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1일 토요일

‘을’의 갑질에 우는 ‘병’ 두번 울린 김앤장의 법률 자문

 등록 :2020-11-22 08:55수정 :2020-11-22 09:44


공갈죄로 몰린 현대차 2차 협력사의 비명

현대자동차 1차 하청 한온시스템
2차 대진에 납품단가 인하 ‘압박’
못 견딘 대진 사장, 공장 인수 요구
1200억에 인수한 한온, 공갈죄 고소
대진 사장은 법정 구속돼 6년형

그 과정에서 김앤장의 법률 조력
공갈죄 고소까지 대리하는 상황
서연이화-태광공업 사건도 비슷
2차 협력사 옭아맨 ‘공식’인가
자동차산업 불공정 생태계 심화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가 지난해 2월2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하청업체들이 부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납품을 중단할 시 형사처벌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하청업체 납품중단 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가 지난해 2월2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하청업체들이 부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납품을 중단할 시 형사처벌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하청업체 납품중단 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자동차 원청의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들을 상대로 갑질을 한 뒤,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2차 협력사가 손실보상이나 기업 인수를 요구하면 이를 구실 삼아 2차 협력사 사장을 공갈죄로 고소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그 뒤에는 김앤장 등 국내 대형 로펌의 자문이 있다. 1차 협력사의 갑질과 로펌의 법률 자문이 결합해 자동차산업의 불공정 생태계를 심화하는 현실을 들여다봤다.“한온(현대차 1차 협력업체)이 협력사 대표인 나를 깔아뭉갰어요. 한온이 갑질을 해서 작년(2015년)에 협력업체로부터 뜯어낸 돈이 1300억원이에요. 제 평생을 다 걸고 한 회사를 한온에 팔려고 생각합니다. 사가십시오. 다른 협상은 없습니다.”(2017년 12월 1심 판결문 중)

한온시스템(한온)과 ‘전속거래’(원청과 하청 업체가 10년 이상 맺는 장기 계약으로 특정 원청과만 거래하도록 구속하는 불공정 거래로 이어지기 쉽다)를 해온 2차 협력사 대진유니텍(대진)의 송아무개 사장이 2016년 4월 한온 임원에게 악에 받친 듯 말했다. 한온의 경영진이 바뀐 뒤 심해진 ‘갑질’에 내몰린 송 사장은 공장 매각이라는 극약 처방을 택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수년간의 수사와 재판에 따른 고통뿐이었다. 


