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7일 목요일

현실에 악마 있다, 다만 숨어있을 뿐

현실에 악마 있다, 다만 숨어있을 뿐

천정근 목사 2016. 03. 17
조회수 1082 추천수 0
8001700482_20160321.JPG» 테러방지법과 사이버테러방지법은 ‘데칼코마니’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강화하면서도 통제는 불가능하게 한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는 1924년 문단에 데뷔했다. 스탈린 시대 반혁명 회오리에 휩싸여 공개적 침묵을 강요당했다. 1929년부터 발표되리란 기대도 없이, 간경화와 실명 속에, 밀실의 작업에 전념했다. 아내를 통한 구술로 1940년 2월 작업을 마치고 3월10일에 죽었다. 유고는 미발표 상태로 27년이 지난 1967년에야 출간된다. <거장과 마르가리타>(Масер и Маргарита)라는 환상소설이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1930년대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트와 그의 시종들이 출현한다. 볼란트의 흑마술에 모스크바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위조된 공문서들, 우스꽝스러운 해프닝들, 실종된 사람들, 의문의 죽음들. 불가코프가 폭로한 세계는 관료주의의 형식과 이념이 지배하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면이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일상의 이면에는 악마가 숨어 있었다. 악마가 직접 출현하기 전까지, 권력에 줄 대며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 사회적 지위와 명성과 재산, 모스크바 대극장의 흥행 같은 기만은 악마의 장난에 불과했다. 무명의 거장만이 악마를 포착한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기에 악마의 존재도 부정하는 국시에 따라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최근 경동택배 신입사원으로 입사 한 달 만에 숨진 주선우(27)씨 아버지를 인터뷰하러 갔다. 김포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한 수사보고서를 봤다. 제어 불능의 지게차에서 탈출하다 사망한 정황이 담긴 영상을 경찰도 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회사 쪽 주장대로 사이드를 채우지 않고 내려 발생한 본인 과실로 보고돼 있다. 더 큰 난해함은 목격자들의 진술이다. 한 직원은 고인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게차가 저절로 굴러와 덮치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한다. 이 목격의 ‘신비’를 모를 경찰은 없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이런 거다. 이 청년은 애초 김포수하물집하장에서 죽을 신분이 아니었다. 그는 경동택배 사무실에 있어야 했다. 사망 후 급히 합진운송하역 지게차 운전사로 변조된 사연이다. 애초 죽어선 안 될 사람이 죽었고, 죽었기 때문에 새로운 소속이 생겼고, 새로운 신분이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죽을 수 있게 되었고, 죽었기 때문에 죽음은 다시 조작됐고, 조작됐기 때문에 목격자까지 생겼다. 

8001700424_20160321.JPG» (진도=연합뉴스) 여운창 기자 = 16일 오전 8시 58분께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다 사고로 침몰 중인 6천825t급 여객선 세월호에 헬기가 동원돼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2014.4.16 <<독자 제공>

 논란 끝에 테러방지법이 통과됐다. 야당 대표 비서관의 핸드폰까지 사찰된 증거가 폭로됐지만, 결과는 모른다. 환상은 현실 표현이 가로막혔거나 불가능할 때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가령 대한민국의 일상이라는 악마의 장난 이면엔 세월호 참사 같은 초현실이 벌어진다. 무엇이 볼란트의 흑마술에서 우리를 구원해줄까? 세월호가 ‘언터처블한 우상’이 되고 있다는 기독교계의 지성이나 그가 강조하는 ‘쓰레기 안 버리기’ 같은 도덕 캠페인으로 가능할까? 불가코프가 이념과 권위에 기댄 사회선생들의 안일과 치부를 드러낸 이유다. 작가 자신의 분신인 거장과 그의 연인 마르가리타는 어디에 있는가. 전에는 판타지를 싫어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지 못했다.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계시록> 강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판타지를 이해했고 환상이 뭔지 알 것 같다. 미루어 뒀던 <계시록> 설교를 해야 할까? 때마침 이세돌에 대한 알파고의 승리가 인공지능의 미래 인간의 초현실적 비관을 예고한다니. 악마를 깨우치지 못하면 신도 없다.
천정근(목사·안양 자유인교회)

북, 한.미 경고 속 기습 탄도 미사일 발사


합참. 동해상으로 발사 중거리 미사일 추정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18 [07: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이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규탄하며 경고의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18일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해 배경과 미사일 성능에 이목이 주목되고 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조선이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연일 규탄하며 경고성 발언과 군사적 행동 이행의 강도를 높여 가고 있는 가운데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해 주목 된다.

