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일 일요일

군의 수사결과, 지난 30년간 단 한 건도 바뀌지 않아

군의 수사결과, 지난 30년간 단 한 건도 바뀌지 않아

2015.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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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내용 가운데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재연 사진
  2013년 8월 22일 낮 2시. 필자는 그날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등법원 내 한 법정에 앉아 있었다. 무려 30년간 자·타살 공방을 벌이고 있는 한 군인의 민사 항소심 선고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건은 1984년 4월 2일 시작되었다. 이날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허원근 일병(당시 22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스스로 총을 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군 복무 염증에 의한 전형적인 군인 자살 사건으로 처리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하지만 이후 30년간 진짜 사망 원인이 무엇이냐를 넣고 치열한 논쟁을 하게 된다.
  군은 허원근 일병이 가혹한 중대장의 업무 지시와 폭언, 폭행 등으로 인해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유족은 믿지 않았다. 특히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는 아들이 사망한 후 30년 세월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허원근 일병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군 의문사’로 세인들에게 언급되고 있다. 현재도 방송과 신문이 군 의문사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다.
  허 일병 사망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허 일병의 사체에서 발견된 세 발의 총상이다. 허 일병은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모두 세 발의 총상을 입고 숨졌다. 유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는 의혹도 이것이며, 허 일병 사인은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의심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허 일병이 자살하고자 스스로 좌·우 가슴에 한 발씩 총을 쐈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을 쏘고 자살했다는 군 발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주력 총기로 사용하는 M16 소총은 당장 바꿔야 한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총알을 두 발이나 맞고도 죽지 않는 총으로 무슨 전쟁을 하냐는 조소였다.
더구나 M16 소총을 직접 다뤄본 군 전역자들은 군의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M16 소총의 위력을 안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설령 총탄을 비껴 맞아 즉시 사망하지 않았다 해도 그 충격과 고통으로 기절할 수밖에 없는데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스스로 총을 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한다. 하지만 군의 입장은 불변이다. 국방부는 지난 30년 동안 허원근 일병은 자살했다는 말 외에 나머지 남는 의문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런데 세 발의 총상 외에도 허원근 일병 사건에서는 중요한 의문이 또 있었다. 바로 ‘피’였다. 허 일병이 총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접한 7사단 헌병대가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헌병대는 허 일병의 사체와 사건 현장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런데 헌병대가 촬영한 사진 속에서 허 일병의 아버지는 이상한 점을 확인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허 일병은 무려 세 발이나 총상을 입었다. 당연히 허 일병의 몸에는 모두 6개의 관통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와 빠져나간 사출구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통상 사입구는 작으나 빠져나간 사출구는 그보다 훨씬 구멍이 크다. 그렇다면 이 총알 구멍들을 통해 허 일병의 몸에서 흘러내릴 피는 어느 정도의 양이 될까? 법의학자들은 적어도 몇 리터에 달하는 양의 흥건한 피가 현장과 사체에서 보여야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깨끗했다.
  너무도 상식 밖의 현장에 대한 의문에 대해 군 헌병대의 답변은 어처구니없었다. 흘러내린 피가 땅과, 입고 있던 허 일병 옷에 스며들어 사진 상으로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피가 땅에 스며든다 해도 빨대처럼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상당한 넓은 면적으로 그런 흔적이 남아야 옳은 해명이 될 수 있다. 또한 옷에 스며든다면 거기서도 그런 넓은 핏자국이 보여야 인정될 수 있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런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땅도 옷도 거의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궁색한 군 헌병대의 변명조차도 끝내 피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 의혹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2010년 허원근 일병 유족이 낸 민사소송 1심 판결에서 당시 재판부가 “허 일병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며 사건 현장은 조작되었다”는 근거로 삼은 증거였다.

 사라진 허 일병의 신체 조직

  바로 ‘허원근 일병의 뇌 조직이 어디 갔느냐?’였다. 군은 사망한 허 일병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을 쏴 자살했다고 했다. 그런데 법의학적 분석 결과 머리는 가장 마지막에 총격이 가해졌는데 이로 인해 허 일병의 머리 부위는 상당히 큰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얼굴 피부 조직과 머리 뼈, 그리고 뇌 조직 등이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사건 현장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면 당연히 현장에는 허 일병의 손상된 신체 부위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없었다. 피도 없었고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 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건 민사소송 1심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 김OO 부장판사는 2010년 2월 3일 “허 일병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증거 자료,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선고한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발생 무려 만 26년 만에 내려진 새로운 법정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됐다는 유력 증거 중 하나로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현장에 출혈 흔적이 없다는 의혹에 대해 “피가 땅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군의 황당한 해명과는 달리 재판부는 이 사건에 더 큰 의혹이 있다고 판단하여 타살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총상으로 손상된 허 일병의 머리 부위 신체 조직도 헌병대 촬영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됐다. 더욱이 재판부는 이 사건을 해외 법의학자에게 의뢰했다. 그들이 보내온 답은 간결했다“피는 설령 땅에 스며들 수 있어도 뇌 조직은 땅에 스며들 수 없다.” 즉, 허 일병이 발견된 장소는 허 일병이 사망한 장소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러자 재판부는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사망한 허원근 일병을 사체 발견 장소로 옮긴 것이며, 따라서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그날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시간에 비하면 얻어낸 결론은 미약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고, 남은 의혹에 대해 명쾌하게 다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번 판결로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기다린 보람 끝에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심 결과를 접한 국방부는 곧바로 반발했다. “사실 인정 및 법리상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1심 판결에 불복, 바로 항소했다. 그래서 열리게 된 2013년 8월 22일 민사소송 2심 판결일. 나는 이 2심 선고를 보기 위해 그날 법원에 갔다.