송 사장의 경우는 전속거래 방식으로 상위 사업자에 대한 의존도가 큰 자동차 업계의 고질적인 피해 사례다. 현대자동차 등 원청이 비용을 아끼려고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면 1차 협력사는 2차 협력사에 그 부담을 전가한다. ‘쥐어짜기’로 경영난에 시달린 2차 협력사가 1차 협력사에 회사를 넘기기도 하는데 이때부턴 또 다른 분쟁이 시작된다. 1차 협력사가 ‘협박에 못 이겨 매각대금을 과도하게 줬다’며 2차 협력사 대표를 공갈죄로 고소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엔 매각대금의 상당액을 받아내면서 ‘병’에 대한 ‘을’의 승리가 굳어지는데 국내 최대 규모 로펌의 조력은 필수적이다. 원청이 고안한 ‘직서열 생산’ 구조에서 갑과 을을 향한 병의 항변은 엄청난 후과를 각오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1200억에 회사 인수…900억 뜯겼다?
현대차의 2차 협력사인 대진은 1985년부터 차량용 냉각팬과 금형, 플라스틱 신소재를 생산했다. 1차 협력사인 한온은 대진으로부터 받은 부품으로 공조장치를 완성한 뒤 현대차에 공급한다. 대진은 한온에만 부품을 납품하는 전속거래처다. 그러나 2013년 한온이 금형 발주 물량을 줄이고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면서 두 회사 간 갈등이 시작됐다. 당기순이익률이 1%를 넘지 못하고 부채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2016년 4월18일, 대진의 송 사장은 거래 중단을 선언하며 한온에 “대진을 인수하지 않으면 생산라인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요구한 매각대금은 1300억원이었다. 이틀 뒤 한온은 대진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한온은 1년 전부터 관계를 맺은 김앤장의 법률자문을 받아 대진의 부채 등을 감안해 송 사장이 요구한 가격보다 100억원 저렴한 1200억원에 회사를 인수하기로 했다. 한온은 계약 성사 직후인 2016년 4월21일 이사회를 열어 대진 인수 안건을 의결했다.그러나 한온과 김앤장은 매각대금이 모두 건너간 날로부터 6일 뒤인 2016년 4월29일, 송 사장을 공갈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한온과 김앤장은 ‘대진의 기업가치가 300억원에 불과한데 송 사장의 협박에 못 이겨 900억원을 갈취당했다’고 고소장에 적었다.국내 최대 로펌 김앤장의 법률자문을 받고 있던 한온은 어떻게 900억원이라는 거액을 ‘뜯기게’ 된 걸까. 한온은 “대진의 부품 납품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현대·기아차의 완성차 생산라인 가동이 멈춰버리고, 10만 협력업체도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송 사장이 부품 공급 중단을 무기로 무리한 회사 인수를 요구해 협박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송 사장이 한온에 최후통첩을 한 당일, 공장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 송 사장에게 불리하게 작용되기도 했다.한온은 김앤장의 법률자문을 받아 대진을 12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한온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연매출 6조원에 이르던 거대 기업이 하청업체의 ‘협박’에 못 이겨 적정가치의 4배를 주고 회사를 인수하게 됐으니 결과적으로 이를 계약 과정에서 면밀히 챙기지 못한 책임이 김앤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온은 김앤장의 손을 놓지 않았고 송 사장을 공갈죄로 고소하는 사건까지 맡겼다.2016년 4월29일 고소장이 접수된 뒤 검찰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돼 그해 7월 대전지방검찰청 천안지청은 송 사장을 공갈죄로 불구속 기소했다. 1심에서 송 사장의 공갈죄가 유죄로 인정된 뒤 한온은 민사소송도 냈다. 공갈죄가 인정된 이상 한온이 건넨 매각 대금은 송 사장이 얻은 ‘부당이득금’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돌려달라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이 된 매각 계약서 작성에 관여한 김앤장 ㄱ변호사는 공갈죄 고소 사건도 함께 대리했다.
‘계약 책임’ 김앤장이 형사고소까지
송 사장 쪽은 민형사 재판 과정에서 한온과 김앤장이 고소를 예정하고 양수도 계약을 맺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앤장은 송 사장이 최후통첩을 한 바로 다음날인 2016년 4월19일 오후, 한온으로부터 급하게 대진 인수 관련 법률 자문을 의뢰받았다고 설명했다. “상황의 급박성으로 사업 양수도 이전의 자문은 (부품) 공급재개 방안에 초점이 맞춰졌고, 형사고소 가능성에 대한 자문은 26일에야 이뤄졌다”는 것이다. 매각 계약 3일 뒤에 형사고소를 검토하게 된 것도 “(한온으로부터) 향후 대응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공갈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한 판결을 여러 개 찾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온 쪽은 법정에서 매각 계약 직후에 공갈죄 고소를 검토한 이유에 대해 “회사 임원 중 1명이 태평양 변호사와 친분이 있는데, 그로부터 형사고소 가능성을 듣고 고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간접적으로 양수도 계약 소식을 전해 들은 태평양 변호사는 상대방의 공갈 혐의를 인지했는데 계약을 위한 법률자문에까지 참여한 김앤장 변호사는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얘기다.송 사장은 매각 계약 직후의 공갈죄 고소 등이 석연찮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1부(재판장 윤도근)는 “(김앤장) 변호사들은 대진 인수대금이 송 사장이 지정한 1300억원이라는 전제하에 계약 조건과 대금 지급 방법만을 의논한 것에 불과하다”고 ‘기획고소 의혹’을 일축했다. 이어 “한온은 (납품단가 인하, 납품 금형 생산시간 단축 및 그에 따른 비용 부담 전가 등의) ‘갑질’을 통해 장기간 자동차부품업에 전념해온 송 사장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운신의 폭을 좁게 해 범행을 자초한 면이 있다”며 이를 양형에 고려했다고 했지만 징역 9년의 중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송 사장은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현재 복역 중이다.