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2일 월요일

핵 시험 앞에 선 한미연합훈련의 운명


<분석과전망>북핵문제의 범주 확장-핵위협엔 핵개발 한미연합훈련엔 핵시험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5/01/12 [21:22]  최종편집: ⓒ 자주민보

북한은 핵개발의 명분을 미국의 핵위협에서 찾는다. 북한은 이어 최근, 핵 능력을 고도화하기 위한 핵 시험의 명분까지도 미국에게서 찾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핵을 둘러싼 북미대결전의 새로운 양상이다. 북핵문제의 범주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게 한미연합훈련을 임시중단 하면 핵 시험을 임시중단 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최근 북미대결전에서 최고의 사안으로 된다. 
수많은 의도가 깔려있는 제안이다. 온갖 정치적 복선이 얽히고 섥혀 있는 제안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북미관계전문가들이 나서서 심혈을 기울여 분석하고 할 그럴 정도로 복잡한 사안은 아니다. 북미관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다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인 것이다. 
북한의 이 제안에서 가장 먼저 짚을 수 있는 것은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하지 말라는 북한의 압박이다.

북한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기본적인 사안이라며 한미연합군사 훈련 중지를 한 두 번 만 강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현 시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게 부각될만하다. 북한은 통일의 대통로를 열자며 남북고위급회담 그리고 부문별 회담 개최는 물론 더 나아가 최고위급회담까지도 못 열 이유가 없다고 했다.

북한은 지난해 초 남북고위급회담이 한미연합훈련을 중지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판문점에서는 남북이산가족이 상봉하고 다른 여타의 곳에서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서로 엇나는 풍경을 마뜩치 않게 여겼을 것이었다.

북한의 이 제안에서 다음으로 짚을 수 있는 것은 북한이 핵 시험을 언제라도 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우선은, 당장이라도 핵 시험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이 한미연합 군사훈련으로 대표되는 대북대결 태세를 바꾸지 않으면 이후 핵 시험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북한의 의도는 핵 시험의 명분을 공개적인 방식으로 확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대결정책인 ‘전략적 인내’정책은 북핵문제 해결에 그 어떤 기여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핵 능력을 고도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이 ‘전략적 인내’정책이다. 임기 후반기에 들어선 오바마 대통령이 ‘전략적 인내’정책을 고수하게 되는 한 북한은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핵능력을 고도화하게 될 것이다. 
 
북미대결전에서 핵심은 핵이라는 누구할 것 없이 다 아는 상식이다. 그렇지만 핵 시험 중단이 북미대결전에 정치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비중 있는 정치기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제안을 통해 북한은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더구나 공개적 방식을 동원한 것이었다. 핵 시험과 한미연합 군사훈련 문제는 서로 간에 이른바, ‘빅딜’할 수 있는 내용으로 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는 흔히 물밑 접촉에서 다뤄질만한 사안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협상의 방식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밑에서는 안 되어서 공개하는 방식을 통해 북한이 미국에 정치공세를 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핵 시험 중단 문제를 공개적인 영역에서 문제화할 정도로 북미대결전이 매우 구체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핵 시험 중단 문제를 북미대결전에서 적지 않은 정치적 위상을 갖는 정치기재로 부상시키고 있다는 것은 북핵문제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이는 북핵문제가 북핵을 폐기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단선적 형태를 띠는 것이었던 것을 과거로 돌리고 핵 시험 문제까지도 북미 간에 또 하나의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시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핵문제는 이제 북핵 폐기 그리고 당장에는 핵 시험 중단 문제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핵 능력의 고도화로 귀결될 북한의 지속적인 핵 시험은 단순히 북한의 핵능력을 고도화시킨다는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가 북핵문제를 세계적 사안인 핵군축문제로 변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될 수가 있는 것을 간헐적으로 보여주고는 한다. 북한이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핵군축문제를 부각시키는 언론플레이를 보였던 것이 그 비근한 사례이다.

북핵문제가 핵군축문제로 성격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조짐만으로도 미국의 핵 패권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의도하는 이러한 전략적 사고가 이 제안에는 읽히는 것이다. 북한의 지속적인 핵 시험이 미국에게 가하는 실질적 위협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제안은 아울러 북핵문제가 해결되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방식에 대한 답을 준다.
제안은 말 그대로 간단하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라 그러면 핵 시험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는 북미대결전에서 북핵문제는 ‘행동’ 대 ‘행동’ 방식으로만 풀릴 것이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확정시켜주고 있다.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05년 북미관계정상화에 대한 경로와 과정까지도 담고 있는 9.19공동성명이 이룩해놓고 있는 원칙이 그것이다.

북한의 이 제안에 대해 미국은 거절을 했다. 이에 대해 아쉬워 하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놀라는 전문가 또한 없었다. 익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북한의 이 제안을 정치공세쯤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미국이다.

당연한 것이었다. 패배의 모양새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안이다. 쿠바와의 국교정상화를 결정하고 난 뒤 오바마행정부는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는 상황이기까지 하다.
사실, 미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북대결정책인 ‘전략적 인내’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그 준비다. 최대한 양보해서 ‘전략적 인내’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수정이라도 있어야 되는 것이 미국의 대북대화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이 제안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결단을 요청한 것이다. 핵 시험과 한미연합군사훈련을 맞바라보게 하고 마는 북한의 제안이자 전격적 조치.
이 조치에 대해 오바마행정부는 당장에는 거절했지만 그러나 상황은 그것으로 끝날 기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미국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형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모양새를 갖추는 미국의 대응이 나올 수도 있어 보인다.

전문가들의 시선이 오는 18일부터 이틀간 싱가포르에서 열리게 될 북미'트랙 1.5'(반관반민) 대화에 벌써부터, 꽂혀있는 이유이다.

