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6일 일요일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현장을 가다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현장을 가다

정현환 2015.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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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중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한국과 중국은 작년부터 협조했다. 우리 (중국) 중앙정부는 이일에 대해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우리 인민들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국 측 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더우위페이(竇玉沛) 민정부 부부장>
 2015년 3월 20일. 65년 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과 중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자의 유해를 함께 들었다. 주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함에 오성홍기를 덮으며, 백승주 국방부 차관 등이 유해 68구를 배웅했다. 그동안 북한을 거쳐 송환됐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중국측에 직접 인도되었다.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의 상흔’이라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긴 여정에 첫발을 내딛었다. 유해발굴에서 송환까지,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앞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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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홍기(五星紅旗)에 덮인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가슴에 품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의장대의 모습.  (사진/ 정현환 기자)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배경

 2013년 3월 29일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류옌둥(劉延東) 중국 부총리 겸 국무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아 중국 전사자 유해 360구를 송환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으로, 1년뒤인 2014년 3월 한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437구를 처음으로 중국측에 송환했다. 작년 송환 이후 2015년 3월 20일에도 1년 동안 발굴된 인민지원군 유해 68구를 중국측에 건넸다. 국방부는 이번 유해를 송환하며 “분단 70주년을 맞아 과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양국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송환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랴오닝성 선양의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을 일컫는 중국 정부의 공식 명칭) 열사능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한국 정부는 매년 4월 5일 청명절(淸明節, 중국에서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에 중국에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정기적으로 인도할 예정이다.

60년간 타국에 묻혔던 중국 전사자 유해는 총 403구

 2013년 중국을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방중 나흘째되는 날 베이징(北京) 칭화대학(淸華大學) 환영간담회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칭화대 학생들 앞에서 중국 방문을 “심신지려(心信之旅,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라고 표현했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한·중 두 국가가 우의를 다지는 방안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 유해들이 이제는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류옌둥(劉延東) 부총리는 “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멀리 가더라도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중국 속담을 언급하며 박 대통령에 감사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의 제안은 곧바로 시진핑 주석에게 보고 됐다.
  곧이어 청와대는 정전협정 이후 지난 1997년까지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403구가 발굴됐다”면서, 그동안 43구를 UN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중국 측에 송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송환되지 않은 360구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북한군 유해와 함께 임시로 매장했다”고 언급했다.

우여곡절을 겪었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유해 송환 문제는 전쟁협정 당사자들 간의 문제이다. 그런데 한국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가 아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정전협정 당사자인 UN군사령부와 북한의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가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이러한 사실은 1981년에서 1997년까지 중국군 전사자 유해가 송환된 과정을 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이 기간 동안 중국측에 반환된 43구의 유해는 작년과 올해에 중국에 직접 송환된 것과 달리 북한을 거쳐 돌아갔다. 한·중 간의 사안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라 군정위와 판문점에서 열린 장성급 회담을 통해 송환됐을 뿐이다. 이번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송환하는 과정에 참여한 국방부 관계자도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군정위를 통해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유해송환 이후 중국 분위기

  3월20일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중국 본토로 송환된 다음날인 21일 유해는 중국 선양 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 지원군 열사기념광장(志願軍烈士紀念廣場)에서 안장됐다. 민정부, 해방군 총정치부, 선양전구부대(瀋陽戰區部隊) 군 지휘관들을 비롯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했던 노병(老兵)과 참전 용사들과 초·중학교 학생 400여 명이 참석했다.
 현지 언론매체는 이날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했는데, 작년 제1차 한중 유해송환 현장에 참석했던 사업가 장웨이(張偉) 씨는 중국 정부 외문국(外文局) 산하 인민화보(人民畵報)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후손이라고 밝히며, “자기 가족의 유골도 이처럼 정중하게 대해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남방일보>(南方日報)는 사설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발굴 작업에 한국측의 성의에 감사”를 전했고,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 인민왕(人民網)은 “최근 중·한 양국의 전략적 소통이 원활해지고 정치적 상호신뢰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두 번에 걸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순조롭게 귀환해 안장된 것은 양국이 여러 분야에서 밀접하게 협력하는 좋은 관계임을 보여 준다”고 논평했다.
 더욱이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과 관련된 현지의 뜨거운 분위기는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번 유해 송환을 지켜본 중국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유해에 애도를 표하면서 “한국측의 선의와 진지하고 세심한 배려에 만족과 감사”를 드러냈다. 특히, 중국의 한 네티즌(아이디: 一枝梅)은 “중·한 양국이 이제 역사의 짐을 벗었다”고 언급하며, “이번 일의 의미가 남다르고, 한국의 조치에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은 중국 지도층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치더쉐(齊德學) 군사과학원 전 군사역사 연구부 부원장은 “인도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 것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번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지켜본 감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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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0일 중국으로 송환된 유해는 21일 중국 선양 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 지원군열사기념광장(志願軍烈士紀念廣場)에 안장됐다. 6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전우에게 묵념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노병(老兵)의 모습. (사진출처: 바이두) 

