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4일 화요일

광주 진압에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아침신문 솎아보기] 광주 진압 관련 모든 회의 참석… 경향신문 군 문서 입수해 1,4,5면에 진상규명 보도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9년 05월 15일 수요일

전두환 각하께서 ‘Good idea’
광주 5·18 민주화운동 39주기를 앞두고 15일자 아침신문 가운데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먼저  진상규명 탐사보도와 기획기사를 각각 내놨다. 
경향신문은 1980년 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문서를 입수해 5월23일자 기록에 “각하께서 Good idea”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손글씨가 적힌 사실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1면 머리기사에 이어 4,5면 전면을 털어 보도해 가장 집중력을 보였다. 내용도 단순 기념보도가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980년 5월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광주 진압의 책임을 물어가는 탐사보도 형태를 취했다. 
5월23일은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엄군이 잠시 광주 시내에서 후퇴한 시점이었다. 2군사령부는 이날 ‘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광주 재진입을 건의했다. 이날 회의엔 진종채 2군사령관이 계획을 보고하고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누군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반응과 지시사항을 자필로 옮겨 적었다.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 1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경향신문은 “당초 5월24일 오전 2시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군사행동에 반대한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고 전했다. 해당 문건에는 “5월25일 오전 2시 이후까지 작전 연기”라고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5월27일 새벽,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행해 옛 전남도청 등을 무력 진압했다.
경향신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최종 진압작전의 기획단계부터 개입해 작전을 승인했음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5면.
▲ 15일자 경향신문 5면.
이어 경향신문은 15일자 5면에도 ‘각하로 불린 전두환, 광주 재진입·도청 진압회의 모두 참석’이란 제목으로 관련 기록 12건을 통해 1980년 5월 전두환의 한 달간 행적을 추적해 “권력 찬탈을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이날 4면엔 1980년 5월 한 달간 전두환이 등장한 각종 회의와 행사장 참석 행적 34건을 분석해 1980년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된 뒤 5월4일 시국수습방안 회의 참석 이후 5월3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 취임까지 모든 장면을 날짜 순으로 기록했다. 경향신문이 기록한 전두환의 1980년 5월 행적은 권력장악을 위한 동분서주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고 해명했다.
▲ 15일자 경향신문 4면.
▲ 15일자 경향신문 4면.
한겨레는 사라진 사람들에 주목 
한겨레신문은 ‘5·18 사라진 사람들’이란 기획기사로 1980년 광주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15일자 10면에 기획기사 첫 회분으로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 15일자 한겨레 10면.
▲ 15일자 한겨레 10면.
한겨레의 이 기사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의 주검이 사라졌다’는 제목을 달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의 사격명령에 매복한 군인들이 집중 사격해 버스 속 승객 10명이 몰살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주남마을 일대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총격사건 5건을 날짜와 피해자, 목격자 등으로 나눠 상세히 소개했다.
1980년 광주에서 사라진 사람은 확인된 사람만 7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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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5.15 09:06
  • 댓글 1
▲ 이덕인 열사 시신[사진 : 필자 제공]
1. 인천의 연수구에 위치한 작은 섬 아암도
아암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마 섬이었을까 싶을 이곳은 매립 이전에는 송도유원지 후문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작은 섬이었다. 개펄 위로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돌다리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바닷물이 빠진 개펄 위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닷물이 빠지면 돌다리로 인해 홍해를 연상케 하는 길이 열렸고, 송도유원지를 찾은 시민들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줄지어 아암도로 향했다. 그리곤 손바닥만한 섬에 올라앉아 바다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러나 면적 1천8백32평에 불과한 작은 바위섬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였는지 인천시가 발간한 안내 책자에서조차 섬 취급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했던 섬이다. 그리고 왜 똥섬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암도를 "똥섬"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잊혀진 작은 섬, 그 섬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 장애인 노점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덕인(남, 당시 29세)이다.
1995년 11월 28일 몹시도 추운 겨울날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들 인천의 "아암도"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 중인 노점상들이 걱정되어서인지 그날따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노점상 단체의 여성부의장 유희 씨의 입담으로 분위기가 다소 활기차졌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지 이 싸움이 끝날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지."