국군포로 자녀들을 참전 유공자 유족으로 인정하라


2015.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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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국회의원 사무실로 낯선 말투를 쓰는 3명의 남녀가 찾아와 무작정 의원과 면담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순간 그들이 평범한 우리나라 주민이 아니고 북한 사람, 즉 탈북자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고 탈북자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는 하지만, 탈북자를 아무 선입견 없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최근 일부 탈북자들의 ‘삐라 날리기’ 등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을 초래하는 행위 때문에 나 역시 탈북자를 보는 인식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비난 문구로 가득찬 삐라를 날리는 행위가 남북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또 그러한 행위가 결국 우리 국민의 안전만 위협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탈북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날도 탈북자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무작정 찾아와 국회의원 면담을 강압하니 내 특유의 분노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대답하는 내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퉁명스러운 내 태도에 방문한 남자의 태도도 거칠어졌다. “왜 사람을 무시하듯 불친절하게 대하냐”며 강하게 치고 나오는데 그 말이 다시  내 속을 자극했다. “내 말이 뭐가 문제라는 거냐? 확인해서 답해 준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냐”며 대꾸하니 바로 큰 소리가 왕왕 터지는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다른 보좌진들이 말리고 또 그쪽 일행도 말리면서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 때 갑자기 보좌관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보좌관님, 사실 저 분들은 탈북자가 아니라 국군포로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순간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알게 된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이 책임져야할 큰 정신적 빚인 국군포로, 우리가 몰랐거나 또는 외면했던 그 이야기다.
  한근수. 그날 나를 찾아온 국군포로 명예회복 관련 단체의 회장 이름이다. 북한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른 가족을 위해 나는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처리한다. 그는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아주 악명 높은 그 곳, ‘아오지 탄광’이 그가 태어난 고향이란다. 여기서 잠깐 아오지 탄광에 대해 정확히 확인해 보자.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SNS에서 우스개 농담처럼 떠돌던 말이 있었다.
28년 만에 한국 남자축구가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 올라갔는데 결승전 상대가 북한이었다. 이때 우리나라 일부 네티즌들이 농담으로 ‘북한에 져주자’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비록 결승에서 진다하더라도 축구 대표선수 중 군 미필자 일부만 논산훈련소로 가면 되지만 북한은 패배하면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과거에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1994년 탈북한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문기남 씨 증언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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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포로 모습

  아오지 탄광 출신의 국군포로 2세

  여하간 이처럼 아오지 탄광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어 북한의 독재와 인권유린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이름이다. 바로 그곳에서 한근수 씨는  태어났다. 도대체 한근수 씨 부모는 누구이기에 이른바 저주받은 땅, 아오지 탄광에서 한근수 씨를 낳은 것일까.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였다. 193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한 씨의 아버지는 18살이 되던 1949년 8월 15일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같은 해 12월 말 또는 이듬해인 1951년 1월경 강원도 양구에서 중공군에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끌려간 곳이 평안남도 강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 이곳에서 한 씨의 아버지는 다른 국군포로와 함께 수용되어 체포 당시 입게 된 부상을 치료하며 감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1953년 8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계급으로는 중좌, 우리나라 계급으로 치면 중령에 해당하는 인민군 장교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날 국군포로에게는 수용소 연병장으로 전부 나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어 인민군 중좌는 모여 있던 국군포로에게 “조국 해방전쟁이 우리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거짓 선전을 하더니 연병장 한 가운데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국군포로에게 인민군 장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화국이 동무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 그어놓은 선을 기준으로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싶은 자는 좌측으로, 그리고 우리 공화국에 남아서 살고 싶은 자는 우측으로 이동하라.”
  그때였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천천히 좌측으로 움직였다. 남한으로,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삼척으로,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국군포로 역시 한근수 씨의 아버지처럼 좌측으로,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순간 연병장에 도열해 있던 인민군들이 대한민국을 선택한 국군포로 발밑으로 기관단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리고 고꾸라진 사람, 또는 자신이 이미 총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기절하거나 또 누군가는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들려온 인민군 장교의 목소리. “동무들,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하시오. 다시 선택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갔어” 더 무엇을 생각할까. 좌측에 서 있던 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우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인민군 장교는 웃으며 “동무들을 공화국의 이름으로 열렬히 환영한다”는 말을 남기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북한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스스로 공화국을 선택하여 남은 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날의 일화가 그 주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끌려간 그곳 ‘아오지 탄광’에서의 삶