연합뉴스는 합동참모본부의 발표를 인용 “18일 동해상으로 중거리 '노동미사일'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하며 무력시위의 강도를 한 단계 높였다.”고 보도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북이 오늘 새벽 5시 55분께 평안남도 숙천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북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은 약 800㎞를 비행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사거리를 고려할 때 로동미사일인 것으로 추정하고, 이 미사일은 이동식 발사대(TEL)를 이용해 미사일을 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으나 더 발전 된 형태의 미사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로동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2014년 3월 26일 이후 약 2년 만이다.

신문은 로동미사일은 고폭탄과 화학탄을 장착할 수 있으며 최대 사거리가 1천300㎞에 달해 남측은 물론 일본 주요 도시까지 사정권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노동미사일 발사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해왔다며 1990년대에 작전 배치된 노동미사일의 탄두 중량은 약 700㎏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북은 지난 10일 동해상으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 밑에  조선인민군 전략군의 탄도로켓발사훈련을 진행하며 미사일 2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한바 있다.

특별한 '190초 영상'... 나를 지켜주세요


16.03.18 10:26l최종 업데이트 16.03.18 11:57l





여기, 아주 특별한 공연 영상이 있습니다. 짧습니다. 3분 11초입니다. 


(위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youtu.be/mlW1xfj78Zk)
서울 성북구 학생들로 구성된 '안중근 청소년 평화 오케스트라(단장 정경화)'와 '안중근 어린이 합창단(단장 김우섭)'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화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18차 수요시위'에서 가곡 '그네'와 '아리랑' 공연을 하고 있다.ⓒ 권우성
기억하시나요? 박근혜 대통령은 소녀상을 내쳤습니다. 아직 서운함과 분노가 남아 있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이 영상을 퍼날라 주세요. 외국인에게도 친절한 자막이 있습니다. 지상파와 <종편>은 외면하겠지만,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당신의 이메일이 모이면 강력합니다. 이 봄, 민들레 씨앗 같은 소녀의 눈물을 사람들의 가슴에 뿌려주세요. 당신이 미디어입니다.

[공연 현장] 얼음장 같은 청동의 목, 선율로 감싸다

오뚝한 콧날, 앙다문 입술, 주먹 쥔 손, 소녀 눈동자는 처연했다. 영하의 날씨, 그것도 천년 동안 맨발로 앉아있을 기세다. 손바닥을 대면 쩍 달라붙을 것 같은 차디찬 청동 목을 감싼 건 노란 목도리. 소녀가 다가가 목도리와 보라색 모자를 어루만지면서 '평화의 소녀상' 옆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소녀 플루트 연주자가 홀로 일어나 화음을 맞췄다. 잠시 뒤 또래의 소년소녀가 바이올린 줄(현)에 활(bow)을 올려놓고 연주했다. 선율은 차가운 소녀상 곁에 머물고 노래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울려 퍼졌다. 소녀상 뒤쪽의 첼로도 현을 켜기 시작했고, 어린이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합주와 합창을 했다.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사진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지켜봤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지난 2월 17일 서울 중화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주 특별한 공연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도 소녀상처럼 의자에 앉아 가곡 '그네'와 '아리랑' 공연을 보았다. 1218번째 수요집회가 이어졌다.


(위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youtu.be/boWEHyNZktc)

[공연 후] "연주밖에 할 수 없어 미안했다"

이날 공연은 서울 성북구 학생들로 구성된 '안중근 청소년 평화 오케스트라(단장 정경화. 지휘자 이영국)'와 '안중근 어린이 합창단(단장 김우섭)'이 주최했다. 200초 정도의 공연이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졌다. 악기를 연주하고 합창한 어린이 청소년들의 손은 새하얗게 얼었지만, 큰일을 한 듯 얼굴은 상기됐다. 

"할머니들의 얼굴을 보니 안타까웠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연주)밖에 없어서 미안했다." (주재훈. 고등학교 2학년)

"재능 봉사하러 왔다. 할머니들을 기쁘게 해줬다." (김솔. 초등학교 5학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연주로 도와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권경민.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공연하는 동안 방송카메라 8대가 돌았다. 권성민 전 MBC 예능피디(해직 무효 소송중)와 지인들이 자원봉사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공연을 주선했고,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도 거들었다. 자막을 입히는 등 마지막 영상 편집 작업도 권 전 피디 몫이었다. 한 달여간의 공연 준비와 작업 끝에 3분11초 영상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세상에 내놨다.

눈물의 힘을 믿는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서거일이다. 사형 집행일이다. 부끄러운 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쳤지만, 오늘도 소녀상 곁을 지키는 시민들은 많다. 지금까지 400여만 명이 영화 <귀향>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80년 동안 눈물을 흘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힘이다.  

