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그렇게 한 것이 박정희야. 그것이 박정희의 정치야. 어떤 정치냐면 청와대 정치고, 중앙정보부의 정치야. 어떤 것이라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
최승호 신임 MBC 사장이 지난 2016년 만든 <자백>에 출연한 김승효씨의 회고다. 그가 말한 '중앙정보부의 정치'를 '김기춘의 정치'로 치환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김승효씨는 박정희의 시대가 낳은 중앙정보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74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배후에서 학생운동을 조종했다는 죄로 7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 난 뒤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결국 일본에 다시 넘어간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남산에 끌려갔던 1974년 5월 4일, 그 날짜를 절대 잊지 못하는 그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그 암흑의 세월을, 지옥 같은 세월을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왜냐하면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됐으니까 죽을 지경이야. 죽고 싶단 말이야.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야."
김승효씨는 단호했다. <자백>의 최승호 감독이 한국에 올 생각이 없자고 묻자 김승효씨는 "한국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한국은 나쁜 나라다", "얼마나 한국이 나쁜 나라인지 말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무죄'는커녕 이후 평생을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산 그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부터 현 국정원까지. <자백>은 한국의 정보기관이 조작했으며 차후 무죄 판결을 받은 간첩 사건이 무려 100여 건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간첩 조작의 달인'으로 유명한 김기춘은 김승효씨와 같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무어라 말 할 수 있을까.
젊은 공안검사였던 김기춘이 '간첩 조작'의 '능력'을 인정받아 박정희 유신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며 정치적 성공의 초석을 다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역사'다. 검사로서 유신헌법 초안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김기춘은 유신의 한복판인 70년대 중·후반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숱한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정치인으로, 법무부장관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70대까지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갔던 그 김기춘이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는 물론 여타 본인이 연루된 사건과 관련해 그 어떤 공식 '사과'를 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기 전까지 말이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 그가, 19일 항소심 재판 법정에 선 피고인 김기춘이 최수 진술을 통해 병석의 아들을 들먹이고 선처를 호소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기나긴 세월 동안 권력의 단맛을 누렸던 김기춘이 이제 와서 병석의 아들을 거론하며 선처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남은 소망은 늙은 아내와 식물인간으로 4년간 병석에 누워 있는 아들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주는 것입니다."
이번 뿐만은 아니다. 김기춘의 아들은 지난 2013년 12월 교통사고 이후 뇌출혈 판정을 받고 의식 불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 당시에도 김기춘은 아들을 언급했다.
그는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인양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지시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일도 없고 그렇게 지시한 일도 없다"며 "저도 아들이 죽어 있는 상태인데 왜 시신을 인양하지 말라고 하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김기춘의 호소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아마도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소셜미디어 글일 것이다.
"기춘 대원군 식물인간 아들 손잡아주고 싶다고요... 눈물 겹네요. 저도 유민이 손 잡고 싶습니다. 그런데 유민이가 내 곁에 없네요.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
김기춘의 최후 진술이 알려지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던 '아들'과 '부모'도 있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그의 어머니다. 국정농단 사태가 한창이던 작년 연말, 김영한 수석의 어머니는 복수의 언론을 통해 "아들이 죽은 건 김기춘, 우병우, 박근혜 때문"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다.
2014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한 김영한 전 수석이 김기춘, 우병우 등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퇴직 후 급성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었다. 김기춘은 이들을 포함해 숱한 직간접적인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원망과 원한을 샀다. 그가 최후 진술에서 아들을 언급하자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헌데, 김기춘의 예의 그 '확신'은 다른 발언에서 더 확실히 드러났다.
여전한 '확신범' 김기춘
▲ 올 1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의 한 장면.
"북한과 종북 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공직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제가 가진 생각이 결코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믿지만, 북한 문제나 종북 세력문제로 인한 위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본인을 비롯해 모든 피고인이 결코 사리사욕이나 이권을 도모한 것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란 헌법적 가치를 위해 애국심을 갖고 성실히 직무수행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이날 김기춘의 최후 진술을 갈무리하자면 이러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다를 바 없는 '확신범'의 언어다 다를 바 없다. 종합하자면, 본인의 블랙리스트 지시와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은폐, 블랙리스트 지시 등이 헌법적 가치에서 비롯된 '애국심'의 발로였고, 과거 간첩 조작 사건을 포함해 '공안' 이력이 '북한'과 '종북' 세력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한 '공직자의 사명'과 '직무수행'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법정에서 "특검이 재판을 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고 독배를 들이밀면 제가 깨끗이 마시고 이걸 끝내고 싶다"라고 한 것이 다소 감정적인 발언이었다면, 이번 최후 진술은 꽤나 자기 확신을 드러낸 '진심'에 가까운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배경 위에서 "경위를 불문하고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통받으신 분들에게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용서를 구한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이, 피해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결백을 호소하던 그 피고인 김기춘이 "아들의 손을 다시 잡고 싶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호의'와 '연민'을 보내기에게는 '중앙정보부의 정치'를 실현하고, 피해자들에게 지옥의 세월을 맛보게 했던 지난 과오와 치러야 할 죗값이 너무나 크지 않은가. 검찰이 구형한 7년형이 "부족하다"고, "종신형도 부족하다"는 여론이 빗발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저는 정말 내가 그런 것이 권력을 남용해서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하고 이랬으면 오늘날 김기춘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그 점을 제가 자부합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원이던 지난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위와 같이 말했다. 김기춘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본인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자부'가 남다른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 자부심을 안고서, '법조인' 출신 김기춘이 특검이 구형한 딱 그만큼만 감옥에서 제2의 인생을 보내기를 바란다. 우연찮게도, 김승효씨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세월 역시 7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의 평화적 개최를 위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일정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을 공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19일 미국 방송 NBC와 인터뷰에서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까지 도발을 멈추면 한미 양국도 올림픽 기간에 예정돼있는 합동 군사 훈련을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미국에 이러한 제안을 했으며, 미국 측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훈련 연기는 북한에게 큰 의미가 없다. 북한이 군사 훈련에 대응하려면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국제적인 제재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북한으로서는 훈련 축소나 중단이 아닌 연기는 예년과 달라지는 것이 없는 셈"이라며 "연기만을 가지고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유인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문 대통령의 이번 입장 표명이 "외교의 '자국 중심성'을 확립해가는 시발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의 연기든 중단이든 축소든 이런 식으로 해서 남북관계 개선과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북한에 문 대통령이 내놓은 이번 제안을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북한 입장에서 군사 훈련의 연기를 미국에 요청했다는 사실과 함께 균형 외교를 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움직임을 보고 그동안의 오해나 섭섭함을 풀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며 "그렇게 남쪽과 관계를 푸는 것이 북한에도 좋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 혼자서 북핵 국면을 돌파해나갈 수 없다. 한국이 미국과 북한의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줄 때 북한에도 도움이 된다"며 "북한은 이미 예전 사례에서 이를 체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북중 관계를 보더라도 북한은 남쪽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경쟁국가'라고 선언한 마당에 중국이 북한한테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북한도 알게 될 것"이라며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남한을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당면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8일(현지 시각) 발표한 국가 안보전략보고서와 관련, 정 전 장관은 미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풀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북핵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결정적 증거는 중국과 러시아를 경쟁국으로 명시했다는 것"이라며 "북핵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면, 그리고 해결하려고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면 협조를 구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과 소위 '경제 전쟁'을 통해 미국의 일자리 창출, 즉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되면 외교 안보 분야에서 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인터뷰는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미국 방송 NBC와 인터뷰에서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까지 도발을 멈추면 한미 양국도 올림픽 기간에 예정돼있는 합동 군사 훈련을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미 미국에 이런 제안을 했고, 미국 측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는데요. 미국은 아직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문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이를 먼저 공개한 모양새가 됐습니다.
