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7일 수요일

박근혜, '통일' 타령으로 남북합의 팽개치나?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한 로켓, 언제든 쏠 수 있는 카드
이재호 기자 2015.10.08 06:33:30


오는 10월 16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미국을 설득해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진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8.25 합의 이후 이산가족 상봉 외에 남북 간 별다른 교류나 대화는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9월 2일 한-중 정상회담 이후 박 대통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중국과 평화통일을 위해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북한 입장에서 이를 흡수통일로 받아들이고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른바 '통일 외교'는 유엔총회에서도 이어졌다. 통일을 위해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협조도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와 함께 경제적인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을 떠올리는 발언도 나왔다. 

정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의 발언이 당국회담을 열기 힘들게 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면서, "만약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면 8.25 합의로 약속한 당국 회담은 정말 물 건너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오는 10월 10일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중국은 공산당 서열 5위인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을 북한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도 사실상 연기 또는 취소되는 분위기다. 

정 전 장관은 현 상황에 대해 "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마주 앉아 6자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 것"이라며 "한-미 양국 정상이 대북 제재를 강화하거나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뜬금없어진 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의 로켓 발사는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튀어 나올 수 있는 '이벤트'임에는 분명하다. 정 전 장관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쏠 가능성이 있다"면서 "만약 한-미 정상회담에서 강경한 대북발언이 나오고 이후 후속 조치로 한-미-일 3각 동맹이 강화된다면 여기에 대한 견제구를 던지는 차원에서 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 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의 사회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평화협력원 황재옥 부원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오는 10월 16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이 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남북관계 진전이 필요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끌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진전이 필수적이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8.25 합의 이후 이산가족 상봉 외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8.25 합의 이후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최소 한 달 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북 간 대화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9월 초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실무 접촉을 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접촉'이지,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만드는 '회담'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신호를 보냈는데 북한이 응답이 없는 것인지, 아예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설사 우리 쪽에서 제안을 했더라도 북한이 받기가 어려운 상황을 우리가 만든 측면이 있습니다.

우선 대북 전단 살포 문제가 있습니다. 그동안 남북대화 재개와 관련해 북한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대북 전단 살포를 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자세로 전단 살포는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라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이러면 대화가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때문입니다. 지난 9월 2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평화통일을 위해 중국과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발언이 북한을 상당히 자극했을 것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흡수통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박 대통령은 유엔총회 참석차 9월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습니다. 북핵과 인권문제, 도발과 같은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한반도 통일이고, 이를 위해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국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 메시지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중국과 이미 흡수통일 논의를 했는데, 오는 10월에 미국하고도 할 생각인가 보다'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면 8.25 합의로 약속한 당국 회담은 정말 물 건너갈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정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박 대통령과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에 대해 논의하자고 말했을까요?

황재옥 :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외교부는 "중국은 조선 반도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라고만 표현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조속한 시일 내에 평화통일을 논의하자고 했는데 중국이 면전에서 거부하지 않으니까 중국과 합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외교부에 올라온 공식 문구는 박 대통령의 발언과 다른 의미입니다.

지금 북한과 중국 관계는 상당히 경직돼있습니다. 내년 정상회담을 점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현재 상황을 봐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이 조속히 평화통일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입장은 예전부터 동일합니다. 자주적이고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건데요. '자주적'이라는 말은 미국을 등에 업고 통일하지 말라는 겁니다. '평화적'이라는 말은 무력을 쓰지 말고 남북이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무력을 쓰지 말라는 것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통일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제로 깔려 있는 겁니다. 그만큼 통일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박 대통령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8.25 합의 이후 박 대통령이 이른바 '통일 외교'에 꽂혀있는 것 같습니다.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통일 외교인데요. 계속 이런 식이면 북한은 당국 회담을 받지 않을 겁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통일 문제는 많이 거론하지 않았는데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황재옥 : 박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이 과감하게 핵을 포기하고 개방과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와 힘을 모아 북한이 경제를 개발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2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70차 유엔총회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당시 남북관계는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이어 집권한 박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꺼내 들며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된 대북 정책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북한도 나름의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유엔 총회에서 박 대통령이 '비핵·개방·3000'과 유사한 발언을 했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저런 정권과 만나서 뭐하냐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비핵·개방·3000'은 북한이 비핵화를 먼저 달성해야만 국제사회와 손잡고 북한과 경제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정책입니다. 그전에는 남북 경협 확대도 없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이런 입장을 밝혔으니, 북한에서는 우리한테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세현 : 한편으로는 북한은 남한 정부가 개혁개방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민감합니다. 과거 장관급 회담에 대해서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북한은 개혁개방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남한이 유도·권고·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할 때도 이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습니다. 10월 3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회담이 있었는데,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면서 노 대통령은 "보따리 싸고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정이 하루가 남은 상황이라 판을 깰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앞으로 개혁개방이라는 말도 쓰면 안 되는 거냐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아마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쪽에서 개혁개방을 너무 강조한다, 기분 나쁘다 이런 불만을 제기한 것 같았습니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런 말도 못 쓰면서 어떻게 대북 정책을 할 수 있겠냐며, 살짝 좌절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고도의 협상 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판이 깨질 수도 있으니 김정일 위원장이 좀 살살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김 위원장의 귀에 들어갈 수 있게 상황을 만든 것이죠. 실제로 그날 오후 회담은 상당히 잘됐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은 남한 당국자들이 개혁개방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발언을 박 대통령이, 그것도 유엔 총회에가서 이야기했으니 북한은 엄청 기분 나쁠 겁니다.