현대차 협력사 간 갈등→인수 계약→공갈죄 고소로 이어진 패턴은 송 사장에 대한 1심 형사 재판이 한창이던 2017년 4월 서연이화(1차)-태광공업(2차) 사건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현대차 1차 협력사인 서연이화는 2차 협력사인 태광공업 손영태 전 회장이 보유한 회사 주식 전량을 50억원에 인수하고, 태광 부채 463억원에 대한 연대보증 책임을 승계하기로 하는 양수도 계약을 2017년 4월28일에 맺었다. 그러나 나흘 뒤 서연이화는 ‘계약무효 및 연대보증 인수 거부’ 방침을 통보하면서 손 전 회장 부자의 협박으로 회사를 인수한 것이라며 이들을 공갈 혐의로 고소했다. 결국 손 전 회장은 징역 2년6개월, 아들인 손정우 전 사장은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서연이화가 태광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한온-대진 사건과 판박이다. 서연이화를 대리해 인수 계약을 맺고 공갈죄로 고소해 대금을 다시 받아내는 과정의 법률 대리인이 김앤장이라는 점도 같다. 한온-대진 사건에서 계약 및 형사 소송에 모두 관여한 ㄱ변호사도 서연이화 쪽에 자문해주는 등 사건에 개입했다.태광공업 쪽을 대리했던 오영중 변호사는 “이사회를 통과하고 변호사들이 나서서 계약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는 것은 나중에 돈을 되돌려받으리란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기업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이라며 “2차 협력사가 납품을 중단하며 협박하면 1차 협력사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공갈죄를 적용시킬 핵심 수단을 대형 로펌이 만들고 이런 논리를 사법부가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공정 생태계에 묻히는 병·정들 목소리
대진이나 태광공업 사례처럼 2차 협력사의 ‘납품 중단’ 절규가 형사처벌 대상으로 전락하는 건 자동차산업의 고질적인 전속거래 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지적(2017년 8월12일 기사 ‘갑과 을이 힘 합쳐서 병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냐’)은 꾸준히 제기됐다. 원청이 비용과 재고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직서열 생산방식’(부품 업체들로부터 실시간으로 필요한 부품을 공급받는 현대차 생산 방식)이 협력사를 향한 압박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직서열 방식에서 현대차는 모든 부품을 적시에 공급받을 수 있다.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현대차는 하청업체에 ‘벌금’도 매긴다. 1차 협력사는 이를 면하려고 재고 보유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이 과정에서 하위 협력업체에 재고·비용 부담을 떠넘기게 된다. 갑질과 을질의 연쇄반응이다.송 사장 공갈 혐의 재판에서 한온 쪽은 “(송 사장)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재고품의 여유가 없어 우리도 생산을 중단하게 되고 그 여파로 현대·기아차의 생산마저 멈추게 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일대일 전속거래 구조 현실에서 사실상 유일한 거래 대상인 원청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는 협력업체로선 일방적인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못 이겨 ‘납품 중단’을 무기로 꺼내 보지만 수사기관과 법원은 이를 공갈죄로 처벌한다.송 사장 형사 사건 1심 재판부는 “대진의 일방적인 공급 중단으로 재고품 여유가 없는 한온의 생산라인을 중단하게 하고, 그 여파로 현대차의 생산마저 멈추게 하면 (한온이) 손해배상책임 등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한온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해 인수를 요구했다”며 “공갈 범행은 다수 협력업체와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전반의 안정적인 운영에 막대한 악영향을 야기할 수 있어 그 죄질이 매우 좋지 못하다”고 밝혔다. 현대차의 생산 생태계에 편입된 뒤 갑질과 을질에 시달리다가 ‘이럴 거면 차라리 회사를 사가라. 안 그러면 부품 생산 않겠다’는 항변이 협박으로 간주되고 사법부의 판단도 ‘자동차산업 전반의 안정적인 운영’이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공장 매각 계약과 공갈죄 고소 건을 동시에 대리하는 ‘패턴’은 더이상 김앤장만의 ‘사업 스킬’은 아니다. 현대차 1차 협력사인 두올산업은 2018년 6월 2차 협력사였던 ‘미래텍’의 김아무개 대표가 발주량 축소나 단가 인하 갑질에 못 이겨 보상을 요구하자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뒤 김 대표를 공갈죄로 고소한 뒤 민사소송을 걸었다. 이때 두올산업을 대리한 법무법인이 ‘화우’였다. 화우는 2017년 대진 송 사장의 공갈죄 사건에서 송 사장을 대리한 경험도 있었다. 당시 김 대표 쪽을 대리했던 한 변호사는 “미래텍 사건 재판 증인신문 당시 두올산업의 전 대표가 ‘화우에서 조력을 받아 공갈로 엮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고도 했다. 2차 협력사를 옭아매는 이런 방식은 변호사 업계에서도 하나의 ‘공식’처럼 활용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이항구 한국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진 사건 등은) 외환위기 이후 자동차산업이 독점구조로 바뀌면서 만들어진 결과”라며 “독점구조가 만든 약육강식의 산업 생태계에서 변호사도 의뢰인(1차 협력업체)의 승리를 위해 2차·3차 협력업체를 고소·고발하지만 법원은 이러한 구조를 모른 채 판결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0910.html?_fr=mt1#csidx9ab07060783396b9ac1b8ec2baf39f5 