"삐삐 왔네, 확인하고 올께…."
"뭐라고? 누가 죽었다고?"
인천 연수구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덕인이었다. 망루에서 내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던 그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온몸에 밧줄이 감겨 아암도 근처 갯벌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우리는 인천으로 달려가 곧바로 "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인에 대한 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 눈 맑은 청년 이덕인
최정환 열사 투쟁이 끝나고 장애인과 노점상은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직업을 얻지 못한 이들과 노점상 그리고 장애인이 모여 청계천과 인천 아암도에 새로운 생계 터전을 일구어 나간다. 하지만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단속과 탄압으로 이어진다. 청계천에서만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소속 5명의 장애인과 노점상이 구속되었다.
한편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는 여름부터 인천의 아암도에 노점 좌판을 깔기 시작한다.
바닷물을 만질 수 있고 갯벌에 뛰어다니는 망둥이와 게를 볼 수 있어 인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아암도는 송도유원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로 인해 일대를 3개 지구로 나눠 56만4천 평을 메운다. 아암도 바로 앞 갯벌까지 송도 3지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해안선 백사장에서 돌출한 형태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7월 개통된 폭 40m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아암도 근처에 노점상이 하나둘씩 들어서게 된다.
덕인이와 첫 번째 만남은 1995년 같은 해 3월 장애인으로 강남역에서 장사하다 분신자살한 최정환 열사" 투쟁 후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계기로 몇몇 활동가들이 장애인 운동과 노점상 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청계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출소한 김종상씨와 함께 인천 장애인자립 추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덕인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턱수염을 기르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나이가 한참 더 먹었거니 생각하였다. 그도 내가 작아서 자기보다 서너 살 어린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살 많으니 내가 형이네" 했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또 웃었다. 첫 만남부터 시원시원했다. 강해 보이는 인상 속에 맑은 눈을 가진 이였다. 어디서든 그는 눈에 띄었다. 정열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쉽게 눈에 밟혔는지 모른다. 집회 때는 선봉에 서서 구호를 외치거나 언제나 깃발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목소리가 컸고 웃음이 많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일기장에는 가족과 장애인인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일기장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1995년 3월 인천시와 군부대가 용현 갯골수로에서 아암도까지 설치된 군 철책선을 철거하기로 합의 각서를 체결한 뒤, 같은 해 6월 아암도를 중심으로 4백여 미터 구간의 철책선을 철거했다. 그리고 아암도를 하와이 와이키키형 관광위락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일대에 모래를 부어 인공 백사장을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인공 백사장은 사실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얼마 안 가 모래는 바닷물에 휩쓸려 다 없어졌고, 예산만 낭비한 것이 됐다. 더욱이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와 이권 문제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후 이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오히려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천시는 철책선 철거 후 새로 발생한 노점상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과 대안을 수립하지 않고 공권력과 철거 용역반원들을 투입하여 강제 철거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 모든 것은 금전적 손실뿐만 아니라 행정력 낭비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었던 것으로 기획단계부터 과욕이 앞섰다. 인천시의 뜨거운 감자였던 아암도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와 의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암도는 행정기관의 단속뿐만 아니라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과 싸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95년 9월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 인천의 폭력조직인 소위 '꼴망파'라 불리는 폭력배들이 개입하여 장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좌판을 깔기 시작하면 이들과 싸움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당시 총무국장을 맡고 있던 이덕인은 장애인이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었기에 이들과 충돌에서도 언제나 앞장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금품을 갈취하려는 건달들과 맞섰다. 한번은 꼴망파 행동대원들이 아암도 장사 현장에 들이닥쳐 노점 좌판과 포장을 걷어치우기 시작했는데, 덕인은 끝까지 이들과 맞붙어서 돌려보냈다. 폭력배들도 끈질긴 저항에 기가 질려 그가 버티고 있으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천시와 연수구청에 단속이었다. 그들은 도로를 뚫고 바다를 메꾸었지만, 정작 노점상에게는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장사를 허가하지 않고 단속을 반복하였다.