그래서다. 지상파 방송과 보수 종편은 외면하지만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미디어다. 소녀상과 함께한 '190초 오케스트라'를 전 세계에 뿌려 달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시민들이 지난 2월 17일 오후 서울 중화동 일본대사관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18차 수요시위'에서 서울 성북구 학생들로 구성된 '안중근 청소년 평화 오케스트라(단장 정경화)'와 '안중근 어린이 합창단(단장 김우섭)'의 가곡 '그네'와 '아리랑'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권우성

“지금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있다”

대전 찾은 정기섭 개성공단 비대위 대표, 고향민에게 호소
대전=임재근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
승인 2016.03.18  11:20:46
페이스북트위터
  
▲ 17일 대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주)에스엔지 정기섭 개성공단입주기업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전을 찾아 개성공단 중단 사태의 피해 상황에 대해 강연을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대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주)에스엔지 정기섭 개성공단입주기업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전을 찾아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로 입은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피해 현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상임대표 김용우)와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이사장 김병국)가 17일 정기섭 대표를 초청하여 대전광역시NGO지원센터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단체들은 개성공단 중단 사태의 직접 피해자인 개성공단입주기업 대표로부터 개성공단의 의미와 피해실태, 향후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해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을 듣는 강연회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강연 하루 전인 16일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협력업체, 노동자 등 1,000여명이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한 달여 만에 첫 옥외집회를 열고 행진을 진행한 터라 정기섭 대표는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강연장을 찾은 청중들은 개성공단 전면 중단으로 직격탄을 맞은 피해당사자인 정 대표가 강연을 시작하자 정 대표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결정임에도 사전에 협의나 예고나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게 과연 대한민국이 2016년에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놀라웠다.”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에 대한 정기섭 대표의 첫마디였다.
정부는 우리가 ‘보상’을 말 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 '개성공단 중단 날벼락 피해자에게 듣는다’는 제목으로 진행된 정기섭 대표 초청강연회에 80여명의 대전 시민들이 참석해 개성공단 중단 조치로 인한 관심을 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이어, 그는 “사실 그런 결정은 헌법에 정해져있는 규정에도 안 맞는 것이고, 남북협력사업법에 승인을 취소할 때 법적인 절차가 정해져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이라며 불법적인 조치였음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이번 결정은 생계를 심대하게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인도적이고, 정부의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주재원들의 신변안전과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의 임금의 핵개발 전용을 들었지만, 이는 저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르다”며 정부가 왜곡된 발표를 했다며 불편함을 표했다.
또한 “한 두 명의 생계가 걸린 게 아니고 수천수만 명의 생계가 걸린 문제인데, 그것을 법이 아닌 정부의 결정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까지 ‘보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 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며 정부는 피해 입주기업에게 ‘지원’이 아닌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있다”
그는 이어 “원래 기업들은 겁이 많다. 정부가 (기업들한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기업은 어지간해서는 정부에게 끽소리도 못하는데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있기 때문에 어제 임진각에서 집회신고 내고 시위를 했던 게 개성공단이 생긴 이래 기업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북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서면서 여당이 선거에서는 유리할지는 모르겠으나 실제 국민들이 불안하고 내수경기도 엉망이라고 하는데, 자꾸 전쟁위기에 국민들이 돈이나 제대로 쓰겠냐?”며 여당의 태도를 비판하며 평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그는 “우리 경제의 활로가 보이지 않고 있다”며 “여러 가지로 구조적인 한계 속에 남북 경협을 활성화하면 그 만큼 출구가 마련되는 건데 현재는 이념의 잣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가야할 방향과 거꾸로 가고 있다. 내 개인 사업도 큰일이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한테 무엇이 득이 되겠는가?”는 말도 덧붙였다.
현재까지 직접적 피해 규모 8천 2백억 원, 실제 피해는 훨씬 커
  
