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요일

4.19는 ‘미완의 혁명’ 아닌 ‘승리한 항쟁’이다

 

4월 항쟁과 미국 ①

4.19는 ‘미완의 혁명’이 아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전민중의 투쟁이었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농민, 노동자 가리지 않고 모든 민중이 항쟁에 떨쳐나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승리의 항쟁이었다.

4.19는 4월 항쟁이었다. 4월 19일 하루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날 시작된 것도, 그날 끝난 것도 아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서 출발한 항쟁은 4월 들어와 정권 퇴진 투쟁으로 상승하였고, 이승만이 하야를 결정한 4월 26일까지 항쟁은 계속되었다. 87년 민주화운동을 6월 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4.19 혁명 역시 4월 항쟁이라고 명명해야 정확할 것이다.

▲ 4월 항쟁은 중고등학생 뿐 아니라 초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하였다.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3월 15일은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일이었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3.15 선거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부정선거와 개표 조작을 준비했던 것.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고,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등 다양한 계획 등을 세웠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엔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가 하면 한 명이 투표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 선거 조작 행위가 저질러졌다.

개표 과정에서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부정선거가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라는 지시가 내려가기도 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한 일. 3월 15일 오후와 저녁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권 퇴진의 불씨를 지핀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주된 구호는 부정선거 규탄이었다. 이승만 정권 퇴진의 구호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본격적인 정권 퇴진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가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4월 11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사망한 것이다. 경찰은 시신에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밧줄이 풀리면서 27일 만에 시신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마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경찰서장실 앞뜰에 수류탄을 투척할 정도로 극에 달했다.

4월 19일엔 전국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가 이승만과 이기붕의 퇴진, 김주열 열사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 4월 19일 오후 5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경찰과 군인은 탱크를 앞세우고 실탄을 퍼부으며 광화문까지 밀고 나왔다.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

이승만 정권은 경무대에 몰려든 대학생들에 총격을 가했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4.3 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참히 짓밟으려 했다.

계엄령 선포 후 전국민적 정권 퇴진 항쟁 폭발

전국민적인 정권 퇴진 투쟁이 폭발한 것은 계엄령 선포 이후였다. 계엄령으로 서울에서의 투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인천에서 투쟁이 발생했다. 4월 23일 인천에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고, 4월 24일 마산 지역의 ‘마산애국노인회’ 할아버지들이 “책임지고 물러가라”, “갈아 치울 때가 왔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투쟁을 벌였다. 할아버지들의 투쟁에 자극받은 것이었을까. 4월 25일엔 마산 지역의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결정타는 4월 25일 서울이었다. 이날 대학교수들이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 및 대법관들은 책임지고 물러서라”라는 내용이 담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지역에서의 투쟁과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자극받은 서울 지역의 학생들과 시민들 역시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월 25일 서울에서의 시위는 4월 26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퇴진까지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4월 26일 오전 7시 45분 경 동대문 부근에 1만 5천 명의 인파가 집결해 있었고, 8시 30분 경엔 7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는 재선거 실시, 이승만 퇴진을 요구했다.

이승만 하야 성명, 부패 독재 정권 몰아낸 승리의 4월 항쟁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도심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위대는 경무대를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예상치 않은 이승만 대통령 사임 성명을 들어야 했다. 광화문 인근에 모여있던 시위대는 계엄군의 마이크를 통해 이승만 사임 성명을 듣는 ‘희극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 4월 26일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시민과 학생들은 계엄군 탱크 위에 올라가 환호했다.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성난 항쟁 대오를 진압하려 했다. 그리고 이승만 퇴진 구호가 전국적 범위에서 폭발한 것은 4월 25일의 일이었다. 길게 보면 일주일, 짧게 보면 하루 만에 이승만은 강경 진압 태세에서 물러나 사퇴 즉 하야를 선택한 것이다.