 2심 재판부 허원근 ‘자살’ 판결, 30년 돌아 다시 제자리로

  잠시 후 서울고등법원 민사합의 9부 강OO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려진 선고. 설마 했던 우려는 사실이 됐다. 타살로 인정되었던 1심 선고는 항소심에서 또 다시 자살로 뒤집혔다. 1984년 당시 7사단 헌병대가 자살이라고 발표한 후 이 사건은 정부기관 조사와 재판을 통해 모두 네 차례나 자·타살 결과가 번복되었다. 2002년 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허 일병이 타살되었다고 발표하자 당시 국방부는 특별조사단을 임의로 구성하여 재조사한 후 다시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2004년 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가 억지를 부린다며 다시 타살이라고 발표했고 이후 유족이 낸 민사소송에서 2010년 1심 재판부가 타살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런 허 일병 사인이 다시 그로부터 3년이 지나가던 2013년 8월 민사 2심 선고에서 다시 자살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만 29년을 돌고 돌아 결국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살로 결론을 내린 민사2심 재판부의 판단은 1984년 7사단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사실상’ 그대로 반복했다. 더 밝혀진 것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는 29년 전 그 ‘자살론’ 그대로였다. 먼저 세 발의 총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재판부는 “망인과 신체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밝혔다. 자세가 가능하니 자살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시연한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연자는 그 자세로 보여준 것일 뿐 실제로 좌·우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마지막 세 번째 자세를 할 수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그런 자세가 가능한지만 보여준 것뿐이었다. 가슴뼈가 부러지고 몸에 4개의 큰 구멍이 이미 발생한 상태에서 다시 또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격을 가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재판부의 결론은 참으로 ‘신비한’ 주장이었다.
  사실 나는 항소심 결과를 앞두고 우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살로 처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언급한 것처럼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허 일병의 뇌 조직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해결할 수 있어도 그 뇌 조직이 사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방법도 변명도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합리적인 재판부라면 그것을 무엇으로 피해갈 수 있겠나 믿은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없었다. 놀랍게도 답은 간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 피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땅에 스며들었다는 군 헌병대 답변은 옹색한 수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를 가져왔다. “M16 소총탄의 회전력으로 혈액이 비산(날아서 흩어짐)하여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뇌 조직 역시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간 것으로 판단된다”였다. 재판부는 그렇게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후 자살이 맞다며 유족에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나는 정말 그 판결을 들으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의 위력이 보잘 것 없어 무려 세 번이나 총을 쏴야 사망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또 반대로는 소총의 회전력으로 그 모든 것이 비산되어 사라졌다는 이중적 논리는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
  이런 판결에 대해 허 일병의 유족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국방부가 그동안 해 온 아들의 자살 주장을 판사가 그대로 말하더라”며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법정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상고했고 이제 이 사건의 최종 결론은 대법원으로 간 상태다.
  아버지 허영춘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재판이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던 나 역시 너무도 허탈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국방부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번 내린 수사 결과를 바꿔 본 적은 있을까? 자신들이 내린 수사 결론을 이후 피해 유족이 반발하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다시 재조사하여 그 결과가 바뀐 사례가 있다면 과연 그 횟수는 얼마나 되며 그러한 구체적 사례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이 들면서 나는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국회 자료제출 요청권’에 따라 국방부에 공문을 보냈다.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1984년보다 2년 전인 1982년 1월 1일부터 만 30년 후가 되는 2012년 12월 31일 사이 기간 중 군인 사망사건에 있어 유족이 기존 수사 결과에 반발하여 재조사를 요구한 후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대상자의 이름과 사건 개요, 그리고 사망 원인이 변경된 결과가 무엇인지 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마침내 내가 요청한 자료가 국방부 조사본부로부터 전달됐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문서를 열람해 보니 문서 분량은 고작 ‘한 장’이었다. 아니, 30년 동안 결과를 요청한 것인데 왜 이렇게 분량이 적나 의아했다. 그리고 읽어본 답변서의 분량은 딱 한 문장이었다. 그 답변을 그대로 인용한다.
  “요청하신 자료와 관련하여 군 헌병대의 1차 수사결과에 대해 유족이 이의를 제기하여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는 없습니다.”
  2015년 현재, 허원근 일병 의문사는 만 31년이 지나가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 군 사망사고중 하나인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은 올해로 만 17년째다. 많은 이들은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군 의문사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냐고. 나 역시 이 공문을 보고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군 헌병대 수사는 신이 하는가? 완벽한 신이 하는 수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지난 30년간 군이 한 수사는 단 한 건도 그 결과가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전화를 해서 물었다. 내가 물어본 것이 30년 사이 기간인데 혹시 1948년 군 창설 이래 지금까지 바뀐 사례는 있는지 물었다. 정말 놀라웠다. 답변은 "단 한 건도 없다"였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제 답은 하나다. 군 헌병대가 군 사망사고 수사를 독점하는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제3의 민간 외부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의 주장을 더 이상 국가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 허원근 일병처럼, 김훈 중위처럼, 그 외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는 수많은 군인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군 수사에만 맡기는 것은 또 다른 죄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숨져간 모든 군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제 진실을 밝히자.
 고상만 인권운동가

신입 7만8241명 건보료 분석해보니

등록 : 2015.02.01 22:02수정 : 2015.02.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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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리포트]신입 7만8241명 건보료 분석해보니
취직 전보다 더 자주 병원에 가
진료비 지출 평균 10%가량 늘어

