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5일 월요일

통일 베트남의 횡포, 붉은 라오스의 탄생


[유라시아 견문] 붉은 라오스 : 베트남의 서진(西進)
이병한 역사학자2015.06.16 07:49:26

1975 : 도미노

4월 30일, '사이공'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호치민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이공이 익숙하다. 이곳 사람들도 그렇다. 호치민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쓰인다. 일상과 유리된 이름이다. 사이공을 다시 찾은 것은 올해가 통일 4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을 지켜보고,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무더위 탓에 기념행사는 아침 7시부터 시작되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TV 생중계를 보는 만 못했다. 사전에 확인된 사람들로 참여가 제한되어 있었다. 주변으로 차량도 통제되고, 보행로마저 막아두었다. 하노이에서 총출동한 국가 지도자들이 사이공 시민들과는 아무런 교감도 없이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공보다는 하노이에 어울릴법한 각종 선전 포스터들만이 통일 40주년을 상기시켰다.

작년(2014년) 한 사진작가를 만난 일이 떠올랐다. 사이공 토박이였고, 1975년생이었다. '통일둥이'였다. 호치민 영묘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내뱉는 일성이 의외였다. 순 거짓말~이란다. 내심 놀랬다. 통일 이후에 학창 시절을 났을 텐데도, 북에 대한 감정이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공식 서사와는 다른 얘기들을 주변에서 일상에서 많이 들었던 탓이리라. 통일둥이가 마흔이 되도록 남북 간 마음의 통합은 여전히 멀었다.

실제로 1975년 4월 30일을 '통일'이 아니라 '병합'이라고 보는 견해가 여럿이다. 특히 남베트남 출신들의 회고록이 그렇다. 미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한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들의 처지와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호앙반안(Hoang van an)같은 예외적인 인물도 있다. 내가 읽었던 회고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경우였다. 그는 북베트남 출신이었다. 그것도 호치민의 최측근이었다. 초대 중국대사를 역임하며 북조선과 몽골 업무도 담당했다. 동아시아 통이었다. 그런 고위 인사가 1979년 통일 베트남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로 떠난 이들이 통일의 실상을 '병합'이라고 여겼다면, 호앙반안은 통일로 말미암아 베트남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친소파가 득세함으로써 중국과 적대하고 동남아시아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친중파'의 치우친 독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실상과 부합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서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1975년 이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1945~1975년의 '민족 해방 전쟁'이라는 베트남의 주류 서사를 답습하는 편이다. 물론 한국 현대사 최대의 오점 중 하나인 베트남전 참전과 양민 학살을 반성하는 일은 소중한 작업이다. 나라의 양심을 일깨우고 나라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접근이라는 점이 아쉽다. 정작 베트남에는 내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20세기를 꿰차기 위해서는 1975년 이후의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도차이나의 지평에서 1975~1989년의 궤적을 함께 살펴야 한다.

우선 도미노 이론부터 전혀 틀리지가 않았다. 사이공이 무너지자, 인도차이나 전체가 적화(赤化)되었다. 베트남이 통일되던 1975년, 캄보디아(4월)도, 라오스(12월)도 공산 국가가 들어섰다. 1972년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악수로 상징되는 탈냉전의 흐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류는 그 다음부터였다. 도미노 이후의 사태가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민족 해방 운동'의 상징이었던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10년이나 점령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 전쟁까지 벌였다. 자중지란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는 산산이 깨어졌다.

무엇보다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주체가 중국이 아니었다. 베트남이었다. 중국 위협론과 중국 봉쇄론에 입각해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중립주의'를 부추기는 편이었다. 아세안과 협력하여 베트남/인도차이나와 적대했다.

북조선이 신중국의 위성국이 아니었듯, 북베트남 또한 신중국의 괴뢰국이 아니었다. 커녕 매우 능동적이고 야심찬 역사의 주체였다. 본디 월남과 조선은 기질이 달랐다. 소중화에 자족하는 동방예의지국과는 달리, 월남은 남쪽의 중화 제국을 자처했다. 자그만 치 1000년 전 대당제국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 줄곧 그러했다.

하노이 근방에는 짱안(Trang An)이라는 아름다운 휴양지가 있다. 동양화풍의 절경을 감상하며 뱃놀이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그런데 알파벳을 지우면 '長安' 이라는 한자가 드러난다. 장안이 어디인가. 현재의 시안(西安)이다. 대당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즉, 대당제국이 무너지나 그 수도의 이름을 남쪽에다 옮겨다 둔 것이다.

그만큼 호방했다. 실로 월남은 1000년을 그치지 않고 제국 건설을 추진했다. 20세기도 다르지 않았다. 끝끝내 라오스인민공화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불교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1975년 12월, 20세기 최후의 공산 국가였다.

▲ 베트남 전쟁을 승리한 통일 베트남은 소련의 위성 국가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자를 자처했다. 베트남은 라오스를 20세기 최후의 공산 국가로 만들었다. ⓒtvN

인도차이나 : 국제주의와 제국주의

19세기부터 그랬다.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최초로 통일한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자 '문명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동남아시아의 유일하고 예외적인 유교 국가, 중화 문명 국가로서의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통일 이후에는 남쪽의 크메르, 서쪽의 라오스로 눈을 돌렸다. 양국을 '夷(오랑캐)'로 여기고 황제의 교화와 감화로써 개조하려 들었다.

1834년 크메르를 복속시킨 이가 민망 황제이다. 허나 대남제국은 대청제국과도 달랐다. 불교 국가의 자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식 관료제를 곧장 적용했다. 의복과 언어, 사상, 종교까지 바꾸려 했다. 일종의 '체제 전환(Regime Change)'을 꾀한 것이다.

오래 가지는 못했다. 크메르에서 철수한 것은 1847년이다. 야심은 넘쳤으되 힘이 모자랐다. 실제로 월남은 시암과 버마에 견주어도 압도적이지 못했다. 대청제국과 같은 보편 제국에는 못 미쳤다. 동남아의 다중심 가운데 하나, 만달라 세계 질서의 일부였다.

제국 건설의 물질적 토대를 닦아준 것은 역설적으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아래서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진출했다. 프랑스의 '문명화 사업'이 월남의 문명 의식과 묘하게 공명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5~1954년)에서도 프랑스와 베트남은 적수였으되, 각기 서로 다른 인도차이나 건설의 책무를 자임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은 한국 전쟁 발발도 기회로 여겼다. 인도차이나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체로 혁명을 확산시킬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그들은 이것을 '국제적 임무(Nhiem Vu Quoc Te)'라고 불렀다. 베트남이 동남아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국가임을 자부했다.

인도와 버마, 인도네시아 등은 이런 (북)베트남을 우려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수용할 수는 있지만, 베트남이 주도하는 인도차이나 및 동남아시아의 공산화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니 결단코 반대했다. 총대를 멘 것은 인도의 네루였다.

네루는 버마의 우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의견을 나눈 뒤, 중국의 저우언라이에게 의견을 전했다. 1954년 6월, 뉴델리 회동에서였다. 중국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인도차이나 서부에서 (북)베트남군을 철수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우언라이는 인도차이나 사정에 어두웠다.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네루는 인도와 버마에 비유했다. 영국령 식민지라는 공통점은 있었으되 양국이 엄연히 별개의 국가이듯,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또한 별개의 국가라고 했다. 인도차이나는 어디까지나 식민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네루의 견해는 명쾌했다. 남/북 베트남의 통일은 지지하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중립주의 또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운동에는 성원을 보내되, 베트남의 제국주의적 행보 또한 제어하겠다는 뜻이다.

저우언라이는 설복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및 중립을 지지하기로 했다. 양국이 버마처럼 비동맹 노선을 걷는 '신형 동남아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동남아에서 가능한 많은 중립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이 미/소의 개입을 방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도 여겼다. 이듬해 반둥회의(1955년)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치민도 수긍했다. 그래서 제네바 조약(1954년)이 타결된 것이다. 프랑스군과 더불어 베트남군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호치민보다 한 세대 아래는 불만이 컸다. 혁명적 열정에 불타오르는 '신청년'들이었다. 인도차이나 혁명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호치민을 '민족주의자'로 깎아내렸다. 호시탐탐 기회도 엿봤다.

2004년 출판된 쭈휘만(Chu Huy Man)의 회고가 흥미롭다. 라오스 혁명에 깊숙이 개입한 베트남 고문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라오스로 파견되기 전 호치민과의 독대 장면이 나온다. 호치민이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의 친구인 라오스인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그 친구들이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도움을 베풀어라. 결국은 그들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 또한 '자력갱생'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쭈휘만은 호치민의 충고를 그 자리에서 받아 적고, 현장서도 따르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과연 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호에 대해서는 원체 사후 각색과 윤색이 많기 때문이다. 설령 했다 하더라도, 그의 뜻이 실제로 옮겨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쭈 본인의 회고만 보더라도 베트남의 주도성이 너무나 역력하기 때문이다. '국제적 임무'와 최종적 승리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기층 단위에서 전개되었던 실천 양상까지 매우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헌신적인 베트남 혁명가들의 기록을 보노라면 마치 19세기 프랑스의 선교사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혁명 사상을 전수하기 위하여 라오스 언어를 직접 배우고, 산간에 사는 소수민족 언어까지 학습했다. 어학 교재를 출판하고, 특수 학교도 세웠다. 라오스에서 '국어'가 전국 곳곳, 고산지대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것도 열정적인 베트남 혁명가들 덕분이었다.

철저한 '하방'을 실천하는 이들도 있었다. 현지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피부를 더 검게 태우고, 라오스 식이나 소수 민족 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지인과 결혼을 하거나, 마을 촌장의 양아들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진정성을 보임으로써 라오스인들을 '붉은 복음'으로 인도하고 자 했던 것이다. 실로 베트남은 식민모국에 맞서 군사적으로 승리한 세계 유일의 국가였다. '베트남의 길'이 곧 라오스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뜻 한 세기 전 대남제국의 문명화 사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민망 황제가 도모했던 '교화'의 반복이고 심화처럼도 보인다. 문명화가 근대화, 혹은 혁명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100년 전과 달리 물리력도 갖추어졌다. 프랑스가 건설한 교통망이 있었고, 소련과 중국에서 전수받은 군사력도 있었다. 평지에서 산지까지 더 높이, 더 깊이, 더 널리 베트남의 영향력이 침투한 것이다.

여기에 선교사적 혁명가들의 열정이 결합하여 '붉은 라오스'가 탄생했다. 라오스는 전통적으로 시암과 월남 사이에서 이중 조공을 하며 균형을 취했다.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불교 국가인 시암에 더 가까웠다. 라오스의 근대화 또한 입헌 군주제에 바탕을 둔 태국(타이)식 모델을 따랐다. 그러나 베트남 혁명가들의 '국제적 임무'로 말미암아 역사상 처음으로 베트남의 단독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20세기 동남아시아사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베트남과 라오스 간의 '특별한 우의(Tình Hữu Nghị Dặc Biệt Việt-Lào)'를 체현한 인물이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umvihan)이다. 라오스 인민혁명당 첫 총서기이자, 라오스인민공화국 초대 수상이 되었다. 1920년생으로 어머니가 라오스인, 아버지가 베트남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하노이에서 유학하여 베트남어도 유창했다. 이처럼 인민혁명당의 주요 간부들이 혈연과 학연으로 하노이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1975년 이후에도 사상 및 이론 학습을 담당하는 당 간부 교육은 하노이에 있는 응우옌 아이 꾸억(호치민의 아명)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북의 군사 물자를 남으로 이송했던 호치민 루트가 괜히 라오스를 지났던 것이 아니다. 호치민 루트는 통일의 길이자 혁명의 길이었고, 또 제국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베트남은 미국이 그러했듯이 라오스의 운명을 라오스인의 손에 맡겨둘 의사가 거의 없었다.