북한, 장거리 로켓 언제 쏘나

프레시안 : 8.25 합의 이후 한반도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인 10월 10일 전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것이라는 관측이 곳곳에서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10일 전에 발사하는 것은 어려워졌는데요. 중국이 공산당 서열 5위의 고위 인사인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을 북한에 보내겠다고 결정한 것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황재옥 :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의 정세가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경을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를 두고 미국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중국은 현지시간으로 지난 9월 2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군사적 행동을 막기 위해 강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뒤로는 북한을 달랬을 겁니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북핵 불용'이라는 표현을 빼고 '한반도 비핵화'만 넣었습니다. 미-중 정상회담 이후 가진 기자회견 때와는 다소 다른 입장입니다. 중국은 자기들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면서 북한에 "너희들 체면 봐준 거니까 핵 이나 미사일 실험 하지 마"라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는 절대로 북한의 비핵화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 주변에서 주한미군 함정에 싣고 다니는 핵무기도 한반도 내로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미-중이 합의한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프레시안 : 중국이 류윈산 상무위원 파견을 통해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사실상 지연 내지 무산시킨 셈인데요. 8.25 합의 이후 대화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중국이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정세현 : 그렇긴 하지만 중국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한국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중국이 북한의 도발이나 위협을 자제시켜주는 건설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중국은 아시아 질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가 더 큽니다. 그동안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들어오는 구실로 북한 문제가 계속 활용됐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는 남사군도 문제도 있습니다. 중국이 암초 위에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여기에 레이더 기지까지 설치하면 인도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미국 비행기나 선박의 움직임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이 남사군도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중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자기들을 압박할 수 있는 구실을 줄여가기 위한 차원에서 북한의 행동을 자제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럼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를 포기한 건가요?

정세현 :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에 북한이 급하게 하지 않은 데는 중국의 체면을 생각하는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과 오바마가 만나 북한에 군사적 도발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보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켓을 쏜다는 것은 중국의 입장을 너무 곤란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북한이 중국에 "한-미 정상회담에 이 정도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한-미 정상회담에서 강경한 대북 발언이 나오면 분명히 쏠 겁니다. 또 이후 후속조치로 한-미-일 3각 동맹이 강화된다면 북한이 여기에 대한 견제구를 던지는 차원에서 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미국을 6자회담 테이블로 끌고 나올 때 

프레시안 :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까요?

정세현 : 북핵 문제의 전기를 마련해보자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를 수정해 달라고 유도해야 합니다. 북한의 선행동에서 미국의 선행동으로, 중국 역할론에서 한국 역할론으로 북핵의 해결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물론 남북 당국회담이 당국회담 성사되고 다음번 만날 날짜까지 잡은 상태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북핵 문제 해결에 시동을 걸어보자는 이야기를 미국에 하기가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없다고 해서 미국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 우리가 남북 당국회담을 복원에서 동북아 상황을 안정적으로 끌고가는 일익을 담당할테니, 미국도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특히 북한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 총회 연설을 흘려듣지 말라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 못 해서 그렇지, 그 안에 미국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리수용 외무상은 당시 연설에서 평화협정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건 비핵화의 다른 표현입니다.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북한이 평화협정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신들도 비핵화의 용의가 있고 협상이 준비됐다는 메시지를 보낸 겁니다.

북한이 노골적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은, 미국이 받아주지 않을 경우 북한 입장에서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살짝 운을 띄우는 식으로 말한 겁니다. 협상이 준비됐다는 이면의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마주 앉아서 6자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환경이 됐습니다. 류윈산 상무위원 방북으로 북한의 로켓 발사가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에 한-미 양국 정상이 대북 제재를 강화하거나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뜬금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6자회담에 대해 미국이 진전된 자세로 나오라고 설득하고 유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미국 측에서 생각하는 한-미 정상회담의 가장 주요한 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황재옥 : 우선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사드에 공을 들인 게 많습니다. 원래 이번 정상회담이 지난 6월 계획돼있었는데 당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문에 미뤄진 것 아닙니까? 미국은 이번 회담에서 보다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사드 배치 문제를 꺼내 들 것입니다.

▲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회담을 하면 서로 받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쪽에서 줘야 할 것도 있구요.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회담이고 협상인데 미국은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데 있어서 한반도 내 사드 배치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의해주는 것만큼 큰 이득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편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는 문제와도 관련돼 있습니다.

미국은 11월 초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예정돼있는데 그 때 한-일 정상회담도 열어서 한-일 관계를 잘 풀어달라, 미-일 동맹은 튼튼한데 한-일 관계가 나쁘니까 한-미 동맹이 힘을 못 쓰고 있지 않느냐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미-일 3각 편대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당장 발표는 하지 않더라도 일단 사드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마무리를 짓자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어느 정도 합의만 해두고 다음 정권에서 사드 배치 절차를 하나씩 밟아가는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여기에 박 대통령이 말려 들어가면 향후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청도, 미국과 협의도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었다는 이른바 '3NO' 전략을 구사하면서 시간을 끌었는데요. 이번에는 한-미 동맹 강화는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끝내고, 사드 배치는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강조해서 정확하게 마무리를 짓고 오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전격 체결됐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까요?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TPP에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정세현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애매모호하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TPP가 경제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것인데 우리가 여기에 들어가버리면 사드 배치 못지않게 중국에 타격이 됩니다. 사드는 안보·군사적 측면, TPP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압박하는 건데, 여기에 우리가 참여하면 우리 국익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서둘러 가입해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경련은 사드를 배치하면 중국으로부터 받게 될 경제적 보복 때문에 배치 반대 입장을 보였습니다. TPP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보복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지난 6월 중국의 증시가 곤두박질치면서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지난 7~8년 동안 중국이 세계 경제를 끌고 왔지만 이제는 미국이 다시 부흥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인데요. 이렇게 되면 중국으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TPP에 가입해야 한다는 경제계의 요구가 더 커지지 않을까요?