자주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된다. 전에 없던 일이다. 어깨와 목은 갈수록 뻣뻣해지고 뒷목을 잡는 날이 많다. 감기는 왜 이리 자주 걸리는지….
신입사원이 아프다.
최악의 취업난을 뚫었으니 ‘불행 끝 행복 시작?’ 아니었다. ‘지옥’을 빠져나왔다고 좋아했는데, 정작 기다리고 있던 건 새로운 ‘전쟁터’다. 낯선 전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상흔을 남긴다. 악전고투다. 지금도 입사지원서를 고쳐 쓰는 후배나 동료들은 ‘행복한 아우성’이라 핀잔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입사원들이 꿈에 부푼 직장에서 확인하는 건 “여전히 미생”이라는 사실이다.
<한겨레>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갓 직장에 들어간 신입사원의 입사 전후 1년간의 병원 이용 행태를 추적해 보니, 취직 전에 비해 입사 뒤에 더 자주 병원을 찾았고 그만큼 진료비 지출도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2012년 6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자격을 취득한 1977~1987년생(2012년 현재 25~35살) 7만8241명의 병원 이용 행태를 분석했다. 이들이 입사 뒤 1년(2012년 7월~2013년 6월) 동안 쓴 1인당 평균 진료비(건보공단 지급+개인 부담금)는 29만원이다. 입사 직전 1년(2011년 7월~2012년 6월) 동안 지출한 진료비 26만2000원보다 10%가량(2만8000원) 많았다. 입사 전엔 77%(6만429명)가 병원을 찾았지만 입사 뒤엔 그 비율이 82%(6만4626명)로 높아졌다. 취직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은 신입사원 100명에 5명꼴로 입사 뒤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 뜻이다.
입사 전후를 가리지 않고 진료 빈도 상위 1~3위를 차지한 질병은 급성기관지염, 편도염, 급성상기도감염이다. 모두 감기와 관련된 증상들로 볼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취직 뒤 이런 질병으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3.4% 늘었다는 사실이다. 직장생활 뒤 스트레스가 쌓여 발병 빈도를 높이거나 새로 병을 유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흔히 복통·설사 증상으로 나타나는 위장염이 신입사원이 된 뒤 무려 31.6%나 증가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속쓰림 증상인 위염 및 십이지장염을 앓는 직장인도 11.5%가 증가했다.
추정은 건보공단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위장 등 소화 분야 장기는 스트레스에 민감하다. 신입 직원들이 새로운 일을 하느라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지고 업무가 바빠 생활이 불규칙해지면 위염이나 소화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잦은 회식과 과음·폭식·흡연도 위염 등의 원인이 된다”고 짚었다. 김형렬 가톨릭대 교수(직업환경의학)는 “신입사원들이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난 건 취직 뒤 경제적 여유가 생겨 이전엔 참고 넘기던 질병도 병원 치료를 받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입사원들이 취직 전에 견줘 더 자주 병원을 찾고 진료비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겨레>는 몇몇 새내기 직장인들을 만나 병을 부르는 그들의 업무 환경, 생활 방식, 고충을 들어봤다. 야근과 과로, 업무상 음주, 인간관계와 조직 적응 과정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몸에 투영된 결과로 요약된다.
부서 회식에 술접대까지
일주일에 사나흘은 만취
바쁠땐 며칠씩 제대로 못자
눈치 보여 아파도 휴가 못내
진상 민원인에도 고분고분
인사불이익 당할라 꾹 참아
아프다 말해도 대책 안세워
회사서 소모품 취급당해 절망
1년씩 계약 연장해야 돼 불안
‘월급이 아깝다’ 무시 당하기도
①대기업 사원(27·남)/과음/2014년 9월~
총무팀에서 근무한다. 인허가나 규제를 맡은 공무원에게 술자리 접대를 하는 일이 잦다. 일주일에 한번은 부서 회식에 참가해야 한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업무상 술자리는 고역이다. 마음이 편치 않고 술 마시는 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어서다. 무엇보다 긴장해야 한다. ‘갑’을 앞에 두고 먼저 흐트러져는 안 된다. 그렇게 일주일에 나흘 정도 술을 마신다. 그 가운데 사흘은 만취할 때까지 마신다.
지난해 말 건강검진을 받기 전 선배들의 조언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문진표 음주 습관 항목에 음주 횟수나 주량을 사실대로 적지 말라는 거였다. 나중에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일 때문이 아니라 원래 술을 좋아해 많이 마신 탓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조언에 격하게 공감한다. 하지만 자괴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벌레처럼 기어다닌다. 이렇게 살려고 취업하려 안달복달했나 싶다.
②구청 공무원(27·여)/감정노동/2013년 12월~
일반직 8급으로 서울의 한 구청에서 일한다. 첫 보직으로 10개월 동안 민원 처리 업무를 맡았다.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민원인 탓에 곤란할 때가 많다. 함께 화를 내지도 못한다. ‘불친절’ 공무원으로 찍혀 인사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서다. 행동 하나하나가 (구청 공무원의) 대표성을 띤다고 생각하니 행여 말실수라도 할까봐 긴장을 떨치지 못한다.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데다 업무마저 익숙지 않아 대기 줄이 길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가 낸 세금으로 이런 식으로 굼뜨고 불친절하게 민원을 처리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사람이 꼭 있다. 어김없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한데, 직접 당해보니 달랐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민원인이 욕을 하거나 언성을 높이면 긴장 탓에 소화가 안되고 오후 서너시면 편두통이 심해진다. 찬 공기를 쐬어도 효과가 없어 약을 먹을 때가 많다. 그런 날은 퇴근 뒤 집에 돌아와서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귀가 계속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③티브이(TV) 드라마 프로듀서(28·남)/밤샘노동·과로/2013년 12월~
촬영에 들어가면 프로그램이 종영될 때까지 쉬는 날이 없다. 일과가 아침 6시께 시작해 일러도 다음날 새벽 1시는 돼야 끝난다. 잠은 두세시간밖에 못 잔다. 그마저도 입사 초기에는 중간에 서너번씩 잠에서 깼다.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악몽에 시달려서다. 일이 새벽 서너시까지 이어지는 날도 흔하다. 그런 날은 잠은커녕 찜질방에 들러 몸만 씻고 출근해야 한다.
학생 땐 규칙적으로 지냈다. 그러다 취직 뒤 하루 두세시간밖에 잘 수 없는 현장에 내던져지니 적응이 어렵다. 입사한 지 서너달 됐을 땐 촬영 나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기도 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안정이 필요하단다. 선배들도 좀 쉬라고 권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내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다. 제때 하지 않으면 일이 자꾸 쌓이게 된다. 구멍이 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눈치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요즘에도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많다. 갈수록 머리가 몽롱하고 몸은 나른해진다. 추운 날씨에도 종일 서서 버텨야 하니 온몸이 욱신거린다.
④중소기업 사원(30·남)/인간관계 스트레스/2012년 8월~2013년 7월
대전의 한 의료기기 중소기업 기획실에서 1년가량 일하다 건강이 나빠져 결국 퇴사했다. 지금은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입사할 때 받은 건강진단에선 아무 이상이 없었다.
늘 아침 8시 전에 출근했고, 밤 9시 전엔 퇴근해 본 적이 없다. 하루 13시간씩 일했다. 퇴사 두달 전쯤 혈압이 160까지 올라갔다. 2층에서 5층까지도 걸어서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호흡곤란 증상이 왔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며 무조건 쉬라고 했다. 일을 그만두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고혈압 치료를 받느라 병원비와 약값으로 두달간 20만원을 썼다.
회사에 사정을 설명했는데도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다. 사람을 늘리지도, 업무를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지도 않았다. 엔지니어 위주의 회사라 홍보 담당인 나는 업무 배정이나 연봉 협상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만큼 반감도 컸다. 내 일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피상적이었고 종종 시기와 질투도 받았다. 몸도 몸이지만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를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회사와 상사들의 태도에 절망했다. 그래서 사직서를 냈다.
⑤국립대 기간제 비서(26·여)/모멸감과 고용 불안/2013년 10월~
국립대학 산하기관에서 비서로 일한다. 1년 계약을 했고 지난해 10월에 다시 1년 연장계약을 했어야 했는데 연봉 협상 문제로 아직 계약서를 새로 쓰지 못하고 있다. 행정실장은 바빠서 그렇다며 계약을 미룬다. 추가근무수당도 3개월째 받지 못하고 있다. 계약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일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 일이 어찌 될지 몰라 불안하다.
상사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데 내 인사는 일부러 받지 않는 거 같다.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받는다”며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알아서 그만두라’는 거 같기도 하고…. 같은 대학의 다른 기관 비서들은 월급을 180만원까지 받는다는데, 내겐 120만원도 아깝다는 거다.
입사하고 두달 만에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몸이 붓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심야에 병원 응급실에 가야 했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갑자기 스트레스가 집중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더라. 한달 가까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나서야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민심 모르는 ‘2·8전당대회’ 정권교체 가능할까?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 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임병도 | 2015-02-02 08:56:3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2·8전당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보궐선거와 총선은 물론이고 대선까지 책임질 새정치연합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2·8전당대회’이지만, 여론 반응도 신통치 않고, 들려오는 소리도 그다지 좋은 얘기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는 가면 갈수록 지도부가 구성돼도 과연 정권교체가 가능할지라는 의문만 잔뜩 남기고 있습니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는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당심과 민심, 왜 그리 차이가 날까?’
선거 관련 자료 중에 시도별 유권자수를 분석하는 도표는 빠짐없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경상도 유권자수가 다른 시도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9대 총선 시도별 유권자수 분포 ⓒ박대용
경상도 유권자수는 전라도에 비해 세 배가 넘습니다.1 전라도와 충청,강원,제주,세종을 합쳐도 경상도 유권자를 넘지 못합니다.
광주와 전북,전남을 모두 합쳐도2 10.2%로 부산 (7.2%)과 경남 (6.4%)를 합친 13.6%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거에서 지역별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지역별 유권자수 불균형은 새정치연합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 비중이 75%인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숫자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 권리당원을 합쳐야3 전북이나 전남 지역 하나와 비슷합니다.