경색된 '남·북관계'가 되레 유해송환을 이끌어

  현재 남과 북의 관계는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달리고 있다. 특히, 지난 MB 정권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최악을 맞이했으며, 현 정부까지 이어져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색된 남과 북의 관계는 현재 그동안 역대 남측 정부와 북측이 불편한 관계 속에서 물밑으로 이루어졌던 인도적 제안마저 거부하고 있는 실정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관계는 남쪽이 중국이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북한의 소통 부재와 대화 단절의 태도는 중국과 경제적·정치적 관계를 긴밀하게 구축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과 2011년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를 중국으로 송환하는 사업(해외열사기념시설 보호 관리 업무)을 펼치고 있는 중국에게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사의 동의하에 한국과 중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을 두고 긴밀한 교섭을 펼쳤다. 양쪽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60여 년간 타지에 매장되어 있던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2014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 437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통해 ‘광복군’ 표지석 설치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있었다. 광복군은 과거 중국의 시안(西安)에주둔지를 두고 활동했었다. 광복군은 시안의 창안구(長安區)와 두취진(杜曲鎭) 두 곳에 주둔하며 조국 광복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두 곳이 무관심으로 인해 방치되고 있었다. 이에 박근혜 정부는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통해 이 두 곳에 광복군 표지석 설치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3월 29일 산시성(陝西省)의 자오정융(趙正永) 당서기, 러우친젠(婁勤儉) 성장과 만난 자리에서 “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주둔지가 있었던 곳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9년부터 추진해온 정부주도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은 아니다. 이는 앞으로도 한국이 두 차례에 걸친 송환과정에서처럼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가 발굴되고 송환되는 문제에 있어 계속 UN군사령부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해외에 묻힌 중국 전사자의 숫자는 11만 5217구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중 99%에 이르는 11만 4000여구가 한반도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앞으로도 유해발굴 사업은 계속 진행될 예정인데, 유해가 발굴 때마다 UN군사령부의 동의를 언제까지 얻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더욱이 지금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은 현재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반면 한중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세 국가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다. 정치·외교적 차원을 넘어 인도적 차원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지 남한과 중국 그리고 북한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나아가 한국정부는 지금보다 더 큰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현재 북한은 남북회담 등을 통해 북한 내 남한군 유해 송환에 합의했으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다. 명백한 합의 불이행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쪽도 북쪽에 묻힌 군 유해를 송환받아야 한다.
 정부는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중국 전사자 유해송환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남한은 중국정부의 신뢰와 협조를 얻어,  한반도 이북지역에 매장된 국군의 유해송환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미국은 북한과 경색된 외교관계에서도 96년부터 220여구의 미군 추정 유해를 발굴했던 일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북미관계가 단절된 상태였지만 직접 미 국방부 산하 미군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 (JPAC, Joint Prisoner of War/Missing in Action Accounting Command)가 북한으로 건너가 북측으로부터 미군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을 미 본토로 송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유해송환에 대한 규범이 전무한 실정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전쟁 전사자에 대한 예우와 기준을 마련하고 기존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마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정현환, 유원 기자 dondevoy8612@naver.com , bittersweet0401@gmail.com

수원대 등록금 환불 뉴스가 조선일보에 없는 이유


[민동기의 신문비평] 조간 1면을 강타한 네팔 지진, 현지 상황 심각…국제사회 구호 손길
민동기 기자  |  media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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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27  07:11:52
수정 2015.04.27  07: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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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신문 1면은?
네팔 지진 소식이 1면을 장식했습니다. 머리기사와 사진 대부분이 네팔 지진 소식입니다. <‘세계의 지붕’이 무너졌다>(경향) <울고 있는 네팔 모든 것이 무너졌다> <네팔 강진 8000명 사상 통곡의 땅>(조선일보) <폐허 속 “살려주세요” … 네팔의 절규>(한겨레) 등 제목에서 현지의 처참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발 빠르게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해 르포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번 대지진으로 한국인 3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여행 중인 50대 부부가 낙석에 맞아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네팔을 방문 중인 한국인 관광객은 최대 10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사관은 현지 민박업체와 여행사 등을 통해 이들의 피해 여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가족들이 대사관으로 행방을 문의해온 여행객 60여 명 가운데 20여 명은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 한겨레 2015년 4월27일자 1면
2. ‘성완종 파문’은 오늘도 주요 소식이네.
검찰은 경남기업 측이 빼돌린 성완종 전 회장의 다이어리(일정표) 등을 일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검찰은 증거인멸에 가담한 혐의로 이용기 경남기업 부장을 26일 구속했습니다. 지난 25일 구속된 박준호 전 경남기업 상무와 이 부장은 성 전 회장 다이어리 등 일부 자료를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최근 압수수색에서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계열사 대여금으로 조성한 비자금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26일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검찰은 최근 성 전 회장의 측근 자택 장롱 속에 감춰져 있던 대여금 관련 비자금 자료를 한 박스 분량 확보해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3. 서울신문이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관련한 기사를 실었는데 흥미롭다.
기사 제목이 <‘성완종 금배지’ 시절 민원 대부로 통했다>입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성 전 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은 지난해 6월까지 만 2년간 의정 활동을 했습니다. 서울신문이 성 전 회장이 2년간 참석했던 국회 정무위,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특위 및 소위원회와 국정감사 등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총 94건의 회의록 발언을 전수 분석했습니다.
성 전 회장은 국회 정무위에서 ‘건설업계 민원의 대부’와 같은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그가 2012~2013년 열린 정무위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정책은 건설업계에 대한 대출 및 보증 확대였습니다. 이 기간은 성 전 회장이 오너였던 경남기업의 자본잠식 개시 시점(2012년 6월), 3차 워크아웃(2013년 10월), 채권단에 대한 긴급자금 2000여억원 대출 요구 시점(2014년 6월)과 맞물립니다.
4. 정치면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귀국 소식이 많이 실렸다.
경향신문은 ‘머리 아픈 귀국길’(4면)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1) ‘성완종 리스트’를 수습해야 하고 (2) 이완구 총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3) 표류하는 국정과제에 대한 해법도 제시해야겠지요. 조선일보는 여권의 한 관계자 말을 인용해 “성완종 파문과 이완구 총리 사퇴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박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다수 올라간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사과할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어떤 형태로든 대통령의 사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5. 이완구 총리도 사과한다는 얘기가 있지?
이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휩싸여 지난 20일 사의를 밝힌 이후 26일까지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사의를 수용한 상태라 빠르면 순방 귀국일인 27일이나 28일 박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임사를 통해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불명예 퇴진하는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의 뜻을 밝힐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6.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의 재산증가와 관련한 소식도 보이네.
한국일보 1면 보도입니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8명의 정치인 중 한명인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의 현금성 자산이 2012년 3억원, 2013년 5억원 등 2년에 걸쳐 8억원이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국일보가 대선 직후인 2012년과 2013년 2년치 홍 의원의 재산신고 내역을 확인한 결과, 의원 임기를 시작한지 7개월 만에 약 3억원이 순수하게 증가. 2013년에도 예금이 5억여원이 늘었다고 신고했습니다.
  
