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일 토요일

세계 각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합의 무효” 수요시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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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6일 세계주요도시에서 연대수요집회 진행

박정희 독재 2인자 JP, 전두환 "안 되겠어" 한마디 하자…



[김종필에게 묻는다 ⓹] 만년 2인자 JP의 권력욕… 내각제 카드 불발, 퇴장해야 할 때 외면하다 결국 퇴출

입력 : 2015-12-30  09:53:39   노출 : 2016.01.03  10:03:27
장슬기 기자 | wit@mediatoday.co.kr    
지 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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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며 “박정희는 권력의지가 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권력을 넘보지 않았고 대의를 먼저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JP는 자신을 겸손한 2인자로 표현하지만 1인자를 향한 욕망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JP의 권력욕은 이미 196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다마 불충사건’
고다마 요시오(1911~1984)라는 일본인이 있다. 미국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다.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며 ‘우익의 거괴’, ‘정재계의 흑막’ 등의 별칭으로 불린 극우인사다. 하루는 고다마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석정선, 김용태, 김종락 세 분을 만났죠. 그분들 말씀이 이 나라에는 JP가 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과 뭘 하려고하면 실권자인 JP와 손잡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하더라고요.”
고다마는 김형욱에게 그 세 명이 자신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했다. “사실 혁명(5·16)을 주도한 것도, 그 후 모든 정책 결정도 JP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박정희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허수아비라는 겁니다.” JP가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자신이 박정희를 설득하며 혁명을 이끌어 갔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황당한 사실은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국내 실력자들이 고다마와 같은 일본 실력자에게 한국 차기 대통령에 대해 상의했다는 것이다.
고다마는 박정희와 만주시절 친분을 쌓았고, 우익 폭력단체 ‘동성회’를 조직한 재일교포 정건영,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를 외손자로 두고 있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특별고문을 역임한 세지마 류조(일본군 장교, 이토추 상사 회장) 등과 막후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1971년 2월 고다마는 한일친선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 인사들은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JP는 정건영을 통해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김형욱, 박종규, 김용태, 석정선 등 실세들도 고다마를 자주 만났다.
석정선(JP 육사동기), 김용태, 김종락(JP의 셋째형)은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JP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 JP 주변인들이 JP 대통령 만들기와 관련해 고다마의 협조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다마와 JP계 3인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를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3인은 중정에 연행됐다. 이를 ‘고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김형욱 회고록,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참고)
2인자는 1인자를 꿈꾼다
JP는 증언록에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조금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고,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고 ‘2인자 철학’에 대해 말했다. 고다마 불충사건은 1인자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다 걸린 일이다.
1인자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3선 개헌 얘기는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 전부터 나왔다. 당시 야당은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은 7대 총선에서 개헌 선인 의석 3분의 2를 넘기자 1969년 1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꺼냈다.
JP는 69년 2월 “이 나라의 민주 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 3선 개헌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고 증언록에서 주장했다. 박정희는 이미 두 번(1963년, 1967년 대선)이나 대통령을 했고, 1967년 대선은 부정선거 논란에도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법적 국가기구인 중정의 창립자이자 쿠데타 정부 2인자 JP의 입에서 나온 “민주 정치”라는 단어는 사뭇 어색하다.
   
