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1일 토요일

추모를 넘어선 ‘2차 가해’ 등장에…피해자 곁 지키는 시민들

이보라·김형규·오경민 기자 purple@kyunghyang.com

입력 : 2020.07.10 17:23 수정 : 2020.07.10 22:22

멀어진 ‘성추행 의혹’ 규명…고소인 향한 “지지·연대” 확산
시청 앞 분향소 설치 10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가 설치되고 있다. 시민들은 11일부터 이 분향소에서 조문할 수 있다. 이준헌 기자 
SNS ‘#피해자 연대’ 해시태그에 ‘서울시 5일장 반대’ 청원 25만 서명
피해자 신상털기식 글에 조롱·욕설까지…경찰 “2차 가해 내사 착수”
여야 일각 “혼자 아니다” 응원…“애도 우선” “명예 훼손 그만” 입장도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지며 그의 성추행 의혹 고소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고소인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거나 공론화하기 어려워졌다. 일부 시민들이 박 시장 추모를 넘어 2차 가해로 여겨질 발언도 내놓으며 고소인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런 가운데 시민들 사이에 피해자를 지지하는 연대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0일 온라인상에는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한 서울시청 직원 ㄱ씨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트위터에서는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와 연대합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글들이 게시됐다. 박권일 문화평론가는 페이스북에 “한마디 사과도 받지 못한 피해자들, 앞으로 어떤 시달림을 겪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들을 아프게 떠올린다. 명복을 빌지 않겠다. 당신들의 시대가 이렇게 끝나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성찰하길 바란다”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 저서 <김지은입니다>를 출간한 봄알람 출판사도 “이번에도 유력 인사들은 사건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 없이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메시지를 올리고, 애도를 표하는 시민들이 많이 보인다”며 “거대 권력 앞에서 세상에 진실을 드러내준 피해자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함께하겠다”고 했다.
책상 위 놓인 자필 유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9일 시장 공관을 나가기 전에 작성한 유언장이 10일 공개됐다. 유언장은 박 시장이 자필로 작성한 뒤 공관 내 책상에 놓아둔 것을 서울시 주무관이 방을 정리하던 중 찾았다고 서울시가 밝혔다. 연합뉴스" 
박 시장과 서울시에 성추행 의혹에 따른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많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박원순씨 장례를 5일장, 서울특별시장(葬)으로 하는 것 반대합니다’라는 글이 게시됐다. 오후 9시 기준 약 25만명이 참여했다. 청원인은 “성추행 의혹으로 자살에 이른 유력 정치인의 화려한 5일장을 언론에서 국민이 지켜봐야 하나. 대체 국민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가.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가해지목인이 숨진 뒤 남겨진 피해자는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고 했다. 실제 일부 시민들은 피해자 신상털기식 글을 게재했다. ㄱ씨에게 박 시장 죽음의 책임을 묻고 욕설과 조롱 등을 담은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한 여성학자는 “ㄱ씨에게 ‘왜 빨리 일을 그만두지 않았느냐’ ‘왜 증거를 모았느냐’ 등 전형적인 2차 가해가 이어졌다”며 “성폭력 피해는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아야 빠르게 회복된다”고 했다.
이은의 변호사는 “박 시장의 마지막 선택이 고소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그 선택은 박 시장이 졌어야 할 책임의 무게를 피해자의 어깨에 내려놓는 형국이 된다”며 “ㄱ씨는 앞으로도 사과를 받지 못하고, 피해에 대한 판단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박 시장 빈소에서 “이 상황에서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분 중 한 분이 피해 호소인일 것”이라며 “피해 호소인 신상털기나 2차 가해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당 장혜영 의원도 “어렵게 피해사실을 밝히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마음을 돌보기는커녕 음해와 비난, 2차 가해가 일어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류호정 의원은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냈다.
더불어민주당 당원게시판에도 “민주당이 나서서 공식추모하지 말라” “이러려고 20·30대 여성들이 민주당에 표를 줬나” 등 글이 올라왔다. 다만 민주당은 현재로선 박 시장의 성폭력 의혹을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일단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박홍근 의원은 “근거 없는 글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족에게 고통을 주는 무책임한 행위를 멈춰달라”고 했다. 박 시장과 인연을 맺은 의원들이 당 내에 많은 것이 이번 사건을 대하는 민주당의 ‘온정적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날 ㄱ씨 2차 가해 행위 내사에 착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고소 사건과 관련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유포해 사건 관련자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위해를 고지하는 행위에 대해 내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해당 고소 건과 무관한 직원의 사진이 ㄱ씨로 지칭돼 포털에 유포됐다. 이를 재확산할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박원순 저격수'였던 강용석 행보가 우려스러운 이유