정세현 : 청와대가 정확히 언제 제안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미국이 설사 한국의 제안에 동의하기로 내부에서 결정했더라도 제안을 받자마자 자신들의 결정을 공개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방송을 통해 군사 훈련 이야기를 꺼낸 것은 미국의 동의 없이 내용을 까버렸다기보다는 오히려 미국 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공개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같은 추정을 하는 이유는 대통령 개인의 성향을 반영한 측면도 있습니다.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앞서가는 편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슷한데, 이쪽 저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하고 결정을 내리는 타입 같습니다. 따라서 미국과 조율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기 때문에 이같은 사안을 공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북한이 여기에 어떻게 호응해 나올지를 주목해야 하는데요. 사실 훈련 연기는 북한에게 큰 의미는 없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이 기존처럼 2월 말~3월에 하든 5~6월에 하든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국제 제재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 훈련에 대응하려면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북한이 한미 연합 훈련에 반발하는 이유가 군사적인 측면도 있지만, 위협을 막기 위해 들어가는 경제적인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근 북한이 100만 톤 원유를 비축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1년에 1억 300~400만 톤 정도를 사들이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는 우리의 100분의 1도 안되는 양입니다. 이 정도 기름을 가지고 군대를 움직여서 훈련에 대응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 훈련이 연기되면 5월 말에서 6월 초에 훈련이 끝나는데, 8월에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이 또 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국력이 소진되는 시기가 다소 늦춰지는 것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 연기를 고려하겠다"는 입장 발표로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유인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와 이후 대화 국면 조성까지 염두에 두고 나름의 카드를 던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북핵을 둘러싼 현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일까요?
정세현 : 만약에 내년 훈련을 올림픽 때문에 취소한다고 하면 북한이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관계개선 분위기가 조성되면 군사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 등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평창을 평화올림픽으로 치르겠다고 한다면 연기가 아니라 중단을 요청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제안은 '연기'이기 때문에 북한의 반응을 봐야겠지만 일단 당장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문 대통령의 입장은 외교의 '자국 중심성'을 확립해가는 시발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의 연기든 중단이든 축소든 이런 식으로 해서 남북관계 개선과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똑같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 남북관계를 중심 축에 놓고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시동을 건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지난 10월 '3NO' 발표와 한중 정상회담, 이번 조치까지 묶어서 미국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국에 굴복했기 때문이고, 이것이 곧 주권을 상실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교는 미국과도, 중국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실속을 챙기는 것입니다.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치는 일변도 외교를 하는 것이 훌륭한 외교가 아닙니다.
▲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미국 방송 N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청와대
그런데도 국내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문 대통령의 방중 과정에서 생긴 의전 문제를 가지고 국빈 방문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외교에서 본질은 의전이 아니라 어떤 성과를 챙겨왔느냐로 봐야 합니다.
이번 국빈 방문의 최종 결론은 리커창 총리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향후 양국 경제, 무역부처 간 채널을 재가동하고 소통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사드로 얼어 붙은 양국 경제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이렇다면 의전 문제에서 섭섭함이나 불쾌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국익 차원에서 봤을 때는 남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
그런데 한미 동맹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 한국 내에는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미 이들은 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 전부터 중국에 끌려가는 것은 주권 침해라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지난 10월 제기된 이른바 '3NO'와 관련해서도 중국에 편향됐다는 지적을 했죠. 그런데 미국 편에서 미국이 하라는대로 하면 주권을 존중받는 것일까요?
평창 올림픽 참가가 북한에도 이득이다
프레시안 : 문 대통령이 신호탄을 쐈기 때문에 이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데요. 북한이 신년사에서 관련된 입장을 표명할까요?
정세현 : 원칙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한미 연합 군사 훈련과 관련해서 훈련을 중단하라, 남쪽과 못 만날 이유는 없다, 남쪽의 태도를 봐가면서 회담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등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군사 훈련의 연기를 미국에 요청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국과 거리를 두고 균형 외교를 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움직임을 보고 그동안 가졌던 오해나 섭섭함을 풀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남쪽과 관계를 푸는 것이 북한에도 좋은 일입니다. 북한 혼자서 북핵 국면을 돌파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한국이 미국과 북한의 중간에 서서 조정자 역할을 해줄 때 북한에도 도움이 됩니다. 북한은 이미 예전 사례에서 이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북중 관계를 보더라도 북한은 남쪽을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경쟁국가'라고 선언한 마당이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한테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북한도 알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남한을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당면한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프레시안 : 북한의 올림픽 참가가 북핵 문제가 대화국면으로 전환되는 시그널로 볼 수 있을까요?
정세현 : 북한이 비록 출전권을 딴 선수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매우 다릅니다. 북한이 개회식 때 참석하고 동시 입장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좋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평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큽니다.
또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온다면 선수단만 참가하는 것은 아니고 그 기회에 정부 당국자들도 함께 올 겁니다. 그런 기회에 예를 들어 우리가 판문점 채널 복원하자는 제안을 던질 수도 있는 겁니다. 전화나 통신으로 하는 것보다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쉽게 풀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도 올림픽에 참가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저 나라가 그래도 올림픽에는 나오는구나. 완전히 나쁜놈들은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북한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도 올림픽 참가는 좋은 카드입니다. 북한도 웬만하면 올림픽에 참가해서 이미지 개선에 득을 보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북한은 최종 참가 엔트리 마감인 1월 29일까지 계속 관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도 일단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는 북한 선수단도 참가 준비는 끝났고, 이제 김정은의 결정만 남았다고 분석하던데 미국의 태도와 국제 정세, 연합 군사 훈련의 추이 등을 보면서 결론을 낼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참가하겠다고 결정하려면 미국 쪽에서 신호가 나가야 하는데, 현재 미국 방침이 정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트럼프 정부의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의 책임자들이 말하는 것이나 스타일로 봐서는 쉽게 조율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미국, 북핵 해결 의지 있나?