이승만은 4월 24일 자신이 자유당을 탈퇴하고, 국무위원들의 사직서를 수리해서 개각하겠다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하야 결심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승만의 하야는 4월 25일 어떤 변수가 작동한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승만이 돌연 하야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4월 항쟁은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승리의 항쟁이었다.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200명 가까운 사망자와 6천 명이 넘는 부상자를 양산할 정도로 폭력 진압을 서슴지 않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던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굴함 없이 싸워 승리한 민주 항쟁이었다.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자료

시행착오가 낳은 의혹과 냉소…‘정쟁 아닌 참사’로 응시했다면

[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피디수첩 ‘세월호 10년’

외력설에 집착한 선조위·사참위
진상조사 시도 10년 종합 갈무리
이태원·오송 등 참사 계속되지만
규명·책임·추모 당위성 일깨워

  • 수정 2024-04-20 09:00
  • 등록 2024-04-20 09:00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4월16일 문화방송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뉴스데스크’를 팽목항에서 진행하는가 하면, ‘피디(PD)수첩’에서 ‘세월호 10년의 기억, 밝혀진 것과 묻힌 것’(1414회)을 방송하였다. 심야에는 다큐멘터리 ‘봄이 온다’를 내보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이다. 참사를 둘러싸고 온갖 불신과 혐오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참사 원인과 구조 실패에 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사가 수차례 있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를 비롯해 검경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단, 특별검사 등이 꾸려져 총 아홉번의 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고, 왜 구하지 못했는지 합의된 결론이 없다. 그 결과 ‘알 수 없다’ 혹은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이 팽배해 있다. ‘무엇을 더 밝혀냈는지 모르겠다’는 무용감은 ‘피곤하고 지겹다’는 냉소를 불러일으킨다. 나쁜 사회적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참사에 관한 그 많은 조사들은 모두 헛수고였을까?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정말로 확인된 것은 무엇이고, 기각된 것은 무엇인지를 짚고 가야 한다. ‘피디수첩’(1414회)은 이를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비난 빌미 제공한 ‘열린 안’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잔잔한 바다에서 세월호가 옆으로 기울면서 급격하게 침몰했다. 일본에서 18년 동안이나 사용한 낡은 배를 사들인 청해진해운이 4·5층을 올리는 무리한 증개축으로 좌우 균형이 맞지 않게 배를 뜯어고쳤다. 여기에 적정 무게의 두배가량 과적을 하였고, 이를 감추기 위해 평형수를 뺐다. 그 결과 배의 복원력이 아주 낮은 상태였는데, 맹골수도를 지날 무렵 갑자기 방향을 틀다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갑판 위의 화물들은 고박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18도 이상 기울자 우르르 쏟아져 서로 부딪치면서 더 쉽게 균형을 잃었다. 격실 수밀문 7개가 모두 열려 있었던 것도 배가 약 100분 만에 빠르게 가라앉도록 한 원인이다. 기관실의 각 구역을 막는 수밀문은 항해 중 반드시 닫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양된 세월호의 수밀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수밀문만 닫혀 있었더라도, 세월호는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하루 이상 떠 있었을 수 있었고, 구조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것이 참사 초기부터 밝혀지고 확인되어온 내인설이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던 급변침의 원인으로 조타장치 부속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착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사참위에서 외부 조사 없이 최종 기각해버렸다.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조타장치 부속의 고장)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인설은 부정되지 않는다. 배의 복원력이 매우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작은 폭의 변침으로도 배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과 대한조선학회 역시 내인설을 지지한다.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한편 외력설이 있다. 세월호가 잠수함과 부딪혀서 침몰했을 가능성이다. 선체 인양 전에 네티즌 ‘자로’ 등에 의해 주장되었지만, 배가 인양된 후 선조위 조사로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2018년 선조위는 외력설을 폐기하지 않고, 내인설과 더불어 ‘열린 안’(외력설)을 채택한다. 그 결과 마치 명확한 결론이 없는 것 같은 혼선을 자초했다. 이런 업보는 이후 사참위로 이어진다. 사참위는 2022년 6월 “외력으로 침몰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등의 애매한 문구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명확한 원인을 못 밝히고 최종 결론을 낸 것에 대해 위원장이 사과하였다. 보고서에는 훌륭한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과 ‘더는 규명할 진상도 없는데 공연히 세금만 낭비했다’는 비난을 불러왔다.

