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일 월요일

메르스 의심 50대 여성 숨져…격리 대상 700명 육박

등록 :2015-06-01 20:16수정 :2015-06-01 22:41

첫 확진환자와 같은 병원에서 입원…호흡기 질환 앓아
‘3차 감염 우려’ 격리 인원 682명…하루 만에 5배로 늘어
문형표 장관 “미흡한 초동대처로 국민 불안 끼쳐 송구”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1일 오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치료 격리센터가 있는 서울의 한 병원 응급실로 고열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1일 오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치료 격리센터가 있는 서울의 한 병원 응급실로 고열 환자를 이송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와 접촉한 적이 있던 메르스 의심환자가 1일 오후 숨졌다. 메르스와 관련해 자기 집이나 시설에 격리된 인원이 682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출국도 금지된다.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대책본부)는 이날 “지난달 20일 메르스 환자로 확진된 첫번째 환자가 입원했던 병원 같은 층에 입원했던 여성(58)이 경기도 한 병원에서 이날 오후 6시께 급성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이 여성의 사망이 메르스와 관련이 있는지) 역학조사와 진단 검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여성의 메르스 확진 여부 검사 결과는 2일 오전 중에 나올 예정이다.
이 여성은 이날 현재까지 확진 판정을 받은 18명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보건당국은 31일 밤 이 환자가 첫 환자와 함께 입원한 사실을 알고 뒤늦게 의심환자로 분류했다. 이 여성은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본부는 또 “첫 환자와 접촉한 것으로 추정되거나 2차 감염 환자들과 접촉해 3차 감염이 우려되는 682명에 대해 자가 및 시설 격리 조처했다”고 밝혔다. 대책본부는 또 “격리 대상자에 대해서는 관련부처에 요청해 출국 제한 조처를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복지부는 애초 격리 대상자를 60여명으로 잡았다가 31일 129명으로 확대한 뒤 하루 만에 다시 다섯배로 늘려 ‘1차 방역’에 실패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초기 대응이 매우 중요한데 전파력에 대한 판단과 접촉자 확인, 예방, 홍보와 의료인들에 대한 신고 안내 등 초기 대응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이날 새누리당과의 당정협의에서 “미흡한 초동 대응으로 인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와 불안을 끼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1주일 동안이 메르스 확산이냐 진정이냐의 기로로 판단하고 3차 감염을 막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메르스 감염자 3명이 추가로 확진돼 환자 수는 모두 18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모두 첫 환자와 접촉한 2차 감염자로, 첫 환자가 입원한 병원에서 같은 병동을 쓴 환자들과 가족이다.
이근영 선임기자, 서보미 기자

여전히 ‘산 역사’인데 정부는 일본 눈치보며 외면

억울한 고통의 대물림, 원폭 2세 청년의 절규
여전히 ‘산 역사’인데 정부는 일본 눈치보며 외면
육근성 | 2015-06-01 14:35:46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20세기 일제의 광기의 역사는 지금까지 연장돼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인류 최악의 실험 ‘원폭 투하’
온갖 병에 시달리며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 김형률씨는 폐 기능의 70% 가 정지된 고통 속에서도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원폭 피해자 2세의 인권을 외치며 이렇게 절규했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은 채 숨이 넘어가도록 마른기침을 하던 체중 32kg의 청년은 원폭 2세였다.
1945년 8월 미국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제를 향해 인류 최악의 실험을 감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순간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은 2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 한국인 7만 명이 피폭을 당했으며, 이중 약 4만 명이 사망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 온 한국인 피폭 생존자는 2만 5천 명 정도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폭 1세들 상당수가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렸지만 일본과 미국정부뿐 아니라 한국정부도 이들을 외면했다. 수십 년이 지나며 1세 대부분은 이미 사망해 2600명 정도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몸을 할퀴는 병마가 아니었다. 선천성 기형과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는 자식들이었다.
정부는 반세기가 넘도록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원폭 피해자 1세들이 직접 나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부터다. 피폭 1세뿐 아니라 피폭 2세들이 겪는 고통도 컸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 의해 간헐적으로 다뤄졌을 뿐이다.