미국은 라오스 왕정을 도와 국군을 양성했고, 베트남은 인민혁명당을 지원하여 혁명군을 양성했다. 제네바 조약을 어기면서까지 전개된 이 북베트남의 비밀공작이 당시 소련과 중국에 얼마나 알려졌는지는 미지수이다. 내 판단으로는 베트남의 독자 행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의 실천보다는 '대남제국'의 현대적 계승에 가까웠다.

1977년 통일 베트남과 '붉은 라오스' 간 조약이 체결된다. 소련과 동유럽에 방불한 비대칭적 동맹이 공식화되었다. 따라서 국가 간 체제의 확립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왕년의 조공국을 내부로 편입시킨 것에 가깝다. 이로써 베트남은 라오스의 외교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등 내정에도 깊숙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5만 명의 베트남군이 주둔하며 사회주의적 개조를 진두지휘 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베트남이 축이 되어 라오스/캄보디아를 하위 파트너로 거느리는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s)도 완성되었다. 라오스도 캄보디아도 '속국의 근대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소련이었다. 1979년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해이기도 하다.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에도 소련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통일 베트남이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간 것만큼이나, 인도차이나에도 동구형 질서가 이식된 것이다. 차이라면 프랑스/베트남(우파) 연합의 인도차이나에서 소련/베트남(좌파) 연합의 인도차이나로 전환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 '붉은 대남제국'을 저지하고자 동남아 국가들이 합심하여 등장한 조직이 바로 아세안이었다. 인도차이나 대 아세안, 1980년대 동남아의 '신냉전' 구도였다.

아세안 : 우정의 다리

동유럽과 동남아의 탈냉전은 동시적이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철수할 무렵, 베트남도 캄보디아/라오스에서 철군했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유럽연합(EU)이 확대되어간 것처럼, '인도차이나연방'이 해소됨으로써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도 확산되었다. 동유럽의 위성 국가들이 독립 국가로 전환되었듯, 라오스와 캄보디아 또한 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베트남이 아세안에 가입한 것은 1995년이다. 1945년 독립으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마침내 제국 건설의 기획을 접고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라오스 또한 해방 공간으로 돌아갔다. 10년간 탄압받았던 소승 불교가 되살아났고, 독립 초기에 추구했던 비동맹 중립 노선을 복구했다. 중국과 베트남, 태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취하고 있다. 아세안에 가입한 것은 1997년이다. 중국, 베트남, 북조선과 함께 현존하는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들로서의 연대를 지속하되, 아세안의 구성원으로서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1994년 태국과 라오스를 가르는 메콩 강에 '우정의 다리'가 세워졌다. 1980년대 양국의 국경은 신냉전의 최전선이었다. 인도차이나와 아세안이 메콩 강을 사이로 길항했다. 이제는 딴 판이고 새 판이 열렸다. 동남아에서 바다를 면하지 않은 유일한 내륙 국가라는 특성이 라오스를 동남아 교통망의 허브로 변화시키고 있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과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래서 어떠한 통신망과 교통망도 라오스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중국의 운남성과도 국경이 닿는다. "5국 1성(五國一省)"으로 부상하고 있는 광역 경제권에서 중차대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운남성 쿤밍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까지 가닿는 고속철 또한 루앙푸라방과 비엔티엔 등 라오스의 주요 도시를 거친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메콩 강은 티베트 동부에서 발원한다. 운남성을 지나 동남아 주요 국가를 돌고 돌아 남중국해로 흘러나간다. 길이로는 세계 12번째, 수량으로는 세계 10번째에 꼽힌다. 20세기 메콩 강은 식민과 전쟁의 상징이었다.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의 분단선이기도 했다. 21세기는 동남아를 통합하고 중국 남부까지 잇는 평화의 물줄기가 되고 있다.

'우정의 다리' 건설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와 태국 사이,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에도 '우정의 다리'가 생겼다. 그리고 이 다리들은 다시 아세안 하이웨이 프로젝트와 연결된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 내륙을 종횡으로 엮는 '1일 생활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남중국해가 부쩍 소란해졌다고는 하지만, 메콩 강에서 일고 있는 이 도저한 변화의 물결이 쉬이 꺾일 성 싶지는 않다. 강물이 흘러 바닷물이 될 것이다.

제국과 속국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나 동북아의 일원이 되었다. 라오스는 베트남의 속국에서 벗어나 동남아의 일국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남과 북에서 전개된 탈냉전의 양상이다.

동아시아 냉전은 양분이 아니라 삼분이었다. 미국-동맹국, 소련-위성국, 중국-주변국의 삼분 세계였다. 서구와 동구, 동방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동구와 서구는 다른 듯 닮은 구석이 있었다. 공히 '속국의 근대화'가 전개되었다. 조공국이 식민지를 지나 동맹국/위성국으로 낙착되었다. 주권 국가, 독립 국가에 미달했다.

반면 속국을 해소해가는 역사 운동도 있었다. 중화 세계의 상/하국 관계를 대/소국 관계로 재편시켜가는 또 다른 근대화였다. 제국을 근대화하여 국가 간 체제에 적응시킴으로써 속국의 자립과 자결을 확보해간 것이다. 소수 민족에게는 자치권이, 주변 민족에게는 자결권이 부여되었다. 나는 이 100년의 역사 운동을 '중화 세계의 근대화'라고 표현한다.

즉, 동아시아의 20세기를 '중화 체제에서 국가 간 체제로의 전환', '전통 질서에서 근대 질서로의 전환'이라고 갈음하는 것은 몹시도 미흡한 진술이다. 명과 실이 부합하지 않는다. 실사구시에 어긋난다.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동북아의 중화 세계와 동남아의 만달라 세계를 구성하는 복합계의 일부로서 국가 간 체제를 포용/포섭해간 과정이었다고 보는 편이 한층 적실하다.

그 과정에서 실로 다양한 발상들이 제출되었다. 두 사람만 꼽는다. 청말 사상가 장삥린은 몽골과 신장, 티베트, 만주는 독립시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애당초 중원과는 문명이 다른 지역이었다. 반해 조선과 월남, 류큐를 편입시키고자 했다. 유교 문명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즉, 중화 문명을 계승한 국가끼리 협동하여 '대중국'을 이룸으로써 국가 간 체제에 들어가고자 했다. 번부를 독립국으로, 조공국을 제국의 내부로 삼는 기획이었다.

반면 민국 초기, 청년 마오쩌둥은 각 성들이 모두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동국, 산동국, 복건국 등 소중국으로 자립자강 하자고 했다. 각자도생, 자력갱생하여 차후에 '중화연방공화국'으로 합치자는 것이다. 전자는 '대국주의적 발상'이고, 후자는 '소국주의적 발상'일까.

쉬이 단정하기 어렵다. 각자 그 나름으로 국가 간 체제에 어떻게 적응해 갈 것인가에 대한 상이한 판단이 있었을 뿐이다. 즉, 만국공법으로 전수된 유럽형 세계 질서를 중화 세계의 어느 단위에서 어떤 수준으로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집합적 과제가 있었다.

21세기 하고도 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수되지 않은 숙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못다 이룬 과제가 목하 동아시아를 짓누르는 '신냉전'의 망령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핵심 모순도 여기에 있다. 좌우 체제 대결도, 미중 패권 경쟁도 아니다. '미국식 조공 체제'와 '중국식 국가 간 체제'가 길항하고 있다. 신형 상-하국 관계와 신형 대-소국 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동과 서가 뒤집어졌다. 서구가 '봉건적'이고, 동방이 '근대적'이다. 역사의 커다란 역설이다.

도대체 국민은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어디서 들어야 하나요?

외신 편애 박근혜, 돌아온 것은 고작 이런 대접

임병도 | 2015-06-16 09:25:2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6월 12일 금요일 저녁,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본사 데스크에서 걸려 온 전화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외신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위안부 문제’와 ‘사드 배치’ 등의 언급이 보도됐는데,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월 11일 (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에는 ‘Eventually we will face a situation that will be beyond our control.’ 라는 제목의 박근혜 대통령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인터뷰 기사에는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일 관계가 국제 정세에서 중요한 이슈이기에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는 한국 언론사들이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청와대의 태도는 상당히 이상했습니다. 평소 외신과의 인터뷰 한국어 원문을 제공하던 청와대가 이번에는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와대가 일부러 한국어 인터뷰 원문을 제공하지 않으니 언론들은 자신들의 독해력 수준에 맞춰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위안부 문제나 사스 배치, 대북 관계 등의 중요한 얘기가 언론사마다 뉘앙스가 달리 보도된 것입니다.

‘외신 편애 박근혜, 돌아온 것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내 언론과는 인터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CBS’와 ‘워싱턴포스트’,’월스트리트 저널’, 중국의 ‘CCTV’ ,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포스트’와 ‘KOMPAS’, 프랑스의 ‘르 피가로’, 영국의 ‘BBC’ 와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외신을 편애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외신과 인터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해외 순방을 앞두고 외신을 통한 홍보 효과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한국이지만, 외신 인터뷰를 통해 해외 순방 국가에 자신의 방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외신과 독점 인터뷰를 해도 그 나라 언론에서는 별로 관심도 없다는 점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2013년 유럽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순방 보도 100% 국내용'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1 BBC 홈페이지에서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을 다룬 기사는 세 건에 불과했고, 프랑스 최대 공영방송사도 박근혜 대통령의 방불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르 몽드는 박근혜 대통령이 공공시장 개방을 다뤘는데, 결국 프랑스 경제인들에게 좋은 뉴스였기에 보도했을 뿐입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아버지의 딸’,’섹스 스캔들로 얼룩진 임기’,’선거부정에 대한 의혹’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외신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보도하는 모습은 긍정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 많았습니다.
이번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도 비슷합니다. 인터뷰 후 박근혜라는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올라온 기사는 단 2건,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 방미 연기에 동의했다는 내용과 한국의 메르스 관련 보도뿐이었습니다.2
메르스 보도에서도 2002년 중국이 사스에 대응하던 엉터리 모습을 말함으로 오히려 사스 대응 우수국가였던 우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 진 사실만 떠올리게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한 한국 관련 기사는 여자 월드컵 기사와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가 늘었다는 소식뿐이었습니다.3
메르스 사태 때문에 방미를 연기했지만, 외신의 보도는 박근혜 대통령이 타격을 받았고, 한국 정부가 공공 보건 시스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4 국내 언론과는 단 한 번도 인터뷰하지 않으면서 외신 인터뷰만 한 박근혜 대통령의 노력치고는 너무 비참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민에게 말하지 않는 대통령’
외신과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결과는 나쁠 수 있습니다. 해외 언론이 한국 언론처럼 받아쓰기나 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왜 국민에게는 말을 하지 않느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연기의 이유를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청와대 홍보수석이 브리핑한 내용을 인용한 언론 기사에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방미 연기를 굳이 국민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칩시다. 그럼 메르스 사태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말을 했나요?
5월 20일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발언한 내용은 모두 국무회의나 대책회의에서 말한 것뿐입니다. 국민이 국무회의에 참석한 것도 아니고 직접 국민에게 말하거나 지시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런 발언을 국민에게 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줄어들 줄 알았던 메르스 확진자는 계속 늘어만 갑니다. 사망자도 이미 16명이나 됩니다. 이런 엄청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담화문이나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언론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보고 믿으라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포럼에서 소통에 대해서 '굳이 말보다는 국민이 성원하는 지지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5 박근혜 대통령이 가진 소통에 대한 사고방식이라면 메르스 사태로 많은 국민이 고통받고 있지만, 지지율이 높으면 소통이 되고 있다는 이상한 논리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지금 동대문도 방문하고, 거점 병원도 찾아가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있느냐라고. 대통령은 단순히 보여주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국민에게 정확히 지금의 사태를 보고하고, 대응책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저 웃으면서 사진 찍고 전화하는 모습만으로는 지금 사태가 너무 확산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동대문 시장을 방문해 시민들과 웃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전북 순창에 사는 70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환자가 12일 사망한 가운데 방역관계자들이 화장을 위해 전주 승화원으로 시신을 옮기고 있으며, 마스크와 보호장비를 착용한 유가족들이 멀찍이 바라만 보고 있다 ⓒ뉴스1.청와대
메르스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써 19명의 국민이 죽었습니다. 여성 대통령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웃었다면, 이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 때문에 사망한 국민을 위해 앞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국민이 얼마나 더 죽어야 소통하고 말을 하려는지 두렵고 무섭습니다.
외신에만 등장하는 대통령
국민에게 말하지 않는 대통령
도대체 국민은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어디서 들어야 하나요?
1. “유럽순방보도, 100% 국내용” 뉴스타파 2013년11월 15일. http://newstapa.org/1458
2. http://www.washingtonpost.com/newssearch/?query=Park+Geun-hye#sthash.fuQOtHiw.dpuf
3. The 5 things you need to know about MERS (and global health) 워싱턴 포스트 2015년 6월 12일.
http://www.washingtonpost.com/blogs/monkey-cage/wp/2015/06/12/the-5-things-you-need-to-know-about-mers-and-global-health/
4. Experts Fault South Korean Response to MERS Outbreak. 뉴욕타임스 2015년 6월 3일.
http://www.nytimes.com/2015/06/14/world/asia/experts-fault-south-korean-response-to-mers-outbreak.html?_r=0
5. https://www.youtube.com/watch?v=0IMrwp83OuY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35 

