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0일 월요일

집배노동자는 살인노동·버스기사는 과로운전 ‘과로사회’


[아침신문 솎아보기] 이틀 30시간 운전, 휴식시간 보장 안 돼…분신한 집배원 노동시간, 새벽 4시반~밤 10시반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7년 07월 11일 화요일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가졌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난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해 7중 추돌사고가 난 것과 관련해 버스 운전기사들의 과로 근무실태에 대해 1면에서부터 조명했다. 경향신문은 1면에서 지난 6일 안양우체국 앞에서 분신한 집배원 사건을 다루며 그들의 과중한 업무에 대해 살폈다.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이 법정시한을 넘긴 가운데 노사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는 노동계가 오랫동안 주장했고, 대선 당시 후보들도 어느 정도 합의했던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좀 미루자는 주장의 칼럼이 실렸다. 경향신문은 최저임금 인상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고 보며 최저임금도 주지 못하는 사업장은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11일자 아침종합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극단으로 내몰린 집배노동자…‘살인 노동 멈추라’”국민일보 “법안처리 1건…정쟁에 막힌 정책” 동아일보 “오늘도 저승사자와 달린다” 서울신문 “지명 철회 검토…협치 구하는 靑” 세계일보 “국정원, 野정치인 ‘사찰’ 검·경 표적수사도 종용”조선일보 “송영무·조대엽 임명 늦추기로” 중앙일보 “레미콘 공장 철거, 61㎡로 커지는 서울숲” 한겨레 “‘골목상권’ 대기업 진출 특별법 도입해 막는다” 한국일보 “文정부 두 달, 아직도 ‘반쪽 정부’” 
오늘도 저승사자와 달린다 
동아일보는 1면에서 광역버스 운전사의 과로근무에 대해 다뤘다. 이 신문에 따르면 버스기사들이 졸음을 가리키는 말이 ‘저승사자’였다. 9일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7중 추돌사고를 낸 광역급행버스 운전사 김아무개씨는 사고 당시 “시속 90km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이 감긴 것 같은데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앞바퀴가 붕 떠 있었다”고 말했다. 

▲ 11일자 동아일보 1면

사고 전날인 8일 김씨는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반까지 19시간 가까이 일했다. 이날 운행거리는 약 639km로 서울~부산 최단거리 360km의 두 배에 육박하는 거리다. 김씨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데 이튿날 운전대를 잡은 시각은 오전 7시15분. 동아일보는 “다음날 운행할 때까지 8시간 휴식 적용이 안 됐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현행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사업용 차량 운전사들이 2시간 이상 운행 때 반드시 15분 이상 쉬도록 하고 있다”며 “운행 간격도 최소 8시간 이상 유지토론 하고 있다”고 설명한 뒤 “김씨에게 이 규정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였다. 동아일보는 3면 “7대 신고하고 5대만 운행…출근시간대 15분간격 ‘돌려막기’”에서 “예고된 사고였다”며 “하지만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고 표현했다. 이 신문은 “7중 추돌사고는 왕복 100km가 넘는 장거리 노선을 하루 5, 6회씩 달려야 하는 수도권 광역버스 운행시스템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고 분석했다. 중앙일보도 1면 제목을 “이틀 30시간 운전, 졸음 버스 만든다”고 뽑으며 휴식 없는 노동에 대해 지적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M5532번을 운행하는 오산교통은 지난해 8월 국토교통부에 ‘버스 7대로 15~30분마다 하루 40회씩 운행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허가를 받았지만 실제 투입된 버스는 5대 뿐이었다.
동아일보는 “국토부는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지자체는 인력 부족과 업계 반발을 이유로 손을 놓았다”고 지적했다. 경기 광주시 경우 전담 인원 2명이 3000대 버스를 관리해야 한다. “서울시처럼 준공영제를 실시하는 곳은 지자체가 권한을 행사하지만 준공영제가 없는 지자체는 업체 ‘양심’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졸음운전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다뤘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2~3초만 깜빡 졸아도 일반 도로에서 100m 이상을 눈감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며 “졸음운전은 음주운전보다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고속도로안전청 보고서에 따르면 18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운전자는 혈중알코올농도 0.05%의 음주운전자와 상태가 비슷하고 21시간째 깨어있는 운전자는 알코올농도 0.08%때 수준처럼 둔해진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2012년부터 최근 5년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졸음운전 사고는 모두 2241건이다. 치사율이 18.5%로 과속 치사율 7.8%,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 11.1%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졸음운전을 막기 위한 장치 역시 설치가 쉽지 않다.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형 화물차와 버스에 ‘차로이탈경보장치(LDWS)’와 자동긴급제동장치 등을 의무 장착케하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같은해 12월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교통안전법’으로 수정됐고 사로이탈경보장치 하나만 의무장착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비용문제였다.  
중앙일보는 “미국이나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첨단운전보조장치 의무 장착을 제도화한 국가에서는 차로이탈 경보장치와 자동긴급제동장치 등을 함께 장착하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유럽 국가들의 도로상황을 확인했다. 프랑스는 4시간 30분 이상 연속 운전을 할 수 없고 그 사인 45분을 반드시 쉬어야 한다. 승객들이 휴게실에서 10분 만에 볼일을 마쳤지만 긴 시간을 기다린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기자가 ‘조금만 미리 출발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휴식시간은 모두 기록됐다. 미국도 의무휴식제도를 엄격하게 지킨다고 한다. 버스는 10시간, 화물차는 11시간 연속 운전 후 각각 최소 8시간, 10시간을 쉬어야 한다.
▲ 11일 경향신문 1면
▲ 11일 경향신문 1면
집배원들도 ‘살인노동’
경향신문은 1면과 2면에서 집배원들의 살인적인 노동현실에 대해 다뤘다. 지난 6일 경기 안양시 안양우체국 소속 21년차 집배원 원아무개씨는 ‘오늘은 일을 못 나가겠다’며 연가를 냈고, 오전 11시경 안양우체국 앞에서 음료수병에 든 인화성물질을 자신의 몸에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전신에 2,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지난 8일 숨을 거뒀다. 한 동료는 경향신문에 “나 역시 너무 힘들었던 탓에 그가 자살할 거란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로가 만든 참극이었다.
경향신문이 전한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원씨가 일하는 안양 지역은 최근 신도시 개발 등으로 물량이 급증해 안양우체국은 대표적으로 집배원 부족 우체국으로 꼽혔다. 그는 새벽 4시 반에 일하러 가 밤 10시 반에 퇴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집배원 사망사고는 지난 5년간 75건, 올해만 12건이 발생했다. 자살은 원씨가 다섯 번째다. 주된 원인은 과로. 사회진보연대노동자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집배원 초과근로 실태조사’에 따르면 집배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5.9시간, 연평균 노동시간 2888.5시간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우정사업본부는 지난달 노동여건 개선책을 내놓고 주 52시간 초과 노동이 이뤄지는 일부 관서에 2018년까지 인력 100명을 충원하기로 했고, 안양우체국에도 위탁집배원 2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구인에 차질을 빚으며 현재까지고 증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최저임금, 1만원 몇 년 뒤로 미루자? 
최저임금도 노동문제의 중요한 쟁점이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최저임금 결정 법정시간인 지난달 29일을 넘겼고 최종 마지노선인 오는 16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노동계는 올해 최저임금 6470원보다 54.6%오른 1만원을 주장하지만 사용자 측은 2.4%(155원) 인상한 6625원을 제시했다. 
▲ 11일 한겨레 칼럼
▲ 11일 한겨레 칼럼
이런 가운데 한겨레에 최저임금 인상이 자영업자·중소기업들에게 부담이 되니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늦추자는 주장의 칼럼이 실렸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겨레 칼럼을 통해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나 중소기업들에 큰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최저임금 1만원을 몇 년 늦추는 대신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물론 정부는 카드수수료 인하 등의 지원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가맹점업계의 불공정 관행과 임대료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도 추진되고 있지만 이런 조처들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은 약자들끼리의 갈등만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것에 대해 장단점을 계속 나열하다가 “최저임금 인상을 생산성이 낮은 산업들을 구조조정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세심한 정책수단들도 요구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며 최저임금 1만원을 늦추자는 주장을 하면서도 이 교수는 “최저임금 1만원 논란이 단지 얼마를 더 올리느냐 누가 힘들어지느냐를 넘어 경제구조의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로 발전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최저임금 1만원에 대해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1만원 달성을 위한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최저임금은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이라며 “1만원 정도는 돼야 주 40시간 노동 기준으로 월 소득이 209만원에 이르러 1인 가구 노동자 표준 생계비(월 215만원)에 근접한다”고 했다. 대선 후보들도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공약으로 내건 만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고 이 신문은 봤다.  
경향신문은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르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지원책을 당장 마련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소상공인들의 몫을 채가는 프랜차이즈 본사나 대기업의 ‘갑질’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상공인vs노동자, 약자들끼리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프랜차이즈·대기업과의 관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경향신문은 “그러나 정부의 지원에도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청년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정페이’로 연명하려는 사업장은 정리하는 편이 낫다”며 “사회적 안전망을 우선 확충한 뒤 최저임금 1만원 한국 사회 산업구조를 개혁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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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독창적인 고대 문명이 탄생하였다

