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하던 한국 국적의 케미컬 운반선(석유 화학제품 운반선)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정부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박의 조기 억류 해제를 이란 측에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4일 외교부는 "이날 오후(현지 시각)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항해 중이던 우리 국적 선박(케미컬 운반선) 1척이 이란 당국의 조사 요청에 따라 이란 해역으로 이동 중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해당 선박에는 20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중 한국 국적 선원은 5명이며 나머지는 각각 미얀마 11명, 인도네시아 2명, 베트남 2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들은 이란 남부의 항구 도시인 반다르아바스에 구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는 "외교부와 주이란 대사관은 선박 억류 관련 상세 상황 파악과 함께 선원 안전을 확인하고 선박 조기 억류 해제를 요청 중"이라며 "현재 청해부대(최영함)가 사고 해역으로 이동 중이며 인근 해역을 항해 중인 우리 선박에 대해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국방부는 "이란에 의한 우리 선박 억류 상황을 접수한 직후 청해부대를 즉각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해역으로 출동시켰다"며 "외교부, 해수부 등 유관부서 및 다국적군과 긴밀히 협조하여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영함은 5일 오전 작전 해상에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 한국 국적 케미컬 운반선이 4일(현지 시각) 호르무즈 해협 오만 인근 해역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나포됐다. ⓒ연합뉴스
앞서 이란 혁명수비대 측은 성명을 통해 이날 오전 10시경(현지 시각) 걸프해역(페르시아만)에서 한국 선박을 나포했다며, 해당 선박이 해양 환경 규제를 반복적으로 어긴 데에 따른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밝혔다.
혁명수비대는 "선박 나포는 호르무즈 주 검찰과 항만청의 요구에 의한 것이며 이번 사건은 사법 당국이 다루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들은 또 해당 선박에 7200톤의 화학 물질이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당 선박의 선사인 디엠쉽핑(DM Shipping)은 선박과 혁명수비대가 접촉했던 해역은 공해상이었다면서, 소속 선박은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이번 선박 나포가 이란과 미국 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 속에 발생함에 따라, 향후 사건 추이를 두고 긴장감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최근 이란 내부에서는 미군의 공격으로 숨진 거셈 솔레이마니 전 쿠드스군(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의 1주기를 맞아 반미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세인 살라미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은 지난 2일(현지 시각) 군에 강력하고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핵 추진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등을 페르시아만 인근에 배치한 상황이다.
오기태는 잠을 설치다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 2시, 사방이 깜깜하다. 동생 조상이는 어제 일이 고되었는지 이불을 저만치 밀어내고 곤하게 잔다. 오기태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거칠고 팍팍하다.
오기태가 1930년생이고 조상이가 50년생이니 올해 90세와 70세, 두 사람은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전주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1989년 12월 24일 같이 출소했고 2000년부터는 전주 평화동 주공아파트에서 20년을 함께 살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이다.
오기태는 오른쪽으로 굽은 허리를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쓰겠다고 마음 먹은 지 벌써 한 달. 눈은 컴컴하고 손마디는 힘이 없어 글씨는 엉망이었다. 컴퓨터를 들여 자판 연습을 해보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볼펜을 잡고 여러 날 동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참이다. 갑자기 새된 기침이 나온다. 그는 조상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소리를 낮추고 휴지를 입에 갔다 댔다. 그리고 첫 줄을 적었다.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제 나이 올해 구십입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죽기 전에 북녘땅,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오기태는 노동당 문화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되었다. 1969년 7월 황해도 해주에서 달빛을 안고 내려와 전남 장흥의 수문리 해안가에 닿았다. 그날 밤은 야산에서 남해 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뉘였다. 다음 날 일찍, 전남대 출신의 조장 이봉로와 함께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달간 노동자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오기태는 광주 대인동 근처 여인숙에 숙소를 잡고 일당 잡부로 건설 현장에 나갔다. 노동자들과 담배를 나눠 피며 "내 고향은 신안군 임자도요"라고 통성명을 했고 국밥집에서 대포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이봉로 조장과 전남대 앞 서점에 들러 책도 사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세 다가온 9월 하순의 귀환 날, 오기태는 해가 졌을 때 장흥군 월암리 바닷가에서 땅굴을 팠다. 무전기를 켜고 접선을 시도하려는 참에 "동무, 마을에 가서 담배 한 갑 싸게 사 오겠소"하며 조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바닷가에는 달빛을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잔 물방울을 뿌려댔다. 사위는 물소리와 간혹 꾸룩대는 기러기 소리뿐이었다. 무전을 쳐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 조장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기태가 마을 쪽 어둠을 근심스레 바라볼 때 정적을 깨는 총성이 한 발, 곧이어 대여섯 발이 '드드드' 울렸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바닷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오기태는 무전기를 집어 들고 땅굴에서 솟구쳐 나왔다. 지금 가까운 보성역으로 서둘러 가면 경전선 새벽 첫차를 탈 수 있다. 만일에 대비했던 계획이 현실이 될 줄이야...
