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한국, 차세대 전투기 F-35A 도입 확정


총사업비 70억 달러...가격 거품. 기체 결함 문제점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9/25 [04:54] 최종편집: ⓒ 자주민보 한국 정부가 미국 록히드마틴 사가 제작한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A를 구입하기로 최종 구매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한국방위사업청은 지난 24일 F-35A를 대당 1천200억원, 미화로 1억1천5백만 달러 총 구매액 70억 달러(한화 약 7조3천억)에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앞서 지난 3월 F-35A를 차기 전투기 후보로 단독 결정한 뒤 제작사인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와 가격과 기술, 조건 등에 관해 협상을 진행해 왔다. 백윤형 방사청 대변인은 이날 차기 전투기(F-X)의 총사업비가 7조3천억원, 미화로 70억 달러라면서, 이 가운데 66 퍼센트가 전투기 구매, 26 퍼센트는 종합군수지원, 그리고 8 퍼센트는 무장과 시설 등에 투입된다고 전했다. 한편 중앙일보는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한 국책연구원의 말을 빌려 차세대 전투기 구입에서 스텔스 기술 이전이 빠져 가격에 거품이 끼었다는 것과 개발 단계에서 결함이 발생했다는 문제점을 지적해 F-35A 구입 결정에 대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역사이갸기-23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대외(對外) 관계사(關係史) - 9(三神五帝本紀), 장승(長丞)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4/09/23 [18:3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장승(長丞)의 이정표(里程標)로서의 기능(技能)에 대한 비판(批判) ❝ 이정표(이정표)로서의 기능 a) 장승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시대인 16세기부터 나타난다. 중국의 노표(路標)인 후(堠)의 영향으로 우리의 이정표와 결합하여 보여주지만 이 시기로부터 우리나라의 노표가 재래의 중국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의 노표인 후(堠)에 세운 목주(木主)의 상부에 귀면(鬼面)이나 무서운 인면(人面)을 조각하여 형태를 노표에 복합시킨 것이라 한다.(김두하, 객표장승고찰, 한국민속학 12집, 1980년, 15쪽) b) 이정표로서의 장승 기록은 장승의 “생(栍)”자를 살린 “생곡(栍谷)”이라는 고려사의 역명(驛名)과 이조 초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齎叢話) 제5권 금사문조(金斯文條)에 나오는 장승에 대한 언급이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동네 입구에서 축액을 하고 이정표의 구실을 했다는 장승이 주로 교통중심지였던 마을에서 떠들썩한 의례로 현재도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정표의 기능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c) 이정표(堠)로서 가령 숫장승 “자경성팔십리(自京城八十里)”, 암장승에 “군내이십리(郡內二十里)” 등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 장승(長丞)이 이정표(里程標)의 기능(技能)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승(長丞)에 대한 분석에서 장승(長丞)의 중요(重要)한 역할(役割)로서 분석(分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장승(長丞)에 대한 우리겨레의 믿음은 고작 사람들에게 가는 길이나 알려주는 기능(技能)을 하자고 창작(創作)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강조하지만 장승신앙(長丞信仰)은 최소 6천여 년 아니면 일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겨레의 뿌리신앙인 삼신교(三神敎) ‧ 삼신사상(三神思想)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겨레에 의해 창작(創作) ‧ 탄생(誕生)이 된 이후 장구(長久)한 세월(歲月) 이어져 온 장승(長丞)이 고작해서 사람들에게 가는 길이나 알려주는 기능(技能)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물론 각 지역의 장승(長丞)을 제작하는 특징에 따라서 그 지역을 상징하기도 하였을 것이고, 또 때로는 그 지역의 이름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글귀를 부수적으로 표기를 했을 수도 있다. 이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방향을 가늠하기도 하였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장승(長丞)에 고을 이름이나 가는 방향등을 표시하고, 이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방향이나 거리를 가늠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승(長丞)이 가지는 부수적(附隨的)인 것이지 중요(重要)한 기능(技能)을 한 것은 아니다. 이를 두고 장승(長丞)의 중요한 기능(技能)으로 분류를 하고 분석을 하는 것은 장승(長丞)이 가지는 우리겨레의 믿음 즉 장승신앙(長丞信仰) 더 나아가서 삼신신앙(三神信仰)에 대한 잘 못된 인식(認識)을 심어줄 수 있다. 즉 장승신앙(長丞信仰)이나 삼신신앙(三神信仰)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하고 믿어온 종교적(宗敎的) 가치(價値)와 사상(思想)을 말살(抹殺)시키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논자(論者)는 위에 논(論)한 것보다도 더 큰 우(愚)를 범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 하면 우리 조상(祖上)들의 종교적(宗敎的) 믿음과 사상적(思想的) 가치관(價値觀)을 모독(冒瀆)하고 있다. “중국의 노표(路標)인 후(堠)의 영향으로 우리의 이정표와 결합하여 보여주지만 이 시기로부터 우리나라의 노표가 재래의 중국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고 하여 우리 조상들을 미개인 혹은 바보 천치로 격하시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창작하고 수천 년 동안 믿어온 삼신신앙(三神信仰) 그리고 이로부터 탄생(誕生)을 한 오제(五帝)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조형적으로 형상화 시킨 장승(長丞)에 대해서 논자는 이민족(異民族)의 이정표(里程標) 문화(文化)를 끌어들여 우리 조상들을 사정없이 격하(格下)시키고 있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일제가 감행한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찌든 소위 학자(學者)입네 하는 사람들의 우리겨레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에 대한 인식(認識)이다. 자신의 조상들에 대해 조상들의 업적(業績)을 제대로 분석(分析)하고 평가(平價)를 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當代)의 구성원(構成員)들을 올바르게 선도(先導)를 하고, 또 미래(未來)에 오게 될 후손(後孫)들에게 참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문화적(文化的) 업적(業績)을 전해주어야 할 전문가(專門家)요 학자(學者)요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 반대(反對)의 역사적(歷史的)인 사실(事實)과 문화적(文化的) 현상(現想)을 고착화(固着化)시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 할 일인가. 논자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중국의 노표(路標)인 후(堠)의 영향”이라고 하여 우리겨레가 창작하고 믿어온 삼신신앙(三神信仰)을 모독하고 있다. 또 논자는 “장승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시대인 16세기부터 나타난다”고 하면서 우리겨레가 장승에 대한 그 어떤 구체적(具體的)인 기록이 조선시대인 16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듯 하고 있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논자는 그간 우리겨레의 사서(史書)나 문화서(文化書)등이 이민족(異民族)에 의해 병화(兵禍)를 당하였고 자신들의 정치적(政治的) 정당성(正當性)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조상들 기록들을 멸실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거나 없었던 듯 분석을 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악랄하게 왜곡(歪曲) ‧ 조작(造作)된 우리의 역사(歷史) ‧ 문화적(文化的) 사실들과 일제가 수많은 역사서(歷史書) 및 문화(文化), 종교(宗敎), 사상(思想)에 관(關)한 서적(書籍)들을 수거(收去)해 불사르고 일본으로 가져간 것에 대해서 논자는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논자의 분석에서 “장승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시대인 16세기부터 나타난다”까지만 하여도 별반 비판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국의 노표(路標)인 후(堠)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나 “이 시기로부터 우리나라의 노표가 재래의 중국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는 분석에서는 더욱더 우리 조상(祖上)들을 모독(冒瀆)을 하고 있다. 