대물림되는 고통, 정부는 일본 눈치 보며 외면
원폭 피해자 김 할머니(언론 취재 당시 대구 대명동 거주/2002년)는 1945년 당시 히로시마 시내의 한 산부인과 간호사였다. 피폭 당시 섬광과 열선으로 화상을 입고 해방 후 귀국길에 올랐다. 1949년에 낳은 첫딸은 허벅지에, 이어 태어난 둘째딸 역시 팔뚝에 주먹만 한 혹이 생겼다. 아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원인 불명의 양성 종양이라고 말했지만 김 할머니는 원폭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김 할머니는 삼 남매의 요구에 따라 피울음을 삼키며 친권포기각서를 써줬다. 그래도 할머니의 소원은 일본정부가 삼 남매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 아무개 할머니의 사 남매 중 세 자녀도 원폭 후유증에 시달린다. 큰 아들은 불임증, 둘째는 정신질환, 막내는 폐결핵을 앓고 있다. 원폭 피해자가 많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경남 합천에 사는 전 아무개 어르신의 자식 3명은 모두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검진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합천군 봉산면의 최 아무개씨도 희귀병을 앓고 있는 원폭 2세다. 가슴에 이상하게 생긴 종양을 안고 산다. 원폭 피해자를 어머니로 둔 용주면 강씨 형제는 정신지체 2급이다. 초계면 문씨 형제는 원폭 1세인 아버지로부터 후유증을 물려받았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는 시력까지 잃고 말았다.
원폭 1세들에게는 한국과 일본 정부가 원호수당과 일부 의료비를 지원하지만, 원폭 2세와 3세들에게는 아무런 지원이 없다. 게다가 사회적 차별과 편견까지 감수해야 한다. 피폭자 박 아무개씨의 절규다.
“자식들이 나더러 ‘아부지예, 어디 가서 피폭자라고 하지 마이소. 우리 결혼 안 시킬랍니꺼’라고 역정을 내는 통에 자식에게 지장을 줄까봐 아무 말 몬하겠심더.”

한 청년의 절규, 원폭 2세 실태 세상에 알려
병마의 고통에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보태지는 원폭 2세들. 그나마 이들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진 건 한 청년의 절규 덕분이었다.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을 앓고 있던 고 김형률씨는 2002년 3월 자신이 원폭 2세임을 밝히는 ‘커밍아웃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 양국 정부를 상대로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피폭자 2세 환우회’가 결성됐고, 김씨는 이 단체를 이끌며 2005년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피폭 2세를 위한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이러한 고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무관심은 여전하다. 원폭 2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실정이다. 어느 단체에서는 1만명이라고 말하고, 다른 기관에서는 4만명이라고 추정한다. 또 어떤 이들은 8만 명을 넘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실정이니 피폭 2세 가운데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실태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정부가 피폭자들의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정부 뒷짐만 지고 있다. 일본정부를 의식해서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국제정세를 고려한 전략적선 택이 요구되는 외교행위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원폭 피해자들의 구제를 외면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워진 역사’가 아니라 ‘산 역사’인데
2003년부터 원폭 1세들이 받고 있는 원호수당도 피해자들이 투쟁한 결과다. 징용병으로 히로시마로 끌려간 곽귀훈씨가 한국인 피해자도 일본정부가 지급하는 원호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일본 오사카 지법에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가능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제공한 지원과 외교적 도움은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정부가 한국인 원폭 피해 상황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2011년 발간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 진상조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올해 광복절을 기화로 일본 전역에 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원폭 투하 70년 만에 이뤄지는 정부차원의 공식 활동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어판 발생부수가 고작 1000부라니. 척만 하려는 모양이다.
원폭 2세들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나 마찬가지다. 국내 유일의 원폭피해자 시설에도 입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1996년 한일 양국정부가 기금을 지원해 설립된 ‘합천원폭피해지복지회관’의 경우 원폭 1세들조차 입주가 쉽지 않다. 신청, 심의, 선정, 대기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시설 정원 110명에 비해 입주 요청이 많기 때문이다. 원폭 2세의 경우 아예 신청조차 할 수 없다.

고 김형률의 절규
국회도 마찬가지다. 17대와 18대 국회 때 각각 한차례씩 ‘원폭 피해자 진상조사 및 지원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기한 내 처리가 안 돼 자동 폐기 됐다. 19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계류 중이다. 한국인 원폭 피해는 ‘지워진 역사’가 돼 간다. 국내 중고교 역사교과서 29종 가운데 ‘한국인 피폭’ 관련 내용을 다룬 건 두산동아가 출판한 교과서 1종뿐이다.
원폭 투하 70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살피며 실태조사조차 쉬쉬한다. 고 김형률씨가 제기한 ‘원폭 2세 특별법’ 문제는 고인의 10주기가 되도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피해자들의 실존적 역사를 '외면'이라는 지우개로 지우려 하다니. 고 김형률씨는 생전에 이렇게 외쳤다. 이 외침조차 내팽개칠 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도 진실을 밝히려하는 것은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피폭자 2세들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547 