단순히 숫자만 비교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 전체 권리당원의 비중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새정치연합의 권리당원 중 전남, 전북,광주를 합치면 50%가 넘습니다. 서울과 경기를 합쳐도 전라도 지역의 권리당원 숫자보다 적습니다.
권리당원의 비중이 높아서, 새정치연합 당대표와 최고위원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남’에만 가면 자신이 ‘호남의 적자’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남지역이 야당의 텃밭이자 근간이 되는 지역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역별 편차가 심하다 보니 당심과 정권교체에 가능한 민심이 비슷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새정치연합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2·8전당대회’에서 당심과 민심이 다르다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무조건 후보자를 선택해야 유효표?’
새정치연합의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방식은 대의원의 현장투표와 선거권을 가진 권리당원4의 ARS투표와 여론조사를 합산해서 결정됩니다.
대의원 투표는 전국대의원명부에 기재된 국내 거주 대의원은 현장투표를 하고, 재외국민대의원은 이메일로 투표합니다.
ARS투표는 선거권이 있는 권리당원에게 전화를 걸어 투표하는 방식입니다.5
여론조사는  당원 여론조사와 국민여론조사를 합니다. 여론조사는 25%를 반영하는데, 이때 국민여론조사는 득표율을 합산한 평균값 결과 5분의 3을, 당원 여론조사는 5분 2를 반영합니다.
문제는 여론조사에서 당대표 후보자 1명과 최고위원 후보자 2명을 모두 선택해야만 유효표 된다는 점입니다. 6