오기태가 가까스로 순천행 기차에 올랐을 때에서야 역전 마당에 호루라기가 울리고 경찰이 경계망을 펼쳤다. 그는 순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차 접선지인 부산 형제 바위로 갔다. 여기서도 접선에 실패한 그는 3차 장소인 광주로 되돌아왔다.
예전 여인숙에 행장을 풀었을 때, 그는 월암리 바닷가에서부터 일주일이나 옷을 갈아입지 못해 상거지 꼴이었다. 몇 시간 뒤 나타난 경찰 서너 명이 그를 에워쌌고 그날로 그는 서울 대방동 미군첩보부대로 이송되었다. 총상을 입고 치료받던 이봉로 조장도 거기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날이 길고 긴 징역생활의 첫째 날이 될 줄은...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눈을 비비며 다음 문장을 썼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89년 12월 24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본놈 앞잡이처럼 민족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한 흉악범도 아닙니다. 나는 분단된 땅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남쪽에 와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만나 조직사업을 했으나 불과 2개월, 그저 이름 석자 주고 받고 친분을 나눈 정도입니다. 과연 2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충분한 댓가를 치루지 않았나요?
어렵게 한 자 한 자 써가던 오기태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2005년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두 달이나 있었다.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 목소리는 새되졌고 마른 기침을 달고 살았다. 창문에는 한밤중의 한기가 달라붙어 성에를 수놓았고 그 위로 달빛이 실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오기태는 기침을 억누르고 다시 펜을 들었다.
2000년 9월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이 사람은 ‘전향’을 했다고 제외되었습니다. 정녕 그 실상을 모르는 겁니까? 전주교도소에서 있을 때 간수들은 한 겨울에 열두 명을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몰아넣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얼음칼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 뒤로는 무수한 바늘이 파고드는 듯했습니다. 입이 쩍쩍 벌어지고 우리는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돌아온 건 비웃음과 찬물세례, 구두발자국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내 허벅지에 전선줄이 감겼고 땅바닥에 내평개쳐진 물고기 마냥 살점이 퍼덕거렸습니다. 전주교도소의 전향은 이런 고문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미 수없이 증언한 이야기들이고 나는 2001년 내 양심에 따라 ‘강제전향무효’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오기태는 다시 옆구리를 쥐었다.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 지 얼마 안되어 2008년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나이 팔순이 가까워 얻은 큰 병이었다. 가까스로 치료는 되었지만 그 후로 설사와 변비가 되풀이 되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동네 학산을 오르내렸건만, 올해는 설사기가 심해져 이마저 그만두었다. 새벽이면 통증이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오기태는 배를 어루만지며 잠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창가에는 여전히 어둠이 웅크리고 새벽 햇살을 가로막았다.
오기태의 집은 9평 임대주택, 방·거실·부엌이 모두 하나다. 부엌 옆에는 손마디 같은 복도와 손뼘 같은 화장실이 전부다. 그나마 요런 임대주택이라도 있었기에 오기태와 조상이는 숨 쉬고 살았다.
