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9일 화요일

미국서 돌아온 문희상 의장이 연일 ‘버럭’하는 이유는?

미국서 돌아온 문희상 의장이 연일 ‘버럭’하는 이유는?

등록 :2019-02-20 11:23수정 :2019-02-20 11:38


정치BAR_서영지의 오분대기
17일 미국에서 귀국한 뒤 참모진 전화로 호출
지난 18일 국회 ‘주간업무보고‘에선 답답함 호소
“국회가 너무 낯뜨겁다. 국회가 한 게 뭐가 있냐”
19일 원내대표 회동서 고성 뒤 직접 ‘친전‘도 보내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지난 19일 오전 국회 의장실에서 5개 정당 원내대표가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문 의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공동취재사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지난 19일 오전 국회 의장실에서 5개 정당 원내대표가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윤소하, 민주평화당 장병완,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문 의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 공동취재사진


지난 18일 오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주간업무보고‘가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은 매주 월요일 오전 국회 사무총장 등 사무처 간부들과 회의를 하는데요. 이번엔 이 자리에서 문 의장이 국회 상황을 언급하며 ‘격정적 토로‘를 했다고 합니다. 국회 의사과 관계자가 “2월 임시국회가 아무래도 열리기 어려울 거 같고, 3월이 돼야 가능할 거 같다”고 보고하자, 문 의장이 강력한 톤으로 ‘멈춰선 국회’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했다는 겁니다.
“굉장히 강력한 톤으로 ‘국회가 너무 낯 뜨겁다’고 했다. 여야가 매일 정쟁만 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회의조차 안 하니까… 촛불로 정권이 바뀌고, 그 뒤 국회가 한 게 뭐가 있느냐면서. 그동안 의장이 협치에 공을 많이 들였다. 5당 대표들과 ‘초월회’도 하고, 5선 이상 중진의원들의 모임인 ‘이금회’도 만들고 일하는 국회를 강조했는데, 가만 보니까 된 게 하나도 없지 않냐는. 그래서 화가 난 거 아닌가 추측했다(회의 참석자)”
또 최근 문 의장이 여야 지도부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실감했기 때문에, 완전히 멈춘 국내 국회 상황을 더 갑갑하게 느꼈을 것이라는 게 참석자들의 얘기입니다. 특히 내년 4월 21대 총선이 예정된 만큼 국회가 개혁입법을 처리할 수 있는 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한 일요일에 참모들을 전화로 호출할 정도로 이 문제에 신경을 썼다 . 국회 주간업무보고에서도 많은 걱정을 했다 . 19일에도 계속 비서진을 불러들이고 하면서… 헌법상 임시국회 소집을 위해서는 대통령 또는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어야 하므로 의장이 직권으로 회의를 소집할 수가 없다. 의장은 북-미 정상회담이 8000만 민족의 생존이 걸린 회담인데 우리 국회는 뭘 하고 있느냐는 말을 계속했다. 2월, 3월이 국회가 일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이 있다. 민생입법, 개혁입법 등은 시간이 지체되면 처리하기가 어렵다. 5당 원내대표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호소했는데 19일 비공개 회동에서 자기들 얘기만 하니까 역정을 낸 것이다. (또 다른 회의 참석자)”
국회가 멈추면서 민생입법, 개혁입법 문제뿐 아니라 국회의 ‘인사 처리’ 문제도 미뤄지고 있습니다. 문 의장은 각각 지난해 12월 차관급인 국회 예산정책처장과 입법조사처장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운영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국회가 열리지 않으면서 이에 대한 처리도 ‘감감무소식‘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법과 국회입법조사처법에 따라 의장은 두 처장에 대한 임명 동의를 운영위원회의에서 받아야 합니다.
국민이 보다 쉽게 국회에 청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국회법 일부 개정안도 운영위에 계류 중입니다. 여기에는 현재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아야 청원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현행 청원제도를 고쳐 ‘청원심사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누구든지 단독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서면이나 전자형식으로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운영위 소위원회는 국회법 개정안 6건을 병합 심사해 전체회의로 넘겼지만, 국회가 파행하면서 운영위를 포함한 모든 상임위 가동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국회 관계자는 “여야가 정쟁만 할 게 아니라 국회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문 의장이 지난 19일 5당 원내대표들과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큰소리를 친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의장 밖으로 문 의장의 고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국회에서 뭐 하나 하는 게 있어요? 사법개혁이 됐습니까. 국가기관 개혁이 됐습니까. 그러니까 5.18 (망언과 같은) 이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괜히 생겼습니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5.18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입법부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국회 공전에 대한 책임감과 답답함이 응축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문 의장은 2월 임시국회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손혜원 의원 투기 의혹 등에 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자유한국당과, 손 의원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의 ‘이해충돌 여부’까지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문 의장이 원내대표들에게 화난 민심이 국회를 향해 쓰나미처럼 몰려올 수 있다고 질타했다”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지난 19일 문 의장이 여야 국회의원 전원에게 보낸 서한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지난해 12월 이후 국회 주변에서는 3차례의 안타까운 분신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절규일 뿐만 아니라 성난 민심이기도 합니다. 제20대 국회가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연말까지 불과 10개월 남짓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국회가 민생입법, 개혁입법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지금처럼 지리멸렬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국민의 촛불이 쓰나미처럼 국회를 향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회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싸워도 국회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국민의 삶과 마음 앞에서는 이유도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국회는 지금 당장, 무조건 열려야 합니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광주 학살은 어떻게 냉전 해체를 가로막았나?