정세현 : 물론 중국 경제가 가라앉고 상대적으로 미국이 이득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이런 현상이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이 6%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성장 동력이 별로 없습니다. 무기 산업 말고 어떤 동력이 있습니까?

TPP에 들어가서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 보고 쫓아가다가 중국을 섭섭하게 해서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이 혜택보다 먼저 올 수도 있습니다. 큰 틀의 전략을 세워놓고 상황에 맞춰 전술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중국의 입장도 지원했다가 미국 입장도 거들어주는 식으로 가야지, 지금 당장 급하게 TPP 가입을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프레시안 : 한편으로는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상당히 당당했고 시진핑 주석은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양국의 경제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데요.

정세현 : 저는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무승부라고 봅니다. 아무것도 합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 문제 관련해서 2017년 기후변화협약에 중국도 참여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이건 미국도 참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 부분보다는 남사군도 문제를 거론했을 때 중국이 강하게 반발한 대목이 주목됩니다. 중국이 작심하고 남사군도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양국이 전혀 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미-중이 대립하는 모습을 여전히 보여준 것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우리의 고민이 더 커진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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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빨치산 중심의 당 영도체계확립자들


<특집②> 인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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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07  22: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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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창건 70돌 특집>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이 오는 10일 창건 70주년을 맞는다. 건국보다 창당이 2년이나 앞선 셈이다. 당 우위의 국가인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조선노동당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 할 수 있다.
<통일뉴스>는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이 당이 걸어온 길을 규약과, 인물,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김정은 시대의 조선노동당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연재 순서>
1. 당 규약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2. 인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3. 정책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4. 김정은 시대의 조선노동당
북한 조선노동당이 10일 창건 70년을 맞는다. 북한의 당 70년 역사 동안 수많은 인물이 등장했고 사라지기도 했다. 조선노동당의 인물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노동당의 정책방향을 이해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김정일 등장과 함께 이들을 중심으로 당 핵심일꾼들이 이끌어왔고, 김정은 시대 들어 40~50대 전문일꾼들이 당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시대를 아우르는 북한 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들은 누구인가. 당의 핵심세력인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들의 면면을 중심으로 당 70년을 살펴보자.
김일성 시대(1945~1994), 항일빨치산 세대 포진
김일성 시대 당.국가건설 초기에는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을 이뤘다. 하지만 김일성 유일영도체계를 확립해 나가면서 당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김일성이 당 창건의 초석을 다지는데 함께한 이들은 김혁, 차광수, 최창걸, 김리갑, 계영춘, 강병선, 김원우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함께 맞이하지 못했다.
이들을 두고 김일성은 "혁명은 동지들을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한 명 한 명의 동지들은 모두가 억만금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해방 후 김일성 시대 조선노동당은 1946년 8월 제1차 당 대회를 거쳐 연안파, 갑산파 등으로 일컫는 파벌 경쟁을 거쳐 1970년 제5차 당 대회에 이르기까지 항일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을 강화하는 핵심세력으로 활동했다.
46년 제1차 당 대회 당시는 당과 국가건설이 최우선의 목표라는 점에서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함께했다. 이를 반영하듯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에 김두봉, 김일성, 주녕하, 최창익, 허가이 등 5명이 이름을 올렸다. 당시 당 중앙위원 파별간 비율은 항일빨치산 20%, 연안파 35%, 소련파 25% 등으로 정치위원도 비슷한 구도였다.
48년 제2차 당 대회도 기존 정치위원에서 김책, 박일우가 새로 들어왔는데 이 또한, 사회주의 당.국가체제를 세우기 위한 파벌연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56년 제3차 당 대회부터 양상이 달라진다. 당 정치국 정치위원에 김일성이 김두봉보다 앞서고, 박정애, 박금철, 김일, 림해, 정일룡, 김광협, 남일 등이 새로 선출되면서 항일빨치산 세력의 포진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61년 제4차 당 대회에서 소련파, 연안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갑산파가 제2의 세력이 됐다.
1953년 8월 제6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남로당파 박헌영, 리승엽, 소련파 허가이, 연안파 무정 등이 숙청되고,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 소련파 박창옥, 국내파 오기섭이 숙청됐다.
이는 당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의 분포와도 유사하다. 48년 제2차 당 대회 당시 조직위원은 김일성, 허가이, 김열, 박창옥, 박영성이었던 데 반해 1966년 제2차 당 대표자회에서 설치된 비서국에서는 김일성이 총비서로, 최용건, 김일, 박금철, 리효순, 김광협, 석산, 허봉학, 김영주, 박용국, 김도만 등이 당 비서로 항일빨치산과 갑산파가 절 반씩 차지했다.
  