그해 10월 나는 인천 새날 청년회 회원과 함께 아암도를 방문하였다. 인천시는 노점상에 대한 행정 대집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고자 망루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망루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농성자들이 거대한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하던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던 것을 철거민이 개발지역에서 전술로 응용하였는데, 노점상이 용역 깡패의 단속에 맞서 생존권을 방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등 투쟁은 격렬하고 희생이 컸다. 그날은 늦가을 날씨답지 않게 더웠다. 덕인이와 나는 마침 바닷가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개를 구워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덕인씨? 망루를 세우기로 하였다는데 잘돼?"
"네, 아직은 판단이 잘 서지 않네!"
"사람들 의견은 어떤데?"
"사실 이곳은 동떨어진 해안가이기에 농성자들이 망루 안에 고립될 수 있지. 그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지 않아서 과연 선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
덕인은 망루를 세우고 단속에 맞서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를 통하여 조직이 결정한다면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술을 한잔 털어 넣었다. 그날 아암도 근처는 때마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노을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몇 잔의 술기운 때문인지 덕인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 인천 아암도의 망루와 철거모습[사진 : 필자 제공]
3. 죽음을 부른 인천 아암도
'인천 장애인 자립추진위'는 물리적인 힘으로 저들의 강제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심 끝에 1995년 10월경 약 10m 가까운 (망루)을 건설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언제 공권력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4시 30분경 며칠 사이 떨어진 기온을 이기기 위하여 농성자들이 전날 피워놓은 장작더미가 거의 타들어가 재로 변할 즈음이었다. 시청과 구청에 동태를 살피던 노점상 회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포크 레인과 전경 버스 30대, 철거 용역 깡패들이 타고 있던 서우관광 버스 4대가 연수구 일대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노점상 40여 명은 즉시 총회를 개최하여 망루에 올라가 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점상 25명은 망루에 올라가 대기하였고, 나머지 20명은 아암도 주차장에서 상황을 보거나 싸움에 대응하였다.
새벽 6시,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병력 8대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재개발 철거 현장에서 악명을 떨치던 무창용역 소속 철거용역깡패 300명이 푸른색 청카바를 입고 나타났다. 구청 직원 50여 명, 타이탄 트럭 15대, 덤프트럭 5대, 포크레인 3대, 물 대포용 소방차 3대가 아암도에 속속 도착하였다. 다시 한 시간 후 철거 병력 총 1400명이 아암도 현장에 도착하였다.
새벽 7시, 하늘은 이제 막 어둠이 걷히고 인천 앞바다는 서서히 푸르른 빛으로 제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그날따라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 대었다. 바다로 통하는 어통소에서 아암도 방향으로 노점 설치물에 대하여 포크레인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은 새벽의 정적을 가르며 포장마차와 좌판들을 하나둘씩 찍어 눌렀다. 상인들의 생계수단은 조각조각 뜯겨 아스팔트위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주차창 근처 노점상들은 손 쓸 틈도 없이 흩어져 철거되는 포장마차와 좌판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소방차는 망루 위로 물대포를 마구 쏘아대자 한겨울 바닷바람에 힘이 실려 망루 상층을 흔들어 댔다.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저항을 했지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과 노점상에게 물대포는 살인적인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물대포 쏘기가 끝나자 포장마차와 좌판을 철거하던 포크레인이 망루 지지대를 찍었다. 높이 10미터가량의 망루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위에 있던 농성자들은 극도의 위협을 느꼈다. 계속 포크레인에 찍힌 지지대를 여러 차례 흔들어대자 조금씩 기울어졌다. 위기감에 처한 망루 위의 농성자들은 인분과 화염병을 망루 아래로 던졌다. 그러나 위협용으로 제작된 인분과 화염병은 곧 바닥이 났다. 농성자들은 죽음의 위협과 싸웠다. 계속된 공권력 앞에 마지막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흩어져 있는 물건과 집기, 심지어는 먹으려고 갖고 있던 무와 감자 등의 식료품을 던지며 필사적인 저항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자 포장마차 2개를 제외한 모든 좌판이 철거가 완료되었다. 오전 8시 30분경 사다리가 달린 소방차가 망루에 도착하였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농성자들을 상대로 해산하라며 협박을 하였다. 서로 대치된 상태에서 긴장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위협적인 철거가 진행되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 4시, 잠시 조용해진 듯싶더니 동시에 3단의 원형 철조망을 망루 주변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망루 농성자의 탈출을 막으려 했다.