이 시기 즉 조선시대인 16세기 이후에는 우리의 노표(路標, 里程標)가 마치나 화하족의 재래식(在來式) 노표(路標, 里程標)의 영향(影響)으로부터 벗어나 진일보(進一步)한 듯 묘사(妙思)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욱더 심대한 오류를 담고 있다. 위 문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결국 조선시대인 16세기 이전까지는 여전히 화하족의 노표(路標, 里程標)의 영향(影響)아래 있었으며, 노표(路標, 里程標) 역할(役割)을 한 장승(長丞)에 대한 믿음 역시 화하족의 영향(影響)아래에 있었다는 분석(分析)이 된다. 그럼 조선시대인 16세기 이전까지는 우리겨레가 자체(自體)로 창작(創作)하고 믿어온 믿음 즉 종교적(宗敎的) 신앙체계(信仰體系)나 사상적(思想的) 현상(現想)들이 없었다는 분석(分析)이 성립(成立)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암울할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우리 조상들 바보가 아니었으며 천치도 아니었다. 아니 앞선 장에서 김교헌 선생의 ≪신교(神敎)의 다른 갈래≫에서 보았듯이 오히려 이민족(異民族)들은 우리겨레를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보았으며 우리겨레가 사는 땅을 하늘나라로 보고 숭상(崇尙)과 숭배(崇拜)를 했었다. 우리가 예전에 늘 상 입에 달고 살다 시피 했던 우리겨레는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말이 그저 나온 말이 아니었다. 이민족(異民族)이 우리겨레를 그토록 숭배(崇拜)를 하고 숭상(崇尙)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했겠는가. 결국 상(上) ‧ 고대시기(古代時期) 온 누리 문명(文明)과 문화(文化) 그리고 종교(宗敎), 사상(思想) 등 모든 부분에서 이민족들은 바로 우리겨레의 영향(影響)을 강력하게 받았기에 그들은 우리겨레를 하늘처럼 떠받들었으며 그토록 숭배(崇拜)를 하고 숭상(崇尙)을 했던 것이다. 우리겨레와 이민족과의 관계가 은혜(恩惠)를 베풀고 받은 관계였었는데 현대(現代)를 살아가는 후손(後孫)들은 그 관계를 정반대로 해석(解析)을 하고 분석(分析)을 하고 있으니 지하에 계실 조상들이 통곡을 할 일이다. “우리의 노표인 후(堠)에 세운 목주(木主)의 상부에 귀면(鬼面)이나 무서운 인면(人面)을 조각하여 형태를 노표에 복합시킨 것이라 한다.”한 부분은 논자는 역시 장승(長丞)의 본질적 측면이나 외형적 측면 모두 제대로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장승(長丞)의 외형적(外形的) 형상(形象)이 얼핏 보면 험상(險狀)궂고 무섭기까지 한 면(面)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부분에 대해서는 장승(長丞)의 조형적(造形的) 형상화(形象化)에 대한 분석(分析)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장승(長丞)은 장승(長丞)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리적(心理的)인 상태(常態)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도 이미 분석을 하였다. 즉 바라다보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幸福)한 마음을 가진 상태(常態)라면 장승(長丞)의 외형(外形)은 해학적(諧謔的)이고 풍자적(諷刺的)인 즐겁고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또 사악(邪惡)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볼 때에 그 장승(長丞)은 자신들을 엄(嚴)히 꾸짖는 엄한 얼굴 심지어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무서운 외형(外形)으로 보일 것이다. 그건 곧 장승(長丞)이 자연 그대로 미(美)를 외형적(外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자는 “우리의 노표인 후(堠)에 세운 목주(木主)의 상부에 귀면(鬼面)이나 무서운 인면(人面)을 조각하여 형태를 노표에 복합시킨 것이라 한다.”고 하여 장승(長丞)의 험상(險狀)궂고 무서운 면(面)만을 부각시켰다. 또한 장승(長丞)의 외형(外形)이 우리의 위대한 임금인 ≪신시(밝달나라,검불) 제 16대 치우 한웅(桓雄, 한검)≫을 형상화(形象化) 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분석(分析)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역사(歷史) ‧ 종교(宗敎) ‧ 문화(文化) ‧ 사상(思想) 등에 대해서 자주적(自主的)으로 해석(解析)을 할 줄 모르고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 사고(思考)에 찌들어 분석(分析)을 하다 보니 제대로 분석(分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데 나의 입장(立場)에서 나의 주관적(主觀的) 생각대로 바라다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남의 입장(立場)에서 남의 생각으로 바라다보고 분석(分析)을 하니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으며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 지조차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이다.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다시 한 번 강조를 한다. 장승(長丞)의 외형(外形)은 전쟁(戰爭)의 신(神)이요 벽사(辟邪)의 신(神)으로 온 누리에 떠받들어지고 있는 “신시(神市, 검불, 밝달 나라) 제 16대 한웅(桓雄. 한검)인 ≪치우 한웅(桓雄. 한검)≫”을 형상화 시킨 것이다. 따라서 장승(長丞)의 외형(外形)은 이민족(異民族)의 것을 모방(模倣)을 했다거나 형상화(形象化)시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위대한 조상(祖上)을 장승(長丞)의 외형(外形)으로 형상화(形象化)시킨 것이다. “이정표로서의 장승 기록은 장승의 “생(栍)”자를 살린 “생곡(栍谷)”이라는 고려사의 역명(驛名)과 이조 초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齎叢話) 제5권 금사문조(金斯文條)에 나오는 장승에 대한 언급이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동네 입구에서 축액을 하고 이정표의 구실을 했다는 장승이 주로 교통중심지였던 마을에서 떠들썩한 의례로 현재도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정표의 기능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상기 인용문에서는 아예 장승(長丞)을 이정표(里程標)로 확정(確定)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건데 장승(長丞)의 본질적 기능은 절대 이정표(里程標)의 역할이 아니고 ≪삼신(三神)≫에 대한 우리겨레의 믿음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시킨 것이다. 이를 이정표(里程標)로 확정하는 것은 숭고한 우리겨레의 믿음인 ≪삼신신앙(三神信仰)≫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역명(驛名)이 생곡(栍谷)이라 하여 과연 이게 장승(長丞)을 말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확정을 할 수 있는가. 앞선 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장승(長丞)에 대한 기록으로 약 1200년 전 신라 경덕왕(景德王) 18년 (서기 759년) 전남 장흥군(長興郡) 보림사(保林寺)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령탑비(보조선사령탑비)”에 왕명을 받들어 장생표주를 세웠다는 “조선금석총람(조선금석총람)”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여기에는 “是以乾元二千年特敎植長生標柱至令存焉(시이건원이천년특교식장생표주지령존언)”이라고 기록어 있다. 여기에서 장승(長丞)에 대한 단서는 ≪장생표주(長生標柱)≫라는 기록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경북 청도군(淸道郡) 운문사(雲門寺)에 세워진 것인데 경북 청도군 운문사 선원내외에 장생표탑(長生標塔) 11개를 세웠다(雲門山禪院長生標塔公文一道長生十一阿尼岾嘉西峴畝峴西北買峴‧‧‧. 운문산선원장생표탑공문일도장생십일하니첨가서현무현서북매현‧‧‧)”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장승(長丞)에 대한 단서는 ≪장생표탑(長生標塔)≫이다. 고려시대 장승에 대해서는 “경남 양산군(梁山郡)하북면(下北面) 백암리(白巖里)의 통도사(通度寺)에 세운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는 고려 선종(宣宗) 2년에 세운 것으로 通度寺孫(阜+川)國長生一座啓寺所報尙書部乙丑五月日牒前判思如設立 今是施爲寺以立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통도사손천국장생일좌계사소보상서부을축오월일첩전판사여설립 금시시위사이립 태안원년을축십이월일)”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위 기록에서 장승(長丞)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는 단어 혹은 문자는 ≪국장생(國長生)≫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국시기부터 고려시기까지의 남아있는 기록에서 장승(長丞)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는 단어 혹은 문자는 신라의 기록 ≪장생표주(長生標柱)≫,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장생표탑(長生標塔)≫, 고려시대의 기록 ≪국장생(國長生)≫이다. 