20.07.11 13:55최종업데이트20.07.11 13:55
"문재인 정권 차원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과 관련해 무언가 숨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닌가…."

10일 새벽, 경찰이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을 수습한 뒤 개최한 현장 브리핑에서 어느 보수 성향 유튜버가 던진 질문이다. 기자들 사이에 자리 잡은 이들은 "(박 시장이) 떨어진 건가요?"라는 등의 패륜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시장의 실종에 대한 가짜뉴스와 루머가 온라인상을 뒤덮고, 일부 매체마저 검증되지 않은 오보를 쏟아내던 시점이었다.
 
 10일 오전 북악산에서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을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구급차량이 응급의료센터앞에 도착해 있다.
▲ 10일 오전 북악산에서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을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구급차량이 응급의료센터앞에 도착해 있다. ⓒ 연합뉴스
 
같은 시각, 인터넷 포털과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서울대병원 앞에 몰려든 취재진을 포착한 사진뉴스가 관심을 끌었다. 일각에선 경찰의 수색 작업이 진행되던 와중에 서울대병원으로 몰려든 취재진의 과도한 보도경쟁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여기에 보수 유튜버들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자정 무렵 서울대병원에 몰려든 유튜버들. 박원순 시장과 전혀 상관없는 구급차인데도 일단 카메라부터 들이댑니다. 앞서 밤 9시쯤 '속보'라는 제목을 달고 '박 시장이 이미 DOA, 도착 전 사망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중'이라는 가짜 뉴스가 온라인에 퍼지면서 유튜버들이 병원으로 몰려온 겁니다(...). 월간 조선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확인도 없이 '속보'라며 줄줄이 오보를 냈습니다.

비슷한 시각, 서울지방경찰청의 간부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시신을 찾았냐는 질문에 "찾았다" 라고 답하는 대화 내용도 메신저를 통해 퍼졌고, 반대로 '무사하다고 합니다'라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도 함께 유포됐습니다. 심지어 일부 유튜버들은 고인에 대해 추측과 모욕성 발언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10일 MBC <뉴스데스크>, <수색 중인데 "사망"…가짜 뉴스에 2차 가해까지> 리포트 중)


이날 지상파 및 종편4사 메인뉴스 중 이런 유튜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태를 지적한 곳은 MBC <뉴스데스크>와 JTBC <뉴스룸> 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방송사가 언급하지 않은 유튜브 채널이 있었다. 강용석 변호사가 이끄는 <가로세로연구소>였다.

<가로세로연구소>의 부도덕한 수익 창출

 
는 성북구 와룡공원 일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style="letter-spacing: -0.025em; word-break: break-all;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가로세로연구소>는 성북구 와룡공원 일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 가로세로연구소유튜브
 
"최고 일간지 취재기자에게 들은 바로는,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니에요." (김용호)
"고소장에도 한 명이 아닌 거예요?" (강용석)
"추가적으로 (피해자들의) 고소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인 거예요." (김용호)


검증되지 않은 추측이 난무한다. 검은 옷을 맞춰 입은 네 남자가 주절주절 의미 없는 말들을 이어간다. 자신들이 늘어놓은 추측에 본인들이 감탄을 연발하고, 가끔씩   조소도 터트린다. 성북구 와룡공원 일대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 <가로세로연구소>의 '현장출동 박원순 사망 장소의 모습!!!'의 내용이다.

<가로세로연구소>는 10일 오후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찾았다는 성북구 와룡공원 일대를 카메라에 담는 무의미한 영상을 제작했다. 일각에선 비난이 쇄도했지만, 이 영상의 조회 수는 11일 오전 10시 현재 17만을 넘어선 상태다.

