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6일 일요일

[바다 위의 ‘김용균’](상)바다에도 김용균이 있다

부산·경주| 이효상·김한솔·최민지 기자 hansol@kyunghyang.com
입력 : 2020.04.27 06:00 수정 : 2020.04.27 09:22

한국에서 이주선원으로 일했던 중국인 ㄱ씨(47)가 지난 1월12일 부산 자갈치시장 어귀에 정박한 고기잡이배를 바라보고 있다. 2009년 선원비자를 받고 한국서 처음 탔던 배다.
한국에서 이주선원으로 일했던 중국인 ㄱ씨(47)가 지난 1월12일 부산 자갈치시장 어귀에 정박한 고기잡이배를 바라보고 있다. 2009년 선원비자를 받고 한국서 처음 탔던 배다.
“겁납니다, 바다.”
60대 최한길씨(가명)는 30년차 어선원 노동자다. 제주 앞바다에서 고등어잡이가 한창이던 1월 초,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잃었다. 선체의 철골에 부딪혀 6·7번 갈빗대가 그대로 부러졌다. 지난 1월 부산의 한 병원에서 만난 그는 살구색 복대를 차고 병상에서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전에도 다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최씨는 “배 타고 안 다치는 사람 어딨습니까. 당해내질 못해예, 바다 모른다니까”라고 답했다. 줄일 수 있는 산업재해를 ‘뱃사람의 운명’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리 쪽이 아니라 다행이었지 만약 머리를 부딪쳤으면 즉사”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실이 26일 수협중앙회에서 제출받은 어선원재해보상보험 통계 자료를 보면, 최근 10년간 매년 140명가량의 어선원이 사망(실종 포함)했고, 다치거나 병든 이들은 연평균 4000명을 웃돌았다. 2.6일에 1명꼴로 사람이 죽고, 하루에 10명 이상은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어선원은 산재보험법이 아니라 어선원보험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고용노동부가 매년 발표하는 산재 통계에서도 빠져 있다.
지난 2년간 고등어잡이 배에서 일한 한민수씨(39·가명)는 사고가 가장 자주 발생하는 양망기(그물 끌어올리는 기계)를 설명하면서 “돌아가는 기계에 조금이라도 끼이는 순간, 이미 사람은 형체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다 일… 개인적으로는 정말 말리고 싶다”고 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어업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군 중 하나로 꼽는다. 예측 불가능한 바다, 일단 출항하면 누가 다쳐도 쉽게 뭍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배,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이다. 하지만 연간 140명이라는 사망자는 어업의 특수성뿐 아니라 어선원의 안전을 사각지대에 방치해온 한국적 특수성이 맞물린 결과다. 캐나다의 어선원 사망 통계를 보면 최근 10년간 연간 사망자 수는 10명가량으로 유지됐다. 캐나다 전체 어선원 규모가 4만6000명으로 한국(6만여명)보다 적은 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차이다.
한국에서는 바다 위 산재 소식이 좀처럼 뭍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을 모아 개선할 여지도 없는 셈이다. 매년 나빠지는 업황과 늘 빡빡한 인력상황은 오늘 다친 사람에게 내일 다시 그물을 던지게 한다. “작업 환경개선, 안전교육, 재해예방을 위한 법제 정비 등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특히 재해율이 높은 것”(박상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어촌어항연구실장)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향신문은 지난 1월부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국내외 선원 노동자들을 병원·숙소 등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바다’라는 특수한 공간 탓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어업 산재의 심각성을 2회에 걸쳐 짚어본다.
“배 한 번 돌리면 몇 억 손해라는 말에…다쳐도 참고 버텨”
한씨는 최근 ‘하선’하기로 했다. 뱃일을 그만둔다는 뜻이다. 일하다 입은 부상으로 통원치료 중인 한씨에게 선사는 출항을 이틀 앞두고 다시 승선을 지시했다. 한씨가 “아파서 못 가겠다”고 했지만, 선사는 “일단 배 타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치료하라”고 권했다. 한씨는 “끝내 못 간다하이 하선 처리한다카대요. 잘리는 기라. 아픈 사람한테 이란다니까”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초 투망을 위해 닻을 내리다 4번째 손가락이 빨려들어가 뼈가 산산조각 난 40년차 선원인 김정현씨(66·가명)의 손.  부산 | 이효상 기자
지난해 12월 초 투망을 위해 닻을 내리다 4번째 손가락이 빨려들어가 뼈가 산산조각 난 40년차 선원인 김정현씨(66·가명)의 손. 부산 | 이효상 기자
■ 다쳐도 못 들어와…부상의 악순환
손가락 골절로 손 못 쓰니
출렁일 때마다 넘어졌고
결국 왼쪽 팔꿈치도 깨져
무릎 인대 찢어진 후 뭍으로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연달아 4차례 다쳤다. 처음은 오른손 중지를 다친 작은 부상이었다. 하지만 한 번 다치자 이곳저곳이 잇달아 고장났다. 부상 당시 서해상에 있던 배는 육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총 여섯 척으로 구성된 고등어잡이 선단은 조업 비용으로만 한 달에 8억~10억원을 쓴다. 일정한 어획량을 확보하기 전까지 바다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 한씨는 “내 하나 다쳤다고 들어가면 몇 억 손해라고 하니까, 바로 못 들어온다”고 했다.
배는 한씨가 다친 지 5일여 만에 태풍을 만나 평택항에 입항했다. 잠시 들른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손가락은 이미 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휴식은 짧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배는 다시 출항했다. 한씨도 간단한 깁스만 하고 배에 올랐다. 그는 “싫으면 내리라고 하는데 일자리를 잃을 수 없으니까 일했다”고 했다.
고등어잡이 선단은 어군을 찾아 그물을 던지는 본선 한 척과 불빛을 비춰 고등어를 유인하는 등선 두 척, 잡은 고등어를 뭍으로 운반하는 운반선 세 척으로 구성된다. 본선에 탄 한씨는 선단의 수장인 어로장이 물고기를 탐지하면 선미에서 대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그물을 던지는 일을 했다. 그물의 출구인 선미는 바다를 향해 트여 있다. 난간이나 안전장치가 없다는 얘기다. 배에 들이친 파도로 바닥은 미끄럽고 달리 부여잡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한 손을 제대로 못 쓰는 한씨는 몇 번이고 넘어졌다. 조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씨의 왼쪽 팔꿈치는 뼈가 깨져 있었다.
선단은 고등어의 성장기인 7월부터 산란이 시작되는 이듬해 4월까지 조업한다. 이 중 9월부터 1월까지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성어기다. 조업을 할 때는 음력 19일에 출항해 다음달 음력 14일에 돌아온다. 25일을 바다에서 생활하고 5일간 육지에서 쉬는 셈이다. 한 선단에 속한 70여명의 선원에겐 모두 각자의 일이 맡겨져 있다. 누군가를 대신해 갑자기 25일간 바다로 떠날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고, 성어기에 일을 가르칠 여력도 없다. 한쪽 손과 한쪽 팔을 다친 채 한씨는 또다시 배에 올랐다.
출항 이후 한씨는 몇 차례 더 넘어지면서 무릎 인대가 찢어졌다. 한 주 뒤에는 그물을 배에 고정하는 줄을 잡아당기다 허리를 삐끗했다. 그날 새벽 유난히 파도가 심해 몸이 긴장을 했고, 그 상태로 힘을 쓰다 탈이 났다. 무릎을 다친 뒤 다리는 한동안 감각조차 없었다. 그제야 한씨는 인근에 있던 선사의 다른 배를 타고 뭍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한씨는 이달 중순까지도 병원 신세를 졌다. 그는 “바다에 계속 나가 있으면 다른 일을 할 생각도 못하고, 힘들든 위험하든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통영 앞바다 어선에서 일하다 양망기에 끼어 발목이 잘린 베트남 이주선원이 이송되고 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통영 앞바다 어선에서 일하다 양망기에 끼어 발목이 잘린 베트남 이주선원이 이송되고 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연합뉴스
■ 고령자·이주선원이 채우는 일터
40년간 큰 사고만 5~6번
베테랑도 “빙시돼부렀어”
반복된 산재서 벗어나려면
산재를 당하는 방법뿐…