각각의 시기에 보여주는 기록들 중에서 장승(長丞)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는 두 글자는 바로 세 시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생(長生)≫이다. 그동안 장승(長丞)에 대해서는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장생(長生)≫이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확정을 하였다. 그런데 논자는 “생(栍)”자를 살린 “생곡(栍谷)”이라는 고려사의 역명(驛名)을 예로 들면서 그것이 곧 장승(長丞)을 세워두었던 지역명으로 확정을 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본다. 굳이 매 글자를 대입해서 본다고 하면 ≪생(生)≫자와 ≪생(栍)≫자가 어떻게 같은가. 물론 현대에 뜻글자 ≪생(栍)≫자를 ≪장승 생(栍)≫으로 ≪훈(訓)≫을 달아놓았지만 과거에도 그러리라고 보장하지 못한다. 만약 뜻글자를 사용하던 초기부터 ≪생(栍)≫자를 ≪장승 생(栍)≫으로 ≪훈(訓)≫ 사용하였다면 왜 신라시기, 삼국유사, 고려시기에 나타나는 장승(長丞)에 대한 기록이 ≪장생(長生)≫으로 되어있는가. 따라서 논자가 고려시기 기록에 나타나는 역명이 “생곡(栍谷)”이라고 하여 이를 ≪장승골(長丞골)≫로 확정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동네 입구에서 축액을 하고 이정표의 구실을 했다는 장승이 주로 교통중심지였던 마을에서 떠들썩한 의례로 현재도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정표의 기능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는 것 역시 억지 주장일 뿐이라고 본다. 동네 입구에서 축액(逐厄)을 하였다면 그 곳이 곧 장승(長丞)을 세워놓기에 명당(明堂)자리이고 또 고을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지리적(地理的)인 이점(利點)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곧 장승(長丞)이 이정표(里程標)의 기능(技能)을 했다고 확정(確定)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장승이 주로 교통중심지였던 마을에서 떠들썩한 의례로 현재도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정표의 기능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는 것 역시 논자의 짐작일 뿐이지 그러한 현상을 가지고 장승(長丞)이 이정표(里程標)의 기능(技能)을 했다고 확정(確定)할 수 없다. 논자 역시 짐작케 한다고 했을 뿐이지 확정하고 있지 못하다. 이 점 잊지 말기 바란다. “이정표(堠)로서 가령 숫장승 “자경성팔십리(自京城八十里)”, 암장승에 “군내이십리(郡內二十里)” 등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여 장승(長丞)을 이정표(里程標)로서 확정(確定)을 하고자 하는 논리(論理)를 전개(展開)하고 있다. 앞서도 분석을 했듯이 일부 혹은 장승에 지역명이나 방향(方向)등이 표기(標記)가 되어있을 수는 있다. 또 지역(地域)의 경계(境界)를 표시(標示)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를 근거(根據)로 장승을 이정표(里程標)의 기능을 중요하게 수행(修行)한다고 확정(確定)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자경성팔십리(自京城八十里)”라는 문장에서 ≪경성(京城)≫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오늘의 서울 조선시대 ≪한양(漢陽)≫을 일본인들이 명명(命名)한 것이다. 따라서 위 숫장승에 “자경성팔십리(自京城八十里)”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장승 제작이 일제강점기 이후에 되었음을 증명해준다. 다라서 이를 근거로 우리겨레의 장승신앙(長丞信仰)의 형상인 장승(長丞)이 이정표의 기능을 중요하게 수행을 했다하는 것은 타당한 분석이 될 수 없다. 또한 아무런 보충 설명 없이 ≪숫장승≫이요 ≪암장승≫이요 하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엄연히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명칭이 있는데 굳이 ≪숫 장승≫, ≪암 장승≫ 하는 것은 장승 본래의 신성성(神性性)을 격하(格下)시키는 것이다. 물론 외형이나 장승에 표기된 이름으로 보면 수컷과 암컷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다. 실제에 있어서도 ≪숫≫은 양(陽)이요 ≪암≫은 음(陰)이다. 따라서 ≪숫 컷≫은 땅위(陽)의 오제(五帝)를 감독하고 보살피며, ≪암 컷≫은 땅 속(陰)의 오령(五靈)을 감독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이런 상세한 설명이 있고 난 후 ≪숫장승≫ ‧ ≪암장승≫하고 불러야 옳다. 우리는 여기서 ≪숫장승≫ ‧ ≪암장승≫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겨레는 언제나 양(陽)과 음(陰)의 조화(造化)를 매우 중시(重視)했으며, 양(陽)과 음(陰)이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온 누리 모든 것들이 균형(均衡)을 이루며 존재(存在)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결국 남녀(男女)는 평등(平等)한 존재(存在)로서 보는 남녀(男女) 평등사상(平等思想)을 태고적(太古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해주고 있다. 이는 혼인을 한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현재 우리는 자신과 함께 사는 ≪암 컷(陰)≫을 ≪마누라≫, ≪집사람≫등으로 부른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조차도 모르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심지어 하대를 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 함께 사는 ≪암 컷(陰)≫을 결코 하대하지 않았다. 여기서 혼인을 한 ≪숫 컷(陽)≫과 함께 사는 ≪암 컷(陰)≫에 대한 호칭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 ≪마누라≫는 다음과 같이 분해가 된다. ≪마누라= 마누 + “ㄹ” + 아(부를 때 붙는 토씨)≫가 된다. 여기서 ≪마누≫는 곧 ≪아누≫가 변천한 것이며 ≪아누≫는 또 ≪안+우≫이며 이는 ≪안 + 우 + “ㄹ”≫ 즉 ≪한울≫이 된다. 또 ≪라≫는 ≪“ㄹ”+ 아≫이다. 결국 ≪마누라≫는 ≪한 우 + “ㄹ” + 아≫가 되며 이는 ≪한울+아(“아”는 상대를 부를 때 붙는 토씨임)≫가 된다. 즉 ≪마누라≫는 ≪하늘아≫가 변천하여 된 이름이다. ≪마누라≫가 절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하대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처럼 높이 떠받드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인 것이다. 우리가 1920년대의 소설이나 작품들을 보면 혼인을 한 ≪숫 컷(陽)≫과 함께 사는 ≪암 컷(陰)≫에 대한 호칭이 ≪안해≫였다. ≪안해≫를 도해하면 ≪안 + 해≫가 된다. ≪안≫은 곧 ≪한≫이다. ≪해≫는 그대로 ≪해(太陽)≫이다. 따라서 ≪안해≫는 ≪안=한, 해=해≫가 되어 결국 ≪한(하늘)해≫가 된다. 즉 ≪숫 컷(陽)≫과 함께 사는 ≪암 컷(陰)≫에 대해 극존칭인 ≪하늘의 해≫로 불렀던 것이다. 지금도 연세가 드신 분들은 ≪안해≫라고 부르고 있으며, 북에서는 ≪안해≫라고 부르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음을 북에서 창작된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마누라≫와 ≪안해≫는 ≪하늘아, 하늘의 해≫로서 같은 의미를 가지며 이는 함께 사는 ≪암 컷(陰)≫에 대한 극존칭임이다. 반면 ≪집사람≫에 대해서는 굳이 도해를 할 필요가 없다. 이는 함께 사는 ≪암 컷(陰)≫에 대해 존경하는 의미도 없으며 그저 집안일이나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매우 부적절한 호칭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말고 함께 사는 이에 대한 호칭에 대해서도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겨레는 양(陽)과 음(陰)의 조화(造化)를 매우 중시(重視)했기에 장승을 세우는 것에서도 언제나 ≪숫 장승≫인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암 장승≫인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장승을 쌍으로 세웠던 것이다. 또한 양(陽)과 음(陰)을 동일시했기에 장승신앙(長丞信仰)에 있어서도 ≪숫 장승≫과 ≪암 장승≫을 함께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남녀의 문제에 있어서도 선진적인 사상이었고 믿음이었는가. 