사회적 합의 막은 두개의 결론

선조위와 사참위는 왜 애매한 결론을 낸 걸까. 세번의 조사위원회 모두 정치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운영된 특조위는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도 못 한 채 1년6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정권 내내 세월호를 추모하거나 진실을 알려는 사람들은 감시와 억압을 받았다. 그사이 제한된 정보를 짜깁기한 무수한 추측과 음모들이 난립했다.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13일 뒤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 선조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선조위는 인양된 선체와 블랙박스 등을 바탕으로 1년4개월 동안 외력설을 비롯해 그동안 제기되었던 온갖 의혹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내인설이 유력했지만, 정치적인 진영 논리가 작동했다. 선조위는 내인설을 인정하면서도 ‘여러가지 원인을 더 보자는 취지’라며 외력설을 폐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패착이었다. ‘피디수첩’에서도 “내인설로 결론짓고, 외력설은 소수의견 정도로 갈음했어야 한다”는 정현 카이스트 교수(해양시스템공학)의 의견 등을 인용하며, 아쉬움을 피력한다. 두개의 결론은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고, 유족들의 진상 요구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유족단체들은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며, 특별수사단 구성을 통해 국방부·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 등 전방위적인 추가 조사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선체 조사에 국한되었던 선조위보다 조사 범위를 사건 전체로 넓히고 가습기 살균제 의제와 묶어서 사참위가 꾸려졌다. 사참위는 3년 반 동안 외력설을 입증하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 대한조선학회 등 외부 기관에 의해 외력설은 사실상 기각되었다. ‘주간 뉴스타파’의 ‘세월호, 기각된 의혹과 확정된 사실’에서 김성수 기자는 애초에 입증하고자 했던 가설이었던 외력설을 기각해버릴 경우, 사참위가 그간 쏟아부은 노력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된 성과 등을 모두 보고서에 싣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사참위 최종 보고서에 애매한 문구와 함께 외력설이 남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세월호 기록팀 ‘진실의 힘’이 펴낸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개정판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이 4월 출간되었다. 저자들은 이런 사참위를 매섭게 비판한다.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가 외력에 대한 가능성, 잠수함 충돌 가능성을 찾는 데 집중됨으로써 침몰 원인을 보다 깊이 있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그쪽으로 많이 몰렸다. 이런 것을 ‘기우제식’ 조사라고 하는데, 과학적인 가설로 외부 충돌설을 기각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음에도 외력설을 기각하는 대신 잠수함이 등장할 때까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듯 조사를 계속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무능하면서 유능했던 국가

왜 구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어이없던 것이 이 대목이었으리라. 배가 기울었을 때 선장이 퇴선 명령을 내려야 했지만 ‘가만있으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선원이 아닌 승객의 신고를 받고 해경이 출동했지만 퇴선 지시는 선장의 권한이라며 적극적으로 승객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근처에 승객 구조를 도울 선박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벌어질 불상사를 책임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편 사고를 인지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에게 보고할 영상을 내놓으라고 해경에 독촉했다. 해경 지휘부는 청와대에 보낼 영상을 현장에 요구할 뿐 현장을 파악하고 제대로 된 구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구조 주체가 없었다. 일부러 안 구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구하지 않은 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조 실패와 관련해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 정장이 유일하다. 세월호 참사의 초동 구조 실패는 국가적 위기관리 체계의 총체적 실패였다. 굉장한 음모 따위는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전부였다.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방송 화면 갈무리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국가의 두 얼굴을 목격했다. 두 얼굴의 국가는 정권에 관대했고 피해자에게 가혹했다. (…) 국가는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놀랄 만큼 유능했다. 재난 대응을 지휘하여 인명을 구하는 역할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려 여론을 조작하고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나 진상규명 방해를 지휘하는 역할에는 비할 수 없이 성실했다. 진도 앞바다와 팽목항에서는 정부의 그 누구도 컨트롤타워를 자임하지 않았지만, 광장, 언론, 국회 등 유가족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곳에서는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가의 역량은 선택적으로 그리고 편향적으로 발휘되었다.”(사참위 종합 보고서) 명징한 요약이다.

‘피디수첩’은 세월호 참사가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는지를 짚으며 프로그램을 마친다. 사참위 보고서가 나온 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 뒤 매뉴얼이 강화되고 중앙재난안전통신망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결정해야 될 사람들이 결정하지 않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료 시스템의 풍토는 여전했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이리라. 그렇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세월호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재난도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고, 가해자의 사법적 책임을 지켜보고, 피해자도 사회적 추모를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첫 사례였다.”(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 그것을 깨닫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유가족과 시민사회가 처절하게 뒹굴며 싸우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지난 10년은 헛되지 않았다. 편향과 반편향을 넘어, 참사를 정쟁이 아닌 참사로 바라볼 때, 비로소 다음 장이 열릴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고 “‘잠수함 충돌설은 그동안의 오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외력이나 잠수함과 같은 개념은 세월호 침몰에 관한 설명에서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라고 못박는다.


