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6일 월요일

"박근혜도 못 들어준 재벌 숙원, 문재인 정부가 왜?"

전성인 "은산분리 완화, 문재인 공약 뒤집은 유령정책"
2018.08.07 12:23:08




청와대·여당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정책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금융은 의료와 함께 재벌의 숙원 사업"이며 이를 수용한 정부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뒤집기"라는 비판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실과 정의당 정책위원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연대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은산분리 규제 완화의 문제점 진단'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고, 토론자로는 백주선 민변 민생경제위원장(변호사),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회계사), 정명희 금융산업노조 정책실장 등이 참여했다.  

전성인 교수는 발제에서 "대통령도 대선 공약에서 안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말 바꾸기'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대선공약집 120쪽을 보면 '금융산업 구조 선진화 추진' 항목에 '인터넷전문은행 등 각 업권에서 현행법상 자격요건을 갖춘 후보가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라고 돼 있다"며 "업계가 로비를 했겠고, 반대 논거도 있었을 것이다. 표를 얻기 위해 그냥 다 들어주자며 만방 허용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현행 제도 유지'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이 정도 선이 우리 당과 새 정부가 취할 스탠스'라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또 "작년 7월의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작년 말의 '2018년 경제정책 방향', 올해 7월 18일의 '하반기 이후 경제여건 및 정책방향'에는 '인터넷은행'이나 '은산분리'라는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정부 문건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정책'을 대통령이 나서서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왜 지금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느냐. 금융위 외의 다른 부서에서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게 지난 6월 27일, '준비 부족'으로 몇 시간 전에 대통령이 취소한 규제혁신회의 때 처음 공식 어젠다로 올라갔다"고 지적했다.

그 근거로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은산분리 완화, 이번에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는 <머니투데이> 보도를 들며 "정책 방향을 다 정해놓고 무슨 토론을 하느냐. 그래 놓고 반대하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거나, 반대하는 의원 3명은 (금융위 관할 상임위인) 정무위원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고 비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해당 보도에 대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그런 발언을 하신 기억이 없다"고 부인하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전 교수는 '말 바꾸기'라는 차원을 떠나,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 완화는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으로 이어갔다. 그는 "(이 정책을) 왜 하는지 정확하게 서술된 정부 공식 문건을 찾기가 어렵다. 언론 보도를 통해 관계자 말이라며 슬금슬금 뒷구멍으로 나오는게 3가지이고 최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말한 게 1가지 더 있다"면서 "(관계자 말은) '첫째, 4차 산업혁명 활성화를 위해 인터넷은행이 활성화돼야 한다. 둘째, 고용이 는다. 셋째, 중금리 대출이 활성화된다'는 것이고, 홍 원내대표 말은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규제를 완화해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하지만 "규제 완화를 한다고 천국이 오느냐"며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마다 조목조목 반박했다. '4차 산업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는 "(인터넷전문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은 빅데이터 안 하고 블록체인 안 하느냐. 오히려 기존 은행의 IT 투자가 훨씬 어마어마하고, 은행이 가진 빅데이터는 온 나라가 탐내는 '깨끗한 정보'다. 4차 산업혁명은 인터넷전문은행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용이 는다'는 주장에는 "아무리 300인의 전사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케이뱅크는 300명 정도의 회사다. 300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고용 촉진의 첨병이 될 수 있느냐"고 지적하며, 또한 "작년처럼 모 은행이 '우리 이제 지점 다 없애고 인터넷은행 하겠다. 비대면 영업만 하겠다'며 사람들을 다 자를 가능성이 없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비대면 거래가 늘면 그 자체는 고용이 늘지 않지만 파급 효과로 고용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는데, 경제학의 기본은 1차 효과가 언제나 파생 효과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파급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중금리 대출 활성화' 주장에 대해선 "지난 1~2년간 인터넷은행의 (대출 영업)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드러났다"고 한 마디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사내유보금 투자 유도' 부분에 대해 그는 "은산분리 완화를 해 주고 사내유보금을 받아쓰자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며 "그게 갖다 쓸 수 있는 돈인지 없는지도 토론해봐야 하겠지만, 그 돈은 대부분 하청업체 기술 탈취나 납품가 후려치기로 조달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쓰더라도 하청업체를 위해 써야지, 그게 왜 은산분리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 교수는 이어 은산분리 완화에 대한 '보완 장치'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했다. 전 교수는 "대기업 대출, 산업자본 대출, 대주주 대출을 막았으니 사금고화 우려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원래 소유 규제는 개별적 행위규제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매우 뭉툭한 규제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 규제를 완화하는 근거라며 '한두 개 막아놨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규제의 ABC를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했을 때의 장점은 단지 '급전 유통'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은행이 가진 막대한 데이터와 예금통화를 찍어내는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 면에서도 "은행은 독과점 사업이고, 최근 선진국에 비해 총자산 대비 수익이 낮디고는 하지만 일정 궤도에 들어가면 수익이 매우 안정적"이라며 결국 재벌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고 우려했다.  

