 등등, 그럴싸한 언어유희 밑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격차, 부와 권력의 극심한 편중, 토지와 물을 포함한 공공재의 상품화, 국가기구의 사유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환경파괴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이라고 부를 만큼 거의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이 수탈 구조를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정말 이 시점에 ‘대안’이 없다는 게 진실일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때,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게 이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회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를 경험해왔고, 그것은 아직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생활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우리들은 현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부조의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이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글로벌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계속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들은 '상호부조의 경제'라는 개념에서 대뜸 '가난'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호부조의 경제란 기본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성장경제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경제이다. 따라서 이른바 생활수준의 저하는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가난'은 회피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미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프루동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생활은 원래 가난한 생활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일이다.
구스타브 란다우어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위해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다가 1차 대전 직후 짧은 순간 존립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공화국 혁명정부의 문화 담당 각료로 활동하던 중 1919년 49세의 나이로 반동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란다우어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언젠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진보'를 믿지도 않았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철저히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동적 공동체들의 연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기초는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였다. 그는 자본주의국가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공동체가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도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하나의 조건,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이자 행동양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하여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게다가 그는 생애의 후반기로 갈수록 땅과 농촌공동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는 토지를 떠난 인민은 자본가에 맞설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산업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으로부터 퇴각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이 만일 '협동적 사회주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대도시를 떠나 농촌공동체에서 농업과 소규모 공업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우어의 생각이었다.
구스타브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사상은 주류 사회주의 사상들에 밀려나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그의 명료한 메시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들에게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다. ‘경제’라는 덫에 걸려 사고력이 정지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란다우어와 함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웃들과 더불어 자발적인 협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2008년)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74~82쪽
이 회의는 지난 해 12월, 주한미군이 8부두 세균전부대 시설을 ‘현장설명회’란 이름으로 공개할 당시, 미군 책임자가 직접 맹독성 세균샘플 반입을 실토한 것에 분노한 부산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이 시설과 부대를 철거할 수 있을지’를 집단적으로 토론하고 결의하기 위해 기획됐는데, 본래 백운포 미 해군사령부 앞에서 대규모로 진행하려던 것을 장마와 코로나19의 우려로 인해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하게 됐다.
본 행사를 기획한 ‘부산 미 세균전부대 추방 시민대책위’는 지난 달 부터 원탁회의에 참가할 조(동아리, 소모임, 분회)를 조직해 왔으며, 민주노총부산본부, 부산여성회, 진보당 등 지역조직과 분회가 있는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참가신청을 해 왔다고 한다. 특히, 8부두를 끼고 있는 남구의 ‘감만동(8부두)미군부대 세균무기실험실 철거남구지역대책위’의 경우, 20개 원탁을 조직하겠다는 목표로 주민만남과 단체만남을 진행하며, 아래로부터의 회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대연우암공동체의 경우, 회의 당일 마을회관에 30여명이 모여 노트북을 열고 참가하는 등 곳곳에서 활기찬 분위기가 넘쳐났다.
회의가 대규모 화상회의 형태로 진행되다 보니 여러 재미있는 일화들도 생겼다. 자기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함께 하던 원탁조에서는 사회자의 구호제창 요청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멀뚱히 있는 바람에 사회자가 진땀을 빼기도 했고, 대학생들로 구성된 조가 전체화면에 등장하자 어느 조에서 마이크를 끄지 않은 채 “와~ 젊네”하는 감탄사를 내뱉어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각 원탁을 책임지는 조장들이 사전에 2시간동안 진행교육도 받고, 준비물도 꼼꼼히 챙겼음에도 당일에는 여기저기서 ‘소리가 안들린다’. ‘인터넷연결이 안된다’ 등의 하소연들이 올라왔다. 하지만, 누구하나 찡그리지 않고, 새로운 형식의 집회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으며, 원탁회의를 마치고 나서는 신세계를 경험했다는 평이 줄을 이었다.
이번 원탁회의 생중계 무대는 민주노총부산본부 2층 강당에 마련됐으며, 8개의 원탁을 두고 현장감을 살려 진행됐다, 이 원탁들에는 6.15부산본부, 공무원노조, 대학생겨레하나, 신진문화예술인 등 무대행사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첫 순서는 신진문화예술행동 흥에서 직접 만들어 온 보급곡을 함께 배워보는 시간이었는데, 이번 원탁회의를 겨냥해 ‘우리에게 권력을’이란 행진곡풍의 노래를 힘차게 선보였으며,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이어 최근 주한미군 사령관을 고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산 민변의 이현우 변호사가 ‘공고한 연대를 통해 반드시 세균전부대를 추방시키자’는 인사말을 전했으며, 부산 남구에 위치한 오륙도아이쿱생협 김영옥 이사는 사무실에서 화상으로 준비한 인사말을 남겼다.
다음 순서로 주한미군 세균전추방을 위한 전국연석회의에 참가한 전국의 대표들이 무대로 나와 차례로 인사를 했으며, 오후3시부터 진행된 전국연석회의 결과를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발표하였다.