오산기지 미군들, '탄저균' 항의서한 전달 가로막아


단체들, 오산 미군기지서 기자회견..철조망에 항의 엽서 매달아
오산=조원호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신고하기
승인 2015.06.01  22:20:30
트위터페이스북
  
▲ 시민사회단체들은 1일 오산 미군기지 앞에서 탄저균 반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제공 - 한국진보연대]
 지난 28일 오산 미군기지에 생물학 무기인 탄저균이 우리정부도 모르게 반입되어 폐기처분되었다는 소식에 전국민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1일 오산의 미군기지앞에서는 탄저균 반입 규탄과 투병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 대표 및 소속 회원들 70여명이 모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평택이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고 운을 뗀 뒤 사드(THAAD, 고고도방어미사일) 배치와 탄저균 반입사건, 메르스 확산 등을 언급하면서 국민들의 의혹과 불신, 분노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원들은 박근혜 정부가 책임있게 나설 것을 주문하면서 ‘미국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국민은 물론, 대통령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꼬집고 우리정부가 미국에 대한 어떠한 항의도 없었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한미 당국에게 소파 개정을 촉구했다. [사진제공 - 한국진보연대]

  
▲ 집회를 마침 참가자들은 항의 엽서를 미군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에 매달았다. [사진제공 - 한국진보연대]
참석자들은 앞으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개정해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물자의 반입, 반출시 한국정부에 통보하고 위험물질에 대해 사전 협의와 동의’를 거치도록 개정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이어서 대표단들이 미군부대 사령관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민원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헬멧에 방패와 곤봉 등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민원실 앞에서 대표단의 진입을 막으면서 한동안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졌고 항의서한 전달은 끝내 무산되었다.

한편 기자회견을 마치고 후문 쪽으로 이동한 100여 명의 참석자들은 한국진보연대가 주최하는 ‘탄저균반입사건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결의대회’를 개최했다.
  
▲ 대표단들의 항의서한 전달을 미군들이 가로막아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사진제공 - 한국진보연대]

  
▲ 헬멧에 방패와 곤봉 등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민원실 앞에서 대표단의 진입을 막아 항의서한 전달은 끝내 무산되었다. [사진제공 - 한국진보연대]
집회를 마친 소속단체 회원들은 우리국민들의 울분을 담은 항의 엽서를 미군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에 매다는 것으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보내는 경고를 대신했다.

이날 기자회견 및 집회에는 한국진보연대, 민변,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평택YMCA 등 65개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했다.

"특허 전쟁 4년... 창조경제가 망치고 있다"


15.06.01 21:01l최종 업데이트 15.06.01 21:01l


기사 관련 사진
▲  4년 전 <특허전쟁>을 통해 삼성전자-애플 특허 소송의 본질을 짚었던 '글쓰는 변리사' 정우성 임앤정특허사무소 대표
ⓒ 김시연

"이제 명목상 소송만 남았죠."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전쟁'이 불붙은 지 4년이 지났다. 아직 소송은 진행중이지만 포성은 잦아들었고 언론과 사람들 관심에서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 사이 두 회사는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한 채 승승장구하고 있다. 특허전쟁에선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는 셈이다.

당시 <특허전쟁>(에이콘)이란 책에서 이 같은 특허 소송의 본질을 짚었던 정우성(43) 변리사를 4년 만에 다시 만났다(관련기사: "사실상 삼성 승리? 국내 언론 사실 왜곡").

2011년 4월 시작된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은 한 변리사의 인생을 바꿨다. 정 변리사는 언론 취재에 응할 뿐 아니라 저술 활동에도 적극 나섰고, 이듬해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애플 완승'은 애국심 탓? '삼성 관점' 벗어야 보인다)로 직업 언론인들을 제치고 KAIST 과학저널리즘대상 인터넷부문상을 받았다(관련기사: '삼성 애국주의' 벗긴 시민기자, 과학저널리즘상 받다).

이후에도 <세상을 뒤흔든 특허전쟁 승자는 누구인가>(에이콘)에 이어 아빠 육아 이야기를 담은 <나는 아빠다>(알마)를 냈고 각종 매체 기고 활동을 통해 '글 쓰는 변리사'로 활약하고 있다.