50여 분간 이어진 이 영상에서 어떤 유의미한 내용을 찾을 수는 없었다. 왜곡과 허위도 난무했다. 서울성곽 길을 걷던 강 변호사가 "서울성곽 복원 사업이 박 시장의 역점 사업 중 하나"라고 소개하자, 김씨가 "문화체육관광부 출입기자여서 아는데, 이걸 처음 추진한 사람이 유인촌 장관"이라고 받은 장면이 대표적이었다.

이른바 '도성놀이'란 서울 성곽길 사업은 한 시민단체가 진행해 오던 민간 사업이었고, 박 시장은 취임 이후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놀이'에 참여하는 등 해당 사업을 관심 있게 지원했다. 과거 언론보도 확인 결과, 유인촌 전 장관의 경우엔 숭례문 화재 이후 기자들과 성곽 길을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박원순 저격수'였던 강용석의 과거

강 변호사는 이날 서울시 부시장 등 서울시 직원 3명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방조죄로 서울지방경찰청에 고발했다. <가로세로연구소>측은 경찰이 박 시장의 사망으로 '성추행 혐의' 피소 사건을 수사 종결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반발했다. 

과연 강 변호사가 박 시장의 극단적인 선택 자체를 2차 가해라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해, 성추행 고소인을 위해 이런 고발을 벌였는지는 의문이다.

강 변호사가 박 시장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이 지난 2011년. 강 변호사는 박 시장 아들의 척추 공개 검진 등 해명 이후 의혹 제기 책임을 지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당시 새누리당 한 의원은 강 변호사의 의혹 제기가 허위로 드러난 것과 의원직 사퇴와 관련해 이런 쓴 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박 시장 아들 병역기피 의혹이 허구로 드러남에 따라 강 의원이 제기해온 다른 주장들의 신뢰성도 모두 한방에 날아갔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법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 의원직 사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진정 사과한다면 정치를 접어야 할 것(이다)." (<한겨레> 2012년 2월 22일, <무책임 폭로 강용석 사퇴> 중)

이후 강 변호사는 사퇴 선언을 되돌리며 재선 출마를 선언했고, '폭로왕'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박 시장 아들 의혹을 재차 물고 늘어졌다. 이러한 박 시장과의 악연은 이후 수년 간 지속됐다.

1차 의혹제기 때와 달리 2015년 강 변호사의 2차 의혹 제기에 박 시장 측은 "부당하고 야만적인 공격을 바탕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태도"로 규정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수단으로 대응에 나섰다. 강 변호사와 의혹 제기자들을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듬해 2월 법원은 의혹을 제기한 이들에게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유포' 위반 혐의 등으로 벌금형 등 유죄를 선고했다. 그럼에도 강 변호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원순 저격수'로서 언행을 이어갔다.

강 변호사가 서울시 공무원들을 고발하고 나선 것이 과연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 피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것인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강 변호사나 <가로세로연구소> 출연자들이 사생활 문제로 경찰 수사 중이라거나 실형을 선고받았던 과거는 둘째 문제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박 시장의 마지막 행적이라 알려진 장소에 찾아가 실시간 방송으로 수익 활동에 나선 <가로세로연구소>의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하나, 보수극우 유튜버 중 수퍼챗(콘텐츠 구매 플랫폼) 등으로 압도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는 <가로세로연구소>의 이러한 '박 시장 저격'은 서울대병원으로 몰려갔던 또 다른 보수 유튜버들에게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더 우려스러운 지점은 고인까지 수익 창출에 활용하는 <가로세로연구소>와 강 변호사, 그리고 보수극우 유튜버들의 이러한 행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유언이 된 한마디, “입에 말아 넣으시오”

아버지의 뜻을 함께 이어가겠습니다
안영민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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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1  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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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민 / 안재구 선생 유족 대표, 전 <민족 21> 대표

  
▲ 지난 9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안재구 선생의 차남 영민 씨. [통일뉴스 자료사진]