전 교수는 이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왜 문재인 정부가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케이뱅크의 부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거나 △케이뱅크 대주주인 우리은행의 지주적격성 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는 정권교체 후 감사원 감사에서 케이뱅크 인허가에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등 금융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그는 문 대통령에 대해 "은산분리 완화 시도를 즉각 중지하고, 케이뱅크 인허가 및 은행법 시행령 삭제 연루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고 감사원 감사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자가 있는지 조사하며, 케이뱅크는 예금자·직원의 정당한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케이뱅크 '정리' 방안에 대해서는 KT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우리은행이 100% 소유하는 자은행으로 인수하는 방안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다른 발제자인 박상인 교수도 "문재인 정부 2년차에 이런 세미나를 하고 제가 발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참담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추진했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된다며 반대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 논리적 설명 없이 입장을 바꿔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박 교수는 금융위원회가 시민단체의 질의에 대해 보낸 공식 답변에서 "은산분리의 기본 취지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한다. 은산분리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재벌들이 제조업에서의 경쟁력을 잃고 있으면서 눈독을 들이는 게 의료와 금융"이라며 "그 숙원 사업의 총대를 맨 것이 지난 정부(박근혜 정부)인데, 지난 정부도 못 한 것을 하겠다는 게 문재인 정부"라고 한탄했다. 그는 "인터넷전문은행 규제 완화를 통해 낼 수 있다는 고용효과나 경쟁력 강화, 핀테크산업 등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자신이 있다면 언론을 통해 프로파간다만 하지 말고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가 공개 토론을 하자"고 말했다. 그는 2013년 동양그룹 사태의 사례를 들며 "은산분리 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고,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카카오뱅크는 가계신용대출에서 급속 성장했는데 케이뱅크는 뚜렷한 실적을 보여주지 못해 자본 확충에 실패했다. 인터넷전문은행 성공은 은산분리와 무관하다는 게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의 사례에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또 "가장 핀테크 기술이 발전했고 인터넷전문은행을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도 은산분리를 하고 있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나라"라며 "규제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직격탄을 쏘았다.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도 토론을 통해 "케이뱅크가 증자에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분 비율에 비례해 기존 주주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정부의 인허가 사업에서, 출범하자마자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은 애초의 심사과정이 졸속이었다는 것이다. 인가 시점으로부터 2년이 경과 되지 않아 전체가 삐걱거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결국 케이뱅크가 은행업 인가 과정에서 자금조달 방안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제출했거나, 금융위원회가 심사를 부실하게 진행한 것"이라며 "(즉)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은산분리 규제와 무관하고, 현재 금융위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주장은 자신의 부실한 행정을 덮기 위함일 수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어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만났고 오늘은 은산분리 규제완화 당정협의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과 경제 정의마저 완화시키는게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이 쏠린다"고 지적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권영준 경실련 공동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데, 최근 자꾸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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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도 30도 넘겼다…고온 현상이 보내온 옐로카드

등록 :2018-08-07 11:35수정 :2018-08-07 13:04


북반구 남반구 곳곳에서 최고기온 경신 릴레이…
광범위한 고온 현상이 보내는 경고 주목해야
“북극권 제트기류(대기 상층부에서 띠 형태로 빠르게 이동하는 바람)가 약해진 가운데 북반구 일대에 걸쳐 강력하게 형성된 고기압이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면서 겹쳐져,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열돔 현상’이 발생했다. 북반구 전역을 강타하고 있는 기록적인 폭염이 장기화하면서….”(영국 일간지 <가디언> 7월13일치)
덥다. 왜 더운 건지 설명을 듣는 것도 숨이 찬다. 우리만 더운 게 아니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까? 북극권의 최고기온도 30도대에 들어선 터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밤 최저기온이 42.6도
올해 6월 시작된 불볕더위가 두 달여 세계를 휘감고 있다. 지구촌 북쪽 반구가 아주 뜨겁다. 폭염과 관련한 기존 기록이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다. 6월28일 아라비아반도 남동부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남쪽 바닷가 어촌 마을 쿠리야트에선 기이한 신기록이 세워졌다. 낮 최고기온이 높았던 게 아니라, 밤 최저기온이 42.6도를 기록한 게다. 세계기상기구(WMO)의 공인을 받진 않았지만, 관측 이래 최고 기록이다.
7월5일엔 알제리의 사하라사막 인근에 인구 19만 명이 사는 도시 우아르글라에서 낮 최고기온이 51.3도까지 치솟았다. 알제리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서 관측 이래 최고치다. 현재까지 지구에서 기록된 낮 최고기온은 19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에서 측정된 56.7도다.
위도를 조금 높여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남부 코카서스 지방의 내륙국가인 아르메니아는 평균 고도가 해발 990m에 이르는 산악 지대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선 7월 들어 수은주가 42도까지 치솟는 등 일주일 동안 40도가 넘는 이상고온현상이 발생했다. 예레반의 예년 7월 평균기온은 26.4도에 그친다. 아르메니아에선 올해 2월(19.6도)과 3월(28도)에도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서유럽은 5월 이후 최악의 가뭄과 폭염을 동시에 겪고 있다. 예년 6월 평균기온이 20도를 넘지 않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선 6월28일 31.9도를 찍었다. 가뭄이 심각해지면서 영국 정부는 북서부 지방 일대에 이른바 ‘호스 파이프 밴’(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세차하거나 식물에 물을 주는 등의 행위 금지) 조처를 내렸다.
가뭄으로 메마른 산과 들판은 ‘성냥갑’으로 변해간다. 스웨덴에선 7월 한 달 동안에만 산불이 60건 이상 났다. 이 가운데 10여 건이 북극권에서 났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시베리아 북부지역과 북극해 지역에서도 평년 기온을 4~5도 웃도는 고온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7월엔 한때 최고기온이 32도를 넘기도 했다.
북아메리카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미국 서부 일대에서도 7월 한 달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운 콜로라도주와 캘리포니아주에 피해가 집중됐다. 캘리포니아주에선 최고 48도에 이르는 폭염이 주 전역을 강타했다. 역시 기상관측 시작 이래 최고 기록이다.
밀 가격에 원전 가동까지 폭염의 공습
두 달 넘게 이어진 폭염과 가뭄이 불러온 사회·경제적 파장은 이미 구체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 뉴스 매체 <블룸버그> 통신은 7월25일 “폭염과 가뭄으로 유럽 전역에서 생산량 감소가 불가피해지면서, 밀 선물 가격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실제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에선 6년 만에 처음으로 생산량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올해 1월16일 1t에 166.3유로였던 파리상품거래소 밀 선물값은 7월25일 198.8유로까지 올랐다. 밀값 폭등은 또 다른 파장을 부른다. 1억 명에 가까운 인구에게 정부가 빵값을 보조하는 이집트에선 식량값 폭등을 염려하고 있다.
전력 부문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 파리의 7월 평균기온은 지난 30년 평균치인 20도 안팎보다 5~10도나 높았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자력발전소 58기에 의존하는 전력 수출국이다. 이상 고온에 따라 강물의 수온도 높아지면서, 이를 냉각수로 쓰는 원전 가동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프랑스의 전력 생산량이 줄어들면 주변 전력 수입국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기적인 폭염으로 냉방용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공급 가격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다. 폭염의 연쇄반응이다.
북반구뿐이 아니다. 현재 겨울철인 남반구에서도 이상고온현상이 목격된다. 7월5일과 6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기온이 25도까지 치솟았다. 기상관측을 시작하고 159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이 이틀 연속 기록됐다. 사실 이상고온현상은 지난해부터 지구촌 차원에서 꾸준히 나타났다.
지난해 4월 최고기온이 50.2도를 기록한 파키스탄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4월’을 보냈다. 5월엔 파키스탄 투르바트의 기온이 53.5도를 기록하며, ‘5월 지구촌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6월엔 이란 아흐바즈의 기온이 역시 역대 최고치인 53.7도를 찍었고, 7월엔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수은주가 46.9도까지 치솟았다. 또 10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일대에서 기온이 42도까지 오르는 등 미국 전역에서 10월 최고기온 기록이 잇따라 바뀌었다. 또 지난해 11월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사흘이나 최고기온이 42도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장 기온이 높았던 2016년의 폭염은 지구온난화와 함께 강력한 엘니뇨(지구에서 태양에너지 유입이 가장 많은 적도 부근 열대 동태평양과 중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은 상태로 몇 달씩 유지되는 현상)가 결합돼 생긴 현상이었다. 올해는 상대적으로 기온을 낮추는 라니냐(엘니뇨의 반대 현상)의 영향 아래 있음에도 예년 평균기온을 5도 이상 넘기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독일의 소리>(도이체벨레)는 7월18일 이렇게 전했다. 실제 세계기상기구 자료를 보면, 올해 전반기 6개월은 라니냐 현상이 발생한 해 가운데 역대 가장 기온이 높았다. 올해 말 라니냐가 물러가고 엘니뇨 현상이 시작되면, 내년엔 기온이 더욱 올라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서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7월13일치에서 마이클 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지구과학센터 소장의 말을 따 이렇게 경고했다.
엘니뇨 오면 내년 기온 더 오를 수도
“북반구 전역에 걸쳐 폭염이 발생한 것은 규모 면에서 분명 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일이다. 특정 지역의 최고기온이 높게 나온 게 문제가 아니라, 고온 현상이 이처럼 광활한 지역에서 관측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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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소매 걷은 당·정·청 "7·8월 누진제 한시 완화"