▲ 김종필 국무총리(1971~1975)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JP가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1인자의 장기 집권은 2인자로서 애가 타는 일이다.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에 따르면 박정희의 후계자 문제는 심각한 정치쟁점이었다. 1967년 선거 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책에 따르면 1968년 5월 공화당은 ‘당내 사조직을 만들어 해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을 전격 제명했다. ‘박정희 3선 개헌을 저지하고 당의장 JP를 1971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다 들킨 것’이 실제 원인이었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JP를 따로 불러 3선 개헌 동참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JP의 손을 꼭 잡았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이렇게 말했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
JP는 경제발전을 위해 1인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 저자 이달순은 JP가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만일 JP가 동지들과 끝까지 (3선개헌을) 막았더라면 숙청을 당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JP의 2인자 철학에 따르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3선 개헌안은 결국 통과됐다. 1971년 3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고, JP는 새로 신설한 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같은 해 6월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JP의 첫 번째 국무총리 임기는 1975년 12월까지 이어졌다.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JP가 강조한 2인자 철학 첫 번째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다. 유신정권시절 국무총리였던 JP가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얻게 된 교훈은 아닐까?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가 미 의회에 보고했던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JP가 국무총리에서 경질되기 직전 상황이 나온다.
1973년 초 박정희는 슐 아이젠버그가 진행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편의를 봐주도록 정부에 지시했다. 박정희는 한국정부가 캐나다산 CANDU 핵 반응로(핵개발용)를 구매하도록 했고, 아이젠버그는 대리인 역할을 했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 초 미국이 경제개발 계획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경시했을 때 필요한 자금을 지급해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인물이다.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아이젠버그는 핵 반응로 판매 수수료 등으로 200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중 일부를 민충식과 JP가 뒷돈으로 받았다. 이 사실을 청와대에서 알게 돼 JP는 국무총리, 민충식은 한국전력 사장에서 해임됐다. 민충식은 친 JP 인물로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여해 대통령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73년부터 한전 사장으로 일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JP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 통치술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덧붙였는데 이게 사퇴한 진짜 이유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분할통치’는 2인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실력자를 통해 견제하게 했던 박정희의 통치술을 가리킨다.
JP의 국무총리 사퇴의 이유에 대해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 돈에 손 댄 후 쫓겨났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편의를 봐주라”는 1인자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1인자의 사망, 결정적 기회 
JP는 증언록에서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자 JP는 공화당 총재가 됐다. JP는 공화당 요직을 개편해 ‘JP 체제’를 만들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10·26 후 전두환과 JP의 메신저 역할을 한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 전 민자당 의원도 전두환이 12·12사태 이전까지 JP를 대세 인물로 봤다고 전했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전두환이 JP에게 요구한 사항은 5·16세력만 끼고돌지 말라, 육사 8기생만 편애하지 말라(전두환은 육사 11기), JP 비서실 잡음을 정리해달라, JP가 일본 측인 건 알지만 앞으로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달라 등 네 가지였다.
18년을 집권한 독재자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며 재야인사들이 복권되자 프라하의 봄에 빗댄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퍼졌다. 재야인사 뿐 아니라 1인자의 그림자만 밟았던 JP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권력은 온전히 JP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JP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이라고 당시 정국을 표현해야 했다.
1980년 1월17일 전두환은 언론사 간부들과 술자리에서 “JP는 안 되겠어”라고 했다. 봄은 꽃피지 못하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갔다. 10.26 이후 만발했던 개헌논의가 얼어붙고 1980년 5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신군부는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소장은 중정부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JP는 신군부에게 부정축재로 쌓은 216억4648만원을 몰수당했다. 1980년 6월 공화당 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리고 전두환 집권기 7년 동안 잊혀졌다. 1987년 구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을 모아 만든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JP는 13대 대선에서 8%(4위)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노태우 36.6%(당선), 김영삼(YS) 28%, 김대중(DJ) 27%를 각각 얻었다.