  이 일이 있고 2, 3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강동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한근수 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강제로 기차를 타게 된다. 승객 수송용 기차가 아닌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차였다. 이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꼬박 하루를 달려 기차가 도착한 곳이 바로 ‘아오지 탄광’이었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은 북한 인권 탄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유가 뭘까.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오지 탄광은 단순한 탄광이 아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광복 후 북한 지역 통치자들이 친일파를 비롯한 북한 반체제 인사들을 아오지읍으로 강제 이주 시켰고 그곳에서 노역과 함께 외부로 나갈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 아오지에 국군포로도 보내진 것이다. 한근수 씨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그날 이후 아오지읍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인민 서열 ‘43호’라는 숫자였다. 북한은 인민들에게 계급처럼 번호를 매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최고로 높은 1호는 김일성 일가라고 한다. 그리고 2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군인 및 그 가족, 그리고 3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의사자로 지정된 사람들. 이런 방식으로 각기 인민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 번호는 43호였고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국군포로가 그 번호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즉, 43호는 북한에서는 반역의 저주받은 계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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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주민들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러한 국군포로는 누구와 결혼했을까. 한근수 씨의 어머니 역시 기구한 인생이었다. 1951년 1월 4일,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던 국군이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 후퇴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긴급 철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국군은 흥남에서 배들을 강제 동원하게 된다. 이때 국군의 후송을 강요받은 배의 선주들은 자신의 가족을 남겨둔 채 남쪽으로 배를 몰아야 했는데, 그 가족들이 북한 입장에서는 부역자의 가족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남게 된 부역자의 가족은 또 다른 ‘43호’가 되었고 이후 아오지 탄광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것이 한근수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경위였다.
  이들은 삶은 또 어떠했을까. 북한 당국은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일률적으로 작은 방과 부엌이 달린 ‘사택’을 제공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택처럼 칸칸이 이어붙인 집이었는데 옆방에서 방귀를 끼면 그 소리가 들릴 정도의 허술한 집이었다고 한다. 가구와 살림 역시 빈약하기 짝이 없어 이불과 책상이 전부였다. 그래도 결혼이나 누군가가 환갑 등을 맞이하면 잔치는 했다고 하는데, 그 잔치 방식이 진짜 음식으로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으로 된 과일과 떡을 행정기관에서 빌려와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한편 한근수 씨가 자신의 신분, 그리니까 ‘43호’라는 굴레를 이해하게 된 때는 15살이 되던 해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아오지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한근수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사실, 그래서 국군포로의 자식은 대학을 갈 수도, 인민군에 입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근수 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는 것 뿐이었다. 다만 국군포로인 아버지는 탄광 안에 들어가는 채탄공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탄을 지상으로 옮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차이일 뿐 일평생 탄광에서 일하다 죽는 것은 똑같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삼척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삐뚤어진 막내 아들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근수 씨에게 나무 하러 산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따라나선 그날, 한근수 씨는 오랫동안 묻고 싶었으나 꺼낼 수 없었던 그 말을 꺼냈다고 한다. “왜 아버지는 괴뢰군(국군)으로 살면서 공화국에 전향하지 않았냐?”는 원망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주춤하더니 아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의 입에서 고향 강원도 삼척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푸른 바다, 그리고 나무, 돌, 바람, 사람들. 특히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한근수 씨가 가장 믿기 어려운 대목이 과일 중 ‘배’에 대한 설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기 고향 삼척에서는 배가 어린애 머리통처럼 크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근수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에 살면서 그렇게 큰 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북한의 재배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큰 배를 본적이 없는지 모르겠으나 설령 있다 해도 그 좋은 1등급 수준의 배를 아오지 탄광에서 저주받은 최하위 계급 43호인 국군포로에게 줄 리 있었을까. 여하간 그날 아버지에게 들은 배 이야기가 한근수 씨는 제일 신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이야기 말미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 근수에게 속삭이며 말을 이어갔다. 놀랍고 무서운, 그러면서도 일생을 바꿀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근수야, 잘 듣거라. 너의 두 형과 누이는 이 체제에서 그냥 안주하며 살아갈 것 같고 너는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너는 때를 보아 남으로 탈출해라. 그리고 그곳에 가서 이 아버지의 군번을 알려줄테니 국방부를 찾아가거라. 이곳에서는 우리가 비록 43호로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지만 거기서는 우리가 또 2호가 되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탈출해라. 너만은 그곳에서 대우받고 잘 살 수 있도록 해라.”
  2004년 4월 9일. 그날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군’으로 전향하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 장례가 끝난 직후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군번을 가지고 북을 탈출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한 고향 삼척도 가고 거기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애 머리통만한 배가 정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내 43호의 굴레를 벗고 다시 새로운 대한민국의 ‘2호’로서 거듭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로 다할 수 없는 탈북의 고난 끝에 입국한 대한민국. 한근수 씨는 아버지 고향인 강원도 삼척에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 애 머리통만한 배도 봤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영원히 버리지 않은 조국 대한민국에 안긴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6.25당일에 전사한 아버지의 기록