                                       1.
“영민아, 아버지가 드디어 말씀을 하셨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데? 누나를 알아보셨어?”
“아니, 알아보시지는 못하는데…, 내 손을 잡고 손에다 뭘 쥐어주는 것처럼 하시더니 ‘입에 말아 넣으시오’ 이렇게 말씀하셨어.”
작은누나(소영)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여전히 천정만 응시한 채 아무 말씀 없이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뵙고, “아버지, 저 영민입니다. 알아보시겠어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흘낏 보시더니 다시 천정만 바라보셨습니다.
“아까 그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무셨다.”
6월 4일 밤늦게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산소포화도가 50대로 떨어져 빨리 응급실로 모셔야겠다고 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오신 아버지를 100일 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3일 요양원으로 가셨는데, 2월 말부터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양원에서 식사를 잘 못 하신다는데 어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00일 만에 만난 아버지는 많이 여윈 모습에 기력도 쇠하셔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급히 인공호흡기를 장착하고 바로 중환자실로 이동했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2주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며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병실에서는 거동도 못하고 식사도 코줄로 공급받으며 누워계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도 맥박도 혈압도 모두 정상수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천정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자식들도 못 알아보고, 말을 걸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제가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설명을 해드렸는데, 그때 갑자기 저를 날카롭게 노려보곤 다시 천정만 바라보았습니다. 또 누군가 곁에 오면 항상 손을 꽉 쥐고 계셨고, 팔다리에도 힘을 주고 버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작은누나가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쓰신 책도 읽어드리고, 라디오에서 클래식 방송도 들려드리곤 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만 책에 나오는 어린 시절 할배들의 이야기를 읽어드리니 한 번씩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러길 여러 차례,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여신 겁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입에 말아 넣으시오”였던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아버지가 처한 상황,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생사를 걸고 지난한 투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병실은 끌려온 취조실이었고,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던 저는 취조하는 수사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묵비하고, 천정만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누나를, 어렵게 연락선을 갖고 면회 온 동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에 꼭 쥐고 있던 문서를 건네주며 “입에 말아 넣으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쓰신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을 보면 1948년 2.7 구국투쟁 후 모든 투쟁이 비합법화되고, 모든 조직이 지하로 들어가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남로당 밀양군당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는 군당의 연락문서를 들고 아지트를 찾아갔지만 이미 그곳은 적들의 침탈로 풍비박산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어렵게 찾아낸 마지막 비선도 끊어진 상황에서 아버지는 홀로 산속을 헤매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문서를 입에 말아 넣어 씹어 삼키고, 갖고 있던 총도 계곡물에 던져버린 뒤 살길을 찾아 나섭니다. 절절하게 묘사되는 그 대목이 아버지의 오늘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현재가 바로 그 참담한 날들의 순간순간이었던 것입니다.
                                      2.
아버지의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였습니다. 기억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기억이 비연속적으로 사라지더니 어느 때부터는 구국전위 사건을 기억 못하셨습니다. 최근 20~30년의 기억 중에는 2005년 아리랑 참관단으로 많은 분들과 함께 평양에 간 기억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평양 방문 이야기를 꺼내면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꺼내시곤 했습니다.
그러다 남민전 사건의 기억에 한참 머무르며 이재문 선생님을 그리워하셨고, 인혁당 사건의 여정남 열사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또 경북대 수학과 은사인 박정기 총장님을 찾아뵈어야겠다고 하셨다가 1960년대 경북대 수학교실의 세미나 수업 속에 한참을 머무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랬던 기억이 다시 거슬러 올라가 해방 정국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아버지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도 감옥살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집 곁으로 새로 이사 오신 다음에는 그 집을 감옥이라고 여기셨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제게 “당장 보안과장을 불러오라”고 호통도 치셨습니다. 식사를 챙겨서 가면 제가 취사장의 소지를 통해 밥을 받아오는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다 한 번씩 바깥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새로운 곳으로 이감 왔다고 여기셨는지 집안 곳곳을 둘러보더니 “그래, 또 한번 살아보는 거지”하며 껄껄 웃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4년을 지내시다 새로 가게 된 요양원도 교도소 병사라고 여기셨다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요양원 이사장께 불호령을 내리곤 하셨답니다.
그랬던 아버지이기에 생의 마지막도 끝내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조직을 지키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마지막 저항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조직선을 만나고, 그 사람의 손에 문서를 전달해주신 아버지는 전과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누나에게 첫 마디를 건네고 며칠 후, 퇴원을 하루 앞둔 날에 아버지는 저와 형에게도 처음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오랜 만이구나, 별일 없지?”라고.
퇴원을 하고 예전 요양원으로 다시 가신 날, 아버지는 한결 마음이 편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살아온 생을 알고 있던, 그래서 더욱 각별히 아버지를 챙겨드렸던 요양원의 직원들도 따뜻하게 반겨주었습니다. 하모니카로 연주해주는 고향의 봄을 들을 때도, “안재구 교수님!”하고 부를 때도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이발도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주무시다가 7월 8일 새벽 4시 30분 심정지로 기나긴 전사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당신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마침내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을 따라가시기라도 하듯 바로 7월 8일, 그렇게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3.
  