휴대폰 특허 많은 삼성이 '신참' 애플에 고전한 까닭

지난 29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정 변리사는 변리사 5명을 포함해 직원 8명이 일하는 임앤정특허사무소 대표였다. 삼성-애플 특허 소송은 두 당사자와 우리 사회, 그리고 정 변리사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특허가)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라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기는 어려워요. 단순하게는 기업 경영에서 특허가 정말 중요하다, 이 소송을 교훈 삼아 우리 산업에서 특허 경쟁력을 찾자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건 문제의 겉모습일 뿐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흥미롭게도 삼성전자는 휴대폰 업계 선발주자이고 애플은 2007년 처음 휴대폰을 만든 후발주자예요. 삼성이 애플보다 무선통신분야 특허가 10배나 더 많았어요. 특허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삼성이 압도적으로 이겨야 하죠. 삼성 특허팀도 그런 전략을 폈을 테고 소송이 9개 나라로 번진 것도 삼성이 주도했어요. 그런데 소송 전개 과정에서 삼성이 밀렸고 애플이 주도했어요. 우린 여기서 교훈을 찾아야 해요."

특허는 '숫자 싸움'이 아니다. 특허가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야 특허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에서 원천기술을 강조했듯 삼성도 원천특허와 표준특허로 애플을 공략했지만 결국 무용지물이 됐어요. 특허가 독점인 만큼 책임이 있어요. 바로 독점 규제죠. 우리 산업은 대기업이 주도해 속성으로 발전하다 보니 독점을 어느 정도 봐줬고 특허의 독점적 속성도 고찰하지 못했죠."

삼성전자는 처음에 휴대폰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될 무선통신기술 관련 '표준특허'를 앞세워 애플에 맞섰지만 외국 법원에서 '프랜즈 조항'에 발목이 잡혔다. 자칫 표준 특허를 보유한 기업이 특정 산업을 독점할 위험이 있어, 경쟁사도 합당한 사용료를 내고 그 기술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애플이 앞세운 제품 외관 같은 디자인 특허는 힘이 약해 보여도 법원뿐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만한 내용이어서 '여론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원천특허와 표준특허는 일부 대기업이나 가능하지 중소기업은 대부분 소외될 수밖에 없었어요. 산업이 대기업 중심이듯 특허도 대기업 중심이었던 거죠. 스마트폰 등장으로 산업 패러다임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대기업-하청기업 수직적 구조에서 플랫폼 중심의 수평적 구조로 바뀌었어요. 기업의 특허 전략이나 국가의 특허 정책도 달라져야죠. 

요즘 중소기업, 스타트업, 청년창업, 창조경제 얘기하는데, 특허는 그런 비즈니스 활동에서 아이디어나 브랜드, 디자인이 나오게 하는 촉매제이고 아이디어 유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권리' 이전에 하나의 '과정'인 거죠. '권리'로서 특허가 중요했다면 삼성-애플 소송에서 삼성이 큰 승전보를 가져왔어야죠. 애플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면 사소한 것들이지만 지금은 그런 게 혁신이죠."

"창조경제 지원에 행정업무 늘고 '허수 특허'도 비일비재"

기사 관련 사진
▲  정우성 임앤정특허사무소 대표 변리사가 만든 소책자 3종 세트.
ⓒ 김시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요즘 IT(정보기술) 업계 화두인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로 이어졌다.

"창조경제 담론도 좋고 멋지잖아요. 창조경제란 말을 생각해 낸 사람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수직적 체계에서 에코시스템으로 바뀌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반대할 이유가 없죠. 

다만 창조는 누가 하느냐. 사람이 하는 거죠. 사람의 활력과 자율성이 중요한데 타율성에 의해서는 창조 활동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정부 지원 사업이 다양하게 나오는데 현장에선 그걸 '눈먼 돈'이라고 해요. 지원 사업은 행정과 유대해야 하는데, 창조경제와 행정의 관계를 풀지 않으면 창조경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기업들이야 불경기고 자금 사정도 어려운데 정부에서 각종 명목으로 자금 풀고 지원 사업하니 좋죠. 그런데 많은 기업들이 행정 업무에서 힘들어해요. 국가가 지원하면 평가와 감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서류 구비나 평가 준비에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어요.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나 서비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창의성이 행정 업무에 소모되고 있는 거죠."

한마디로 주객이 뒤바뀌는 현실이다.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특허 생태계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가 지식재산권을 강조하다보니 아이디어가 정말 가치 있는지 생각하기보다 일단 정부 지원을 받으려고 내는 특허가 비일비재해요. 기업도 그렇고 국책연구기관도 허수가 많아요. 연구개발을 평가하기 가장 좋은 게 특허 출원이나 보유 특허 건수거든요."