프레시안 :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지난주 발언을 두고 너무 왔다갔다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습니다. 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일관된 방침이 없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정세현 : 트럼프 대통령, 틸러슨 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의 말이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미국 시간으로 18일에 공개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게 아니라 이것저것 되는 내용들을 마구 꽂아 넣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북핵 문제를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북핵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결정적 증거는 중국과 러시아를 경쟁국으로 명시했다는 겁니다. 이는 냉전식 사고인데요. 북핵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면, 그리고 해결하려고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면 협조를 구할 수 있을까요?
특히 미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을 압박해 들어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과 소위 '경제 전쟁'을 통해 미국의 일자리 창출, 즉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외교 안보 분야에서 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은 일본과 호주, 인도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광범위하게 압박해 들어가는 구실로 북핵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서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빠른 속도로 중국에 침식당할 가능성은 낮아진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북핵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고 미국의 주요 당국자들이 북핵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면 미국이 북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기 쉽지만, 미국은 북핵이 대외 정책의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미사일 방어체제(MD)를 한국‧일본과 같이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향후 이 부분에서 미국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요?
정세현 :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MD의 히스토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김영삼 정부 때부터 우리에게 MD를 팔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KAMD)가 나오게 된 것이죠.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때도 계속 미국은 MD 판매를 시도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통해 북한이 우리에게 핵이나 미사일을 쏘지 않게 만들겠다고 하면서 MD 구입 강요에 대응해왔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MD만은 도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켜왔죠.
▲ 18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다른 어떤 정권보다 높았습니다. 미국은 이 점에 착안해서, 즉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적개심을 이용해서 무기 판매를 늘리자고 판단했다고 봅니다.
즉 앞에서 살펴봤듯이 MD는 지금 생겨난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21세기 내내 미국이 계속 정책적 측면에서 가져갈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미국은 냉전 때만 해도 소련과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써왔습니다. 그러다가 냉전이 없어지면서 MD 체계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MD를 들여놓으면 좋지만, 한국이 거부하면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중국을 포위할 수 있는 곳에 설치하면 그만입니다. 미국은 그런 방식으로라도 MD 체계를 완성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한국의 협조가 업더라도 MD 구축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아마 미국의 MD 완성 계획을 검토했을 겁니다. 그 결과 계속 미국의 요구대로 계속 가다보면 결국엔 버틸 수 없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3NO' 입장과 MD 구축이 충돌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우리가 MD 구축을 거절하면 동맹이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 MD 구축은 한미관계에서 그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사안은 아닙니다.
프레시안 : 그런가 하면 중국 내에서는 한국의 '3NO'를 받아주는 것으로 사드를 봉합한 것에 대한 불만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군부에서 불만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정세현 : 중국은 한국과 사드 문제를 봉인하는 과정에서 너무 양보만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외교에서 합의라는 것은 각자 해석을 유리하게 하면서 다시 또 접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입장에서는 한국과 사드 갈등을 마무리 지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 주석은 사드를 적당히 봉인하고 '일대일로'를 위해 서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대일로가 유라시아 세력권을 중국 아래에 두겠다는 건데, 이러려면 중국의 외교 및 경제 분야 관계자들이 총동원돼야 합니다. 한국 정부도 중국이 일대일로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드 문제를 봉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중국 측도 일정 부분 한국 측에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정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국도 한국이 사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한미 관계가 있기 때문이죠. 또 우리가 미국이랑 동맹을 끊고 중국과 맺는다고 해도 중국은 우리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이 역시 중국도 잘 알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해결해야 할 사드 문제를 왜 우리가 '3NO' 입장 표명을 하면서 끼어든 것이냐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정세현 : 문재인 정부가 '3NO'를 밝힌 것은 미국과 사전 조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과 교감 없이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는 외교관은 한국에는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이는 미국의 승낙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2014년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줄어들어 ‘디커플링’의 시작에 대한 기대를 불렀던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이듬해 다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디커플링은 경제 규모와 온실가스 배출량이 동반해 증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경제는 성장하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은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 폭은 전년 대비 2.8%인 국내총생산 증가율에 견줘 미미한 수준인 0.2%에 불과했다.
국무조정실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는 20일 2015년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6억9020만tCO₂eq(이산화탄소 상당량)으로 집계한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통계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년도 배출량 6억8920만tCO₂eq보다 1백만tCO₂eq(0.2%) 증가한 것이다.
배출 부문 별로 보면 에너지 부문과 폐기물 부문에서 각각 330만tCO₂eq과 100만tCO₂eq가 늘어나 배출량 증가를 이끈 반면, 산업공정과 농업 부문은 전년보다 각각 300만tCO₂eq, 20만tCO₂eq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자료: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는 2015년 배출량이 소폭 증가한 이유로 두바이유 기준 유가가 전년 대비 47%나 내려가는 등 저유가에 따른 교통량 증가와 석유제품 생산 증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정책 시행에 따른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했다.
2015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년 대비 증가하기는 했으나 증가폭이 국내총생산 증가폭의 14%에 불과해, 국내총생산 10억원 당 배출량은 471tCO₂eq로 1990년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에 10억원 당 698tCO₂eq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국내총생산량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인 온실가스 집약도가 33%나 향상된 셈이다.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은 2012년 이후 지속적으로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는 낮게 나타나고 있으며, 2014년에는 국내총생산이 증가한 가운데 처음으로 절대량이 전년 대비 감소한 바 있다. 과거 온실가스 배출량 절대량이 전년보다 준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등 경제 침체기에 나타난 것으로,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배출량이 줄기는 2014년이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온실가스 통계 발표 직후 ‘디커플링’의 시작일 수 있다는 기대도 나왔다.
» 정부의 석탄발전소 확대 방침에 반대하는 환경단체 회원들이 7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석탄화력발전의 피해를 표현한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정부는 2015년 기후변화 파리협정에 참여하며 유엔에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망치(BAU) 대비 37% 줄이겠다는 감축계획을 제출하고, 지난해 말에는 2030년까지 배출량을 5억3600만으로 줄이기 위한 로드맵을 확정한 바 있다. 이 목표가 무리 없이 달성되려면 가능한 일찍 디커플링이 시작될 필요가 있다. 2015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다시 증가한 것은 한국이 디커플링 단계에 들어간 것은 아님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배출량 증가폭이 매우 미미하다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최형욱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연구관은 “유가가 떨어지면 에너지 소비량이 크게 느는 것이 통상적 ”이라며 “전년에 감소했던 것에서 다시 증가하기는 했지만, 국제 유가가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2.8%의 경제성장을 기록한 상황에서도 우려했던 것 만큼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향후 온실가스 배출량은 결국 에너지원별 발전 비율인 전력믹스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대통령 전용고속열차인 '트레인 원' 내에서 미국 측 평창동계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와 대담을 갖고 통상 2월 말에서 3월 초에 시작하는 연례 한·미 연합훈련을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이후로 연기하는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미국 측에서도 지금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으며 한미연합사령부에서는 동맹국 한국의 결정에 따를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은 한미연합사는 미 국방부 소관이고 백악관에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했으며 미 상원 의원들 속에서는 훈련 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미연합사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시설개관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이상하게 미 군부가 평창 올림픽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이전부터 한미정부 사이에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미국 정부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과 대화 국면을 조성해보려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평창올림픽을 성사시키자는 차원에서, 그것도 중단도 아닌 훈련 연기를 전제로 북에게 핵무장력 시험 중단을 요청하는 것이 과연 북에 통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 북은 이런 남측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2012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를 안정적으로 추진할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과 이산가족상봉을 제안하는 등 남북교류를 제안했을 때 북은 이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핵안보정상회의를 마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남북관계를 험악하게 몰고 갔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을 이명박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어쨌든 근본적인 한반도 문제 해결보다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일단 성사시키자는 목적이 먼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북이 이런 남측의 요구를 들어줄지 이제는 미지수다.
