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문재인 대통령, 일 년 전 ‘해수담수화 생수 치워달라’

‘MB가 추진했던 원전-해수담수화 수출 패키지’
임병도 | 2017-11-15 09:31:4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JTBC는 부산시가 기장 해수담수화 생수를 장애인,저소득층 등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부산시가 시각장애인, 독거노인, 다문화가정 행사 등에 원전 인근에서 채취한 물이라고 밝히지 않고 생수를 제공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JTBC 뉴스룸에 따르면 부산시는 지난 4월 시각장애인 행사에 ‘순수365’라는 생수를 500병 넘게 제공했습니다. 이 생수는 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11km 떨어진 부산 기장의 해수 담수를 담아 놓은 생수였습니다.
부산과 기장 일대 시민들은 원전 인근 바닷물을 식수로 공급하는 사업에 반대를 해왔습니다. 법원도 “담수화 수돗물 공급사업을 취소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시는 여전히 안전하다며 생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산시는 시민들이 아무도 기장 해수담수를 수돗물로 신청하지 않자, 편법으로 사회 약자 등에게 공급한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일 년 전 ‘해수담수화 생수 치워달라’
▲2016년 당시 문재인 전 대표는 고리원자력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장 해수담수화 생수를 치워줄 것을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작년에 기장 해수담수화 생수를 치워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지역 국회의원들과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를 방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앞에 놓여진 생수에는 ‘부산 해수담수화 수돗물’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라며 ‘고리원자력 본부’가 제공한 생수를 가리켰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금 기장의 해수담수화 수도에 대해서 주민들이 안전성에 대한 염려들이 해소되지 않아서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며 “우리 더불어민주당은 주민들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 기장의 해수담수화 수돗물을 가져다 놓고 이것을 마치 홍보하는 듯한 모습은 적절하지 못해 보입니다. 우리 쪽 자리에서는 수거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생수를 테이블에서 치웠습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고 신뢰가 확보되지 않은 ‘해수담수화 생수’를 홍보하려는 태도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이었습니다.

‘방사성물질을 마시라고요?’
▲기장 해수담수화 시설은 고리원자력발전소로부터 불과 11km 떨어져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시험성적서를 보면 방사성물질인 삼중수소가 검출됐다.

부산시는 총사업비 1,945억 원을 투자해 바닷물을 수돗물로 공급하는 해수담수화플랜트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해수담수화 수돗물은 2014년 12월 상수도를 통해 공급하려다 주민의 반대로 중지됐습니다.
주민들은 왜 해수담수화 수돗물을 반대했을까요?
부산 시민들은 바닷물을 수돗물로 만들어 마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부산시 기장군에 있는 해수담수화 시설의 수돗물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산시 기장군 대변리에 있는 해수담수화 시설은 고리원전으로부터 불과 11km 떨어진 바닷물을 여과시켜 수돗물로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고리원전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반경 10km 이내 주민들은 대피해야 합니다. 그만큼 10여 킬로 내외는 방사성물질에 대한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지역입니다.
주민들이 바닷물을 수돗물로 마시는 것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방사성물질이 100%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사성 배출물인 ‘삼중 수소’는 암을 유발하거나, 기형아와 돌연변이 발생 위험성이 높다고 알려졌습니다.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는 수돗물에서 삼중 수소가 ‘불검출’됐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시험결과를 보면 분명히 검출됐습니다. 현재까지 삼중 수소를 100% 제거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으며, 아무도 해수담수화 수돗물을 신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MB가 추진했던 원전-해수담수화 수출 패키지’
▲ 기장 해수담수화 사업에 참여했던 두산은 사우디에서도 해수담수플랜트를 수주했다. 기장 해수담수화 사업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추진됐다.