우리겨레에 있어서 장승신앙(長丞信仰)은 남녀(男女) 평등사상(平等思想)의 일단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겨레는 이름 하나, 드러내는 것 하나 섯 불리하지 않았으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장승신앙(長丞信仰)에서도 남녀(男女) 평등사상(平等思想)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배달겨레의 후손된 우리들에게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장승은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로, 그것은 사찰의 경계표시나 호법신(護法神)으로 등장하는데,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普照禪師卑門)에 “장생표주(長生標柱)”(884년)의 명문과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國長生)이라 표기된 판석형 선돌과(1085) 고려시대의 영암 도갑사에 세워진 황장생(皇長生), 국장생(國長栍)의 선돌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장승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졌으며 그 기원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신앙적 조형물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장승의 원시시신앙형태는 고대부족국가 또는 부족연맹시대에 지배신앙이나 이념으로 정착화 되면서 이것이 민족의 일반 법칙대로 전승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장승은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로, 그것은 사찰의 경계표시나 호법신(護法神)으로 등장하는데”라고 하여 적어도 6천여 년 더 나아가서 일만 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우리네 장승신앙(長丞信仰)을 이제는 이민족에게서 전해져 온 불교(佛敎)의 절의 권위를 지켜주는 위치로 전락을 시키고 있다. 도대체 논자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나 그로부터 탄생한 오제사상(五帝思想) 그리고 그 오제사상(五帝思想)이나 믿음을 외형적으로 형상화한 장승(長丞)에 대해서 알기나 하면서 “장승은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라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겨레가 창작한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알고나 있으면서 위와 같이 어이없는 분석(分析)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하다하다 이제는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장승이 불교(佛敎)의 절의 권위(權威)나 지켜주는 문지기로 전락(轉落)을 하고 만다. 여기에 우리네 종교적(宗敎的) 믿음이나 사상(思想)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결국 우리 조상(祖上)들은 외래(外來) 종교(宗敎)의 전당(殿堂)이나 지켜주는 한심한 사람들로 천(賤)하게 전락(轉落)을 하고 말았다. 이 역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폐해(弊害)라고 밖에 뭐라고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오늘을 사는 전문가요 학자요 하는 사람들이 한 번만이라도 역발상(逆發想)을 하지 못하는가. 하나 같이 똑같음에 암담함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이미 전 장들에서 논증을 한 것처럼 불교는 삼국시대 중기에 우리겨레에게 전해져 온 후 우리의 전통종교인 삼신교에 흡수가 되었다. 만약 불교의 절간에 우리네 장승들이 세워져 있다면 불교가 우리네 전통종교인 삼신교(三神敎)에 흡수가 되어 우리의 종교적(宗敎的) 상징물을 세워두었다고 여기지 못하는가. 혹 절간에 장승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불교가 우리네 전통종교의 믿음을 빌어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轉派)하고자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네 전통종교인 삼신교의 기세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장승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졌으며 그 기원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신앙적 조형물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논자의 횡설수설이 극에 달함을 알 수 있다. “장승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졌으며”라는 문장과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신앙적 조형물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라는 문장은 한 문장 안에서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바로 위에서 논증을 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장승은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로, 그것은 사찰의 경계표시나 호법신(護法神)으로 등장하는데”라고 논증을 한 문장과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여기는가. 위 세 문장은 상호 논리적 모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신앙적 조형물”이라는 문장은 결국 논자의 논증대로 분석을 해도 장승의 탄생이 불교가 우리겨레에게 전해진 삼국시대 중기 훨씬 이전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결국 논자의 논증대로 보아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 장승은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로, 그것은 사찰의 경계표시나 호법신(護法神)으로 등장하는데”라는 논증은 성립할 수가 없다. 결국 논자 스스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장승이 사찰의 권위를 말해주는 표시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앞에서 논증을 한 내용을 바로 뒷 문장에서 부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장승신앙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하고 또 장승의 조형적 형상화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논증한 내용을 부정을 하는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장승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졌으며”라고 하여 장승이 마치나 이정표(里程標) 혹은 경계표시(境界標示)가 본질(本質)인 것처럼 논증(論證)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곧바로 뒤에서 이를 부정(否定)하는 논증(論證)을 하고 있다. 앞선 문장 즉 “이렇게 장승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졌으며”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 신앙적 조형물”은 논리적(論理的)으로 그 어떤 합리성(合理性)도 부여하지 않는다. 장승이라는 조형물(造形物)이 솟대 ‧ 선돌 ‧ 돌무더기 등의 원시(原始) 신앙(信仰)에서 기원(起源)을 했다면 결국 장승이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는 신앙적(信仰的) 조형물(造形物)이 아니라 이정표(里程標) 내지는 경계표시(境界標示)라고 해놓고는 바로 뒤에서는 원시(原始) 신앙적(信仰的) 조형물이라고 하고 있는 것은 상호(相互) 모순적(矛盾的)인 논증(論證)이다. 필자가 지나치게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 또 글자 한자 한자를 치밀하게 대비하면서 논증을 하는 것은 우리겨레의 삼신에 대한 신앙과 그로부터 탄생하는 장승의 신앙에 대한 본질적(本質的)인 문제들을 내포(內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논자 뿐 아니라 현 우리사회의 구성원(構成員) 대부분 자신들 조상들에 대한 종교(宗敎) ‧ 사상적(思想的) 업적에 대해 알지 못하다 보니 빚어지는 모순(矛盾)이라고 밖에 설명(說明)할 길이 없다. 이는 또 다시 말 하건데 일제(日帝)가 왜곡(歪曲) ‧ 조작(造作)한 식민사학(植民史學)의 弊害라고 斷言한다. 결국 논증을 하는 문장이 한 문장 안에서 모순을 보인다는 것은 장승이 가지고 있는 본질(本疾)이 논자가 논증을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역(逆)으로 증명(證明)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장승의 중요(重要)한 기능(技能)은 이정표(里程標)로서의 기능(技能)이 아니라는 걸 증명(證明)해주고 있는 것이다. 논자의 장승에 대한 논증 중 뒷부분 논증하는 단어들 가운데 원시(原始) 신앙(信仰)에서 기원(起源)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 굳이 타당성(妥當性)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옳은 분석(分析)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굳이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원시 신앙= 세월이 오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네 조상들이 창작(創作)한 신앙(信仰)인 삼신신앙(三神信仰)은 절대 원시적(原始的)이지 않으며 미개(未開)한 사람들이나 믿었을 미신(迷信)이 아니다. 