어선에서 보기 드문 30대 선원 노동자가 떠난 자리는 60~70대 노장들과 이주선원 노동자들이 지키고 있다. 2019년 선원통계연보에 따르면 연근해어선을 타는 국내 선원 1만3982명 중 5593명은 60세 이상이다. 전체 선원 중 절반 가까이는 이주노동자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온 20~30대 젊은 노동자들이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터의 위험이 맡겨진 셈이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에 E10 선원비자로 입국한 20대 이주선원 ㄱ씨는 한국에 온 지 고작 3개월 만에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지난 1월 설 연휴 때 만난 그의 팔에는 성인 손바닥 한 뼘 정도로 길게 꿰맨 상처 자국이 있었다. 2개월째 입원 중인 그는 사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사고 직후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고 직전 양망기 앞에서 다른 선원들과 함께 ‘스탠바이’를 하며 서 있던 것, 갑자기 양망기의 밧줄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을 본 것,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했지만 자신은 피하지 못한 것 등을 조각조각 기억하고 있었다. “맞고 바로 기절했는데, 눈을 뜨니 배 안이었어요.” ㄱ씨는 저녁에 사고를 당했지만, 배가 다시 육지로 돌아온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2016년부터 한국의 크고 작은 배에서 뱃일을 한 인도네시아 이주선원 ㄴ씨도 지난해 여름 35t 배에서 일하다 다리가 부러졌다. ㄱ씨와 비슷하게, 양망기 근처에 서 있는데 갑자기 줄이 날아와 넘어졌다. ㄴ씨는 “그 기계가 갑자기 왜 (평소보다)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다”며 “그냥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려 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ㄴ씨 역시 ㄱ씨처럼 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날 오전 4시에 배를 탄 그가 사고를 당한 것은 1시간30분 뒤인 오전 5시30분이었다. 이미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온 배는 ㄴ씨를 위해 다시 육지로 가지 않았다. 그는 “오전 11시까지 그냥 배에 누워 있었다. 다리가 아프긴 했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참았다”고 했다. ㄴ씨는 지금도 오래 걷거나,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다리가 불편하다.
어선 한 척이 밤늦은 시각에 조업을 준비하고 있다. 고등어·오징어 등 빛에 반응하는 주광성 어종의 경우 밤 조업이 일반적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선 한 척이 밤늦은 시각에 조업을 준비하고 있다. 고등어·오징어 등 빛에 반응하는 주광성 어종의 경우 밤 조업이 일반적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베테랑 선원의 몸은 어선원 산재 박물관이다. 베테랑이라고 산재를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유일한 생계 수단인 배에 오래 남아 있는 한 산재 횟수는 증가한다. 지난 1월 부산의 한 병원에서 만난 선원 양승국씨(67·가명)는 “빙시라, 빙시돼부렀어”라며 자조했다. 지난해 12월 조업 과정에서 배에 줄을 묶다 미끄러지면서 선체에 받혔고 갈빗대 3대가 골절됐다. 군 전역 후 배를 타기 시작한 그는 40년간 뼈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절단되는 큰 사고만 5~6번 당했다. 다리 한쪽은 무릎 아래 정강이부터 발목까지 피부색이 다르다. 흑산도 인근 해역에서 일할 때 배 위에서 떨어지면서 “뼈가 전부 다 골절”됐다.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는 짧고, 다른 손가락 하나는 심하게 굽었다. 양씨는 “선장이 하도 뜰채그물(잡힌 고기를 운반선에 퍼 올리는 그물) 레버만 잡아주면 된다 해서 철심 박은 채로 또 바다에 나갔다”며 “처음에는 당직도 하지 마라 이카더니, 하룻밤 지나고 나니까 (다른 사람 고생하는 것 보고) 안 할 수가 있으요. 나중에 와서 (치료)해도 굽은 손가락이 안 펴지더만요”라고 했다.
산재는 반복되는 산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지난 1월 부산의 또 다른 병원에서 만난 40년차 선원 김정현씨(66·가명)는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초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투망(그물을 던지는 것)을 앞두고 닻을 내리다 손을 다쳤다. 닻줄을 감고 푸는 과정에서 빠르게 감기는 닻줄에 김씨의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에 김씨는 별다른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왼손 4번째 손가락 뼈가 산산조각나며 신경도 일순 마비됐기 때문이다. 이후 다른 사람의 뼈를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됐다. 붕대를 걷은 김씨의 왼손은 수술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4번째 손가락뿐 아니라 왼손 전체가 부어, 크기가 오른손의 2배는 돼 보였다. 완치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씨는 “손만 안 다쳤으면 10년은 더 탈 낀데”라며 “이제 이래 가지고 본선도 못 타겄다”고 했다.
[바다 위의 ‘김용균’](상)바다에도 김용균이 있다
■ 사고나면 “바다가 험해서”
현장서 몸으로 일 배우는데
안전교육·장비 태부족에
양망기 끼임 등 잇단 사고
대부분 그저 ‘바다가 험해서’
많은 어선원이 현장에서 일하며 ‘몸으로’ 일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어선원의 재해는 개인의 부주의나 ‘바다’라는 ‘어쩔 수 없이 험한 작업환경’ 탓으로 돌려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31일 오전 경남 통영시 앞바다 11t 선박에서 베트남 선원(39)이 양망기에 몸이 감겨 발목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선원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이 발간한 ‘2019년 어선 사고사례집’에 수록된 사고 유형 상당수는 양망기에 끼임, 로프에 맞음 등이었다. 과거 한국에서 뱃일을 한 중국인 이주노동자 ㄷ씨는 “일을 빨리하면 위험한데, 항상 ‘빨리하라’고 다그치다보니 양망할 때 줄이 팍 끊어져서, 그때 사람이 다치곤 했다”고 말했다. 어선원 재해 중 가장 많이 반복되는 유형이지만 양망기 끼임 사고 등을 막기 위한 안전교육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나마 한국인 선원은 양망기의 위험성을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주선원은 다르다. 한국에 오기 전 인도네시아에서 뱃일을 했던 ㄱ씨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이 직접 그물을 던지는데, 여기서는 기계가 당기니까…”라면서 “한국에 온 후 (양망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소통이 원활치 않은 데다 익숙해지기 전 현장에 투입되다보니 사고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ㄱ씨는 자신이 사고를 당한 이유가 “제가 조심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해수부가 작성한 ‘2018년 연근해 어선사고 예방대책’을 보면 안전교육 대상을 지난해부터 선주·선장·간부선원 외의 일반 어선원과 이주선원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가장 재해에 노출되기 쉬운 일반 어선원, 외국인 어선원에게 이전까지는 안전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해수부는 “일반 선원 교육 확대는 예산 확보에 한계가 있어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고, 외국인 선원 교육 확대는 올해부터 20t 이상에 승선하는 외국인 선원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대 초반의 베트남 이주선원 ㄹ씨는 인천에 도착했을 때 잠깐 안전교육을 받았지만, 막상 배에 타서는 따로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양망기처럼 자주 쓰이는 단어를 띄엄띄엄 알아듣는 수준으로만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같이 일하는 한국 선원들이 진짜 일을 잘한다. 위험한 것을 많이 가르쳐주는데, (제가) 말을 못 알아듣는다. 몸짓으로 하는 것을 보고 알아듣는다”고 했다.
국립수산과학원이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맡긴 연구용역 보고서 ‘어업작업 안전재해예방 지원을 위한 종합계획 및 실태조사’를 보면, 전체 어업인의 절반 이상(51.8%)은 외국인 선원들과의 작업 시 ‘언어소통 어려움’에 따른 사고 발생 위험이 높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70600045&code=940702#csidx234b8e101e991e485549625c0d0ffa4 