특히 미국이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계속 가한다면 평창올림픽이건 뭐건 북은 바로 대미 대응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 일을 계기로 북미대화가 시작되어 평화적으로 한반도문제가 풀릴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고 밝히기는 했다. 고무적인 지적이다.
더 좋기로는 북미관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남북관계를 흔들림 없이 추진할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북이 남북교류협력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미국과 공조하여 대북 제재와 압박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북과 관계를 풀라고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북과 대화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없이는 내년에도 남북관계 개선은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 우려가 높다.
미국도 정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과 대화국면을 조성하려면 대미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하여 대북 군사적 압박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엄청난 미군 군사력을 북을 위협하면서 핵무장력 시험을 중단하라고 하면 북은 반발만 더 거세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타계한 프랑스 누벨바그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 잔 모로는 "목소리라는 것은 한 인간의 측면이자 감정이 비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아나운서 정세진의 목소리가 좋은 예일 것이다. 정세진의 목소리는 프루스트의 문장처럼 물처럼 한없이 흘러가는 듯 하다가도 단단하게 멈춰서고, 대를 물려가며 공들여 사용한 은식기처럼 정감어린 온기가 느껴지면서도 기품이 서려있다. 그녀가 진행하는 93.1FM 라디오 '노래의 날개 위에'에서 정세진의 멘트는 언제나 소개되는 쟁쟁한 성악가들의 노래와 목소리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KBS 파업이 시작되고 파봉단에서 파업영상을 만들고 있는 최승현 PD는 39기 강승화 아나운서를 파업 집회에서 새롭게 발견했다고 평했다. 기수가 낮아, 쟁쟁한 선배들과 다양한 직군이 모두 집중하는 자리인 파업 집회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분위기에 촌철살인의 유머와 재치를 더하면서도 날카로움을 간직한 매끄러운 진행으로 한껏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이 인상깊다고 말했다. 이런 강승화 아나운서가 월요일 고정을 맡아 모두가 지치지 않고 집회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다며, 최PD가 직접 대사를 써서 연출한 '적폐와의 대화' 에 주저없이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KBS 파업이 100일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유례없이찾아온 혹한에 맞서며 240시간, 10일동안 547명의 조합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릴레이 발언을 이어나갔다. 아나운서 구역의 정세진, 강승화 두 아나운서를 만나 파업 이야기를 들었다.
KBS 강승화 아나운서(좌), 정세진 아나운서(우)
-파업 현장에서 눈물 고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진이 인상깊었습니다. 어떻게 찍힌 사진이었나요?
=강승화(이하 강): 플룻 연주자 분들이 저희 파업 집회 현장에 응원을 하러 오셨어요. 처음에 저는 안 울려고 했어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개사해서 '파업이 끝나는 날에' 이걸 노래를 해주셨는데, 눈물이 난 건 아니었어요. 저는 눈물이 별로 없거든요. 가사를 읽고 노래를 하는데 옆의 선배분 들이 거의 흐느끼면서 우시는 거에요. 박영주 선배부터, 저희 기수 높은 선배들이 막 어깨가 들썩이면서 많이 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눈물이 너무 나길래 이걸 참으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게 딱 사진으로 찍힌 거에요. 선배들 옆에서 눈물이 너무 나는데 어쩌나 싶어서 먼 산 봐야지 하는데요. 그게 파업 66일째였나. 그랬어요. 저희 생각보다 파업이 길어져서 대부분 조합원들이 마음이 약해진 상태라 그날 정말 다 울었어요.
-파업이랑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닌 분이라 이번에 파업 취재를 하면서 정세진 아나운서님이 2012년에 리셋뉴스 진행도 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리셋뉴스를 하게 되셨나요?
=정세진(이하 정): 저는 97년 입사인데 그때 막 입사 신입사원으로 연수원에 들어와 있었는데 총파업 중이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은 신입인데 이게 뭐지? 하면서 연수원에서 앵커가 아닌 기상 캐스터가 9시 뉴스를 진행하는 걸 봤죠.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9시 주말 뉴스를 할 때였어요.
99년도쯤 저는 9시 뉴스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 하고 싶어했던 사람이라 위에서 막 늦은 새벽까지 연락이 왔어요. 파업할 거냐, 안 할 거냐.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묻더군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동료들은 당연히 저한테 뉴스 하면 안된다고 했죠. 새벽이었는데, 3-4시쯤에 결정을 직접 내렸어요. 계속 고민했고, 밤새 생각을 했는데 한 순간 명료해지더라고요. 윗 사람에게 전화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제가 결정한 거기 때문에 이런 결정에 대해 후환이 두렵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누가 저를 막 설득하거나 떠밀린 게 아니잖아요.
-KBS9시 뉴스라면 아나운서 모두가 꿈꾸는 자리 아닌가요? 큰 결정이었겠네요.
=정: 후배들 중에서도 이번에 파업에 참가한 자기 한 사람 때문에 방송이 녹화 들어가기 직전에 안 되었다고, 그러면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나운서는 대부분 그런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제가 내린 결정이라 힘겹지 않았던 거고요. 2012년 파업이 있었어요. '리셋 뉴스'가 2012년인데, 저는 그때 파업에 처음부터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파업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좀 더 전략적으로 준비를 잘 갖춰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파업을 한다는 게 큰 결정인데, 시간을 들여서라도 좀 더 전략을 세워서 들어가야 한다고요.
집행부나 새노조의 구성원들이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해요. 좀 계산을 덜 한달까, 저는 파업 기간이 길어지는 것보다는 긴장 구도를 최대한 끌어서 조일만큼 조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확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투쟁의 대상을 쉽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싸우는 상대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그렇게 순순하게 지금까지 쥐고 있던 권력을 내려놓을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는 길어질 거라고 예상을 했어요. 정권이 바뀌었다고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쉽게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고요. 정권이 바뀌었으니 장악된 방송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좀 순진하죠. 더 대오를 갖추고 싸움이 시작되기를 바랐던 거죠.