기장 해수담수화 수돗물 공급 사업은 타당성과 시장성이 없었습니다. 1,954억이 든 부산 해수담수화 사업으로 공급되는 수돗물은 현재 수돗물 가격보다 두 배는 비싸게 판매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5년 유예 기간을 줬지만, 나중에 부산시가 판매단가 기준 연간 59억 6천만 원, 생산단가 기준 연간 32억 5천만 원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싼 수돗물을 부산시민들은 마셔야 할까요?
두산중공업은 부산 해수 담수화 사업에 706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해수담수플랜트 수주를 위한 성공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MB는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물 부족 중동국가에 해수담수화 수출 패키지를 진행했습니다. 원전을 수출하고, 원전에서 나오는 바닷물을 수돗물로 바꿔 공급하는 방식은 엄청난 MB의 치적으로 홍보됐었습니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사업을 수출 실적과 성공 사례로 만들기 위해 부산 시민들이 실험용 모르모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는 해결해야 할 적폐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42 

“사람 팝니다, 90만원 낙찰!” 21세기 노예시장 리비아

[영상] “사람 팝니다, 90만원 낙찰!” 21세기 노예시장 리비아

등록 :2017-11-15 11:06수정 :2017-11-15 11:47

CNN, 리비아 트리폴리 밀착취재
유럽행 난민선 줄어들자 노예로 전락
매달 ‘인간 경매’서 40만원대에 팔려
리비아 당국, 조사 착수 뜻 밝혀
CNN 갈무리
CNN 갈무리
800, 900, 1000, 1100…. 숫자가 계속 올라가다 1200에서 멈췄다. “1200디나르(약 90만원) 낙찰”
중고차도, 땅도, 가구도 아니다. 바로 사람. 두 남성은 그렇게 팔려나갔다. <시엔엔>(CNN) 방송이 14일 지중해와 맞닿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인간 경매 시장을 밀착 취재해 보도했다. <시엔엔>이 지난 8월 단독 입수한 영상에는 20대로 추정되는 나이지리아 출신 남성이 경매에 나와 팔려나가는 모습이 등장한다. 취재진은 이 영상을 토대로 지난달 수도 트리폴리 인근 지역에서 잠입해 몰래카메라를 들고 확인에 나섰다. 도시 외곽에선 매달 1∼2회의 인간 경매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매가 시작된 지 6∼7분 동안 12명이 팔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군복을 입은 남성이 모여있는 군중을 향해 땅을 파는 사람이나, 크고 힘센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묻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값을 부른다. 이런 비인권적인 경매는 트리폴리 인근 주와라, 사브라타, 카바 등 전국적으로 9곳 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취재진은 팔려간 남성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두려움에 떨면서 거부했다.
<시엔엔>은 리비아에 유럽으로 넘어가려는 아프리카인들이 운집하면서 난민을 노예처럼 팔아넘기는 인간 경매가 성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비아 당국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유럽으로 가는 난민선이 줄어들었고, 밀수꾼에게 몸을 맡긴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리비아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CNN 갈무리
CNN 갈무리
취재진이 정부가 운영하는 트리폴리 난민 수용소에서 만난 나이지리아 남부 에도 출신 빅토리(21)는 겨우 마련해 온 자금 310만원이 떨어진 뒤 노동자로 팔려나갔다. 밀수꾼은 그에게 빚을 갚으라며 일을 강요했고, 빅토리의 가족들에게도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길 원하는 그는 “내 어머니는 나를 구하기 위해 돈을 빌리러 마을을 전전하고 다녔다고 한다”고 슬퍼했다.
국제이주기구(IOM)의 조사 결과 올해에만 최소 8800명이 기구에서 마련한 비행기를 타고 자발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리비아 당국은 인간 경매 시장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나세르 하잠 불법이민단속청 중위는 갱단 같은 폭력 조직이 밀수와 연관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들은 난민선에 100명씩 채워넣지만 유럽에 도착하던지, 바다에 빠져죽든 돈만 받으면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입양을 보낸 게 아닙니다. 인신을 내준 겁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⑧
2017.11.15 08:07:31



※이 기사는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외입양'이라고 표현을 해서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입양'을 보낸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한 일은 그저 아동의 인신을 내준 것 밖에 없습니다." (김도현 '뿌리의 집' 목사) 