한반도 문명의 뿌리와 성격
  •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 승인 2017.07.11 11:01
  • 댓글 0
신석기 농업혁명이 고대문명 창조의 어머니라면, 청동기 문화는 고대문명 창조의 아버지이다.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곧 청동기 문명이라고도 한다. 청동기 문화에 기초해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 지배도구로서 국가권력이 형성되면서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3000년경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전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 기원전 2000년경 황하 유역의 문명이 인류 4대 문명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들 인류 문명 발상지는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 문화, 고대 국가, 문자의 발명 등의 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독자적인 고대문명이 창조된 지역들이다. 물론 이집트 경우처럼 청동기 문화가 성립하기 이전 신석기 시대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청동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4대 문명에서 주목할 점은 중국의 경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약 1000년 후에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유럽지역보다 1000여년 늦게 고대문명이 형성되었는가? 바로 이 점에서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고대 국가의 성립시기가 주목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밝히는 문제는 한반도 고대문명의 탄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된다. 한반도에서 언제 고대문명이 발생했으며,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는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외래에서 유입된 수입문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원전 13세기경에 시작된 카라수크 청동기 문화 전파론, 스키타이 청동기설, 오르도스 청동기설, 은나라 청동기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것 하나 청동기 문화의 이동경로나 유적 유물적 증거들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 외래 유립론들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이 올라감에 따라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어 아직 확정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기원전 12~13세기를 훨씬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문화와 공존하면서 점차 본격화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교과서는 가장 보수적으로 연대를 설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상한은 적어도 기원전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기원전 20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다수 발굴되고 있어, 한반도 청동기 시대 개시 연대는 갈수록 올라갈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남 영암군 장천리에 있는 두 곳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수집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그 연대가 각각 기원전 27세기,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으며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5기의 고인돌 유적에서 채취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다. 또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동북지역(만주)의 청동기 문화도 기원전 20세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결정적으로는 북한에서 최근 청동기 유적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35세기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외부유입론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창조된 독창적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중국이나 시베리아지역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 앞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데,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과는 전혀 다른 문화양태에 속한다.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형이지만 비파형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분리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비파형 동검은 다른 지역의 동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파형태의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어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유물로는 고인돌,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팽이형토기, 미송리형 토기 등이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독창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점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다른 지역에서 창조되어 전래된 수입문화가 아니라 이 땅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주적 문화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즉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이룩한 옛 유형의 한반도인(현대 한반도인의 직계 선조)들이 이 땅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한 자주문화이다.
▲ 비파형 동검(왼쪽) 동주식 동검(오른쪽)
그렇다면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이전까지는 현재 중국 동북지역(요동반도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요령식 동검으로도 불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에서 대동강 주변의 청동기 유적유물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 이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원해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지유물은 팽이그릇(팽이형 민무늬 토기)이다. 이 그릇은 생긴 모양이 팽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대동강 유역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남쪽 한계선은 한강 하류 유역이다. 이 그릇은 신석기 시대의 밑창이 뾰족한 새김(빗살)무늬 그릇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릇은 대동강 일대의 고인돌에서도 자주 나오며, 대동강 일대의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는 반드시 출토된다. 이렇게 볼 때 팽이그릇을 남긴 집터의 주민들이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를 팽이형토기 문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팽이형 토기 문화의 분포영역은 남쪽으로는 한강 하류지역에 이르고, 북서쪽으로는 청천강 일대에 이른다. 이러한 분포지역은 고조선 초기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팽이형 토기(질그릇)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질그릇)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 팽이형 토기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된 시점은 언제일까? 북한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동강 유역의 팽이형 토기 문화는 1기~4기로 나뉜다. 1기는 고조선 건국 이전 팽이그릇만 쓴 청동기 시대이며, 2기는 고조선 건국 이후 팽이그릇과 미송리형 토기를 함께 쓴 시기이며, 3기는 팽이형 토기와 묵방리형 토기가 함께 나오며, 화독이 2개인 집터를 사용하던 시기이며, 4기는 집터에 주춧돌을 놓기 시작한 시기이다. 팽이형 토기 문화의 절대연대는 비파형 창끝이 나온 표대유적 집터에 의해 알 수 있다.이 유적 10호 집터에서 나온 묵방리형 단지를 열형광법으로 측정한 결과 4450±380년 전(측정 당시로부터)으로 나왔다. 이것은 비파형 창끝이 나온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의 절대연대(기원전 26세기)와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묵방리형 단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팽이형 토기 3기는 대체로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 속한다. 이 연대를 근거로 하면 미송리형 단지가 나온 2기는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로, 그보다 더 이른 팽이형 토기 문화 1기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이러한 편년은 팽이형 토기 문화 1기에 속하는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8호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를 핵분열흔적법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5238±777년전(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나온 것으로도 증명된다. 