이 말을 바꿔말하면 서울시장과 구청장, 구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서울시장과 구청장을 선택하고 구의원 투표에 ‘지지후보 없음’이라고 하거나 기표를 하지 않으면 무효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새정치연합의 최고위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권리당원이라고 해도 최고위원 후보가 누군지 모르는데, 일반 국민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새정치연합은 최고위원 2명을 무조건 선택해야 유효표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냥 대놓고 여론조사를 무효로 만들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2월 3일부터 권리당원에 대한 ARS투표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새정치연합 홈페이지에 가보면 무슨 ‘강제적 권리당원 ARS투표’나 ‘자발적 권리당원 ARS투표’라는 어려운 말만 잔뜩 텍스트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권리당원이지만 새정치연합 당비만 자동이체로 나가지, 평소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유권자를 위해 자세하게 투표 안내를 해줘야 마땅하지만, 그저 경선규칙만 나와 있지, 쉽고 간편하게 이해될 안내문이 없습니다.
동영상으로 간단하게 투표 방식을 알려줄 의무가 있지만, 새정치연합은 홈페이지 어느 곳에도 그런 친절함은 없습니다. 공지나 자료실을 가봐도 현장중계 일정만 나옵니다.
투표 참여를 아예 처음부터 가로막는 참 불친절한 정당입니다.

‘정권교체 전에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아이엠피터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정치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 특히 민심을 새정치연합 내부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재인 후보는 여기서 나아가 제대로 된 ‘탕평책’을 펼쳐야 합니다. 자기와 우호적인 세력을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상대방 진영을 중요 보직에 임명하거나 정치신인을 등용해야 합니다.
선거 전에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줘야 ‘2·8전당대회’가 끝나도 새정치연합을 이끌 수 있는 수장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위원장이나 대의원이 장악한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그들과 연대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시스템을 바꾸어 공정하게 새정치연합이 개혁될 수 있는 방법 또한 모색해야 합니다.
박지원 후보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당권과 대권 분리’입니다. 그런데 2010년 박지원 후보는 원내대표 경선에 나와서 “전당대회에서 대권을 꿈꾸는 우리 당 인재들이 지도부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느냐는 중요한 점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권과 대권을 분리해서 ‘정권교체’가 가능하느냐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새정치연합의 당권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도록 대선을 준비하고 승리한다면, 그의 말이 맞겠지만, 지금 새정치연합을 보노라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아이엠피터는 정치블로거이지만, 새정치연합보다는 항상 새누리당의 행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을 비교하면, 새누리당이 오히려 더 젊어지고 진보적 성향의 모습을 가식적이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7
새정치연합의 ‘2·8전당대회’를 보면 참석자 대부분이 노령층입니다. 젊은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각 후보 진영 자원봉사자들이나 젊지, 참석자의 연령대는 대부분 높습니다.
‘2·8전당대회’조차 젊은이들이 참여하지 않는 정당을 보고 있노라면, 이래서 어떻게 ‘정권교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새정치연합이 정권교체를 할 수 있게 하려면, 전당대회 투표에 선거권을 가진 권리당원이나 여론조사에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새정치연합의 모습을 보면, 민심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당원이 있어야 정당이 운영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선거에서 패배, 정당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민심과 당심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2·8전당대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1. 박대용기자블로그 2012년 7월 29일. 19대 총선 시도별 유권자수 분포http://biguse.net/608
2. 광주 1,108,862명 2.8% 전북 1,476,325명 3.7% 전남 1,525,241명 3.8%
3. 서울:37,503 경기:35,935
4. 2014년 6월 31일까지 입당한 당원 중 3회 이상 당비를 납부한 당원
5. 새정치연합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시행세칙. http://npad2015.kr/page/rule.php
6. 새정치연합 경선방법,시행세칙 http://npad2015.kr/page/way.php
7. 새누리당의 홈페이지와 새정치연합의 홈페이지만 비교해봐도 누가 더 시민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쉽게 이해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37 

"팟캐스트가 낯선 나이? 6살 위 윤여준 장관도 하는데"


15.02.02 08:05l최종 업데이트 15.02.02 08:0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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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진행자인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과 황방열 오마이뉴스 기자.
ⓒ 권우성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945년 6월에 태어난, '해방둥이'입니다. 그 시절 만주라 불린 중국 동북3성의 북쪽 헤이룽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100일 만에 강보에 쌓여 그곳을 떠나 만주와 한반도를 관통하는 40일간의 여정을 거쳐 아버지의 고향인 전주에 도착합니다.