▲ 한국일보 2015년 4월27일자 5면
홍 의원은 당시 부친이 설립한 경민대 총장직에서 내려와 학교에서 별도의 급여를 받지 않았습니다. 홍 의원은 포천 아프리카예술박물관 구입 등으로 100억원이 넘는 빚을 져 연간 수억원에 달하는 이자도 부담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예금이 불어난 ‘또 다른’ 수입원이 무엇인지에 의혹이 증폭되는 대목입니다. 성완종 전 회장은 숨지기 직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2012년 대선 때 홍문종은 본부장을 맡았는데, 제가 한 2억 정도 현금으로 줘서 조직을 관리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홍 의원에게 수 차례 전화를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7. 오늘 사회면에는 수원대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송경근 부장판사)는 수원대 학생 채종국씨 등 50명이 학교법인 고운학원, 이인수 수원대 총장, 최서원 수원대 이사장을 상대로 낸 등록금 환불 소송에서 “2013년 이전 입학한 학생 44명에게 학년당 30만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3년 7월15일 수원대 학생 88명은 등록금이 교육 및 실습비로 쓰이지 않고 사용처가 불분명한 적립금으로 누적돼 피해를 봤다며 1인당 100만~400만원의 등록금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재판부가 등록금으로 적립금을 과도하게 쌓으면서 실험·실습 등 교육서비스는 부실하게 한 사립대학은 학생들에게 등록금 일부를 환불해줘야 한다고 판결했는데요, 과도한 적립금을 축적한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유사한 소송이 이어질지 주목됩니다.
  
▲ 경향신문 2015년 4월27일자 10면
관심을 모으는 건, 오늘 조선일보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조선일보만 알겠지요. 하지만 몇 가지 ‘정황’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우선 조선일보와 수원대의 ‘특수 관계’입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차남 정오씨는 수원대 이인수 총장과 고운학원 최서원 이사장의 딸 주연씨와 부부지간입니다. 고운학원은 대학발전기금으로 TV조선에 50억 원을 출자한 뒤 2011년 이 사실이 드러나자 ‘2018년까지 매각’ 계획을 밝히도 했습니다. 현재 TV조선 주식은 수원대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정황’이 있습니다. 수원대가 2011년 조선일보 종합편성채널 TV조선 출범 당시 수억 원의 대학발전기금을 재단회계로 처리해 TV조선에 50억 원을 출자했습니다. 당시 감사원이 수원대에 “대학발전기금 전액을 교비회계로 되돌려 놓아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만약 이런 점들이 고려됐다면 조선일보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국가인권위원회가 도마에 오른 이유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18일 열린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에서 차벽과 캡사이신 최루액 등을 동원한 과잉진압 논란을 빚은 경찰에 대해 ‘경찰력 남용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위원장 성명을 준비했다가 보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겨레가 보도한 내용입니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 △경찰력 남용 자제 등을 뼈대로 한 위원장 성명을 내는 방안이 논의됐고, ‘집회 참가자들도 폭력을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초안이 작성됐습니다. 하지만 일부 인권위원이 ‘집회의 불법성’을 문제 삼으면서 성명이 보류됐다고 합니다. 보수화한 인권위원 구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9. 국세청 간부들 성매매 사건과 관련해 돈을 댄 회계법인 있었다고?
조선일보(10면) 보도입니다. 지난달 2일 국세청 간부 2명이 서울 강남의 룸살롱 여종업원들과 성매매를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이들이 당시 국내 유명 회계법인 임원과 함께 룸살롱에서 술을 먹었으며 술값과 성매매 비용을 회계법인 임원이 계산했던 것으로 26일 알려졌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 수서경찰서는 해당 룸살롱에 대한 계좌 추적 영장을 발부받아 사건 당일 이 업소의 카드 매출 전표를 전수(全數) 조사했습니다. 회계법인 임원 2명이 국세청 간부 2명과 술자리를 갖고 이들의 2차 성매매 비용을 계산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0. 삼성이 ‘이재용 승계’를 연내에 마무리 한다고?
동아일보(1면) 보도입니다. 삼성그룹이 연내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승계 작업을 사실상 마무리 짓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5월 이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공백이 장기화되고 있는 데다 최근 해외 기관투자가 및 기업 간 거래(B2B) 파트너사들이 ‘경영권 안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계 방안으로는 삼성 사장단협의회에서 경영 상황을 고려해 승계를 공식 건의하거나 사회 원로 및 외국인투자가들이 공식 요청하는 방식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11. ‘이한열 운동화’가 복원된다고?
1987년 6월9일 전두환 정권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됩니다. 26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근·현대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47)는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을 당시 신은 운동화를 복원 중입니다. 기념사업회는 오는 6월9일까지 운동화 복원을 마치고 다시 전시할 계획입니다.
※ 이 글은 CBS <뉴스로 여는 아침 김덕기입니다>(매주 월요일~토요일 오전 6시 10분부터 7시까지 / 98.1 MHz)에서 방송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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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하얀 전쟁>·<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천안함 프로젝트>·<영화판> 등 모두 우리 시대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회적 성찰을 시대적 화두로 던진 작품들이다. 

곧 칠순이 되는 평생을 영화인으로 살아온 노련한 노장(老壯) 감독 정지영. 그의 깊은 사회적 성찰이 담긴 메시지는 작품 발표와 동시에, 공론과 토론의 장을 오갔다. 이것이 그가 관객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자.' 이게 영화를 만드는 기본적인 나의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영화가 상영된 후 공론이 일고 토론이 발생하면, 너무 기분이 좋다. 좋게 말하면 토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논란인데, 논란이 되는 주제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었던 중요한 가치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는 들춰내서 토론의 장을 펼치는 게 맞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빨갱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는 이 괴물 같은 질병을 오히려 '그러려니…' 받아치며 근본적인 문제는 '분단이 가져온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중략)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글로벌시대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는 민족문제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나라, 분단 모순으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비정상적인 나라이자 불행한 나라다. 분단 모순만 극복하면 한국은 아마도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났는데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것은 분명 정치의 문제다. 영화인으로 세월호 동조 단식에도 앞장섰던 정지영 감독은 곪아버린 정치, 움직이지 않는 정치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권이 해줘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모두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 은연중에 세월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고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눈감고 묻어버리면 상처는 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썩은 채로 도려낼 생각인가. 언제든 곪아 터질 상처를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고름을 째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 권력자들은 이를 감추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국민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기 전, 빨리 치유해야 한다."