중일전쟁 2차 국공내전 그리고 6.25에서 중국 공산군의 주역


이동훈 2015.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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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자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졌던 달이다. 6.25 하면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던 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전격 참전으로 물러나야 했던 역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국군을 누가 지휘했는지 알고 있는가? 세계 최강이던 UN군을 빈약한 장비와 보급을 받는 중국군 앞에 패주하게 했던 명지휘관. 그가 바로 팽덕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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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서구 선진국들의 주요 군사지휘관들을 보면, 사관학교와 국방대학을 졸업한데다 때로는 집안까지 상류층인, 속된 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에 다룰 팽덕회(彭德懷, 중국명 표기는 펑더화이이지만 본고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해 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한자의 우리음으로 표기)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군사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정규 교육 과정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다년간의 실전 경험에서 두각을 나타내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 성분은 평등과 노동자 계급 독재를 강조하던 공산국가의 군대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군 및 국민당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한국 전쟁에서 중국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북한의 함락을 막은 팽덕회. 그러나 그는 말년에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팽덕회는 1898년 10월 24일 중국 호남성 상담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팽의 아버지는 1.5에이커 정도의 토지에서 농사로 8명의 식구(동거하고 있던 팽의 할머니와 종조부 포함)를 먹여 살렸다. 태평천국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던 팽의 종조부는 팽이 어릴 적부터 충분한 식량생산, 여성의 전족 철폐, 토지 균배 등의 이념을 설파했다고 한다.
  팽덕회는 1905~1907년 사이에 동네 서당을 다닌 다음, 1908년에는 현대식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05~1906 연속으로 가뭄이 호남성을 덮친 탓에 팽의 집안 식구 2명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학교를 1년도 못 다니고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13년 또 가뭄이 들자 데모에 참가해 지역 농산물 상인의 창고를 약탈한다.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을 떠나 도망쳤다가, 1916년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당의 동맹인 탕향명의 군벌 부대에 이등병으로 입대,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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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팽덕회

 초기에는 국민당군의 병사로

 당시 팽의 이등병 월급은 중국 돈으로 5.5위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칠게 계산해보면 요즘 우리 돈으로 65,000원 정도에 해당한다. 그는 매달 월급에서 2위안씩을 떼어 고향에 송금했다. 팽의 지휘관 중에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이상적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팽은 그 영향을 받아 사회 개혁과 국민 통합이라는 국민당의 목표에 공감하게 된다.
 이후 중국내에서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해 상당한 군사 경력을 쌓은 그는 1921년 8월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남현의 어느 마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은 지역 지주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고 마는데, 그의 소신이 매우 잘 드러난 행동이었다. 이 일로 질책을 당한 그는 이듬해 2월, 이미 자신의 군벌 부대를 떠나 국민당군에 입대하기 위해 무급휴가를 받아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에서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그는 군대를 떠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옛 전우들의 설득에 넘어간 그는 1923년 호남성의 지역 사관학교에 입학, 9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옛 군벌 부대에 대위 계급으로 복귀한다. 
  1924년 그의 군벌 부대가 정치적 노선을 반국민당 노선으로 바꾸자, 당시 임시 대대장을 맡고 있던 팽덕회는 이듬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계속 공을 세워 중령 계급의 연대장으로 진급해 있던 1927년의 팽덕회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를 중국 공산당에 입당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들의 설득에 넘어간 팽덕회는 1928년 2월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2000명으로 구성된 팽덕회의 연대가 평강현을 점령하자, 팽덕회는 해당지역의 고위 공무원과 군벌 장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버린 뒤, 다음날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공산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아울러 중국 공산당의 우두머리이던 모택동 및 주덕 진영에의 합류도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공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팽덕회의 연대는 10월, 병력이 수백 명 수준으로 줄어들자 정강산으로 후퇴해 중국 공산당 게릴라 부대와 합류한다.

 공산군의 장교로 변신 국공내전에서 활약

  이후 팽덕회는 국민당에게 포위된 모택동, 주덕을 구출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강서성 서금시를 공격해 1929년 1월 강서성 혁명근거지를 창설한다. 같은 해 중순, 정강산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병력은 지역 산적들을 규합해 2,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팽덕회는 이 병력을 이용해 호남성 도처에서 습격을 벌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신병들을 모았다.
  1930년 7월 13일,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당수였던 이입삼은 전국적인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성도 하나를 점령할 것을 전국의 공산군 부대에 지시했다. 팽덕회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7월 25일, 17,000명의 병력과 게릴라 10,000명을 데리고 호남성의 성도 장사를 공격했다. 7월 30일 장사를 점령한 팽덕회는 8월 1일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를 수립하고, 정부수반으로는 당시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살던 이입삼을 추대, 자신은 부수반을 자임했다. 그러나 8월 5일 국민당군의 반격을 받은 그는 결국 장사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럼에도 그는 1930년 12월~1931년 5월 사이에 벌어진 강서성 혁명근거지 방어전에서 국민당군의 포위를 3번이나 깨뜨려 중국 공산당 내에서 임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1931년 11월 7일에는 강서성 혁명근거지의 중앙군사위원회 및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정치 지도자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로도 그는 국민당의 공격을 계속 훌륭히 막아냈다. 그러나 1933년 장개석이 약 8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서성의 공산당에 맞서 제5차 포위전을 벌이자, 35,000명에 달하던 팽덕회의 병력은 1934년 10월 1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0월 20일 팽덕회를 비롯한 중국 공산군은 강서를 떠나 대장정에 이른다. 딱 1년 만인 1935년 10월 20일, 목적지인 섬서성에 도달한 팽덕회 부대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때 중국 공산당 내 모택동의 부상을 도운 팽덕회는, 중국 공산군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중국 현지에서 팽덕회를 인터뷰한 후, 자신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 무려 두 장을 할애해 그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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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파견된 미군 장교(가운데)와 포즈를 취한 모택동(좌)과 팽덕회(우).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실시한다. 일본군과의 싸움은 보여주기 정도로 족하고, 국공합작의 진짜 목적은 훗날을 위한 공산군 병력의 건사라고 믿었던 모택동과는 달리, 팽덕회는 공산군이 일본군 격멸에 온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팽덕회의 의견대로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1940년 7월, 중국 공산군은 일본군에 맞선 사상 최대 규모의 공세인 백단 대전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 정규군 병력 20만 명과, 게릴라 병력 20만 명, 도합 40만 명이 참여한 이 공세의 총지휘관은 팽덕회였다. 공산군은 그 해 8월~10월에 걸쳐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끼쳤으며, 10월에 벌어진 일본군의 반격도 대부분 성공리에 물리쳤다. 백단 대전으로 인해 입은 일본 측 손실이 완전 복구된 것은 1942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전투 후 연안으로 소환된 그는 모택동에 의해 백단 대전의 ‘실책’에 대해 혹독한 자아비판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팽덕회는 모택동을 보필하면서 주로 정치지도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갈라져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된다. 1946년 3월 당시 110만 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던 중국 공산군은 현재의 이름인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게 되고, 팽덕회는 17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북서야전군의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북서야전군의 장비 상태는 국민당군에 비해 열악했으나, 그들은 초반에는 후퇴하면서 호종남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공세 한계점까지 몰아붙인 후, 이후 반격하여 1947년 8월 대승리를 얻어내고,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국민당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는다. 또한 1948년 2월에는 국민당군을 섬서성에서 내쫓는다. 팽덕회는 1947년부터 1949년 9월 22일까지 호종남, 마보방 등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상대로 계속 승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국민당군 잔여전력을 괴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국민당군은 1949년 12월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철수한다.
  국민당군의 철수 이후에도 여러 소수민족 게릴라와 공산군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팽덕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북서부 군사 및 행정위원회 위원장 겸 신강 지역 군 총사령관 및 정치장교를 맡게 되었다. 이로서 그는 섬서, 감숙, 영하, 청해, 신강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과 약 3,000만 명의 인구를 책임지게 되었다. 공산군이 이 지역의 적들을 섬멸하고 신강 지역을 완전 정복한 것은 1951년 9월이 되어서였다.  

 6.25 전쟁에서 북한을 구해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함으로서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초전에 단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북한.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남한을 돕기 위해 투입되면서 전세는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성공,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그 달이 지나가기 전에 서울을 수복했다. 그리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 내부로 북진하기에 이른다. 그냥 놔두면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중-북 국경에 도달하는 것은 뻔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북경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UN군이 북한을 괴멸시키고 중국 본토에 침공해 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 사태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였다. 대부분의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중국 본토가 적의 침공을 받지 않는 한 한국전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UN군으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에 파견될 중국군의 사령관으로 임표를 내정했다. 그러나 임표는 건강상의 문제로 이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팽덕회가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으로 내정된다. 
 10월 4일 북경에 도착한 팽덕회는 참전 찬성 의견과 반대 의견을 모두 경청한 후, 다음날 모택동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안겨다 준 팽덕회가 찬성을 하자 대세는 참전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1주간 팽덕회는 심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한국 참전 전략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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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왼쪽)와 모택동. 혁명 동지이기는 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 역시 중국의 참전을 승인하자, 10월 19일 밤 제1파 26만 명의 중국군 병력이 중-북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투입되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UN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10월 25일, 온정과 운산에서였다. 이들 중국군은 11월 4일까지 UN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밀어붙였다. 이후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팽덕회는 총 3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38선 이북의 북한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50년 12월 31일부터 그는 23만 명의 중국군을 38선 이남으로 투입했다.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통해 중국을 위한 확실한 울타리를 확보하려는 모택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진격은 UN군의 맹반격에 의해 중지되었고 서울은 3월 14일, 별다른 전투도 없이 다시 UN군에게 수복되었다. 팽덕회는 서울을 빼앗기 위해 5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마지막 대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공산군과 UN군은 더 이상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휴전 시까지 전선의 고착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팽덕회 휘하의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서 보여준 성과는 당시 중국군의 역량과 한계를 모두 다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군은 UN군 전선의 취약 지역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해 기습 돌파하는 인해전술을 통해, UN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주었다. UN군에게 중국군의 병력이 무한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체계 및 기계화 전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전쟁 첫해 중국군의 보급을 책임진 것은 7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인력으로 운반한 보급품들이었다. 때문에 중국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려 공세를 1~2주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동계장비의 보급까지 늦어진 바람에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동사한 중국군 장병의 수만 해도 45,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기갑, 항공, 해상전력으로 가면 UN군과의 격차는 그야말로 비교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중국군의 사정상 팽덕회는 1951년 여름까지 인해전술에 철저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권은 중국의 개입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인명피해도 실로 막심한 수준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사 및 부상을 당한 중국군 병력은 100만 명을 가뿐히 넘었다. 하지만 팽덕회는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종교적이기까지 한 충성심으로 이러한 엄청난 인명 소모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많은 중국이라지만 이 정도의 인명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팽덕회와 주은래, 모택동은 이러한 인명 피해의 심각성과, 이를 줄일 방법, 특히 후진적인 보급체계의 개선에 대해 1951년에 여러 차례 만나 논의했다. 결국 1951년과 1952년 사이의 겨울, 팽덕회는 더 이상 한국 전쟁을 끌었다가는 공산측과 UN측 중 누구도 가까운 장래에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2년, 중국의 전쟁 수행을 더욱 원활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중국인민지원군 병력을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한국 전쟁에 교대로 투입시키고, 중국 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을 가속화하며, 일선에 더 많은 대공포를 배치하고, 소련에서 더 많은 군수품을 도입하며 군의 식량 및 피복 지급량을 늘린다는 것이었다. 군의 보급책임도 중국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팽덕회는 특히 부패와 낭비야말로 중국군의 주적이라고 믿었기에, 부패와 낭비, 관료주의를 척결하자는 3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2년 4월, 팽덕회는 뇌종양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중국측 대표로 정전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7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집회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은 팽덕회의 공헌을 높이 사 그에게 지난 1951년에 이어 북한 제1급 국기훈장을 다시금 수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팽덕회는 한국 전쟁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청난 인명 손실로 인해 그는 중국군의 현대화와 기계화, 전문화, 신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정치사상 교육보다 군사훈련이, 정치장교보다 군사지휘관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공산국가들 중 현대전을 치를 대비가 충분히 된 나라는 소련뿐이었기에, 그는 소련군을 중국군이 따라야 할 롤모델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군사적 관점, 그리고 모든 인민들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겼던 정치적 관점은 모택동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950년대 후반부터 둘의 불협화음은 심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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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시초프(맨 오른쪽)를 만나는 팽덕회(왼쪽 두번째)