또한 청동조각이 나온 성천군 용산리 1호 고인돌 무덤의 경우 뼈를 시료로 전자스핀공명법(ESR)으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69±426(기원전 31세기)이며, 핵분열 흔적법(FT)으로 출토된 질그릇을 시료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37±853(기원전 31세기)로 나왔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동강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원전 35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이는 신석기 시대 이래 우리겨레가 살았던 한반도와 요동반도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당되어,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대동강 지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후반에 시작된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세기 초 고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는 전 지역이 청동기 시대로 돌입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시작됐다. 중국은 기원전 20세기 초 하나라 건국과 함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훨씬 뒤쳐진다.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경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겨레 청동기 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문화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외부에서 유입된 수입문화, 모방문화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겨레의 창조적 지혜와 힘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토착문화라는 것을 실증해 준다.
한반도 문명의 탄생과정
인류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라 할 때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항구적 정착생활, 사회정치조직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통한 농업과 수공업의 분업 체계의 형성, 잉여생산물 축적, 계급의 발생을 통한 계급사회로의 진입,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서 고대국가의 탄생의 과정을 거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농경문화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살펴봤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고대문명 탄생의 전제조건들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한반도에서 계급의 형성과 고대 국가 성립과정을 밝히게 되면 한반도 고대문명 탄생과정의 비밀이 풀리게 된다.
한반도에서 계급이 언제 발생했을까? 계급의 발생은 신석기 농업혁명의 결과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발생하고, 사적 소유가 발생한 역사적 조건과 맞물려 이루어지며, 그것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출발과 함께 한다.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은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생산물이 증대됨에 따라 잉여생산물을 비축할 수 있는 대형 질그릇이 필요했을 때 발생하며, 청동기의 발명과 더불어 확고히 고착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과정이 진행된 것은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초기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전반기에 이르러 농업생산이 증대되어 잉여생산물을 축적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신석기 시대 유적인 남경 유적 31호 집터에서 높이 84cm나 되는 독을 비롯해 낟알을 담아두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그릇이 10여개 나온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질그릇의 제작은 가내 수공업 형태로는 만들 수 없으며, 전문 수공업자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즉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에서 예를 든 남경유적 31호 집터에서 질그릇이 120개나 쏟아져 나온 사실이 이를 방증해 준다.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초보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수공업은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 분야로서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게 되었다. 청동기란 원래 전문적인 수공업자에 의해서밖에 생산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더 필요치 않다.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교역도 함께 발전해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 순수 팽이그릇 집터에서 돌돈과 같은 원시 화폐가 출현했다. 이러한 과정은 원시공동체적인 사회관계를 붕괴시킨 객관적 조건으로 되었다.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발전에 따라 가족 형태도 달라졌으며 사회관계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발생했다. 생산의 기본단위가 가족농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가족형태가 지배했으며 사회관계 역시 모계 씨족공동체 사회로부터 부계 씨족 제도가 확립되었다. 한편 공동체적 경리도 점차 촌락공동체(부가장적 공동체)로 바뀌었다. 이후 생산이 더욱 발전하고, 사유재산이 발생하였는데, 사유재산의 발생과 발전은 곧 촌락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혈연적 유대에서 벗어난 촌락공동체(마을공동체)에서는 집과 텃밭은 개별 가족이 소유하고 농경지와 벌목지 산림 같은 것은 공동소유로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촌락공동체에서 재부의 축적은 집단의 공동경리와 종교 행사 등을 주관한 족장(추장)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족장을 중심으로 한 그 친족들은 그들이 차지한 특권을 이용해 공동체 소유의 토지를 자신들의 사적 토지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소유가 발생했다. 사적 소유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생산수단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생기게 하였다. 생산수단에 대한 이러한 소유에서의 차이는 빈부의 차이를 낳게 되었고, 재산상 불평등을 낳았고, 그리고 사회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분화되었으며, 그 결과 계급이 발생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노예 소유자와 노예라는 적대되는 계급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35세기경이다. 이는 기원전 31세기에 해당되는 용산리 순장 고인돌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 고인돌 무덤에 순장된 자들은 노예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고인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노예 노동이 사역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용산리 고인돌
결국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대동강 일대의 종족 연합체 내에서는 계급관계가 형성되어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과 그것을 갖지 못한 계급이 확고히 갈라지게 되었다.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권력과 재부를 독점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부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이웃 종족들과의 전쟁을 빈번히 벌였다. 기원전 400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는 것은 금탄리 유적과 남경 유적을 비롯해 불에 탄 집터들이 뚜렷이 보여준다.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에 위치한 금탄리 유적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 2층은 신석기 유적이며, 3층은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인데,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에서 불에 탄 집터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또한 이 시기 발굴된 집터에서 그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뿌리나루 활촉, 단검을 비롯한 전투용 무기들이 다수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대동강 유역일대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과 교역관계의 발생 발전, 사적 소유의 발생과 계급분화의 진행, 혈연공동체의 붕괴와 지역공동체의 형성 등의 과정이 진행됨으로써 고대 국가 형성의 역사적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와 함께 빈번한 종족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전쟁시대를 끝낼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강력한 힘을 갖춘 국가체제에 대한 시대적 열망이 높아져 갔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제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기원전 30세기 초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국가인 단군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이 땅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문명이 창조되었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87년 6월항쟁 양심수 전원석방 역사 재현해야 진정한 촛불혁명