이런 개인사를 보면 그가 통일 문제를 일생의 화두로 갖게 된 것이 그의 표현대로 "강보에 쌓여 넘어온 38선을 되짚어 다시 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는 일을 하게 된 것"으로 "그의 운명이었구나"라고 해도 심한 비약은 아닐 듯 합니다.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과 바로 이은 노무현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례적인 경력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77년 국토통일원 공산권 연구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이래 말단 실무부터 장관까지 통일관련 업무를 경험한 거의 유일한 통일부 장관입니다. 또 '공산 중국'에 대한 연구가 척박했던 1982년에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장관 재임중 남북대화 95회, 합의서 73개 나와

그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때까지 열린 606회의 남북대화 중 99회의 회담에 관여했고, 총 226건의 남북합의서 중 76건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특히 통일부 장관으로 있던 2년 5개월(2002년 1월~2004년 6월)동안 95회 남북대화가 있었고 73개 합의서가 작성됐습니다.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꿈같은 시절'이라 할 만합니다.

27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친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대통령자문 통일고문회의 고문,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등을 맡아 민간에서도 계속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프레시안> '정세현의 정세토크'와 <한겨레> 칼럼 등의 언론활동을 계속해왔습니다.

그가 '평화통일을 하려면 남북한이 한통속이 돼야 한다'는 취지아래 <오마이뉴스>가 만드는 남북관계-통일문제 전문 팟캐스트 방송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활동의 연장선일 겁니다.

방송을 한 주 앞두고 만난 그는 "박근혜 정부 대북 정책의 문제점을 짚고, 그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한편,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은 오는 2월 3일 시작되며, 매주 화요일에 방송될 예정입니다. 현재는 예고방송이 나가고 있습니다.

☞팟빵에서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듣기
☞아이튠즈에서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듣기

다음은 정 전 장관과의 문답 전문입니다.

-1945년에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에서 태어나셨는데요.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45년 6월에 헤이룽장성 자무스(佳木斯)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헤이룽장성 성도 하얼빈에서 러시아쪽으로 동북단 끝에 있는 곳입니다. 아버님이 젊었을 때 이주해서 한의원으로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내가 태어나고 두 달 뒤 해방이 된 겁니다. 내가 태어난 지 100일 정도 지났을 때 추석 직후인 9월 말에 아버님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전주로 출발하셨답니다.

기차 타고가다 막히면 걷다가 다시 기차를 구해 타는 식이었다는데, 당시 만주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젊은 처자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고 해서 어머니가 얼굴에 검정 칠을 하기도 하고, 아기 울음소리 나면 소련군이 마구 죽인다고 해서 극도로 조심했다고 합니다.

또 그해 장티푸스가 창궐해서 아기들이 많이 죽고 또 유행병도 돌았다는데, 피난민들은 그런 게 더 심했을 텐데 나는 명줄이 길었나 봐요. (랴오닝성) 단둥에서, 신의주, 평양, 38선을 지나 예성강을 건너서 (한국전쟁 전에는 남쪽 지역이었던) 개성, 서울역 그리고 전주까지 40일 걸려서 도착했답니다. 예성강 가파른 철교를, 철로 수리하는 지붕 없는 차량 타고 건너다 떨어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우리는 별 일이 없었습니다. 강보에 쌓여서 한반도를 관통한 것인데, 최연소 월남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71년 대선 때 김대중 장충단 연설 들으러 갔는데"

이런 개인사가 이후 통일 문제에 매진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글쎄요, 그런 점도 없지않아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어렸을 때부터 그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기억도 없는 어렸을 때 얘기이고, 대학 때 서울대 외교학과를 만든 이용희 교수가 '한국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는데, 멋지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뒤 대학원 1학년 때인 1971년 7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연설을 보러 간 일이 있습니다. 당시는 현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던 때라 연설 잘 한다는 김대중 후보의 연설기법을 보러 갔는데, 세계적인 화해 흐름에 맞춰서 남북 화해를 추진해야 한다는 말이, 당시 대학 교수들보다 더 국제정세에 해박했습니다. '이용희 교수 말씀이 저거였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사 논문이 모택동(마오쩌둥) 시대 중국 외교에 대한 것인데 그 시절에는 드물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한의사여서 어렸을 때부터 한문에 친숙해서 그런지 중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973년에 한비자 연구, 그러니까 중국 고대 정치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7년에 이용희 교수가 국토통일원 장관이 돼서 뽑은 공산권연구관 중 한 명으로 통일원에 들어간 것이, 통일관련 업무를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1982년에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 그러니까 모택동 시대의 중국 외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직업적인 전공은 남북관계지만, 학문적 전공은 중국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때는 국내에 중국 관련 자료가 별로 없던 시절 아닙니까.
"나는 통일원에 근무하고 있었잖아요. 당시 민간에서 그런 자료 봤으면 불온문서 소지로 쇠고랑 찼을 겁니다(웃음). 모순론, 실천론 같은 당시 운동권의 필독서인 모택동의 주요 저작을 다 넣었습니다. 그때 중국과 소련 자료들 보고, 중국 공산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비교도 하면서 비교 공산주의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이 이후 통일문제, 북한 문제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이 논문을 보강해서 '모택동의 국제정치사상'(형성사)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한창 일할 때는 기억도 못하는 어렸을 때 경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강보에 쌓여 넘어온 38선을 되짚어 다시 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는 일을 하게 된 것을 보면 결국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나리오는 있는데 본인은 모르고 그 장소에서 그 역할 하는 게 인생 같아요."

"대통령의 대북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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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정세현·황방열의 한통속> 진행자인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과 황방열 오마이뉴스 기자.
ⓒ 권우성

-팟캐스트 방송이 익숙하신 연세는 아닌데, 어떻게 마음을 먹게 되셨습니까. 물론 제가 제안하기는 했지만요(웃음).
"나보다 6살 위인 윤여준 전 장관도 계시잖아요? 우선은 황 기자의 적극적 제안이 있었는데 그건 인간관계 영역이겠구요. 이 팟캐스트를 하기로 한 것은, 박근혜 정부 대북 정책의 문제점을 짚고, 그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분석과 대책, 공직생활의 오랜 습관입니다.