중국 초대 국방부 부장에 취임

  앞서 살펴보았듯이 1952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한 팽덕회는 1954년 봄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모택동)을 맡아 사실상의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초대 국방부 부장(국방부 장관을 부르는 중국식 호칭)에 취임한다. 그리고 다음달부터, 소련군을 모델로 한 중국군 현대화 계획에 돌입한다. 
  또한 그는 이듬해인 1955년 1월, 국민당이 지키고 있던 저장성의 여러 섬들을 공격해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이 섬에서 멀게는 상해까지 게릴라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중화민국을 지키기 위해 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동독, 폴란드, 소련 등 선진 공산국가를 시찰한 다음, 그해 9월 중국군의 4대 주요 제도를 수립, 정비하기에 이른다. 그 주요 제도란 다름 아닌 계급제도, 호봉제도, 상훈 제도, 징병제도였다. 이전의 중국군은 공산주의 사상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계급도 없이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의 보직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일개 정당의 정치폭력조직에 더 가까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된 ‘국가의 군대’ 모양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훈장과 기장, 소련군의 군복을 본뜬 복제도 제정되었다. 그는 그 해 9월 27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2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이 큰 점을 인정받아 주덕, 임표 등과 함께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1956년에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꾸었으며, 이등병에서부터 원수에 이르는 18개 계급에 따르는 호봉이 정해졌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정치위원에 대한 지휘관의 우위를 명문화했다. 1956년 9월, 군의 전문화, 실전과 같은 훈련과 엄격한 군기, 현대 기술 장비에 대한 전문성 확보 등 팽덕회가 내세운 강령이 중국군 내에 정착되었다.
  하지만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모택동은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보다 군사적 효율성을 우선시해 군을 경영하려던 팽덕회의 행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국공내전 때부터도 이런저런 의견 충돌을 빚어왔지만, 국공내전, 중일전쟁, 한국전쟁이 모두 끝나고 눈앞의 적이 모두 사라지자 그 갈등이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둘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는 그 외에도 많았다. 1958년 금문도 사건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중국군은 국민당군에게 처참하게 대패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중국 인민의 영웅으로 신격화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던 모택동에 대한 팽덕회의 혐오 역시 커져갔다. 팽덕회는 북경 군사박물관에 모택동의 흉상이 전시되는 것도 반대했고, 부하 병사들이 “모택동 만세!”를 외치자 “모택동이 정말로 10,000년이나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100살도 못 살고 죽을 거야. 그런데 만세라니? 그건 개인숭배야!” 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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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 당시 대중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팽덕회.

몰락과 숙청

  1958년, 모택동은 중국을 10년 내에 미국 이상의 선진국이자 공업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차다 못해 황당한 목표를 띤 <대약진 운동>을 시작한다. 농부들을 억지로 공장에 밀어 넣어 강제로 중공업에 종사케 한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처참했다. 농가에 일손이 줄어들자 식량생산량이 급감했고, 불과 1년 만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분개한 사람들은 각지에서 정부의 식량 저장소를 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대약진 운동은 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기존의 중국군에서 완전 독립되어 공산당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대규모(무려 수천만 명 규모의!) 민병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당연히 팽덕회의 눈에 이런 정신나간 정책들이 옳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심각하던 팽덕회와 모택동 사이의 알력은 이로서 극에 달했고, 결국 1959년 9월, 국방부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팽덕회의 후임으로는 평소 그의 라이벌이었던 임표가 임명되었다. 이로서 1916년부터 시작된 팽덕회의 군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모택동은 1965년 팽덕회에게 중국 남서부 산업 개발 계획인 삼선건설의 지휘를 맡으라고 하여 그를 다시금 공직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66년, 중국 공산당의 친위쿠데타격 사건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바로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어 북경으로 압송, 옥고를 치르며 고문과 가혹행위 등 고초를 당해야 했다. 평소에 소련군을 중국군의 롤모델로 삼고, 소련과의 군사교류를 통해 중국군의 현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모택동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던 팽덕회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 1호’였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팽덕회의 수감 여건은 그리 좋지 않았고, 그는 감옥에서 결핵과 혈전증을 얻고 만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던 그는 1974년 11월 29일 숨을 거두고 만다. 유해는 화장되어 성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인 1976년 모택동도 세상을 떠나고, 1978년 12월 제11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등소평은 팽덕회의 사면 복권을 공식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팽덕회 추모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1966년 팽덕회 체포를 현장 지휘했던 홍위병 왕다빈에게 9년형이 선고되었다. 1986년에는 그의 자서전이 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팽덕회 탄생 90주년 기념우표도 발간되었다. 호남성에 있던 팽덕회의 생가는 현재 복원되어 기념관 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민족감정, 냉전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도, 분명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인물도 독재자 모택동의 입김 앞에서는 제대로 맥을 추지 못하던 모습에서, 과연 정치와 군사 간의 올바른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정치 체제가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글: 이동훈 객원기자(enitel00@naver.com)

<남북관계발전 전환적 국면 열어나가야> ... 북정부 성명

  • [정치] 〈남북관계발전 전환적 국면 열어나가야〉 ... 북정부 성명



  •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명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치따라 북남관계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야 한다>를 15일 게재했다.

    성명은 <오늘 우리 민족은 분열사상 처음으로 마련된 북남수뇌상봉과 6.15공동선언발표 15돌을 맞이하고 있다.>며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북남관계개선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를 한결같이 바라고있다.>고 밝혔다.

    이어 <북남관계를 수습하고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려는 입장>으로부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는 확고한 입장을 가질 것 △<체제통일>을 추구하지 말 것 △북침전쟁연습을 걷어치울 것 △북남관계개선에 유리한 분위기를 마련 △북남공동선언들을 리행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러면서 <남조선당국은 말로만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존중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며 <북남사이에 신뢰하고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당국간 대화와 협상을 개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력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치따라 북남관계발전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오늘 우리 민족은 분렬사상 처음으로 마련된 북남수뇌상봉과 6.15공동선언발표 15돐을 맞이하고있다.
    이 력사의 날을 맞으며 온 겨레는 평양상봉의 격동적인 사변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6.15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북남관계개선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를 한결같이 바라고있다.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여 평양상봉을 마련하시고 6.15공동선언을 채택발표하신것은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획기적전환을 가져온 력사적사변이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북과 남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여온 불신과 대결을 해소하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화해와 단합,통일로 나아가는 새시대를 맞이하게 되였다.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6.15시대와 더불어 2007년 10월에 또다시 북남수뇌상봉을 마련하시고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채택발표하심으로써 북남관계와 조국통일의 앞길에 보다 밝은 전망이 열리였다.
    북남관계가 6.15의 길을 따라 계속 전진하여왔더라면 우리 민족의 념원인 통일문제해결에서 놀라운 전변과 성과들이 이룩되였을것이다.
    그러나 북남공동선언들을 전면부정해나선 리명박보수패당의 악랄한 책동으로 북남관계는 과거의 대결시대로 되돌아갔으며 이러한 파국상태는 오늘 더욱 엄중한 지경에 이르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태를 바로잡고 뜻깊은 올해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기 위하여 신년사에서 북남관계의 대전환,대변혁을 가져올데 대한 중대립장을 천명하시였으며 우리는 그 실현을 위해 모든 성의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은 시대착오적인 반공화국적대행위와 미국과 야합한 끊임없는 북침전쟁연습소동으로 북남관계개선을 가로막고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러한 파국적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재난이 닥쳐올지 누구도 예측할수 없다.
    70년의 기나긴 민족분렬의 력사로 보나 조선반도를 둘러싼 첨예한 주변정세로 보나 북과 남은 하루빨리 대결을 끝장내고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가야 한다.
    그 지름길은 이미 실천을 통해 정당성과 생활력이 뚜렷이 확증되고 오늘 우리 겨레가 더욱 절박하게 요구하고있는 6.15공동선언의 리행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위임에 따라 엄중한 위기에 처한 북남관계를 수습하고 민족적화해와 단합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려는 의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립장을 천명한다.

    1. 북남관계와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는 확고한 립장을 가져야 한다.
    북남관계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는것은 6.15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이다.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 북남관계를 풀어나가는것은 통일문제해결에서 항구적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할 기본원칙이며 생명선이다.
    북과 남은 강한 민족적자존심을 가지고 북남관계와 통일문제해결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민족의 리익과 지향에 맞게 풀어나가야 한다.
    외세를 우상화하고 동족을 배척하는 사대매국의 종착점은 망국이다.
    지금 미국과 그 추종세력은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을 가로막기 위해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과 간섭책동을 그 어느때보다 로골화하고있다.
    남조선당국은 민족문제를 외세에 내맡기고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을 해치려는 《국제공조》놀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
    첨예하고 복잡한 오늘의 세계에서 믿을것은 오직 우리 민족이며 북과 남이 힘을 합치면 극복 못할 난관이 없고 못해낼 일도 없다.
    남조선당국은 우리 민족끼리 북남관계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길로 나와야 한다.