87년 6월항쟁 양심수 전원석방 역사 재현해야 진정한 촛불혁명
공동취재단 
기사입력: 2017/07/11 [01: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07.08 광화문에서 진행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의 발언 동영상]


▲ 8일(토) 저녘 광화문에서 진행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     © 양심수후원회


치열했던 87년 6월항쟁으로 분출된 민주주의 열망을 모아 88년 12월 양심수 전원석방을 이루어낸 역사가 있다. 30여년 전의 일이다. 민주주의 탈을 쓴 노태우정권이었지만 결국 그도 강력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구속된 모든 시국사범과 양심수 전원석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6월항쟁 못지 않은 뜨거운 국민들의 열망이 분출했던 2017년 촛불혁명! 새 정부도 들어섰지만 아직도 이땅 감옥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정치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수백명의 양심수들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옥방 찜통 더위와 싸우며 신념과 양심을 지켜 싸우고 있다. 

그 양심수 전원석방을 이루어내기 위한 본격적인 투쟁의 봉화가 광화문 광장에서 타올랐다.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가 7월 8일(토) 저녘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를 거행한 것이다.

이 행사를 통해 민가협, 민가협양심수후원회원들과 사회진보와 민주주의, 통일 위해 헌신해 온 모든 인사, 단체들이 근 한 달여 진행한 ‘양심수석방 보라색엽서 보내기’ 실천을 총화하면서 민주주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할 태세를 가다듬었다. 

특히 민중연합당 당원들은 ‘양심수석방 보라색엽서 보내기’ 실천을 성과 있게 집중시키는 1차 마감과 함께 1천여 명이 참가하는 촛불퍼포먼스로 ‘양심수석방문화제’를 힘있게 열었다. 

민가협 그리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 ‘30여 년 전 양심수 전원석방의 역사를 반드시 재현해 내야한다’고 못 박았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중에도 2천여 명의 양심들은 근 4시간의 ‘양심수석방문화제’를 지키고 빛냈다. 줄기차게 진행된 공연의 빛과 소리, 노래와 춤사위로 우리가 촛불이고 양심수들이 촛불이라는 것을 강력히 발산하였다. 우리를, 양심수를 가두고서는 그 누구도 촛불정부라고 말할 수 없다고 외쳤다.

▲ 민간협어머니들과 함께 단상에 오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양심수 전원석방을 반드시 이루어내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 양심수후원회

관련하여 권오헌 명예회장은 명쾌하게 설파했다.

“양심수 왜 석방해야 되는가? 간단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양심수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수는 자기 양심에 따라 활동한 사람입니다. 개인 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의 선을 위해서 투쟁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 자기가 하는 일을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속을 두려워  하지 않고 불이익을 감내하면서 활동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 그 시대의, 당대의 의인들이기 때문에 석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가 ‘사람이 먼저’, ‘국민이 주인’이라고 한다면 양심수는 한마디로 사람 중의 사람이며 국민 중의 국민이라는 주장이었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공동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촛불정권이 ‘적폐세력을 아무리 단호하게 처벌해도 양심수가 석방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살아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양심수석방 여부는 진짜 민주주의와 가짜 민주주의, 진짜 촛불정권과 가짜 촛불정권을 가르는 시금석이라는 선언이었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가슴이 타는지 목 메인 음성을 혼신을 다해 토해내며 강조했다.

“양심수 문제는 양심수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명사회라면 단 한 사람의 양심수도 있어선 안 된다.며 대만이 1987년 국가보안법을 폐지했을 때 중국의 공산당을 지지하고 중국의 통일을 주장하다 구속되어 형을 살던 단 한 사람의 양심수가 마지막으로 석방되었다.”

단 한 사람의 양심수라도 옥에 갇혀 있는 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결코 민주주의 인권국이라 말할 수 없다는 일갈이었다.

장장 수십년, 이 땅의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온 권오헌 명예회장은 사실 지금 건강이 위중한 상태다.
권오헌 회장은 발언을 마치며 함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자고 제안하였고 2,000여 참가자들은 뜨거운 목소리로 노래를 함께 부르며 권오헌 명예회장의 뜻을 비상한 각오로 받아 안고 단 한 명의 양심수마저 모두 석방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 승리 확신이 어린 힘찬 노래 소리는 뜨거운 여름밤 광화문 네거리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     © 양심수후원회