물 건너간 대통령 “내각제 하자”
JP는 원래 내각책임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0·26 직후인 1980년 1월 ‘주간한국’과 인터뷰에서 “정부조직은 대통령 중심제가 좋다”고 밝혔고, 같은 해 3월 기자간담회에서도 “대통령은 언제라도 총리를 경질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원집정부제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5·16쿠데타로 내각제(2공화국 장면내각)를 붕괴한 뒤 강력한 대통령의 2인자 특혜를 누려온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발언이다.
하지만 13대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JP는 1988년 1월 기자간담회에서 내각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JP를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노태우+YS+JP) 결과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됐다. 3당 합당 후 JP는 YS에게 내각제를 하자고 요구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YS는 ‘자신이 민자당 총재-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명예총재-JP는 최고위원’을 각각 맡는 수직적 지도체제를 제안했다. 다음 대통령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YS는 내각제에 부정적이었다. JP는 계속 1인자의 그림자만 좇아야 했다.
JP가 말하지 않은 2인자 철학
JP는 YS를 지지했고, DJ와는 DJP연합까지 했지만 결국 내각제를 거절당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이나 유신을 밀어붙일 때 반대하는 JP에게 “임자 한번만 도와줘, 이번만 내가 하고 다음은 임자 차례”라고 하며 설득했을 때도, YS가 민자당 대선후보 시절 JP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나 다음은 당신’이라고 했을 때도, 3당이 합의한 ‘내각제 합의서’를 YS가 뒤엎었을 때도 JP는 절대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 취임 축하리셉션에서 김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지명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절대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2인자의 덕목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을 대신할 JP계보를 만드는 것도 경계했다. 친 JP계로 불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DJ의 동교동계, YS의 상도동계에 버금가는 계보는 없었다. 절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DJ, YS의 계보가 곧 집권의 발판이 됐다는 점에서 JP 계보가 취약했던 것은 그를 영원히 2인자로 머물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2인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YS정부 시절 JP는 ‘5·18특별법’을 반대했다. 이 법은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정치권에서 쫓아낸 전두환·노태우를 처벌하는 법이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당론으로 탄핵을 찬성하면서도 JP 본인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JP는 증언록에서 2인자는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JP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1990년 9월 성균관대에서 “민주화 전환기에 노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노 대통령 말고 누가 현 시국을 조화롭게 이끌 수 있겠는가”라고 찬양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 당무회의를 주재하며 “차기 대통령의 윤허를 받아 회의를 주재하게 됐다”며 다시 바뀐 1인자를 깍듯하게 모셨다. YS에게 레임덕이 찾아온 1997년 JP는 “이제 눈을 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남았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 1998년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왼쪽)와 김영삼 전 대통령 부부(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97년 대선 역시 DJ에게 밀렸고, JP는 공동정부를 약속받으며 국무총리에 올랐지만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JP는 증언록에서 DJ가 당시 외환위기 수습을 위해 내각제를 못할 것 같다고 말하자 자신은 “정상의 고뇌를 이해한다”며 내각제 포기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대의를 위해 권력을 포기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퇴장해야 할 때를 외면한 JP는 퇴출됐다. 자민련은 창당 첫 총선 1996년에 50석을 얻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쇠락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정당지지율을 2.8% 밖에 얻지 못해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JP마저 낙선했다(지역구만 4석). 당시 13%의 지지를 얻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린 참패였다.
JP는 이 상황을 증언록에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추한 게 없다. 아낌없이 타야 한다. 활활 타서 하얀 재가 돼야 한다. 어떤 인생도 자기를 다 태울 자격이 있다. 정치적으로 나는 완전 연소됐고 재만 남았다.” 어렸을 때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라며 밤마다 책 한 권씩 읽은 사람답게 JP의 수사는 화려했다.
JP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며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JP눈 내년 총선에서 공주지역 출마예정인 정진석 전 새누리당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당 지역 공주고(JP 19회 졸업생)에는 JP 흉상 건립이 추진 중이다. 그의 욕망은 식지 않은 것인가?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5. 1인자를 꿈꿨던 영원한 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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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대연합론자’ 김근태와 야권의 분열