싸움은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동열의 형 한동일(남)과 이석근의 형 이회근(남)이가 동생 신변을 확인하려고 1t 트럭을 타고 가다 주차장 차도에서 용역 철거반 20여 명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슬 퍼런 눈빛의 철거반들은 이들마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저 새끼들도 한통속이다."라며 달려들어 집중적으로 구타하였고 아암도에서 끌고 나왔다.
부근엔 경찰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외면하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가족 50여 명은 오후 3시경 인천 시청을 항의 방문해 울부짖었다. 시청 측에서는 국장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한 후 전경을 동원해 강제로 시청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2명은 실신한다. 인천 시청에서 강제로 끌려 나온 50여 명의 가족과 장애인 노점상은 오후 7시경 아암도로 진입을 시도한다. 경찰은 이미 송도 삼거리와 아암도 주변의 약 2km의 거리를 바리케이드로 완전히 막고 모든 차량과 사람의 왕래를 봉쇄하였다. 일부 가족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아암도에 진입하려다 연행된다.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살리려고 경찰과 악에 받친 싸움을 한다. 이 와중에 전투경찰에게 걷어차여 배미옥(여), 박길림(여) 씨가 다치어 인천 시립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오후 7시 30분, 이제 인천의 아암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물대포를 맞아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권순희(여)와 한은미(여)는 탈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자 망루에서 내려오자 경찰은 연행하였다. 권순희(여)의 증언에 따르면 망루 위에는 28명의 농성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상황으로 총 연행자는 모두 15명으로 늘어나고 면회조차 거부당한다. 쏘아대는 물대포와 돌 세례를 맞아 이미 탈진의 지경에 이른 농성자들에게 공포와 추위 못지않게 허기진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공권력에 의해 일체의 식수와 음식물을 차단 당한 채 뜬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덕인이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기억한다. 대부분 탈진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는 선봉에 서서
"장애인 생존권을 쟁취하자",
"노점단속 자행하는 김영삼 정권 퇴진하라"
고 구호를 외쳐댔다. 그리고 모여있는 농성자들을 위로하며,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무엇이 됐냐, 우리 가족 먹여 살리려 노점상이 되었단다"
하며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이때 빨간 츄리닝을 입고 선동하던 덕인 이를 경찰은 주동자로 주목하게 된다. 망루 아래의 용역은 "빨간 츄리닝! 내려와, 죽여버린다!"라는 욕설과 협박을 당한다. 11월 25일 오후 1시경 박흥수(남)가 경찰과 협의 하에 망루 위로 올라갔다. 박흥수는 덕인이에게 '빨간 츄리닝이 경찰의 눈에 띄니 옷을 바꿔입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골덴 바지를 덕인이와 바꿔 입은 후 보급품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망루 밖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경찰을 상대로 집회와 인천 남부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및 종교인을 중심으로 안전을 보장토록 촉구를 하였다. 농성자가 먹을 물과 담요 그리고 하루 두 끼의 음식을 올려 줄 것에 대해 요구를 했지만, 경찰은 무시하였다. 남부 경찰서 관계자들은 "죽을 지경이면 내려온다"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후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노점상과 장애인 등 80여 명이 망루에 있는 농성자들에게 의약품과 물, 빵을 전달하기 위해 망루에서 150m 거리까지 진입하여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당하였다. 이어 당뇨병, 폐결핵 환자를 비롯해 부상자에게 전달할 구급약품이라도 전달하고자 노점상 배미옥 씨가 지원하여 재진입을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팔이 뒤로 꺾이는 등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구급약 전달은 또 실패하게 된다. 이때 경찰병력은 도로에 전경들이 있었고, 어통소 포장마차 주변에는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농성자 중 황재안(남)이는 당뇨 환자라 경찰측에 약품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음식과 의약품을 구하러 망루를 내려간 덕인이는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더해지자 이석근은 바닷가 쪽 아래로 밧줄을 내려놓고 보급품이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26일 오후 11시 15분경 보급품을 찾으려 윤태열이 망루에서 내려왔지만 역시 곧바로 남부서로 연행되었다. 보급품을 찾으러 간 사람은 경찰에 의해 하나둘씩 연행되거나 지쳐나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망루에 있었던 노점상은 '물대포를 맞아 몹시 춥다. 배고프다.' 며 고통을 큰소리로 호소했지만, 절규의 목소리만 바닷가를 맴돌았다. 농성자들은 살인적인 추위와 물대포 세례 속에서 28일까지 5일 동안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다. 11월 28일 아침 해안가에 한 구의 시신이 포승줄에 포박되고 상의가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덕인이었다. 다시 공권력은 서둘러 망루를 무력적으로 철거하였다. 농성자들은 덕인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의를 상실하고 농성을 해제한다. 그들은 곧 전원 인천남부경찰서로 연행된다.