*참고자료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

제안자
권영길(민주노총 지도위원) 권오헌(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김상근(경기도 교육연구원 이사장)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도 법(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문경식(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석운(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박순경( 615공동실천 남측위원회 전 상임 고문)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 법 안(조계종 전 중앙총회 부회장) 이해동(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 위원장) 이창복(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정이(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부산본부 상임대표) 정연순(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진우(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센터소장) 조영건(구속노동자 후원회장) 조순덕(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의장) 지 선(조계종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청 화(조계종 전 교육위원장) 최병모(전 민변 회장) 한충목(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함세웅(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공동추진위원장
함세웅(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오종렬(5.18민족통일학교이사장), 권오헌(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순덕(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조영건(구속노동자 후원회 회장), 이창복(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상임대표의장), 김상근(한국기독교 교회 협의회 비상시국 대책위원회 위원장), 최병모(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회장), 이해동(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배은심(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 회장), 정동익(사월혁명회 상임의장), 박순경(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전상임고문), 박중기(추모연대 상임고문), 김정숙(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감사), 문정현(신부), 권영길(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문규현(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윤한탁(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명예의장), 이정이(615남측위부산본부상임대표), 임기란(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명예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장남수(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정혜열(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조헌정(전태일재단 이사장), 안학섭(통일광장 회원), 권낙기(통일광장 대표), 한상렬(한국진보연대 상임 고문), 법 안(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청 화(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도 법(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지 선(조계종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시 공(실천불교승가회 상임대표), 효 진(실천불교승가회 집행위원장), 퇴 휴(전 조계종 교육부장), 일 문(실천불교승가회 공동대표), 혜 조(청련사 주지), 재 범(인월사 주지), 정진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김성복(NCCK인권센터 이사), 황필규(NCCK인권센터 서기 이사), 이 적(민통선 평화교회), 박철(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장), 강은숙(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총무), 유시경(성공회교무원장), 최재철(천주교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한만삼(천주교 수원교구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나승구(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이영선(천주교 광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권오준(천주교 춘천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나핵집(한국기독교장로회 열림교회), 남재영(기독교대한감리교 빈들교회), 박승렬(한국기독교장로회 한우리교회), 강해윤(원불교 봉도수위단원), 김선명(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대위집행위장), 김성근(원불교 상계교당), 오광선(원불교 궁동교당), 정상덕(전 원불교 개벽교무단 회장), 임진택(연출가), 신경림(시인), 윤민석(음악가),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심재환(통일의 길 공동대표), 김주영(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만(한국노총 상임지도위원), 이호윤(전국민주동문회 상임대표), 장 건(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행동 상임대표), 정연순(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한상권(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대표), 황인성(수원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김희선(여성독립운동단체기념사업회 회장), 이강실(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손미희(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권오희(615남측위여성본부상임대표), 김성은(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김영순(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안김정애(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최진미(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김한성(615남측위학술본부장/연세대교수), 장임원(민교협초대의장/중앙대명예교수), 김세균(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김애영(한신대 교수), 송주명(한신대 교수), 홍성학(교수노동조합위원장/충북과학대교수), 이규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정현찬(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 문경식(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노수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부의장), 송무호(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 대표), 박석운(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한충목(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강병기(민중의 꿈 상임대표), 김영호(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순애(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윤기진(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의장), 윤택근(민주노동자 전국회의 의장), 정종성(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 김 식(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 (이상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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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때문에 묻힐 뻔했던 세계 최초 ‘한국인 위안부’ 영상

박근혜 정부가 외면했던 위안부 할머니, 서울시가 손을 잡아주다
임병도 | 2017-07-11 08:39:3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7월 5일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가 공개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영상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영상이 73년 만에 최초로 발굴됐습니다. 지난 7월 5일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있던 한국인 위안부 영상을 찾아내 공개했습니다.
한국인 위안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당시 미‧중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164통신대 사진대 배속 사진병이 1944년 9월 8일 직후 촬영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해왔습니다.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이하 서울대 연구팀)는 2년여간의 끈질긴 발굴 조사 끝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자료를 찾아내, 73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개된 위안부 영상’
▲기존에 공개됐던 일본군 위안부 사진과 이번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동일했다.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그동안 한국인 위안부 관련 증언과 문서, 사진 등이 공개된 적은 있었지만, 실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입니다.
영상에는 민가 건물과 중국군,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1944년 9월 7일 미‧중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했던 송산을 점령합니다. 이때 일본군 위안부로 있던 24명 중 10명이 생존해, 미‧중연합군의 포로로 잡혔습니다. 영상은 미‧중연합군 점령 다음 날인 9월 8일 촬영된 것입니다.
영상 속 여성과 대화하는 군인은 미‧중연합군 산하 제8군사령부 참모장교 신카이 대위(중국군 장교)로 추정됩니다. 나머지 여성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상 속 여성이 한국군 위안부라고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2000년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자신이라고 밝혔던 사진과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송산에서 쿤밍 포로수용소로 이동해 작성된 포로 심문 보고서를 보면,포로 명단 가운데 고(故) 박영심 할머니의 이름도 명확히 표기돼 있었습니다.
위안부 관련 문서가 대부분 일본 정부, 군의 공문서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굴한 이 영상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후 묻힐 뻔했던 영상’
▲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각종 위안부 관련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거나 축소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증거였지만, 하마터면 공개되지 못하고 묻힐 뻔했습니다.
영상을 발굴한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미국 자료 조사 사업을 위해 여성가족부의 예산을 받아 서울대 인권센터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지난해 1월 (여가부 예산지원이) 돌연 취소됐다”라며 “12·28 합의 직후였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2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문미옥 의원도 여가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한 단체에 대해 국고보조금 지원을 중단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강 교수는 “12·28 합의(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여러 압력이 있어 어려웠는데 서울시에서 지난해부터 후원해 결실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한국인 위안부 영상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포착하고 2년 전부터 추적했습니다. 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수백 통의 필름을 일일이 확인해 이번 영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오랜 시간 발굴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외면했던 위안부 할머니, 서울시가 손을 잡아주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리는 추모공원인 ‘기억의 터’ 제막식. 박원순 서울시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했다. ⓒ서울시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각종 예산을 대폭 축소하거나 제외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이 나섰습니다.
앞서 말했던 영상도 서울시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의 하나로 발굴됐습니다. 서울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추모하는 공원인 ‘기억의 터’도 조성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안정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사업’ 예산 삭감을 하자, 서울시가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 1일 박원순 서울 시장은 지난해 스웨덴 ‘예테보리 지속가능발전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 5천만 원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캠페인에 기부했습니다. 박 시장은 1990년대 초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지원 활동에 참여했는데,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서 한국 측 검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연구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갑자기 끊긴 상태에서 정부가 하지 않으면 서울시라도 지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대 연구팀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 오늘과 같은 결실을 얻게 됐다”며 “이러한 불행한 역사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자원을 집중해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고통받았던 국민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일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지난 정부에서는 하지 못해 서울시가 나섰지만, 이제라도 정부와 서울시가 함께 꼭 이룩해야 할 역사적 소명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0 

피고인 없는 무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17.07.10 22:05l최종 업데이트 17.07.10 22:05l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 진실의힘 제공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2017년 6월 29일 오전 10시 20분,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재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425호 법정. 법정을 가득 메운 가족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었다. 법정에 앉아 있어야 할 피고인들 자리에는 아들들이 앉아있었다. 