"정부, 코로나 관련 남북협력 내부적으로 착실히 준비 중"

[기고] "남북 보건협력도 세계 각국과 마찬가지...'연대와 협력' 원칙으로 추진"
지난 14일 <프레시안>에 코로나 방역 대북지원과 관련한 안문석 전북대학교 교수의 칼럼이 게재되었다. 인도적 문제 관련 남북 협력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동 칼럼의 내용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 내용은 국경이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감염병 위기 앞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고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 관련 기사 : 북한의 코로나 지원 요청, 문재인 정부는 왜 외면했나)

칼럼에는 '북한이 여러 민간단체를 통해 코로나19 지원을 요청했으나, 정부가 총선과 야당의 공세를 두려워 해 대북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북 제재 완화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차원이겠으나, 이 기회를 빌려 방역협력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많은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선 정부는 코로나19 관련 남북 방역협력이 필요하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전 세계가 국경을 넘어 확산되고 있는 감염병의 피해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과 북 사이에 감염병 전파 및 확산 방지를 위한 협력은 당연하고도 시급한 현안이다.
정부는 우리 내부의 상황과 국제상황, 그리고 북한이 발표하는 모든 뉴스를 주시하고 있다. 또한 필요한 협력과 적절한 시점에 대해 국제기구 및 민간과 긴밀한 협의를 하고 있다. 감염병 분야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고 유관부서와 긴밀한 소통도 유지하고 있다.

남북간 방역협력은 일회적이고 일방적인 지원이 아닌 호혜적이고 지속가능한 협력이어야 한다는데 전문가, 국제기구, 민간 그리고 당국 내에서도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미 2018년 남북 정상은 방역 및 보건의료 분야 협력을 합의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세부 분야별로 착실하게 그러나 조용하게 내부적인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 백화원에서 회담을 마친 뒤 '9월 평양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정부는 총선 등 국내 정치일정과 상관없이 국제기구, 국내 민간단체들과 코로나 상황 하에 북한과의 협력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협의를 진행해 왔다. 국내 민간단체가 신청하면 북한과의 합의서는 물론 재원확보 여부, 물자 확보 가능성, 물자전달 확인 등 요건을 검토하고 관련부처와 협의를 거쳐 3.31일 코로나 방역물품의 첫 반출을 승인하였다.