아들은 자수 후 1년만에 자살... 만석지기 집안의 파멸

 '해남의 모스크바'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마을 김상훈 집안의 비극

20.11.21 20:18l최종 업데이트 20.11.21 20:18l

김상훈 가족사진 김상훈 가족사진. 앞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작은언니, 할머니, 작은오빠, 할아버지. 뒷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어머니, 큰언니, 큰오빠, 아버지(김창수). 촬영시기: 1940년대 초반. 장소: 해남군 계곡면 방축리
▲ 김상훈 가족사진 김상훈 가족사진. 앞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작은언니, 할머니, 작은오빠, 할아버지. 뒷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어머니, 큰언니, 큰오빠, 아버지(김창수). 촬영시기: 1940년대 초반. 장소: 해남군 계곡면 방축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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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아."
"누구세요?"
"오빠다."
"우리 오빠는 다 죽었어요."

낯선 남자가 대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새댁 김상훈은 무서워 부리나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부엌에 들어가 나무 빗장을 건 그녀는 문에 뚫린 옹이로 밖을 내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빠라니?' 큰오빠는 6.25 때 학살됐고, 작은오빠는 12년 전에 죽지 않았는가. 그러니 오빠라는 저 사람이 이상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김상훈의 무릎을 주저앉혔다.

"상훈아! 상윤이 오빠야. 오빠 목소리도 잊었니?"
"흑..."

12년 전 병으로 죽었다던 작은오빠 목소리가 맞았다. 상훈은 빗장을 풀고 "오빠~"하며 상윤이의 품에 안겼다. 1968년 김상훈이 살았던 전남 광산군 하남면 고롯마을(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에서의 일이다.

눈물의 재회를 한 이들은 그간 사연을 나누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근데 오빠, 죽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김상윤의 설명은 이랬다. 마지막 형집행정지로 나왔을 때, '다시 형무소 가면 이제는 살아서 못 나오겠다'라는 생각에 가족회의를 통해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폐렴이 악화돼 일시적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사망으로 위장하기 위해 거짓으로 장례를 치른 후 대전으로 이사해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김상윤은 집안 사람 중에 6.25 때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이름을 썼다.

자수한 지 1년 만에 자살

이름을 바꾼 후 대전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지만 김상윤은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1962년 5월 10일 제정된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1968년부터 만 17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은 의무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통장을 만들 수 없었고, 여관에서 잘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거디가 김상윤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크는데 무한정 주민등록증 없이 살 순 없었다. 

김상윤은 경찰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숱하게 꾸었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김상윤은 1969년 대전중구경찰서에서 자수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형집행정지 중에 탈출해 형무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처벌받지 않았다. 1968년 주민등록증 제도가 실시되자 정부는 범법자들에게 기간을 정해 자수를 받았고 그 경우 과거의 죄를 묻지 않았다. 김상윤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남의 이름을 도용한 죄로 구류 7일의 처분을 받았다.

자수하면 자유로운 삶을 살리라 기대했던 김상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시로 대전중구경찰서 보안과가 그의 집을 들락거리며 감시와 신원조회를 했다. '괜히 자수했다'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1970년 김상윤은 아내와 여동생에게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여보 미안해."
"상훈아. 이 세상에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구나. 하늘나라에 가서 너를 도와줄게."

당시 김상윤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가족 죽은 지 보름 만에 화병으로 죽은 할머니

"할머니, 마실 가요."

손녀 김상훈(당시 5세)이 조르자 할머니 이법곡은 "그래. 아가" 하며 손녀의 손을 이끌었다.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냇가를 건너 당산나무를 지나쳐 집 가까이 왔을 때였다. 순경 여러 명이 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들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의 가구 100호가 타는 데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1950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경찰들은 어린 김상훈의 가족을 굴비 엮듯이 묶어 신작로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김상훈의 아버지 김창수, 어머니 김병순, 큰오빠 김상화, 큰언니 김상님, 작은언니 김상욱이었다. 공포에 질린 김상훈이 "엄마"라고 불렀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줄줄이 묶인 김상훈의 가족이 냇가를 건너는데 지휘자인 듯한 경찰이 총 개머리판으로 아버지 김창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어이쿠" 하며 김창수가 주저앉자 다른 가족들도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경찰들이 몰려들어 발로 차고 밟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비명과 절규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뭇매를 맞은 가족들은 잠시 후 GMC 트럭에 실렸다. 경주김씨 집성촌이었던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에서는 이날 김창수 집안 5명을 포함 20여 명이 계곡지서로 연행됐다. 얼마 후 이들은 무이리 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도 상반기 조사보고서』)