변리사는 개인이나 기업이 발명한 독창적 아이디어부터 개발 단계인 기술이나 상품, 서비스가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도록 특허 출원을 돕는 전문가다. 특허를 받으려면 각 나라 특허청을 상대로 상품이나 기술 같은 실체 대신 글과 도면이 담긴 문서로 모두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을 잘 이해하고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변리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쨌든 특허 출원이 늘어나면 변리사 업계에선 반길 일 아닌가요?
"아니죠. 변리업계도 심각해요. 지금 변리업계는 2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어요. 우선 시간이 흐르면 가격이 오르는 제품 가격과 달리 변리사나 변호사, 회계컨설팅 같은 서비스 가격에는 물가 상승률이 반영되지 않아요. 시간이 흘러도 가격 안 오르고 경쟁이 심해지면 오히려 떨어질 수도 있죠. 국책연구기관이든 기업이든 무의미한 특허나 행정에 수반되는 특허에는 굳이 많은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아요. 변리사 서비스 수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우리 같은 전문가가 보기엔 가치 없는 특허가 태반이에요.

두 번째 문제는 국가가 창조경제 명목으로 자금을 많이 풀면서 다양한 기획 사업이나 컨설팅 사업을 만들어요. 여기서 수행기관과 수혜기관이 나오는데, 컨설팅 사업은 특허와는 무관하지만 돈은 커요. 몇천만 원, 몇억 대가 될 수도 있으니 변리사가 머리 짜내서 특허 권리화에 필요한 글을 쓰기보다 컨설팅해서 발표 자료나 행정업무평가에 필요한 서류 만드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요. 그럴수록 실무 역량이 떨어지는 거죠. 좋은 특허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발명가)과 그 아이디어를 문서화하는 사람(변리사) 협업으로 경쟁력이 확보돼요. 후자가 열악해져서 좋은 특허도 실무자 때문에 나쁜 특허가 되면 심각하죠. 그런데 이렇게 막말해도 되나(웃음)."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던 정 변리사가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은 변리사 업계에 대한 비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후배 변리사들이 걱정돼요. 일(변리사 고유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 일을 잘하려면 장인이 돼야 하는데 그럴수록 경제적 빈곤함이 동반하는 현실. 변리사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에요. 그런 정통 실무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입증하는 게 제 시대적, 직업적 소명이에요."

이날 정 변리사를 만난 직접적 계기는 소책자였다. 정 변리사는 지난해 <특허, 더 나은 생각>에 이어 최근 <디자인 극장>이란 소책자를 비매품으로 펴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작은 판형에 100쪽 안팎에 그쳤지만 특허와 변리사 업무에 대해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었다.   

"원래 회사 홍보 자료를 만들려고 했는데 팸플릿 같은 건 대부분 버리잖아요. 이왕이면 세상에 이로운 걸 만들자고 해서 책자를 만들게 됐고 크게 만들면 들고 다니기 힘들 테니 양복 주머니나 핸드백에 들어갈 크기로, 쉽게 버리지 않게 (디자인을) 예쁘게 만들었어요."

실제 책 표지는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1899)의 원작 삽화와 19세기 화가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명화 <비오는 날의 파리 거리>(1877)처럼 저작권 시효(저작권자 사후 50년)가 지난 옛 그림을 사용해 아름답게 꾸몄다. 여기엔 지식재산권이 창작자의 '권리 보장' 못지않게 후세들의 창작에 '활용'돼야 한다는 가치관이 반영돼 있다.

"지금까지는 특허를 기술과 권리(법률)로만 '2원론'으로 봤는데 전 '경영(비즈니스)'을 더해 '3원론'을 주장해요. 기업이 망하면 권리는 사라지고 기술도 패러다임이 바뀌면 죽어요. 특허는 '경영'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기업이나 정부도 경영 관점으로 특허를 보면 시각이 달라져요.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떤 경우엔 특허 출원을 안 해도 되고 어떤 경우엔 꼭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거죠.

이 책을 만든 것도 특허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사람은 많은데, 모호하고 심지어 잘못된 정보가 만연돼 있어요. 잘못된 정보를 만든 사람도 문제지만 저 같은 전문가가 전문성만 고집한 나머지 쉽게 이야기하거나 안내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특허를 쉽게 안내하고 좋은 지식을 전달하자는 차원이죠. 만족해요. 예쁘니까. 비매품이지만 사람들 반응도 좋고.(웃음)"