▲ 정지영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 <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영화판> 등 최근 작품은 패기 있는 젊은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정지영' 하면 젊은 느낌이다. 그런데 곧 칠순이 된다니, 조금 놀랐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사회고발 성격의 영화라 젊게 느껴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젊기 때문이다.(웃음) 곰곰이 생각해보고 점검한 결과 그렇다. 나쁘게 말하면, 철이 늦게 든 거다. 다른 사람들이 나이 오십(理順)에 깨달을 것을 나는 지금 깨닫는다. 이 말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이 늦다는 것이다. 내게 지금 사십 대 후반 정도의 안목과 깊이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가 젊을 수밖에 없다. 지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하나의 사건)을 통해 실체를 알고 난 후에 의미를 깨달아 온전하게 내 것이 되는 시간이 항상 늦다.

- 반전이다.(웃음) 충북 청주에서 아버지가 사촌 형에게 내준 헌책방의 책을 다른 곳에 몰래 팔아넘겨 영화를 보러 다녔을 정도로 '영화에 미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소년이자 청년 정지영은 어떤 학생이었나.

학창 시절, 무척 한심했다.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설득해 전문 서적을 판 돈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한마디로, 전문 지식을 팔아서 오락을 취한 것이다.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그 덕분에 나는 영화감독이 됐지만….(웃음) 분명 나쁜 짓이었다. 당시 중학생이 영화를 본다고 얼마나 깊게 봤겠는가. 예쁜 여배우 보고 재밌는 이야기 들으려고, 영화를 본 거다. 도둑질이었지 뭐….(웃음)

- 1946년 출생이다. 6.25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있나? 

기억은 거의 없고 생각나는 몇몇 장면이 있다. 청주에 살 때였는데, 밖에서 총소리와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마루로 나갔는데, 한두 살 많던 옆집 아이가 밖에 나가기에, 내가 '어디를 가느냐?'라고 물었더니 '총탄을 주우러 간다'고 했다. '난 무서운데, 쟤는 참 용감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쟁 중에 청주보다 더 시골인 옥천으로 피난을 갔는데, 동네 아이들이 내가 도시에서 왔다고 나를 따라다니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며 놀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애들하고 어울릴 생각에, 대답도 잘해주고 했었다. 그리고 시골 밤이 무척 무서웠던 기억, 밤마다 누나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줬던 기억이 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 피난 여정에 관한 이야기 등 자세한 건 나중에 들었다.  

- 언제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는지, 계기가 있었는지?  

사실 영화는 재미로 봤고, 중학교 때 나름 문학소년이었다. 집이 책방을 해서 이것저것 주워서 읽다 보니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추리소설 위주로 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본격 문학을 접했다. 가장 쉽게 접근한 것이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세계전후문제작품집>(1962~1963)으로, 전후(戰後) 주목할 만한 작품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1권에서 7권까지는 한국·미국·불란서(프랑스)·영국·독일·남북구(남북극)·일본 편이었고, 8권과 9권은 각각 한국과 세계의 시를, 10권은 세계의 희곡(시나리오)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인간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운 것 같다. 

특히 한국 편에는 당대의 한국 작가 중단편이 실려 있었다. 그때 이범선(1920~1982)의 <오발탄>(1959년 10월 <현대문학>에 발표됨)을 읽었다. 후에 영화잡지에 실린 오발탄 시나리오를 우연히 봤다. 원작이 단편소설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에는 에피소드가 더 많이 들어가고 등장인물도 추가돼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참 재밌었다. 하지만 영화 <오발탄>(오현목 감독, 김진규·최무룡 주연)은 1961년 4월 13일 개봉됐지만, 5.16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상영이 금지됐다. 어렸지만, '정부에서 싫어하는 영화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2년 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가 재상영됐다. 그때 <오발탄>을 보면서 이전까지 재미로만 봤던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오발탄>을 보기 전에는 영화를 그냥 봤는데(see), 이후 영화를 처음으로 읽었다(read). 소재가 시나리오를 거쳐 영상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보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화감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습작용으로 소설도 쓰고, 그림도 즐겨 그리고, 노래도 한 번 들으면 쉽게 익히고 해서 그런 쪽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역시 종합예술인이 맞아' 라고 합리화하면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했다.(웃음)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런 다짐을 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왔다.

- '영화는 종합예술'이고 '영화인은 종합예술가'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압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눈(시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발탄>을 비롯해 사회와 세상을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우선 <오발탄>의 영향이 크다. <오발탄>은 당시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온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것으로, 전후 서울의 풍경을 그린 영화였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질문으로 던졌다. 제목의 '오발탄'은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신의 오발탄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잘못 태어난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범선 작가는, 당시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결국 해고됐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문제 삼은 것은 주인공(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의 어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 "가자! 가자!"라고 외친 부분이었는데, 정권의 반(反)공산주의적 시각이 <오발탄> 상영을 금지한 것이다. 그 말이 '북한이 더 좋다'라는 뜻이 아닐 텐데…. 이렇게 협소한 시각으로 작품을 봐서는 안 된다.