18.08.07 11:59l최종 업데이트 18.08.07 12:08l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남소연
"이번 주 각 가정에 도착하는 419만 가구의 7월 고지서를 분석해봤다. 지난해보다 전기요금이 감소하거나, 증가 금액이 1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가 89%였고, 5만 원 이상 증가한 가구는 불과 1% 수준이었다. 지난해 7월보다 폭염 일수가 2.5배 늘었는데 마음 놓고 냉방하지 못하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기 요금 대책 당·정·청 논의에서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안타깝다"라며 서두에 꺼낸 말이다.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전기요금 걱정에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없는 대다수 가구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당·정·청의 긴급 처방은 '7·8월 누진제 완화'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 7·8월 두 달 간 누진제 한시적 완화 ▲ 사회적 배려계층 전기 요금 복지 할인 규모 7·8월 두 달 동안 추가 30% 확대 ▲ 출산 가구 할인 대상 1년 이하 영아에서 3년 이하 영유아 가구로 확대 등 총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출산 가구 할인 대상 추가 지원... "정부 재정으로 조달"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남소연
누진제 완화의 경우에는 3단계 누진 구간 중 1단계(200kWh에서 300kWh)와 2단계(400kWh에서 500kWh)를 100kWh씩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정부에서 이를 최종 확정하면 요금 인하 효과는 총 2761억 원으로, 가구당 평균 19.5%의 인하 효과가 기대된다"라고 전망했다.

냉방 사각 지대에 있는 사회적 배려 계층에 대한 특별 지원 대책도 내놨다. 김 의장은 "최대 68만 가구로 추정되는 취약계층에 대한 대책, 출산 가구에 대한 추가 지원 대책도 포함될 예정"이라면서 "출산 가구 할인 대상을 확대해 46만 가구, 매년 250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재원 조달은 정부 재원을 통해 지원할 계획이다. 김 의장은 "당은 폭염으로 인한 국민의 불편을 한시라도 덜기 위해 정부에 관련 절차를 신속하게 마무리할 것을 당부했다"라면서 "누진제 한시 완화와 사회적 배려 계층 지원 대책에 대해서는 재난안전법 개정과 함께 재해대책 예비비 등을 활용해 정부 재정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한시 처방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듯, 중장기 대책도 언급했다. 다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김 의장은 "당·정은 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체계 전반에 대한 개선은 중장기 과제로 추진하기로 했다"라면서 "아울러 주탁용 계시별 요금제 도입, 스마트미터 보급 등의 추진 상황도 점검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관련 기사 : 문 대통령의 '누진제 완화' 지시, 민주당은 환영했지만...)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남소연
"재킷 벗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당·정·청 관계자들은 회의 시작에 앞서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8월 국회의 폭염 대비 입법을 강조했다. 홍 원내대표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폭염을 상시 대비해야 한다. 폭염과 한파도 특별재난으로 선포해 피해 예방을 지원하는 법 개정을 검토할 것이다"라면서 "가능하면 8월 중 입법을 완료해 좋은 결과를 마련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회의는 당·정 논의로 공지된 바와 달리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또한 참석해 당·정·청 회의로 진행됐다. 윤 수석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문 대통령도 전기 요금과 관련해서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기 요금 걱정 때문에 냉방기를 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발생할 일이므로 차제에 전기 요금 누진성을 포함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라고 전했다.

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08/06 [22: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일 김동연 부총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사진 : 기획재정부)     © 편집국

6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기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바이오 산업 규제 완화 등을 정부에 요청했고김 부총리는 몇 가지 제안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휴가 복귀 후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이를 가로막는 규제부터 과감히 혁신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 부회장을 직접 만난 바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는 논평을 통해 우려를 표했다.

민주노총은 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라며 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김 부총리가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기록한 것을 두고 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이며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질렀다고 반박했다.

민주노총은 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며 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며 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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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재용을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오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이재용을 만났다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다구속되었다가 2심 재판부의 이재용 살리기 적폐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대법 판결을 앞두고 있는 국정농단 범죄의 공범이다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고 한다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다뿐만 아니라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지른 것도 드러났다대한민국 경제수장이 재벌총수에게 바치는 낯부끄러운 헌사(獻詞).