    2. 북남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고취하는 《체제통일》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북과 남에 70년동안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해온 조건에서 하나의 제도에 의한 통일은 대결과 전쟁밖에 가져올것이 없다.
    그러나 남조선보수패당은 언제가도 실현될수 없는 《체제통일》에 환장하여 우리에 대한 불신과 적대의식을 고취하고있으며 이것은 오늘 북남관계악화의 주되는 요인으로 되고있다.
    우리의 존엄과 제도에 감히 도전해나서는 그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징벌하는것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드팀없는 신념이고 의지이다.
    남조선당국이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부정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체제통일》을 계속 추구하다가는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후과가 차례지게 될것이다.
    북과 남은 6.15공동선언에서 우리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과 남측의 련합제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합의한바 있다.
    남조선당국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북과 남이 공존,공영하는 민족통일의 길만이 가장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의 방도라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3. 미국과 야합하여 벌리는 북침전쟁연습을 걷어치워야 한다.
    남조선당국은 미국과 결탁하여 《키 리졸브》,《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비롯한 북침전쟁책동을 끊임없이 벌림으로써 온 겨레의 통일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북남관계개선의 좋은 기회들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군사적위협과 도발을 계속하는 한 북남관계가 언제가도 개선될수 없으며 조선반도는 핵전쟁위험에서 벗어날수 없다.
    남조선당국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실현의 돌격대가 되여 겨레의 생명과 안전을 침략자들의 전쟁도박판에 내맡기는 위험천만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민족분렬의 장본인이며 조선반도에 핵전쟁위험을 몰아오는 화근인 미국의 침략과 전쟁책동을 짓부시고 민족의 자주적존엄과 리익을 수호할 만단의 준비가 되여있다.
    남조선당국은 민족의 존엄과 안정,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우리의 자위적억제력에 대해 불안과 위구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그를 시비하는 반민족적행위를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남조선당국은 미국과의 모든 침략적군사연습을 영영 걷어치워야 하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길로 나와야 한다.

    4. 북남관계개선에 유리한 분위기를 마련해나가야 한다.
    비방중상은 동족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는 위험한 독소이며 이를 방치하면 물리적충돌과 전쟁으로까지 번져질수 있다.
    남조선당국은 말로만 《신뢰》니,《관계개선》이니 하지 말고 우리를 자극하고 헐뜯는 일체 도발행위부터 그만두어야 한다.
    극악한 독재통치로 수많은 악재를 빚어내고있는 남조선당국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를 시비중상하고 동족을 모해하는것은 언어도단의 극치이다.
    남조선당국은 북남사이의 접촉과 래왕,교류와 협력을 가로막는 법적,제도적장치들을 대담하게 철페하고 관계개선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나가야 한다.

    5. 력사적인 북남공동선언들을 리행하기 위한 실천적조치들을 취해나가야 한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은 북남최고위급에서 관계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해 마련한 귀중한 합의이며 북남당국이 민족앞에 다진 엄숙한 확약이다.
    북남공동선언들이 《정권》이 바뀌였다고 부정당하고 그 리행이 중단된다면 앞으로 북남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수 없다.
    남조선당국은 말로만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존중한다고 할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북남사이에 신뢰하고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당국간 대화와 협상을 개최하지 못할 리유가 없다.

    온 겨레가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열망을 안고 맞이한 뜻깊은 올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가고있다.
    지금 남조선당국은 우리와 손잡고 북남관계를 풀어나가느냐 아니면 우리와 끝까지 대결하다가 선임자들처럼 비참한 종말을 고하느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있다는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북남관계에서 대전환,대변혁을 이룩하여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려는 우리의 립장은 시종일관하다.
    온 겨레는 신심과 락관을 가지고 조국해방 70돐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력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치따라 북남관계와 조국통일의 전환적국면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것이다.

    주체104(2015)년 6월 15일
    평 양

    (조선중앙통신, 2015.6.15) 

“5.24 해제와 대화와 협력으로 귀결”

“5.24 해제와 대화와 협력으로 귀결”<6.15 15돌 기념 인터뷰>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김치관 기자/이태우 인턴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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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15  15: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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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과 11일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6.15 15주년 기념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이태우 인턴기자]
“지난 2년 반동안 상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웠지만 구체적 내용 없이 불량품이라 판단한 MB정부의 강경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정책 수행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 시기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아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과거 MB 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제로 기획한 최대석 박사가 인수위원회에서 낙마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월에 북한 핵실험이 있었다”며 “정부가 막 출범하는 시기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도하고 내용을 채워야 했던 주도 세력이 낙마한 상황에 안보 위기가 벌어진 것”이라고 짚었다.
특히 “지난 2년 반동안 박근혜 정부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여권과 경제계 주요 인사, 거대 보수 언론 일부도 5.24 조치 해제를 주장하고 있다”며 “결국 5.24 조치를 능가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 정부가 크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며 “정부가 지난 2년 반 동안 대북 정책을 수행하며 설정한 목표들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즉 목표 대비 달성률에 대한 진지하고 냉철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과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밝혔으면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나아가 “어쨌든 5.24 조치를 우회해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길은 없다”며 “결국 5.24 해제와 대화와 협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누가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해 줬으면 한다”는 말속에서는 현 정부에서는 대북정책 전환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도 묻어났다.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통치스타일에 대해 “강경한 언술은 아버지 시대와 큰 차이가 없지만 남북한의 실제 무력 충돌 자체는 상당히 자제되고 있다”며 “북한이 최근 표방하는 약간의 투명성, 혹은 다원성 등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통상 김정은 제1위원장 등장 이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더 커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위협적 언술을 제외하면 실제로 서해상 충돌 등 군사적 무력 충돌은 자제되고 있다는  것.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라며 북한의 경제개발구 추진 전략에 주목하고 “북한 노동자들이 과거 중국에 가서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일반 호텔에 복무하는 등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개혁이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북중관계에 관한 단행본을 저술한 바 있는 그는 “북중관계는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며 중앙 차원의 정치교류와 지방정부 차원의 경제교류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이중구조 속에서 북중관계는 국제 정세의 영향을 일정 수준 받겠지만 민간과 지방 차원의 교류가 북한이 계속 일정하게 성장하며 발전하는 원천”이라고 분석했다.
향후 전망과 관련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4년차에 접어들기 때문에 슬슬 정상 외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중국 지도부 역시 올해 안에는 북중 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을 갖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연내 북중 정상회담설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올 가을에 김정은이 핵 실험을 강행한다면 대외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전망하면서도 “철저히 내 주관에 입각한 관점이라, 북한의 진법은 다를 수도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는 통일부 장관 재직 당시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지만 2006년 10월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정부는 쌀차관 제공 중단 등의 대응조치로 맞서 남북관계가 경색된 바 있다.
그는 “북한은 여전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서방은 모럴 해저드(moral hezard)에 빠져 북한이 핵 보유 능력을 강화하는 모든 행위를 방임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6자회담의 즉각적인 재개를 향해 정부는 노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야당에 대해서도 “야당으로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현안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 길을 잃었다고 봐야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남북문제에 대해 사안이 발생했을 때 두 마디 촌평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야당의 역할”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패러다임을 다시 세워야 한다. 통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 평화, 안정과 남북공동번영을 위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제시하면서도 “진보, 보수라는 이름으로 대북정책을 갈라놓은 양 진영의 기득권층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고민도 내비쳤다.
“낙망하지 말고 상식과 합리성의 눈으로 통일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다음은 이종석 수석연구위원과 지난 11일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MB 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
  