이런 전후 작품이 나의 청소년 시절을 좌우했다. 비단 한국 전후 작품뿐 아니라, 세계대전 이후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전후시대라는 것은 전쟁으로 자기가 생각하던 모든 가치가 무너진 시대를 말한다. 반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반어적인 세상이기도 하다. 전복적·반어적 가치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보니, 인간과 사회에 대해 얼마나 냉소적이겠는가. 그 때문에 인간애(愛), 즉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이나 친구 사이의 우정 같은 살가운 것보다는 이념과 사회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1998년 <까> 이후로 13년 만에 <부러진 화살>(2011)로 복귀해 쾌거를 거뒀다. 그동안 제작비 등의 문제로 준비하던 영화가 좌초되거나 실패했다고도 하던데, 어려운 시간이 있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13년 동안 무척 고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계속 영화 준비를 한 시간이었다. 님 웨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쓰느라, 8년 이상 많은 시간을 보냈다(명필름이 제작을 맡았으나, 2007년 결국 중단됐다). 중국 혁명기를 그린 작품이라 중국 정부의 검열에 신경을 써야 했다. 주인공 김산이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에 건너가 혁명의 과정에 휩쓸리다 연안(延安)으로 와서 중국 공산당을 위해 활동했는데, 간첩으로 몰리면서 북한 공산당에게 처형당하는 이야기다. 사후 5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사면복권이 됐지만, 이런 주인공을 그리다 보니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엄청난 제작비도 부담이었고, 그래서 보류했다. 그 뒤에도 작품 하나를 하려다 잘 안됐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부러진 화살>을 만들게 됐다.

물론 경제적 고생은 했다. 그런데 이런 고생은 평생을 해온 것이라, 익숙하다. 익숙한 고생.(웃음) 그냥 견뎌왔던 것이지, 특별히 엄청난 고통과 쓰라림은 없었다.  

- 영화 제작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한 번도 없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찍다 실패하거나 그 실패가 계속되면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실패했어도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좋은 일이 생겼다고 크게 기뻐하지도, 슬픈 일이 생겼다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 편이다.  

- 빨치산의 나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낸 <남부군>(1990),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다룬 <하얀 전쟁>(1992), 사법부와 일반 국민의 관계를 들여다본 <부러진 화살>, 한국의 영화산업을 파헤친 <영화판>(2011),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을 고발한 <남영동 1985>(2012) 등 모두 사회적 성찰을 담은 메시지로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 또한 논쟁도 불러왔다. 그만큼 관객들을 자극한 것이다. 이런 토론의 장을 실제로 기대했었는지? 

영화를 만들 때는 항상 많은 관객이 봐주기를 기대하며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러면 안 된다. 자기의 고집스러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아도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작업해야 한다.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 관객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쉽게 이해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데 나는 반대다.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이렇게 찍으면 관객이 잘 모를 텐데? 이렇게 하면 관객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라며 점검한다. 항상 관객을 의식하며 영화를 제작한다. 이다. 이 말은 되도록 영화를 통해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에서 던진 이야기, 질문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논하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자.' 이게 영화를 만드는 기본적인 나의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영화가 상영된 후 공론이 일고 토론이 발생하면, 너무 기분이 좋다. 좋게 말하면 토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논란인데, 논란이 되는 주제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었던 중요한 가치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는 들춰내서 토론의 장을 펼치는 게 맞다고 본다.  

- 그러나 영화 <남부군>,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2013) 등의 작품에 대해서는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하며, '빨갱이' 감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념 논리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 혹은 '종북'이라고 비난받을 때 마음이 어떤지,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일단 자기가 만들고 나면, 이후에는 자기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관객은 각자 자기 삶과 철학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만든 사람과 똑같이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남부군>에 대해 좌(左) 쪽에서는 빨치산을 나약한 휴머니스트로 그렸다고 비판했고, 우(右) 쪽에서는 빨갱이를 미화했다고 손가락질했다. 각자 자신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이 우리 사회를 더욱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 사회가 가진 특징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글로벌시대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는 민족문제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나라, 분단 모순으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비정상적인 나라이자 불행한 나라다. 분단 모순만 극복하면 한국은 아마도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흥행의 실패가 영화의 성패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흥행에 실패하면, 관객과 소통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함께 작업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한계 등 수많은 감정이 교차할 텐데 어떻게 처리하는 편인가.  

반성해야지.(웃음) 내가 할 수 없는 마케팅과 영업 등을 제외하고, 내가 한 일 중에서 무엇을 잘못했나 면밀히 살피고 반성한다. 반성하다 보면 뭐가 나온다. 물론 그 반성 전에 같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단 말부터 전한다.  

- 혹시 대표적인 반성작이 있나.  

<남영동 1985>.(웃음) 극장에서 100만 명만 봤으면 하고 바랐다. 그 이상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보기 힘든 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2012년 대통령 선거도 있는 정치의 계절이어서 조금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에 못 미쳤다. '전 국민이 봐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이 났지만, 관객수가 33만여 명에 그쳤다(2015년 4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누적 관객수 334,619명). 개봉한 다음에 반성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남영동 1985>를 보다가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영화가 지나치게 끔찍했던 것이다. 고문 장면을 찍을 때 관객들이 고문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관객의 감정을 계산하면서 고문 장면을 배치했어야 했구나' 생각했다.  

- 2012년 11월 <남영동 1985>을 개봉하면서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어떤 바람이 있었던 건가.  

영화 개봉 당시가 대선 직전이었다. 그래서 <남영동 1985>를 보고, 박근혜 후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지 않나. 물론 영화의 배경은 전두환 정권이지만, 박정희 정권 이야기도 나온다. '군사독재'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배우가 극악무도한 악인이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는 경우, 감독이 민감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제작할 경우 후유증이 상당할 것 같다. 영화를 찍고 난 이후에 어떻게 회복하는 편인가? 


실제로 <남영동 1985>를 제작한 뒤 아팠다. 영화 촬영 당시 배우와 스태프 모두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이 내게 돌아온 복수인 양 정말 많이 아팠다. <남영동 1985>를 찍을 때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안 피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셨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뿐만 아니라 몸도 아팠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도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 얼마 동안이나?  