대단히 정교(精巧)하고 과학적(科學的)이며 논리적(論理的)인 것이 삼신신앙(三神信仰)이다. “그 起源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등과 함께 원시 信仰的 조형물(造形物)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에 대해서도 비판적(批判的)인 분석을 하면 논자의 논증이 결코 옳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추후 상세하겠지만 장승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 등에서 기원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한 무더기로 묶어서 말한다면 장승 ‧ 솟대 ‧ 선돌 ‧ 돌무더기 등은 모두 삼신신앙(三神信仰)을 형상화(形象化) 한 것이니 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분명하게 말 하면 장승의 기원은 솟대 ‧ 선돌 ‧ 돌무더기 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할 것이다. “ 이런 장승의 원시시신앙형태는 고대부족국가 또는 부족연맹시대에 지배신앙이나 이념으로 정착화 되면서 이것이 민족의 일반 법칙대로 전승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길게 본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할 예정이니 여기서는 아주 간략한다. 솔직히 필자는 상기 문장에 나오는 고대부족국가(古代部族國家) 또는 부족연맹시대(部族聯盟時代)라는 것을 인정(認定)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일면 타당성(妥當性)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겨레가 역사시대(歷史時代)를 열기 시작한 이후에 대해서는 고대부족국가 또는 부족연맹시대라는 분석을 옳지 않다. 이 역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기재를 빌어 우리겨레의 유구한 역사와 강력했던 국가 형태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분석기재라고 필자는 본다. 지금으로부터 일만 년 전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되는 만주 요녕성에서 발굴된 홍산문명과 그 문명과의 연관성을 가지는 유물(遺物)들이 조선반도(朝鮮半島)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이미 부족국가 혹은 부족연맹체를 뛰어넘은 문명(文明)을 구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도 후일 따로 분석을 할 것이다. 일단 현재 만주 혹은 조선반도 일대와 또 대륙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물(遺物)과 사적지(史蹟地)등을 비교분석(比較分析)하면 상(上) ‧ 고대(古代)에 부족국가 혹은 부족연맹체를 뛰어넘은 강력한 국가를 형성(形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게 바로 우리겨레가 세운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요 문명(文明)이요 문화(文化)이다. “지배신앙이나 이념으로 정착화 되면서 이것이 민족의 일반 법칙대로 전승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정치적(政治的)인 측면(側面)에서만 분석(分析)을 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비단 논자만이 아니다. 대부분 동일하게 분석을 하고 있다. 본 부분에 대해서는 북한의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 분석(分析) 역시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本質的)으로 본다면 사람의 종교적(宗敎的) 믿음과 사상(思想)의 형성(形性)을 정치적인 목적(目的)에 의해서 탄생(誕生)을 했다고 분석(分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서양의 기독교의 탄생은 일정 정도 정치적 목적을 두고 발전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마도 상(上) ‧ 고대시기(古代時期)에 탄생(誕生)한 종교적(宗敎的) 믿음이나 사상(思想)의 형성은 정치적 목적에서라고 분석을 해야 과학적(科學的)인 분석(分析)이고 현대적(現代的)인 역사(歷史) 문화적(文化的) 실증(實證)을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정치(政治)가 탄생(誕生)하기 이전에 종교적(宗敎的) 믿음과 사상(思想)이 탄생(誕生)을 하였다고 본다. 즉 그 종교적 믿음이 한 사회를 구성(構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共感)을 주게 된다면 자연히 종교적(宗敎的) 믿음의 집단(集團)이 형성이 될 것이요 또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일정한 지경(地境)을 형성(形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굳이 정치적(政治的) 지배신앙(支配信仰)이요 하는 현대인들의 사고의 이념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삼신교(三神敎) ‧ 삼신사상(三神思想)은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에 의해서 탄생(誕生)을 하지 않았으며 이를 수단(手段)으로 사람들을 강제(强制)하지 않았다. 그것은 누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안(平安)하고 행복(幸福)하게 걱정 없이 살아가는 방법(方法)을 제시(提示)하는 믿음이었으며 사상(思想)이었다. 그 종교적(宗敎的) 교리(敎理)와 사상(思想)이 비단 우리겨레 뿐 아니라 이민족(異民族)들에게도 광범위(廣範圍)하게 공감대(共感帶)를 형성(形成)하였기 때문에 상(上) ‧ 고대시기(古代時期) 우리겨레가 온 누리 역사(力士)와 문화(文化), 종교(宗敎), 사상(思想,) 문명(文明)등의 형성(形成)에 커다란 영향(影響)을 미쳤다고 본다. 물론 종교적(宗敎的) 믿음이 일정 정도 정치적(政治的) 이념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否定)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現代社會)에서는 종교(宗敎)와 정치(政治)의 분리(分離)를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지만 기실은 정치(政治)와 종교(宗敎)의 유착(癒着)은 오히려 과거보다도 훨씬 더 강(强)하다고 보아야 한다. 상(上) ‧ 고대시기(古代時期)에도 미미하지만 나라가 형성(形成)이 된 이후에는 종교적(宗敎的) 믿음이 정치적(政治的) 영역(領域)에 영향(影響)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분석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적(宗敎的) 믿음이나 사상(思想)의 형성(形成)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탄생(誕生)을 한 것 인양 일률적(一律的)으로 규정(規定)하는 것은 오류(誤謬)를 범할 수가 있다. 장승신앙(長丞信仰)의 형성(形成)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는 장승신앙(長丞信仰)의 탄생(誕生)은 정치(政治) 이전(以前)이었으며 그 기원(起源)은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 ‧ 삼신사상(三神思想)을 구체화(具體化) 시킨 오제설(五帝說)에 있다. 오제설(五帝說)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 시킨 것이 장승(長丞)이요 장승신앙(長丞信仰)이기 때문이다.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普照禪師卑門)에 “장생표주(長生標柱)”(884년)의 명문과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國長生)이라 표기된 판석형 선돌과(1085) 고려시대의 영암 도갑사에 세워진 황장생(皇長生), 국장생(國長栍)의 선돌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普照禪師卑門)에 “장생표주(長生標柱)”(884년)의 명문과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國長生)이라 표기된 판석형 선돌과(1085) 고려시대의 영암 도갑사에 세워진 황장생(皇長生), 국장생(國長栍)의 선돌 등을 통해 알 수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마치나 장승이 이정표(里程標)나 불교(佛敎)의 절간을 수호(守護)하는 문지기 인양 논증을 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장승에 “장생표주(長生標柱)”요 “황장생(皇長生)”이요 “국장생(國長栍)”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하여 그 장승이 곧 이정표의 역할(役割)이나 절간을 수호(守護)하는 신(神)이었다고 확정(確定)하는 것은 곤란하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논증을 하였기 때문에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필자는 불교 절간에 위와 같은 문구가 기록된 것은 우리의 전통 종교인 삼신교에 불교가 흡수된 증거라고 보고 있다. 필자가 불교(佛敎)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불교 본래(本來)의 신앙(信仰)은 장승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불교 절간에 위와 같은 문구를 기록하여 세워두었다는 것은 불교가 우리의 삼신교(三神敎)에 흡수가 되었음을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證明)해주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굳이 우리겨레가 창작한 장승이 불교의 절간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니 본말이 전도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 장승의 기원에 대해 손진태(孫晉泰)는 석비형 장승은 입석(立石)에서 목주형 장승은 솟대(立木)에서, 그리고 석적(石積) 장승은 선돌왕 할미당에서 유래되었음을 제시하였다. 