2013년 전까지 한국 아동은 미국으로 입양될 때 IR-4 비자를 받았다. IR-4 비자는 '미국 시민에 의해 미국에서 입양될 예정인 고아(orphan to be adopted in U.S. by U.S. citizen)'에게 주어진다. 이 비자를 받은 아동은 '입양'이 아니라 '입양 예정'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양부모에겐 2년 동안의 '후견권'이 주어진다. '입양 예정'인 아동과 부모는 미국에서 별도의 입양 재판을 해야 법적인 '부모 자식' 관계가 된다. 출생국에서 입양이 완료된 아동은 IR-3(orphan adopted abroad by U.S. citizen) 비자를 받고 입국한다.

미국 정부는 양부모가 아동을 직접 만나 입양 절차를 밟았느냐는 사실을 근거로 '입양 완료' 여부를 판단한다. 2013년 전까지 한국 아동의 입양은 입양기관이 모든 절차를 대신해줬다. 입양부모는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아도 한국 아동을 입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시작된 '대리입양' 관행…2100여 명의 아기가 전세기에 실려 단체 입양

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해외입양 행태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신념을 갖고 한국 아동 8명을 직접 입양하기도 한 해리 홀트는 1955년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입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홀트는 미국 난민법을 근거로 한국의 혼혈아동들을 미국에 대규모로 입양 보내면서 '대리입양'을 추진했다. 한국 아동의 입양 부모가 되기를 원하는 대다수의 부부들이 한국을 방문해 입양 절차를 밟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당시 전세기를 빌려 입양아동을 한꺼번에 최대 129명까지 이송하는 과정에서 사망 아동도 발생(총 5명)하고 한 비행기를 탄 아동 23명이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등 사고가 일어나고, 양부모 심사 과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되자 미국 사회복지계 내에서는 '대리입양'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반발이 일어났다.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홀트아동복지회 펴냄, 2005)에 따르면, 홀트는 1956년부터 1961년까지 26편의 전세기를 띄워 총 2010여 명의 아동을 미국으로 보냈다. 또 1963년과 그 다음 해 2편의 전세기로 입양부모들을 한국으로 실어나르기도 했다. 1972년 여름에 100여 명의 입양 아동을 실어나르는 전세기까지 포함해 2110여 명의 아동이 홀트의 전세기를 통해 집단으로 미국에 이주했다.  

▲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결국 1961년 미국 내에서는 '대리입양'이 법적으로 금지됐으나, 같은 해 한국에서 고아입양특례법을 제정하면서 '외국인은 각령에 정하는 기관으로 하여금 입양절차의 일부를 대리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또 미국에서도 1961년 이민법상 '고아' 규정이 생기면서 양부모가 입양할 예정인 아동에 한해 미국으로 이주가 가능해졌다. 이는 해리 홀트를 비롯해 해외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활발히 정치적 로비를 한 결과다. 

이처럼 입양 대상 아동과 부모를 선별하고 아동과 부모에게 적절한 상대를 찾아주는 핵심적인 업무는 공적인 사회복지체계에서 벗어난 사적인 입양중개기관이 전담을 하며, 국가는 아동의 '몸'이 국경을 건너는 '이주' 과정에만 개입하는 '사영화된 국제입양 모델'은 한국과 미국에서 탄생했다. 한국 정부는 외교부의 업무 영역에 포함되는 국외 이주 허가를 국제입양에 대해서만 보건복지부로 넘겼다.  

이런 한국과 미국의 법과 제도적 틀 안에서 한국에서 많은 아동들이 '입양 예정 아동'으로 IR-4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입국하면서 보장 받은 것은 10년 기간의 영주권이다. 이 아동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입양 예정'이 '입양 확정'으로 바뀌어야 하며, 이는 입양을 약속한 양부모가 미국의 주법원에서 입양 재판을 완료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아동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 1만9000여 명이 미국 시민권 미취득자로 추정된다. 이는 전체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2016년 기준 11만1148명)의 17%에 해당하는 숫자다. 
미국은 왜 전 세계 아동을 입양할까?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아동을 국제 입양하는 국가다. 2015년 미국은 5648명의 아동을 해외입양했다. 해외입양이 가장 활발했던 2004년에는 2만2884명의 아동을 해외입양했다. 미국의 국제입양에서 특이한 점은 부부가 통상적으로 입양을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불임'이 주된 동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입양에 관한 미국의 한 전국 조사에 따르면, 입양부모들은 불임을 입양 이유 중 네 번째로 꼽은 반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부모 노릇' 그리고 '인도적.종교적 동기'를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김동수,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국제입양", 2015)