몇 개월을 끙끙대다 실제로 몸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까지 했다. 나만 그랬겠나. 박원상 씨와 이경영 씨도 오랫동안 힘들어 했다. 고문 피해자 역을 한 박원상 씨보다 가해자 역할을 한 이경영 씨가 더 힘들어 했다. 연기라고 해도 그 후유증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 2005년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이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 이후,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다른 나라들이 문화 정책의 모범으로 삼는 제도가 됐다. 그러나 한미FTA가 진행되면서 스크린쿼터 폐지 논란이 일었다. 당시 범(凡) 영화인들이 반대 투쟁을 벌였고, 배우 안성기 씨와 함께 스크린쿼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인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지만, 일부에서는 '밥그릇 챙기기'라는 오해와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이 만약 밥그릇 챙기기였다면, 더 치열했어야 했다. 물론 영화인들에게는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그만큼 설 자리가 없어졌을 테니 생존권의 문제이기도 했다. 밥그릇 챙기기라고 비판한 이들을 그래서 바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물론 '어떤 배우는 외국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를 비판한 사람들은 대중의 여론을 자기식으로 환기시키려고 여러 가지 수를 썼다. 그런 노력의 연장선에서 '벤츠 타고 양담배 피우는 배우들,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생존권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영화 문화가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집요하게 싸웠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스크린쿼터가 반으로 뚝 잘렸지만, 투쟁 과정에서 한국 영화인의 의식은 상당히 고양됐고 사명감까지 갖추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 밑바탕에서 오늘날의 한국 영화가 나온 것이라고 본다. 만약 그런 영화사적 과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국 영화가 세계시장에서 이렇게까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긍지를 가지고 당시 싸움을 종종 되돌아본다.

-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2013년 8월 언론시사회에서 "'천안함'은 우리 사회 '소통의 단절'을 담았다"고 했지만, 천안함 유가족과 해군 장교들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상영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국가가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국민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나 <다이빙 벨>(안해룡·이상호 감독, 2014)의 소재가 된 사건들은 의문투성이 문제가 너무 많다. 해명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지만, 국민들에게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과 소통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몇몇 사람만 의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전 국민이 의문을 가진 것 아닌가.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정부에 친화적인 사람들을 향해 '저 새끼들은 빨갱이들이다'라고 말하며 편 가르기를 한다. 정부를 비판한다고 빨갱이인가? 물론 대다수의 국민은 그 말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려니…' 한다.  

- 영화 제작에 있어, 지금까지 대기업(거대 자본)과 작업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상업 영화로 흥행해서 소위 '천만 관객'을 넘어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은 없었나.  

'천만 관객을 넘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거대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게 현재 한국 영화 산업이 가는 길이다. 기회가 된다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또는 거대 자본과 작업을 해봐야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드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왜 꼭 관객이 천만 명이 되어야 하지? 내가 선택한 작품은 '천만 관객'은 아닐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데 최근 <삼별초>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 정도 영화면 '천만 관객'쯤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하고 머리를 굴려보니, 내용 자체가 천만 명이 들것 같다는 자신감이 든다. 나도 '천만 관객' 감독이 되려나? 생각하니, 재미있다.(웃음) 

- 대기업의 투자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인가.  

2008년 <이리> 이후, 13년 만에 <부러진 화살>을 제작했다. <부러진 화살>은 처음부터 대기업과 만나기 힘든 작품이었다. 사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데, 대한민국 대기업이 투자하겠는가. 다음으로 만든 영화가 <남영동 1985>인데, 이 역시 뻔하지 않나. 다행히 <부러진 화살>의 흥행(2015년 4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누적 관객수 346만여 명. 역대 흥행 순위 102위)으로 돈을 빌리기는 쉬웠지만, 처음부터 저예산으로 만든 작품이다.  

- 2012년 1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계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다 보니 신인 감독들이 스타만 캐스팅해오면 돈을 준다"며 "조금 더 뜸을 들인다면 좋은 재목이 될 수 있는 씨앗들을 너무 일찍 사장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대기업이 본인과 같은 또래의 노장 감독은 "감각이 늙었다며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대기업이 과학과 통계를 바탕으로 (영화의 투자와 흥행을) 예상한다고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본적으로 나이 많은 감독을 만나기 꺼린다. 힘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데, 동방예의지국이라 노장 감독에게는 그 힘을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하니 불편한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든 감독들은 감각이 낡았다고 핑계를 댄다.

대기업의 투자 기준은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이 아니라, '출연 배우가 누구냐?'이다. 그래서 A급 배우를 섭외하려고 노력한다. A급 배우란, 인기 있는 배우를 말한다. A급 배우가 캐스팅된 시나리오라면, 시나리오와 감독이 B급이라도 대기업은 투자를 한다. 이게 대한민국 대기업이 가진 영화에 대한 투자 안목이다. 영화의 성공 가능성을 배우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실 영화계가 이런 투자 행태에 좌우되는 한, 한국 영화의 미래는 밝지 않다. A급 배우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나리오와 새로운 소재로 승부수를 띄우는 최소한의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영화로 성공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감독, 2014)는 확률상 만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하기 때문에 도전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해 전체 영화산업 매출이 2조276억 원, 극장 입장권 매출액이 1조6641억 원으로 해마다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영화만 217편이다. 그런데 스크린을 통해 상영된 영화 중 눈에 띄는 건 몇 편에 불과하다. 영화산업은 성장하는데, 반대로 실패하는 영화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평생 영화를 제작해온 감독으로, 한국 영화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대기업이 한국 영화산업을 이끌어가는 시스템, 소위 수직 계열화된 구조가 문제다. 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한국 영화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 외에 다른 영화는 상영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가게가 문을 안 여는데, 관객이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나. CJ, 롯데 등 대기업은 투자만 하고 제작하지 못 하게 해야 한다. 영화 상영과 배급도 분리해야 한다. 자기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작품을 발로 차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 영화인 또한 넓은 의미에서 노동자이다. 그런데 상품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 작품 또는 노동자들은 실로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 영화계에 가장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권과 노동환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최근 전국영화산업노조도 생기면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노조 간에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졌다. 영화계가 노동면에서 상당히 발전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다만 영화계 일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인 것은 사실이다. 촬영 스텝들을 월급을 주며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계 노동자들이 일이 없을 때 생계를 보장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 같다. 물론 영화를 하고 싶어서 이 업계에 들어온 것이지만,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영화 산업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해 8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 동조 단식을 하면서 "침묵은 공범이다"라고 했다. 특히 정지영 감독뿐 아니라, 많은 영화인이 참여했다. 그런데 일간베스트의 폭식 투쟁 같은 상반된 일도 벌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봤나.  