‘민주대연합론자’ 김근태와 야권의 분열

등록 :2016-01-02 11:03수정 :2016-01-02 16:08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30일 오전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의장 4주기 추도미사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오른쪽)와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30일 오전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의장 4주기 추도미사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성한용의 정치막전막후 54]
2016년으로 넘어오기 이틀전인 2015년 12월30일 김근태 전 의원 4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창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은 미사 전에 잠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언론에 이미 보도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신당 작업은 잘 돼갑니까?”(문재인) “예, 지금 시간은 촉박하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연말연시 다 없을 것 같습니다.”(안철수) “총선 시기에 맞추려면 시간이 별로 없죠?”(문재인) “네네,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선거구제 획정도 끝나지 않아서. 지금 어떻게 진행돼가고 있습니까?”(안철수)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서 잠시 말이 얽혔다가 대화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종교가 가톨릭이신가요?”(문재인) “저희 아내와 딸도 견진까지 다 받았습니다.”(안철수) “우리 안 대표는요?”(문재인) “하하하. 저는 가톨릭학생회 출신입니다.”(안철수) 그리고 두 사람은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가톨릭학생회 출신이지만 종교가 없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추모미사에 이어 진행된 추도식에서 문재인 대표는 매우 인상적인 추도사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배님. 우리는 선배님이 없는 네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오는 내내 선배님과의 추억들, 특히 고문 후유증 때문에 힘들어하시던 모습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금, 선배님의 부재가 우리를 더욱 춥게 만듭니다.” “김근태 선배님은 온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습니다. 스스로 투쟁으로 쟁취하고 지켜온 민주주의 안에서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선배님이 없는 네 번째 겨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희망은 절망으로, 꿈은 포기로 바뀌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정부, 고통 받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불통의 정부만 있을 뿐입니다.” “선배님의 마지막 호소를 아프게 기억합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 선배님은 병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호소하셨습니다. 그 간절했던 호소는 선배님의 당부를 받들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과 함께 여전히 우리들 가슴에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김근태가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미완의 희망을 우리가 함께 해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선배님이 우리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선배님은 이미 이기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더 혁신하고 더 단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큰 통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강한 야당, 더 단단한 야당이 되어 박근혜 정권에 맞서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선배님의 간절한 희망을 이루어드리는 길일 것입니다.” “선배님.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내년 추도식 때는 총선 승리의 소식을 자랑스럽게 보고드리고 2017년의 희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배님의 유언 집행을 더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김근태 선배님. 편히 쉬십시오.” 추도식 사회를 맡은 최상명 우석대 교수가 안철수 의원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에게 추도사를 부탁했지만 안철수 의원은 사양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고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짤막한 추도사를 했습니다. 추모미사가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가는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에게 기자들이 따라붙었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안 의원과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색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으로 좋은 경쟁을 해 나가야 하고 언젠가 또 합치기도 해야 하고 길게 보면 같이 가야 할 사이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30일 오전 서울 도봉구 창동 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4주기 추모미사에서 맞은편 자리에 착석해 있다. 뉴시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30일 오전 서울 도봉구 창동 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4주기 추모미사에서 맞은편 자리에 착석해 있다. 뉴시스
안철수 의원은 기자들과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추도사에서 야당 통합을 말했다. “제 원칙은 이미 얘기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까 추도사는 부탁을 받았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기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사양했습니다.” -사양하신 이유는? “저보다 더 많은 노력들을 한 분들이 거기 많이 계신데 저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인영 의원이 앞으로 오라고 했는데 거절한 이유는? “이인영 의원이 제 앞에 앉으시는게 맞다고 봤습니다.” -어떤 의미인가? “고 김근태 고문께선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 정신을 기리고 그리고 계승할 책무가 있습니다. 또 인재근 의원님 사실 처음 선거에 나서실 때 제가 도와드렸습니다. 당시 유일하게 제가 두 분을 도와드렸습니다. 제가 노원 선거 때 당이 다른데도 제가 무소속이었는데도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현재는 같은 복지위 소속입니다. 그런 깊은 인연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찬을 안했는데. “예 저는 영세는 받지 않았습니다. 가톨릭학생회 출신으로 거기서 제 아내도 만나고 했습니다.” -미사에서 김근태 정신 얘기가 많이 나왔다. 신당 추진과 맞닿아 있을까? “아까 신부님을 포함해 여러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김근태 전 고문님, 그 생각과 정신을 기리고 꼭 후배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표가 김근태 정신을 얘기하며 통합을 강조했다. “통합에 대해서는 제가 벌써 세번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문재인 대표에게 선거구 협상을 물었는데? “사실 지금이 소선거구제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몇달전부터 간절하게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밤새워서라도 여야가 협의해서 소선거구제를 조금이라도 바꾸길 바랍니다. 지금 바꾸지 못하면 20대 국회에서 현재 의원 300명 전원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모습이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정의화 국회의장님과 여야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주길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김근태 4주기에 만난 문재인과 안철수
어색한 짧은 대화 뒤 미사집전 함께해 “여기 올 자격없다”는 싸늘한 눈길엔
김근태 민주대연합론과 반대된 행보 때문
그건 바로 연합의 기본이 양보에 있는데
문재인·안철수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고
두 지지자들 ‘안빠’ ‘문빠’ 부르며 증오 김근태가 말한 민주대연합론의 참뜻을