국제입양을 하는 미국 부모들에 대해 심층 취재한 책인 <구원과 밀매-복음주의 기독교의 선의와 국제간 아동 입양의 현실>(캐서린 조이스 지음, 2014)에 보면 '인도적.종교적 동기'로 입양을 하는 여성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만난 샤론이라는 여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녀는 모두 낳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피임을 하지 않아 이미 7명의 친자녀를 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였다. 그녀는 '고아'를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국제입양을 열렬히 희망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양을 희망했던 과테말라와 라이베리아는 모두 늘어나는 입양수요를 채우기 위해 아동 납치, 밀매 등 문제가 발생하자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중단했다.

그러자 샤론은 국내입양으로 눈을 돌려 텍사스에서 흑인 여자아기를 입양했다. 입양절차가 끝난 직후 그녀는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러 나섰고, 샤론은 1년 반 동안 세 아이를 입양했다. 먼저 텍사스에서 온 여자아기가 있고, 다음으로 라이베리아 출신으로 원래의 입양가정에서 파양된 후 샤론의 집에 온 소년이 있었다. 끝으로 남녀 성기를 둘 다 지니고 태어난 건강상 문제가 많은 아이를 입양했다. 이렇게 입양을 하고도 이들 부부는 다른 아이의 입양을 생각했다. 가정 위탁을 받고 있는 어느 자폐아 소년을 만나려고 두 사람은 미국 끝에서 끝까지 차를 몰고 갔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워싱턴 주에서 장애아를 입양했으나 나중에 행정 절차상의 문제로 다시 돌려줘야 했다. 한번 파양 경험이 있는 라이베리아 소년은 입양된 다른 아이가 되돌아갈 때마다 울었다. 샤론은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입양기관을 만들거나 고아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시점인가, 샤론의 가족은 파양 경험이 있던 그 라이베리아 소년을 미주리에 있는 부적응소년 쉼터로 보냈다. 정서적으로 둔감하고 이상 행동으로 다른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샤론은 자신의 가족은 다음 번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자인 십대 한 명을 입양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조이스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입양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입양은 낙태를 반대하는 친생명(pro-life) 정치의 확장이다. 이들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낙태를 하지 말고 입양 보내라는 요청을 하는 운동을 벌인다. 또 이들에게 입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찾도록 인도'하는 선교 행위다. 이들은 전 세계 곳곳에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면서 입양을 기다리는 수억 명의 고아가 있는 '고아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현실은 교회 입양운동이 복음주의 신자에게 구원할 아이들을 찾아 나서라고 열심히 권하다보니 이에 따라 더 많은 '고아'가 양산되고 있으며, 국제입양은 하나의 커다란 산업이 됐다. 샤론이 입양을 희망했었던 과테말라의 경우, 한때 신생아 100명 당 1명꼴로 미국에 입양을 보내기도 했다. 

2012년 입양특례법 전부 개정..."입양은 뼈아픈 결별에 기초한다"