[기고] 5.18과 1980년 한반도 주변 역학 관계



1980년 5.18 광주 항쟁에 대한 극우 진영의 왜곡이 도를 넘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북한군 개입설 등이 공론장에서 떠돈다. 이는 민주 진보 진영의 광주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그간 주춤했던 탓도 있다.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나온다. 광주 항쟁을 다룬 대표적 저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어판 내는 일을 했던 설갑수 씨의 글을 싣는다. 2017년 5.18 기념재단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을 설 씨와 재단 측의 동의를 받아 다시 소개한다. 지만원 박사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글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당연히 광주 항쟁에 개입할 의사도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 역시 같은 판단을 했었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미국 정보기관 자료로 확인된 내용이다. 반면, 광주 항쟁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 진압은 미국과 중국이 손 잡는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의 역사적 과오는 광주 시민 학살과 성폭행 등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다 일찍 완화될 수 있었던 냉전 질서를 다시 굳혔다. 다음은 설 씨의 글 전문이다.   

소위 보수 정권 기간 동안, 즉 이명박의 임기가 시작된 2008년 2월부터 박근혜의 탄핵에 이르는 2017년 3월까지 광주 항쟁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는 극우세력에 의해 극심한 왜곡에 시달려 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고, 가장 비극적인 열흘이었던 광주항쟁은 진상 규명이 활발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의 버금가는 사건으로 대중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디게나마 도약하는 시기에는 북한 특수 부대 개입설 등과 같은 광주 항쟁에 대한 왜곡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왜곡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방증일 뿐이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탐사보도와 학문 연구가 사실상 정체했다는 것도 극우의 왜곡을 가능케 한 다른 요인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다시 불붙기 시작한 진상규명 노력조차, 여전히 과거에 이미 거론됐거나, 찾아냈던 사실을 복기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내 진실규명 상황이 착잡하게 더딘 탓도 있겠지만,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광주 항쟁에 대한 국제적 역학 연구는 미국의 항쟁 진압을 규명하는데 국한돼 왔다. 광주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역학과 세계 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다.

사실상 첫 시도이므로, 글의 범위를 1980년 전후의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역학에 제한한다. 또한 논증을 위한 데이터 역시 1차 자료, 외교, 정부 문서 그리고 언론 자료 등으로 제한한다. 

기존의 연구가 거의 부재한 탓이다. 또한 자료 접근성의 극심한 제한 때문에 중국 측 1차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다. 보다 많은 1차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중국이 어떤 논리와 목적을 갖고 한반도의 1980년 5월을 접근했고 개입했는지를 보다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주항쟁 : 신냉전시대의 길목 

광주항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카터-레이건 행정부를 잇는 신냉전 시대의 중심인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관계 역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총을 겨누고 싸운 27년 만에, 미국과 중국은 1979년 1월1일을 기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에 앞서, 1978년 8월 12일, 일본과 중국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서로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면서 서로의 시장에서 경제적 활로를 찾으려는 미국과 중국이 새로 짠 거대한 장기판을 비집고 나온 시험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의 분쟁이 군사행동으로 격화할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에 대한 첫 시험대였던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해체될 기미조차 없던 동서 양극체제 하에서,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미국이 구상하고, 중국이 적극적이었던 미국-남한-북한의 3자회담이 그것이다. 미중 국교 정상화 7개월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공동성명에 3자 회담 제안을 포함시킨다. 