아들과 며느리, 손주 등 5명이 끌려가 죽자 김상훈의 할머니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손뼉을 치고 중얼거리며 마을을 쏘다녔고, 땅바닥과 마루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가족들이 끌려간 지 보름 만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해남의 모스크바' 방춘리
 
 김상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  김상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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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가족을 포함한 방축리 주민 20여 명은 왜 학살 당했을까? 한국전쟁 이전 해남군 계곡면 방축리는 '해남의 모스크바'로 불리웠다. 그 이유는 김창수와 김정수의 활동과 영향력 때문이었다.

김상훈의 아버지 김창수와 김정수는 사촌지간으로 둘 다 해남군 계곡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를 나왔다. 이들은 해방 직후 해남인민위원회 수립을 주도해 해남군에서 촉망받는 지도자로 여겨졌다. 소위 '해남군의 3대 천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김창수·김정수와 함께 민영남이었다. 해남군 마산면 출신의 민영남은 일본 경도제대(교토제국대학)를 나와 귀국 후 마산면장을 지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마산면장을 하면서도 면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 1954년에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해남에서 당선되었다. 1960년 4.19 직후에는 민주당 소속 전남도지사(1960.12.31.~1961.5.23.)에 당선되었다.

또 김정수는 해방 직후 해남군 인민위원장과 초대군수를 역임하고 월북 후 초대 평양시장을 지냈다. 하지만 김창수는 1950년 부역혐의로 학살되었다. 그는 북한군이 점령한 '인공(인민공화국)' 시절에 감투를 쓰지 않았다. 다만 해방 후와 한국전쟁기에 김정수와 좌익세력들에게 경제적 후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남의 모스크바'로 불린 계곡면 방춘리에서 인공 때 부역 활동을 한 이들 중 일부가 입산하면서 1950년 11월 8일 우익인사 집 3채에 불을 질렀다. 다음날 경찰은 보복 차원에서 마을의 전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 20여 명을 연행해 학살했다. 부역혐의자들이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재판을 통해 처벌하면 될 것을 불법적으로 죽인 것이다. 김창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딸 둘은 당시 이화고보와 이화여중에 재학 중이었다. 과연 10대 소녀들이 죽을 만큼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을까?

김천소년형무소에서 폐결핵을 얻은 소년

부모와 형, 누나, 여동생이 계곡지서에 끌려가던 날, 아들 김상윤은 목포의 외가집에 있었다. 당시 배제중학교 학생으로 당시 17세(1934년생)였던 상윤은 학살은 면했지만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경찰들이 계곡면을 수복한 후 몇 차례에 걸쳐 부역혐의자들을 싹쓸이하는 과정에서 중학생 김상윤은 부역 혐의로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김상윤은 감옥에서 폐결핵을 얻었다. 병 때문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상윤이 잠시 계곡면 왔지만 가족이라고는 12살 어린 여동생 김상훈이 전부였다. 고모와 이모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 상훈은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너무 반가워 상윤을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결핵을 옮길까 두려웠던 상윤은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김상윤은 기침을 하면 금세라도 죽을 듯 괴로워하며 수십 분 동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는 목에서 피가 나왔다. 집에서 몸조리를 하며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김상윤은 재수감되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감옥에서 성인이 된 김상윤은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세 번째 형집행정지를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잠시 나왔을 때 김상윤은 말 그대로 뼈만 남은 해골이었다.

그런 상윤을 보고 집안 어른들은 "이러다가 집안 대(代)가 끊기겄어. 상윤이를 결혼시키자"라고 의견을 모았다. 김상윤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결혼이에요!"라고 반발했지만 어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을 한 김상윤은 다시 재수감되었고 훗날 상윤의 딸이 태어났다. 네 번째 형집행정지로 상윤이 집에 왔을 때였다. "다시 감옥에 들어갈 수는 없재"라고 의견을 모은 집안 어른들은 그가 죽은 걸로 위장했다. 이 일은 상윤의 여동생 상훈도 몰랐다. 그러니 상훈은 작은오빠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고, 1968년 김상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기절초풍한 것이다.