윤 대통령, 이재명 대표와 5분 통화…첫 ‘영수회담’ 합의

 


윤 “자주 만나 국정 논의하자”…이 “가급적 빠른 시일 내 만나자”

윤석열 대통령 (자료사진)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9일 오후 5분가량 통화했다.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 만남을 제안했다.

19일, 대통령실과 민주당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날 오후 3시 30분부터 4~5분가량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통화가 있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이 대표와의 통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당선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고, 이 대표의 건강 및 안부를 물었다. 이에 이 대표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일단 만나서 소통을 시작하고, 앞으로는 자주 만나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또 통화도 하면서 국정을 논의하자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이 국회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양측은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통화에서 구체적인 쟁점 현안을 언급하기보다는, 원론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날 통화는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 대표 측 천준호 비서실장에게 전화로 제안해 이뤄졌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 측은 실무자들 간 조율을 거쳐 구체적인 회동 날짜와 회담 의제를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영수회담 합의는 윤 대통령 취임 뒤 1년 11개월(3년 차) 만이다.

민주당은 이번 윤 대통령의 제안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강 대변인은 “‘민생이 어렵다’는 말로 모자랄 만큼 국민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고되고 지치는 상황이다. 여야 없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며 “부디 국민의 삶을 위한 담대한 대화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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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친미 윤석열정권 타도하자”

 


민족민주단체들, 수유리서「4월혁명 64주년 합동참배식」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4.04.19 17:26
  •  
  •  수정 2024.04.19 18:12
  •  
  •  댓글 1
 
묵념하는 민족민주운동단체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묵념하는 민족민주운동단체 회원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사대매국 친일친미 외세의존 윤석열정권 타도하자!”

19일 오후 1시 서울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민족민주운동단체 합동참배식」 단상에 오른 전덕용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이 “4월 민주애국영령들의 뜻”을 받든 「4월혁명 64주년 선언」을 통해 이같이 촉구했다.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 △전쟁책동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검찰독재와 언론·노동탄압 중단 등도 요구했다. 

특히 “이번 22대 총선은 분노에 찬 전체 민중의 원성과 절망을 담은 경고이고 심판이었”음에도 “4·19혁명으로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 기념관을 짓겠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질타했다. 

각계 대표들은 ‘하루빨리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리자’고 촉구했다.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은 ‘22대 총선’ 결과 “정권과 여당을 말 그대로 ‘대파’로 ‘대파’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총선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총선 승리를 통해 저 무도한 윤석열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故) 김주열 열사.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故) 김주열 열사.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그는 “(탄핵까지) 모자란 8석은 국회 밖에서 채워야 한다”면서 “바로 광장의 몫”이라고 했다. “이승만정권을 끌어내렸던 4월혁명과 박근혜정권을 끌어내렸던 촛불혁명을 계승하여 더 많은 국민들과 함께 윤석열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경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도 “총선 이후 성난 민심을 확인했다”면서 “더욱더 자신감을 가지고 민심을 믿고 민중을 믿고 싸움에 나서야 할 때”라고 독려했다.   

“5월 1일 노동절 투쟁을 시작으로 명실상부한 윤석열정권의 몰락을 도모하는 투쟁을 조직화하고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도 민생도 한반도의 평화도 우리가 지켜나가는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당 윤희숙 상임대표는 “4·19혁명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30년째 정부가 공식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음에도 오늘 윤 대통령은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는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두 시간 전에 ‘도둑참배’를 하고 갔다”고 꼬집었다. 