북 당국은 현재 공식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없다고 발표하고 있다. 국내 단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북측의 책임있는 관계기관과 코로나 방역 관련 협의를 진행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꼭 필요한 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많은 단체가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로서는 이러한 민간의 입장을 존중하여 개별 단체의 사업 협의 상황이나 반출, 물자 전달 상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이러한 방침을 두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말 필요한 지원이 적시에 성사되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빌 게이츠는 2015년에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과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향후 몇십 년 내 1000만 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보다는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일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신종 바이러스는 이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는 상시적 위협이 되었다. 남과 북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 한반도에서의 방역 협력이 절실한 이유다. 이는 당면한 현실이자, 포스트 코로나 시기 남과 북이 더 자주 오가면서 상호 신뢰를 쌓으며 한반도 평화 경제를 구축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정치적 상황이나 이념도 우리와 우리 미래 세대들의 건강과 평화를 지키는 일보다 우선할 수 없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기고문에서 코로나19 극복을 위해서는 '시민적 역량강화와 글로벌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가 봉쇄없이 '연대와 협력'을 통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추진하는 남북 보건협력도 이러한 기준과 원칙하에 추진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42700543638348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과학자들의 무서운 경고, 코로나보다 더 큰 위협 온다

20.04.27 07:58l최종 업데이트 20.04.27 07:58l


4월 22일부터 4월 29일까지 한국에서 2020 세계군축행동의 날(GDAMS) 캠페인이 진행된다. 세계군축행동의 날 캠페인은 매년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세계 군사비 지출 보고서 발표에 맞춰 군사비를 줄이고 평화를 선택할 것을 각국 정부에 촉구하는 국제캠페인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위기와 인간 안보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비를 줄여 공공의료 확대, 사회안전망 구축,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연속 기고를 진행한다.[기자말]
"바이러스의 분노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저는 세계 곳곳에서 즉각적인 글로벌 휴전을 요구합니다. 이제 무력 충돌을 중단하고, 우리 삶의 진정한 싸움에 집중할 때입니다."
   
지난 3월 24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코로나라는 공동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지역에서 전쟁을 멈추자는 제안을 하였다. 가톨릭의 교종 프란치스코도 뜻을 같이 하며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함께 "갈등은 전쟁을 통해선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합당한 제안이다.

전쟁은 의료시설을 파괴하고 의료진의 목숨을 위협한다. 감염병 예방과 대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전쟁 수행에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 사회는 보건을 위한 인프라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막대한 군비를 사용하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상황은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의 보건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군사 안보가 국민 안전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기후변화다.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는 인류의 생존과 지구 문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상승 1.5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와 마찬가지로 기후변화 앞에서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추기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전쟁과 군사 활동이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회를 하고 있다
▲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회를 하고 있다
ⓒ 기후위기비상행동
 
군사 활동과 기후변화 

2003년 아프리카 수단 다르푸르에서 대규모 학살과 분쟁이 일어났다. 6년 동안 약 30만 명이 사망하고 250만 명의 난민을 낳은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이 분쟁은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사이의 인종 갈등 양상을 띠었는데, 그 촉발은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에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도양의 수온 상승이 강수량의 급속한 감소를 불러왔고, 목축과 농사에 필요한 땅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토지와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다르푸르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CSIS)는 다르푸르 사태를 최초의 '기후전쟁'으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다르푸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기후변화는 기상이변, 폭염과 가뭄, 물 부족과 식량난, 해수면 상승을 불러온다. 살 곳을 잃은 이들은 난민이 되어 고향을 떠나게 되고,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미국 스탠퍼드대 캐서린 매치 연구원팀은 20세기의 무력충돌 중 최대 20%가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극한기후에 의해 일어났고, 21세기 들어 그 영향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기후변화가 국제적인 분쟁과 갈등을 낳고 있다.

미국 등의 국가는 이미 기후변화를 중요한 '안보 위협'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2014년 <기후변화 적응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기후변화를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닌 눈앞에 닥친 국가안보 위협"으로 규정하였고. 2019년 호주국립기후복원센터에서 나온 보고서는 현재 과학계의 전망이 지나치게 안이하다면서 "전시 수준의 비상 자원 동원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안보의 관점에서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군사력 강화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국경 지역 경계를 강화하여 기후변화로 인한 난민의 이주를 막을 방법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방법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국제적인 갈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 곧 기후변화 자체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군사적 방법이 위험한 것은, 군대 자체가 바로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미국 브라운대 왓슨 연구소가 2019년 발표한 <전쟁 프로젝트의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7년까지 미군은 단일 조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소비하고,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한 해 동안 미국 국방부가 배출한 온실가스는 5900만 t에 달하며 이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의 1년 치 온실가스 배출량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한편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영국 과학자들'은 영국 국방부는 2016-17년 동안 320만 t의 온실가스를 배출했고, 이는 아이슬란드의 탄소배출량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군사활동은 기후변화의 원인이자 주범이다. 따라서 기후변화로 인한 분쟁을 막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강화하는 것은 막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기후변화의 악화를 가져올 뿐이다.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아파치 레인지에서 열린 주한미군 2사단·한미연합사단의 최고 전사 선발대회에서 미군 장병이 부상자 모형을 끌고 오르막을 달리는 테스트를 받고 있다.
▲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아파치 레인지에서 열린 주한미군 2사단·한미연합사단의 최고 전사 선발대회에서 미군 장병이 부상자 모형을 끌고 오르막을 달리는 테스트를 받고 있다. 2018.4.10
ⓒ 연합뉴스
 
공개하지 않는 군사 부문 탄소 배출량

세계 많은 국가에서는 '안보'상의 이유로 군사 부문 탄소 배출량이 얼마나 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각국이 유엔에 제출하는 배출량 통계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1997년 발효되었던 교토 의정서 체제에서는 군사활동의 배출량은 자동면제 대상이었다. 2015년 파리협정에서는 군사 분야가 자동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군사부문 배출량을 감축할 의무도 명시하지 않았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의 온실가스 국가배출량 통계에 군사 부문의 배출량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군사 부문 배출량이 정확히 포함되어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또한 공공부문 온실가스 목표관리제도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 있다. 배출량 통계조차 없다면, 배출량을 줄이려는 노력도 없다는 의미다. 결국, 군사 부문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대응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셈이다.

하지만 기후변화 대응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발전, 산업, 수송 등 각 분야가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양의 감축을 해야 한다. 군사 분야라고 예외일 수 없다. 더군다나 한국이 탄소 배출 세계 7위, 군비지출 세계 10위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군사 부문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사회적 자원을 빼앗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많은 공공재원이 투여되어야 한다. 화석연료를 대신하는 재생에너지 확충을 비롯한, 산업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와 지역민을 지원하는 것, 산불, 태풍, 폭염과 같은 기후재난으로부터 보호책을 마련하는 것 등 사회시스템의 전환에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군사비에 비해 기후대응 예산은 턱없이 적다.