미국의 의도는 중국의 지지 하에 미국-남한-북한 세 주체가 모여 서로 교차 승인 후, 남북 불가침 선언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식한다는 게 회담의 장기 목표였다. 남북의 교차 승인은 물론, 북미, 한중 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장기적 프로젝트였다. 유념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평화체제는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려는, 냉전체제의 한계 안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북한 민중들에게는 고단한 군사대결 체제를 종식하고, 냉전 체제 하에서 평화 공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빈약한 기회였으나, 한반도의 대전환이 가능한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 기회가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살 정권과 당장에 평화를 대화한다는 것은 실리도 명목도 없었다. 대화를 줄다리기하던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항쟁의 유혈 진압과 관련해서 미국을 비판했다.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과 그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미중의 냉전적 동맹 하에서조차, 한반도에서 남북을 둘러싼 두 열강이 이해가 상충되며, 서로의 영향권에 대해 계속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후, 급속히 냉각된 남북관계는 간헐적 해빙기를 제외한다면,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가 체결까지 냉전 상태를 지속했다. 이 또한 노태우 정권 하의 제한적 국내 민주 역량이 이끌었 다기보다, 동구권의 해체와 탈냉전 구도의 영향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남북 지배층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0 년 5월 항쟁 전후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광주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의 집권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종결 했는지 살펴보자.

여력이 없는 북한 

1970년대 중반과 말기에 접어들어서, 격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더불어, 남북의 국내 정세도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 말, 남한은 중공업 과잉 투자로 말미암아, 경제는 급작스럽게 냉각됐고, 기층 민중의 불만이 기존의 지식인과 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과 접목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점증하는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지표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북한 경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장기침체에 들어갔다는 게, 좌우를 아우르는 합의다. 또한 이런 정치경제 상황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마무리되고 있었으나,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여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남과 북 모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남한에서는 1979년 부마 항쟁에 이어, 10.26 그리고 이듬해 5.18에 이르는 정변이 일어났다.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북한도 비슷한 시기에 정치 불안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0년 5월 28일, 평양주재 헝가리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은, 시민의 자발적 봉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남한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정보부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국의 국장 이진우가 조선 만주 국경의 소요 대응을 현장지도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헝가리 외교관과 면담한 부국장은 "남한의 최근 소요(광주 항쟁) 이래, 북한 당국은 남한이 (항쟁 진압에) 쏠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남측의 도발보다, 북쪽에 자리잡은 적대 세력의 체제전복 활동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Wilson Center Digitnal Archive 1980)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협의체인 국가 정보 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제출한 1980년 6월 2일자 회의의제에서 정보국은 미국의 단호한 군사공격 의지 표명이 북한이 광주 항쟁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 한다. (CIA, Agenda Items for 10 June NUC Warning Meeting 1980)

그러나 사실상 북한은 남한의 정치 혼란을 이용할 의사도 능력도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정보공개법(FOIA)을 활용해 입수한 북한 지도자들의 대화는 이 점을 드러낸다. 김일성과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등이 나눈 대화다. 1980년 5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 보고서는 "'최종 검증이 안된' (not finally evaluated) 첩보(intel)"를 담고 있다고 적시된 것으로 봐서 제3국이나 북한 내부 인적 첩보(humint)를취합한 자료로 보인다. 정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19일 남한에서 학생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나는 와중, 북한의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북한의 지도자들은 광주 소요가 전국적 인민 반란으로 확대된다면, 남한을 침공하는 일을 자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실제로 침공을 준비한다고 시사하는 이상 징후는 없다." 