이재용은 김동연의 방문에 맞춰 원래 100조 원대 투자계획을 발표하려했으나 청와대의 투자구걸’ 논란이후 발표가 연기했다고 한다그러나 단순한 투자구걸 문제가 아니다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다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 살리기 행보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오늘 김동연이 이재용과 외쳤다고 하는 혁신과 성장구호는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라도 재벌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극명한 구호다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가 위태롭다.

2018년 8월 6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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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처녀 유인납치.. 국정원과 정보사 합작품

기무사 ‘계엄 문건’에 ‘국가테러’가 생각나는 이유
강진욱  | 등록:2018-08-06 17:13:24 | 최종:2018-08-06 17:33:5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6년 4월 북한식당 여종업원 집단 탈북이 결국 우리 정보기관이 기획한 유인납치극으로 결론이 날 모양이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궁색한 변명을 달아서… 때마침 대통령이 국군기무사령부를 해체하는 수준으로 재창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가 죄에 합당한 벌이고, 유사 범죄의 재발을 막는데 충분하기를 바라지만…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역사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 이 나라의 3대 정보기관이라 일컬어지는 이들 조직은 평소 ‘적’으로부터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한다. 또 한편으로는 ‘적’을 상대로 - 또는 겨냥한 - 다양한 ‘공작’도 벌인다.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럽고 끔찍한 공작을 저들은 “국가를 위하는 일”로 여긴다.
북한 처녀들 납치극에 가담한 정보사 요원이 표창을 상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했으면 그랬을까? 동족에 대한 적개념이 지나쳐 국가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하긴 38선을 넘어가 북한 군인들을 살상하고 주민들을 납치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국회에서 떠벌리는 선배도 있었으니… 생사람을 패고 찢어 간첩(단)을 만들어 표창을 받은 이는 또 얼마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내력이 있다. 해방된 조국 남녘을 점령한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우익반공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백색테러를 부추긴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우익을 자처하며 좌익을 살상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여기던 무자비한 테러리스트들을 정보기관으로 불러들였고, 미국을 뒷배로 하는 이 나라 반공 우익정권들은 저들의 만행을 방조했다.
이승만 정권 .. 박정희 정권 .. 전두환 정권 .. 노태우 정권 .. 정통성 없는 부도덕한 정권이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내부의 적’을 - 만들고 - 살상하는 국가테러리즘을 활용했고, 그 부정한 정권에 기생하던 권력의 개들은 그런 행위를 ‘국가를 위한 일’로 둔갑시켰다. 자국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살상하는 테러를 저들은 ‘내수공작’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협박하거나 두들겨 패고(동아방송, 동아일보 간부 테러), 그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법정에 난입해 법조인들을 겁박하고, 출근길에 나선 신문사 사회부장이 사미미칼 테러를 당했고(1988.8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테러), 한밤에 사회단체 사무실에 침입해 잠자던 여인을 강간하는 테러를 자행했다(1988.8 우리마당 사건).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와 정보사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와 공모해 벌인 짓이었다.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특정해 납치 또는 살해한 일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1973.8.8),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 박정희가 죽기 19일 전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살해(1979.10.7) ... 이들 사건 모두 자∼랑스런 대한민국 정보기관 공작팀의 소행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처럼 정권 또는 권력자에 반항하거나 도전하는 이들을 살상하는 국가테러는 더 끔찍한 테러로 진화했다. ‘적을 겨냥한 공작’은 더 비열하고 악랄해졌고, 급기야 자국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며 그 책임을 ‘적’에게 뒤집어씌우는 공작이 시작됐다. ‘북괴의 테러’로 각인돼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1983.10.9)와 KAL 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이들 두 사건의 징검다리 격인 김포공항 폭탄 테러(1986.9.14)도 마찬가지다. 중국 내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은 이런 ‘해외공작’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과거의 끔찍한 국가테러리즘의 계보를 잇는 사건들에 비하면 훨씬 점잖고 한편으로는 애교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테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게 다가 아니다. 그 ‘국가테러 리스트’에 또 하나의 사건이 추가돼야 한다.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이 벌어진지 10개월 뒤인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김정남 살해 사건’.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통일부, 얼치기 국회의원들, 소위 북한 전문가들, 패널들, 기레기들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김정은의 만행’이라고 침을 튀기며 떠벌리던 사건. 누구 짓일까?
                                                  