▲ 김일성 시대 조선노동당 확립을 함께 한 항일 빨치산 1세대들. 김일, 최용건, 최현, 김책(왼쪽부터).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하지만 1967년 5월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리효순 등 갑산파와 1969년 1월 군당 제4기 4차 전원회의에서 김창봉, 허봉학, 김광협 등 일부 항일빨치산에 대한 숙청이 이뤄졌다. 이는 김일성의 단일지배체계에서 유일지배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이질적 요소를 제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일성의 당'으로 자리매김한 1970년 조선노동당은 제5차 당 대회를 거쳐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 이르는 동안 당의 핵심은 항일빨치산 1세대였다. 그러나 김정일 후계구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항일빨치산 2세대와 김정일과 함께 일한 당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일꾼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80년 제6차 당 대회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에는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리종옥 등이 이름을 올렸고, 김정일, 김중린, 김영남, 김환, 연형묵, 윤기복, 홍시학, 황장엽, 박수동 등이 당 비서가 됐다.
또한, 제6차 당 대회부터 신설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의 경우, 80년 당시에는 오진우, 김정일, 최현, 오백룡, 전문섭, 오극렬, 백학림, 김철만, 김강환, 태병렬,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조명록, 김일철, 최상욱, 리봉원, 오룡방 등이 선출됐다.
즉, 김정일 후계구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항일 빨치산 1세대를 우대하고 김정일로 대표되는 2세대와 당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에서 활동한 김정일 측근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김일성 시대는 다양한 인물들이 뜨고 진 시기이고 항일빨치산 동료들도 많아 집어낼 수없지만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의 측근으로 자리한 김일과 최용건, 최현 등을 꼽을 수있다.
김일은 본명이 박덕산으로 '오직 김일성밖에 모른다'는 뜻으로 김일성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1936년 곰의골밀영에서 김일성과 처음 만났으며, 해방후 1946년부터 민족보위성 부상, 내무성 정치국장을, 1959년 내각 제1부수상, 1972년 정무원 총리, 1976년 제1부주석, 1953년부터 당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다 1984년 3월 사망,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최용건은 1941년 항일연합군지휘간부회의에서 김일성을 만난 뒤 1948년 민족보위상, 1972년부터 부주석, 1966년부터 당 비서로 일했으며 1976년 9월 사망,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최현은 1907년 독립군 가정에서 태어나 무장투쟁에 참가했으며, 한국전쟁시기 제2군단장을 지냈다. 그리고 당 중앙위원회 군사부장, 당 비서 겸 민족보위상, 인민무력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쳤으며 1982년 사망했다. 최룡해 당 비서의 부친이다.
김책은 1927년부터 항일혁명에 참가해 1932년 유격대에 입대, 초대 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전선사령관 등을 지냈지만 1951년 한국전쟁 중 사망했다. 김국태 당 검열위원장이 그의 아들이다.

  
▲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된1980년 10월 열린 제6차 당 대회. 오진우(맨 오른쪽)의 모습이 담겨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일 시대(1994~2011), 후계구도 확립자들
김정일 시대 조선노동당의 핵심을 이룬 인물들은 항일빨치산 2세대와 김정일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쳐 선군정치를 핵심으로 내세운 김정일 시대는 당 대표자회가 30년만에 열렸을 뿐, 공식적인 당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당 인사변동 보다는 오히려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누가 더 많이 동행했는가를 두고 분석하는 경향이 많다.
김정일 시대 현지지도 동행자 횟수로 보면 현철해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677회로 가장 많고, 이어 김기남 당 비서(616회), 장성택 당 중앙위원회 위원(510회), 리명수 당 정치국 위원(486회), 박재경 당 중앙위원회 위원(456회) 순이다.
하지만 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김정일과 함께 오진우가 1995년 사망할 때까지 항일빨치산 1세대로 당의 중심을 잡았다. 오진우는 1968년 당 비서에 이어 제6차 당 대회 이후 줄곧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북한에서 몇 안되는 원수칭호를 받았다.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80년 제6차 당 대회부터 줄곧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2010년 사망 전까지 김정일의 후계구도를 지켜왔다.
그러나 공식적 서열과 상관 없이 김정일 여동생인 김경희와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이 지근거리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대남분야에서는 김용순 비서가 최측근으로 활약했지만 일찍 사망했다.
  
▲ 김정일 시대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비서들. [자료정리 - 통일뉴스]
김정일 시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열린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는 김정은으로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당을 정비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오진우 사후 인선되지 않던 정치국 상무위원에 김영남, 최영림, 조명록, 리영호가 선출됐다. 그리고 당 비서로 기존 김기남, 최태복 외에 최룡해, 문경덕, 박도춘, 김영일, 김양건, 김평해, 태종수, 홍석형 등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신설되면서 김정은이 처음 등장해 리영호와 함께 선출됐고, 위원으로 김영춘, 김정각, 김명국, 김경옥, 김원홍, 정명도, 리병철, 최부일, 김영철, 윤정린, 주규창, 우동측, 최룡해, 장성택이 올랐다.
즉, 제3차 당대표자회 이전까지 오진우, 조명록으로 대표되는 항일 빨치산 1세대들을 중심에 놓고 빨치산 2세대와 김정일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 포진됐다면, 그 이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김정은으로의 후계구도 발판을 놓은 셈이다.
  
▲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당 고위간부들, 당대표자회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정은 시대(2011~현재), 노.장.청 배합을 통한 신진세력의 등장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 이후 후계구도의 발판을 마련한 김정은 시대의 당 인물들은 노.장.청 배합으로 풀이된다. 즉, 이제는 노년기에 접어든 항일빨치산 2세대 원로그룹을 존중하고 실질적으로 당을 이끄는 전문가 집단인 장.청 인사들을 신진세력으로 포진시킨 것이다.
2012년 4월 열린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김정은, 김영남, 최영림, 최룡해, 리영호가, 당 비서로 김경희, 박도춘, 김기남, 최태복, 김양건, 김영일, 태종수, 김평해, 문경덕, 곽범기 등이 선출됐다. 사망한 김정일은 영원한 총비서로 남고 김정은은 제1비서에 올랐다.
하지만 2013년 12월 '반당 반혁명적 종파행위'로 장성택이 숙청되고 관련자들이 축출되면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유일영도체계에 확고한 인물들이 당을 구성한다.
  