한국의 해외입양 제도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는 이명박 정권 때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의 경험과 주장, 시민사회단체들의 개입, 미혼모와 아동 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의식 변화,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 등 국제 사회의 압력 등에 따른 '외과적 수술'이었다.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는 "당시 민법에 아동입양과 파양에 대해 가정법원 허가제 도입하는 개정안을 추진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입양특례법 상의 해외입양도 같이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11년 8월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입양특례법 전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 개정안이 아니라 당시 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안은 입양인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법안이었다. 과거 '입양 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이었던 공식 명칭을 '입양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으로 바꾼 것 자체가 이 개정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입양이란 친생부모와 아동의 뼈아픈 결별에 기초해 시작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입양을 촉진하는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친생부모와 입양 위기에 노출된 아동이 결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호하는 조치, 즉 친생가족 권리 보호를 정책의 핵심으로 다뤄야 한다"고 개정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5일부터 시행된 이 법만으로 60년 가까이 누적된 해외입양의 문제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입양특례법 개정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법원, 보건복지부 등 공적기관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사적 기관인 입양기관에 일임했던 해외입양 과정에 가정법원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입양특례법 제11조에 따르면, 아동의 입양은 출생신고 증빙서류 등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동법 2항은 '양자가 될 사람의 복리를 위하여 양친이 될 사람의 입양의 동기와 양육능력, 그 밖의 사정을 고려하여 입양 허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입양특례법 시행 1년, 한국 아동은 여전히 IR-4 비자를 받았다 


이처럼 입양이 가정법원의 입양재판을 통해 결정되는 '허가제'로 바뀌었지만, 지난 60년간 계속된 해외 '대리입양'의 역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입양기관과 미국의 입양부모단체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들은 양부모의 한국 방문을 의무화할 경우 한국 아동에 대한 선호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티브 모리슨 한국입양홍보회 대표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추진하는 입양기관이 법원으로부터 '꼭 양부모가 법정에 오지 않아도 입양을 진행할 수 있다'는 문서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한국입양홍보회 측은 당시 양부모가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도 줄여 약 10일안에 모든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청원을 복지부와 국내 입양기관에 전달했다. ("입양특례법 개정에도 한국아동 '국제미아' 위기" , 연합뉴스 2013년 4월 4일 보도)  

앞서 지적했듯이 양부모가 한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입양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 출신 아동은 IR-4 비자를 받았고, 이는 입양 아동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가정법원에서 입양재판이 진행되더라도 양부모가 출석하지 않고 입양기관에서 대리할 경우, 한국 출신 아동은 IR-4 비자를 계속 받아야 한다. 입양기관과 미국 입양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방문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압력을 넣은 셈이다.

이 당시 한국을 제외한 상당수의 나라가 이미 해외입양 시 양부모 방문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가나, 아이티, 온두라스는 외국인이 입양을 원할 경우 2차례 입국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중국, 콜럼비아, 코스타리카, 인도, 홍콩은 양부모가 7주까지 국내에 머무르며 직접 입양절차를 직접 밟도록 하고 있었다. 국제입양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얼마나 자국 출신 아동 인권 보호 문제를 등한시 해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정법원은 '양부모 출석 여부'를 법 시행 후 9개월이 지나서야 확정했다. 입양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한 시점으로 따지면 1년 9개월이 지나서야 결론을 내린 셈이다. 덕분에 2013년에 미국으로 입양된 아동 중 68명이나 IR-4 비자를 받았다. 그해 IR-3 비자는 71명이 받았다.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시행되던 2012년에는 IR-4 비자를 628명, IR-3 비자는 단 1명만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된 후에도 696명이나 IR-4비자를 받았다. 

▲ 2001년부터 2016년까지 IR-3와 IR-4 비자를 받은 한국 출신 아동 숫자. 미 국무부 통계를 집계했다.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onscar@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 프레시안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13년부터 4년 동안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프레시안 기자들과 함께 취재한 내용을 묶어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등을 책으로 냈습니다. 원래도 계획에 맞춰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 아이 덕분에 무계획적인 삶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재에도 더 밝아진 평양의 야경

제재에도 더 밝아진 평양의 야경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1/15 [01: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중국에서 원유수출 제한을 시작한지도 반북제도권 언론을 보면 갈수록 북의 전기 사정이 악화되고 있으며 경제가 파산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보도들 뿐이다. 
문재인정부도 이런 내용을 보고를 받고 있는지 북에 대한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면서 북의 개별인사들에 대한 금융제재까지 단행하면서 북에 제재를 가하면 결국 백기를 들고 비핵화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나라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상대에게 대북제재 동참을 부탁하고 있다.