2012년에 저는 2주 정도 시간을 좀 더 끌다가 내려왔어요. <노래의 날개 위에> 게시판에 글도 올리고,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93.1 FM방송이지만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알리고 싶었으니까요. 제가 글을 자주 남기는 스타일이 아닌데 청취자들에게 알리려고 들자 위에서는 제 글도 사진도 바로바로 삭제하더라고요. 약간의 압력도 주고요. 2주 정도 시간이 지나 이미 파업에 참여한 동료들을 저버리는게 제 마음이 너무 안 좋은 거에요. 그때는 새노조에 소속된 아나운서가 15명이었어요. 그렇게 파업에 참여하고 중간쯤 지났을 때 우연히 중국집에서 리셋 뉴스 팀을 만났어요. 선배들이 너무 고생하시는게 눈에 보였어요.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저도 조합원이니 얼마든지 활용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바로 리셋 뉴스를 해달라고 하시는 거에요. 선배 기자들이 계셨고, 저는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도 아니고 따로 간 거였어요. 저는 처음에 뉴스 한 회차를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계속 하는 거더라고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속된 말로 저는 리셋뉴스 때문에 찍힌 게 되어버렸죠. 아무래도 화제가 되고, 홍보도 많이 되고 많은 분들이 보셨고 하니까요. 저는 그것도 제가 결정한 거라, 하나도 불이익을 받는 거라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없었어요. 제가 누구한테 떠밀려서 갔다면 불이익을 받았다고 느꼈을 텐데, 제가 결정해서 들어간 건데 거기에 대해서 억울하다 여기지 않는 거죠. 진심으로요.
후배들이 물어볼 때가 있어요. 파업해야 하는지, 방송 내려 놓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니까요. 저는 언제나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해요. 선배가 끌어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저는 늘 자기가 결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이야기해요.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건 성인이라면 당연한 거고요. 누가 끌어줘서, 누가 설득해서 이게 아니라 내가 이게 정당하다고 소신을 갖고 생각한다면 하는 거고, 아니면 방송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 파업 안하고 방송하는 거고요.
-방송이냐, 파업이냐 본인이 정해야 하는 거군요.
=강: 그걸 안 정하면 파업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이걸 내가 방송이 너무 하고 싶은데 파업도 하고 싶고, 오락가락 하면 너무 괴롭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되니까요. 확실하게 지금 뭘 해야 되는지 각오를 하고 파업을 해야 하는 거에요. 파업이 저희에게는 정말 힘들죠. 우선 생활인인데 월급을 못 받고요.
=정: 그게 어떤 면에서는 너무 순수한 거고, 한편으로는 오만인 거에요. 정말 전략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너무 사람들이 순수한거죠. 노조 집행부도 다 너무 순수하게 계산 속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좀 더 전략적으로 움직였으면 해요. 저희 파업이 언제나 그래요. 참 순수하게 대의를 가지고 시작하고, 조합원들도 순수하게 따라주거든요. 결과가 늘 가시적으로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신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이랄까, 이런 건 참 좋아지더라고요. 서로 각각 구역이 달라서 모르던 사람을 다 만나고 또 보게 되니까요.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에요.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 보이고요.
-당시 인터뷰에서는 아나운서로서 새노조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블랙리스트라고 전해들었습니다.
=강: 저는 지역에 있을 때에는 새노조 아니었고 서울에 와서는 새노조에 바로 가입했어요. 제가 지역 근무 갔던 대구가 새노조 활동이 쉬운 곳도 아니고요. 왜 새노조에 들어갔느냐고 묻는다면 정치적인 신념 때문은 아니에요. 어차피 노조라는 건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내가 속해야 할 곳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뜻이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잖아요. 2014년에 서울에 오니까 딱 새노조에 가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입할 때에는 아나운서 실에 구노조가 6, 새노조가 4였는데 1년 지나고 역전이 되었고요. 이번에는 거의 9대1로 바뀌었고요.
-돌아가시면 어떤 방송을 하고 싶으세요?
=정: 저는 제가 하고 있는 방송인 '노래의 날개 위에'를 워낙 좋아해요. 석달 넘게 재방송이 나가고 있어서 제가 파업을 하는지 모르는 청취자 분들도 있을 거에요. 목소리 그대로 나가고 날짜나 이런 이야기를 안하니까요. 이 추위에 폭염 이야기 하는게 나오고 그렇지만 (웃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이고, 방송을 통해서 저 자신을 더 알게 해준 그런 고마운 방송이에요. 클래식은 방송을 하면서 제가 적성을 찾은 거에요. 그 전에는 클래식을 전혀 안 들었고 회사 다니면서 좋아하게 된 거에요. 아나운서는 제작하는 분들로부터 선택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작하는 쪽에서 원하는 것과 우리가 잘 할 수 있는게 합이 맞아야 하고요. 그게 서로 딱 맞을 때 방송이 잘 되고 흔히 말하는 "뜬다"는 것도 그때 가능한 거고요. 방송을 접하는 사람들이 다 인지를 하게 되요. 그게 안 맞아 떨어지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에게까지 다 전달이 안된달까. 아나운서인 내가 원하는 건 이건데 피디가 원하는 건 저거니까 저거를 하고 따라가야지, 그게 잘 안되거든요. 저는 뉴스와 클래식 음악, 두 가지를 제가 찾은 거고요. 뉴스보다도 사람들이 클래식 프로그램을 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처음에 저는 이게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성격도 굉장히 털털하고 남성스러운데, 보이는 이미지는 또 그렇지 않아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이미지와 진짜 나 중에 뭐가 제 모습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스튜디오에 혼자 앉아서 1시간짜리 음악을 듣는게 너무 좋더라고요. 특히 성악곡들은 다 외국어라서, 이게 직접적으로 들리지가 않잖아요. 그냥 음가를 가진 소리로 들리는 거라...가곡이나 우리말 가사는 직접적으로 들려서 생각을 좀 방해하는데, 저는 그 자체로 듣는 게 좋아서 가사를 굳이 그 의미까지 알려고 하지 않을 때도 많아요. 소리만으로도 그 자체가 음악적으로 선율과 함께 완성이 된 상태로 느껴져서요. 가사를 분석해달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오는데, 저는 그냥 포인트만 잡고, 제가 음악을 전공한 건 아니라 절대 음감이거나, 화성의 변화를 느낀다거나 하는 건 못하지만 직감적으로는 알고 선율을 느끼죠. 클래식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파업이야기를 한다는 게 뭔가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야 들지만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도 끝날 때에는 투쟁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제가 멘트를 집어 넣었어요. 혁명이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아리아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 같네요.