2016년 전 세계의 기후재정은 전 세계 군사비의 1/12에 불과하다. 미국 정책학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전투 vs 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미국의 기후예산이 210억 달러인 반면 국방예산은 무려 5880억 달러에 달한다. 20배가 넘는 차이다. 한국은 어떨까? 2019년 기준 한국의 국방예산은 46.7조 원이었으나, 환경부의 기후변화대응 예산은 792억 원에 그쳤다. 국토부의 128억 원, 농림축산식품부의 242억 원을 다 합쳐도 1162억 원에 불과하다. 국방예산의 1/400에 불과하다. 기후위기의 시급성에 비춰볼 때, 무책임, 무대응에 가까울 정도의 예산 배분이다.

사실 현재의 기후위기를 초래한 화석연료 중독의 경제체제는 애초부터 군사력에 크게 기대고 있다. 산업화 이후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20세기 이후 많은 전쟁이 석유라는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어진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중동이 화약고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석연료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수행을 위해 더 많은 석유를 소비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또 전쟁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다시 기후변화를 가속하게 된다. 기후 위기를 유발한 현재의 경제 시스템, 지구자원의 착취에 기반한 문명은 군대의 도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결국,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평화운동과 지구온난화에 맞선 기후 운동은 함께 만나야 한다. 군사주의는 기후변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다.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은 코로나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라는 공동의 위협과 싸우기 위해, 지금 전 세계는 군비를 줄이고,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춰야 한다. 기후변화로부터 안전한 세상과 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은 함께 가야 한다. 평화를 지키는 것이 곧 기후위기를 막는 길이며, 기후위기 대응이 평화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황인철 기후위기비상행동 정책언론팀장이 작성했습니다. 참여연대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당 대표냐 곧바로 대권이냐…이낙연의 선택은?

정치인에게 선택은 정치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합니다
임병도 | 2020-04-27 08:49:1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415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습니다. 이제 민주당은 5월 7일 원내대표 선출을 시작으로 8월 전당대회 등 내부를 다지는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낙연 당선인의 당 대표 출마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낙연 당선인의 당 대표 출마 장·단점을 분석했습니다.
7개월짜리 당 대표, 꼭 해야만 할까
만약 이낙연 당선인이 당 대표에 도전해 당선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면 임기는 7개월에 불과합니다.
민주당 당헌 제25조를 보면 “당대표 및 최고위원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때에는 대통령 선거일 전 1년까지 사퇴해야 한다”라는 규정 때문입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2022년 3월 9일에 있으니 최소한 2021년 3월 이전에는 사퇴해야 합니다. 임기 7개월이니 굳이 당 대표에 출마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한편으로는 당 대표에 도전하면서 당권 경쟁을 벌일 경우, 다른 후보들과 마찰을 빚어 오히려 대선 경선에서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180석의 거대 여당 당 대표는 잘해도, 못해도 비난을 받을 수 있으니 아예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대권 이미지에 유리해 보입니다. 선거에서 민주당에 힘을 실어줬지만, 야당에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내 기반과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보여줄 필요도
당 대표 출마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 대표 출마를 통해 안정적으로 당내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낙연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에도 민주당 후보 38명의 후원회장을 맡았습니다. 이중 16명은 낙선했지만, 22명은 당선됐습니다. 당 대표 출마 과정에서 이들과 힘을 합친다면 대권 경선까지도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단순히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을 만큼 녹록지 않은 시기라는 점도 이 당선인이 당 대표 출마를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코로나 19 여파로 경제와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서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보여줘야 대선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가 쉽습니다.
또한 내년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을 경우 다른 대권 후보들이 치고 올라올 수도 있는 등 대권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당 대표 출마 대신 전략적 제휴를 통한 대권 도전
이낙연 당선인이 당 대표에 출마하지 않고도 당내 기반을 다지면서 대권 이미지를 유지할 방법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번 원내대표 선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이 당선인이 후원회장을 맡아 당선된 22명은 대부분 정치 신인입니다. 이들과 호남계 의원들을 모은다면 원내대표 선거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전해철, 김태년 의원 등 원내대표 후보들이 이 당선인에게 지지를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8월 전당대회에 나서지 않더라도 친문 진영 인사와 당권과 대권 분리를 약속해 서로 힘을 실어주는 전략적 제휴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경선에서 무난하게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낙연 당선인이 일방적으로 특정 후보를 밀어줄 경우 다른 후보의 반발과 당내 분열을 야기한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반감은 최소화하면서 장점은 취하는 정치적 능력이 요구됩니다.
당 대표는 아니더라도 코로나 19 위기 극복위원회 등의 직함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코로나19 관련 현장을 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비친다면 차기 대선 주자로서의 입지와 이미지가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에게 선택은 정치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합니다. 이 당선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차기 대선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 당선인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30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과 민중의 혁명적 요구

[개벽예감 392]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과 민중의 혁명적 요구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4/27 [08:39]
<차례>
1.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에 제기된 최대쟁점
2.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 세울 수 없었다
3. 민중은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4. 점령군 철수하면 15분 만에 무너질 우익세력
5. 모스크바협정 파기한 미국의 반통일-반혁명계획


1. 좌우격돌의 혁명적 상황에 제기된 최대쟁점

식민지조선이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국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던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다.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느냐 아니면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에 휘말려들어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분단체제로 전락하느냐 하는 근본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혁명적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세계혁명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혁명적 상황에서는 대립과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남북조선의 혁명적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절대다수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미국의 분할점령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려는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표출했다. 반면에 소수의 반역자들은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을 추종하여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혁명적 상황에서 좌익세력은 민중의 강렬한 의지와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고, 우익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탄압, 착취하고 미국의 분할점령책동을 추종했다. 

여기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를 말하면, 좌익은 왼쪽 날개라는 뜻이고, 우익은 오른쪽 날개라는 뜻이지만, 불상용적인 상극관계에 놓여 있는 좌익과 우익을 새의 양쪽 날개에 비유하는 것은 오류다.  

역대극우정권들의 탄압으로 좌익세력은 압살당했고 우익세력만 득세하여 좌익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는 좌익을 극좌와 혼동하여 기피하고, 중도를 좌익으로 오인하는 비정상적인 풍조가 만연되었지만, 정치세력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는 것은 합리적인 분류법이다. 좌익-우익 분류법은 19세기 말 프랑스 정치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세계로 퍼져나가 약 150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독 한국 사회에서만 좌익-우익 분류법을 쓰지 않고 엉뚱하게도 진보-보수 분류법을 쓴다. 