▲ 김정은 시대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비서. [자료정리 - 통일뉴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운구차와 함께 걷던 장성택, 김기남, 최태복, 리영호, 김영춘, 김정각, 우동측 중 현재 김기남, 최태복, 김정각을 제외하고 모두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되고 오수용이 당 비서에 오르는 등 끊임없이 김정은 체제 공고화가 진행되고 있다. 김정은 시대 조선노동당의 인물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현재 당 정치국은 상무위원 김정은, 김영남, 황병서, 위원 최룡해, 박봉주, 김기남, 최태복, 박도춘, 양형섭, 강석주, 리용무, 김원홍, 김양건, 곽범기, 오수용, 후보위원 오극렬, 김평해, 최부일, 로두철, 조연준, 리영길, 태종수이다. 당 비서는 박도춘, 김기남, 최태복, 최룡해, 김양건, 김평해, 곽범기, 강석주, 오수용 등이다.
김정일 시대는 선군정치와 이른바 측근정치가 주효해 현지지도 수행횟수와 당비서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는 당 공식회의 체제가 작동해 당 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박봉주, 곽범기, 로두철 등 경제 전문가들이 중용되고, 황병서, 최룡해 등 비 군부 출신이 군 총정치국장을 맡은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김정일 시대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함께 '고난의 행군기'를 거치면서 '선군정치'를 앞세운데 비해 김정은 시대는 당과 내각을 정상화 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리영호 총정치국장의 숙청과 잦은 인민무력부장 교체 등 군인사는 선군정치 시기를 거치면서 과도하게 집중된 군부의 힘을 덜어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고, 비 군부 출신 총정치국장의 임명은 군에 대한 당적 지도의 관철 의지로 읽힌다.
황병서, 최룡해를 양두체제로 삼아 권력 편중 현상을 막은 점과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이 일선에 나선 점도 특색으로 꼽을 수 있다. 대남비서인 김양건이 김정은 측근으로 움직이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고영주식 메카시즘, 국민 절반이 공산주의자?