또 이들 동일 명칭 표기가 하등의 무리가 없다고 밝혔다. 신라 이래 사원 소유의 장승은 그 시초에는 민속상의 의미에 따라 사원의 입구에 한 개씩 세우고 이를 사원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나 장생에는 그 자체 속에 경계표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으로써 후일 객표사상(界標思想)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것이 사찰 소유의 전토(田土)나 산림(山林)의 주위나 노방(路傍) 등에 있어서의 표시 또는 이정표로 되었다.(손 진태, “생考”한국민족문화연구, 서울, 을유문화사, 1948년, 2쪽) ❞ 손진태의 장승(長丞)에 대한 분석(分析)이 1948년도로서 상당히 오래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장승의 기원에 대해 손진태(孫晉泰)는 석비형 장승은 입석(立石)에서 목주형 장승은 솟대(立木)에서, 그리고 석적(石積) 장승은 선돌왕 할미당에서 유래되었음을 제시하였다. 또 이들 동일 명칭 표기가 하등의 무리가 없다고 밝혔다.”라고 하여 장승신앙(長丞信仰)의 기원(起源)이나 근원(根源)을 제대로 모르고 분석(分析)을 하고 있다. 1948년이라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네 민족신앙(民族信仰)이 꽤 널리 믿어지고 있을 때임에도 위와 같이 분석(分析)을 했다는데 대해서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물론 이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우리네 사서(史書)나 종교(宗敎), 문화(文化), 사상서(思想書) 등 관련서적(關聯書籍)들을 대대적으로 수거(收去)하여 불사르고, 또 수십만 권이나 일본으로 가져다가 우리겨레에게는 그 공개조차 하지 않다보니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게 분석을 할 수는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신앙(民族信仰)이 민간(民間)에 널리 퍼져 믿고 있었음에도 상기와 같이 해석을 한 것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장승(長丞)의 기원(起源)에 대해서 손진태는 ≪돌장승(석비형.石碑形)≫은 ≪선돌(立石)≫에서 찾고 있으며, ≪나무장승≫은 ≪솟대≫에서 찾고 있다. 물론 ≪선돌(立石)≫이나 ≪솟대≫등이 우리겨레가 창작하고 수수천년 믿어온 우리겨레의 전통신앙인 삼신신앙에 대한 믿음을 형상화시킨 것임은 분명하다. 즉 ≪선돌(立石)≫이나 ≪솟대≫등은 모두 사람이 하늘로 승천하고자 하는 믿음을 상징적으로 조형화 한 것이다. 장승신앙(長丞信仰)과 장승신앙長丞信仰)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 한 장승 역시 우리겨레의 전통적(傳統的) 믿음인 삼신신앙(三神信仰)에 기원(起源)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수도 없이 논증(論證)을 하였다. 장승신앙長丞信仰)은 삼신신앙(三神信仰)과 그 삼신신앙(三神信仰)을 구체화(具體化) 시킨 오제설(五帝說)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 시킨 것이 장승이다. 따라서 장승 역시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삼신신앙(三神信仰)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선돌(立石)≫이나 ≪솟대≫, ≪장승(長丞)≫ 모두 그 기원은 삼신신앙(三神信仰)에 그 기원(起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장승(長丞)≫의 기원을 굳이 ≪돌장승≫은 ≪선돌(立石)≫에서 ≪나무 장승≫은 ≪솟대≫에서 찾을 이유도 없거니와 ≪장승(長丞)≫과 ≪선돌(立石)≫ ‧ ≪솟대≫의 선후관계(先後關係)를 따질 이유도 없다. ≪장승(長丞)≫이나 ≪선돌(立石)≫ 그리고 ≪솟대≫모두 삼신신앙(三神信仰)을 형상화(形象化) 시킨 조형물이기는 하지만 그 쓰임은 각각 다르다. 솟대는 지난 장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두(蘇塗)≫에 세워두었던 신앙적(信仰的) 조형물(造形物)이다. ≪수두(蘇塗)≫는 삼신을 믿는 이들이 좀 더 넓은 범위(範圍)에서 모여들어 하늘에 제(祭)를 지내는 성지(聖地)이다. 지난번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두(蘇塗)≫에 관한 논증에서 보았듯이 ≪수두(蘇塗)≫도 ≪대수두(大蘇塗)≫가 있고 ≪소수두(小蘇塗)≫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현 천주교(天主敎)의 교구형성(敎區形成)과 그 맥(脈)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天主敎)의 교구형성관계(敎區形成關係)를 보면 가장 작은 단위이자 신부가 없는 공소가 있고 그 위에 신부(神父)가 성당(聖堂)에 주거(住居)를 하면서 미사를 주관(主管)하는 본당(本堂)이 있다. 또 몇 개의 본당은 아우르는 지구가 있으며 그 지구를 몇 개 아우르는 교구가 있다. 이 교구(敎區)에는 주교(主敎)가 있다. 그 주교가 머무르는 성당을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이라고 부른다. 또한 몇 개의 교구를 관장하는 추기경(樞機卿)이 있으며 추기경이 관할(管轄)하는 전 세계의 교구를 주관(主管)하는 로마 교황청(敎皇廳)이 있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그 조직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다. 우리겨레의 전통적(傳統的) 믿음의 범위(範圍) 혹은 조직체계(組織體系) 또한 위에서 본 천주교의 조직체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우리의 전통종교(傳統宗敎)의 믿음 역시 각 가정(家庭)에서부터 삼신(三神)께 기원(祈願)과 기도(祈禱)를 올리면서 가장 작은 단위(單位)의 신앙적(信仰的) 체계(體系)를 가지게 된다. 또 작은 고을에서는 그 고을에 서낭을 설치하고 그 서낭에 모여서 제(祭)를 지낸다. 또 몇 개의 서낭을 주관(主管)하는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또 성황당을 주관하는 ≪소수두(小蘇塗)≫가 있으며, ≪소수두(小蘇塗)≫를 주관하는 ≪대수두(大蘇塗)≫가 있다. 또 한 나라의 모든 삼신신앙(三神信仰)을 주관(主管)하는 이가 바로 ≪임금≫이 된다. 이와 같이 우리겨레의 전통신앙(傳統信仰)의 조직체계(組織體系) 역시 매우 정교(精巧)하며 치밀(緻密)하였다. 결코 현대(現代) 사회(社會)에 존재(存在)하는 서양(西洋)의 종교(宗敎)의 조직체계(組織體系)나 불교(佛敎)의 조직체계(組織體系)에 비해 뒤떨어졌다거나 허술하지 않았다. 매우 정교(精巧)하고 치밀(緻密)하며 과학적(科學的)인 체계(體系)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겨레의 전통신앙을 외적으로 형상화 하는 것 역시 바로 이와 같은 조직체계(組織體系)에 따라 설치를 하였던 것이다. 즉 서낭은 작은 고을에 큰 당산나무에 신께 기원하는 검은색,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누런 색등 오색¹의 천을 매달아 두고 삼신께 제를 지냈다. 또 당산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돌무지를 쌓아두고 삼신께 제를 올렸다. 이를 서낭이라고 한다. 바로 전 장에서와 위에서 논자들이 장승의 기원이라고 하는 ≪적석(積石)≫이 바로 ≪서낭≫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논자들은 이에 대해 잘 모르기에 ≪적석(積石)≫을 장승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확정(確定)하고자 하는 오류(誤謬)를 범하고 있다. 성황당(城隍堂)은 집을 신당(神堂) 즉 신(神)을 모시는 집을 지어놓고 그 집안(神堂)에 三神을 정히 모시고 삼신(三神)께 제(濟)를 올리는 성(聖)스러운 장소(場所)를 말한다. 성황당(城隍堂)은 서낭 보다 한 차원 높은 급의 신당(神堂)이며 그 범위 역시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아우른다. 성황당(城隍堂)에 모시는 삼신 역시 매우 다양하다. 우리가 앞 선 장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황당(城隍堂)에는 천신(天神) ‧ 지신(地神) ‧ 인신(人神)을 모시기도 하고, 또 한인(桓因) ‧ 한웅(桓雄. 한검) ‧ 임금을 모시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분석(分析)을 하지 않았지만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麻姑) ‧ 궁희(宮姬) ‧ 소희(小姬)의 삼신(三神)을 모시기도 한다. 현재 당골들이 굿을 하는 신당(神堂)들이나 절간들에 모셔져 있는 ≪삼신(三神)≫은 대개 위에 언급한 신(神)들을 모시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간혹 성황당(城隍堂) 바로 옆에 돌무지를 쌓아놓기도 하고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는 오색의 천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서낭과 성황당(城隍堂)이 함께 존재를 하게되는데 그렇다고 이상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다만 성황당(城隍堂)이 서낭에 비해 드러나는 큰 차이는 바로 집을 지어놓고(神堂) ≪삼신(三神)의 상(像)≫을 모시는가 아닌가 하는 것에 있다. 물론 장승도 함께 세워두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승, 서낭(적석, 당산나무), 성황당이 함께 존재를 하는 것이다. 천주교 역시 마찬가지 이다. 