방첩, 첩보, 침투, 공작.. 이 나라 정보기관의 정체성
이 나라 정보기관은 곧 ‘소위 국가라는 것’ 그 자체이며, 그 정보기관의 역사는 분단체제의 공고화 과정 그 자체다. 이 나라 정보기관은 ‘적’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분석 보다는,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빼오고 ‘적’을 겨냥한 공작을 벌이는데 역점을 뒀다. 정보 수집이나 분석은 이 나라의 ‘큰집’인 미국의 몫이었고, 우리네 정보 조직은 저 ‘큰집’에서 시키는 허드렛일을 했던 것이다. 
그 역사는 1945년 9월 9일 미군 24군단 소속 정보부대원들로 구성된 방첩부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우리 땅에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이 1946년 1월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를 설치했다.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과 기무사령부(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를 낳을 씨가 이때 뿌려진 것이다.
이 국방총사령부 정보과가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된 뒤 이 정보국에서 정보 분석을 주로 하던 부서는 육군정보대(MIG)로 확대돼 오늘날의 국가정보원에 이르고, 첩보 및 공작을 맡는 2과와 방첩을 담당하는 3과가 생겨 각각 정보사령부와 기무사령부의 모체가 된다. 아마도 육군정보대 (국가정보원의 모체)에 이어 특별조사과(기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고, 이어 정보국 2과(정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면서 특별조사과를 3과로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2과와 3과 역시 미국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조직이다. 미군 CIC(방첩부대) 제971 파견대(제224CIC가 제971CIC 파견대로 교체됨)가 1948년 5월 각 연대 정보 장교 및 간부 33명을 선발해 육군본부 정보국에 설치한 것이 3과(특별조사과)다. 이름하여 육군정보국 방첩대(CIC). 장차 보안사령부를 거쳐 기무사령부가 되는 조직이다.
정보사령부의 모체인 육군본부 정보국 2과는 1950년 7월에 생겼다. 해방 직후, 특히 6.25 전후 미군이 월남자들을 첩자로 양성한 HID 북파공작원들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출발했다. 1951년 3월 첩보와 공작을 담당하던 2과가 독립해 첩보부대로 독립하며, 1972년(또는 1970년대 초) 육군정보사령부로 정식 발족하고, 육군정보사령부는 1990년 해·공군 첩보부대와 합쳐져 국군정보사령부로 통합돼 오늘에 이른다. 1951년 3월 독립한 첩보부대 대장이 이철희(李喆熙)였다.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공작 담당 차장으로 일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총괄 지휘했고, 1982년 어음 사기 사건의 주인공 장영자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나라 공작정치의 역사는 이처럼 웅숭깊다.
육군본부 정보국 1.2.3과는 1945년 해방 이후 이 땅 남녘을 점령한 미군이 이승만의 극우반공 체제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었다. 미 군정은 북녘의 김일성 체제에 반감을 가진 서북청년단 등 월남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북파공작을 본격화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남한 각지에 보내 좌익계를 탄압하고 살상하는데 활용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북선 분국 책임자 김일성 씨”(동아일보 1946.1.13 / 이 시기 도하 신문에는 “씨”보다 “장군”이라는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다)와 김책·강양욱 등 북측 요인들을 겨냥한 테러가 빈발한 이유이다. 또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획책하는 분단체제 구축에 방해가 되거나 이에 저항하며 ‘남북협상’이니 ‘합작’ 또는 ‘통일’을 입에 담는 인사들이 하나 둘 살해됐던 이유이다.
육군정보부 1.2.3과에는 서북청년단이나 백의사 등 극우반공 조직의 간부급 인사들이 상당수 편입돼 있었다. 이들이 과거 자신들이 부리던 수하들을 시켜 좌익을 겨냥한 백색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이 육군정보국 방첩대(미 CIC 분견대) 소속이었고 서북청년단 간부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근로인민당 당수를 살해한 자들은 백의사 소속이었다.
2004년 9월, 주한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일명 ‘실리보고서’ 1949.7.1)가 공개된 바 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국 CIC 요원이자, 우익 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과 김창룡 특무대장 / 서울 통의동(옥인동)에 있던 특무부대 본부 : 1955~1971년)
방첩을 전담하기로 한 방첩대가 직접 국내 인사를 살해하는 공작을 벌인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보안사가 정보사 요원을 시켜 일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작업방식(modus operandi)이다. 방첩 전문 보안사와 공작 전문 정보사 간 공모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 및 사회단체인을 겨냥한 국가테러 때도 반복된다.
정보와 첩보 및 방첩 업무를 보는 육군정보국 1.2.3는 6.25 전쟁을 계기로 각각 별도 조직으로 분화한다. 6.25 전쟁 발발 4개월 뒤인 1950년 10월 21일 육군정보국 3과인 육군정보국 방첩대가 먼저 육군 특무부대로 승격된다.
안두희가 체포돼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보살피던 김창룡은 6.25 전쟁 발발 직후 육군정보 정보국 특무대장이 돼 ‘아무나’ 좌익의 누명을 씌워 살상하며 이승만의 극우반공체제를 지탱했다. 전쟁 전후 시기, 제주 4.3 사건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미군의 방조 아래 미군의 지휘를 받는 특무대가 주도했다.
中情의 전신 이후락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우익의 전위로 이승만 시대를 호령했던 육군특무대는 4.19 의거 직후 이승만과 함께 사라지고, 1960년 7월20일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된다. 그리고 몇 달 뒤 미국은 중앙정보연구위원회(회장 이후락)를 만든다. 국가정보원의 모체다. 더럽고 궂은일 하는 조직에 육군방첩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정보 업무를 전담하는 별도 조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을 계기로 특무부대와 첩보부대가 독립해 3분할됐던 정보조직은 이승만 체제가 무너지고 박정희 체제가 들어서기 전에 또 한 번 재정비된 것이다. 미국이 이 나라의 새 권력 창출을 위해 정보조직을 재정비한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부추기고 있었다. 에버레디 플랜(EverReady Plan)이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 말기 미국이 중앙정보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은 미국이 쿠데타를 도모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 땅에 정보부의 모체를 만들 때 활용한 이가 바로 박정희 시대 중반인 유신정권 창출 때 까지 박정희를 모셨던(?) 이후락이었다. 
미국이 왜 이후락을 정보책임자로 만들려 했는지는 그의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43년 일본 항공기정비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해 귀국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말 미국이 세운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4개월 만인 1946년 3월 대위로 졸업하면서 임관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본 정보국장 김종필의 회고에 의하면, 이후락은 주로 북파공작 및 첩보 조직인 HID 업무를 총괄했다 한다. 당시 HID는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 뒤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인 1955년 2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2년 6개월간 주미대사관 부(副)무관으로 일하며 정보 업무와 기술을 익혔다. 그 기간 “한-미간 군사적 유대를 강화한 공로로” 1958년 1월 미국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후락은 사실상 미국의 ‘자산’(asset)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미대사관 부무관 일을 마치고 1957년 10월 귀국한 이후락은 국방부 ‘79부대장’으로 군에 복귀한다. ‘79호실’로도 불렸던 이 제79부대는 미 CIA 한국지부 격이었다. ‘79’는 이후락의 군번 10079에서 따왔다. 미국은 얼마 뒤 이후락을 미 CIA 한국 지부이자 장차 한국 중앙정보부의 모체가 되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으로 만든다.