야당 전투력의 현주소, 고영주 처리 결과 보면 안다.
임두만 | 2015-10-08 08:29:04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발언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 전체가 목하 해방 후 좌우갈등 시기와 같아지는 것 같다. 이는 친일파가 친일파로 단죄 될 위험을 느끼자 미군정에 협조하는 방법으로 생존, 자신들을 단죄하려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좌우 갈등을 일으키고 살아남아 기득권이 된 것과 유사하다.
▲공산주의자 발언 파문의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팩트티비 화면 캡쳐)
박정희 전두환 정권 부역자들은 1987년 민중항쟁 후 군부독재 정권이 단죄되면서 설 자리가 없었다. 특히 김영삼 정권 당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사법적 단죄를 받은데다 이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설 정도로 국민적 감정은 좌우대립이란 이념전쟁에서 해방되어 갔다. 사회의 이 같은 변혁은 그러나 친일파 후예임을 감추기 위해 보수우파로 위장한 이들에겐 불편한 변혁이었다. 이념 전쟁이라야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10년 동안 새로운 이념무장을 시도했다.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이다. 이 뉴라이트 운동은 기존 독재정권 부역자들이 뒤로 빠지고 새로운 얼굴들로 바꿔 나타났다. 하지만 실제는 친일파들의 논리나 이념을 다시 세팅한 것이었다.
이후 이렇게 세팅된 조직을 키운 이들이 이명박을 앞세워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앞서 기득권을 누렸던 친일파이면서 우파 탈을 쓴 이들이 다시 나서면서 노골적 이념전쟁 판으로 만들어 간다. 일베현상도 이 현상이며 이들의 숙주가 바로 고영주 같은 지식인 그룹이다.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이들은 정권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기가 이념전쟁임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위협은 이들에게 좋은 숙주다. 북한 김정은 정권도 마찬가지로 남쪽의 반북정서 확산이 정권유지에 가장 좋다. 전쟁위협을 통한 국민일체화 현상은 통치그룹이 피통치자들을 제압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라서다.
박근혜 정권 들어 이들은 더 기승을 부린다. 고영주 관련 기사의 포털 댓글들이 이를 증명한다. 백색 테러에 동원해도 될 만한 포털의 뉴스 댓글러들, 이들은 홍위병 그룹이다. 친노 홍위병 그룹은 숫자로 뭉친 세력 싸움에서 이들과 게임이 안 된다. 이미 일베 등에서 양성된 이들 홍위병들은 친노 홍위병들을 포털에서 제압한지 오래다. 따라서 변희재 정미홍 강용석 등 일베 여론 주도층은 이 현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고영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포털의 영웅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7일 오전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해임촉구결의안을 낸다는 목표로 긴급 의원총회를 열었다. 또 의총 후 고영주가 해임 때까지 당 차원의 규탄대회 등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새정연으로서는 이 싸움이 물러날 수 없는 한판이기 때문이다.
▲7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긴급 의원총회에서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가 고영주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새정치민주연합 홈페이지
고영주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는 발언에서 물러나기는커녕, 한발 더 나아가 “노무현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문재인을 당 대표로 하고, 노무현을 절대존엄으로 추앙하는 야당이 이를 용납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 전부가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들을 추종하는 세력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는 또 현 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은 전체 유권자 48.9%의 득표로 46.8%를 득표한 이회창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 5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고영주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국민 48.6%는 공산주의자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셈이 된다. 이에 그 5년은 ‘변형된 공산주의자 노무현’이 임명한 검찰총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군기무사령관, 군정보사령관 등이 이 나라 모든 정보를 독점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이었다는 것도 된다. 문재인도 지난 선거에서 48%를 득표했다. 그러나 상대였던 박근혜가 51.6%를 득표했기에 낙선했다. 노무현 득표율 48.9%와 문재인 득표율 48%의 차이는 0.9%다.
결국 고영주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 유권자 48%는 ‘공산주의자’를 지지하는 유권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변형된 공산주의자 노무현’을 지지한 수는 48.9%, ‘그냥 공산주의자 문재인’을 지지한 수는 48%이므로 0.9%가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우리 국민 절반에서 2%만 빼고 모두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를 추앙하는가? 이런 말을 국회에서 당당하게 하는 공공기관장을 용인하는 야당? 그렇다면 그런 야당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야당후보 지지 48%를 공산주의자라는데 우린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발언만이 아니라 그동안 고영주의 행보를 보면 그는 매카시즘의 신봉자다. 이런 사람이 공영방송사 사장의 임명권이 있는 공익기관 대표라면 그 기관은 공익기관이라고 할 수 없다.
MBC는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이란 사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공동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 국민은 노무현 문재인을 찍은 48%도 당연히 포함된다. 이들도 MBC를 통해 유익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는 고영주가 MBC를 감독하는 기관의 수장으로 있다면 이 방송이 이 48%까지의 유익을 위해 복무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관의 수장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48%가 배제된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박근혜는 당연히 고영주를 징치해야 한다. 이게 답이다. 결국 이런 답을 얻을 수 있는 전투력을 새정치민주연합이 갖고 있느냐의 싸움, 이 싸움의 끝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느냐가 된다. 그런데 고영주가 당당하게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는 버틸 자신이 있어서다. 야당이 어떤 압력을 행사해도 박근혜가 자신을 지킬 것이라는 자신감, 이 자신감이 당당하게 노무현도 문재인도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야당의 전투력이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005년, 당시 여당 열린우리당은 ‘4대개혁입법’(국가보안법·과거사법·언론개혁법·사립학교법) 개폐에 정권을 걸었다. 당연히(?)한나라당은 이를 ‘4대악법’으로 부르며 저항했다. 열린우리당은 결국 국가보안법 등에는 손도 못 대고 사학법 하나만을 처리했다. 개정된 사학법의 골자는 개방형 이사제 도입, 대학평의원회 설치 의무화, 법인이사회 회의록 공개, 법인 임원의 인적사항 공개 등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사학 재단들의 반대를 등에 업고 이도 받지 않았다.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 9일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했다. 즉각 반발한 박근혜는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앞서 국가보안법 등의 극력저항에 밀린 열린우리당이 원내과반 여당의 체면이라도 챙길 수 있는 힘을 보여준 것이 사학법 강행통과였는데 박근혜는 이것까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2005년 서울 명동에서 열린 한나라당 장외투쟁 현장의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2005년 12월 13일, 명동에서 시작된 한나라당 장외투쟁은 이듬해 1월까지 전국을 순회하면서 이어졌고 국회는 53일 동안 파행했다. 12월 1월의 한겨울 한파에도 거리의 한나라당은 강경했다. 모든 국회의 회무는 중단되었다. ‘민생입법’같은 말도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과반 여당의 항복만이 이들을 장내로 불러 올 수 있었다. 후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이렇게 썼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망연자실했다. 사학법이 어떤 법인가? 우리 아이들의 앞날과 우리 교육의 미래가 걸려 있는 법 아닌가? 그 자리에서 나는 비장한 결의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 땅의 부모들과 함께 사학법 반대투쟁에 나서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중략) 사학법은 우리 아이들에 관한 문제로서 아이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나라의 근본이 달라진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여당이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는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장외투쟁이 길어지면서 민생을 챙기자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지적이 나오자 박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뒤흔들어놓는 법은 절대 통과돼서는 안 되며, 법의 뿌리가 허물어지면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걸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여론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당시 장외투쟁 연설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년간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온 국민에게 추위를 안겼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이었다. 편 가르기·부정부패·무능으로 추운 겨울이었다. 이 정권은 봄의 새싹을 틔울 희망마저 없다. 다수 횡포로, 폭력으로 밀어붙여서 열린우리당이 날치기한 것은 우리 교육이고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헌법정신이다.”- 12월 13일
“이 정권이 경제를 살렸나, 국민을 편안하게 했나, 외교를 잘했나, 다 망치고 이제는 교육마저 망치려 하고 있다. 현 정권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파괴정권'이다. 한없는 걱정으로 비통한 심정이다.” - 12월 16일
박근혜와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은 이듬해인 2006년 1월 30일 여야 원내대표가 북한산 산행을 하며 가진 회담과 함께 끝났다. 당시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와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북한산에서 산상 회담을 열고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재개정 요구를 수용하고 한나라당은 국회 등원을 약속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국회 등원을 거부한 지 53일만이었다.
앞서 거론했지만, 당시 박근혜는 이회창을 지지한 46.8%의 유권자들이 국가보안법 존재를 원한다는 이유로 노무현 정권의 국보법 폐지 또는 개정을 극력 반대하므로 국가보안법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4대개혁입법 중 마지노선으로 지키려 했던 사학법마저 후퇴하게 만들었다. 같은 맥락이라면 문재인은 자신을 지지한 48%의 유권자가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를 지지한 유권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고영주 몰아내기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자신 문제가 아니라 48%의 국민 문제다.
지금 문재인은 2005년 12월 16일 박근혜가 했던 연설 그대로를 받아 되치기를 해야 한다. “이 정권이 경제를 살렸나, 국민을 편안하게 했나, 외교를 잘했나, 다 망치고 이제는 교육마저 망치려 하고 있다. 현 정권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파괴정권’이다.”를 그대로 가져다 “이 정권이 경제를 살렸나, 국민을 편안하게 했나, 외교를 잘했나, 다 망치고 이제는 국민 절반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단하려 하고 있다. 현 정권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파괴정권’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
문재인이 앞장서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고 노무현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고영주를 용납하려는 이 정권의 기도를 깨뜨려야 한다. 그래서 고영주는 물론 이념적 편가르기로 정국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암수가 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교체도 총선승리도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이마저도 유야무야라면 정말 이 야당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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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朴, 나라 개판 만들고 혼자 살겠다고 퇴임 후 목숨 관리”새정치연합, 긴급 의총 열고 고영주 이사장 해임 촉구 결의