"염치없는 짓은 말자"... 대표실 버리고 출입구 택한 까닭 

기사 관련 사진
▲  임앤정특허사무소 대표인 정우성 변리사의 자리는 직원들이 가장 꺼려하는 사무실 출입구쪽 자리다.
ⓒ 김시연

실제 그사이 특허 등 지식재산권 문제는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다. 인터넷에 올린 서체나 사진, 그림을 빌미로 누리꾼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저작권 장사'가 있는가 하면 대기업에 기술이나 상표권을 빼앗긴 중소기업이 소송을 벌이는 사례도 많다.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졌어요. 우리나라에 매년 특허 신청이 20만 건 정도 상표, 디자인 권리까지 포함하면 연간 40만-50만 건이 넘어요. 내 권리를 찾는 목소리도 커진 거죠. 권리가 무수히 많은 세상에서 권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찰할 필요가 있어요. 과연 40만 개의 권리가 정말 도덕을 결정하느냐, 모두 진짜 권리냐 하는 거죠. 사실 그 가운데 외형은 갖췄지만 실제 권리가 아닌 허수도 많아요.

회사 경영 이념 맥락도 '염치없는 짓은 하지 말자'는 거예요.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개인의 아이디어를 뺏어갔다는 언론 보도가 많은데, 사실 권리적, 법리적으로만 바라보면 대기업이 잘못한 게 별로 없어요. 대기업은 법무팀이 있으니 잘 분석했겠지만 개인이나 중소기업은 잘 몰라서 법적 행위를 잘못한 경우가 많을 거예요. 전통적 법리 시각으로 보면 대기업은 면책이지만 우리 정서로 보면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문가는 소송에서 권리 분석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더라도 일상에선 도의적으로 정당한지 따져봐야 해요."

정 변리사는 회사 경영에 18세기 독일 철학자인 칸트의 윤리학을 접목했다. 이른바 '칸트주의 경영'이다. 정 변리사가 1년 전 대표실 밖으로 나오면서 일반 직원들이 가장 꺼리는 사무실 출입구 쪽 자리를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칸트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는데, (직원에게) 가급적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게 칸트 윤리학에 맞아요. 제 자리는 컴퓨터로 뭘 하고 있는지 누구든 볼 수 있어 직원들이 싫어해요. 전 눈치 볼 사람이 없는 대표니까 심력이 강해 괜찮지만, 심력이 가장 약한 말단 직원에게는 나쁜 환경인거죠. 오히려 제겐 이 자리가 채찍질 돼서 딴짓 안 하고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직원들이 농담 주고받는 것까지 다 들을 수도 있어 좋아요. (웃음)"

명색이 회사 대표지만 정 변리사는 아주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저녁 약속이나 야근을 하지 않는다. 저녁이나 주말만큼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철칙이다. 2년 전엔 보통 아빠의 육아 이야기를 담은 <나는 아빠다>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아내가 외국인(일본인)이다 보니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어 가급적 일찍 집에 들어갔어요. 자연스럽게 아홉 살, 일곱 살 두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많은 걸 배웠어요. 전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게 자기 자신에게도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배우고, 잠도 많아져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져요. 남자의 진정한 발전은 아빠 역할을 할 때 시작한다고 할까. (웃음) 아이들이 없었다면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 길이 훨씬 낫다는 거죠."

○ 편집ㅣ손병관 기자

1. 역사적으로 검증된 종북공세의 허구성

<나라를 망치는 종북귀신> 1. 역사적으로 검증된 종북공세의 허구성
우리사회연구소 곽동기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5/06/02 [02:12]  최종편집: ⓒ 자주시보
 [연재서문] 

역설적으로 우리 대한민국만큼 북한을 무서워하는 나라가 또 있을 지 의문입니다. 바로 서울 한복판에서 “종북” 귀신이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국정원 등 공안당국을 그리도 업신여기고 불신의 눈길을 보내다가도, 우리사회 누군가가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공안당국의 발표만큼은 “사실이라면 큰일”이라며 확 기울어버리는 이런 콘크리트 같은 영향력은 어찌보아야 하나요.

의심은 우리생활 전반에 젖었습니다. 국민들은 술자리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끄집어냅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기의견과 주의주장도 없이 북한의 지시사항 (그것조차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을 파악해내려 애쓰고 또 제 멋대로 설정한 북한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가난과 멸시, 심지어는 감옥행도 감수한다는 “종북”주의자가 있다는 주장만큼 어리석은 견해가 또 있을까요.