이때부터 이후락은 ‘79부대장’ 자격으로 중앙청에서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석해 당시 라오스 사태와 월남 정세를 브리핑했다 한다. 이후락은 또 직접 라오스에 가 그 나라 지도자 노사반을 만났다. 프랑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져 베트남에서 쫓겨 난 뒤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집어 먹으려 호시탐탐 할 때, 이후락은 ‘미국의 대리 특사’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미국은 그를 통해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에게 미국의 동남아 전략과 관련해 어떤 지침을 교수(敎授)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월남 파병 훨씬 전인 1950년대 말부터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 이야기가 나온 이유이다.
이후락이 중앙정보연구회 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1961년 초다.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 김흥한 씨가 장 총리에게 물었다. “이후락이, 괜찮겠습니까?” 장 총리는 “응, 미국이 좋다고 해서 시켰어”했단다. 최경록 육군참모총장까지 나서 ‘인물도 아닐뿐더러 현역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장 총리는 미국의 요구임을 강조했다. 결국 이후락은 군복을 벗고(준장 예편)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이 됐다.(<신동아> 1997.4.1 정대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4.19특집]장면 최후 고백>) 장 총리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고, 이 장군은 “힘센 쪽에 붙어 다니는 형편없는 군인”이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락의 위세는 5.16 쿠데타로 끝나는 듯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그가 밀고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군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그는 권력에서 소외돼 얼마 동안 대한공론사 명함을 갖고 다녔지만, 몇 달 안 돼 박정희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고(1961.12), 이후 박의 비서실장(1963∼1969), 중앙정보부장(1970∼1973)이 돼 박의 곁을 지키다, 7.4 남북공동성명 체제를 파탄시키기 위한 미국의 공작으로 박의 곁을 떠나게 된다.  
육군방첩대 609부대장 이진삼
4·19 직후인 1960년 7월20일 육군 특무부대가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되고,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립된데 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인 1961년 7월 육군첩보대(Army Intelligence Unit)가 창설된다. 오늘날의 기무사와 국정원, 정보사로 발전할 3개 조직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육군첩보대는 휴전선 이북으로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거나 적진을 유린하는 북파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었지만, 이 조직이 생겨나면서 ‘내부의 예비 적(possible enemy)’을 감시·사찰하고 살상하는 ‘내수 테러’의 시대가 열린다.
1960년대는 명실상부 육군방첩대와 육군첩보대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육사 15기 이진삼이다.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뒤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고 나중에는 국회의원도 되는 인물이다. 단, 1960년대 육군첩보대(정보사의 전신)는 육군방첩대(보안사/기무사의 전신) 산하 조직이었거나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북파공작과 내수테러를 전문으로(?) 하던 609 부대가 육군방첩대장 직속이었고(기무사령관이 정보사령부 특공부대를 지휘), 609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이 훗날 정보사령관이 된다.
이진삼의 놀라운 업적(?)이 세상이 알려진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였다.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1년 자유선진당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던 그는 1월 24일 국회 국방위 간담회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을 세워 놓고 “내가 이북에 세 번 들어가서 보복 작전[?]한 내용 알고 있습니까”라며 “몸으로 때려 부순거야. 33명이 사망했어요”라고 자랑한 것이다. 당시 간담회는 비공개여서 그의 이야기는 10여일 뒤 MBC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그가 말한 ‘보복 작전’(?)은 1967년 9월과 10월에 있었던 세 차례의 북파 침투 공작을 말한다. 당시 대위였던 그가 특수공작원 3명과 함께 황해도 개풍군에 침투해 인민군 수 십 명을 살상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진삼 씨는 아마도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널리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그의 ‘애국적(?) 북파공작’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내수공작 즉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있어서도 가히 1인자였다.
그의 국회 국방위 발언이 알려진 직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양정철 씨가 이 점을 지적했다. 양 전 비서관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알려지지 않은 그 분의 다른 작전들도 국민이 알아야지요”라며 1965년 9월 있었던 민간인 테러 사건을 상기했다.
“1965년 9월7일 밤 11시45분경.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였던 변 모씨 집 대문에 폭발물이 터져 집이 크게 파괴 .. 약 1시간 뒤인 8일 새벽 0시40분경 서울 성동구 성수동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 모씨 집에 지프를 탄 괴한 3명이 들이닥쳐 .. 성북구 장위동까지 끌고 가 노상에서 집단 구타 .. 8일 오후에는 당시 동아방송 본부국장 최 모씨 집에 “가족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내용의 협박전화 .. 동아일보 이 모 기자 집엔 .. 불온문서 1장이 투입돼 용공조작 ..의혹 .. 경찰은 △추석을 앞두고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황 .. △통행금지시간 전후임에도 범인들이 탄 지프가 검문에 걸린 적이 없으며 △변 씨 집 대문 폭파에 사용된 폭발물이 군용 TNT였다는 점을 들어 범인들이 군인이라는 심증 .. 10여일 만에 육군 모 방첩부대 소속 군인들의 사건 관련 수상한 동향을 알아냈고 군 수사당국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 군검경 합동수사반을 편성.. 10일간의 수사 끝에 서울시내 주둔 특수부대인「6·25용사회」 소속 부대장 이진삼 대위와 부하 두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하지만 소환조사가 어렵다며 수사반을 해체 .. 2차 합동수사반을 구성했지만 역시 용두사미 .. 1975, 1980년에도 .. 진상규명 여론이 일었으나 재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미궁에 ..”
당시 신문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까지 꾸려져 이진삼과 그의 부하 두 명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군 당국이 이들 세 명을 베트남으로 빼돌려 조사를 방해했고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정보사 출신 요원들의 양심선언으로 1985년과 1986년 테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한 창일 때, 1965년 테러에 대한 진상 규명 요청이 있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보안사와 정보사의 힘이 청와대와 국회의 권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 뒷배까지 가세하면 실로 그 힘은 어마어마하다 할 것이다.