89년 출소 후 오기태는 신원보증을 섰던 전주 남문화방 사장 밑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교도소 목공반에 있었던 그는 표구와 액자 일을 잘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냐”“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상점과 창고 등 열쇠 다섯 개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하지만 IMF로 남문화방은 문을 닫았고 오기태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 ‘나눔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영세민들과 노숙자를 위해서 밥 짓는 일을 하고 상담 일을 맡았다. 어떤 신용불량자는 오기태에게 ”회장님 저 100만 원만 빌려주세요”라고 손을 벌렸다. 주방 아주머니도 “삼촌 30만 원만 꿔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오기태는 쉼터에서 받은 월급으로 이런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전주에는 열 명 정도의 출소장기수들이 있었다. 오기태가 있는 쉼터는 이들에게 사랑방이었다. 와서 점심도 먹고, 안부도 물을 수 있는...그 무렵, 다행히 임대아파트가 배정되었고 쉼터를 나와 평화동으로 오게 된 것이다. 출소 후 두 번이나 결혼사기를 당했던 조상이도 오기태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두 장기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조상이가 교도소에서 건축 1급 메달을 딸 정도로 실력이 있어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임대아파트 관리비래야 한 달 5만 원 안쪽이었고 두 노인네 쓰임새는 담배 한 갑 정도였다.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책상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다시 볼펜을 잡았다.
저는 89년 12월 24일 출소해서 제일 먼저 고향 임자도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형님은 조계산 어느 골짜기에선가 숨졌다고 누이 동생이 일러주더군요. 고맙게도 임자도 초등학교 동창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저는 선산에 가서 아버님께 술잔을 올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총 맞아 돌아가신 그 한이 눈을 감으시고서라도 풀렸을까요? 아버님 눈에 임자도 푸른 물이 핏빛으로 일렁거렸을 것이고 바다 갈매기는 시체 위를 떠도는 독수리 떼처럼 보였을 겁니다. 분단은 우리 가족에게 큰 한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상처를 삭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오기태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빨치산이었던 형의 권유로 인민군에 입대했다. 목포에서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낙동간 전선으로 가려던 차에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여단을 따라 목포, 장흥, 지리산, 오대산을 거쳐 강원도 양양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인민군 2군단 9사단 32연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때가 10월 말이었다. 당시 32연대는 국군 대대장 출신으로 대대병력 전체를 데리고 월북한 강태무였다. 32연대의 주요임무는 금강산 일대에서 미군의 남쪽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50년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이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전진했다. 10월 25일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제 9병단의 3개 군단이 장진호 일대에 집결해서 이들에 대한 포위 공격에 들어가자 미군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전황은 압록강 방면도 마찬가지여서 11월 30일 맥아더는 모든 전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오기태가 속한 32연대는 이들의 퇴각 길목을 막으며 원산으로 진공했다. 원산항이 막히자 미군은 흥남항을 택해 12월 15일부터 ‘흥남 철수’를 시작했다.
오기태는 참전 후 이곳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51년 여름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6개월간 생사를 넘나들었다. 어렵게 회복한 그는 전방에 있을 때 노동당에 화선입당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그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서 정전협정을 맞았다. 이후 4년간 복무를 더하고 1957년 중사로 제대해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북은 1차 5개년계획(1957~1961)에 따라 중공업 부문에 청년들을 집중배치했었다.
그는 온성 탄광에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되어 탄광지도원으로 승진했다. 1959년 초에는 청진 공산대학에 입학해 당의 정강 정책, 항일유격투쟁사들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온성군 인민위원회 상업 검열국으로 배치받아 상점들의 부정행위들을 단속했다. 그 후 국토청 토지관리지도위원이 되어 온성군 내 토지, 산림 실태를 조사했다.
이래저래 온성에서 일을 하던 오기태는 1959년, 군수방직공장에 다니던 김외식을 만나 혼례를 치렀다. 3남매를 낳고 막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문화부의 소환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야간행군, 태권도, 무전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이봉로 조장과 함께 내려 왔다 귀환 길에 체포된 것이다.
▲ 오기태 선생
새벽 4시에 예약 취사를 한 전기밥솥에서 쉬쉬 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새벽일 나가는 조상이의 아침상을 차려줘야 한다. 오기태는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일어났다. 청국장을 끓이고 겨울 시금치를 무쳤다. 후라이팬을 달궈 꽁치도 올렸다. 맛나게 먹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선가 간을 맞추는 게 힘들어져 속상할 때가 많다. 요즘 들어 그를 보면 안쓰럽다. 칠십이 넘은 나인데 공사장 일을 나가고 전주에서 대전 유성까지 그 먼 길을 다니니... 오기태는 그를 깨우려다 조금 더 자게 놔뒀다. 밥상 준비를 얼추 마친 그는 책상에 앉아 다시 펜을 잡았다.