요약하면, 광주 항쟁이 전국 반란으로 번지면, 군사행동을 한번쯤,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북한의 입장이었고("자제하지 않겠다"), 실제로는 그조차 아무런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의사도 능력도 없는 말의 성찬이었다. 이 점은 2017년 5.18 기념재단이 CIA FOIA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광주항쟁 관련 20여 개의 기밀해제 문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980년 7월, 미국 정치인으로서 북한을 최초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하원의원을 만난 김일성은, 비록 외교적 수사라 할지라도, 광주에 개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경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광주사태(incident)가 일어나자, 미국은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발언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봉기에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역시, 이러한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 당국이 말하는 북조선의 남침 위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북한이 남한의 혼란상을 이용해 남침하려 한다는두려움도 사라졌다. 미국의 가장 큰 우려인 즉, 남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남한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자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StephenS. 1980,9-10) 

이에, 솔라즈는 "북 측이 남한의 소요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러한 북의 입장은 건설적이었다"고 답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북으로 출국 전, 국무부와 정보부의 대북 브리핑을 받은 미국 하원의원의 화답이었던 셈이다. 

3자회담 : 북한의 대담한 제의, 중국의 후원, 그리고 미국의 화답

위에서 인용한 김일성의 발언은 북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취한 외교 노선의 논리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군사력을 통한 남한의 무력 점령 전략을 점차 포기하고 있었다. 

열전 대신, 북한은 스스로를 둘러싼 냉전구도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1970년대 중후반, 북한은 중국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의 지위를 활용 한반도에서 유일한 자주국가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체제 안전 보장을 확보하려 했다. 1974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결의했고, 1977년 1월,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공식 제안했다. 한편 남한에 대해, 연방제 구성과 단일국호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박정희는 남북 불가침 조약 회담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한미 관계가 소원해졌다 해도,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배제한 채,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과 한국 전쟁의 강화 조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미국의 제안이 남북미 3자 회담 제안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국무부 파일을 살펴보면, 미국은 1979년 7월 카터와 박정희 정상회담의 코뮤니케를 통해 3자 회담을 제안하려고 했고, 1979년 초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내부입장이 정리되자, 5월에는 중국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한다. 5월 4일 백악관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nski)는 주미 중국대사 차이 제민(柴泽民)과 만난다. 하루 전, 차이 대사와 카터 대통령과 미소 군축회담에 대한 면담의 내용을 재확인 것을 제외한다면, 3자 회담이 유일한 대화 주제였다. 미국은 3자 회담을 실현시킬 방법을 중국에게 물었다. 브레진스키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통한 극동 지역의 안정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이해이지만, 소련의 이해는 아니라며, 3자 회담을 통한 남북 긴장 완화의 목적이 종국적으로 소련 봉쇄 전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차이 대사가 북한이 남한이 참여하는 3자 회담 틀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자,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대북 대화는 남한의 의구심을 사게 될 것이며, 미국과 중국이 3자 회담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 해결책(creative solution) 을 모색하자고 제의해 중국의 동의를 얻는다. 중국의 지원을 확인하자, 미국은 3자 회담 제안 준비를 재빠르게 진행한다. 5월 23일에는 정상회의 준비 명목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전 주한대사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를 특사로 서울로 보내, 이를 조율한다. 그리고 대중 접촉을 통해, 북한의 입장과 의중 변화를 계속 확인해 간다.

미국의 뜻대로, 그리고 중국의 의도대로,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한 미국의 고위당국자 회담이 제안됐다. 북한은 7월 10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한미 공동 제안을 거부하고, 종전 서명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고 남한이 옴저버 자격으로 참석하는 3 자 군사회담을 역제안 한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중국과 루마니아와 같이 미국과 통하지만 북한의 우방인 나라를 통해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 급기야, 1979년 10월 13일, 당시 루마니아 외상이었던 스테판 안드레이(Stefan Andrei)을 통해 북한의 3자 회담 거부가 최종 입장이 아니며, 이 제안을 계속 고려하겠다는 전언을 듣는다. (Romanian Remarks on the Korea Trilateral Proposal 1979)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10.26 박정희 암살로 시작한 남한의 정변과 5.18 광주 항쟁의 진압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중단되었다. 무엇보다 광주의 유혈진압과 그에 대한 지지로 말미암아, 한국과 미국 모두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했다.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의 회고록(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한국판 제목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의하면, 1980년 5월 22일, 국무성 아태 차관보 리차드 홀부르크(Richard Holbrooke)는 중국 대사 차이를 국무성으로 불러, 중국이 북한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고무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는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지 하루가 채 되지 않고, 미국이 전두환의 유혈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백악관 회의와 같은 날 만난 이 두 사람이 당시 남북한 사정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중국은 일면 미국을 제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을 단속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조기에 확보하고, 자신의 대북 영향력을 확인 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맞닿아 있었다.