 
▲ <사진제공 = 뉴시스>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SNS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원색 비난했다.
진 교수는 7일 “박근혜는 1년차 국정원 대선개입, 2년차 세월호에 십상시, 3년차 메르스 사태… 경제는 바닥, 민생은 파탄”이라며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는 저 혼자 살겠다고 퇴임 후 목숨 관리에 들어간 듯”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대해서도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진 교수는 “정신병원, 아니면 반인권적 범죄자로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며 “고영주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수준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오랫동안 한국 현대사의 흑역사로 남을 듯”이라며 “이 중요한 10년을 저들이 하는 닭짓을 보며 고스란히 날려 보내야 하다니…”라고 탄식했다.
  
 
한편, 고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발언에 새정치연합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고 이사장의 해임을 촉구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지난번에 한 발언이 실수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가겠다고 수차례 경고했다”며 “그러나 어제 미방위 국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민중민주주의자로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명백히 이야기하며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 때 문재인 후보의 사상을 알고 찍었으면 이적행위 동조자”라며 “문재인 후보를 찍은 48% 넘는 국민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동조자로 몰은 것으로 이는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태”라고 비판했다.
새정치연합 의원들도 결의문을 내고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혼돈으로 몰고갔던 백색 테러가 고영주 이사장의 입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며 “본인과 다른 생각을 말살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영주 이사장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인식은 다양한 가치관의 존중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고 이사장의 즉각 해임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 중단 등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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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집 때려 부숴도 기뻐하는 사람들


15.10.07 08:14l최종 업데이트 15.10.07 08:14l


[이전 기사] 서울 '전세 1억' 아파트, 거기 제가 살았습니다

고덕주공 입주자, 특히 3단지보다 2단지 주민에게 재건축에 따른 이주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우리 가족도 언제 이사 가야 하나 늘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날로 치솟는 서울 전셋값이 너무 야속했다. 고덕주공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내심 재건축이 천천히 진행되길 바랐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2014년 하반기 들어서는 그다음 해 봄쯤 재건축 이주 명령이 떨어진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렸다. 우리 가족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이따금 네이버 부동산 화면을 띄워 근처 다른 지역 매물을 알아보았다. 경기도 하남, 송파구 석촌동을 살폈다. 아파트는 어림없었고 빌라(다세대주택)나 단독 다가구 주택 위주로 찾았다.

전세 물건이 많지 않았고 고덕주공보다 비쌌다. 석촌동 전세 빌라를 직접 보고 온 적도 있다. 고덕주공보다 덜 낡았고 직장이 있던 강남역과 가깝다는 건 나은 점이었다. 하지만 더 좁았고 햇볕도 잘 들지 않았으며 주택가라 주차가 곤란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고덕주공 전세 보증금은 비교적 싼 편이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돈으로 왜 저런 집밖에 구할 수 없는 걸까'하는 무력한 의문만 들었다.

지난 1월, 추위를 뚫고 퇴근한 어느 날이었다. 몸에 두른 모직 코트와 목도리가 무거웠다. 한 달 전부터 판교로 출근했다. 회사가 강남역에서 사옥을 옮겼다.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 6시 10분쯤 지하철을 타고 천호에서 내려서 6시 35분에 출근버스를 타는 나날이었다.

저녁이 되면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퇴근길에 올랐다. 몸도 피곤했고 마음도 지쳐갔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힘없이 열고 들어갔다. 1층 각 세대 우편함마다 꽂힌 종이봉투가 눈에 띄었다.

재건축 정비사업 조합이 보낸 이주 안내문이었다. 빠르면 3월부터, 늦어도 9월 말까지는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올 것이 왔구나. 어차피 회사 사옥도 옮겼기에 출퇴근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이사 가고 싶은 참이었다. 맞벌이가 아니어서 배우자의 직장 위치를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아기가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았고 어렸기 때문에 전학 문제도 걸리지 않았다. 아내와 의논하여 최대한 빨리, 3월이 오면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이사 올 사람 없는 아파트, 하루에만 화물차 10대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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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축 재건축 이주안내 현수막
ⓒ 이두리

다시 네이버 부동산 화면을 띄웠다. 회사가 있는 판교 테크노밸리를 출발지로 두고 지도를 살폈다. 성남 구도심, 분당, 용인 쪽을 검색했다. 우연히 분당 동쪽 수내동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였지만 주택가가 있어서 분당 다른 지역보다는 보증금이 낮을 것 같았다.

수내동에 있는 한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방문했다. 중개인이 권하는 매물을 보았는데 역시 그곳에서도 '그 돈으로 왜 저런 집 밖에?'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개인은 수내동이 분당에서도 학군이 좋고 학원이 몰려서 전셋값이 비싼 곳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것도 모르고 주택가랍시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다.

중개인은 우리 가족 상황을 듣고 경기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일대를 추천했다. 광주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광주? 그게 어디지? 게다가 읍, 리라니. 물론 호남의 광주(광역시) 말고 경기도에도 광주가 있다는 건 알았다. 나나 아내나 지방 출신이고 경기도 권역에는 연고가 없었다. 수도권 지도를 볼 때면 동유럽 지도를 보는 기분이 드는 사람들이었다.