두 의원은 뭐라고 응답할까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각자 차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추도식 참석을 추모객들이 꼭 반긴 것만은 아닙니다. 추모미사에 참석했던 한 국회의원은 “당을 분열시킨 문재인 대표나 안철수 의원 모두 김근태 정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오늘 여기에 올 자격도 없다”고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김근태 정신이 무엇일까요? 최상명 교수가 최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정치인 김근태는 ‘민주대연합론자’이다. 대연합은 힘을 합쳐 보다 큰 적을 이기는 정치전략이다. 그래서 대연합은 약한 소수자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또 대연합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보와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대연합이 필요한 국면, 대연합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늘 그 전제에서 ‘나는 예외다’였다. 김근태만이 예외를 스스로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결국 김근태만이 양보하고 희생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주장하면서 싸운다. 그러나 김근태는 ‘나’를 희생하면서 싸웠다. 정권을 내어주는 일이 그동안 우리 국민의 피와 땀, 열사들의 숭고한 죽음과 희생으로 일구어 온 민주주의를 일순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김근태는 양보하고 희생했다. 그리고 대연합을 이루는 다수의 뜻에 복종하고 헌신했다. 민주주의자의 길이었다.” 김근태 전 의원의 정치 노선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전기고문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재야의 지도자였던 김근태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대연합 후보(김대중)는 패배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그 뒤에도 민주대연합을 통해 냉전적 수구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민주대연합론은 김영삼 정권에 면죄부를 주고 3당합당을 사후적으로 합리화시켜준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3당합당을 거부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민주대연합론을 비판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태도를 바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근태 전 의원을 통해 정치란 교조의 원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은 2007년 재집권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스스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대선주자 연석회의와 대통합신당 창당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최상명 교수의 글에 나온대로 민주대연합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양보와 희생’입니다. 연합을 하려면 서로 양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은 같은 정당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서로를 불신했습니다. 물론 따져보면 둘 중에 더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했고 야권은 지금 분열하고 있습니다. 추모미사에 참석했던 국회의원이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을 강하게 비판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민주화의 대부’로 불렸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상임고문의 4주기 추모행사가 3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민주화의 대부’로 불렸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상임고문의 4주기 추모행사가 3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돌아갔지만 김근태 전 의원 4주기 추모행사는 이어졌습니다. 오후 1시30분 마석 모란공원 김근태 묘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동민 전 서울시 부시장이 사회를 봤고 유인태 의원이 제례를 집전했습니다. 홍익표 의원이 축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원식 의원과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추도사를 했습니다. 우원식 의원이 김근태 전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가 추모객들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근태 형님. 올해도 어김없이 형님의 벗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계절이 바뀌듯 남은 벗들의 삶도 조금씩 변해가지만, 형님을 향한 애끓는 심정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님.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형님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그 목소리가 귓전을 맴도는데,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러나 요즘 제게는 형님의 선한 눈빛이 매서운 서릿발처럼 느껴집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꾸짖음이 되어 돌아옵니다. 박근혜 정부의 광폭한 노동개악에 맞서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는데도, 국민이 을로 전락한 세상을 바꾸고자 중소기업, 노동자, 영세자영업자를 비롯한 이 땅의 서민과 점점 더 굳건히 손잡고 가려 하는데도, 어쩐지 형님이 바라던 국민들의 편안한 삶은 험난해져 가기만 하고, 민주주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왜곡도 도를 넘어 친일이라는 굴종의 역사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형님이 살아생전 그토록 강조하신 민주대연합,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말씀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져 내리는 암울하고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형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계실겁니다. ‘이 땅의 민주세력이 하나되지 못하고 어찌 국민의 고통받는 삶을 지킬 수 있느냐.’ ‘혁신을 내부를 갈라놓는 도구로 악용하면서 어찌 세상을 진전시킬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국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만 가고 있는데 힘을 모두 합쳐도 부족할 판에 그 알량한 대권욕 때문에 우리는 부서져만 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못난 후배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계실 형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형님은 희망은 힘이 세다고 하셨죠. 저희는 형님이 말씀하신 힘이 센 그것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근태 형을 기억하는 우리들부터 오직 국민의 삶을 위한 길만 가겠습니다.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형님의 민주대연합의 긴 여정에 함께 했던 우리들입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을 걷는 심정이지만 반짝이는 별처럼 김근태의 유지를 이정표 삼아 뚜벅뚜벅 걷겠습니다. 더불어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수많은 열사와 동지들까지 이 곳에 잠들어 있는 이 땅의 노동의 권리와 민주주의, 통일을 바라던 모든 이들의 염원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근태 형님 앞에서 잡았던 손, 결코 놓지 않고 우리는 여기에 다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의 김근태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김근태의 이름,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형님. 보고싶습니다. 형님. 또 다시 만날 날까지 편히 쉬십시요. 우원식 의원은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입니다. 또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주도한 당 혁신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우원식 의원이 말한 ‘혁신을 내부를 갈라놓는 도구로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힘을 모두 합쳐도 부족할 판에 그 알량한 대권욕 때문에 부서져만 가고 있는 우리’는 또 누구일까요? 우원식 의원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혁신을 명분으로 갈등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혁신전당대회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탈당했습니다. 문병호 황주홍 유성엽 김동철 임내현 권은희 등 탈당한 의원들은 이른바 ‘친노패권주의’를 청산해야 당을 혁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가 상대에게 혁신을 외치며 갈라서고 있는 것이 지금 야권의 모습입니다. 부서져 가고 있는 것은 야권 전체입니다. 정당과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지지자들도 부서져 가고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 탈당 이후 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의원 지지자들은 서로를 ‘안빠’ ‘문빠’라고 부르며 헐뜯고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관계망과 언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야권 분열을 위한 공작도 확실히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상대 후보를 ‘색광’ ‘빨갱이’로 부르며 증오했습니다. 정치공작 세력의 이간책이 틈을 더 벌렸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승리였습니다. 분열의 상처는 그 이후 우리나라 정치와 역사를 뒤틀었습니다. 야권의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 이후 김근태 전 의원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습니다. 우원식 의원의 추도사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조건 다시 합치라는 것은 해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김근태 전 의원이 말했듯이 주먹을 쥐고 악수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김근태 전 의원 4주기가 야권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관련 영상] ‘2017 대선’, 절박한 쪽이 이긴다/ 김보협의 ‘더 정치’