** 이덕인 열사의 투쟁과 몇 가지 의문을 중심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
임두만 | 2019-05-14 14:50:4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2월 8일 국회에서 열린 지만원 초청 공청회에서 지만원은 물론 당시 자유한국당 이종명 김순례 의원은 5.18 광주항쟁에 대해 심각한 왜곡 발언을 했다.
이에 5.18 사형수인 김종배 전 의원을 비롯한 5.18 생존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이 망언을 계기로 2월 11일부터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약칭 5·18농성단)을 조직, 국회 앞에서 93일 째 농성 중이다.
▲ 5.18 농성단이 장세동 씨 집으로 가고 있다. © 농성단 제공
즉 이들 농성단은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 국회 제명과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구속, 5·18역사왜곡 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성단은 중간에 행동의 날을 정하고 4월 4일부터는 광주학살의 실질적 책임이 있는 이들의 집을 찾아가 공개질의를 던지는 등 행동으로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농성단은 ‘행동의 날’ 첫날인 4월 4일 학살주범으로 꼽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 앞에서 제1차적으로 행동을 보였다. 이어 4월 1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제2차, 4월 18일 정호용 전 의원의 과천 집 앞에서 제3차, 4월 25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집 앞에서 제4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통해 전두환과 지만원 처벌을 촉구하고, 집단발포 명령의 진범을 추적하고 있다.
▲김종배 농성단 대표(전 국회의원)가 정호용 씨 집에 질의서를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어 농성단은 또 지난 5.2 목요일 제5차 ‘5·18행동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오후 2시 양재역 9번 출구 앞에서 집결, 인근에 거주하는 허삼수 전 의원(5.18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1980년 5월부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혐의사실을 공개했다.
또 당시 보안사가 전두환 집권을 위해 저지른 5,17신군부 쿠데타에서 희생양으로 삼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고 광주항쟁과 연계, 폭동 혐의 씌우기를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 5월 광주항쟁 당시 일어난 5.21 헬기사격 주도 등에 대해 공개질의를 했다.
이런 가운데 농성단은 오는 16일 1980년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신군부 쿠데타 핵심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의 집을 찾아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공개질의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농성단에 따르면 허 전 의원은 전두환 신군부 핵심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연금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는 핵심이었으며,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서 시민사살명령이 내려진 5월 21일 전두환과 함께 광주에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연희동 전두환 씨 집 앞에서 농성을 벌인 ‘5.18 농성단’ ©농성단 제공
이와 관련, 전날인 13일 1980년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 씨와 광주 주둔 505보안부대 수사관 출신 허장환 씨는 국회에서의 공개증언을 통해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희생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용장 씨는 이날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정오께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74명이 회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었다.