▲ 정기섭 대표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지금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개성공단 중단조치로 인해 본인뿐 아니라, 모든 근로자들이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비상대책위원회 자체 조사로 현재까지 파악된 직접적 피해 규모는 8천 2백억 원 정도. 하지만 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금액은 2천 몇 백 억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보험으로 보상을 받게 되면, 기업들은 개성공단에 있는 모든 투자를 포기해야만 한다.
“5.24조치 이후 기업들은 필요한 설비를 반입하는 과정에서 신규투자를 못하게 하는 5.24조치 때문에 1억짜리 기계를 500만원으로 신고하여 반입하는 등의 경우도 많았다.”
개성공단이 닫히게 되면서 설비를 회수할 수도 없고, 적정의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고가의 설비를 실제 규모로 신청하면 승인이 안 되기 때문에 줄여서 신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여서 실질적 피해는 더 크다는 것이다.
다 보상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보상의 형태로 받은 것은 한 푼도 없다
“이번 개성공단 중단 조치는 우리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에 지원보다는 보상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포장을 잘해서 엄청나게 지원을 받고, 정부가 보상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상의 형태로 받은 것은 10원도 없다는 것이 정기섭 대표의 말이다.
대출지원을 해준다는 것은 더 큰 빚쟁이로 몰아내는 것이고, 법이 없어 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정부의 대책이라는 것. 이에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지원’이 아닌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에 나섰고, 국민들도 함께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강연의 시작은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정기섭 대표가 강연을 마치자 안타까운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현실과 한반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청중들은 안타까워하며 숙연하면서도 ‘힘내시라’며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DJ, 'MB 악정'을 보고 "이제 우리도…"


[프레시안 books]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김기만 전 청와대 춘추관장
| 2016.03.18 09:25:05



김대중(DJ)을 멀리서나마 처음 본 것은 1971년, 고교 3년생 때였다.

때마침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그가 전주 공설 운동장에서 연설했다. 평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연설장에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단속했지만 극악한 유신 시절, 이미 세상 물정에 관심이 적잖았던 18살 고등학생 몇 명은 슬쩍 교실을 빠져나가 연설장으로 갔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사자후였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87년 9월 동아일보 기자로서 DJ와 다시 만났다. 당시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10월호에 이를 대대적으로 다룰 예정이었다. 이를 알아챈 안기부(국가정보원)는 이 기사를 빼달라고 회유, 압력을 거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급기야 <신동아>를 인쇄하는 동아출판사에 요원들을 보내 봉쇄하고 출간을 막았다. 유례없는 인쇄소 원천 봉쇄인 셈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에 저항해 신문사에서 귀가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며 '안기부 요원 철수'와 '자유로운 출간'을 요청하는 농성을 두 주쯤 벌였다. 결국 안기부는 물러섰고 매달 18일에 발간되던 10월호 <신동아>는 9월 30일에야 발간되었다. 소문이 퍼져서인지 무려 40여만 부가 팔려 우리나라 월간지 사상 전무후무한 판매 기록을 세웠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안기부와 싸우기 일주일쯤 지난 늦은 밤에 당시 DJ가 김진배 의원, 장기욱 의원, 배기선 비서관 등을 대동하고 동아일보 편집국 농성장(세종로)을 격려하려고 방문했다. 당시 농성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던 내가 어찌하다 보니 기자 대표로 DJ 일행과 악수했고, 그의 격려사에 답하는 짧은 감사의 말씀도 하게 됐다.

그 후 11년여가 지난 1999년 3월 나는 무너져가는 <동아일보>를 다시 세워보려고 사주와 싸우다 포기하고 DJ의 청와대에 합류했다. 그분 퇴임 때까지 국내 언론 비서관, 해외 언론 비서관, 춘추관장을 맡아 일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님 뵙고 인사드릴 때 1971년, 1987년 말씀도 드렸다. 인연이라면 꽤 뿌리가 깊은 인연이라고, 그는 파안대소하며 좋아했다.

▲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김택근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최근 출간된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메디치미디어 펴냄)라는 책을 막 읽었다. 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삼인 펴냄) 1, 2권을 DJ 구술을 바탕으로 사실상 썼고 그 뒤 <새벽 : 김대중 평전>(사계절 펴냄)도 썼던 김택근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시인)이 지은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시 김대중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는 것은 세상이 편치 않다는 얘기다. 그가 걱정한 대로 민주주의, 서민 경제, 남북 관계의 위기가 오지 않았는가?"라며 "그가 다시 돌아와 우리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유산인 그의 말들 속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그를 아무 복선 없이 불러내 보자는 데 동참했다"고 밝혔다.

용기, 도전, 지혜, 인내, 성찰, 평화, 감사의 7장으로 나누어 DJ가 남긴 대표적인 어록을 소개한 뒤 저자가 자서전과 평전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직접 들었던 육성과 모든 자료를 동원해 그 말의 의미와 배경, 오늘에 살릴 지혜를 설명하는 형식이다. 

DJ에 관해서라면 알 만큼 안다고 여겼던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여럿이다. 이명박(MB)의 악정을 보며 "이제 우리도 내각 책임제를 할 때가 되었다"라고 토로했다 할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는 YS(김영삼)에 대해 "부럽지는 않지만 대단하다"고 토로했다는 것 등이다. 서거 1년 전부터는 잠자리에 들기 전 이희호 여사와 '고향의 봄'이나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아내와 윷놀이를 했는데 세 판 연속해 져서 30만 원을 잃은 적도 있다는 것도 그렇다. 