대통령님, 2018년 평양 능라동 경기장에서 하셨던 감동적인 연설을 기억합니다. 온 겨레가 가슴 벅차게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사무치게 와 닿았습니다.
오기태는 ‘닿았습니다’에 구두점을 찍고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사실 오기태는 1차 송환이 좌절되자 혼자 온성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2004년부터 여러 번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넘어가서 온성군이 마주 보이는 도문(圖們)시 쪽으로 이동했다. 어찌어찌 중국 공안과도 선을 연결해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통한 결과가 없자 그는 두만강을 그냥 건너가려 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온성이고 그는 10여 년 이상 그곳에 근무했기에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는 길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태는 발걸음을 거두었다. 그는 판문점을 통해서 동료 장기수들과 함께 당당히 돌아가고 싶었다. 그게 올바른 길이고 다른 장기수들에 대한 도리라고 여겨졌다. 포기하고 연변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안개비처럼 고이고 가슴에는 검은 비가 흘렀다. 그러면서 늙은 몸은 오른 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오기태의 기침이 더욱 심해지더니 오장육부를 게워낼 듯 소리마저 커졌다. 휴지를 급히 뜯어 입을 막았는데도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오줌이 조금씩 새어 나와 속옷 마저 축축하다. 오기태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몇 줄만 더 쓰면 된다. 얼른 마무리하고 새벽밥 먹여서 조상이를 출근시켜야 한다.
쿡 쿡 찌르는 배를 움켜잡고 기침을 억누르며 다시 볼펜을 꽉 쥐었다.
저는 부탁드립니다.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2차 송환을 간절히 바라는 어느덧 구순을 넘나드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둘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도 강담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두화 선생을 비롯 여러 동지들이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구십 살인 나도 오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우리들을 보내주는 일은 평화를 위한 중요한 걸음입니다. 615선언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국놈들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일, 대통령님이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조차 늦추면 안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창문으로 슬그머니 어둠을 뚫고 달빛이 들어왔다. 조각같은 그 빛은 오기태가 벽에 붙여놓은 두 장의 사진을 비췄다. 한 장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한 장은 2018년 백두산 천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하늘로 치켜올린 장면이다.
오기태는 두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침이 계속되었다. 고개가 자꾸 떨궈지고 눈마저 감긴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쓰러질 듯 다시 책상에 앉았다. 감기는 눈을 치뜨고 떨궈지는 고개를 가누며 마지막 줄을 써내려갔다.
죽기 전에 아내 김외숙과 춘자, 정자, 성일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막내를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그의 손에서 볼펜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가 푹 책상으로 떨궈졌다. 기침과 숨이 가느다랗게 몇 번 이어지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오기태의 눈은 어느새 감겨버렸다. 시계는 3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오기태 선생 추도식 [사진 : 통일뉴스]
<못다한 이야기>
⓵ 오기태선생은 2020년 12월 4일 필자에게 생애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힘주어 문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릴 것이고 그 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청원서를 올렸는데도 2021년까지 송환이 안 되면 연변을 통해 온성으로 가서,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겠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생애 구술 삼일 후인 새벽 4시에 숨졌습니다.
⓶ 이 글에서 흥남철수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간)을 참고했습니다.
③ 아래 추모시는 정충식_전농 전북도연맹 정책위원장이 오기태 선생을 추모하며 남긴 시다.