하지만 모 인터넷방송국에서 소개한 북 뉴스보도 직전에 보여준 평양의 야경을 보면 갈수록 도시가 더 밝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공훈국가합창단, 모란봉악단, 왕재산예술단의 음악무용종합공연이 북 전연을 순회하며 진행되고 있는데 북녘의 지방 곳곳의 야경도 화사했으며 특히 공연이 진행된 대형 공연장은 하나같이 새로 지었거나 개건한 현대적인 것들이었다. 조명시설도 화사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카메라를 촬영할 때만 전기를 넣어 야경을 켰을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그런 꼼수를 부렸다면 북 주민들이 북 정권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지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북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제재로 피폐해져하고 있는 나라라면 미국과 한국, 일본에서 굳이 북 여행을 막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국 국민들에게 가서 보고 오라고 고무했을 가능성이 많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수교를 맺자마자 남녘 공안기관에서 운동권 대학생들을 모아 국비를 들여 러시아 여행을 시켜준 적이 있다. 도시 빵집 앞에 길게 사람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들녘에서는 가을걷이를 다 하지 못한 밀이 눈을 맞고 쓰러져 가스라져가고 있었다. 농부들이 8시간만 일하고 집에 가버려 채 추수를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밀가루가 부족했다.
그것을 직접 보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전향을 하였다.

그런데 왜 미국마저 자국민 방북 여행을 금지시키고 하다못해 유튜브에 북 보도가 올라오는 것까지 차단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북의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면 그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다. 북의 도시는 물론 도로와 철도 주변을 다 살기 좋게 만들어야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더 적극적으로 미국인들의 방북을 독려해야 할 것인데 실상은 정 반대로 가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가 먹히지 않고 있다면 우리 정부도 대북정책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제재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대화 등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제는 북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국민과 함께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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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운명의 목소리가 있는 것 같다”


[KAL858 30주기④] KAL858기 사건 연구자 박강성주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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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4  13: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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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연재 순서>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KAL858 30주기①]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


“김현희, ‘17살 이전 탈북자’ 확신”
[KAL858 30주기②] ‘KAL858 시민대책위’ 신성국 신부

  
▲ KAL858기 사건 연구자 박강성주 박사가 2008년 미CIA가 공개한 비밀문건을 발견해 공개한 사진. 그는 KAL858기 사건 30주기 <통일뉴스>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이것이 외국 정부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의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8년, 제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문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외국 정부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KAL858기 사건이 세인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지난 10년간 가장 꾸준히 이 사건을 천착해온 연구자가 있다. “지금까지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고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을 부분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박강성주 박사.
그와 이 사건의 만남도 말 그대로 ‘운명적’이다. 통일부에서 주최했던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참여해 우수상에 선정됐지만 “논문에 민감한 내용이 있으니 고치라”는 요구를 거절해 상은 취소됐고, 그 ‘민감한 내용’이 다름 아닌 KAL858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그때 수정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수정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이 부당한 처사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시키면서 15년간 지난한 길을 걷고 있다.
KAL858기 사건을 주제로 국내에서 석사,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통일뉴스>와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떤 운명의 목소리가 있는 것 같고, 여기에 귀를 잘 기울이려 한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간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외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공문서들을 분석한 결과에 대해 그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국 문서들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KAL858기 사건에는 어떤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점”이라며 미국 문서들에서도 “북쪽이 왜 사건을 일으켰는지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의 경우 수사발표와 관련해 김현희가 왜 갑자기 자백을 하게 됐는지 의아해했다”, “호주 문서에 따르면 1988년 1월 12일 기준 한국은 벌써부터 김현희 씨에 대한 사면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스웨덴 자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평양의 스웨덴 대사관이 직접 보내온 문서가 있다는 것” 등을 주요하게 꼽았다.
  