체로키 파일 
3자 회담 협상 무산과 더불어 주목할 지점은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이다.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을 통해 입수해서 세상에 알려진 체로키 파일은,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10.26 이후 한국 상황을 점검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하려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3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국무성은 1979년 6월 8일을 기해 3자 회담 관련 모든 전문들에 "Cherokee"라는 분류 캡션을 넣으라고 지시한다. (DepartmentState 1979) 보안등급이 높은, 한반도 담당 고위관리만 3자 회담 전문을 읽고, 토론하고 회담의 성사를 진행할 사실상의 태스크 포스가 이 즈음 시작된 것이다. 체로키 팀은 최소 13명의 고위관리들로 이뤄져 있었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한 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구성된 테스크 포스가 이듬해 5월에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고, 광주의 유혈진압을 사실상 승인한 것은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전혀 모순된 상황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대로, 당시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목적이 아니라, 지역을 재편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수단이었다. 수단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언제나 폐기될 수 있다. 미국은 신군부 지지를 통한 질서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지역구도 재편을 위한 한반도 긴장완화라는 수단을 버렸다. 요컨대 기존의 냉전질서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쉽게 진압을 결정한 것이고,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면서, 지역에서의 자신을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론을 대신해서. 

1. 1980년 5월, 광주 항쟁은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 열강의 어느 정부도 광주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중국과 미국은 극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했다. 양국 모두 광주 항쟁이 신속히 종결될 것을 원했고, 그러한 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2. 이러한 구도 속에서, 북한이 광주 항쟁을 획책하거나,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우 지만원의 북한개입설은 실증적으로나 지역 역학적으로나 어불성설이다.

3. 현재까지는, 남북미 3자 회담 더하기 중국이라는 구도 하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표면 상, 1970년대 말 시도됐던 3자 회담의 구도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때와 다른 점은 긴장 완화와 화해가 회담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이다. 

4. 주변 열강 구도를 비집고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있는 건강한 민주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화해 구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가 촛불혁명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5. 또한 1970년대 말 당시, 열강 구도의 재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3자 회담 구상을 적극 활용하지 못한 남북한 권위주의 체제의 경직성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남북 모두, 이 빈약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립시키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6. 광주 항쟁의 유혈진압으로 주변 열강들의 긴장 완화 흐름을 한반도에 주입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남북관계도 냉각되어 갔다. 한반도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남북화해도 불가능하고, 세계열강에 자기 운명을 내맡길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격동과 동북아시아의 세력의 재편 속에서 중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했고, 정책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충분한 자료와 논쟁을 통해 그런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주항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올곧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mendrami@pressian.com다른 글 보기

김정은 위원장은 ‘할아버지 길’ 따라 갈까?


태극기 부대는 왜?