어쩌다 한두 명, 정말로 그런 사회부적응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이 수 만 명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어찌 믿겠습니까. 그것도 그 수 만 명이 정당을 이루어서 지난 총선 때는 전체 유권자의 1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처럼 허무맹랑한 소설은 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야권은 국가보안법과 종북 색깔론에 휘말릴까 두려워 선거에 번번히 패하면서도 매번 종북공세에 넘어가 단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만큼 북한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자기 경력에 “북한”이 튀면, 정치생명이 끝장난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리하여 그 종북이 무엇이길래 세계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국가보안법 하나 못 건드리고 이제는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상황에 이르도록 종북마녀사냥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종북공세”는 거의 대부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양치기 소년도 거짓말을 세 번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종북 거짓말은 세 번, 네 번도 아니고 무려 70년 가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1. 역사적으로 검증된 종북공세의 허구성

1) 1950년 국민보도연맹

우리 역사는 학계에선 20만명, 최대 100만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관련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반공단체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한시적 법안으로 국가보안법을 만들면서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익세력은 보도연맹 실적을 위해,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까지 마구 가입시키면서 보도연맹원은 무더기로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의 수를 채우기 위해 비료와 밀가루 등을 미끼로 보도연맹 가입을 유도하였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950년 초에 보도연맹의 회원 수는 이미 3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일반 농민들과 심지어는 10대 중고등학생들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빨갱이” 누명을 벗으려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였지만 6.25 전쟁이 터지자 도리어 “확실한 빨갱이”로 몰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였습니다. 6.25 전쟁에서 한-미가 패퇴를 거듭하자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무고한 양민들을 무리로 학살하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깡패들이 최대 100만명까지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배경은 “보도연맹원들이 정말로 종북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이 무죄임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최대 100만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의 피해자들이 종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을 죽일 때는 “빨갱이일지도 모른다”며 마구 죽였는데,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니 모두가 무고한 양민이었던 것입니다. 종북사냥의 실상은 무고한 양민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었습니다. 잔혹한 국가범죄였습니다. 


2) 1958년 진보당 조봉암 선생

종북사냥, 빨갱이 사냥은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야당정치인에게도 집중되었습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반대파인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를 간첩 혐의로 몰아 사형시켰습니다. 오로지 북진통일 주장만이 팽배했던 대한민국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는데 그로인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하였습니다. 오늘날 조봉암 선생을 북한의 꼭두각시로 보는 이는 한명도 없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0년대 말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습니다. 1956년에 치러진 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 선생은 유효표의 30%가 넘는 216만표를 득표했습니다.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풍토에서 30%는 엄청난 이변이었습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조봉암의 등장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위협받자, 이승만 정부는 죽산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대한민국의 국시인 북진통일을 위배했으며, 북한이 밀파한 간첩과 접선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식적으로 “평화”통일을 외치는 평화세력이 “폭력”혁명을 기도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1958년 진보당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체포 1개월 만에 진보당은 전격적으로 등록 취소되어 해산당했으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판은 채 2년이 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은 형장의 이슬로 산화했습니다. 4.19 혁명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물론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에 대한 모든 혐의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3) 1974년 민청학련

4.19 혁명 이후 종북사냥, 빨갱이 사냥이 근거없는 낭설이었음이 드러나자 군부독재정권은 새로운 논리가 필요했습니다. 이제부터 군부독재정권은 좌경용공분자라는 새로운 조어를 탄생시키며 말만 바꾼 빨갱이 사냥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희생양이 바로 1974년 민청학련 관계자들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생, 재야인사를 구금해 무려 8명을 사형시킨 사법살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3일,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4호>에 의해 대학생을 포함한 총 1024명을 조사해 이 중 18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시킨 공안탄압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과정에서 변론을 맡던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모욕,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일본인 관련자 2명에게 징역 20년형이라는 중형을 부과해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을 지목하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 1974년 7월 13일,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한편 김병곤, 김지하, 나병식, 이철, 유인태, 이현배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으며 김지하의 경우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김근태, 이해찬, 장영달, 유홍준, 이철, 유인태 등 민주당의 여러 전현직 정치인들이 민청학련 사건 때 빨갱이로 몰려 탄압을 받았던 분들입니다. 70년대 반유신투쟁에 나섰던 이들은 이후 “민청학련 세대”로 불리면서 민주당 내에 비중있는 영향력을 끼쳐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 세대를 투옥하고 학살한 논리는 “좌경용공세력의 내란음모”였습니다. 민청학련이 인민혁명당의 지도 아래 일본공산당 출신의 하야카와 요시하루와 함께 이철, 유인태 등과 접촉, 폭력혁명 계획을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피해자들은 국가에 재심을 요구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민주당에서 활동하셨던 수많은 민청학련 세대 정치인들도 모두 무죄입니다. 내란음모에 휘말렸던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결백했던 것입니다.