1965년 당시 검사로서 검.경 합동수사반장이었던 김일두(金一斗. 70). 변호사는 1993년 7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 수사당국이 용의선상에 오른 군인에 대한 수사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소환된 군인 중에는 권총을 차고 수사본부에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수사의 어려움을 털어놨다(동아일보 1993.7.26). 동아일보는 1965년 당시 편집국 고위 간부들을 겨냥한 테러의 피해 규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동아일보 1993년 7월 26일 자 30면과 31면. 1965년 9월 발생한 자사 간부 2명에 대한 테러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밝히면서 이진삼 씨의 사진을 싣고 그 옆에 “조사받는 이(李) 대위”라는 사진 제목과 “趙東華(조동화) 씨와의 대질신문을 받으러 당시 합동수사반에 출두한 李鎭三(이진삼) 대위”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진삼 대위 위 사진은 “1965년 9월 7일 밤 폭탄테러로 부서진 당시 변영권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의 집 대문”이다. 오른쪽 해설 기사에는 ‘이듬해도 동아 기자 테러 2건 발생’이라는 제목과 “66년 4월 25일 저녁 정치부 최영철 기자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보안사-정보사-중정 정립기 : 국가테러 극성기
이진삼의 609부대로 이름을 떨치던 육군방첩대는 ‘1.21 김신조 사건’ 직후인 1968년 2월 15일 갑자기 윤필용 방첩대장이 경질되면서 한동안 내홍을 치른다. 그 내홍은 8개월 뒤인 1968년 10월 11일 김재규 육군방첩대장이 육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 될 때까지 계속된다. 김신조가 TV에 나와 “박정희 목을 따러...” 운운해 박정희가 노발대발 윤필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돌지만,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윤필용의 경질은 북파공작의 명수인 이진삼 609부대장의 모종의 역할을 포함해 김신조 사건의 어떤 내막과 관련돼 있을 것으로 본다. 윤필용 육군방첩대장을 경질한 직후 - 훗날 이진삼이 지휘하게 되는 - 정보사령부를 별도 조직으로 떼어내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정보사령부 창설 시기를 70년대 초 또는 1972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즈음 정보(국가정보원)와 방첩(기무사령부), 첩보(정보사령부) 조직이 정립(鼎立)해 3위1체로 움직이면서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창출했고,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양산됐으며 각종 의문사와 국가테러가 자행됐다. 대표적인 국가테러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1973.8.8),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 육영수 저격(1974.8.15),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를 들 수 있다.
이들 사건이 일어나던 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1970.12.21∼1973.12.2)과 신직수(1973.12.3∼1976.12.3), 육군보안사령관은 강창성(1971.9.23∼1973.8.14)과 김종환(1973.814∼1975.2.26), 진종채(1975.2.28∼1979.3.5) 였다. (윤필용 경질 다음날인 1968년 2월 16일 육군방첩대장에 임명돼 8개월 뒤 초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는 김재규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준비하던 때 물러났다.) 그 시기에, 그 ‘국가테러 체계’의 하부에서 수족처럼 움직였을 정보사령부의 수장이 누구였는지 아는 이가 없다. 
1972년 유신 계엄 때는 보안사가 국회의원들을 잡아다 고문한 일도 있었다. 1975년 3월 열린 국회 국방위 회의에서 송원영(宋元英) 신민당 의원은 “명색이 국회의원을 발가벗겨 난타하고 그 부인에까지 폭언을 퍼부었다”면서 “대공 업무에 전담해야 할 보안사가 8대 의원들을 수사하면서 김대중 씨, 김영삼 씨 등과의 관계, 자금 출처 등 정치적 문제를 수사한 것은 군의 중립성을 벗어난 것이며 정치적 보복의 인상이 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75.3.15)
또 1973년 전두환과 노태우의 밀고로 시작된 소위 ‘윤필용 모반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 때는, 그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대우실업 사장이던 김우중이 보안사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윤필용은 1968년 육군방첩대장 직에서 밀려나 월남 맹호사단장으로 쫓겨 갔지만 1972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었다. 5.16 쿠데타 이전부터 이어진 박정희와의 인연 덕에 재기에 성공했지만, ‘더 큰 권력’ 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 ‘더 큰 권력’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우려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윤필용 모반 사건의 또 다른 타깃이 바로 명실상부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준장이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부관(참모장)이었던 손영길은 늘 전두환.노태우 보다 앞서 나갔다. 윤필용 사건이 나던 해인 1973년 1월 1일 별을 달 때도 손영길이 선임이었다. 하나회를 이끈 것도 그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이 거세되지 않았다면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라는 타이틀이 전두환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청와대 30경비대장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도 손영길이었고, 전두환은 그의 자리를 물려받곤 했다. 사진 오른쪽은 1973년 ‘윤필용 모반 사건’ 재판 모습. 앞줄 맨 오른쪽이 윤필용 수경사령관, 그 옆이 손영길 참모장이다. )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와 전두환의 시대
극악무도했던 박정희의 극우반공 체제가 조락(凋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인 1977년 10월 7일 육군보안사령부와 해.공군.해병 보안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탄생한다. 2년 뒤인 1979년 3월 별 둘짜리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들어앉고, 그로부터 7개월 뒤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전두환이 모든 정보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자리가 1977년 만들어졌던 것이다.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까지 대통령이 된 것은 보안사가 5공과 6공 권력 창출의 핵이었음을 뜻한다. 1980년대 말, 노태우(전두환과 함께 육사 11기) 다음 보안사령관이 된 박준병(육사 12기)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국군보안사령부가 신설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0월 17일 전두환 1사단장은 제3 땅굴 발견자로 등장, 땅굴 안에서 존 베시 주한미군사령관과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고, 이 공로로 1년 뒤인 1979년 5.16민족상 수상자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사진이 또 실린다. 이는 차기 대권 주자를 부각시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전두환 권력에 이어 노태우까지, 1950년대 말 함께 미국 군사유학을 다녀온 ‘미국의 밀리터리 보이’ 둘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군보안사령부는 노태우 정권 중반인 1991년 국민의 지탄 속에 국군기무사령부로 개명해야 했다. 1990년 10월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1천300명에 대한 사찰 문건을 들고 나와 양심선언을 했고, 5공 정권과 결별하는 모양새를 노린 노태우 정권이 국민들의 반감을 앞세워 슬쩍 이름만 바꾼 것이다. 
’85·86·88년 테러의 일상화 : 형제 정보사령관 이진삼·이진백
1970년대의 가공할 국가테러의 실행자가 누구였을지는 1980년대 드러난 ‘내수 공작’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자들이 잇달아 대통령을 해먹는 시기에, 한때 보안사에서 한솥밥을 먹던 저들의 국가테러 범죄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끔찍한 범죄의 꼬리가 밟힌 것이다.
1980년대 국가테러의 중심에는 이진삼.이진백 형제 정보사령관이 있었다. 과거 육군방첩대장 직속 609 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은 전두환 정권의 기세가 등등할 때인 1985∼86년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60년대 식 ‘내수 테러’가 재연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전두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언론이 재갈을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이 양심고백을 하고 나서였다. 그들의 양심선언이 없었더라면, 1965년 ‘내수 공작’ 이후의 이진삼 씨 행적은 더 이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양심선언을 한 이는 북파공작원 출신 김형두 씨(당시 41세)와 정팔만 씨(당시 39세)였다.