"내 몸의 반이 부서진 것 같다"는 말씀의 배경도 가슴을 때린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장례 행사 때 김대중은 주최 측 요청에 따라 '추도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정부 측에서 읽지 못하게 해 공개되지는 않았다. 저자는 김대중은 추도사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김대중의 그 절절한 심정을 전한다. 

"서거 소식을 듣고 나는 '내 몸의 반이 부서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노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것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거했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안타깝게도 김대중의 병세는 그 이후 급속히 악화되었고, 석 달 만인 그해 8월 역시 서거한다. 

김대중은 서거 7개월 전인 2009년 1월의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에 일시적인 반동은 있을지라도 완전한 후퇴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그런 믿음에 동의하기 어려운 오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겪었던 격동의 파노라마 같은 인생을 생각해볼 때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DJ가 남긴 불멸의 유산인 그의 어록을 찬찬히 음미해 볼수록 그의 말과 글의 원천은 독서광에 가까웠던 그의 책 읽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대중은 5년 반의 감옥 생활 동안 6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학, 철학, 신학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된 넓고 깊은 책 읽기였다. 

대학을 다니지 못한 김대중에게 감옥은 책 읽기와 깊은 사유의 대학이었다. 기자들이 "받아쓰면 그대로 명문이 된다"고 말하는 김대중의 성명이나 연설, 그리고 논리정연하고 호소력 있는 글과 특히 대구법을 잘 활용하는 뛰어난 조어(造語) 능력은 모두 엄청난 독서량과 잘 정리된 사유에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MB 정부이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청와대 정정길 비서실장이 김대중을 찾아 의견을 구한다. 이때 김대중은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검토하되, 망원경같이 넓고 크게 사고하라"고 충언한다. 사건은 현미경으로 면밀히 보되, 남북 관계 전반은 망원경으로 보고 대처하라는 것이다. 대구법 조어의 절정을 보는 듯하다.

이번 책에서 또 하나 뚜렷이 느껴지고 인간적으로도 감동이 큰 것은 아내 이희호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2008년의 한 일기에서 김대중은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 없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라고 토로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아내를 더 찾았던 듯하다. 

잘 알려졌듯이 김대중은 1962년 이희호와 재혼했다. 상처(喪妻)하고 두 아들을 둔, 더욱이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정치 활동 금지법'에 묶여 있던 39살의 정치 룸펜의 청혼을 두 살 연상으로 당시 최고의 여성 지식인(YWCA 총무) 이희호가 선뜻 받아준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인간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의 삶은 이희호를 아내로 맞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확신한다. 실제 김대중은 사형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나 1982년 미국으로 가 활동할 때 곳곳의 연설에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내 덕분입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제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희호의 남편으로 이 자리에 서 있고 그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2년 5월 유엔 아동 특별총회가 유엔본부에서 열렸다. DJ가 기조 연설을 하도록 예정되었으나 고관절을 다쳐 거동이 힘들게 되었고, 이희호 여사가 대신 연설하도록 조정되었다. 내가 당시 청와대 공보 비서관으로 수행진을 이끌고 기자단과 동행해 유엔본부에 갔다. 귀국 항공기에서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두 분의 연애담과 청혼 및 승낙의 순간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일부 알려진 대로 가슴 뭉클한 러브스토리였다. 이희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주었다. 

"그 똑똑하고 인간적이며 꿈이 큰 김대중 씨를 그대로 방치하면 망가질 것 같았어요. 내가 반려가 되어 서로 끌어주면 틀림없이 위대한 정치가가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파고다 공원에서 그의 청혼을 두말없이 받아들었지요." 

비화 한 토막을 공개하자면 2002년 5월 10일은 김대중, 이희호 결혼 40주년 기념일이었다. 유엔본부 연설을 끝낸 이 여사에게 당시 수행진과 기자단 공동 명의로 간단한 글과 함께 결혼 축하 장미 40송이를 건넸다. 이 여사는 귀국하자마자 이 글과 장미꽃다발을 김대중에게 전했다. 김대중은 나중에 이때 크게 감동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1993년 육필 메모 하나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끝낸다.

"우리의 정치, 아니 이 나라를 망치는 큰 책임자는 언론이다. 그들은 막강한 힘이 있다. 바꿔볼 길도, 고쳐볼 길도 없다." 

23년 전 육필 메모의 일갈을 오늘 빈사 상태인 우리 언론에 대입할 때 단 1%라도 달라진 게 있는가? 가슴이 아려온다. 그분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