  국방부를 찾아가 국군포로인 아버지 군번을 대자 국방부가 아버지가 병적기록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사망 추정일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에 아버지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 뿐 만이 아니었다. 1986년 국방부가 내 놓은 한국전쟁 요약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의 숫자는 82,318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중 휴전 협정 후 돌아온 국군 포로 7,86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950년 6월 25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소원처럼 ‘2호’가 되지 못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북한의 ‘43호’였던 한근수 씨는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43호’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최고의 예우로 국군포로의 자녀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 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연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2004년까지 전향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는 주장을 국방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병적기록표상 여전히 1950년 6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때 사망한 사람이 어찌 1962년에 아들을 낳았다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한근수 씨처럼 목숨걸고 북을 탈출한 국군포로 자녀가 93세대나 있으나 다른 참전 유공자 자녀와 달리 월 100만원 남짓 되는 연금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현재 이들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매일 국방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자신들을 북한의 2호처럼 예우해달라는 요구도 이미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참전 유공자 유족처럼 대우만 해 달라는 것이 전부다. 과연 이것도 무리한 요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양심에 묻고 싶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국군포로 문제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인권의 문제다. 북한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우리 정부에 송환해야 한다. 정부가 파악한 사실에 의하면 최소한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송환을 위해 우리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에게 마땅히 취해야 할 이 나라의 예우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을 정당하게 예우해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갚아야 할 ‘정신적 부채’를 안고 있다. 이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 및 예우를 다 해야 한다. 그것이 끝내 전향하지 않고 조국 대한민국을 선택한 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그것이 옳다. 나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 나와 대한민국으로 온 국군포로의 자녀에게 깊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힘내시라.
 고상만 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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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국회의원 사무실로 낯선 말투를 쓰는 3명의 남녀가 찾아와 무작정 의원과 면담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순간 그들이 평범한 우리나라 주민이 아니고 북한 사람, 즉 탈북자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고 탈북자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는 하지만, 탈북자를 아무 선입견 없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최근 일부 탈북자들의 ‘삐라 날리기’ 등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을 초래하는 행위 때문에 나 역시 탈북자를 보는 인식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비난 문구로 가득찬 삐라를 날리는 행위가 남북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또 그러한 행위가 결국 우리 국민의 안전만 위협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탈북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날도 탈북자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무작정 찾아와 국회의원 면담을 강압하니 내 특유의 분노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대답하는 내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퉁명스러운 내 태도에 방문한 남자의 태도도 거칠어졌다. “왜 사람을 무시하듯 불친절하게 대하냐”며 강하게 치고 나오는데 그 말이 다시  내 속을 자극했다. “내 말이 뭐가 문제라는 거냐? 확인해서 답해 준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냐”며 대꾸하니 바로 큰 소리가 왕왕 터지는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다른 보좌진들이 말리고 또 그쪽 일행도 말리면서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 이 때 갑자기 보좌관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보좌관님, 사실 저 분들은 탈북자가 아니라 국군포로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순간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알게 된 국군포로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이 책임져야할 큰 정신적 빚인 국군포로, 우리가 몰랐거나 또는 외면했던 그 이야기다.
      한근수. 그날 나를 찾아온 국군포로 명예회복 관련 단체의 회장 이름이다. 북한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른 가족을 위해 나는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처리한다. 그는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아주 악명 높은 그 곳, ‘아오지 탄광’이 그가 태어난 고향이란다. 여기서 잠깐 아오지 탄광에 대해 정확히 확인해 보자. 지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SNS에서 우스개 농담처럼 떠돌던 말이 있었다.
    28년 만에 한국 남자축구가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 올라갔는데 결승전 상대가 북한이었다. 이때 우리나라 일부 네티즌들이 농담으로 ‘북한에 져주자’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비록 결승에서 진다하더라도 축구 대표선수 중 군 미필자 일부만 논산훈련소로 가면 되지만 북한은 패배하면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과거에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1994년 탈북한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문기남 씨 증언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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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포로 모습

      아오지 탄광 출신의 국군포로 2세

      여하간 이처럼 아오지 탄광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어 북한의 독재와 인권유린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이름이다. 바로 그곳에서 한근수 씨는  태어났다. 도대체 한근수 씨 부모는 누구이기에 이른바 저주받은 땅, 아오지 탄광에서 한근수 씨를 낳은 것일까.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였다. 193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한 씨의 아버지는 18살이 되던 1949년 8월 15일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같은 해 12월 말 또는 이듬해인 1951년 1월경 강원도 양구에서 중공군에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끌려간 곳이 평안남도 강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 이곳에서 한 씨의 아버지는 다른 국군포로와 함께 수용되어 체포 당시 입게 된 부상을 치료하며 감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1953년 8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계급으로는 중좌, 우리나라 계급으로 치면 중령에 해당하는 인민군 장교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날 국군포로에게는 수용소 연병장으로 전부 나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어 인민군 중좌는 모여 있던 국군포로에게 “조국 해방전쟁이 우리 공화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거짓 선전을 하더니 연병장 한 가운데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국군포로에게 인민군 장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화국이 동무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 그어놓은 선을 기준으로 남조선으로 내려가고 싶은 자는 좌측으로, 그리고 우리 공화국에 남아서 살고 싶은 자는 우측으로 이동하라.”
      그때였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천천히 좌측으로 움직였다. 남한으로,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삼척으로,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국군포로 역시 한근수 씨의 아버지처럼 좌측으로,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순간 연병장에 도열해 있던 인민군들이 대한민국을 선택한 국군포로 발밑으로 기관단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리고 고꾸라진 사람, 또는 자신이 이미 총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기절하거나 또 누군가는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들려온 인민군 장교의 목소리. “동무들,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하시오. 다시 선택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갔어” 더 무엇을 생각할까. 좌측에 서 있던 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우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인민군 장교는 웃으며 “동무들을 공화국의 이름으로 열렬히 환영한다”는 말을 남기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북한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스스로 공화국을 선택하여 남은 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날의 일화가 그 주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끌려간 그곳 ‘아오지 탄광’에서의 삶