현재 한국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면, 한국이 정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힘들더라도, 그 모순을 넘어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이것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권이 해줘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모두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 은연중에 세월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고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눈감고 묻어버리면 상처는 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썩은 채로 도려낼 생각인가. 언제든 곪아 터질 상처를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고름을 째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 권력자들은 이를 감추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국민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기 전, 빨리 치유해야 한다. 

- 새로운 진보 정치세력화를 선언한 국민모임 공동대표다. 정치 참여에는 지금까지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자기의 정치적 안정만을 위해 행동하는 기존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정치에 참여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된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자극을 주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원 배지 하나에 전전긍긍하면서 개인을 위해서 정치하는 기존 정치인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다.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이미 보수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정책 현안은 다 보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세력이 미약하지만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 쪽에서 규합해서 새로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은 절름발이다. 한쪽 날개로 간신히 날고 있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 절름발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과 같은 보수 야당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보야당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1976년 서른 살에 조감독으로 시작해 약 40년 동안 영화인의 삶을 살아왔다. 기쁜 적도 좌절했던 적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정지영'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고 생각하나. 
 

철이 늦게 든 것?(웃음) 뭘, 잘 모른다. 가장의 책임감 같은 것을 좀 알면, 집이 힘들 때 '영화를 그만둬야 하나?'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난 아무리 배고파도 영화가 아니면 할 게 없다. 이런 철없음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온 것 아닐까?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인 거다. 영화를 하고 싶으니까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영화가 아니고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 같다. 물론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외침 속에 '직선제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에 동참한 뒤, 당분간은 영화를 못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포장마차나 해볼까?'라고 말했던 적은 있다.(웃음) 물론 6.29민주화선언으로 금방 풀렸지만…. 사회적 여건이 그랬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해볼까 했던 거지, 개인적으로 영화 외에 다른 것을 해볼 생각은 안 했다. 무모한 거지.(웃음)

- 정지영에게 영화란?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영화가 아니겠나. 나는 태생적으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꿈꾸는 사람이 못 된다.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안 되더라. 뭔가를 떠올리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밥그릇의 수단으로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웃음)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젊은 후배들에게 '어떻게 살아라' 하고 충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마치 어떤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그래도 정 말을 하라면, 이렇게 사는 게 유리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적어도 청년이라면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먼저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대개 비극은 자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데, 자신의 직업이 그 '어떻게'를 뒷받침해 주지 않아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먼저 어떻게 살까를 정하면, 저절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결정을 하기가 쉽고, 대부분 그게 가장 본인에게 맞는 직업이든 일이든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치고, 부자로 살기를 원하면서 정치인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만약 그렇게 살려면, 부정부패해야 하고 감옥에 가야 할 테니 말이다.(웃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공무원이나 평범한 직장인이 될 꿈을 버려야 한다.

- 정지영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문학적이나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말고, 정치·사회적으로 쓰는 자유가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상당히 퇴색시키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자유시장경제·신자유주의 하는 말들이다. 사실 이런 말은 자유를 엄청나게 구속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 체제에서 이것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은 빨갱이가 되는 것 아닌가. 자유시장경제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시장을 장악한 놈이 주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 대부분은 그 시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도 실질적인 자유를 얼마나 많이 구속하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긴 놈이 최고가 된다는 건데, 처음부터 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이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말은 달갑게 인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인'이라고 하면 달라진다. 참 근사한 단어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내가 객관적인 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때다. 내가 나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예수나 석가가 그런 자유인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일 텐데, 우리는 그 경지가 불가능하고(웃음), 죽을 때까지 그 경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삶이란 자기라는 객체를 자기라는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 그런 자유인을 희망하면서 죽어가는 것 같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국제민주인사 빅토르 우고 히혼, 기자회견장 찾아 연대·지지발언

  • [사회] 국제민주인사 빅토르 우고 히혼, 기자회견장 찾아 연대·지지발언

  • 26일 오후2시30분부터 시작된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의 남대문경찰서에 대한 불법폭력연행, 강제날인거부보복구속영장청구, 성추행만행 규탄기자회견이 밤샘 기자회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후8시20분 기자회견 사회자는 지난 24일부터 벌어진 경찰의 표현의자유탄압, 불법폭력연행, 성추행, 인권유린 사실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사회자는 <지난 24일 코리아연대회원 2명이 박근혜<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과 현수막을 들고 있다가 불법체포됐고, 불법체포된 회원들을 석방하라고 규탄하는 남대문서앞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코리아연대회원 20여명을 무차별적으로 폭력해산시키고, 그중 4명을 불법폭력연행했다. 이과정에서 한 여성회원은 성추행을 당했고, 한 여성회원은 도둑으로 몰렸다. 뿐만아니라 남대문경찰서앞에서의 불법폭력연행을 항의하는 기자회견과 항의방문하는 과정에서 성추행피해자를 포함한 4명의 대표단과 언론사기자가 불법폭력연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주호회원은 48시간을 채우고 석방됐지만 박비호회원은 석방되지 못했다. 경찰은 폭력적으로 강제날인을 자행했음에도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또 경찰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며 <강서경찰서 여경 5명을 포함한 10명의 경찰이 불법폭력연행당한 성추행피해자에게 물리력을 동원해 강제로 지문날인을 시도했고, 그 여성은 완강히 저항하다가 실신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준렬히 단죄했다.

    코리아연대에 따르면 변호사는 박비호회원에 대한 구속영장창구에 대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구속될 사항이 아닌데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건 당연히 기각될 것이라 예상된다. 사실 영정실질심사가 열릴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라고 전했다. 