원래 보수라는 말은 전통을 보전하고 지킨다는 좋은 말인데, 미래통합당 같은 정치세력을 그런 좋은 뜻을 가진 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미래통합당 같은 정치세력은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는 세력이 아니라,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진보-보수 분류법은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을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는 세력으로 미화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진보-보수 분류법은 폐기되어야 하며, 150여 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8.15해방부터 6.25전쟁 종전 이후까지 남북조선에서 널리 쓰였던 좌익-우익 분류법을 복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은 1946년 10월 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민중항쟁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여성들을 미점령군 군사경찰대 소속 병사들이 끌어가고 있다. 대구민중항쟁을 기폭제로 하여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서울,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에서 연속적으로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10월 한 달 동안 남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에 약 200만 명의 각계층 군중들이 참가했다.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진압할 수 없었던 미점령군은 우익단체들을 앞세워 무자비한 폭력으로 탄압했다. 좌익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미점령군과 우익세력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격돌이 벌어지고 했던 당시는 혁명적 상황이었다.   

좌익세력은 위험한 기피대상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며, 사회력사를 발전시키는 진보세력이다. 반면에 우익세력은 보수세력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과 요구를 짓밟고 사회력사발전을 가로막는 반역세력이다.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격돌했던 1947년의 혁명적 상황을 민중의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것이 이 글의 집필목적이다.  

미국의 분할점령을 배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통일공화국을 세우느냐 아니면 미국의 분할점령에 휘말려들어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분단체제로 전락하느냐 하는 혁명적 상황에서 벌어진 좌우격돌, 그 속에서 제기된 최대쟁점은 무엇이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였다. 당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은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격돌한 것이다. 격돌은 격전으로 격화되었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정전되기까지 격돌과 격전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싸움이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고, 남측 민중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 그 싸움은 끝나게 될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국가건설문제는 70년 역사의 갈피 속에 묻혀있는 과거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 세울 수 없었다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격돌한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면, 우리 민족이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당시 민족 전체의 절실한 요구였던 독립과 통일은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공통적으로 인정한 절대과업이었다. 이를테면, 우익세력을 대표한 이승만은 입만 열면 독립과 통일을 부르짖었고, 우익세력을 대표한 김구도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혁명적 상황이 격화되면서 우익세력이 분렬될 때, 김구는 민족주의의 길을 계속 걸었고, 이승만은 민족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친미예속의 나락으로 전락했지만, 이승만과 김구가 한때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독립과 통일이라는 양대 개념으로 포장된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분석적으로 고찰하면, 당시 이승만은 무력사용에 의한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김구는 남북협상에 의한 평화통일을 추구했다. 하지만 김구는 처음부터 남북협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위기가 심화되어 자기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을 때 남북협상에서 마지막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이승만이 추구한 독립은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에 따라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독립’이었고, 김구가 추구한 독립은 반미자주라는 핵심내용이 모호한 즉시독립이었다. 이승만과 다르게 김구는 비타협적인 반일투쟁을 벌였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8월 18일 김구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는 귀하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의 독립이 극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중략) 미합중국이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민주세계의 평화를 영원히 보장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김구가 믿었던 트루먼은 김구가 보낸 서한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김구가 믿었던 미국은 점령군 방첩대(CIC) 암살단 소속 비밀요원 안두희에게 김구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구가 미국의 손에 암살당한 때로부터 1년 뒤, 트루먼은 우리 민족 전체를 말살시킬 핵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미국 공군참모총장에게 핵공격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이었다. <사진 2>

위에 서술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민족주의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당위론만 외쳤을 뿐, 새로운 나라에 어떤 사회체제를 세울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 채,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정치이념이었다. 그래서 민족주의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도 없었고, 사회력사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친미예속적인 역대극우정권들이 좌익정치이념인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우익정치이념인 민족주의까지 탄압했던 한국 사회에서 정권의 탄압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민족주의가 진보적 정치이념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났지만, 명백하게도 민족주의는 낡은 우익정치이념이다.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남북조선에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국가건설문제를 놓고 격돌이 벌어진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면,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정치세력이 크게 부각된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역사학은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우익세력의 지도자들이었던 김구와 김규식, 그리고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중도세력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혁명적 상황을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익세력이 표방한 민족주의에도 민족의 이익과 요구를 실현하는 진보적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승만과 김성수는 민족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친미예속을 택했고, 김구과 김규식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 뿐이다. 우익세력이 표방한 민족주의는 반미민족자주라는 핵심내용이 빠진 공허한 우익정치이념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적 상황을 우익정치이념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은 오류다. 좌우격돌이 벌어진 혁명적 상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에 부응하는 민중의 관점에서 인식해야 마땅하다. 민중의 관점에서 혁명적 상황을 인식하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민중의 관점에서 혁명적 상황을 인식할 때 제기되는 물음은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바로 이 물음 앞에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갈라졌다.  


3. 민중은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가?
  
1947년 7월 5일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요청한 자문에 대한 답신서를 보냈는데, 그 답신서를 보면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자문을 요청한 것은, 장차 미소공동위원회의 후원으로 수립될 임시정부가 어떤 사회체제 위에 수립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의견을 물은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그 답신서가 말해주는 것처럼, 통일임시정부가 세워졌을 것이고, 통일임시정부가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답신서를 제출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을 정치이념지형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주주의민족전선 (약칭 민전) - 남조선로동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로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총련맹,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들을 비롯하여 70개 좌익성향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2) 근로인민당 (약칭 근민당) - 여운형을 중심으로 창당된 중도정당.

3) 미소공위대책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 (약칭 공협) - 중도성향의 52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4) 좌우익합작위원회 (약칭 합위) - 시국대책협의회를 모체로 중도성향의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5)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약칭 임협) -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우익성향의 170여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참가함. 

위에 열거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정치이념지형을 살펴보면, 좌익, 중도, 우익을 모두 포괄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답신내용이 민족 전체의 요구와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답신내용을 분석하면, 당시 민중이 어떤 사회체제를 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국호, 토지정책, 토지소유권, 산업소유권, 경제체제, 노동권, 노동임금제, 노동시간에 관한 답신내용이다. 