판사는 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을 일일이 지적하며, 그것이 과연 공소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34년을 기다려온 순간. 판사의 주문은 짧았다.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아버지, 들으셨지요!" 

피고인석 최봉준(최을호씨의 아들)씨가 외쳤다. 그 순간 방청석을 메운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오래 참아왔던 속울음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부둥켜 안으며 "살아만 계셨더라면..." 눈물바람이었다. 

그렇다. 지금 이 법정에 서서 마땅히 법원의 사과를 들어야 할 세 명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최을호씨는 마지막까지 간첩이 아니라고 외쳤지만, 끝내 사형 집행을 당했다. 최낙교씨는 서울지검 정형근 검사의 공소제기 후 구치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으나 경찰의 집요한 보안 관찰 감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피고인 없는 슬픈 재심, 무죄 판결.

그날 법정에서 판사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국가가 범한 과오. 1982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고문해서 간첩단으로 조작하고, 서울지검 공안검사 정형근이 적극 동조해서 간첩으로 기소한 사건. 재판 내내 고문을 당해서 허위로 자백했을 뿐,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한 피고인들의 주장을 외면한 채, 이근안의 수사기록과 정형근의 수사 그대로 판결문이 작성된 사건. 이른바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이다. 

그 일은 1982년 8월,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작은 시골 마을, 김제군 진봉면 고사마을에서 벌어졌다. 해마다 이 마을에서는 8.15를 기념해 동네 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전날 밤 동네 어른 최을호씨가 낯선 사람들을 따라 갔는데 밤이 되고 다음 날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온 마을을 뒤졌다. 진봉지서에 행방불명 신고를 했다. 마을 이장으로 동네의 신임을 받아온 조카 최낙전씨도 숙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최낙전씨의 형 최낙교씨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 조카들도 8월 22일 아침을 기해 사라졌다. 몇 달 뒤. 그들은 '간첩죄'로 기소돼 법정에 세워졌다. 

치안본부 대공분실 이근안의 '수사기록'

이들을 납치하듯 끌고 간 이들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속해있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남영동 분실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9월 25일까지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고문수사를 자행했다. 

수사관들은 이들의 '약점'을 이용했다. 약점은 1958년에 발생한, 도저히 피해갈 수도, 어찌해볼 수도 없었던 사건이었다. 최낙교씨와 최낙전씨는 형제이고, 최을호씨는 그들의 숙부. 일찍 부친을 여읜 두 형제는 숙부와 함께 큰 집에 모여 살았다. 1958년 4월, 6.25전쟁 당시 헤어졌던 숙부 최규인씨가 김제 고사리 최을호씨를 찾아왔다.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안부를 물었다. 1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온 최규인씨는 최을호씨에게 좋은 일자리를 봐뒀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최규인씨의 말과 달리 북한이었다. 돌아올 방법도 없어서 20일간 강제로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귀향했다. 최을호씨는 "북한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렀다. 7년이 지난 1966년 7월, 최을호씨 가족은 이사를 하고 최낙전씨가 살게 된 그 집에 무장한 남성 2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최을호씨를 찾았고, 최을호씨를 겁박해 강제로 이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20일 이후 다시 고향집으로 데려다 줬다. 최을호씨는 이번에도 두려운 나머지 신고하지 못했고, 이후 북한에서 더 이상 연락이 없자 그렇게 무관하게 살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농사일에 전념해왔다. 

최을호씨가 북한과 접촉한 것은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발생한 일이었다. 1982년 8월 이근안이 이들을 체포한 시점에는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간 일이 됐다. 하지만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은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이들을 고문했다. 이들이 체포되기 전까지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자백.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이 작성한 수사기록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은 1982년 9월 25일이고, 최을호씨의 1회 진술서 작성일은 9월 22일이다. 진술서는 모두 52쪽인데, 1958년 최규인씨의 첫 남파 때부터 1977년 8월까지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있다. 128장에 달하는 1회 피신 작성일은 9월 23일, 110장에 달하는 2회 피신조서 작성일도 9월 23일이다. 

묻고 답하는 방식의 신문조서가 23일 하루 동안 무려 238장이나 작성된 것이다. 최낙교·최낙전씨 역시 1회 진술서, 피신조서에서 범죄사실을 전면 자백하고 있으며, 범죄 장소 약도까지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수사기록 어디에도 혐의를 부인하는 조서는 없다. 간첩활동을 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은 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20년 이전에 벌어진 일들까지 상세하게 진술해 200장이 넘는 조서를 하루에 모두 작성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자발적으로 작성한 진술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을호씨는 43일간, 최낙전씨와 최낙교씨는 35일간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고문 수사를 당한 결과라는 뜻이다. 

"심문 받을 때의 그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며 몸서리쳐지는 것은 배지도 않은 애를 내놓으라 했을 때 저는 이미 제 자신을 포기했던 것이며 뱃가죽에는 지금 그 흔적이 역연하게 남아있습니다." - (최낙전씨 상고이유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간 나는 그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커다란 혁대 같은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엄지 발가락에 전기선을 묶었고, 철제 침대 옆에 있는 스위치로 전기를 넣었습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소리를 질러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안에 커다란 주전자로 물을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니까, 거구의 수사관이 내 몸 위에 올라타더니 배를 팍 눌러댔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 진술서)

'거구의 수사관'은 이근안이었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이 가족을 영장도 없이 40여 일 넘게 장기 감금하고, 고문수사를 했던 것은 하나의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최규인으로부터 포섭돼 체포될 때까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무인포스트를 활용하여 무전을 보내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 결과는? 성공이었다. 수사관들은 가족관계를 이용해서 더욱 압박했다. 딸들을 데려와서 조사를 하고, 툭하면 가족을 다 잡아들이겠다고 협박했다. 