북, “일본 특대형 전쟁 반인륜 범죄 사죄 배상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대답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1/03 [11: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은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합의한 일본의 성노예 보상행위를 연일 규탄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특대형 반인륜 범죄에 대한 국가적,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모든 피해자들이 납득할수 있게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나섰다.
국내 주요 언론들은 지난 2일 조선중앙통신을 인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이 일본이 남조선과의 일본군성노예문제협상 ‘타결’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1일 조선중앙통신사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일본당국자들이 최근 남조선과 일본군성노예문제를 ‘타결’하기로 합의한 것을 놓고 ‘위안부문제가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주장을 늘어 놓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외무성 대답은 “빈껍데기뿐인 ‘사죄’와 눅거리(값싼) 자금지출로 일본의 극악한 성노예범죄행위를 덮어버리기로 한 이번 합의는 철두철미 국제적 정의와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 정치적 흥정의 산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주장했다.
 
외무성 대답은 “주목되는 것은 이번 합의를 놓고 미국이 서둘러 ‘축하’와 ‘전면적이행지지’를 운운한 것”라면서 “미국은 일본과 남조선을 저들이 추진하는 침략적인 3각군사동맹에 묶어놓기 위하여 ‘일본군위안부’문제의 ‘타결’을 부추겨왔다.”고 설명했다.
 
대변인 대답은 “일본군성노예범죄는 특정한 나라의 조종이나 중재에 의해 어물쩍하게 타협하여 해결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며 몇 푼의 돈으로 어수룩한 상대나 얼려(속여) 넘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욱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대답은 “일본국가가 20만명의 조선여성들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 여성들을 상대로 감행한 성노예범죄는 국제적인 특대형 반인륜범죄로서 그 피해자들은 조선반도의 남쪽에만 아니라 북에도 있고 다른 아시아나라들과 유럽에도 있다.”며 일본의 2차 대전 당시의 반인륜적 성노예 범죄를 폭로했다.
 
그러면서 “일본군성노예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일본정부가 국가의 법적,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며 짓밟힌 명예에 대한 회복과 재발방지조치를 하루빨리 취할 것을 일관하게 요구하여왔으며 이러한 피해자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고 일본을 압박했다.
 