“(윤석열)정부가 진정으로 헌법과 4·19 정신을 기리겠다면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적을 제거하며 부정선거로 정권 연장을 시도한 불의한 독재정권,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4월혁명 64주년 합동참배식' 참석자들은 '하루 빨리 윤석열정권을 끌어내리자'고 결의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4월혁명 64주년 합동참배식' 참석자들은 '하루 빨리 윤석열정권을 끌어내리자'고 결의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는 “민심의 압도적 심판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정권은 국정기조를 올바른 방향으로 전화하기는커녕 종전의 반민주, 반민생, 반평화의 잘못된 정책 기조를 유지, 온존, 모색해 나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국회와 제도권 투쟁만으로 변화를 만드는 데 명백하게 한계에 봉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민심의 광장에서 거대한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서 “현 시기 광장투쟁은 ‘거부권거부연대’를 중심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진보대학생넷 강새봄 대표, 한국청년연대 김식 상임대표 등의 결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날 행사는 사월혁명회와 민주노총, 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빈민해방실천연대, 진보당, 한국진보연대가 공동 주최했다. 사회는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이 맡았다. 

<4월혁명 64주년 선언>(전문)

윤석열정권 타도하여 자주통일국가 건설하자! 

 역사는 지금 대전환의 시대에 이르렀다.
오늘까지 우리 민족은 세기의 비극인 분단 휴전체제를 인내해 왔다.
79년 동안의 긴긴 분단시대를 청산하고 민족자주통일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일대 사변, 대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다.

 새해 초 우리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북의 대사변적 선언, 통일정책 변화 조치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시대 상황이 전개됐다.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에 의해 영구분단 종속 체제를 영위해 온 우리 조국은,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속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떳떳하고 정당하다.
겨레 총역량을 동원하여 우리를 억압 압제해온 외세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 강토를 불법 점거하고 부당한 신식민통치로 우리에게 극악스런 고통과 비극을 안겨준 미군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주통일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는 백해무익하고 국민의 짐이 되는 철부지 윤석열 정권과 마주하고 있다.

 이번 제22대 총선은 분노에 찬 전체 민중의 원성과 절망을 담은 경고이고 심판이었다.
사대 매국 반민족 반통일 윤석열 정권은 맹목적 종미 저자세 친일행각으로 민족과 조국을 배반하고 미국과 일본의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으로 일관했다.
성노예 위안부 문제, 징용 징병 강제동원 배상, 핵오염수 바다 방류 문제 등 모든 것을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 지역화와 일본의 재무장 길을 열어주고, 자위대의 한국 출병 허용을 밀약한 것은 자손만대를 두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벌과 돈 많은 자들에게는 감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에게는 물가 폭등 폭탄을 퍼부어, 빈익빈 부익부로 사회불안을 야기시켰다.
노동의 존엄과 기본권을 지키려는 노조원들에게는 시대착오적인 친북종북 몰아치기, 불법과 폐정을 규탄하는 목소리에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 살인 몽둥이를 휘둘러대기 일쑤였다.
윤석열의 검찰패거리 권력은 언론사에 대한 압수수색, 방송통신심의위를 동원 방송 장악 등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불필요한 역사전쟁, 이념논쟁을 들쑤셔서 홍범도 장군상 철거를 주장하고 친일친미반민족분자들을 내세우려 했다.
일제의 조선합병 합리화 찬양, 임시정부 건국 법통 부정, 1948년 단독정부 대한민국이 우리 역사 건국 기원이라는 주장으로, 반역사 행위를 감행했다.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미 역사의 심판을 받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 기념관을 짓겠다는 음모가 진행 중이다.

 친일친미 뼛속까지 외세 의존 윤석열은 조국의 영구 분단을 획책, 동족대결 전쟁책동에 불을 붙이기 위해 전쟁 선동 무력대결을 외쳐댔다.
급기야는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고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윤석열 정권은 한미일 군사동맹 실현을 위해, 독도와 제주도 근해에서 연합군사훈련에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다.

이에 우리 4월 전사들은 결연히 떨쳐 일어나 4월 민주애국영령들의 뜻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사대 매국 친일친미 외세의존 윤석열 정권 타도하자!

1.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동족과의 전쟁을 부추기는 반민족 반통일정권 물러가라!

1.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분단 획책, 전쟁책동 중단하고 주한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1.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공안탄압정권 물러가라!

1. 정적탄압, 검찰독재, 언론탄압, 노동탄압 불통정치 중단하라!

1. 물가폭등 국가부채 증가를 불러온 경제 파탄 정권 물러가라!
  
               4월혁명 만세! 자주 민주 통일 만세!

                               2024년 4월 19일
                            사월혁명회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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