▲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2006년 2월 14일 취임 후 첫 공개브리핑을 갖고 '남북간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증진과 경제협력 확대'를 정책 비젼으로 제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통일뉴스 : 올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정부와 민간 모두 남북공동행사와 교류를 많이 기획했다. 하지만 최근 6.15 공동행사가 무산됐고, 또 8.15 공동행사 역시 현재 전망이 밝지 않다. 현 상황에 대한 전망은?
■ 이종석 전 장관 : 광복 70년 자체도 중요하지만 6.15와 연계하자면 분단 70년이기도 하다. 때문에 갈등과 대결을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나아가자고 약속했던 6.15 정상회담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더할 것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정치관계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현재는 종속된 상황이다. 예컨대 정책 집행자들, 혹은 정권이 남북문제를 당국 간 대화와 연결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면 민간교류가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한국 정부의 현주소에 비춰보면 민간운동이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갖고 있지 않다. 더욱이 남북 간 당국 대화가 막혀있고 악화된 상황에서 남북공동행사 개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관계 악화는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으로 누적되고 침체된 현상으로, 민간단체들이 장기적으로 형성된 장벽 사이 틈을 뚫고 대화를 통한 공동행사 개최를 계획한 것 같다. 그러나 틈새를 찾기가 어려웠던 게 아니겠는가.
총체적인 남북관계는 악화됐고, 정부 대화와 민간 대화를 분리하지 않고 정부가 모든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현 정부와, 남북관계에서 유사한 안목을 가진 김정은 정권 사이에 이해와 합의가 들어설 공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미 예상된 결과가 아니었다 싶다.
□ 결국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5년이 지난 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 약간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임기 중반인 현재까지 뚜렷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평가하나?
■ 박근혜 정부가 처음 들어서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운 것은 일단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고 평가했다는 방증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포용정책을 지지하지는 않겠지만, 포용과 이명박 정부의 강경 두 정책의 단점을 보완하며 새로운 안을 만들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어느 매장을 인수한 새 주인이 과거 매장에서 판매하던 상품들을 불량품이라고 판단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매장을 개업하기 전에 대대적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든다고 전면광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상점을 개장하고 보니 전 주인이 팔던 불량 재고품을 파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인 것이다.
즉, 박근혜 정부 초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 이명박 정부와 차별성을 띄고 남북관계를 실제로 개선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은 개략적인 틀인데, 정부 출범 초기 인수위원회에서 틀 안의 세부 내용을 채워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제로 기획한 최대석 박사가 인수위원회에서 낙마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월에 북한 핵실험이 있었다. 정부가 막 출범하는 시기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도하고 내용을 채워야 했던 주도 세력이 낙마한 상황에 안보 위기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구체적 내용은 박 대통령이 후보 당시 선거에서 공약했던 대로 채운 대신, 당시 일어난 정책 공백으로 인해 과거 MB 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2년 반동안 상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세웠지만 구체적 내용 없이 불량품이라 판단한 MB정부의 강경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정책 수행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그같은 분석에 따르면 특별한 정책 변화 없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이나 조언이 있다면?
■ 현 상황에서 흥미로운 것은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부터 통일.외교.안보 분야를 기획했던 학계 인사들의 상당수가 5.24 조치 해제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2년 반동안 박근혜 정부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여권과 경제계 주요 인사, 거대 보수 언론 일부도 5.24 조치 해제를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5.24 조치로 상징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내부에서도 팽배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5.24 조치를 능가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현 정부가 크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언을 하자면 우선 정부가 지난 2년 반 동안 대북 정책을 수행하며 설정한 목표들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즉 목표 대비 달성률에 대한 진지하고 냉철한 검토가 필요하다.
도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부의 목표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신뢰 프로세스의 작동을 통한 신뢰 조성과 관계 개선, 그리고 북한의 모험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에 대한 징벌적 교훈을 통한 교화 등이었을 것이다.
우선 지난 2년 반동안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이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남북관계는 더 악화됐으면 악화됐지, 더 진전됐다고 보는 시각도 얼마 없는 것 같다. 5.24 조치의 계승 등의 정책을 통해 북한을 압박한 결과가 북한의 반성과 양보를 통해 드러나야 하건만, 북한은 도리어 미동도 없이 북중관계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이제 박근혜 정부의 묵표 대비 달성 여부에 대한 냉철한 자평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밝혔으면 한다. 남북관계를 단순히 북한의 공산주의 공격을 억제하는 안보 차원에서 보고 있는 건지.
대통령께서 통일대박론을 이야기하셨고 통일준비위원회 역시 흡수통일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거듭 입장을 표명했다. 흡수통일에 대한 일각의 지적에 계속 부정하며 동시에 통일대박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곧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통해 통일을 실현하고 경제적인 대박, 한국의 경제적인 도약을 또한 추구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국민들에게 이번 정부가 남북관계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야기한 것이다.
다음 문제는 안보인데 우리 수준에서 제재와 압박 없이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를 한다고 안보를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아니고.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남북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계에 다다른 한국 경제의 돌파구를 열고 통일을 향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통일대박론을 통해 새삼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부가 한 번도 대외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흡수통일을 부정하며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통일대박을 이루겠다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일차방정식에 불과하다. 1+2+ x=10이라는 식이 있으면, x는 당연히 7이다. 이와 같이 ‘흡수통일 부정+남북관계 개선+x=통일대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면 x는 당연히 남북협력이라는 답은 자명하다.
이런 식으로 남북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입장을 명료하게 하고, 그걸 통해 정부가 실행해야 하는 일들을 정리하면 결국 5.24 해제와 대화와 협력으로 귀결될 것이다. 어쨌든 5.24 조치를 우회해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길은 없다.
결국 현재까지의 정부 정책이 실패했다면 바꿔야 한다. 현재 시행 중인 제재와 압박은 선악 여부를 떠나 현실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그 길을 폐기하고 새로운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누가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해 줬으면 한다.
“5.24 조치를 능가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2006년 7월 서울에서 열린 제19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측 권호웅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종석 통일부 장관. 회담은 사실상 결렬됐고 북한은 그해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누가 대통령을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보나?
■ 내부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참모들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대통령에게 설득할 수 있는 길이 따로 있겠는가. 현재 정책이 실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솔직히 보고하는 수 밖에 없다.
□ 그렇게 솔직하게 보고와 제안을 할 만한 관료 집단은 없을 것 같다.
■ 단순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들이 대북정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결과를 바람직한 대북정책 흐름으로 치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내가 10년 전에 얘기했을 때보다 오늘날 더 현실성이 있다.
10년 전에는 두 개 진영으로 나눠져 한 진영은 내게 동의했지만 보수로 표현되는 다른 집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권 여당이나 보수 인사들 중 상당수 역시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삼면만으로 대한민국을 만들어왔다면, 이제 봉쇄된 한 면을 뚫고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가 방치하고 유예하고 있다가 잡는다고 해서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심상치 않다. 중국과 북한의 경제가 계속 구조적인 결합 관계를 형성 중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계속 방치하다간 통일 국가가 만들어 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또한 남북협력을 통해 그렇게 많은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 기회의 상당수를 이미 중국이 선점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전처럼 여유를 부릴 때는 지났다.
□ 지난 2011년 12월 김정은 정권이 들어섰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도 있지만 거시적으로는 정권의 자기 정체성을 대체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라 생각한다. 김정은 지도부가 이끄는 북한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 김정은 정권은 김정일 체제에 비해 상당히 특색이 있다. 물론 핵 실험 등으로 도발성이나 호전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리고 장성택이나 최근 현영철 숙청을 통해서 김정은 리더십의 무자비함이 언론에 의해 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측면들이 김정은 리더십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불안정성에 있는 건지, 김정은 리더십의 전형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과정이지만, 분명한 것은 김정은 시대는 김정일 시대에 비해 차별화된 요소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고 이것들이 향후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김정은 정권 이래 강경한 언술은 아버지 시대와 큰 차이가 없지만 남북한의 실제 무력 충돌 자체는 상당히 자제되고 있다. 북한이 최근 표방하는 약간의 투명성, 혹은 다원성 등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김정은 정권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장경제로 진입하고 있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직전 2010~2011년 2년 동안 중국 지도부를 세 번 만나 북중 경제 관계를 단순 지원 관계에서 구조적인 연결 관계로 변모시키는데 합의를 보았다. 아마 후계자인 김정은 시대에는 전면적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냐는 결심을 한 것 같다.
그리고 2013~2014년 사이에 경제특구를 제외하고 19개의 경제개발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경제개발구는 중국과 서방을 포함한 외국 자본과 기업들의 투자와 관광객들의 방문에 지정 목적이 있다. 북한은 이미 나진, 황금평 등 중앙과 지방 모두 특구와 개발구를 만들어 전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작년 11월 즈음 중국 접격지역에 방문했을 때 양강도 혜산에 이미 중국의 중소기업이 입주해 있었다. 북한 노동자들이 과거 중국에 가서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일반 호텔에 복무하는 등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개혁이 이뤄지고 있다.
농업 역시 변혁을 거쳤다. 북한의 변화를 논할 때 정치도 중요한 요소지만 경제 또한 경시할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 정권이 개방을 할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북한의 개방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것이 이후 북한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끼칠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논하고 서해상 NLL(북방한계선)에 대해 협의하자고 요청하려면 굉장히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 정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말을 하면 북한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됐다.
북한은 이미 개방구조를 가지고 있고, NLL과 관련해 가장 예민한 연평도 부근 최전선인 황해남도 강령, 북한의 해군 8전대가 있는 강령을 국제녹색경제개발구로 지정하고 중앙 차원의 개발을 발표했다.
즉, NLL의 평화수역화에 대해 우리가 문제제기를 하면 대화의 여지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북한 내부를 관찰했을 때 정치 등 불안한 요소들이 많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남북 경제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창이 열려있는데 우리가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북중관계는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 북한과 북중관계 전문가인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통치스타일과 북중관계에 관계의 이중성 등에 대해 자신만의 논지를 폈다. [사진 - 통일뉴스 이태우 인턴기자]
□ 북중관계와 북러관계 등 국제관계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최근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지만 북중관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냉랭하다는 말도 있고. 최근 들어서는 북러관계도 부상하고 있고, 또 가끔 북일관계를 활용하기도 한다. 북중관계를 어떻게 보나?
■ 북러관계가 북중관계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북중교역이나 경제협력의 규모는 북러교역이나 정치관계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2010년 천안함 사태가 난 직후부터 2011년 8월까지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 김정일과 후진타오, 또 김정일과 원자바오 사이 세 차례의 회담이 있었다.
2009년 북핵실험이 있었고 2010년에 천안함 사태, 그리고 5.24 조치가 있었지만 중국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압박을 공개적으로는 지지했지만 2009년 10월에는 원자바오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중 경제협력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를 보았다.
결국 북중관계는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정부 수준의 북중관계, 또 하나는 민간 또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발생하는 경제관계다. 우리는 맨 위의 정부 당국 관계만 바라본다. 하지만 지방정부나 민간 차원의 경제협력 또한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실 당시부터 전 세계 지하자원을 빨아들이는 하마같은 존재였다. 중국의 자원에 대한 수요와 인근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 공급능력이 맞닿아 중국의 동북3성 등과 북한과의 구조적인 결착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북한 핵 실험 여부와 상관없이 이러한 이해관계는 항상성을 지닌다.
아무리 중국 지방정부와의 교류라고 해도 북한 전체 인구가 2,400만 명인데 반해 길림성 인구가 2,400만 명, 흑룡강성은 3,500만 명에 달한다. 국가 단위에 맞먹는 엄청난 교류다.
이보다 더 큰 틀은 중앙 당국의 협력으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안 등 대북 제재에 영향을 받고 시진핑 역시 북한에 싫은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언론은 이 싫은 소리에 초점을 맞춰 북한의 붕괴를 예측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구조 덕분에 중앙 당국 간 사이가 나빠져도 지방 차원의 경제 교류는 지속된다.
중국은 국제 사회의 G2로서 위상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도발적인 행동에 대해 언술 수준에서 제재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북중관계를 재단할 수는 없다. 이중구조 속에서 북중관계는 국제 정세의 영향을 일정 수준 받겠지만 민간과 지방 차원의 교류가 북한이 계속 일정하게 성장하며 발전하는 원천이다.
□ 최근 중국의 대북 원유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 우선 중국 중앙정부에서 원유 공급을 끊었다고 공식적으로 공표한 적이 없다. 그리고 예전에는 중국의 대북 원조가 북한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북중경제의 구조적 연결성이 강화돼 북중 경협과 교역만으로도 북한에 유입되는 달러 규모가 상당해 원유 구입이 예전만큼 재정적 부담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에 진출한 개성공단의 북한 노동자 임금은 백 달러도 안 되지만 중국에 진출한 북한 노동자들의 월급은 훨씬 높다. 비록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중국에 진출한 북한 노동자가 최소 5만 명이라고 하고, 아프리카, 시베리아 등에도 진출했기 때문에 북한의 외화 보유 규모나 경제 규모는 예전보다 훨씬 뛰어나다.
중국 정부가 정말 원유 파이프를 걸어 잠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의 대북 원유 공급이 북한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2009년 당시 북한 내 휴대폰 수가 불과 몇 천, 몇 만 대에 불과했을 텐데 재작년에 이미 250만 대를 돌파했다고 한다. 우리의 비관적인 평가와 무관하게 북한의 경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즉, 북한과 중국과의 교역이 생각보다 북한 경제에 상당한 지탱력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 흔히 김정일,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을 평가할 때 정상 회담을 떠올린다. 그런데 최근 김정은 제1위원장은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불참하고 집권 이래 현재까지 북중 정상회담을 갖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한 평가는?
■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4년차에 접어들기 때문에 슬슬 정상 외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국 지도부 역시 올해 안에는 북중 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을 갖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한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러시아 전승절 행사 참가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당시 북중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북러정상회담이 먼저 이뤄질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김정은의 불참이 다리 통풍 때문인지, 국내 정치의 불안정성 때문인지, 전략적 고려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올해 정도에 북중 정상회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다.
그리고 6자회담에 대해 무조건 북한의 더 긍정적인 자세를 촉구하는 것은 적절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6자회담 결렬에 대한 책임을 무조건 북한에 전가할 수는 없다. 북한은 분명히 과거 참석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북 4차 핵실험,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 지난달 27일 한반도평화포럼 특별좌담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이종석 수석연구위원. 왼쪽부터 이종석 수석연구위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올해는 북한에게 정권 수립 70돌이자 당 창건 70주년 등으로 중요한 해다. 당 대회를 여느냐, 인공위성을 쏘느냐, 핵실험을 하느냐 등 다양한 시나리오와 관측들이 나왔는데, 당 창건 기념일 행사를 계기로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를 예상해 본다면?
■ 북한의 2006, 2009, 2013년 핵 실험 과정을 보면, 공통점은 단순히 핵 실험만 강행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06년에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고, 2009년과 2013년은 로켓 발사를 했다. 두 단계의 단계적 행동을 취한 것이다.
북한은 핵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확을 계산할 것이다. 우선 2006년 핵 실험은 BDA(방코델타아시아)라는 특별한 국면에서 미국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했다. 2013년 실험은 김정은의 체제 정통성 확립과, 로켓 발사에 대한 국제 사회의 규탄에 대한 반응 등이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올 가을에 김정은이 핵 실험을 강행한다면 대외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철저히 내 주관에 입각한 관점이라, 북한의 진법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3차 핵 실험이 있었던 2013년 1월 당시 북한은 경제 발전에 대한 외부적 공표가 없었다. 그리고 2013년 5월 경제개발구 계획을 발표했다. 그 언저리에 개성공단 사태가 발생했을 때, 김정은은 개성 단 내 북한 노동자들의 철수를 명령했다가 이내 철회하고 저자세를 보였다.
북한이 자세를 낮춘 유일한 이유는 경제개발구를 만들어 해외자본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타국 자본가들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어느 자본가가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소환하는 사회에 투자하고 싶어할까.
하지만 당시 정부는 북한의 시그널을 오독해 “우리가 강경하게 대응하니 북한이 무릎을 꿇었다!”고 해석해버렸다. 이후 견지한 강경대북정책으로 인해 이산가족 상봉도 무산되고 남북관계의 진척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2013년 5월에 경제개발구법을 발의하고 19개의 경제개발구를 지정한 상황에서 핵 실험을 강행한다면 북한 경제가 입을 타격이 막대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타당한 수준의 외부의 압박이나 갈등이 발생했으면 모를까, 굳이 핵 실험을 진행할 동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핵 실험을 강행한다면 미국은 관성적으로 유엔 안보리에서 추가 제재를 기획할 수 밖에 없고, 중국은 또 비판 성명을 내야 한다. 국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북한이 현재 갈망하는 경제협력과 관광객 유치에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 실험을 한다면, 국제 사회가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을 취해야 하건만 모두가 실제적으로 핵 억제와는 무관한 압박과 조치만을 계속하고 있다. 그 뒤에서 북한은 여전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서방은 모럴 해저드(moral hezard)에 빠져 북한이 핵 보유 능력을 강화하는 모든 행위를 방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국민과 미국 국민이 왼편에, 북한이 오른편에 있고 정부가 그 가운데 서있다고 가정하자. 정부와 북한의 거리는 2m지만 정부는 1.5m짜리 채찍을 휘두른다. 정부 뒤에 숨은 국민들은 북한이 채찍에 맞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없지만 이 형세는 계속되고 있다. 이 와중에 한반도 정세는 더욱 악화되고 북한 핵 문제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으로 향하고 있다.
단순히 북한만 비난할 문제는 아닌데,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나 미국 정부 모두 북한 문제에 대해 모럴 해저드에 빠져 있다. 우리는 정신 차리고 남북문제와 북핵문제를 재고해야 한다. 남북이 대화를 제기하려면 진정성을 보여야 하고, 6자회담 등의 창구를 통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논리조차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말 안타깝고 6자회담의 즉각적인 재개를 향해 정부는 노력해야 한다.
□ 야당 역시 충실한 역할을 못해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지난 대선후보로서 NLL 문제에 대처한 것이나 최근 천안함 사건 관련 발언 등을 통해 볼 때 과연 제 1야당이 북한 문제나 외교 문제에 있어 현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다.
■ 지난달 26일 ‘한반도평화포럼 특별좌담’ 당시 동일한 문제를 제기했는데 원로들께서 충분히 답해주지 않았다.
우리 사회처럼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진행되면서도 이념적인 이데올로기 지향은 점점 좁아지는 기형적 구조에서 야당이라고 해도 남북문제에 있어 상당히 조심스러운 건 이해를 한다. 그리고 예민한 부분에 대해서 정치적 언술을 써야 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경과하며 통일안보분야, 특히 대북정책 등에 있어 국민정부나 참여정부에서 논란이 되었던 정책들이 사실 합리적이고 필요한 정책이었다는 인식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즉, 야당은 10년 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 운영과 남북관계 조율을 해 본 경험과 유산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그러면 남북문제에 대한 대안과 강력한 이니셔티브를 원천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천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그래도 전직 장관들과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자문을 구했는데, 최근 3,4년은 그러한 관례도 더 이상 전무하다. 천안함 사태 이후 남북관계는 파멸적 관계로 치닫고 있지만 야당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본인들이 갖고 있는 강점과 유산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야당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북한 문제를 바라보자”
  