이에 농성단은 당시 전두환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 대령 또한 광주에 있지 않았는지, 전두환의 광주시민 사살명령에 개입되지 않았는지, 이 범죄를 자백할 의향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질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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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식량지원에 민간·종교단체 나섰다

(추가)민화협·북민협·7대종단, 범국민 캠페인 발표...통일부장관과 간담회도 진행(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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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4  17: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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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14일 오후 남북회담본부에서 민화협, 북민협, 7대 종단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 방침에 이어 종교·민간단체들이 적극적인 추진 의사를 밝히고 이에 통일부장관이 이들 단체 대표자들과 즉시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사업 진행에 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14일 오후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대표의장 김홍걸)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 이기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대표회장 김희중 대주교)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이들 대북지원 민간단체 대표자들은 이날 오전에는 서울 중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식량지원을 위한 범국민 캠페인을 전개하여 각계의 지원금과 국민성금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긴급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날 방한중인 데이비드 비슬리(David Beasley) 세계식량기구(WFT) 사무총장과 대북 인도지원 사업 협의를 위해 면담을 가진 김연철 장관은 이날 간담회 모두 발언을 통해 "인도주의 현장에서 경험과 철학을 두루 갖춘 단체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포함해서 인도주의 지원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김홍걸 민화협 의장은 "북미간 비핵화협상이 난관에 부딪치거나 남북 정부간 교류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민간차원의 교류는 계속 활성화시켜야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고 하면서 "4.27 이후 지금까지 남북교류가 관 주도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번 대북 식량지원 사업에서는 민과 관이 협의, 협력해서 상호보완적 관계가 되도록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태성 KCRP 사무총장은 "대북제재와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서 북한내 식량사정이 아주 엄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지난 부처님오신날에 교단 수장들이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깊게 논의했다"고 하면서 "각 종단은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재개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북민협 회원단체인 평화3000 박창일 운영위원장은 "북민협은 지난 연말, 올초에 밀가루 5천톤을 대북지원했는데, 유엔제재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하면서 "그전에는 정부가 대북지원에 나설 경우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민간단체를 많이 활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 외에 국내 종단이나 민화협, 북민협을 통해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한다면 오히려 정책부담을 덜고 모니터링도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며, "중국을 통해서 물자를 보내는 경우 유엔 제재외에도 중국 정부가 가하는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으니 개성육로, 개성철길, 남포-인천, 부산-원산 뱃길 등 통로 다각화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통일부는 이날 간담회에서 "통일부장관이 북한주민에 대한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지원을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 다만 대북 식량지원에는 국민적 공감과 지지가 필요한 만큼 국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추진할 계획"이라는 점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대북 식량지원의 규모와 시기, 필요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대북 식량지원이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표시했으며, 민간차원의 대북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 등 절차에 대한 신속한 지원과 민간단체 및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김 장관은 이같은 건의에 대해 제도적 지원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해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박창일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북민협에서 4명, 김홍걸 민화협 상임대표의장을 비롯해 5명, 김태성 사무총장을 비롯해 KCRP에서 8명 등 총 17명의 종교·민간단체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 민화협, 북민협, KCRP는 14일 오전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대북식량지원을 범국민적 캠페인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에 앞서 이들 종교·민간단체 관계자들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민화협 공동의장인 한영수 한국YWCA연합회 회장이 발표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올해 북한의 식량사정이 최근 10년 사이에 최악이라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고 "우리 정보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서 "결국,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아무 대책없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식량지원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정부에는 "민간차원의 식량지원이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과 방북에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해 줄 것"을, 국제사회에는 "북쪽 주민들의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지지를 보내주고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북측 당국에는 "대북제재 등 국제정세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한국 시민사회의 식량제공 노력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민들에게는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지원은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는 통일준비의 과정이며, 우리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과 평화통일 의지를 제고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생명을 존중하고 통일의 미래를 생각하는 길에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지원물자에 대한 전용의혹을 해소할 수 있도록 분배의 투명성을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날 민화협, 북민협, KCRP 공동명의로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북한 동포들에 대한 식량지원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끈이며, 남북이 상생하는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이고 통일 후 함께 살아갈 우리의 동포들, 우리의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라며,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이는 그 어떤 정치적 이유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북녁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기범 북민협 회장은 지난 5월 3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분과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의 식량 작물 생산량은 약 490만톤으로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여러 가지 원인 중에 인산, 칼륨 비료의 부족 그리고 농장의 전력 및 연료의 심각한 부족이 식량 생산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고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또 "올해 수입해야 할 곡물의 양을 약 136만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 주민 약 1,01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양 "이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인도적 개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히 올 1월부터 1인당 