▲ 박강성주 박사는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김현희 씨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현희 씨는 2009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가족을 만난 뒤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가짜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는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김현희 씨에 대한 조사와 북쪽 현지 조사가 필요하다고 짚었고, 사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첩보’ 수준의 이야기들이 있었다”는 증언에 주목했다.
또한 당시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남쪽이 저지른 자작극”이라면서 남측 내부 정보 소스에 대한 질문에 “우리 또한 친구들이 있다”고 답한 대목에도 눈길을 돌렸다.
박사 논문 작성 과정에서 실종자 가족들과 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는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대부분 많이 힘들어한다”며 “원하는 가족들은 적어도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게 방안이 마련되었으면”하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KAL858기 사건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며 “KAL858기 사건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통일뉴스>가 진행하고 있는 연속 인터뷰의 일환으로 박강성주 박사와 나눈 서면인터뷰 7일자 답변서 전문이다. 아울러 서면인터뷰의 특성상 경어체를 그대로 두었음을 밝혀둔다.
“원하는 가족들 심리상담 받을 수 있어야”
□ 통일뉴스 :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요?
■ 박강성주 박사 : 저는 계속해서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한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활동을 하고 있고요. 올해 가장 신경써서 하고 있는 일은 책을 내는 것입니다. 제 박사논문과 이를 바탕으로 한 책과 마찬가지로, 큰 틀에서는 국제관계학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역시 KAL858기 사건이 있습니다. 사건 30년인 만큼 올해 안에 책을 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의 내부 사정으로 어려워질 것 같아 정말 아쉽습니다.
□ 이 사건과의 인연이 남다른 줄 압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
■ 제가 대학생, 그러니까 학부생 때입니다. 통일부에서 주최했던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참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수상을 받게 되었는데,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전화가 왔습니다. 논문에 민감한 내용이 있으니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정요구를 거부했고, 상은 취소되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뒤늦게 문제 삼은 것이지요. 그때 너무나 혼란스러워 신경쇠약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운을 되찾고 나서 이 ‘통일논문’ 사건을 국가인권위원회로 가져갔습니다. 정부가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우여곡절 끝에 석사와 박사논문을 모두 KAL858기 사건으로 썼고, 관련 연구를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그때 수정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았습니다. 개인적인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 30년… 무엇보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115명의 실종자분들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상규명 요구가 지금도 끊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이 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아울러 올해는 저에게 KAL858기 사건 연구 1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구자로서의 저 자신도 많이 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가족들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고 있다. 2015년 10월 29일, KAL858기 사건 27주기 추모제에서 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박사 논문을 토대로 『슬픈 쌍둥이의 눈물』을 출간했는데, 가족들과 인터뷰도 많이 한 것으로 압니다. 가족들의 고통은 어떠했습니까? 어떻게 해야 치유할 수 있을까요?
■ 모든 고통이 그렇겠지만, 실종자 가족분들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고는 제대로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통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분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어떤 면담의 경우 가족분도 그러셨지만 저도 눈물을 계속 흘려 면담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떤 고통도 온전히 치유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떠나 면담을 하며 고민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원하시는 가족분들은 적어도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게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외국정부 공개문서, “어떤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 외국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해오셨는데, 지금까지의 경과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 2008년, 제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문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외국 정부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고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을 부분적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영국의 경우 신청이 기각돼서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통해 일부 문서를 받아냈습니다. 그런 다음 몇 년을 더 기다려 추가 문서를 받을 수 있었고요. 5년 정도 걸렸습니다. 호주의 경우도 처음에는 일부 문서만을 받았는데 행정심판까지 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더 많은 문서를 받아내었습니다. 모두 6년이 걸렸지요.
  