▲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은 대북 문제에 있어서 '상식'과 '합리'를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태우 인턴기자]
□ 문재인 대표도 있고, 박지원 의원도 있고, 전직 장관들로 구성된 한반도평화포럼이라는 든든한 우군도 존재하지 않나. 한 시기를 실제로 책임졌던 인사들인데.
■ 하지만 한반도평화포럼이 나서서 야당을 끌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름대로 판단하고 건설적 대안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야당이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야당으로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현안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 길을 잃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굉장히 불행한 일이고 과연 이래서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야당에 남북관계와 대북 정책에 대한 대오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전직 통일부 장관들이 여러분 있고, 문재인 대표와도 함께 일한 분들 아닌가?
■ 문 대표를 특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여하튼 남북문제에 대해 사안이 발생했을 때 두 마디 촌평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야당의 역할이다.
이미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은 우리들의 경험의 범위 내에서 제시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지만 야당이 이와 같은 대처를 제대로 했다는 이미지가 지금 우리 머리 속에 없다.
□ 우리 사회가 계속 보수화와 반북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분석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또한 향후 진로나 또는 주력하려고 하는 방향이 있다면?
■ 정말 가슴아픈 것은 북한 문제에 대한 극단적으로 상반된 생각이 혼재한다는 것이다. 북한과 경제협력을 하면 수반되는 이득이 엄청나다고 주장하면서도 북한과 흡수통일을 하면 통일 비용이 엄청나다는 우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런 사고나, 북한 이야기만 나와도 질색하는 혐오 증세 등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민족은 하나라는 생각 또한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에게 애증이 혼재하기 때문이겠지만, 우리 사회 속 남북관계를 통해 모색하는 희망과 열망이 과거에 비해 점점 식어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여권이 통일회의론을 만들고, 분단지향적인 정책을 입안하며 북한 혐오를 재생산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부 종편이 자극적으로 북한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여권이 북한 혐오증을 양산하기 위해 특별히 애를 쓰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 혼재하곤 한다.
또한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진영을 나누고 대북정책과 북한에 대한 시각을 모두 분리한다. 내가 대중 강연을 하면 누군가는 동의하며 박수를 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철저히 반대하기도 한다. 진영을 분리해 나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풍토가 우리 가운데 뿌리내린 것 같다.
대북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남북관계는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종종 대중 강연 도중 ‘북한 정권이 진보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북한 정권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어떻게 3대 세습하는 정권이 진보적인가. 남한의 수구 정권보다 더 수구적이다. 이러니 수구적인 북한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연대하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란 것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북한 문제를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공동번영, 그리고 민족의 통일. 이게 무슨 보수와 진보가 갈릴 문제인가.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살려면 함께 가야하는 길이다.
□ 본래 민족이나 통일은 보수가 표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사실 세인들이 나를 진보 진영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계급 문제에 큰 관심도 없을 뿐더러, 대한민국의 자주를 강조하다가 미국에게 한 소리 들을 정도로 자주, 주권을 강조했다. 자주, 주권은 따지고 보면 보수가 더 강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나를 진보로 보는 일각의 시선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을 다시 세워야 한다. 통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 평화, 안정과 남북공동번영을 위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남북대화에 대해서도 북한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남한만 비판하는 인사들도 있다. 이들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끌어안을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통일은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합리를 바탕으로 공동선의 성취를 향해 재구성돼야 한다.
진보, 보수라는 이름으로 대북정책을 갈라놓은 양 진영의 기득권층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낙망하지 말고 상식과 합리성의 눈으로 통일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
생각의 전환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도 이제 진영논리로 편을 가르는 관성에서 벗어나 사안을 바라보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일전쟁 2차 국공내전 그리고 6.25에서 중국 공산군의 주역


이동훈 2015.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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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자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졌던 달이다. 6.25 하면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던 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전격 참전으로 물러나야 했던 역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국군을 누가 지휘했는지 알고 있는가? 세계 최강이던 UN군을 빈약한 장비와 보급을 받는 중국군 앞에 패주하게 했던 명지휘관. 그가 바로 팽덕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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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서구 선진국들의 주요 군사지휘관들을 보면, 사관학교와 국방대학을 졸업한데다 때로는 집안까지 상류층인, 속된 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에 다룰 팽덕회(彭德懷, 중국명 표기는 펑더화이이지만 본고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해 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한자의 우리음으로 표기)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군사 교육은 물론 제대로 된 정규 교육 과정도 받지 못했으면서도 다년간의 실전 경험에서 두각을 나타내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 성분은 평등과 노동자 계급 독재를 강조하던 공산국가의 군대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군 및 국민당에 맞서 싸워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한국 전쟁에서 중국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북한의 함락을 막은 팽덕회. 그러나 그는 말년에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팽덕회는 1898년 10월 24일 중국 호남성 상담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팽의 아버지는 1.5에이커 정도의 토지에서 농사로 8명의 식구(동거하고 있던 팽의 할머니와 종조부 포함)를 먹여 살렸다. 태평천국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던 팽의 종조부는 팽이 어릴 적부터 충분한 식량생산, 여성의 전족 철폐, 토지 균배 등의 이념을 설파했다고 한다.
  팽덕회는 1905~1907년 사이에 동네 서당을 다닌 다음, 1908년에는 현대식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05~1906 연속으로 가뭄이 호남성을 덮친 탓에 팽의 집안 식구 2명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학교를 1년도 못 다니고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13년 또 가뭄이 들자 데모에 참가해 지역 농산물 상인의 창고를 약탈한다. 경찰이 수배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을 떠나 도망쳤다가, 1916년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당의 동맹인 탕향명의 군벌 부대에 이등병으로 입대,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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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팽덕회

 초기에는 국민당군의 병사로

 당시 팽의 이등병 월급은 중국 돈으로 5.5위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칠게 계산해보면 요즘 우리 돈으로 65,000원 정도에 해당한다. 그는 매달 월급에서 2위안씩을 떼어 고향에 송금했다. 팽의 지휘관 중에는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이상적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팽은 그 영향을 받아 사회 개혁과 국민 통합이라는 국민당의 목표에 공감하게 된다.
 이후 중국내에서 벌어지던 내전에 참전해 상당한 군사 경력을 쌓은 그는 1921년 8월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남현의 어느 마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은 지역 지주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고 마는데, 그의 소신이 매우 잘 드러난 행동이었다. 이 일로 질책을 당한 그는 이듬해 2월, 이미 자신의 군벌 부대를 떠나 국민당군에 입대하기 위해 무급휴가를 받아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에서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그는 군대를 떠나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 옛 전우들의 설득에 넘어간 그는 1923년 호남성의 지역 사관학교에 입학, 9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옛 군벌 부대에 대위 계급으로 복귀한다. 
  1924년 그의 군벌 부대가 정치적 노선을 반국민당 노선으로 바꾸자, 당시 임시 대대장을 맡고 있던 팽덕회는 이듬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계속 공을 세워 중령 계급의 연대장으로 진급해 있던 1927년의 팽덕회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를 중국 공산당에 입당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들의 설득에 넘어간 팽덕회는 1928년 2월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2000명으로 구성된 팽덕회의 연대가 평강현을 점령하자, 팽덕회는 해당지역의 고위 공무원과 군벌 장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버린 뒤, 다음날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의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공산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아울러 중국 공산당의 우두머리이던 모택동 및 주덕 진영에의 합류도 선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공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팽덕회의 연대는 10월, 병력이 수백 명 수준으로 줄어들자 정강산으로 후퇴해 중국 공산당 게릴라 부대와 합류한다.