      이 일이 있고 2, 3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강동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한근수 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강제로 기차를 타게 된다. 승객 수송용 기차가 아닌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차였다. 이후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꼬박 하루를 달려 기차가 도착한 곳이 바로 ‘아오지 탄광’이었다고 한다.
      아오지 탄광은 북한 인권 탄압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유가 뭘까.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오지 탄광은 단순한 탄광이 아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광복 후 북한 지역 통치자들이 친일파를 비롯한 북한 반체제 인사들을 아오지읍으로 강제 이주 시켰고 그곳에서 노역과 함께 외부로 나갈 수 없도록 철저히 통제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 아오지에 국군포로도 보내진 것이다. 한근수 씨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그날 이후 아오지읍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북한인민 서열 ‘43호’라는 숫자였다. 북한은 인민들에게 계급처럼 번호를 매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최고로 높은 1호는 김일성 일가라고 한다. 그리고 2호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군인 및 그 가족, 그리고 3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의사자로 지정된 사람들. 이런 방식으로 각기 인민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 번호는 43호였고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국군포로가 그 번호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즉, 43호는 북한에서는 반역의 저주받은 계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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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흥남항에 몰려 철수를 기다리는 북한주민들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러한 국군포로는 누구와 결혼했을까. 한근수 씨의 어머니 역시 기구한 인생이었다. 1951년 1월 4일,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던 국군이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 후퇴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긴급 철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국군은 흥남에서 배들을 강제 동원하게 된다. 이때 국군의 후송을 강요받은 배의 선주들은 자신의 가족을 남겨둔 채 남쪽으로 배를 몰아야 했는데, 그 가족들이 북한 입장에서는 부역자의 가족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남게 된 부역자의 가족은 또 다른 ‘43호’가 되었고 이후 아오지 탄광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것이 한근수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경위였다.
      이들은 삶은 또 어떠했을까. 북한 당국은 이들 국군포로들에게 일률적으로 작은 방과 부엌이 달린 ‘사택’을 제공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택처럼 칸칸이 이어붙인 집이었는데 옆방에서 방귀를 끼면 그 소리가 들릴 정도의 허술한 집이었다고 한다. 가구와 살림 역시 빈약하기 짝이 없어 이불과 책상이 전부였다. 그래도 결혼이나 누군가가 환갑 등을 맞이하면 잔치는 했다고 하는데, 그 잔치 방식이 진짜 음식으로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으로 된 과일과 떡을 행정기관에서 빌려와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한편 한근수 씨가 자신의 신분, 그리니까 ‘43호’라는 굴레를 이해하게 된 때는 15살이 되던 해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왜 아오지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한근수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사실, 그래서 국군포로의 자식은 대학을 갈 수도, 인민군에 입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한근수 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는 것 뿐이었다. 다만 국군포로인 아버지는 탄광 안에 들어가는 채탄공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탄을 지상으로 옮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차이일 뿐 일평생 탄광에서 일하다 죽는 것은 똑같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삼척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삐뚤어진 막내 아들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근수 씨에게 나무 하러 산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따라나선 그날, 한근수 씨는 오랫동안 묻고 싶었으나 꺼낼 수 없었던 그 말을 꺼냈다고 한다. “왜 아버지는 괴뢰군(국군)으로 살면서 공화국에 전향하지 않았냐?”는 원망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주춤하더니 아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의 입에서 고향 강원도 삼척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푸른 바다, 그리고 나무, 돌, 바람, 사람들. 특히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한근수 씨가 가장 믿기 어려운 대목이 과일 중 ‘배’에 대한 설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기 고향 삼척에서는 배가 어린애 머리통처럼 크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근수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에 살면서 그렇게 큰 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북한의 재배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큰 배를 본적이 없는지 모르겠으나 설령 있다 해도 그 좋은 1등급 수준의 배를 아오지 탄광에서 저주받은 최하위 계급 43호인 국군포로에게 줄 리 있었을까. 여하간 그날 아버지에게 들은 배 이야기가 한근수 씨는 제일 신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이야기 말미에 아버지는 어린 아들 근수에게 속삭이며 말을 이어갔다. 놀랍고 무서운, 그러면서도 일생을 바꿀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근수야, 잘 듣거라. 너의 두 형과 누이는 이 체제에서 그냥 안주하며 살아갈 것 같고 너는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너는 때를 보아 남으로 탈출해라. 그리고 그곳에 가서 이 아버지의 군번을 알려줄테니 국방부를 찾아가거라. 이곳에서는 우리가 비록 43호로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지만 거기서는 우리가 또 2호가 되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탈출해라. 너만은 그곳에서 대우받고 잘 살 수 있도록 해라.”
      2004년 4월 9일. 그날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군’으로 전향하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 장례가 끝난 직후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군번을 가지고 북을 탈출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한 고향 삼척도 가고 거기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애 머리통만한 배가 정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내 43호의 굴레를 벗고 다시 새로운 대한민국의 ‘2호’로서 거듭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로 다할 수 없는 탈북의 고난 끝에 입국한 대한민국. 한근수 씨는 아버지 고향인 강원도 삼척에서 아버지가 말한 어린 애 머리통만한 배도 봤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영원히 버리지 않은 조국 대한민국에 안긴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6.25당일에 전사한 아버지의 기록

      국방부를 찾아가 국군포로인 아버지 군번을 대자 국방부가 아버지가 병적기록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사망 추정일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에 아버지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 뿐 만이 아니었다. 1986년 국방부가 내 놓은 한국전쟁 요약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의 숫자는 82,318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중 휴전 협정 후 돌아온 국군 포로 7,86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950년 6월 25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한근수 씨는 아버지의 소원처럼 ‘2호’가 되지 못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북한의 ‘43호’였던 한근수 씨는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43호’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최고의 예우로 국군포로의 자녀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 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연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다.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2004년까지 전향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는 주장을 국방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한근수 씨의 아버지는 병적기록표상 여전히 1950년 6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때 사망한 사람이 어찌 1962년에 아들을 낳았다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한근수 씨처럼 목숨걸고 북을 탈출한 국군포로 자녀가 93세대나 있으나 다른 참전 유공자 자녀와 달리 월 100만원 남짓 되는 연금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한근수 씨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현재 이들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매일 국방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자신들을 북한의 2호처럼 예우해달라는 요구도 이미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참전 유공자 유족처럼 대우만 해 달라는 것이 전부다. 과연 이것도 무리한 요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양심에 묻고 싶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국군포로 문제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인권의 문제다. 북한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우리 정부에 송환해야 한다. 정부가 파악한 사실에 의하면 최소한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여전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송환을 위해 우리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에게 마땅히 취해야 할 이 나라의 예우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을 정당하게 예우해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갚아야 할 ‘정신적 부채’를 안고 있다. 이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 및 예우를 다 해야 한다. 그것이 끝내 전향하지 않고 조국 대한민국을 선택한 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그것이 옳다. 나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 나와 대한민국으로 온 국군포로의 자녀에게 깊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힘내시라.
     고상만 인권운동가

[세월호 추모음악영상] 잊지 말아요

[세월호 추모음악영상] 잊지 말아요

노래-말로, 사진·그림 - 손문상

프레시안 2015.01.13 11:11:55


눈부신 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가슴 아프게 기억해야 할 날이 하루 더 늘었습니다. 봄날 같은, 햇살 같은 아이들이 사라졌기에 더 아픈 대한민국 역사의 '생채기'입니다.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기억하기에 앞서 여전히 눈앞에 놓인 '아이들의 죽음의 원인'인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싸워야 할 때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이런 마음을 모아 추모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가수 말로의 노래에 본지 손문상 화백의 사진과 그림을 담은 추모음악영상입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 공유해주십시오.