▲ 왼쪽은 5년 만에 영국 외무성으로부터 공개받은 KAL858기 사건 관련 미국 정부 자료. 오른쪽은  2010년 호주 정부를 상대로 시작한 정보공개 청구 결과, 2016년 호주 외교부로부터 추가로 받아낸 비밀문서.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영국 외무성이 추가로 공개한 문서 중 미국 하원 청문회 관련 자료 표지. 박강성주 박사는 "외무성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문서 전달이 몇 년이나 늦어진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를 해왔다. 그리고 이를 공식 문서에도 기록으로 남겨주었다"고 밝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외국 정부가 공개한 자료들을 분석해 <통일뉴스>에 투고해 오셨는데, 드러난 사건의 맥락이나 새로 밝혀진 내용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국 문서들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KAL858기 사건에는 어떤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공식 수사발표를 가장 강하게 옹호했던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북쪽이 왜 사건을 일으켰는지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경우 수사발표와 관련해 김현희가 왜 갑자기 자백을 하게 됐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내용으로는, 호주 문서에 따르면 1988년 1월 12일 기준 한국은 벌써부터 김현희 씨에 대한 사면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사발표 전부터 사면 계획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웨덴 자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평양의 스웨덴 대사관이 직접 보내온 문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은 안기부(현 국정원)의 수사발표를 전면 부인하였는데 문서는 당시의 이런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안기부 쿠웨이트 파견관 ‘사전 첩보’ 언급 확인해야
□ 이 사건의 진상을 온전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료나 증언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개인적으로 주목해 추적하고 있는 사안이 있습니까?
■ 아주 중요하고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먼저 김현희 씨에 대한 조사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술과 관련해 그동안 수많은 의혹들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를 본인이 직접 해명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 재조사에서 중요한 증언을 했던 전 안기부 직원이 한 분 있습니다. 쿠웨이트 파견관으로 계셨는데, 진술 가운데 사건이 일어나기 전 ‘첩보’ 수준의 이야기들이 이미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북쪽 현지 조사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쪽의 공작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김현희 씨의 진술을 검증하기 위해서도 현지 조사가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  KAL858기 사건은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도 다뤄졌지만 '북한 소행'를 입증하지 못하고 결국 미국이 1988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양자제재로 귀결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건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를 짚어보고 싶습니다. 당시 박길연 유엔 주재 북쪽 대사가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위해 남쪽이 저지른 자작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런 내부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우리 또한 친구들이 있다”고 답합니다.
제가 2006년과 2007년 미국에 특파원으로 있던 기자분들에게 취재요청을 드렸는데, 나름대로 노력하셨지만 박길연 대사와 연락은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그 뒤 박 대사는 2008년 북으로 귀국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뜻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친구들” 부분이 지금도 궁금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가려고 한다”
  
▲ 박강성주의 박사논문을 토대로 한 단행본 『슬픈 쌍둥이의 눈물』(한울, 2015). 부제목이 ‘김현희 KAL858기 사건과 국제관계학’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KAL858기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30주기를 맞아 ‘무지개 공작’ 문건 전면 공개와 김현희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 실종자 가족분들과 대책위로서는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공작 문건이 원칙적으로 전부 공개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면담의 경우, 김현희 씨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울 수도 있지만 특별사면을 받았던 취지를 생각해 대화에 나서주었으면 합니다.
□ KAL858기 가족회와 시민대책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저는 가슴이 먼저 아려옵니다… 여러분과의 첫 만남을 생각해보니 1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좀 믿겨지지 않습니다.
가족회의 경우 나이가 있으신 분들, 또는 심리적으로 힘겨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다고 알고 있어 건강이 걱정됩니다. 사건과 관련된 의혹들이 하루빨리 밝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족회와 대책위 분들의 입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분들의 노력과 삶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건 30년, 특히 가족분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KAL858기 사건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어떤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정원 발전위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재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분들은 직간접적으로 저에게 사건에 대한 글 또는 학위논문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안기부 수사발표가 맞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 말씀이 맞을 수 있습니다. 저도 제가 걱정될 때가 있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거든요… 진실에 대한 이러한 고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 불확실함과 고민을 견뎌낼 수 있는 힘,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힘. 그 힘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습니다.
□ 향후 이 사건과 관련된 계획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시죠. 국내에 들어올 계획은 없는지요?
■ 저는 KAL858기 사건과 관련해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가려고 합니다. 좀 무겁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떤 운명의 목소리가 있는 것 같고요, 여기에 귀를 잘 기울이려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