=강: 저는 39기로 연차가 매우 낮은 편이라, 제가 뭘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급이 아직 아니고요. 저는 앞으로 변화할 우리 프로그램들이 기대가 되요. 제가 파업 직전에 했던 프로그램이 '서가식당'이라고, 책을 소개하면서 책에 나오는 음식을 해먹는 그런 컨셉이었거든요. 교훈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재미도 추구하고,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흔히 종편스러운 면이 있는 프로그램이었죠. 제가 왜 '서가식당' 이야기를 하냐면, 출연자 섭외가 참 힘들었어요. 제가 엠씨고 배우 권해효, 박찬일 셰프,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이런 분들이었어요. 그 분들이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나누면 진보쪽에 속한 분들이잖아요. 제작진들이 그 분들을 섭외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프로그램 런칭까지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요. 피디들 조차 자기 검열을 정말 지나치게 했어요. 심지어 프로그램이 런칭된 이후에, 책을 이야기 하는 건데 특정 출연자의 멘트에 대해서도 위쪽에서 압력이 있었어요. 보도도 아닌 교양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피디들이랑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는 파업 직전이라 어쩔 수 없다, 며 서로 위로하고 말았는데 돌아가게 되면 정말 제대로 하고 싶어요. 우리가 할 일이 정말 많았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았거든요. 책도 선정할 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성 맞고,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그런 책이 많잖아요. 저희가 그런 책을 선정하면 위쪽에서 아니 그거 말고, 라는 식으로 막았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하겠다고 하면 아니 그 책 너무 어려워, 남녀노소 모두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해. 이런 식이었어요. 참 교묘한 억압이죠. 시청자들에게 지적으로 자극을 주고, 조금 어렵고 낯설더라도 사유의 폭을 넓히게 하려는 걸 애초에 차단하는 거고요. 그런 역할을 공영방송이 아니면 어떤 채널이 하겠어요? 이런 건 확실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파업 이후 저희가 돌아갔을 때, KBS가 달라진다면, 정말 공영방송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데 앞장선다면 그런 프로그램의 진행을 하고 싶어요. 교양이든 뭐든 좀 의미를 가진 뉴스를 전달하는 거요.
-그런 간섭과 억압을 많이 경험하셨나요?
=강: 제가 연예뉴스를 전달하는데, 심지어 그런 연예뉴스에서조차 멘트를 하는 거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야 했어요. 원래 연예는 좀 웃기고 재미있는 거잖아요. 약간 비꼬고 해학적인 구석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걸 할 수가 없었어요. 운신의 폭이 너무 좁은 거죠.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았어요. 자기 검열을 자꾸 할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번 투쟁 이후에, 앞으로는 변화가 있을 거라고 봐요. 지난 10월말 국정감사에서 특정 당에 소속된 모 국회의원이 왜 개그콘서트에서 "다스"를 이야기 하냐고 KBS가 왜 그런 내용을 만드냐고 뭐라고 했거든요. 그게 말이 안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뭘 만들든, 방송쟁이들이 방송하는 건데 예능 프로그램 내용을 두고 국회의원이 왜 국정감사에서 추궁을 하나요? 국회랑 개그콘서트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시즌 1로 끝나버린 '서가식당'을 다시 시작 하든 어떤 새 프로그램을 하든, 힘있는 사람한테도 안 쫄고, 화끈하게 할말을 하고 싶어요.
아나운서들은 특성상 굉장히 조심하고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어요. 프로그램의 가장 최전선에 있고 전달하는 사람이고 또 선택을 받는 입장이라서요. 저는 스포츠 진행할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스포츠 대작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당시 출연자가 박철민 배우였어요. 레이디제인도 나오고, 그게 녹화 하루 전에 폐지가 되었어요. 갑자기 폐지가 되었고, 제대로 된 사유도 없었는데 형식상의 이유는 저희 편성본부장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폐지 시킨 거에요. 너무 난데없었고, 납득이 안 되는 이유였어요.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당시 엠씨가 저랑 김현태 선배였는데, 김현태 선배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을까도 싶고요. 그때 한창 "비타 500사건" 이 있었어요. 당시 총리가 비타 500상자에 돈을 담아 전달한 사건이 한참 회자되는 중이라 저희가 자유롭게 패러디를 하나 했거든요. 그 사건 직후에 폐지가 되었어요. 겉으로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이죠. 다 추측이죠. 정말 비타 500패러디 때문인지 확실한 물증이 있거나 하는 건 아닌데, 정황상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거죠. 비타 500패러디가 거슬렸거나 진행자 두 아나운서가 모두 새노조니까....
제가 그런 일들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뭘 하든, 대중들이 궁금해 하는 거, 사실에 근거해서 할 이야기 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좀 더 약하고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요.
=정: 이미 만나셨다는 이슬기 기자도 그렇고 강승화 아나운서도 마찬가지에요. 최전선에서 보도를 하고, 전달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들을 건드려버리니까 그 다음에는 이게 정말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강: 정말 자존심 상하잖아요. 소수의 몇몇이 저희의 생각을 조종하려고 들고, 손안에 쥐고 흔들려고 든다는 거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요. 이런 교묘한 억압과 굴종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없어지면 좋겠어요.
=정: 제가 97년에 입사하고 10년동안은 이런 일들이 없었어요. 2008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고 2012년 파업 이후에는 정말 노골적으로 이런 간섭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 노골적인 간섭이라면요?
=강: MC 선정, 프로그램 배치 이런 모든 과정에서 불투명한 게 너무 많았어요. 뉴스 앵커를 선정하는데 개인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것 때문에 이 싸움을 하게 된 거에요. 보도의 공정성은 물론, 개인의 실력대로 정직하게 프로그램을 맡고 경쟁하면서 방송할 수 있게 보장해 달라고요. 방송인으로서 개개인이 가진 역량이 다 다르잖아요. 공영방송이라면 더더욱, 한 개인이 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회사여야 하는 거고, 우리의 양심대로 공정하게 방송할 수 있어야 하고요. 정말 최소한의, 필수적인 조건이잖아요. 그런데 그 동안 KBS에서는 그 최소한이 지켜지지 않았어요. 우리가 싸우면서 요구하는 건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방송할 수 있게, 솔직한 양심에 따른 정직한 이야기를 내보내만 달라는 거에요.
=정: PD나 기자쪽에서 아나운서 누구랑 하겠다고 캐스팅이 들어와도, 윗 선에서 막는게 분명히 있어요. 진행자인 아나운서를 고를 때, 늘 능력 이외의 조건이 굉장히 많이 작용을 해요.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까 능력 이외의 것이 완전히 배제된다고는 못 하겠지만 방송만큼은 능력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직군이죠. 예를 들어 새노조라서 안되고, 자기 라인이 아니라서 안 되고 이렇게 되요. 누가 더 방송을 잘하냐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에요. 위에서 결정권을 갖춘 사람들이 능력은 안되지만 하라는 대로 하고,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을 원해요. 2012년 파업 이후, 저희 때는 새노조에 가입한15명 명단을 같은 아나운서실 선배가 다 직접 적어서 윗사람에게 갖다 주고 그랬어요. 이 15명은, 사람들은 방송에 나가는 걸 철저히 막겠다. 활동 못하게 한다, 이런 게 있었어요. 고생하고 말 잘 듣는 우리 라인 잘 살펴 달라는 거, 실제로 있었고 문서도 있고요. 저는 아홉시 뉴스도 해봤고, 제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찾았고 아나운서로서 활동을 해보기도 했고, 이제 어느정도 초탈하게 되어서 괜찮아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잘 안되죠. 어떻게 저 부분까지 건드리나, 싶은데 젊은 친구들에게 납득이 안가고 황당한 경우가 이어지니까 이렇게 강경하게 파업에 임하는 거에요. 저는 사실 후배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파업에 참여할 줄은 몰랐어요. 이야기들 들어보니까 말도 안되는 걸 다들 경험하니까, 너무 상식 밖의 일들을 경험하니까 싸워야 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말도 안되는 상황이 한 두번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이런게 아니라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돌아갔다고 보시면 되요.