민전
근민당
공협
합위
임협



국호



조선인민공화국
고려공화국
고려공화국
고려공화국
대한민국

토지정책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매수
유상분배

토지소유권

사유권 인정
(처분금지)
사유권 인정
(매매저당 금지)
사유권 인정
사유권 인정
(자유처분 제한)
사유권 인정
(매매제당 제한)

산업소유권

대기업-국유화
중기업-국유화공유화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공유화사유화
중기업-공유화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국유화
중기업-사유화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국유화
중기업-관민합동경영
소기업-사유화
대기업-공유화하여 국가경영
중소기업-사유화

경제체제

계획경제
계획경제
통제경제
계획경제
통제경제

노동임금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8시간제
8시간제
최저 8시간최고 10시간제
8시간제
8시간제

노동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단체교섭권
인정
단체교섭권
파업권 인정

위의 표를 보면, 좌익세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세력들인 근민당, 공협, 합위도 주요산업 국유화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했으며, 계획경제 또는 통제경제를 요구했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좌익세력과 중도세력이 함께 제시한 주요산업 국유화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 계획경제 또는 통제경제, 그리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가 혁명적 강령이라는 사실이다. 좌익세력과 중도세력이 함께 제시한 혁명적 강령을 오늘날 사회과학용어로 설명하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다. 그러므로 당시 북조선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남조선에서도 절대다수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혁명은 구분된다.) 

당시 중도세력은 좌익세력을 따라 혁명적 강령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혁명적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고유한 강령보다 높은 수준의 강령을 수용한 것이었다. 원래 혁명적 상황이 아닌 평시에 중도세력이 제시하는 것은 혁명적 강령이 아니라 개혁적 강령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자문요청에 응답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일반대중보다 정치의식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일반대중도 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다음과 같은 역사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3>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당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 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진행한 설문조사에 서울시민 2,495명이 응답했는데, 응답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국호를 바라는가?
조선인민공화국 - 1,708명 (70%)
대한민국 - 604명 (24%)
기권 - 139명 (4%)
기타 - 8명 (1%)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는데, 위의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는 당시 일반대중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들어간 것은 당시 남북조선에서 혁명의 발전단계가 민주주의혁명단계였기 때문이다.)   

2) 어떤 정권형태를 바라는가?
인민위원회 - 1,757명 (71%)
종래제도 - 327명 (14%)
기타 - 262명 (10%)
기권 - 113명 (5%)
(인민위원회는 남북조선에서 전국적으로, 자주적으로 조직되었다. 남조선 각지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폭력으로 탄압, 파괴한 것은 미점령군과 우익세력이었다.) 

3) 어떤 방식의 토지개혁을 바라는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명 (68%)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명 (17%)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명 (10%)
기권 - 99명 (5%)
(이 여론조사는 농촌이 아니라 서울에서 진행된 것이어서 토지문제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서울시민들이 응답했는데도,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응답이 68%나 되었다. 만일 토지개혁에 대한 여론조사를 농촌에서 진행했다면,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응답이 90%를 넘었을 것이다. 당시 인구분포를 보면, 농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므로,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은 민중 전체의 혁명적 요구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미점령군이 통치한 남조선에서 일반대중이 얼마나 높은 정치의식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역사자료가 있다. 1947년 9월 1일 미군정청이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앨벗 웨드마이어에게 전달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는 4대 주요신문사의 발행부수는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 - 61,000부 
서울신문 - 50,000부 
노력인민 - 45,000부 
동아일보 - 40,000부

지금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당시 중립지로 분류되었고, 지금도 서울에서 발행되는 <동아일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익지로 분류되는데, <노력인민>은 처음 들어보는 낯선 신문이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노력인민>은 남조선로동당 기관지였다. 남조선로동당 기관지가 서울에서 3대 주요언론매체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놀라운 사실은 1940년대 후반 미점령군 통치한 남조선에서 일반대중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역사자료를 하나 더 살펴보자.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는 미군정청 여론국이 서울시민 8,45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도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정치이념을 지지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결과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 6,037명 (70%)
자본주의 - 1,189명 (14%)
공산주의 - 574명 (7%)
모름 - 653명 (8%)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모르고 있었던 미군정청 여론국이 그 개념을 여론조사 선택사항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응답결과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진보적 민주주의를 선택사항으로 넣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더라면,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70%를 넘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역사자료들은 1947년의 혁명적 상황에서 민족구성원 중 70% 이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위에 열거한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요약하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여 계획경제를 운영하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권리를 보장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를 시행하는 새로운 사회체제, 곧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사회체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70여 년 전 혁명적 상황에서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면, 극우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절대다수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를 “소수의 좌익세력”이 제기한 정파적 요구인 것처럼 축소한 것도 사실왜곡이고, 민족주의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절대다수 민중이 제기한 혁명적 요구를 외면하고 중도정치세력이 제기한 민족주의적 요구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사실왜곡이라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4. 점령군 철수하면 15분 만에 무너질 우익세력 

1947년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미국 대통령 특사 앨벗 웨드마이어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서울에 나타났다. 그런데 웨드마이어 특사단이 서울방문을 마치고 떠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9월 27일 미국 육군성 차관 윌리엄 드레이퍼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서울에 나타났다. 트루먼이 보낸 웨드마이어 특사단과 육군성이 보낸 드레이퍼 대표단이 줄이어 서울에 나타난 것은 당시 워싱턴에서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드레이퍼 대표단의 동선을 추적해보자. 그들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47년 9월 23일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회의 중에 육군성 차관 드레이퍼와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드레이퍼 - “미국군이 철수하면, 이승만은 오래 가지 못하겠지요?”
하지(남조선점령군사령관) - “15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차츰 더 필사적으로 행동하고 있죠. 이승만의 처는 자기 남편을 계속 부추기고 있는데, 작은 암컷 여우 같은 그녀는 오스트리아 여자입니다. 그녀가 혹시 소련의 돈을 받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가끔 있죠.”
드레이퍼 - “이승만에 대한 인민의 지지도는 어느 정돕니까?”
제이콥스(미군정청 정치고문) - “우익세력은 미국이 지지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 지지할 겁니다.” 
브라운(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 “이승만은 인기가 높은 유일한 지도자입니다.”  