이명박과 박근혜, 이런 점까지 닮다니


기사 관련 사진
▲ 홍가혜 결심공판 지난해 12월 2일 목포지법 형사 2단독 장정환 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을 마치고 홍가혜씨와 양홍석 변호사가 법정을 나서고 있다.
ⓒ 이영주

세월호 사건 당시 허위사실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됐던 홍가혜씨가 지난 9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홍씨의 판결을 보니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200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네르바(본명 박대성) 사건이다.

두 사람은 재판도 받기 전에 구속되어 1백일 넘게 감옥생활을 하다가 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또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렸다는 '의혹'을 사는 점도 같다. 

수사기관은 미네르바의 수많은 글 중 단 2편만을 문제삼았고, 홍씨 역시 SNS 글 1편과 방송인터뷰 하나로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이런 식으로 인터넷이나 언론에 올라온 수많은 글이나 말들을 이 잡듯이 뒤진다면 하루에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법정에 서고도 남을 것이다. 법이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돼서는 곤란하다.   

[판결 대 판결] 4번째 이야기는 정부를 공격했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닮은 꼴 사건을 분석해 본다. 세월호 해경 명예훼손 사건과 미네르바 사건이다.   

세월호 인터뷰, 홍가혜씨는 왜 형사처벌 대상이 되었나

2014년 4월 16일 오전 온 나라를 뒤흔든 참사가 발생한다. 시간이 지나도 구조자는 늘어나지 않고 실종자는 사망자로 변해갔다. 대형참사 앞에 속수무책인 정부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사고 사흘째인 18일 인터넷과 언론에는 '홍가혜'라는 이름이 오르내린다. 홍씨가 자신을 진도에서 구조활동을 펼치던 민간 잠수부라고 속이고 어느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그날 새벽 홍씨는 종편인 MBN과의 인터뷰에서 '민간잠수부에 대한 지원이 안 되고 있다', '해경이 시간만 때우고 가라고 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언론에선 실시간으로 후속기사가 등장했다. 그가 잠수부 자격증이 없고, 발언이 거짓이라는 점이 부각됐다. 일부 언론에서 확인되지 않은 홍씨의 과거까지 거론하자 그는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 '관심종자'가 되어버렸다. 급기야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홍씨는 4월 20일 경찰에 자진출석했다가 법원의 영장 발부로 구속된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을 때 비난과 지탄이 따를 수 있다. 하지만 법적인 책임을 지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냉정히 따져보자. 홍씨는 왜 구속되었을까. 거짓말을 해서? 아니면 정부의 구조작업을 비판해서? 민간잠수부 자격이 없는데도 행세를 해서? 국민을 우롱한 괘씸죄로? 어떤 것도 처벌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8개월 여 시간이 흐른 지난 9일 1심 법원(광주지법 목포지원 장정환 판사)은 홍씨가 무죄라고 판결했다.  

검찰 "허위 인터뷰로 해양경찰청장과 구조담당자 명예훼손"

그가 형사처벌 대상이 된 건 딱 2가지 때문이다. 2014년 4월 18일 새벽 SNS의 일종인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게시물 1편과 종편인 MBN 방송과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이 2가지로 "김석균 당시 해양경찰청장과 현장구조대원 등 세월호 구조담당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검찰은 SNS 게시물은 정보통신망법위반(명예훼손), 방송인터뷰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기소했다.

두 가지 죄목 모두 목적이 있어야 성립하는 목적범이다. 법원은 우선 '비방의 목적'이 있었는지를 따졌다.

법원은 ▲ 홍씨가 잠수자격증을 소지한 민간잠수사가 아님에도 인터뷰를 제안 받고 승낙한 사실, ▲ 잠수부로서 구조작업에 참여한 사실이 없음에도 글을 게시하고 인터뷰 한 사실은 인정했다. 법원은 이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비방의 목적은 없었다고 판시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세월호 생존자에 대한 대규모의 구조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으나, 홍씨가 팽목항 현장에서 선박 및 장비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민간잠수부들의 구조작업 투입이 제한되고 있는 상황을 확인하게 되자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 구조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주된 목적에서 위와 같은 글을 게시하고 인터뷰를 하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주요한 동기,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수적으로 다른 목적이나 동기가 일부 내포되어 있더라도 홍씨에게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법원 "홍씨의 인터뷰와 글, 허위로 단정하기 어렵다"

기사 관련 사진
▲  MBN 홍가혜 인터뷰
ⓒ MBN 캡쳐

그렇다면 검찰이 허위사실로 지목한 발언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인터뷰 발언과 SNS 게시물을 종합해보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① 4월 17일 구조작업에 투입된 민간잠수부가 벽을 두고 생존자와 대화하였다(인터뷰)
② 해양경찰이 민간잠수부에게 지원을 하지 않고(SNS, 인터뷰), 민간잠수부의 구조작업을 막고 있다(인터뷰)
③ 구조대원이 유가족에게 "여기는 희망도 기적도 없다"고 했다(SNS, 인터뷰)
④ 해경이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다"(인터뷰)