=강: 방송사는 이벤트들이 많잖아요. 이벤트가 생기면 그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여럿이죠. 그럼 거기에서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에요. 그런 경쟁이 제대로 이뤄진 적이 지금까지 거의 없었어요.
-KBS는 지난 몇 년간 능력이 아니라 손바닥 잘 비비는 사람이 큰 프로그램을 맡고 잘 나가는 구조인가요?
=강: 그렇다고 확답은 할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추측은 할 뿐이에요. 사람한테 잘하고 업무외적으로 어필하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능력 9에 사회생활 잘하는게 1이었다면 이제는 사회 생활 잘하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게 더 결정적으로 되는 거에요.
=정: 그런 게 없을 수야 없고 노골적이지 않아야 하는데, 아주 노골적이 되어버렸어요.
=강: 인맥을 쌓고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이런 건 사실 상관이 없어요. 최소한 공개적인 오디션만큼은 공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선 장난을 치면 안되는 거잖아요. 심지어 오디션 조차 이미 내정 해놓고 눈가림식으로 치르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오디션에 참가하는 아나운서들에게 공정한 것처럼 속이면서 헛된 희망을 주는 거였어요. 모를 것 같이 하고 넘어가도 시간 지나면 다 드러나잖아요. 예를 들어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를 찾아서 제가 지원을 했어요. 모든 피디들이 저를 원하는데 단지 새노조 소속이라는 이유로 결과가 뒤집어 진 적도 있어요.
=정: 자기들끼리 MC선정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어요. 전혀 공정하게 심사하는 게 아닌데, 공정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예전에는 없던 MC선정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공정함을 가장했어요. 제도적으로 기구를 하나 만들어서, 피디도 납득할 수 있도록, 절차적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도록요. 실제로는 완전히 편향된 위원회였죠.
=강: 피디들도 정말 피로감이 쌓였을 거에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 원하는 아나운서 누구를 쓰기 위해 너무 많이 싸워야 하니까요. 피디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작 독립성인데, MC가 대체 뭐라고...어느 선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윗 선에서 계속 개입을 하니 피곤하죠. 어차피 원하는 아나운서를 하려면 너무 많이 싸워야 하니까 아예 아나운서실에 알아서 "아무나 주세요"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님 강승화 골라봤자 어차피 안 되는데 차라리 연예인 누구랑 하지, 이런 경우도 있고요. 퇴사한 사람들은 이런 이유들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거에요. KBS가 진짜 멋진 방송국이 되면 퇴사할 필요가 있나요? 여기에서 계속 좋은 방송 만들고 MC하고 그럼 되는 걸요. 저희는 그 어떤 방송사보다도 물량으로나 시스템적으로도 충분한 제작 제반 환경을 갖추고 있거든요. 정말 훌륭한 시사프로그램, 누가 봐도 진짜 좋은 방송이다 인정할 수 있는 거, 만들면 계속 KBS아나운서로 남을 수 있죠. 돈, 명성,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방송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최우선은 좋은 방송을 하는 거에요. 열의가 넘치는 피디들과 기자들이랑 정말 멋진 프로그램을 하는 거,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기억되는 걸 바라는 거에요.
=정: 소수의 몇몇이 아나운서실에서 자기 라인 만들고, 사사건건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데 개입하고 그랬어요. 선배가 자기 후배들을 명단 만들어서 방송 커리어를 완전히 망쳐버리겠다고 하는 걸 다 지켜 봤거든요. 인사 고과도 제일 낮게 주면서 방송을 몇 년 못하게 되는 게 마치 능력이 부족해서 인 것처럼 하고, 그 사람은 자기 후배들을 팔아 넘겨서 승진을 했고 여전히 방송도 하고 있어요. 그쯤 되면 단순한 부역자 수준이 아닌 거죠.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면 아마 처세의 달인으로 또 어떤 스탠스를 취할 지 알 수가 없어요.
KBS는 한국사회의 축소판 같달까, 워낙 인원도 많고 사람들의 결이 다양해서 구성원들 중에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사람부터 다 있다고 보시면 되요. 이 다양한 구성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 사이사이에서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MBC랑은 달라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안 나오고 좀 더딘 것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끼리 또 모여있기도 하고 그래서 저희 싸움이 더 힘들어요. 새노조 사람들이 마음이 여리고 또 착해서, 그들을 적대시 하지 않기도 하고요. 시스템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그들을 해직시키거나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공존하면서 방송을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KBS는 잘 꾸려나가기가 참 어려워요.
=강: 응징은 사실상 힘들 것이고, 그런 분들이 저지른 악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걸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 못지 않게, 구조적으로 장치를 만들어 투명하게 능력과 성과 위주로 평가될 수 있기를 바라요. 정권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에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 해요.
=정: 제 경험상, 정권이 바뀌고 방송이 독립성을 지킨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새노조 안에서도 참 색깔이 다양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겠죠.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요.
-희망을 갖고 계시는 거네요.
=강: 저는 MBC 파업 마치고 올라가서 돌아가는 거 보고, 희망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특히 보도랑 시사분야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지 벌써 기대가 되고요.
=정: 저는 24기인데 지금 29기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모임을 만들고 그 윗선 선배들에게도 할말을 하는 분위기인데요. 26,27기 정도까지는 중간에서 위 아래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요. 결정은 젊은 친구들이 내려주고 그 방향으로 가야지, KBS에 미래가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봐요. 저만 해도 70년대 생이라 될까? 의심하는 게 있고 좌절의 기억이 있거든요. 더 젊고,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10년 전에, 탐사보도팀 다 있고, '미디어포커스' 있고, 9시 뉴스 하면서 일하는게 너무 즐겁고 신나서 어쩔줄 모르던 때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고요. 저희는 그때 방송하면서 당시 방송 지형에서 탐사 보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 뿌듯함도 컸고, 사명감을 정말 많이 느꼈고, 그때는 방송 내용에 대해 개입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9시 뉴스 하는 동안 그 누구도 저에게 와서 앵커 멘트 왜 이렇게 썼어? 라고 한다거나 제가 다 고쳐 쓰는데 저한테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앵커 멘트 고치는 걸 못하게 하고, 고쳐서 가져오면 위에서 기자나 피디들이 다시 다른 뉘앙스로 손대고 뉴스가 한 방향으로만 가더라고요. 이런 젊은 친구들은 저희가 겪었던 거랑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한 거니까요. 그런 것들이 자유로워진다면 저희가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는 거겠죠.