수도권 위성도시들 이름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 식별할 수 없었다. 중개인이 사무소 벽에 걸린 지도를 짚으며 설명했다. 광주 신현리는 분당 바로 동쪽에 붙은 곳이라고. 서울이나 분당보다 싸고 새로 지은 빌라가 많이 들어섰다고.

광주에서 둘러 본 집들은 서울이나 분당과 비교하면 조건이 확실히 좋았다. 우리 가족은 고덕주공 보증금과 똑같은 값의 빌라(단독 다가구주택)를 전세로 구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가 그 세대의 첫 입주자가 될 터였다.

30년 넘은 집에서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생각하자 적잖이 설레기도 했다. 임대차계약을 마친 날, 아내와 나는 광주라는 곳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삶의 방향이 무작위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지난 3월 첫 번째 금요일에 우리 가족은 고덕주공을 떠났다. 그 날 우리 집 말고도 열 곳 넘는 집으로 화물차량이 들어섰다. 가까이서 내가 본 것이 그만큼이었다. 같은 날 이사 간 집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이 살던 집으로 이사 들어올 사람이 없었다.

서로 맞추어야 할 게 없어서 편했다. 재건축조합에서 알려준 대로 미리 한전, 도시가스 회사, 수도사업소에 연락했다. 전기·가스·수도를 차단하는 절차를 밟았다. 계약할 때 본 집주인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50대 초중반 남자인데 점잖고 친절했다. 함께 재건축조합 사무실이 있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가서 퇴거절차를 마쳤다. 헤어지기 직전, 그냥 떠나기도 어색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이곳에 아파트 새로 지으면 이사 와서 사시는 건가요?"

집주인 또한 가볍고 짧게 대답했다. 조금 쑥스럽다는 듯 미소도 지었던 것 같다.

"예, 그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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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삿짐 트럭 맨 앞 차가 우리 집 이사 트럭. 그 뒤로 보이는 트럭들은 각각 다른 세대의 이삿짐 차량이다.
ⓒ 이두리

정든 가게 다시 찾았는데... 이미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떠난 지 여섯 달 만에 다시 찾은 고덕주공 2단지 아파트. 입주자는 드문드문 남았지만 상가는 모두 다 빠졌다. 이곳으로 오면서 혹시 아직 남은 가게가 있다면 몇 가지 물어보려 했다. 입주민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장사는 되는지, 이제 어디로 떠날 건지.

하지만 모두 가까이 또는 멀리 가게를 옮긴다는 말을 남기고 이미 가버렸다. 물건 오천 원어치 사면 쿠폰 스티커를 한 장씩 주던 슈퍼 아주머니도, 텔레비전 채널을 KBS1에 고정해두던 약사 할아버지도, 떠나면서 화분 가져가도 된다고 써붙인 꽃집 아주머니도 지금은 여기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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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상가 문 닫고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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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폐점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사랑해 주시고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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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안내 '점포를 급히 이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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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도 수명이 있다. 오래된 건물은 위험하거나 미관을 해칠 수 있으며 살기 불편할 수 있다. 부분 개보수가 어려워 전체를 무너뜨려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당장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철거가 더욱 나은 주택공급을 위한 후생의 시발점일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있었고, 지금 진행 중이며, 가까운 미래에 있을 한국 사회의 재건축·재개발은 안타깝고 지나친 면이 많다. 자기가 나고 자란 집을 때려 부수는데도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 부동산 차익과 개발이익을 두고 벌이는 아귀다툼, 해임 재선임 고소 고발 손해배상 운운 현수막이 걸리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고 오히려 낯익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와 같은 독립잡지 발간 소식은 반갑고도 소중하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편집장 이인규씨는 고덕주공보다 세 살 위인 둔촌주공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둔촌주공 재건축이 묻어 버릴 풍경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진을 싣고 글을 엮어 독립잡지를 만들었다.

그 뒤 추억을 지키고 싶다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어져 잡지 2, 3호를 냈다. 이씨는 새로 들어설 아파트에 반영할 가치를 재건축참여 건축교수와 함께 고민하거나 아파트 주민들과 소통하는 공동체 자리를 마련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관련기사 : 재건축아파트 속 사람이야기 기록하는 아파트키드).

광주 신현리로 돌아가는 승용차 안에서 문득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여행스케치 1집에 실린 <별이 진다네>였다.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이 무너졌네
별은 그저 별일 뿐이야 모두들 내게 말하지만
(중략)
나의 꿈은 사라져가고 슬픔 만이 깊어가는데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 만이 짙어가는데

곧 아파트가 헐린다. 내 삶의 흔적과 추억 한 부분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평생 보던 나무를 베어 없앤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아.' 아메리칸 인디언이 한 말이라고 한다(김영하 작가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중 138쪽 참조).

고덕주공은 그저 오래된 부동산일 뿐일까. 같은 자리에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더라도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부끄럽지만 고덕주공에 살면서 사귄 이웃이 없다. 증인 삼을 사람도 없다. 나와 아내의 주민등록초본, 아들의 출생등록지가 이곳에서 보낸 우리 가족의 역사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다.

직장, 학교, 부담스런 보증금 등 여러 사정 때문에 고덕주공 2단지를 멀리 떠나기 어려운 전·월세살이 입주민이 많았을 것이다. 3단지 2580세대도 머지않아 이주를 시작한다고 한다. 그 많던 입주민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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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덕주공 3단지 표지판 내 고향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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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고덕주공아파트 놀이터와 벚나무, 다시 볼 수 없을 풍경. 2014년 4월 어느 봄날에.
ⓒ 이두리


○ 편집ㅣ김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