제1야당 전당대회 좌우하는 극단주의, 현대 정치의 민낯 보여줘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9.02.20 09:09 
오늘도 언론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이야기를 주요 소재 중 하나로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이른바 ‘태극기’ 들의 비상식적 언동과 행동으로 난장판이 되었으며, 제1야당이 이런 모습만 계속 노출하면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고, 결국 다 망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이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 지적에 말 한 마디 보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시점에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태극기 부대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전의 여러 글을 통해 이들의 심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바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들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으로 다가온 여파이다. 과정이 아니고 결과, 명분이 아니라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많은 것을 이에 희생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헌법이니 뭐니를 꼬치꼬치 따져서 대통령을 끌어 내릴 정도의 세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면서 이것을 인정할 수도 없고 하여 누구 덕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는 둥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는 둥 너희들도 똑같이 하면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둥 하는 거다.
그런데 ‘피플파워’ 정부의 오늘을 돌아보면 그렇게 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태극기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대한민국’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기대를 갖고 지지했건만 왜 바뀌는 게 없는지 모르겠다”란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 때마다 “원래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란 게 원래 다 똑같은 놈들이 하는 거니 애초에 포기했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정치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의 대구·경북(TK) 합동연설회가 열린 18일 오후 대구 엑스코 앞 바닥에 대형 태극기가 깔렸다. (연합뉴스)
영화 <관상>을 보면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소신을 유배보내라 명하셨지요. 성공했더라면 제 목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지요.” 얼굴의 생김새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소재로 한 오락영화의 이 대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 정치관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이런 믿음은 소수가 독점하는 엘리트 정치의 실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근대 이후에 ‘나’와 ‘상대’를 규정하는 방식에는 또다른 전형이 생겼다. 그것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통치를 뒤엎는다는 어떤 신화적 경험이다.
혁명사는 근대 민중이 본 기득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대개 왕과 귀족들은 통치의 비밀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파렴치한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인물들이며 무능력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열중하는 인물들로 묘사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왕정을 타파한 혁명의 순간에는 언제나 이런 기득권을 민중의 힘으로 끌어 내린다는 서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여기서 ‘민중의 힘’이란 세상의 주인임에도 부당하게 억압당해 온 이들이 자기 권리를 되찾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효성을 갖는 통치 체제로서의 왕정이 거의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이 서사는 모습을 달리해 반복되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비주류와 주류의 거의 모든 싸움은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싸움이라는 외양을 취한다. 이것이 어느 시기에는 파시즘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나치가 스스로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변한 것은 ‘유대인의 음모’라는 피해망상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데 부당하게 권력을 소유한 기득권의 음모가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와 일베들이 상정하는 구도는 정확히 이와 일치한다. 이들은 스스로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증명하려 한다. 나라 발전에 기여 했다며 굳이 태극기라는 상징을 취하는 게 그렇고 학벌이나 직업을 인터넷 공간에 ’인증’해 과시 하려는 것도 그렇다. 이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호남과 여성을 내세우는 민주정부와 종북세력이 음모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해 권력을 탈취해 기득권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광주 북한군 개입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대중주의 정치의 반대편에는 흔히 엘리트주의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실제로 현대정치가 돌아가는 방식은 대중주의와 또 다른 대중주의가 경합한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엘리트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극기들이 지지하는 김진태 의원이 뜻밖의 선전을 해 이를 바탕으로 2022년에 대선후보까지 됐다고 쳐보자. 과연 광주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 없이 선거전을 치를 수 있을까? 이 시점에 이르면 태극기들은 낙담해 정치를 멀리하다가도 또 때가 되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실은 이게 ‘촛불혁명’ 이후 ‘피플파워’의 지지자들이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일이다. ‘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말을 하거나 ‘내로남불’이라는 둥의 똥물을 뒤집어 쓰고 그저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결국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은 어느 정권에서든 승승장구 하는 관료-엘리트들이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그저 원래 하던대로 하는 것이다. 이 정해진 운명을 ‘피플파워’ 정부도 거스르지 못하고 있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곳곳이 다 그렇다. 미국에서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중도적 의원들은 제러미 코빈 대표를 향해 정확히 같은 혐의를 제기하며 탈당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은 기득권’이라는 믿음과, ‘유대인은 기득권이라고 믿는 파시스트’라는 규정과, ‘상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해 반사이익을 얻는 정치’라는 비난이 서로를 기득권으로 규정하며 정신없이 교차하고 있다. 
‘촛불혁명’ 때는 무능한 정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를 말하던 사람들이 오늘날엔 국가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돼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음란사이트 차단에서 북한과 중국의 전체주의 독재를 꺼내고, 지상파 방송에 대한 일종의 권고를 담은 안내서에 대해선 ‘여자 전두환’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지지한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중의 변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의 영화 대사를 빌려 오자면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런 악순환에서 탈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결국 정치 그 자체를 바꾸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사건의 주변을 그저 떠돌기만 하는 말장난들과 일회적 가치판단에 열중하는 걸로는 안 된다. 사건의 핵심을 짚고 잠복돼있는 실제 갈등의 구도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게 첫 걸음이다. 대안을 자처하는 정치와 언론이 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태극기들의 시대는 당분간 여러 모습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것 같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3·1 운동 → 3·1 혁명' 명칭 변경, 국민 절반 "찬성"