4)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박정희가 죽고 신군부의 쿠데타로 전두환이 집권하자, 공안당국은 또 다시 종북사냥, 빨갱이 사냥감을 물색했습니다. 이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바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입니다.

1980년 7월 4일, 전두환 신군부 계엄사령부는 5.18 광주항쟁의 주동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해 그와 사건관련자 37인을 이른바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프레시안>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해방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였으며 해외에서 북과의 노선에 동조하는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즉 <한민통>을 만들었으며 이들 불순분자들과 근래에도 접촉해왔다”고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성 공산주의자였다고 믿으시나요? 1980년 당시의 국민들은 아마도 그렇게 믿었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1977년, 중앙정보부는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체포해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으로 이들이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고 한민통 간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ㆍ수집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민통 결성을 준비하고 의장활동을 했다고 하니 내란음모 조작은 완성되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군사재판을 통해 1981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는 커녕,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고 외쳤던 이들 모두 뻔뻔하게도 김대중 정부 아래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새빨간 거짓말이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5) 각종 간첩단 사건

뿐만 아니라 지난 70, 80년대에 사회지면을 강타했던 각종 간첩단 사건들이 줄줄이 연이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1975년에 있었던 ‘김우철⋅김이철 형제 간첩 사건’도 조작임이 드러나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1977년, 서울대 법대, 한양대 의대생들이 재일교포 간첩에게 포섭되었다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관련자 4명도 이후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1983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으로 몰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10년형을 선고받았던 박 모 씨, 재일동포 유학생 김원중 씨도 모두 재심청구 끝에 조작임이 드러나 무죄를 판결받았습니다.

1964년 인혁당 사건과 저명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 1967년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과 납북되었다가 돌아와 “북한도 제법 잘 살더라”란 말 한마디 했다가 간첩으로 몰린 납북어민 서창덕 씨, 그리고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다 숨진 최종길 서울대 교수, 문인간첩단 사건, 심지어 1985년의 모자 간첩사건, 진도군 중림마을의 고정간첩단 사건들도 모두 재심청구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남파간첩 누명을 쓰고 고문과 조작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함주명 선생은 재심청구로 20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간첩행위 및 방북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4년간 복역했던 이장형 씨는 고문에 못 이겨 간첩누명을 썼다며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악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처와 자식들도 똑같이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간첩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문후유증으로 재심판결이 있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최근 국가정보원은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인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이 법원에 재출한 유우성 씨의 증거자료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사회지면을 강타한 간첩사건 가운데 상당수가 이처럼 공안기관에 의해 조작된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6) 지금 종북은 유죄인가?

새빨간 거짓말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종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우리가 “종북”이란 주장에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6.25 전쟁 당시에는 수십만의 양민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낳았고 진보당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하였으며 민청학련의 선량한 청년들이 무더기로 감옥에 끌려가는 암울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보도연맹도 무고한 양민이었고, 조봉암 선생이 종북이 아님은 물론, 민청학련도 종북이 아닙니다. 당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도 종북이 아닙니다. 간첩으로 내몰려 한맺힌 옥고를 치른 수많은 간첩혐의 연루자 분들 모두 종북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첨단과학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 종북이 있습니까? 종북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공안기관의 소설 속에 있을 뿐입니다. 보수언론의 요상한 입술 속에 있을 뿐입니다. 


지난 시기 수많은 애국인사들, 무고한 양민들이 끊임없이 종북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북한당국과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비슷하다는 데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민족자주”와 “민주”, “통일”이란 말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남쪽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다니니까 무언가 연계가 있다는 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것을 북한이 쓰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쓰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용어가 그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지,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는 재야인사들이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제도권이나 보수인사들처럼, 북한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북한을 비판하는 문장을 삽입해서 국가보안법의 처벌을 피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권 인사들의 행동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입니다. 자기는 국가보안법의 사상검증을 빠져나오는 대신, 국가보안법을 더욱 튼튼히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근거도 없이 북한을 비판할 것을 강요하고, 북한을 비판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위와 정서 자체가 반통일적인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난 70년간 종북공세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은 김대중, 김근태, 이해찬, 이철, 장영달, 유홍준, 유인태 같은 이들이 사실은 종북 빨갱이란 주장을 믿으시는지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015년에 한국사회에 종북인사들이 있다는 마녀사냥도 세월이 지나면 모두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다만 극소수 국민들은 김대중, 김근태, 이해찬, 이철, 장영달, 유홍준, 유인태 같은 이들이 정말 종북 빨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일간베스트>에서 활동하는 몇몇 일베충들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