오기태 선생님을 추모하며
새벽 4시에 당신은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농사짓던 땅 아이들의 살 내음 부인이 초가 살 밖에서 부르던 소리 담아오면 잠 못 이루고 일어났지 간수가 휘두르면 살덩이 떨어져 나오던 매질 의지를 꺾으려 육신을 가두었던 독방의 쇠창살도 막지 못했지
버스 타면 한나절 기차 타면 반나절 갈 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갔을 그러나 기어이 당신의 걸음으로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의연히 걸어가고자 했던 해가 갈수록 사무치게 잠을 깨우던 그 시간
당신의 몸이 북녘에 있을 때도 그리움은 남녘의 바다 고향 회귀하는 민어를 품은 임자도 너른 물결따라 뜨겁게 심장이 뛰었으니 처자식을 뒤로 하고 내려왔었을 당신 당신이 사랑했던 조국은 당신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을 안겼는지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고 대답하지 못해도 돌아보리다
남아있는 자들이 슬픔을 머금고 모여 오늘 이제야 북녘으로 마지막 통일의 배 띄우네
철새의 날갯짓이 부러워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을 당신의 숨결을 싣고 얼어붙은 통일광장의 매운 먼지마저 삭삭 털어 담아 미련하도록 깊고 컸던 조국 사랑의 의지까지 남김없이
영원히 안기고 싶었던 새벽 한기마저 따습게 데우는 아궁이 연기 피어오르는 꿈에 그리던 당신의 땅으로 훨훨 세상에 나온 것은 천명이었지만 기꺼이 고난의 운명을 선택하여 깃발처럼 펄럭이며 살았던 시대마저 태우고
님이여
당신이 떠났던 자리 뒤로 한겨울 추위를 물리며 꽃이 필 것이외다 통일의 꽃 해방의 꽃
눈물 대신에 뜨거운 심장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마다 다시는 마르거나 시들지 않을 꽃이 되어 남녘의 한라부터 북녘 백두산 골짜기까지 해마다 계절 구분 없이 되살아나 필 것이외다 당신의 걸음마다 뿌린 씨앗이 뿌리를 뻗고 땅의 숨통을 틔웠으니 본디 하나였던 반도 하나의 하늘 아래서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민중의 땅에서 영영 필 것이외다
민병래 작가
1999년에 광고대행사 ‘황소와 나비’를 창업하여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1998년부터 문해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푸른’의 이사를 맡고 있고 2000년에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파란자전거 출판)을 썼다. 2015년부터 군함도의 작가 이재갑 사진가와 함께 생각하는 사진모임 '포피엔스'에서 활동하고 있고 2017년 공동전시 ‘마포, 사진을 품다’에 참여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에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사수만보>를 2019년부터 연재중이다.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1월 초로 예정돼 있는 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김여정의 입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여정은 노동당 제1부부장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훨씬 뛰어넘는 위치에 이미 도달했다. 그가 행사하는 권한이 그의 실질적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 3월 3일에는 김여정 명의의 대남 담화가 나왔다. 담화에서 그는 "불에 놀라면 부지깽이만 보아도 놀란다고 하였다"며 "어제 진행된 인민군 전선 포병들의 화력전투훈련에 대한 남조선 청와대의 반응이 그렇다"고 한 뒤 '나는'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나는 남측도 합동군사연습을 꽤 즐기는 편으로 알고 있으며 첨단 군사장비를 사오는데도 열을 올리는 등 꼴보기 싫은 놀음은 다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같은 달 22일엔 김여정 명의로 대미 담화도 발표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코로나19 방역과 관련된 협력 의사를 밝혔다는 점 등을 언급한 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거론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두 수뇌들 사이의 친서가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력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평형이 유지되고 공정성이 보장되여야 두 나라 관계와 그를 위한 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식 담화에 '나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
▲ 북측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사진은 2018년 2월 10일 오후 강원도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대 스위스 관전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는 모습.
지도자 1인의 권위가 절대적인 북한 체제에서, 김여정은 '나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다면'과 같은 표현을 공식 문건에 사용했다. 이는 김정은의 신임이 매우 두터움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지위가 김정은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돼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고 권력이 동일 혈통에서 2대나 3대째 승계되면, 그 가문은 남다른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공식적인 정권 핵심부와 더불어 지도자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권력 분배에 간여할 여지가 넓어진다. 그래서 김일성 가문 사람들이 김정은의 건강이나 자녀 나이 등을 고려해 김여정에게도 힘을 실어준 결과로 '나는' '개인적인 생각' 같은 표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김여정은 김정은과의 공식 동행을 통해서도 위상을 드러낸다. 2019년 8월에는 초대형 방사포 시험발사 현장에서 김정은을 수행했고, 2020년 3월에는 전술유도무기 시범사격 현장에서 김정은을 수행했다. 정치국 후보위원이나 노동당 제1부부장 같은 공식 직함과 관계없이 이미 2인자 지위를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런데 그의 2인자 지위가 곧바로 후계자 지위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2인자에 더해 후계자 지위까지 확보했는지를 판단할 때는 두 가지 선례를 참고할 만하다.