법원은 홍씨의 글과 인터뷰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①과 ②에 대해 법원은 일부 사실과 다르다는 부분은 인정했다. 하지만 △민간잠수부들이 생존자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실종자 가족들이 문자메시지를 받았던 사실 △민간잠수부들은 해경이 구조작업을 막고 있다고 인식하였고, 이후 민간잠수업체 '언딘'과 유착 의혹까지 제기된 점을 비추어 홍씨가 "허위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③의 경우 홍씨가 팽목항에서 회의에 참석한 실종자 가족으로부터 이와 같은 취지의 말을 들었고 ④와 관련, 민간구조대원이 해경과 교신 과정에서 "잠수부 300명 정도가 있으니 민간잠수부가 필요 없다. 선회하다가 그냥 가라"는 말을 듣고 "그럼 시간만 때우고 가란 말이냐"라고 반문하였다가,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답변을 들은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홍씨의 글과 인터뷰 내용은 일부 사실과 다르고 과장이 있을지언정 허위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정부나 국가기관은 명예훼손 피해자 될 수 없다" 원칙 제시

법원은 해양경찰청장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정부 또는 국가기관은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다만 "공직자 개인에 대한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명예훼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법원은 "해양경찰청장은 당시 세월호 생존자 구조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통제하였던 공적인 존재"라며 "홍씨는 구조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주된 목적에서 글을 게시하고 인터뷰를 한 것으로,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피해자로 지목된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담당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도 △세월호 구조담당자는 그 수를 가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집단표시에 의한 비난이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형법 제309조 제1항의 출판물(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텔레비전은 '기타 출판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벌법규의 의미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은 9일 홍씨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을 거칠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홍씨가 민간잠수사 자격이 없었고 일부 확인되지 않거나 과장된 사실을 글이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것은 맞다. 하지만 진도 현장에 있던 홍씨는 민간잠수부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구조작업 투입이 제한되고 있는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려 구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판결에 검사가 항소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 당시 구조작업과 희생자 인양작업이 급선무였던 시점에서 정부와 수사기관이 홍씨를 구속기소한 일이 적절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더구나 공적인 구조업무를 담당했던 해양경찰청장과 구조담당자들의 명예가 그렇게 소중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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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대통령 '미네르바', 전기통신법으로 구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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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 정부 정책과 관련한 허위 사실을 게재한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미네르바' 박대성씨가 지난 2009년 4월 20일 오후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
ⓒ 권우성

2009년 새해 벽두부터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던 필명 미네르바(본명 박대성)의 구속이었다.

미네르바는 2008년 3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포털사이트인 다음(Daum)의 '아고라' 경제 토론방에 280여편의 글을 올렸다. 경제동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당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환율폭등 사태, 주가지수 등을 예측하자 네티즌들은 열광했다.

반면 정부 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가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네티즌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검찰은 2009년 1월 7일 미네르바를 체포한 뒤 구속기소한다. 검찰 관계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네르바의 글이 오른 뒤 불안감이 퍼지면서 정부가 상당한 금액의 외환을 시장에 풀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먼저 검찰의 '공소장' 중 주요 내용을 보자.  

미네르바는 2008년 7월 말경 "8월부터 외화예산 환전 업무 중단"이라는 뉴스 제목을 발견하자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드디어 외환보유고가 터지는구나' 라는 제목 아래 마치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어 외화예산 환전 업무가 중단된 것처럼 허위 내용의 글(①번 글)을 게시하였다. 

2008년 12월에는 '아고라'에 '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 - 1보'라는 제목 아래 "2008. 12. 29. 오후 2시 30분 이후 주요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 전송. -정부 긴급명령 1호-"라는 허위 내용의 글(②번 글)을 게시하였다.

검찰은 2개의 게시물을 통해 "정부의 환율정책 수행을 방해하고 우리나라 대외신인도를 저하시키는 등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하였다"고 기소하였다.

검찰은 280여 편의 글 중에서 단 2개만 문제삼았다. 더구나 그에게 적용된 법률은 일반인들에겐 이름도 생소한, 전기통신법이다. 47조 1항은 다음과 같다.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법원 "미네르바 글, 표현 과장되었더라도 허위사실 아니다"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미네르바의 글이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는지 둘째, 그가 허위의 사실을 게시한다는 고의가 있었는지다. 

서울중앙지법(유영현 판사)은 우선 "외화 환전업무가 중단된 것이 (미네르바의 주장과 달리)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박씨의 '①번 글'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유 판사는 그러나 "박씨가 허위 사실을 게시한다는 고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유 판사는 외환시장 자체 및 연말 외환시장의 특수성, 인터넷 경제토론방의 성격을 감안하면 "글이 표현방식에서 과장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서술이 있더라도 전적으로 허위의 사실이라고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유 판사는 이어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는지 검토했다. 유 판사는 ▲작년 8월경 실제로 외환보유고가 감소되었고, ▲ 인터넷 게시판은 누구나 글을 게시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인 점 ▲ 미네르바의 '②번 글' 게시 이후 달러 매수량 증가가 미네르바의 글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점 등을 보면 공익을 해할 목적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 미네르바의 글이 시장에 일부 영향을 미쳤더라도 이는 개연성 정도에 불과하며 ▲ 오히려 미네르바는 개인들의 환차손 피해를 방지하고자 글을 올렸다고 주장한 점 등을 보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2009년 4월 20일 내려진 판결의 결론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미네르바는 고의로 허위사실을 게시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미네르바의 글은 공익성을 위반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 "'공익'은 추상적...명확성 원칙 위배" 위헌결정

그 후 전기통신법 47조 1항은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12월 28일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공익을 해할 목적'이라는 표현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법률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죄형법정주의의 원칙 중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미네르바는 무죄판결을 받고 104일 만에 풀려난다. 판결에 불복, 검사가 항소하지만 처벌근거가 된 전기통신기본법마저 위헌이 되자 곧바로 항소를 취하한다.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네티즌들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세월호 해경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은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기관의 명예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부나 수사기관도 깨달게 되기를 바란다. 