특히 “일본은 일본군성노예범죄를 포함하여 전쟁범죄와 특대형 반인륜범죄에 대한 국가적,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모든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며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소녀상 철거? 피 토하고 죽을 것"


정대협, 오는 6일 수요시위 세계연대행동의 날로 선정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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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2  1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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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2일 오후 4시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토요시위에서 "소녀상에 손을 대면 피 토하고 죽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한.일 정부가 속닥속닥 하더니 타결했다고 한다. 무엇을 타결했는가. 우리가 재단이 뭣이 필요하냐. 소녀상 손대면 그 자리에서 피 토하고 죽을 것이다."
지난달 28일 한국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타결을 선언한 이후, 합의 무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을 철거할 경우, "피 토하고 죽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일본군'위안부' 한.일협정 폐기 대학생 대책위원회'는 2일 오후 4시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협의 무효와 폐기를 촉구하는 토요시위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우리는 협상을 못 한다. 그러나 한.일 정부 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이 일이 시작되기 전에 상의해야 하지 않느냐"며 "이렇다 말 한마디 없이 속닥속닥하더니 타결했단다. 무엇을 갖고 타결했느냐. 자기들끼리 타결한 게 말이 되느냐"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 아베 총리가 마음에 우러날 정도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우리의 명예를 회복해야 해결되는 것"이라며 "우리 정부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것으로 타결하느냐"고 꼬집었다.
일본 정부의 10억 엔(약 97억 원) 출연으로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는 데 대해서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는 징용, 징병 끌려가서 피눈물 나는 몸값을 받아서 새마을사업을 하더니, 지금 와서 그 돈을 받아서 재단을 만든다? 재단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반발했다.
소녀상 철거에 대해서는 "왜 소녀상을 들먹이느냐. 정부가 돈을 냈는가. 국민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앞으로 후손들이 자랄 때,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표식으로 세웠다"며 "소녀상을 만약 철거한다면, 손을 대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손 못 댄다"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시작이다. 굳세게 힘차게 끝까지 싸우자"라고 강조했다.
   
▲ 청소년들이 '굴욕적인 한일합의, 소녀상 이전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참가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번 한.일 협의와 관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긴급 논의를 통해, 오는 6일 열리는 수요시위를 세계연대 행동의 날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 이번 협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을 막고, 협의의 부당성을 알리겠다는 취지다. 현재 미국 워싱턴, 뉴욕, LA 글렌데일, 뉴저지, 샌프란시스코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동참을 알려왔고,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 등에서도 연대 행동이 열릴 예정이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피해자의 의사가 외면당한 채, 가해자의 인식과 가해자를 고려한 이번 협상은 무효다, 폐기하라고 할 것"이라며 "국제사회가 못다 한, 은폐하고 침묵한 범죄 처벌 문제를 지금에라도 올바르게 해결하도록, 책임을 이행하도록 국제사회를 추동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정대협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이번 합의에 환영 입장을 밝힌 데 맞서, '위안부'관련해 보고서를 제출한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들과 접촉해, 이번 합의의 문제점을 알릴 계획이다.
   
▲ 토요시위에 앞서 문화예술인들이 '위안부' 협상 무효 예술행동을 벌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날 토요시위에 앞서 문화예술인들이 주축된 '위안부' 협상 무효 예술행동이 낮 1시부터 이어졌다.
예술행동에는 더맑음, 이유정, SV, 백정미, 장민준, 이씬, 김지영, 김숙인, 류성국 등 음악인, 미술인, 배우 등이 참가해 협의 무효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한편, 지난달 31일 주한일본대사관 기습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뒤 이날 오전 풀려난 대학생 30여 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남,북,해외의 민족과 함께 굴욕적 한일협상 폐기를 위해 맞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한때, 이들은 토요시위에 앞서 무대설치를 가로막은 경찰과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날 예술행동과 토요시위에는 5백여 명이 참가했다.
   
▲ 김지영 씨가 한.일 협의 무효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홍승희 씨가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한반도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끌려갔을 때 나이와 현재까지의 나이를 숫자로 적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지난달 31일 주한일본대사관에서 기습시위를 벌인 뒤 연행됐다 2일 풀려난 대학생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토요시위에 앞서 무대를 설치하려는데 경찰이 막아서자 대학생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경찰에 연행됐던 김샘 '평화나비 네트워크' 전국대표를 위로하는 김복동 할머니.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