십자가와 성상들 그들이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는 곳에 함께 모셔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우리겨레의 신앙적 행태 역시 같은 매락에서 이해를 하면 된다.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 대해서는 이미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두론에서 논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는 성황당 보다는 그 관할하는 범위가 크며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서 제를 주관하는 ≪당골≫ 역시 ≪작은 당골≫ ‧ ≪큰 당골≫이 주관을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작은 당골≫을 ≪소단군(小壇君)≫으로 ≪큰 당골≫은 ≪대단군(大壇君)≫으로 고증(考證)을 하였다. ≪솟대≫는 바로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 세워두었다.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 ≪솟대≫를 세워둔 것은 그 장소가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임을 알리려는 목적과 또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서 삼신(三神) 혹은 하늘에 제(祭)를 올리면 ≪솟대≫ 끝에 형상화(形象化) 한 ≪새(대개 까마귀로 해석(解釋)을 한다)≫를 타고 하늘로 승천을 한다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도 역시 솟대뿐만 아니라 돌을 쌓아놓고 당산나무에 오색의 천을 매어두는 서낭도 있고 삼신을 모신 성황당도 있으며 장승도 함께 있기도 한다. 그건 장승이나 서낭, 성황당과 솟대등은 모두 우리겨레의 전통적 믿음인 삼신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작은 단위에서는 장승이나 서낭이 함께 하기도 한다. 성황당에는 성황당 단독으로 있기도 하고 장승, 서낭등과 함께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는 솟대가 항상 세워져 있다. 대개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에는 장승, 서낭, 성황당, 솟대 등이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소수두(小蘇塗)≫ ‧ ≪대수두(大蘇塗)≫는 장승, 서낭, 성황당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돌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을 하면 무리가 없다고 본다. 또한 깃발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을 해도 된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를 할 계획이기에 여기서 마친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장승과 당산나무, 돌무더기(石積), 선돌(立石) 솟대 등 각각의 쓰임과 관계에 대해서 논증을 하였다. 이들 모두는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삼신신앙(三神信仰)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 한 조형물(造形物)로서 그 탄생(誕生)시기 역시 동일(同一)한 시기로 보면 된다. 그리고 모두는 삼신(三神)께 기원(祈願)하는 대상물(對象物)들이다. 여기에서는 굳이 그 격(格)을 따질 이유도 없다. 모두 우리겨레의 전통적(傳統的) 믿음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형상화(形象化)한 조형물(造形物)들이다. 굳이 서양(西洋)의 기독교시(基督敎式)으로 말 하면 모두 성전(聖殿)에 모셔둔 성상(聖像)들이라고 보면 된다. 결론적으로 장승, 즉 석비형 장승은 입석(立石)에서 목주형 장승은 솟대(立木)에서, 그리고 석적(石積) 장승은 선돌왕 할미당에서 기원을 하지 않았다. 장승, 입석(立石, 선돌), 선돌왕 모두 우리겨레의 전통신앙(傳統信仰)인 삼신신앙(三神信仰)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형상화(形象化) 한 조형물(造形物)들인 것이다. “신라 이래 사원 소유의 장승은 그 시초에는 민속상의 의미에 따라 사원의 입구에 한 개씩 세우고 이를 사원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나 장생에는 그 자체 속에 경계표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으로써 후일 객표사상(界標思想)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것이 사찰 소유의 전토(田土)나 산림(山林)의 주위나 노방(路傍) 등에 있어서의 표시 또는 이정표로 되었다.(손 진태, “생考”한국민족문화연구, 서울, 을유문화사, 1948년, 2쪽)”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위대(偉大)한 삼신신앙(三神信仰)이 그야말로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분석(分析)이다. 장승(長丞)에 대해서는 전(前) 장(章)들이나 위에서도 상세(詳細)하였듯이 장승은 절대 불교의 절간을 수호(守護)하는 문지기로서의 기능(技能)을 하지 않았으며 이정표(里程標)로서의 기능(技能)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가 1948년에 장승에 대해서 어떻게 얼토당토않게 분석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자신의 조상들의 종교적(宗敎的) 신앙체계(信仰體系)와 사상체계(思想體系)를 그야말로 난도(亂刀)질을 하였다는 느낌이다. 참담함만이 엄습을 한다. 전문가(專門家)요 학자(學者)라는 집단(集團)이 장승에 대해서 이와 같이 인식(認識)을 하고 있으니 일반 백성들이야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하긴 이제 장승이 도대체 무얼 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만 해도 다행이다.대개 일반인들은 장승을 귀신 내지는 잡귀를 나무 혹은 돌로 만들어 세웠다고 믿고 있으며, 일부 기독교인들은 미신을 숭상하는 조형물이라고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솔직히 위 손진태의 장승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현학의 허세를 드러내면서 “객표사상(界標思想)”이요 “전토(田土)”요 “노방(路傍)”이요 하면서 일반인들은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을 섞어 쓰면서 분석이랍시고 한 것이 한심하기만 하다는 감을 받는다. 지역이나 지리 그리고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을 또 무슨 ≪사상(思想)≫까지 동원을 하는가. 그저 ≪길 안내 표지≫라고 하면 될 것을 “객표사상(界標思想)”이라고까지 하면서 마치나 지신의 분석이 신빙성이 있거나 대단히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것처럼 포장을 하고 있다. 손진태는 “장승은 그 시초에는 민속상의 의미에 따라 사원의 입구에 한 개씩 세우고 이를 사원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나”라고 하여 장승의 기원과 장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만약 알았다면 불교의 절간에 장승을 하나씩 세워두었다고 한다면 이를 비판을 했어야 한다. 진정한 “민속상의 의미”라면 장승을 한 쌍 세워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논자는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 개 세워둔 것을 “민속상의 의미”라고 했으니 논자는 장승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본다. 또 논자(論者)는 장승을 “사원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으나”라고 하여 도대체 불교(佛敎)의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조차도 혼동(混同)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불교가 장승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아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하였는지 아무리 필자가 불교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 혹 장승이 불교 절간의 ≪문지기≫ 역할(役割)을 했다고 한다면 논리의 모순이 그 나마라도 하나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논자는 장승을 절간의 ≪수호신으로 신앙≫이 되었다니 이 분석을 불자들이 본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스스로 뭘 말 하는지도 모르고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우리네 장승은 절대 불교 절간의 수호신(守護神)도 아니요 ≪문지기≫는 더더욱 아니다. 장승은 우리겨레가 창작(創作)한 삼신신앙(三神信仰)에서 기원(起源)을 한 우리의 전통적(傳統的) 종교(宗敎)인 삼신신앙(三神信仰)의 조형적(造形的) 상징물(象徵物)이다. 논자는 “장생에는 그 자체 속에 경계표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으로써 후일 객표사상(界標思想)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것이 사찰 소유의 전토(田土)나 산림(山林)의 주위나 노방(路傍) 등에 있어서의 표시 또는 이정표로 되었다.”라고 하여 아예 장승이 가지고 있는 우리겨레의 전통종교(傳統宗敎)의 신앙(信仰) 혹은 사상(思想)을 모조리 들어내고 있다. 