-나아지는 방향이라면요?
=강: KBS는 채널이 2개라 공영방송이고 좀 프로그램을 아주 질적으로 잘 만들어야 해요. 그게 저희 사명이고요. 그렇게 안하고 위에서 자꾸 프로그램 폐지하고 배제하고, 출연진 하나하나에까지 간섭하니까 이제 KBS라고 해도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없어요. 이제 시청자분들이 기억해 줄만한 프로그램들을 돌아가서 만들어야죠.
=정: 올해 가장 화제가 된 프로그램이죠. '알쓸신잡'의 유시민도 KBS에서는 캐스팅이 어려운 사람이니까요. 수준높은 평론이 사라진 시대이고,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도 '클래식 오딧세이'도 다 폐지되었고요. 라디오 7시 뉴스 할 때 아직도 기억나요. 백남기 농민 사건때 물대포가 아니라 물줄기라고 쓰여진 대본이 왔어요. 그거 읽어야 했을 때 정말 착잡하더군요. 제가 9시 뉴스했던 사람이니까, 아예 그 단어를 빼버리고 제가 멘트를 새롭게 해서 읽었어요. 요 근래 몇 년 동안 너무 말도 안되는, 읽고 싶지 않은 기사들이 막 들어왔어요. 회사가 저희들의 입을 다 틀어막았어요. 멘트를 하면 위에서 싫어한다고 하거나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요. 늘 한쪽 방향에서 보니까 저쪽에서 이렇게 보니까 치우치게 보이죠. 작년 촛불 시위 할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촛불' 단어만 언급해도 난리가 나는 거에요. 라디오 뉴스 할 때 받은 대본들의 수준도 그렇고, 이 뉴스 뭐하러 하지? 내가 이걸 왜 읽지? 이런 순간들이 참 많았어요. 작년에 최순실 관련 미르재단 뉴스가 하나 둘 터지고, 국정농단 스캔들이 말 불거지는 시점에, 최대한 최순실 관련 뉴스를 뒤쪽으로 배치하는 거에요. 하나도 안 중요한 것처럼요. JTBC가 터트리고 난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요하지 않은 뉴스처럼 배치를 했어요. 저도 기자도 아무리 위에다 이야기를 해도 편집부에서 다 편집권을 쥐고 있어서 저희가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었어요. 우리는 읽는 사람이잖아요. 뉴스가 내려오면 그걸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거고, 저희가 아무리 그 앞에서 이거 좀 앞에다가 배치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도 그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거죠. 답답해도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었어요.
-이렇게까지 압박을 많이 받으셨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강: 이런 걸 압박이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는 이게 잘못된 거다, 압박하는 거다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회사 잘 돌아가는데 무슨 문제 있어? 아나운서는 그냥 원고 나오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또박또박 읽고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하고 회사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냐고, 월급 주고 자아실현 시켜주고 TV에 나오게 해주는데 너네 파업하는 거 다 배불러서 그러는 거야, 이러는 사람들도 있어요. 파업 초기에 뜻을 같이 해 달라고 설득하고, 설명도 해보고 했는데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더라고요. 언론인으로서 이전에 인간적으로 공감능력이 좀 떨어지는 걸 수도 있죠. 세월호 참사 때에도 별로 슬퍼하지 않고, 최순실 사건에도 이게 뭐? 하는 거고. 같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느끼는 바가 많이 달랐을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주파수가 다른 곳에 맞춰져 있는 거겠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 이전에 상사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이고 어떤 보직을 받을 수 있는지, 더 큰 프로그램을 맡고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 혼자 잘되고 그런 거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정: 중학교 2학년도 다 이해할 수 있을 수준으로 방송을 해야 한다고 늘 그렇게 교육 받았어요. 그건 전달하는 말을 쉽게 사용하라는 것이지 컨텐츠가 중학교 2학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게 아닌데 그걸 놓치기도 하죠. 정말 긴장해서 공들여서 잘 만들어야 하는 방송을 그렇게 안 하는 거고요. 아나운서는 아무 힘이 없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직군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희 아나운서 실장이 나서서 저희를 좀 보호해주려는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데, 자신의 보직과 출세에만 관심있는 분이 아나운서실을 이끌면서, KBS안에서 아나운서는 참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수년을 지나왔어요. 이렇게 연약한 존재들인데 파업할 때에는 노출도 많이 되고, 가장 열심히 해요. 2012년에도 저희가 겨우 15명에 불과했지만 집회 사회도 보고 바깥에서도 저희를 가장 먼저 알아봐 주시니까 전단지 돌리고 하는 것도 열심히 했고 시민들에게 더 보여질 수 있도록 했어요. 이번에도 저희가 사회를 돌아가면서 열심히 보고요. 역할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얼굴 팔리는 일이라 꺼려할 수도 있는데 강승화 아나운서는 심지어 월요일 고정이에요.
강: 다들 월요일은 좀 부담스러워 하니까 제가 먼저 월요일 고정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우선 한 사람이라도 부담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4명만 돌아가면 되니까요. 기수도 낮고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제 진행을 좋아해 주셔서 뿌듯해요.
-100일을 훌쩍 넘긴 파업이 이제 방통위에서 강규형 이사의 해임안이 통과되면서 어느정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떤 소회가 드시나요?
=강: 아나운서는 약간 개인사업자처럼 각개전투로 활동할 수밖에 없거든요. 다양한 직군들이 나오는 파업집회에서 제가 진행을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있고 전혀 모르던 피디들과도 친분이 생기고 돌아가면 하고 싶은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파업이 아니면 절대 다른 직군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거든요. 하고 싶은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신나게 나누기도 했는데 돌아가면 정말 근사하게 멋지게 뭔가를 함께 하고 싶어요. 반성을 참 오래 했으니까요. 돌아가서 좋은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정: 파업이 끝나고 돌아간다면, 아나운서실의 대장이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한눈에 팔린 게 아니라 할말은 하고,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어요. 피디랑 작가, 기자와 함께 프로그램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아나운서도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렇게 처음부터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한다는 건 모든 게 다 셋팅되고 와서 진행만 해주세요, 라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거든요. 프로그램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고, 제작단계에서부터 의견을 내고 다른 직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나운서로서도 굉장히 많은 성장을 할 수가 있어요. 저희가 단지 셋팅된 상황에서 차려입고 꾸민 상태로 나와 그냥 앵무새처럼 읽기만 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단순한 전달자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도 있어요. 뉴스의 통찰력을 불어넣고 멘트를 다르게 해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운 좋게 이미 '클래식 오딧세이'처럼 제가 제작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났고,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뿌듯하게 방송을 하는 경험을 누려봤어요. 얼른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서 이런 젊은 친구들도 저처럼 방송을 통해 그런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