"제가 제일 겁이 났던 일은 옆방에서 들리는 위협과 신음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큰 어머니(서순녀)가 바로 옆방에 있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막 소리 지르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너 하나쯤 죽어 나가도 우리는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가 내 방까지 크게 들렸습니다." - (최을호 딸 최명자 진술서) 

고문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서로 듣게 하고,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조카가 죽는다고 협박하면서 그들은 원하는 각본을 만들어나갔다. 조카가 고문당하며 지르는 소리는 숙부에게 고문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딸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원하는 대로 자백을 '해줘야 했다.' 수사관들의 고문과 협박, 그것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하는 진술에 이르러야 고문은 잠시 멈췄다. 글씨를 못 썼던 이한테는 보고 베껴 쓰라고 했다. 그림 그리듯이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해서 간첩단 사건은 만들어졌다. 

모두 다 아는 국가기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해 누설한 간첩. 국가기밀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아도 그것의 실체를 알고 나면 황당하다. 이들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기밀은 최을호씨가 살던 고사마을의 심포, 거전, 망해초소 현황, 최낙교씨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근처 황산 미군 미사일 기지 그리고 최낙전씨가 예비군훈련 받으러 갔던 고사초소 대간첩 비상훈련과 초소 현황이다. 

굳이 탐지할 의도가 없이도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관공서들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 사실을 알고 나면 헛웃음이 나올 내용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성립하기 어려운 형용모순의 대법원 판례 때문이었다. 
 수사기록 628쪽. 최을호씨, 최낙교씨가 탐지했다는 해안초소.
▲  수사기록 628쪽. 최을호씨, 최낙교씨가 탐지했다는 해안초소.
ⓒ 진실의힘 제공

국가기밀이 된 초소 현황을 보면 "초소에 경찰관 또는 전투경찰 수명이 배치되어 있고 선박과 통행인을 감시한다"는 요지다. 해안에 초소를 설치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해안을 경비하고 통행 선박과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자명한 이야기가 국가기밀로 둔갑했다. 고사초소와 망해초소는 최을호와 최낙전 집 뒤에 있는 산 넘어 있고 심포초소와 거전초소도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동네 아이들은 초소에서 놀았고, 어른들은 조개 잡으러 나가는 길에 반드시 그곳을 들르게 돼 있어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사실에는 수도 없이 초소 이야기가 나온다. 20년 넘도록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이들이, 20년 동안 해안초소 현황만 반복적으로 탐지했다는 설정 자체가 어설프다. 

공작금 "한화 1000원권 500매" 

간첩사건에서 공작금은 간첩활동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가 된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공작금이 등장한다. 최을호씨는 남영동에서 작성한 진술서에서 1966년 입북해 공작금으로 "한화 50만 원, 즉 1000원권으로 500매"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그 돈 가운데 일부를 최낙교에게 공작금으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최낙교씨의 진술서.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최낙교씨의 진술서.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진실의힘 제공

최낙교씨 역시 최을호씨한테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1000원권 지폐를 최초 발행한 때는 1975년 8월 14일이다(한국은행 누리집, 화폐연대표). 2차 입북에서 돌아온 최을호씨가 최낙교씨에게 '공작금'을 줬다는 1966년 당시엔 한국은행 1000원권 화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최을호씨와 최낙교씨는 자신에게 불리한 허위의 사실을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근안이 이 사건을 수사한 1982년에는 1000원권 지폐가 있었다. 이근안은 화폐가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오직 수사 당시 존재했던 화폐만 알고 있었기에 착오를 일으켜 가짜 증거를 만든 것이었다. 
 한국은행 누리집에 나와 있는 화폐연대표. 천원권은 1975년 8월에 발행됐다.
▲  한국은행 누리집에 나와 있는 화폐연대표. 천원권은 1975년 8월에 발행됐다.
ⓒ 한국은행 누리집 갈무리

이근안이 '발견'한 최낙교의 무인포스트

'무인포스트'도 공작금처럼 간첩사건에서 공식처럼 등장한다. '북한에서 간첩에게 숫자로 된 지령방송을 내보내면 간첩은 암호문을 가지고 난수를 해독한다. 그리고 그 지시사항에 따른 내용을 난수로 다시 만들어 미리 약정된 무인포스트에 파 묻는다.' 이처럼 무인포스트는 간첩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열쇠라 할 수 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무인포스트가 당연히 등장했다. 

 : "그러면 피의자가 3차 전문지령을 받고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최낙교) : "67.8. 일자 불상... 3차 전문지령에 따라 67.8. 하순 일자 불상 20:30경 집에서 '동조자 1명 포섭 중임'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보고용(발신용) 난수로 변신암호로 작성(약 15조로 기억)하여 비닐로 싸서 준비한 페니실린병에 삽입 준비하여 약정 장소인 동리 뒷산 국사봉 정상에서 남쪽 약 10지점의 최우호 묘비석 뒤 중앙에서 약 10cm 떨어진 지점에 약 10cm 깊이에 묻고 그 위에 표지석을 올려놓아 북송케 한 후 돌아왔으며..."
문 : "그러면 피의자는 무인포스트를 통해 보고한 것이 북괴에 전달되었는지 확인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다음 4차 전문지령 시 확인되었습니다." 
- 수사기록 1016~1018, 최낙교 피의자신문조서

이 조서만 살펴보면 최낙교씨는 명백한 간첩이다. 이근안이 작성한 실황조사서는 무인포스트로 삼은 '최우호 묘비석'의 위치와 사진까지 첨부돼 있었고, 직접 묘비의 크기를 재는 사진까지 있었다. 
 최낙교 무인포스트 실황조사서, 이근안이 실제 답사하여 조사하는 광경.
▲  최낙교 무인포스트 실황조사서, 이근안이 실제 답사하여 조사하는 광경.
ⓒ 진실의힘 제공