북한은 물론 군사적으로는 적이지만, 현 정부는 북한을 적으로만 봅니다. 입만 열면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통일과정 동반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정책을 펴야 합니다. 먼저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를 보여달라는 조건을 걸고, 내 기준에 맞추라고 하면, 남북관계가 아무리 민족내부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이고 외교인데 이렇게 하면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신뢰를 전제조건으로 거는 게 아니라 협상과정에서 신뢰를 확인해 가야 합니다. 미세한 차이 같지만 이 부분은 남북관계 풀어가는 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77년부터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대통령의 대북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국가 이익과 국제 위상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청취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내보려 합니다. 세금으로 국록을 먹고 살았으니, 국민들께 보고하는 자세로, 현장 경험과 현장에서 닦은 이론을 설명드려서, 국민들의 판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더불어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언론의 남북관계·통일문제 보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옛날에 통일부 기자실에 '북한은 만주벌판이다'라는 농담이 있었습니다. 뭘 버려도 흔적이 안 남는다는 얘깁니다. 북한이 어떻다고 써도 확인이 어려우니까요. 현재 언론의 남북관계와 북한 보도의 편향성이 너무 강합니다. 전문가라는 분들도 마찬가지구요. 정부가 분위기를 조성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을 이렇게 흑백논리, 선악개념으로 끌어가면 안 됩니다. 사상·언론·표현의 자유 속에서 나오는 창의성이 미국 경쟁력의 원천 아닙니까."

"오바마 북 붕괴론 언급, 금융제재 정당화 위한 기초작업"

-최근 현안 하나만 짚어보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군사해결책은 답이 아니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북한 붕괴를 언급했습니다. 북미 관계 개선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아닙니까.
"북한 내부적으로 붕괴되도록 조여들어가겠다는 것은 금융제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융제재가 얼마나 더 세게 들어갈지 모르지만 2005년 9.19 공동성명 직후 금융제재가 가해진 지 1년 뒤에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했습니다. 미국의 자충수였던 겁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통증이 있다 해도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군사적으로 뚫고 나가면서 '미국이 북을 이렇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게 만들려 할 겁니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붕괴할 것인가? 미국과 힘겨루기 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방관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미국만 있는 게 아닙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동의한 유엔 제재는 계속 늘어났지만, 어찌됐는지 북한 경제는 미약하게라도 호전됐다는 것 아닙니까. 2차 대전이후 70년간 국제정치를 끌어온 미국이 북한에 대해 플랜B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비전이 없는 것 아닙니까.

또 미국의 대북정책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우리 국민의 안보불안은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 보수 언론도 이에 대해 생각하고 기사를 써야 합니다. 지나치게 사대적입니다. 보수 언론이 국수적이기까지는 안되겠지만 우리 국익이 아니라 미국의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보수 언론의 패러독스입니다." 

6.15남측위 총회.후원의밤,

"창구 단일화 깨기 위해 배전의 노력해야"6.15남측위 총회.후원의밤, 이창복 의장 연임.원혜영 후원회장 추대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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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31  13: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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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남측위 결성 10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가 30일 한국노총에서 열렸다. 축하떡을 자르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이부영 동북아평화연대 명예이사장,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박남수 천도교 교령, 백낙청 전 상임대표, 이창복 상임대표의장, 김상근 전 상임대표, 함세웅 신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 정권은 3년 밖에 안 남아 있다. 그러나 민족은 앞으로 영원하다. 3년 밖에 안 남은 이 정권에 민족의 문제를 다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이하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30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진행한 ‘6.15남측위 결성 10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서 “이 정권은 모든 통일문제,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정부로 창구 단일화를 획책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6.15남측위는 30일 오후 4시부터 정기 총회를 개최해 이창복 의장의 연임을 결의하고 후원회를 결성해 초대 후원회장으로 국회 남북관계특위 위원장인 원혜영 의원을 추대했다.
  
▲ 이날 6.15남측위 정기총회에서 연임된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의장은 “금년은 분단 70주년, 광복 70주년이다. 또 6.15공동위원회가 조직된 지 10년이고 선언이 발표된 지 15주년 되는 해”라며 “3자(남.북.해외) 간에 공동기획단을 만들어서 열심히 1년 동안 사업을 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또 그 준비를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 의장은 “통일문제는 민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만이 이 남북문제를 전횡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민간은 민간들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것들이 서로 상호 보완되어 가면서 할 때 통일은 더 가까워진다고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깜깜한, 답답한 면이 없잖아 있다”며 “창구 단일화를 깨기 위해서 금년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배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6.15남측위 후원회장을 맡은 원혜영 의원은 “6.15남측위원회 결성 10주년을 뜻있는 모든 국민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인사하고 “국회에서 입법으로 또, 정부 정책에 대한 감독과 견인으로 6.15공동선언 실천하는 일에 역할을 하라는 뜻이겠지만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나도 걱정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 의원은 정부나 여당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권에서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남북관계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면서 “제발 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올해 역할을 해달라 부탁하지만 철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 후원의 밤 행사장은 빈자리도 많이 보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6.15남측위 1,2기 상임대표를 맡았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에서 “연합제와 연방제의 중간이 아니라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중간 쯤, 그 어름에서 일차적으로 (통일)하자”고 합의했음을 상기시키고 “대단히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언이었고, 그런 지혜가 담겼기 때문에 우리가 6.15공동선언을 민족의 헌장으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백 명예교수는 올해 남북 간 공동행사 성사 여부가 불투명한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예단하기 어렵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우리 할 일을 하자”고 말했다.
백 명예교수에 이어 6.15남측위 3,4기 상임대표를 맡았던 김상근 목사는 “6.15선언 실천을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많다”면서 “한민족을 두 개로 쪼개놓고 국토를 분단시켜 놓고 그리고 70년 동안이나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지금도 그냥 움켜쥐고 있는 미국이라는 세력을 어떻게 넘어갈까”라는 과제를 제기했다.
김 목사는 또한 최근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거론하며 “분단이라고 하는 상수를 극복해내는 운동 역시 6.15남측위원회가 넓혀야 될 과제”라며 “부디 힘을 합쳐서 남측위원회가 활동이 폭을 넓혀나갈 수 있는 계기를 꼭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박남수 천도교 교령은 ‘남진원만 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 남쪽 별이 원만해지면 북쪽 강물이 돌아온다)는 경전 구절을 인용하면서 “6.15남측위 10주년을 맞아 누구를 탓할 것 없고 누구에 책임지울 것 없이, 우리들 스스로 남쪽 이웃들이 돼서 남쪽의 별들이 되자”고 당부했다.
  