그동안 북한이 후계자를 띄운 방식
북한은 세습이 사실상 두 번이나 일어났지만 '공식적'으로는 세습이 용인되지 않는 국가다. 북한 헌법과 노동당 규약 내에서 김일성·김정일이 특별한 위상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은 공식적으로 인민공화국의 국체를 띠고 있다. 2019년 8월 개정된 북한 헌법 제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을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어난 두 차례 권력 승계는 그런 구도를 반영했다. '법적으로 세습 불허, 사실상 세습 허용'이라는 이 구도에 맞게 김일성의 권력이 김정일에게 승계되고 김정일의 권력이 김정은에게 승계됐다.
세습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에서는 후계자에게 태자나 세자 같은 지위를 부여한다. 이런 지위를 받은 후계자들은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공부나 자기수양에만 전념해도 된다. 이런 유형의 후계자들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세습이 인정되는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고도 후계자 지위를 안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방법으로는 후계자 지위를 안정시키기 힘들다. '내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지도자의 언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적인 후계자 지위가 없기 때문에, 그런 언명만 갖고는 지도자의 사후에 후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이 그동안 사용해온 방식은 후계자에게 실질적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넘어갔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누구도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후계자의 양 어깨에 실질적 권력을 얹어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남한에서 박정희 유신체제가 등장한 1972년 4사분기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됐다. 그런 뒤에 북에서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작업이 전개됐다. 1972년 10월에는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고 1973년 7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부장이 됐다. 같은 해 9월엔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가 됐다. 그리고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되면서 '김심'이 김정일에게 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그것은 내부적인 후계자 공인에 그쳤다. 북한은 그후 6년간 김정일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문에 1974년 11월 남한에서는 도쿄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에 김정일이 참석했다는 오보까지 나왔다. 1974년 11월 18일 치 <경향신문> 기사 '북괴 김정일 동경에'는 김정일이 이종혁이란 가명으로 총회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사 사진 속의 이종혁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외교관 리종혁과 비슷했다. 리종혁이 IPU 총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당시에는 김정일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오보가 나왔다.
북이 김정일 후계 작업을 내부적으로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명시한 시점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 때였다. 김정일의 얼굴이 남한과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다. 이 해에 김정일은 묵직한 포스트를 받았다. 그는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비서국 비서, 노동당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이었다.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쓴 <북한의 역사 2>는 "조선노동당 총비서인 수령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정치국·비서국·군사위원회라는 당내 3대 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된 것"이라며 "당시 김정일의 당 중앙위원회 공식 서열은 김일성·김일·오진우에 이은 4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2인자임이 확실했다"라고 짚었다.
1974년에는 정치위원에 임명되면서 '김심'의 향방이 확인됐고, 1980년에는 노동당 3대 기구 지도부에 진입함에 따라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김정일에게 넘어갔다는 점이 확인됐다. 김정일이 군사위원 직까지 차지하면서 그의 후계자 지위는 국내외적으로 공고해졌다.
국가권력을 넘기는 방식
▲ 2011년 9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노농적위대 열병식 모습.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김정일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09년부터 김정은 후계 작업이 진행될 때도 유사 현상이 나타났다. 그해 1월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은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명확한 후계자 지위에 올랐다. 군사권을 비롯한 국가권력 상당부분을 김정은에게 넘기는 방법으로 지위를 명백히 했던 것이다.
1980년에 김정일이 차지한 포스트보다 2010년에 김정은이 차지한 포스트가 훨씬 묵직했던 것은 상황의 긴급성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의 김일성 건강과 2010년의 김정일 건강이 확연히 달랐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두 가지 선례는 김정은의 후계자를 공식화할 때도 되풀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의 권력이 새로운 인물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사 조치가 그 신호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의 김여정은 2인자 지위는 분명히 확보했지만, 1980년 김정일이나 2010년 김정은에는 아직 근접하지 못했다. 1974년 김정일에도 접근했다고 보기 힘들다. 국가권력의 상당부분이 김여정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증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현재 지위는 2인자일 뿐, 후계자는 아니다.
현재는 2인자일 뿐
▲ 2019년 7월 8일 조선중앙TV가 방영한 김일성 주석 사망 25주기 중앙추모대회 당시 모습. 김여정 당 제1부부장(가운데)이 리수용 부위원장(왼쪽), 최휘 부위원장(오른쪽)과 함께 주석단에 앉아있다.