▲ 안재구 선생이 영면해 있는 묘소. [사진제공-안영민]
아버지께서 생사를 다투며 중환자실에 계실 때, 권낙기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서운하게 듣지는 마라.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이렇게 내려오는 우리 운동의 전통이란 게 있다. 아버지 장례 문제는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니 우리 동지들이 생각을 하고 있겠다.”
범민련의 원진욱 사무처장도 제게 전화를 해서 “만약 큰일을 치러야 한다면 실무적인 건 후배들이 잘 할 테니 선배님은 염려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7월 8일 새벽에 연락을 받고 뛰쳐나가는데 머릿속만 하얘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단 미리부터 생각해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잡아놓고 이동하는데 남민전 출신의 김경중 선배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서울두레생협에 조합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장례 실무적인 부분은 두레생협에서 맡겠다고 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직 빈소도 꾸려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급히 서울대로 달려오신 권낙기 선생님이 장례위원회 구성 논의를 바로 진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날 오후에 남민전 동지회와 범민련, 진보연대 등 많은 통일사회단체가 참여해 장례위원회 구성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통일애국지사 고 안재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유족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며, 그 덕분에 저희 가족은 문상 오신 분들을 예를 갖춰 맞이하는 역할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조문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생전에 조직적인 인연을 맺고 함께 활동한 분들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참 많은 분들이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또 많은 곳에서 빈소와 복도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조화와 조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장례 기간 내내 큰 힘이 되었습니다.
7월 9일 오후 7시30분 열린 추모식에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추모사를 해주신 남민전 동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님, 아버지에게는 마음의 터전이었던 범민련의 이규재 의장님, 1980~90년대부터 함께 투쟁했던 한국진보연대 한충목 상임대표님, 그리고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 모두에게 항상 큰 힘이 되어주셨던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선생님의 귀한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작사작곡한 노래 <철창 안의 봄>을 불러준 희망새와 아버지의 삶을 춤으로 표현해준 이삼헌 선생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호상 역할을 해주신 아버지의 중학교 후배인 인혁당 사건의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님과 아버지와 함께 감옥살이를 하셨고, 아버지께 싫은 소리도 마다 않으셨던 통혁당 재건위 사건의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7월 10일 오전 6시 발인을 마치고 수원 연화장을 거쳐 밀양의 선영으로 내려가는데 아침부터 밀양에 폭우가 내린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도착할 무렵 비가 그치기 시작하더니 하관과 추모식을 마치니 해가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대구경북지역과 부산경남지역, 또 고향인 밀양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마지막 배웅을 위해 모였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따랐던 후배 동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길이어서 아버지 마음도 정말 푸근했을 것입니다. 마치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하듯이 추모식을 끝내니 숲에서 새가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그 순간 하나하나가 제게는 너무나 뜻 깊었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남은 일들을 정리하는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정성을 보내주셨더군요. 장례식 비용을 모두 지불하고도 꽤 많은 금액의 돈이 남았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의 마음들이 하나로 모인 것인 만큼 주위 분들과 잘 상의해 ‘통일애국지사 안재구 선생’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뜻을 잇는 일에 귀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희 가족들에게 큰 힘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들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저희 가족에게도, 또 이 땅의 자주와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기억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2020년 7월 11일
안재구 선생 유족을 대표하여
아들 영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