    오는 27일부터 30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민주국제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남코리아를 방문한 에콰도르 인권위원회운영위원인 빅토르 우고 히혼(Víctor Hugo Jijón)이 늦은 시간임에도 기자회견장을 직접 찾아와 코리아연대회원들을 비롯한 기자회견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연대를 표했으며 지지발언을 했다.

    그는 <남코리아의 민주주의가 어떤 상황인지 이번 공권력탄압으로 알게 됐다.>며 <남코리아의 헌법은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헌법은 안다. 그기준에 따르면 경찰과 정부가 한 행동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민이 들고 있는 전단에 폭탄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정부이고 경찰이다. 법이 법대로 지켜지지 않을때는 시민들의 요구로 바꿔야 한다.>고 국제수준의 민주주의·인권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안보는 시민들을 연행한다고 지켜지지 않는다. 남코리아의 이런 현실에는 국가테러주의가 엿보인다. 멀쩡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테러가 아니고 뭔가>라고 꼬집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경찰과 정부는 시민과 대화를 해야 하며 폭력연행해서는 안된다. 모든 연행자들을 석방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 코리아연대회원은 <남대문경찰서의 행태는 몰상식하고 비인격적>이라며 <<세월>호유가족들도 짐승같이 끌어내고, 우리쌀을 지키겠다고 하는 농민들도 짐승같이 끌어내고,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려다 불법폭력연행된 두청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들도 짐승같이 끌어냈다.>고 통렬하게 성토했다.

    이어 <수많은 부정부패정치인들은 가만히 놔두면서 정권에 비판하는 시민들만 왜 탄압하는가.>라며 <연행자들이 석방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사회자는 <변관수남대문경찰서장, 최호열강서경찰서장, 구은수서울지방경찰청장, 강신명경찰청장은 불법폭력연행과 성추행만행, 강제지문날인강요 등 만행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코리아연대는 기자회견과 침묵연좌농성을 반복하며 박비호회원이 석방될 때까지 밤새 투쟁할 것이며 불법·폭력·성추행·강제지문날인·인권유린을 자행한 경찰의 책임자들인 변관수·최호열·구은수·강신명에게 법적·사회적 책임을 반드시 물을 계획임을 재차 강조했다.

    한편 지난 25일 새벽 박주호·박비호회원 석방을 촉구하다 불법폭력연행돼 중랑경찰서로 이송된 코리아연대 양고은공동대표와 코리아연대회원 2명, 진보노동뉴스기자 1명이 밤11시20분경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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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네팔 대지진 사망자 2500명 넘어... 이틀째 강력 여진


15.04.27 09:12l최종 업데이트 15.04.27 09:2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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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진이 발생한 네팔의 에베레스트 산 눈사태 피해를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네팔이 규모 7.8의 강진에 이어 이틀째 규모 6.7의 강한 여진이 이어지고 있어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복구 작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네팔 내무부는 27일(한국 시각) 현재 사망자 수가 최소 2430명, 부상자 수가 5900명 이상이라고 밝혔다. 인도 53명, 중국 17명, 방글라데시 3명 등 주변국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전문가 "여진 지속 가능성 높아... 눈사태 위험 가중"

이미 수도 카트만두 중심부와 인근 지역의 건물, 가옥 등이 무너졌고,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 주민들은 차가운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국제 사회가 지원에 나섰지만, 카트만두 국제공항이 사실상 폐쇄되고 도로, 통신, 전기 등이 끊기면서 도움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실정이다.

네팔 구조 당국은 열악한 여건에서도 곡괭이, 삽, 맨손 등으로 건물 잔해를 치워가며 실종자를 찾고 있다. 하지만 워낙 무너진 건물이 많고 어린 아이 피해자도 많아 갈수록 사망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CNN은 지질 전문가를 인용해 "경험적으로 이 같은 대지진 이후 30시간 동안 여진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히말라야 산맥의 눈사태로 등반객이 휩쓸리거나 마을 전체가 파묻혀 피해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네팔 산악협회에 따르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에서 눈사태에 휘말려 지금까지 17명이 사망하고 61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지진 당시 에베레스트 주변에 외국인 등반객 400여 명을 포함해 최소 1천 명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에베레스트에서 구글 임원인 댄 프레딘버그 이사가 다른 직원 3명과 함께 등반하다가 숨졌고, 일본 NHK에 따르면 일본인 등반객 2명도 눈사태에 휩쓸려 남성 1명이 숨지고 여성 1명이 다쳤다.

아직도 에베레스트에 등반객 수백 명이 고립돼 있어 네팔 당국이 헬기를 동원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AP는 한국인 1명도 에베레스트에서 구조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보도했으나 정부 발표가 없어 한국인이 맞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서 정부는 카트만두 북쪽 어퍼 트리슐리 지역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건설 업체 직원 1명과 카트만두 북쪽 샤브로베시를 여행하던 50대 부부 등 모두 한국인 부상자는 3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아직 사망자는 없으나 여행객 남편은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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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 인도지원조정국(OCHA)가 발표한 네팔 대지진 지역별 강도.
ⓒ 유엔 인도지원조정국

정부는 성명을 통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 문화유산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네팔 정부와 국민에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표명한다"며 "이번 피해가 조속히 복구되어 네팔 국민이 충격과 슬픔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기를 기원하고 해외긴급구호대 파견 등 추가 지원 방안을 적극 검토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번 지진은 지난해 4월 칠레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규모 8.2 지진 이후 가장 강력하며, 네팔에서는 1934년 카트만두 동부를 강타해 1만 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던 규모 8.1 지진 이후 81년 만에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BBC는 "네팔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지진 지역 가운데 하나"라며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로 생겨낸 히말라야 산맥에서 보듯 두 지각판이 만나는 곳이라서 대규모 지진이 일어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진의 규모도 7.8로 높았지만, 진원의 깊이가 10~15km 정도로 얕아 지표면에 가해지는 충격이 컸고, 대부분 건물이 벽돌로 허술하게 지어진 데다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라 피해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이미 지진 전문가들은 2010년 3월 3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아이티 대지진에 이어 다음 피해 지역은 네팔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