향후 김여정이 2인자에 이어 후계자 지위에 도달할 경우에도, 영속적인 지위일지 아니면 한시적인 지위일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도 선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1974년에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내부적으로 확정되기 직전까지는, 김일성 동생인 김영주가 후계자가 될지 모른다는 관측이 많았다. 1974년 2월 16일 치 <동아일보> 기사 '김일성 후계로 부각'은 김영주가 부총리에 임명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김일성이 실제(實弟)인 김영주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은 김영주에게 노동당과 행정부의 실권을 모두 장악시켜 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았던 김영주는 그해에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자연스럽게 2선으로 밀려났다.
김정일 집권기에는 동생 김경희가 한때 주목을 받았다. 김정일이 "김경희는 곧 나이고, 김경희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라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을 정도다. 하지만 김경희의 지위는 노동당 경공업부장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기 자녀에게 권력을 넘기기 전에 형제들에게 힘을 실어준 적이 있었다는 선례가 김정은-김여정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향후 김여정이 후계자가 된다 해도, 김정은이 살아 있는 한 한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정권 하에서 김여정의 존재를 더욱 더 부각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김정은의 자녀가 아직 장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녀가 장성하게 되면 김여정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
설령 김여정이 후계자가 된다 해도 그가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처럼 될지 아니면, 일시적인 후계자로 그칠지를 판단해야 한다. 한시적인 후계자에 그친다면, 한국의 국무총리나 미국의 부통령처럼 최고지도자의 유고 및 궐위에 대비하는 대타일 가능성이 크다.
정경원 민주당 부산시당 사무처장, 박화국 정책실장은 시민들과 면담에서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 박근혜 사면 완전철회’에 대해 “아직 논의를 해보지 않아 입장을 밝히기 조심스럽다”라며 이후 부산시당 회의를 통해 대책 및 입장 정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부경주권연대와 부경대진연은 “국민들이 민주당에 180석 의석수라는 권력을 준 이유는 이를 누리는 것이 아닌 적폐 청산을 위해 싸우라고 준 것”이라며 “혹자는 이번 이낙연 대표의 발언을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권모술수가 아닌 정공법으로 적폐 청산에 나설 때 국민이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면담에 참여한 민주당 부산시당 인사는 이낙연 대표의 사면 발언에 대해서는 “개인의 의견"이라고 밝혔다.
아래는 면담요청서 전문이다.
-------------아래---------------------
윤석열 탄핵과 이명박근혜 사면 완전철회를 요구하는 면담 요청서
"이낙연 대표님께 호소드립니다"
지난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직 2개월’ 징계처분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윤 총장은 검찰총장 업무에 복귀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재가한 징계를 뒤집은 사법쿠데타’라며 분노했고, 검찰개혁과 사법적폐 청산 여론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국회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탄핵해야 합니다.
촛불국민의 염원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입니다. ‘나라다운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신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적폐를 완전히 청산하라고 집권여당에 압도적인 180석 의석을 몰아주었습니다.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외침에 이제 국회가 과감하게 나서야 합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적폐청산의 최대 걸림돌이자 검찰개혁 저지의 선봉장입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자리에 있는 한 개혁은 온갖 방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윤석열을 중심으로 검찰과 사법적폐, 보수언론과 수구세력은 더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각종 개혁조치들은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윤석열 정치검찰은 보궐선거와 대선에 개입해 반개혁 반정부 동맹을 형성해 민주개혁을 뒤엎으려 할 것입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 요건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국민을 위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윤석열을 탄핵해주십시오.
지금 윤석열을 끌어내리지 못하면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은 숱한 방해와 반대 속에 좌절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또 다시 후퇴하게 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또 누군가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슬픈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 사면논의는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적폐청산과제는 산처럼 쌓여있고 검찰개혁의 상징인 공수처 출범은 이제 걸음마를 뗀 상태입니다. “적폐를 청산하자!”,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촛불국민의 염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고개 숙여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두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근혜 사면은 있을 수 없으며 사면논의는 즉각 중단, 완전 철회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촛불을 들고 일어선 국민과 함께 해주십시오. 철저한 적폐청산, 중단 없는 사회대개혁의 길에 이낙연 대표님과 더불어민주당이 함께 하리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