 공산군의 장교로 변신 국공내전에서 활약

  이후 팽덕회는 국민당에게 포위된 모택동, 주덕을 구출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강서성 서금시를 공격해 1929년 1월 강서성 혁명근거지를 창설한다. 같은 해 중순, 정강산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병력은 지역 산적들을 규합해 2,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팽덕회는 이 병력을 이용해 호남성 도처에서 습격을 벌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신병들을 모았다.
  1930년 7월 13일,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당수였던 이입삼은 전국적인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성도 하나를 점령할 것을 전국의 공산군 부대에 지시했다. 팽덕회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7월 25일, 17,000명의 병력과 게릴라 10,000명을 데리고 호남성의 성도 장사를 공격했다. 7월 30일 장사를 점령한 팽덕회는 8월 1일 호남성 혁명근거지 정부를 수립하고, 정부수반으로는 당시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살던 이입삼을 추대, 자신은 부수반을 자임했다. 그러나 8월 5일 국민당군의 반격을 받은 그는 결국 장사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럼에도 그는 1930년 12월~1931년 5월 사이에 벌어진 강서성 혁명근거지 방어전에서 국민당군의 포위를 3번이나 깨뜨려 중국 공산당 내에서 임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1931년 11월 7일에는 강서성 혁명근거지의 중앙군사위원회 및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정치 지도자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로도 그는 국민당의 공격을 계속 훌륭히 막아냈다. 그러나 1933년 장개석이 약 8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서성의 공산당에 맞서 제5차 포위전을 벌이자, 35,000명에 달하던 팽덕회의 병력은 1934년 10월 1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0월 20일 팽덕회를 비롯한 중국 공산군은 강서를 떠나 대장정에 이른다. 딱 1년 만인 1935년 10월 20일, 목적지인 섬서성에 도달한 팽덕회 부대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때 중국 공산당 내 모택동의 부상을 도운 팽덕회는, 중국 공산군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중국 현지에서 팽덕회를 인터뷰한 후, 자신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 무려 두 장을 할애해 그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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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파견된 미군 장교(가운데)와 포즈를 취한 모택동(좌)과 팽덕회(우).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을 격퇴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실시한다. 일본군과의 싸움은 보여주기 정도로 족하고, 국공합작의 진짜 목적은 훗날을 위한 공산군 병력의 건사라고 믿었던 모택동과는 달리, 팽덕회는 공산군이 일본군 격멸에 온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팽덕회의 의견대로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1940년 7월, 중국 공산군은 일본군에 맞선 사상 최대 규모의 공세인 백단 대전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 정규군 병력 20만 명과, 게릴라 병력 20만 명, 도합 40만 명이 참여한 이 공세의 총지휘관은 팽덕회였다. 공산군은 그 해 8월~10월에 걸쳐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끼쳤으며, 10월에 벌어진 일본군의 반격도 대부분 성공리에 물리쳤다. 백단 대전으로 인해 입은 일본 측 손실이 완전 복구된 것은 1942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전투 후 연안으로 소환된 그는 모택동에 의해 백단 대전의 ‘실책’에 대해 혹독한 자아비판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팽덕회는 모택동을 보필하면서 주로 정치지도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갈라져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결전을 벌이게 된다. 1946년 3월 당시 110만 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던 중국 공산군은 현재의 이름인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게 되고, 팽덕회는 17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북서야전군의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북서야전군의 장비 상태는 국민당군에 비해 열악했으나, 그들은 초반에는 후퇴하면서 호종남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공세 한계점까지 몰아붙인 후, 이후 반격하여 1947년 8월 대승리를 얻어내고,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국민당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는다. 또한 1948년 2월에는 국민당군을 섬서성에서 내쫓는다. 팽덕회는 1947년부터 1949년 9월 22일까지 호종남, 마보방 등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상대로 계속 승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국민당군 잔여전력을 괴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국민당군은 1949년 12월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철수한다.
  국민당군의 철수 이후에도 여러 소수민족 게릴라와 공산군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팽덕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북서부 군사 및 행정위원회 위원장 겸 신강 지역 군 총사령관 및 정치장교를 맡게 되었다. 이로서 그는 섬서, 감숙, 영하, 청해, 신강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과 약 3,000만 명의 인구를 책임지게 되었다. 공산군이 이 지역의 적들을 섬멸하고 신강 지역을 완전 정복한 것은 1951년 9월이 되어서였다.  

 6.25 전쟁에서 북한을 구해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함으로서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초전에 단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 북한.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남한을 돕기 위해 투입되면서 전세는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UN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성공,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그 달이 지나가기 전에 서울을 수복했다. 그리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 내부로 북진하기에 이른다. 그냥 놔두면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이 중-북 국경에 도달하는 것은 뻔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북경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UN군이 북한을 괴멸시키고 중국 본토에 침공해 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 사태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였다. 대부분의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중국 본토가 적의 침공을 받지 않는 한 한국전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택동과 주은래는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UN군으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한에 파견될 중국군의 사령관으로 임표를 내정했다. 그러나 임표는 건강상의 문제로 이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에 팽덕회가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으로 내정된다. 
 10월 4일 북경에 도착한 팽덕회는 참전 찬성 의견과 반대 의견을 모두 경청한 후, 다음날 모택동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안겨다 준 팽덕회가 찬성을 하자 대세는 참전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1주간 팽덕회는 심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한국 참전 전략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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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왼쪽)와 모택동. 혁명 동지이기는 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 역시 중국의 참전을 승인하자, 10월 19일 밤 제1파 26만 명의 중국군 병력이 중-북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투입되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UN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10월 25일, 온정과 운산에서였다. 이들 중국군은 11월 4일까지 UN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밀어붙였다. 이후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팽덕회는 총 3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38선 이북의 북한 영토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50년 12월 31일부터 그는 23만 명의 중국군을 38선 이남으로 투입했다.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통해 중국을 위한 확실한 울타리를 확보하려는 모택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진격은 UN군의 맹반격에 의해 중지되었고 서울은 3월 14일, 별다른 전투도 없이 다시 UN군에게 수복되었다. 팽덕회는 서울을 빼앗기 위해 54만 8천 명의 병력으로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마지막 대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공산군과 UN군은 더 이상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휴전 시까지 전선의 고착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팽덕회 휘하의 중국군이 한국 전쟁에서 보여준 성과는 당시 중국군의 역량과 한계를 모두 다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군은 UN군 전선의 취약 지역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해 기습 돌파하는 인해전술을 통해, UN군에게 상당한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주었다. UN군에게 중국군의 병력이 무한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보급체계 및 기계화 전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전쟁 첫해 중국군의 보급을 책임진 것은 7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인력으로 운반한 보급품들이었다. 때문에 중국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려 공세를 1~2주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동계장비의 보급까지 늦어진 바람에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2일 사이에 동사한 중국군 장병의 수만 해도 45,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기갑, 항공, 해상전력으로 가면 UN군과의 격차는 그야말로 비교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중국군의 사정상 팽덕회는 1951년 여름까지 인해전술에 철저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권은 중국의 개입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인명피해도 실로 막심한 수준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전사 및 부상을 당한 중국군 병력은 100만 명을 가뿐히 넘었다. 하지만 팽덕회는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종교적이기까지 한 충성심으로 이러한 엄청난 인명 소모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많은 중국이라지만 이 정도의 인명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팽덕회와 주은래, 모택동은 이러한 인명 피해의 심각성과, 이를 줄일 방법, 특히 후진적인 보급체계의 개선에 대해 1951년에 여러 차례 만나 논의했다. 결국 1951년과 1952년 사이의 겨울, 팽덕회는 더 이상 한국 전쟁을 끌었다가는 공산측과 UN측 중 누구도 가까운 장래에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2년, 중국의 전쟁 수행을 더욱 원활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취해졌다. 중국인민지원군 병력을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한국 전쟁에 교대로 투입시키고, 중국 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을 가속화하며, 일선에 더 많은 대공포를 배치하고, 소련에서 더 많은 군수품을 도입하며 군의 식량 및 피복 지급량을 늘린다는 것이었다. 군의 보급책임도 중국 중앙정부로 넘어갔다. 팽덕회는 특히 부패와 낭비야말로 중국군의 주적이라고 믿었기에, 부패와 낭비, 관료주의를 척결하자는 3반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2년 4월, 팽덕회는 뇌종양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중국측 대표로 정전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7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집회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은 팽덕회의 공헌을 높이 사 그에게 지난 1951년에 이어 북한 제1급 국기훈장을 다시금 수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팽덕회는 한국 전쟁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청난 인명 손실로 인해 그는 중국군의 현대화와 기계화, 전문화, 신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정치사상 교육보다 군사훈련이, 정치장교보다 군사지휘관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공산국가들 중 현대전을 치를 대비가 충분히 된 나라는 소련뿐이었기에, 그는 소련군을 중국군이 따라야 할 롤모델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군사적 관점, 그리고 모든 인민들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겼던 정치적 관점은 모택동의 생각과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1950년대 후반부터 둘의 불협화음은 심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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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시초프(맨 오른쪽)를 만나는 팽덕회(왼쪽 두번째)

중국 초대 국방부 부장에 취임

  앞서 살펴보았듯이 1952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한 팽덕회는 1954년 봄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모택동)을 맡아 사실상의 중국군 최고위 장교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초대 국방부 부장(국방부 장관을 부르는 중국식 호칭)에 취임한다. 그리고 다음달부터, 소련군을 모델로 한 중국군 현대화 계획에 돌입한다. 
  또한 그는 이듬해인 1955년 1월, 국민당이 지키고 있던 저장성의 여러 섬들을 공격해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이 섬에서 멀게는 상해까지 게릴라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중화민국을 지키기 위해 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동독, 폴란드, 소련 등 선진 공산국가를 시찰한 다음, 그해 9월 중국군의 4대 주요 제도를 수립, 정비하기에 이른다. 그 주요 제도란 다름 아닌 계급제도, 호봉제도, 상훈 제도, 징병제도였다. 이전의 중국군은 공산주의 사상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계급도 없이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의 보직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일개 정당의 정치폭력조직에 더 가까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된 ‘국가의 군대’ 모양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다. 훈장과 기장, 소련군의 군복을 본뜬 복제도 제정되었다. 그는 그 해 9월 27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2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이 큰 점을 인정받아 주덕, 임표 등과 함께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1956년에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꾸었으며, 이등병에서부터 원수에 이르는 18개 계급에 따르는 호봉이 정해졌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정치위원에 대한 지휘관의 우위를 명문화했다. 1956년 9월, 군의 전문화, 실전과 같은 훈련과 엄격한 군기, 현대 기술 장비에 대한 전문성 확보 등 팽덕회가 내세운 강령이 중국군 내에 정착되었다.
  하지만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모택동은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보다 군사적 효율성을 우선시해 군을 경영하려던 팽덕회의 행보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국공내전 때부터도 이런저런 의견 충돌을 빚어왔지만, 국공내전, 중일전쟁, 한국전쟁이 모두 끝나고 눈앞의 적이 모두 사라지자 그 갈등이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둘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는 그 외에도 많았다. 1958년 금문도 사건에서 팽덕회가 이끌던 중국군은 국민당군에게 처참하게 대패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중국 인민의 영웅으로 신격화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던 모택동에 대한 팽덕회의 혐오 역시 커져갔다. 팽덕회는 북경 군사박물관에 모택동의 흉상이 전시되는 것도 반대했고, 부하 병사들이 “모택동 만세!”를 외치자 “모택동이 정말로 10,000년이나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100살도 못 살고 죽을 거야. 그런데 만세라니? 그건 개인숭배야!” 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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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 당시 대중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팽덕회.

몰락과 숙청

  1958년, 모택동은 중국을 10년 내에 미국 이상의 선진국이자 공업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차다 못해 황당한 목표를 띤 <대약진 운동>을 시작한다. 농부들을 억지로 공장에 밀어 넣어 강제로 중공업에 종사케 한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처참했다. 농가에 일손이 줄어들자 식량생산량이 급감했고, 불과 1년 만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분개한 사람들은 각지에서 정부의 식량 저장소를 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대약진 운동은 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기존의 중국군에서 완전 독립되어 공산당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대규모(무려 수천만 명 규모의!) 민병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당연히 팽덕회의 눈에 이런 정신나간 정책들이 옳게 보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심각하던 팽덕회와 모택동 사이의 알력은 이로서 극에 달했고, 결국 1959년 9월, 국방부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팽덕회의 후임으로는 평소 그의 라이벌이었던 임표가 임명되었다. 이로서 1916년부터 시작된 팽덕회의 군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모택동은 1965년 팽덕회에게 중국 남서부 산업 개발 계획인 삼선건설의 지휘를 맡으라고 하여 그를 다시금 공직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66년, 중국 공산당의 친위쿠데타격 사건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바로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어 북경으로 압송, 옥고를 치르며 고문과 가혹행위 등 고초를 당해야 했다. 평소에 소련군을 중국군의 롤모델로 삼고, 소련과의 군사교류를 통해 중국군의 현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모택동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던 팽덕회는 홍위병들에게 ‘인민의 적 1호’였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팽덕회의 수감 여건은 그리 좋지 않았고, 그는 감옥에서 결핵과 혈전증을 얻고 만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던 그는 1974년 11월 29일 숨을 거두고 만다. 유해는 화장되어 성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인 1976년 모택동도 세상을 떠나고, 1978년 12월 제11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등소평은 팽덕회의 사면 복권을 공식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팽덕회 추모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1966년 팽덕회 체포를 현장 지휘했던 홍위병 왕다빈에게 9년형이 선고되었다. 1986년에는 그의 자서전이 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팽덕회 탄생 90주년 기념우표도 발간되었다. 호남성에 있던 팽덕회의 생가는 현재 복원되어 기념관 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민족감정, 냉전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도, 분명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인물도 독재자 모택동의 입김 앞에서는 제대로 맥을 추지 못하던 모습에서, 과연 정치와 군사 간의 올바른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정치 체제가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글: 이동훈 객원기자(enitel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