▲ (사)서울오케스트라가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후원의 밤 행사에서는 설훈 민주당 의원, 이부영 동북아평화연대 명예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축사를 했으며, 서울오케스트라와 팝페라 가수 최의성이 축하공연을 했다.
6.15북측위원회는 축하인사를 보내와 “결성 10돌을 맞이하고 있는 귀 위원회와 각 부문본부, 지역본부 성원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낸다”면서 “북남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라의 평화와 자주통일의 돌파구를 열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앞서, 6.15남측위는 정기총회에 해당하는 ‘6기 1차년도 정기 공동대표 회의’를 개최, 올해 사업계획과 예산을 의결했다.
특히 6.15선언 15돌 민족공동행사와 8.15 70돌 민족공동행사는 물론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와 유니버시아드대회 남북공동응원, 한반도 평화랠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 6.15남측위가 30일 한국노총에서 정기 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사진제공 - 6.15남측위]
6.15남측위는 총회 결과를 담은 ‘6.15남측위 결성 10주년 결의문’을 통해 “새해의 초부터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은 광복 70년을 내세우면서 대화와 관계 발전을 공언하였지만, 그러한 제안과 약속들은 점점 공허한 메아리처럼 빛을 잃어가고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민이 앞장서서 남북관계 변화의 전기를 열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이들은 △비방중상 중단, 군사적 위협행위 중단, 5.24조치 해제와 민간교류 재개 △민족공동행사 성사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농민추수한마당, 여성교류모임, 유니버시아드대회 남북공동응원단 구성 등을 결의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결성 10주년 결의문 (전문)광복과 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의 역사적 해가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대결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동북아 주변국들의 패권경쟁 역시 더욱 격화되고 있다. 광복과 함께 시작된 분단 70년의 역사로 인해 한반도는 아직도 진정한 탈냉전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미 종식과 그에 따른 항시적인 군사 충돌의 위험성 속에서 늘 평화와 민주주의는 위협받아 왔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같은 통일의 대장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 각계각층의 교류와 연대, 남북 양 정부의 협의와 지원 속에서 탄생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민족공동위원회 역시 이러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빛나는 한 페이지로 자리 잡고 있다.
새해의 초부터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은 광복 70년을 내세우면서 대화와 관계 발전을 공언하였지만, 그러한 제안과 약속들은 점점 공허한 메아리처럼 빛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민이 앞장서서 남북관계 변화의 전기를 열어야 할 때이다. 이에 6.15남측위원회는 각계각층의 분출하는 통일에너지로 온 강산이 들썩였던 그 ‘6.15시대’의 주인으로서 광복 70년, 6.15남측위원회 결성 10년을 맞아 온 겨레 앞에 다음과 같이 우리의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
1. 우리는 고비고비마다 남북관계 발전에 초석을 놓아온 지난 10년의 6.15남측위원회 역사를 자랑스럽게 계승할 것이며,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올해를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대 전환의 만들어나갈 것을 온 겨레 앞에 결의한다.
2. 우리는 남과 북이 맺은 통일의 약속들, 7.4 공동성명, 6.15공동선언, 10.4선언을 지키고 실천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것이다.
3. 우리는 상호 비방중상 중단, 모든 군사적 위협행위 중단, 5.24조치 해제와 민간교류 재개 등 남북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전제적 조치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4. 우리는 올해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8.15 광복 70돌을 계기로, 지난 8년간 중단되었던 화해와 평화의 축제마당 <민족공동행사>를 반드시 성사시킬 것이다.
5. 우리는 노동자통일축구대회, 농민추수한마당, 여성교류모임 등 각계의 민간교류를 복원하고, 아울러 광주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 남북공동응원단 구성 등을 통해 다시 한 번 화해와 평화의 기운을 온 강산에 펼쳐 보일 것이다.
6.l5남측위원회는 ‘민’이 주인답게 역할 하는 참된 통일과정을 개척하기 위해, 지난 10년의 우리 활동을 냉철히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더욱 가다듬고 성찰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사상·종교·이념의 모든 것을 넘어 평화와 통일의 한 마음을 일구기 위해 우리 속의 깊은 힘을 쌓아가는 노력이 함께 할 때, 우리의 결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
2015년 1월 30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