미국 육군성이 드레이퍼 대표단을 서울에 보낸 목적은 그들이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을 만나 한담에 가까운 회담이나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파견목적은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군정청 고위당국자들과 회담을 마친 드레이퍼 대표단은 1947년 9월 24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으로 가서 무력충돌위험이 감도는 38도선 동부전선을 시찰하고, 이튿날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사진 4>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드레이퍼가 어떤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47년 10월 22일 드레이퍼와 존 하지 사이에 오간 비밀전문에서 미국 군부의 의도와 동향을 엿볼 수 있다. 드레이퍼는 하지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남조선군이 앞으로 1년 안에 북조선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는지를 물었고, 하지는 미국군이 남조선군에게 군사장비와 군사훈련인원을 보충해주면 1년 만에 북조선군의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하지의 그런 보고는 미점령군이 창설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드레이퍼 대표단이 38도선 일대의 군사상황을 시찰하기 직전인 1947년 9월 2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도꾜에 주둔하는 미8군 소속 연락장교는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도중 8월 31일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진행된 대중연설에서 “북조선은 무장화된 진영으로 되었”다고 하면서, “북조선군은 10개 사단과 20만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는데, 남조선군은 1개 군단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당시 북조선이 남조선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남조선국방경비대를 1년 만에 강군으로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하지의 생각은 허상에 불과했다.  

하지와 다르게, 미국 군부는 미점령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면 우익세력이 맥없이 무너지고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 좌익세력이 집권할 것으로 우려했고,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면 남북조선에 ‘소련의 위성국가’가 건설될 것으로 우려했다. 

미국은 자기들이 점령한 남조선에서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나도록 방치할 수 없었고, 남북조선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되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이 이끄는 우익세력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했고, 남조선 좌익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5. 모스크바협정 파기한 미국의 반통일-반혁명계획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면, 미소공동위원회부터 폐기해야 했다. 미소공동위원회 폐기공작은 다음과 같이 감행되었다. 

1947년 8월 26일 웨드마이어 특사단의 서울방문에 때를 맞춰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소련 외무상 뱌체슬라브 몰로또브에게 외교문서를 보냈다. 미국은 외교문서에서 조선문제를 4개국 회의에서 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4개국 회의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 대표들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다. 이 제안은 미국이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해오던 미소공동위원회를 폐기하고 조선문제를 4개국 회의로 넘기려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4개국 회의는 소련에게 3대1의 불리한 구도로 진행될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소련은 미국이 제의한 4개국 회의를 거부했다. 미국은 소련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4개국 회의를 제의하여, 소련을 궁지에 몰아넣고 미소공동위원회를 마비시켜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려는 정치음모를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 정치음모는 워싱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1947년 1월 27일 미국 국무부 극동문제담당관 존 카터 빈센트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에 따르면, 1947년 1월 22일 맥아더는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문제를 건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유엔은 친미추종국들을 거느리고 국제문제를 제멋대로 결정해버리는 미국의 거수기로 전락했으므로, 조선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면 미국은 자기 계략을 유엔의 이름으로 정당화, 합법화할 수 있었다. 조선문제를 미국의 이익에 따라 제멋대로 처리하려는 계략은 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유엔총회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독립방안을 제의했다. 그 제의는 조선독립방안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것이었지만,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남북조선에서 유엔위원회의 감시 하에 우익성향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계략이었다. 마셜이 유엔총회에서 언급한 방안은 다음과 같다. <사진 5>

1) 최근 미국은 모스크바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4개국 회의를 제의했는데, 중국(국민당 정부)과 영국은 그 제의를 동의했고, 소련은 거부했다. 그 동안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미소 양국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조선의 독립이 지연되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고 한다.  
2) 미국은 남북조선에서 조속한 시일 안에 실시될 총선을 감시하는 유엔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한다.
3) 총선결과에 따라 유엔위원회 감시 하에 남북조선에서 임시국회가 구성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다.  
4) 미국은 유엔위원회와 조선임시정부에게 미소 양국 군대가 철수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5) 만약 위의 계획이 실패하면, 미국은 미국이 점령한 남조선을 발전시키는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 중에서 “만약 위의 계획이 실패하면, 미국은 미국이 점령한 남조선을 발전시키는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남북조선에서 유엔위원회의 감시 하에 총선이 실시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한 총선은 소련의 반대에 가로막혀 북조선에서 실시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총선이 남북조선에서 실시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한 미국은 자기들이 점령한 남조선에서만 유엔위원회 감시 하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마셜은 유엔총회 연설 중에 그 별도의 계획이 이미 준비되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의 계획은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38도선을 분단선으로 고착시키려는 반통일계획일 뿐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반혁명계획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모스크바협정을 파기하고 38도선을 분단선으로 고착시키려는 반통일계획만 보일 뿐이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고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는 낡고 썩은 사회체제를 세우려는 반혁명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진하려는 반통일-반혁명계획이 소련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셜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유엔총회 소련대표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즉각 발언기회를 얻어 미국의 주장을 배격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문제를 해결하려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노력이 진전되지 않는 책임이 소련에게 있다고 하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는 미국의 행위는 조선을 통일된 민주주의독립국가로 건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한 모스크바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2)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려는 미국의 조치를 반대한다.
3) 미국의 정책은 유엔을 파괴하고, 제3차 세계대전을 불러오고 있다.

소련이 미국의 독단과 전횡을 저지하려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미국은 1947년 9월 23일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친미추종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미국의 거수기로 전락한 유엔총회는 조선문제를 유엔에서 처리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찬성 41표, 반대 6표, 기권 7표로 채택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7년 9월 26일 유엔총회 소련대표 비신스키는 유엔총회연설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총회 의제에서 제외하고, 남북조선에서 소련군과 미국군을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에게 맡길 것을 제의했고, 같은 날 서울에서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1차 회의에서 소련측 대표 테렌티 슈티꼬브는 소련군과 미국군을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문제를 조선인민에게 맡길 것을 거듭 주장했지만, 이미 사흘 전에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된 미국의 제안을 뒤집을 수 없었다. 

미국이 추진하는 반통일-반혁명계획에 따라 8개 친미추종국 대표들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나타났다. 미국이 유엔과 이승만 우익세력을 앞세워 조선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민주주의혁명을 가로막은 비극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