이번 전국연석회의는 최근 폭로된 ‘주한미군의 세균전부대 전국 배치계획’에 대해 우려를 가진 경남, 경남진해, 대구, 평택, 경기, 부산, 부산남구지역의 시민단체대표와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권정호 변호사, 원동욱 동아대 국제학구 교수 등의 전문가들 포함 26명이 참가해 진행됐으며, 3시간에 걸친 열띤 발제와 토론을 통해 “주한미군 세균전부대 문제는 ‘생명과 안전, 자주와 평화’를 화두로 ‘전국화’, ‘국제화’로 나아가야 함”에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이에 기초해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 전국연석회의라는 틀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며, 각 지역 세균전부대와 미군기지 현황과 투쟁, 자료 등을 공유하기 위한 소통창구를 마련하고, 지역 집행책임자와 전문가를 포함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해 사업기획과 집행을 책임지기로 함.
- 전문가 그룹의 여론사업 및 국회 사업 진행(9월 중 국회 토론회 진행 및 특위 구성 논의등)
- 8.15에 미 대사관 앞 항의기자회견을 전국연석회의가 주최해 진행하고, 8.15민족자주대회 대표자회의에 참여하기로 함.
전국에서 많은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참가자들은 큰 힘이 모이는 것 같아 기쁘다는 반응이었으며, 이후 진행된 전기훈 정책기획위원의 ‘미군 세균전부대 실체’에 대한 10분 발제와 함께 원탁토론을 활기차게 만들어 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토론은 “주한미군 세균전 부대 어떻게 하면 추방할 수 있을까?”, “하반기 대규모 궐기대회 성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심도 깊게 진행됐으며, 각 원탁별로 제출된 의견들은 즉시 심의위원에게 송출되어 아래 10여개의 의견으로 간추려지는 데 활용됐다.
1. 다큐멘터리, 광고, 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활동을 적극화한다.
2. 세균전부대의 심각성을 알리는 선전을 전면화하자.
3. 온라인 교육영상을 제작해 온라인교육을 활성화한다.
4. 세균전부대추방 강사단을 구성해 찾아가는 교육을 강화한다.
5.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인 투쟁을 기획하고 확대시켜 나간다.
6. 미세균전부대 감시단을 구성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한다.
7. 세균전부대 철거를 위한 기층조직(주민조직, 현장조직, 청소년 조직 등)을 건설해 부산시민대책위를 확대 강화한다.
8. 전국연대와 나아가 국제연대를 확대하고 강화한다.
9.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미세균전부대추방 문제를 모든 후보가 공약화하도록 정치권을 압박한다.
10. SOFA협정 개정운동으로 나아가자.
위의 내용 중 3개를 선정하기 위해 회의참가자 전원에게 문자를 발송해 투표를 진행했는데, 1,2,9번 항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참가자들의 토론과 투표결과를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역사적인 <부산시민 원탁회의 결정문>이 탄생했으며, 부산지역대학생겨레하나의 ‘바위처럼’ 몸짓공연과 노동예술지원센터 흥의 축하공연을 마지막으로 2시30분에 걸친 대 회의는 막을 내렸다.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부산시민 원탁회의 결정문>
1. 2020년 12월,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대규모 부산시민 궐기대회'를 진행한다.
2.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해 전국 지역단체, 전문가등과 함께 '국회토론회'를 개최하고, 이 문제의 전국화, 국제화를 꾀하기 위한 연대모임을 더욱 발전시킨다.
3. 생물무기금지협약 등을 위반해 온 주한미군 사령관에 대한 '부산시민 1천인 고발인단'을 9월까지 모집해 2차고발을 진행한다.
4. 미군 세균전계획 본질을 정확히 알리는 중,소규모 강연을 풀뿌리단체, 소모임까지 적극적으로 진행해, 12월까지 '부산 미 세균전부대 추방 시민대책위' 소속 단체를 100개로 확대한다.
5. 미군 세균전계획의 본질을 폭로하는 효과적인 방안을 수립해 대 시민 홍보를 백방으로 강화한다.
6. 다큐멘터리, 광고, 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활동을 적극화한다.
7. 세균전부대의 심각성을 알리는 선전을 전면화하자.
8.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미세균전부대추방 문제를 모든 후보가 공약화하도록 정치권을 압박한다.
생소한 온라인 화상회의에 참가한 시민들은 운영에 일부 미숙함이 있었지만, 코로나19시대에 새로운 시도로 재미도 있었고, 의외로 집중도도 높아서 2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고 평했다.
이번 원탁회의를 통해 참가자들은 주한미군 세균전부대를 추방하고 이 땅의 자주와 평화,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는 일은 그 누가 아닌 우리가 해야 할 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함께 각인하게 되었으며, 전국으로 세계로 이 운동이 뻗어 나갈 첫 단추를 꿰었음을 확신하며, 향후 이 운동의 주체가 될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