이제 장승은 아무런 종교(宗敎) 신앙적(信仰的) 상징성(象徵性)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겨레가 담아내고 있는 사상적(思想的) 현상(現狀)마저도 깡그리 말살(抹殺)시키고 있다. 장승은 그저 나무로 만든 행인들에게 가는 길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신세로 전락을 하였다. 논자는 “표시 또는 이정표로 되었다”라고 하면서 결정적(決定的)으로 장승을 이정표(里程標)로 확정(確定)을 하고 있다. 장승은 절대 불교 절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이정표(里程標) 노릇을 하라고 만들어 세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만약 불교의 절간에서 우리네 장승을 절간 입구에 세워두었다면 그들이 우리의 전통(傳統) 종교(宗敎)인 삼신교(三神敎)에 흡수(吸收)되었음을 증명(證明)해주는 것이다. 또 장승에 지역 명(地域 名) 혹은 방위(方位) 표시가 되어있다고 한다면 삼신(三神)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혹은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했 놓았다고 이해를 해야 하지 아예 장승 본래(本來)의 종교적(宗敎的) 신성성(神聖性)이나 고매한 사상적(思想的) 현상(現狀)마저 들어 내버리는 분석(分析)은 조상들을 모독(冒瀆)하는 것이다. 이정표(里程標)에 대해서는 부수적(附隨的)으로 보아야한다. 장승이 주요하게 이정표(里程標)로서의 기능(技能)을 하지 않았다. 장승(長丞)에 관한 민담(民譚) – 판소리 변강쇠전(傳)에서 장승에 관한 민담이나 설화 혹은 전설에 대해서 필자가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그리고 인터넷 등에서 찾아보았으나 자료가 거의 없다. 할 수 없이 판소리 변강쇠전 중에서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불쏘시게로 사용을 하고 전국 팔도의 장승들에게 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올려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변강쇠와 옥녀를 소재로 한 장승 사진 몇 장과 ≪숫 장승≫ 사진을 각각 올려준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남녀 간의 성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간단히 생각을 해보라고 올려주는 것이니 해학과 풍자 혹은 우리 조상들의 남녀 간의 성에 대한 바람 등에 대한 측면에서 보기 바란다. 여기서는 판소리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를 따로 올리지는 않는다. 사진1. 옹녀 사진 – 참고로 현대에 제작된 장승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 판소리 변강쇠 타령 중에서 장승에 관한 사설중에서...옥녀 장승(현대에 제작된 장승으로서 오래된 장승 보다 자연스러운 맛이 없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사진2. 변강쇠 사진 ▲ 판소리 변강쇠 타령 중에서 장승에 관한 사설중에서...변강쇠 장승(현대에 제작된 장승으로서 오래된 장승 보다 자연스러운 맛이 없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사진3. 변강쇠와 옥녀사진 ▲ 판소리 변강쇠 타령 중에서 장승에 관한 사설중에서...변강쇠와 옥녀 장승(현대에 제작된 장승으로서 오래된 장승 보다 자연스러운 맛이 없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사진4. 남근을 크게 강조한 장승사진 – 세월이 조금은 흐른 장승 ▲ 오래된 장승. 남근(男根)이 크게 강조된 장승으로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무결에 장승의 나이가 새겨져 있다. 나무결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장승이다. 우리 조상들의 성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하는 장승이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판소리 변강쇠 타령 중 장승에 대한 이야기 – 별도의 해석은 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장승에 대한 신앙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를 바란다. ❝ 사방을 둘러보니 동부마천 가는 길에 장승 하나 서 있구나. 강쇠놈 좋아라고, 벌목정정(伐木丁丁) 할 것 없이 애 안 쓰고 잘 되었다. 일모도궁(日暮途窮)이² 내 신세 불로이득 좋을씨고 이러고는 지게를 찾아 지고 장승 앞을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며 낯에 핏기를 올리며 두 눈을 딱 부릅뜨고 섰는지라. 장쇠놈이 호령한다. 네 이놈 누구 앞에 눈방울을 부릅뜨느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파시평과 사당 노름, 씨름판에 내 손으로 사람 칠제 선취복장 후취덜미, 범강 장달 허저라도 내 앞에 떨어지는데 수족 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냐. 달려들어 불끈 안아 장승을 쑥 빼내어 지게에다 짊어지고 유대꾼 노래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며, 이 집에 아무도 없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 뜰 가운데 탁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며 여보 마누라, 장작나무 하여 왔네. 장작나무 하여 왔네. ~ 중략 ~ 허허, 이게 웬일인가. 허허 이게 웬일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왓소그려. 아무리 나무가 귀(貴)타 한들 장승 빼어 땐단 말은 고금천지 첨 보았소. 만일 장승을 패 땐다면 목신(木神) 동티(목신의 재앙) 조왕 동티 목숨 보전 어려우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그 자리에 도로 꽂고 왼발 굴어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옵소. 달음질로 돌아오시오. ~ 중략 ~ 머리 풀어 산발하고 혀를 빼어 길게 물고, 짚동같이 부은 몸에 피고름이 낭자하고 주장군(남근) 뻣뻣 서고, 목구녁에 숨소리만 깔딱깔딱. 콧구녁에 찬바람만 쏴쏴. 생문방 아니하고 장승죽음을 하였구나. ~ 중략 ~ 허허 이게 웬일인가. 허허 이게 웬일인가. 아이고 여보 변서방아 날 버리고 어디 갔나. 나도 가세. 님을 따라 나도 가세. 청석골서 만날 적에 백년 살자 하였더니 황천길을 혼자 가니 일장춘몽 허망하네. ❞ 비록 짧은 대목이지만 우리겨레의 해학과 풍자 그리고 장단과 가락 낙천성은 가히 온 누리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해학과 풍자 속에 깊은 내면의 사색과 도리와 이치 천지만물의 조화를 읊는 것은 가히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변강쇠타령은 춘화(春話)이다. 즉 요즈음으로 말하면 19금 이야기이다. 19금 이야기이면서도 전혀 난잡하지 않은 것은 우리네 춘화(春話)이다. 우리 조상들이 창작한 고금소총(古今笑叢)을 읽어보면 정말 그 문학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전혀 색정(色情)이야기 같지가 않다. 이 모든 것은 우리겨레의 얼과 넋이 이민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기 4347(서기 2014)년 9월 20일 이 용 섭 ----------------------------------------------------------------------------- 1.오색 : 오색은 곧 북방의 검은색, 남방의 붉은 색, 동방의 푸른색, 서방의 하얀색, 가운데의 누런색을 말한다. 이를 곧 ≪오방(五方)색≫이라고 한다. ≪오방색≫은 삼신사상(三神思想) ‧ 삼신교교리(三神敎敎理)에서 나온 오제설(五帝說)에서 북방의 현제, 남방의 적제, 동방의 청제, 서방의 백제, 중앙의 황제를 말한다. 이는 곧 북방의 태수(太水)요 남방의 태화(太火)요, 동방의 태목(太木)이요, 서방의 태금(太金)이요, 중방의 태토(太土)가 곧 북방의 검은색, 남방의 붉은 색, 동방의 푸른 색, 서방의 하얀 색, 중앙의 누런색을 관장한다는 것에서 유래를 한 것이다. 이 오방색은 우리의 전통의 풍류악을 행할 때 항상 두르거나 둘러친다. 마을의 당산나무에 매달아 늘어뜨리는 천(베)의 색상도 바로 ≪오방색≫이다. 2. 일모도궁(日暮途窮): 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상황을 말 한다. ➁ 늙고 쇠약해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가련한 처지를 말 한다. ----------------------------------------------------------------------------- ❀❀❀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삼국사기(김부식 지음, 신호열 옮김. 동서문화사, 2판1쇄. 2007년 7월 20일) 삼국사기(원문)(김부식 지음. 강무학. 청화 1989년 2월 15일) 신단민사( 김교헌 지음. 고동영 주역. 한뿌리. 2006년 3월 15일) 교양한국사(성균관대학교 국사교재편찬위원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4년 2월 28일) 한국사신론 신수판(이기백. 일조각. 1967년 3월 20일 초판. 1997년1월10일5판본) 한국사특강(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한영우, 노태돈외 16명.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 1월 19일) ㅎ+한글 古語辭典 실담語 註釋(강상원 박사. 한국세종한림원. 2002년 6월 14일) 종로 교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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