‘기레기’를 믿은 박근혜, 태연히 ‘재탕 기자회견’


2015년 대통령 기자회견은 2014년의 재탕이었다
임병도 | 2015-01-13 08:16:21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번째로 했던 기자회견이 어제 끝났습니다. 혹시나 하고 봤지만, 역시나였습니다. 정말 의미 없었던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최소한 '청와대 인사문제'와 '정윤회 문건', '비선 3인방' 문제에서만큼은 대통령의 사과가 있으리라 봤지만, 역시나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는커녕 1 오히려 대한민국 사회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국민을 비판했습니다. 2
아이엠피터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이토록 의미 없고, 자기 아집으로 똘똘 뭉쳐진 이유에는 대한민국 언론이 그만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기레기'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언론이 어떻게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의미 없게 만들었는지 알아봤습니다.

'2015년 대통령 기자회견은 2014년의 재탕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15년 신년 기자회견은 '경제'라는 단어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25분간의 발표에서 무려 18분 동안 '경제' 분야에 대한 얘기로만 채웠습니다.
경제 관련 단어나 용어만 무려 42번을 언급했습니다. 지난해 24번보다 거의 두 배나 많았습니다. 문제는 이토록 경제를 부르짖었지만, 색다른 내용은 없는 2014년 신년 기자회견의 재탕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474'라 불리는 '성장률 4%','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불' 시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474'는 작년에도 말한 바가 있습니다.
'474'가 목표이니 또 말했다 칩시다. 그래도 실천 방안만큼은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밝혔던 '17개 창조경제혁신센터'나 'ICT', '친환경 에너지타운','규제개혁','유라시아 철도'는 2014년에 말했던 내용과 똑같았습니다.
무슨 곰탕도 아니고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재탕해서 국민 앞에 내놓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년에도 비슷한 얘기로 우려먹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국민을 무시하길래 작년도 했던 얘기를 뻔뻔하게 할 수 있는지, 정말 말조차 나오지 않았던 기자회견이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 기자회견, 어떻게 다를까?'
기자회견을 보면서 답답했던 점은 이미 작년에 나왔던 얘기를 했는데도, 어느 기자도 그 부분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거나 왜 똑같으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느냐는 점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 기자회견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좌측 미국 기자들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하겠다고 손을 듭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스스로 기자를 선택해서 질문을 받습니다.
우측 한국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가 손을 들어도 원고만 보고 있습니다. 손을 든 기자도 때때로 한 명에 불과합니다.
조현아 땅콩회항 사태에서 기자들은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며, 서로 질문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통령 앞에서는 손도 못 들고, 가만히 자리에만 앉아 있습니다.
한국 기자들이 손도 안 들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이미 사전에 질문자와 질문 내용이 그대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질문 순서와 질문 내용을 정했고, 청와대는 사전에 입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거기에 관여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청와대 윤두현 홍보수석은 '질문하실 기자 손들어 주십시오'라고 말했지만, 그의 선택은 이미 사전에 내정된 질문자였습니다.
그냥 'OOO 기자 질문할 순서이니 질문하세요'라고 바꿨어야 했습니다. 작년처럼 대놓고 짜고 치면 걸리니 타짜들의 밑장빼기 속임수처럼 국민의 눈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청와대와 기자들이 한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 기자보다 더 겁을 내는 기자들'
현재 대한민국 언론을 보면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겁을 내며 알아서 권력 앞에 바짝 엎드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1979년 신년 기자회견도 2015년 기자회견처럼 사전에 질문과 순서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 홍보 질문을 배정받은 K기자는 사전에 약속된 시나리오를 깨기로 마음 먹고 질문을 던집니다.
K기자는 각하 호칭조차 빼고 '새마을 운동'을 비판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권총을 만졌고, 박정희는 기자를 노려보기까지 했습니다. 3
기자회견은 겨우겨우 끝났고, 한 달 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그 기자의 이마를 박치기했습니다. 4
뉴스타파의 신년 기자회견을 분석한 기사와 동영상을 보면, 신년 기자회견의 문제점과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제대로 말도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그녀의 입만 바라보며 '경제' 받아쓰기만 했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불통과 의미 없었다'고 비판을 하는데,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회견이 좋았다고 대통령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활짝 웃습니다. 5
청와대 출입기자는 '오늘 얘기 중에 어떤 게 신문지상에서 헤드라인으로 나갔으면 좋겠나요?.'라고 묻습니다. 기자가 대통령의 마음에 드는 기사를 쓰겠다고 대놓고 대통령에게 묻는 이런 모습이 과연 기자의 입에서 나올 얘기입니까?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 시절에도 어떤 기자는 사전에 짜인 각본을 깨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자조차 없습니다. 박정희 시절보다 더 기자들이 엉망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대통령과 손잡은 기레기들의 합작품이었던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회가 얼마나 큰 악몽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1. 박근혜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만 표현했다. 청와대http://goo.gl/vq1nco
2. 원문'계속 논란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정말 건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
3. 동아일보 1991년 1월 11일 http://goo.gl/7n1GfP
4. 동아일보 1994년 1월 7일http://goo.gl/7n1GfP
5. 朴대통령 “소통점수요? 그건 모호하게 놔두는 겁니다” 헤롤드경제 2015년 1월 12일http://goo.gl/eOB6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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