김 씨는 1993년 7월 5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5년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 씨의 상도동 자택에 침입했고, 양순직 신민당 부총재를 폭행하는 등 다른 야당 의원들에게 테러를 저질렀다고 고백했고, 정팔만 씨는 녹음증언을 통해 “85년 10월 중순 쯤 행동대장 주 모 씨와 대원 김 모, 이 모 씨 등과 함께 권총, 마취제 등으로 무장”한 채 김영삼 대통령 집 2층 서재에 침입해 물건을 절취한 사실 등을 시인했다.
김 씨는 또 “86년 4월 29일 오후 10시쯤 테러단을 지휘한 ‘이[상범] 부장’의 지시로 나와 이 모 씨가 서울 신대방동 앞길에서 귀가하는 양[순직] 씨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밝히고, 지난 [1993년] 6월 이[상범] 부장과의 전화통화에서 “배반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내용도 녹음으로 공개했다.(<“또 다른 테러 기도했었다” - 김·정 양씨 증언> 중앙일보 1993.7.8) 테러단을 모으고 테러를 지시한 이상범은 정보사령부 소속(중령)으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한진구 대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의 양심선언이 아니었다면, 1980년대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정치테러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이 이종일씨, 오른쪽이 김형두 씨)
김영삼 대통령의 집을 털었다는 양심 고백의 파장은 컸다. 국방부가 즉각 조사에 나섰고, 검찰도 경찰도 서로 달려들어 수사에 적극성을 보였다. 국방부 검찰부는 7월 14일 ‘정보사 정치테러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 당시 정보사령관이었고 노태우 정권 시절 체육청소년부 장관까지 지낸 이진삼 씨와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예비역소장(55·갑종 151기)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진술을 한운구씨 (54·당시 정보사 3처장)로부터 받아내고 이들 3명의 혐의사실을 서울지검에 통보했다.(이진삼 씨는 자신의 책 <별처럼 또 별처럼: 전 육군참모총장 이진삼의 인생이야기>에서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기 전 우리 국민들은 또 한 번 정보사의 끔찍한 테러를 경험해야 했다. 이번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이진삼 씨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이진백 씨가 정보사령관에 임명된 직후인 1988년 8월 6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씨가 출근길에 괴한들의 습격으로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고, 8월 17일 새벽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에 괴한들이 침입해 잠을 자던 남자 회원을 폭행해 쓰러뜨리고 여성 회원을 강간한 것이다.
신문사 사회부장 테러마저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거의 묻힐 무렵 우리마당 사건이 터졌고, 그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일고 야당이 목청을 높이고서야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이진백 정보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범행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 수사의 단초가 됐던 우리마당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마당 대표는 김기종(당시 29세) 씨로, 2015년 주한미국 대사 모씨에게 ‘커터칼 테러’를 가한 주인공이다. 김 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사건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분신해 전신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이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테러가 기승을 부리던 1985∼1986년 안기부장은 장세동(육사 16기. 재임 1985.2.19∼1987.5.25), 보안사령관은 이종구(육사 14기. 1985.6.1∼1986.7.4)였고, 1988년 오홍근 부장 테러와 우리마당 테러 당시 안기부장은 배명인(1988.5.7∼1988.12.4), 보안사령관은 최평욱 (1987.12.29∼1988.12.7)이었다.
이들 ‘내수 공작’과 더불어 1980년대를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전성기로 만든 것은 ‘해외 공작’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북괴의 공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와 KAL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두 사건의 징검다리격인 김포공항 테러(1986.9.14)도 있다.(이들 사건에 대해서는 졸저 <1983 버마>(박종철 출판사)와 ‘진실의 길’ 기고 <1986 김포공항 테러 : 진상과 은폐의 서사>(2018.7.10)‘진실의 길’ 신성국 신부의 글 참조.)
1983년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당시 정보사령관은 이상규, 보안사령관은 박준병(재임 1981.7.14∼1984.7.6)이었고, 국가안전기획부의 파트너는 박세직 차장이었다. 모두 육사 12기 동기.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의 이름이 알려진 것도 북파공작원 장교급 인사들의 우연한 증언을 통해서였다. 김현희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은 고명승(육사 15기. 1986.7.4∼1987.12.29), 중앙정보부장은 안무혁(1987.5.25∼1988.5.6)이었다.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무사를 없애면 정보사가 없어질까?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 따위가 눈에 보이는 권력이라면, 국군기무사와 이 기무사의 그림자와 같은 국군정보사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국가정보원은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 사이에 있다. 보이는 권력은 유한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한하다. 보이는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훨씬 더 무섭고 간교하다.
이 나라 남녘에 극우반공 체제를 고착시켜 분단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온갖 범죄와 범죄적 행위의 주체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새로운 권력 창출이 필요할 시점에 은밀하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무사령부를 해체하고 새로 조직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소식이다. 기무사의 과거는 이 땅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육과 추악하고 추잡한 테러와 음모, 조작, 협잡의 역사였다. 그런데 기무사령부가 해체되면 그 정치테러의 망령도 사라질까?
<시사저널>은 장기간에 걸쳐 정보사령부가 저질러 온 국가테러의 진상을 추적한 끝에 지난 2004년 11월 제788호에서 정보사령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현역과 예비역 북파공작원으로 각각 구성된 정치공작팀 ‘남산대’를 산하에 두고 있었다고 폭로하면서 “과거 정보사 정치테러는 정보사 단독작품이 아니었다”라며 “계획 단계에서부터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 정보사가 유기적으로 개입하거나 묵인 방조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기무사를 재창설돼 현직 검사가 기무사 감찰실장을 맡으면 남산대가 없어질까? 늘 저들은 변하는 듯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도 미국의 손아귀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흉측한 국가테러는 없었다. 그러다 옛사랑의 추억을 더듬는 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예의 유사행위가 빈발했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려는 자들이 세운 박근혜 정권 시절 두 번이나 국가테러 행위가 자행된 이유다. 저 조직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이 나라에서는 언제고 또 가공할 국가테러가 벌어질 것이다. (20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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