식량배급량도 전년 대비 80g 줄어든 300g이 지급되고 있으며, 7~9월에는 배급량이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춘궁기인 5~9월 사이에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즉각적인 인도주의 조치가 요청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현재 북녘 인구의 43%에 해당하는 1,090만명이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생후 6개월에서 23개월까지의 어린이들 중 3분의 1이 하루 최소량의 식사만 공급받고 있으며, 그 결과 어린이 5명중 1명은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발육부진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엔 대북제재 품목으로 묶여있는 영농기자재와 영농장비도 지원하는 농업분야 개발협력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인도지원 영역에 대한 즉각적인 대북제재 완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남북협력을 통해 식량상황 개선뿐만 아니라 주민과 어린이들의 영양상태 개선과 질병관리를 위한 보건, 의료, 영양 분야 대북지원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홍걸 민화협 의장은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이후 1년간 남북교류가 관주도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번 식량지원사업을 계기로 민과 관이 협력하는 상호보완적 관계가 되도록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아가 "이번 기회를 잠시 닫혀있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말 중국 선양에서 북측 인사들과 실무접촉이 예정돼 있는 김 의장은 북측에서 간접적으로 대규모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는 전언이 있었다며, 민간의 대북 식량지원 계획에 북측이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표시했다.
KCRP 남북교류위원장인 원불교 정인성 교무는 "우리 7대 종단은 북한이 어려울 때마다 항상 기도와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다"며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4대 종단이 구성한 조선종교인협회와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늘 파트너십을 가지고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어려운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에 우리 종단은 적극적으로 함께 나서겠다"며,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와 고뇌를 공유하는 것이 신앙하는 이들의 마땅한 책무이다. 정치인들은 굶주린 동포를 위해, 내 형제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행위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도리로서 나누는 밥그릇에 제발 이념을 덮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식량지원에 대해 북측이 소극적 입장을 밝힌데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의 비핵화협상을 진행중인 북측으로서는 식량문제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조금 소극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어려움을 겪는 북측 주민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기범 회장은 "굶주림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생명과 성장에 부작용을 초래하는 구체적인 경우는 엄격히 다르다는 점을 유념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앞으로 진행상황을 국민들께 소상히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대국민호소문(전문)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긴급 식량지원에 동참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민족의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들이, 통일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갈 우리의 아이들이, 심각한 식량난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기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작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넘어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관계는 물론, 남북관계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립과 갈등을 뛰어 넘어, 생명과 인권의 존엄성을 함께 실현해 나갈 것을 호소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건강한 통일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대승적 차원에서 대북 식량지원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북한주민들이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북한은 ‘136만 톤의 식량이 부족한 상태이고,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 명이 심각한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선뜻 북한을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정부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 발표하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않은 상태입니다. 결국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들을 살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남북의 군사적․정치적 긴장상태와는 별개로,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부족한 식량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대북 식량지원을 둘러싼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통 받는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이 절실합니다.
  북한 동포들에 대한 식량지원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끈이며, 남북이 상생하는 평화와 통일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출발입니다. 통일 후 함께 살아갈 우리의 동포들, 우리의 아이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에 생명과 평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정성을 모아 북한 취약계층을 위한 긴급 식량 지원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각계의 지원금과 국민성금을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국민여러분께 호소합니다. 북녘 동포들을 돕기 위한 식량지원에 동참해 주십시오.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는 그 어떤 정치적 이유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정부에 요청합니다.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보다 유연한 입장을 가져 주십시오. 시민들의 작은 정성으로 마련한 식량이 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민간차원의 식량지원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물자의 반출과 방북에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해줄 것을 촉구합니다. 정부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을 재개하는 것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면, 민간단체나 국제기구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사회에도 호소합니다. 북쪽 주민들은 한반도 남쪽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이웃이라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들이 힘들어 할 때 그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인도주의의 가장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북쪽 주민들의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지지를 보내 주시고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북쪽 당국에도 촉구합니다. 대북제재 등 국제 정세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 시민사회의 식량 제공 노력에 적극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대북 지원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논란과 지원물자의 전용가능성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북 지원의 효과를 높이고 분배의 투명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여러분, 종교인 여러분, 각계의 지도자 여러분,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9. 5. 14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7대 종단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추가-10:29)

한국당 장외투쟁, 국민 10명 중 6명 "공감 안해"

[오마이뉴스 주간 현안 여론조사] 비공감 60.3% vs 공감 35.2%... 중도층 62.6% 비공감

등록 2019.05.15 07:17수정 2019.05.15 07:17유성애(findhope)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약 6명은 약 2주째 진행중인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명 가운데 약 5명은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정치적으로 무당층, 이념성향상 중도층에서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대에 달했다.