그런데 보안이 곧 생명인 간첩들이 바로 집 뒤에 있는 산에 무인포스트를 둔다? 게다가 실황조사서 사진을 보니 비석이 아주 깨끗했다. 1959년 5월 뒷산을 답사해서 묘비석을 무인포스트로 선정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보면, 1982년 이근안이 사진을 찍었던 묘비는 최소한 23년은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기에도 이끼 하나 없이 깨끗했다. 최우호씨 묘비를 찾아서 비석을 살펴봤다. 비석 맨 앞 부분에 "최우호가 이미 죽은 지 27년이 지났다"고 돼 있었고, 이 비석이 세워진 경위와 과정이 적혀 있었다. 최씨 족보를 찾아서 최우호씨 사망 년도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묘비석 맨 마지막 줄에 적혀있는 글귀. 묘비를 세운 시기가 적혀있어야 할 부분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중국에서 쓰던 고갑자(古甲子)였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가 고갑자와 대응관계를 이룬다. '강어'(强圄)는 음양오행을 뜻하는 천간(天干) 가운데 '정'(丁)을 뜻한다. '대황락'(大荒落)은 12지지(地支) 가운데 '사'(巳)를 뜻한다. 따라서 '강어대황락'(强圄大荒落)이란 '정사(丁巳)년이 되는 것이다. 1977년이다. '소춘'(小春)은 음력 10월을, '하완'(下浣)은 21일부터 말일까지를 뜻한다. 

결국 '强圄大荒落小春下浣'은 '1977년 음력 10월 하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낙교씨가 무인포스트로 정했다는 1959년은 물론이고 암호문을 매몰했다는 1967년에도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근안이 사건을 수사했던 1982년 사건 당시 이 비석이 있었다는 점이 열쇠다. 이 무인포스트는 이근안이 '발견'해서 간첩 활동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근안은 고갑자를 몰랐고, 그래서 우리는 이근안이 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우호씨의 묘비. 사진 왼쪽 상단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호씨가 죽은 시점은 1977년 10월 21일부터 말일 사이다.
▲  최우호씨의 묘비. 사진 왼쪽 상단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호씨가 죽은 시점은 1977년 10월 21일부터 말일 사이다.
ⓒ 진실의힘 제공

글이 길어졌다. 이근안의 수사기록은 피해자들이 흘린 피눈물의 흔적이다. 피해자들을 사형으로, 자살로 내몰았던 기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수사기록은 진실의 편린들을 꼼꼼히 담아내고 있었다. 

수사기록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의혹은 더욱 쌓여간다. 마치 허위로 만들어진 산더미 같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은 40여 일이 넘도록 고문으로 짜내고 맞춰나갔다. "24년 동안 암약해온" 간첩으로 만들었으니 제 아무리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이라도 거짓의 흔적만큼은 다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근안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그 수사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고 사실관계를 따져 묻게 될 것을. 
 공안검사 정형근(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오른쪽).
▲  공안검사 정형근(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오른쪽).
ⓒ 오마이뉴스

간첩 지령을 받아 무인포스트까지 설정하며 북한과 암호문을 주고 받았다고 이근안에게 '자백'한 최낙교씨. 그는 검찰로 송치된 이후 정형근 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이근안과 정형근. 2인의 이름은 공안수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들 아니겠는가. 정형근 검사는 이들이 40여 일 넘도록 남영동에서 불법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최낙교씨, 최낙전씨를 몰아붙였고, 심지어 남영동 수사관을 대질시키며 이근안의 수사를 동조했고 완성시켰다. 

"검사실에 들어갔더니, 최낙전 조카가 와 있었습니다. (중략) 낙전이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정형근 검사는 윽박지르면서 기록을 던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조금 후 낙교 조카를 불렀습니다. 낙교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중략) 검사실에 있는 어떤 사람이 우산대로 낙교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눈도 찌를 것처럼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를 불렀습니다. 나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기를 들고 '들어오세요' 그러더군요. 바로 나를 고문한 수사관 2명이 들어왔습니다. 나한테 같이 가자면서 진짜로 데리고 가려고 양팔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씨 진술서)

최낙교씨는 공소제기가 된 이후 수감 중이던 서대문구치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형근 검사는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으나 가족들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최낙교씨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남은 최을호씨와 최낙전씨는 피고인이 돼 법정에 서게됐다. 그리고 탄원서를 수 없이 법원에 제출했다. 강제로 이끌려 북한에 다녀온 뒤 신고하지 못한 잘못은 있겠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외면했다.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이 만든 의견서 그대로 공소장이 됐는데, 판결문은 공소장과 겉표지만 달랐다. 1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가면서 탄원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최을호 사형, 최낙전 15년형의 1심 판결은 대법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근안과 남영동의 불법감금, 고문수사는 간첩을 조작하는 데 필요조건이었다. 간첩 조작이 완성된 데는 검찰과 법원의 묵인 혹은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 27일, 최을호씨는 사형을 집행당했다. 그날 사형장에 입회했던 문장식 목사는 그가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아무런 간첩활동도 안했는데 간첩 누명 쓰고 공산주의자로 낙인 받아 죽는 것이 억울합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문장식 목사의 사형장 일기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에서 문 목사는 "애절하게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라고 그날을 기억했다. 

15년형을 선고받은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석방됐다. 그러나 경찰의 보안관찰법에 의한 집요한 감시가 그를 옥죄었다. 1991년 9월 30일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방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당시 경찰과 검찰이 어떻게 서로 동조하고 묵인하면서 평범한 일가족을 간첩으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판사와 검사 등 법률 기술자들이 법에 무지한 평범한 시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떠밀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공모로 인해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자녀들과 부인들은 '간첩'이라는 차가운 외면과 따돌림 속에서 피눈물로 살아가야 했다. 

34년 만에 무죄로 밝혀지고, 법원은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헌법에 보장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한 범법자로 낙인찍힌" 피고인들과 최낙교씨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일까. '무죄'라는 추상적인 꽃다발을 부여받은 억울한 죽음들은 이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고문조작에 개입한 수사관, 검사 등 그 어느 한 사람 처벌받지 않았다. 공소시효의 방패 뒤에 숨거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엉뚱하게 간첩으로 엮은 국가보안법은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았고, 대공 수사실은 그대로인 채 대상을 바꾼 수사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보안관찰은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은 가능한 것인가. 최을호, 최낙교, 최낙전... 그들의 슬픈 죽음은 지금 우리들에게 재발방지의 보증이라는 근본적인 숙제를 던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송소연님은 (재) 진실의힘 상임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