19.02.20 07:38l최종 업데이트 19.02.20 10:02l





ⓒ 리얼미터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1 운동의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오마이뉴스>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의 약 절반은 이런 개칭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대에서 찬성 의견이 67.3%로 매우 높게 나타나 젊은 세대일수록 명칭 변경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마이뉴스>는 19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500명(7968명 접촉, 응답률 6.3%)을 대상으로 '3.1 운동 → 3.1 혁명 명칭 변경'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

"최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무총리실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현재의 '3.1 운동'이란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항일투쟁에 참여한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고, 임시정부 등에서도 '3.1 혁명'으로 불렀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요. 선생님께서는 현 '3.1 운동'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꾸는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사 결과, 49.4%가 명칭 변경에 찬성한다고 답해(매우 찬성 22.9%, 찬성하는 편 26.5%) 반대한다는 응답 38.8%(매우 반대 15.3%, 반대하는 편 23.5%)보다 오차범위(±4.4%p)를 넘어 10.6%p 높았다. (모름·무응답 11.8%)

연령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세대에서 '3.1 혁명'으로의 개칭 찬성 의견이 높았다. 20대는 찬성 입장이 67.3%로 반대 입장 26.7%를 크게 따돌려 전 세대 중 찬성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어 30대는 55.4%, 40대는 51.7%, 50대 역시 51.7%가 찬성한다고 응답해 모두 과반을 넘겼다(반대 응답은 각각 29.7%, 41.0%, 35.3%). 반면 60대 이상은 반대 53.8% - 찬성 30.3%로 찬반 비율이 뒤집혔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부분 지역에서 고루 찬성 입장이 높았다. 서울의 경우 53.2%가 찬성 응답을 밝혀 가장 높았고, 광주/전라의 52.0%, 부산/울산/경남의 50.8%가 찬성 의견을 밝혀 과반을 넘겼다. 경기/인천의 찬성 응답도 49.6%로 거의 과반에 육박했다. 대전/충청/세종(찬성 47.6% - 반대 41.1%)과 대구/경북(찬성 46.4% - 반대 40.6%)도 오차범위 내이기는 하지만 명칭 변경에 찬성하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이념성향 및 지지정당별로는 답변이 갈렸다. 자신의 이념성향을 '진보'라고 밝힌 응답자 중에서는 절대 다수인 70.6%가 명칭 변경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반면(반대 19.2%), '보수'라고 밝힌 응답자 중에서는 거꾸로 반대 응답이 65.5%로 압도적이었다(찬성 27.8%). 가장 숫자가 많은 '중도' 층에서는 찬성 52.7% - 반대 42.1%로 찬성 의견이 오차범위를 넘어 높게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찬성 65.5%), 정의당(찬성 65.0%), 민주평화당(찬성 73.1%) 지지층에서는 찬성 비율이 매우 높았고, 반면 자유한국당(반대 66.9%), 바른미래당(62.8%) 지지층에서는 반대 비율이 매우 높았다.

"촛불혁명 경험한 청년층, 낡고 고루한 역사관 벗어나"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를 출발한 시민들이 동구청까지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재현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2018.2.28
▲  지난해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를 출발한 시민들이 동구청까지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재현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 연합뉴스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오래 전부터 '3.1 혁명' 개칭을 주장해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운동이라고 표현해왔기 때문에 개칭 찬성이 높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아 국무총리를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정명(正名)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 빛을 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김 전 관장은 20대가 명칭 변경에 제일 높은 찬성 입장을 보인 것에 대해 "지금의 20대는 촛불혁명을 거치며 낡은 고루한 역사관을 완전하게 벗어났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혁명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신해혁명도 프랑스 대혁명도 결과적으로 수십 년의 과정을 거쳐 혁명으로 완성됐다"라며 "3.1 혁명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1만5000여 명이 학살당하고 수만 명이 감옥에 가는 상황에서 완성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학혁명도 처음에는 동학난으로, 광주민주화운동도 광주사태라고 불렸다"면서 "당장 3.1 혁명으로 개칭하는 것은 법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는 원래 정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번 3.1절 100주년을 기해 우리가 먼저 3.1 운동 대신 3.1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무선 전화면접(10%)과 자동응답(ARS) 무선(70%)·유선(20%) 혼용방식으로 집계됐으며, 조사 대상은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선정했다. 2019년 1월 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 성, 연령, 권역별 가중치 부여 방식으로 통계 보정이 이루어졌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p이다. 자세한 조사 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