 
<오마이뉴스>는 14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0명(응답률 6.9%)을 대상으로 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한 국민인식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질문은 이랬다.
 
Q. 선생님께서는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택지 1~4번 순·역순 배열)
1번. 매우 공감한다
2번. 다소 공감한다
3번.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4번.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5번. 잘 모르겠다
 
조사 결과, 비공감 응답이 60.3%를 기록해 공감 응답 35.2%보다 25.1%p 높게 나타났다(모름/무응답 4.5%).  특히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50.5%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 비공감의 강도가 매우 센 것으로 조사됐다("별로 공감하지 않는다"는 9.8%). 반면 "매우 공감한다"는 21.8%, "다소 공감한다"는 13.4%에 그쳤다.
 
▲ 청와대로 향해 거리행진 벌이는 자유한국당과 지지자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원과 지지자들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집회를 마친 뒤 국회 선거법과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강행처리를 규탄하며 청와대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당의 장외투쟁은 무당층과 중도층을 설득하는데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당 지지층의 88.5%가 공감한다고 응답하고, 반대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93.0%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해 지지성향에 따라 입장차가 확인히 갈리는 가운데, 무당층의 경우 공감 22.0% - 비공감 60.9%로 나타났다. 비슷한 구도는 이념성향별 분석에서도 확인됐다. 보수층 응답자의 67.3%가 공감, 진보층 응답자의 86.9%가 비공감에 답변을 하면서 대립하는 가운데, 중도층 응답자의 경우 공감 35.4% - 비공감 62.6%로 한국당의 장외투쟁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높았다.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대구/경북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비공감 답변이 과반을 넘기며 높았다. 특히 광주/전라의 경우 비공감 답변이 89.0%에 달해 가장 높았으며, 서울 64.6%, 경기/인천 61.4%는 장외투쟁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구/경북은 공감 50.2% - 비공감 48.1%로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 ±4.4%) 내에서 팽팽했다.
 
연령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비공감 답변이 50%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40대의 경우 비공감 답변이 75.0%로 나타났다. 반면 60대 이상은 공감 51.8% - 비공감 44.7%로 오차범위 내에서 공감한다는 답변이 높았다.
 
성별로는 남성의 55.5%, 여성의 65.0%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난달 20일 주말 집회에서 시작된 한국당의 장외투쟁은 개혁법안 패스트트랙 처리 직후인 지난 2일부터 본격화되 현재 2주째 지속되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한국당의 장외투쟁이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는 있지만, 그만큼 또는 그보다 강하게 반대층도 결집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당층 또는 중도층의 약 60%가 장외투쟁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 장외투쟁의 지속 동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5월 추가 경정예산처리를 위해 장외투쟁 중인 한국당에게 '5당 협의 후 대표와 일대일 대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는 문 대통령과 일대일 회동을, 나경원 원내대표는 '교섭단체만 참석하는 3당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무선 전화 면접(10%) 및 무선(70%)·유선(20%) 자동응답(ARS) 혼용 방식으로 진행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p이다. 조사 대상은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 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식으로 선정했고, 통계보정은 2019년 1월 말 행정안전부 국가인구통계에 따른 성·연령·권역별 사후 가중 방식으로 이뤄졌다. 자세한 조사 결과는 오른쪽 '자료보기' 버튼을 클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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