만석지기의 손녀가 겪은 현대사
 
 증언자 김상훈
▲  증언자 김상훈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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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은 6.25가 나기 전까지 손에서 떡과 육포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만석지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고 해방 후에도 인민위원회 등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 재산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말처럼, 김상훈은 서울 내수동에 살 때 덕수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매일 등하교 시에는 집 일을 봐주던 언니가 동행했다. 그렇게 곱게 자란 소녀 김상훈은 6.25를 맞아 집안 식구 6명을 잃었고 1970년에는 작은오빠도 떠나보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2000년도에 시동생에게 땅 153평을 샀다.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오빠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뼈도 못 찾은 아버지를 포함한 5명의 가묘(假墓)도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었다. 국가는 김상훈이 만든 가묘에 6.25 때 죽은 가족 5명의 유해를 찾아서 안장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해남군, #부역혐의, #인민위원회, #김상윤, #김상훈

‘트위터부터 드라마까지’ 국가보안법 7조가 ‘불법’으로 보는 것들

 ‘김정은 조롱’도 찬양·고무?...‘막걸리 보안법’에서 ‘리트윗 보안법’으로

김백겸 기자 kbg@vop.co.kr
발행 2020-11-21 17:42:29
수정 2020-11-21 17: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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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ㅣ해방 직후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적폐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국제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 그중에서도 특히 7조를 폐지할 것을 촉구해왔다. 최근 국회의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여당에서 국가보안법 7조 폐지 법안이 발의되고 시민사회도 이에 동력이 되고 있다. 인권존중과 나라다운 나라 건설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이 숙원을 풀 수 있을지 짚어본다.

① 문재인 대통령의 숙원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정부서 이뤄질까
② ‘트위터부터 드라마까지’ 국가보안법 7조가 ‘불법’으로 보는 것들

국가보안법 제7조를 삭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18일 국회 법제 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참여정부 때인 2004년 17대 국회서 국보법 개정안 통과에 실패한 이후 16년 만이다. '국보법 7조'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시절 공약이기도 하다.

국보법 7조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측에 대한 농담이나 조롱도 처벌했던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 가능하게 만든 근거 조항이 바로 찬양·고무죄를 규정하고 있는 국보법 7조다. 찬양·고무·선전이라는 애매한 표현 덕분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해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국보법 철폐를 권고하고 있는 유엔 인권이사회도 특히 국보법 7조만은 시급히 개정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7번이나 합헌 결정을 받은 국보법 7조는 올해에도 위헌심판이 제청돼 8번째 헌법재판소의 심리를 받고 있기도 하다.

국회(자료사진)
국회(자료사진)ⓒ뉴시스

'김정은 조롱'도 찬양·고무라는 국보법 7조
'막걸리 보안법'에서 '리트윗 보안법'으로

국보법 7조는 SNS 활동에도 적용되면서 '막걸리 보안법'의 면모를 보였다.

한 인디밴드의 프로듀서인 박정근 씨는 지난 2012년 1월 국보법상 찬양·고무죄로 구속됐다. 박 씨가 북측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계정에 실린 글 96건을 리트윗했다는 것이 혐의였다.

그러나 박 씨의 트위터 내용 전체를 보면 '우리민족끼리'의 리트윗은 고무·찬양보다는 비판과 조롱하는 의도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그가 올린 트윗 중에는 "김정은 청년대장 동지는 사실 스위스에서 초콜릿 제조를 1년 배웠다", "삼대잉여세습" 등 북측 정권을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럼에도 1심은 박 씨를 유죄로 보고 징역 10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박 씨의 리트윗을 처음 보는 사람은 이를 희화화한 것이라고 곧바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박정근 씨 사건을 보도한 CNN
박정근 씨 사건을 보도한 CNNⓒCNN 홈페이지 캡쳐

1심 판결은 해외에서도 국보법의 부당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유엔 인권위원회, 국제 앰네스티 등에서는 박 씨의 사건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국보법, 특히 7조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2심은 "140자 이하의 단문인 트윗의 개별 내용이 반국가단체 주장과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찬양·고무·선전 또는 동조할 목적이라고 쉽게 추론해선 안 된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대법원도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14년까지 2년여 동안 박 씨는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여야 했다.

박 씨가 구속된 비슷한 시기 온라인의 '리트윗' 행위에 국보법 7조를 적용해 압수수색 등을 받은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2012년 4월 사회당에서 활동하던 권용석 씨가 그의 트위터 글과 리트윗 글이 국보법 7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았다. 권 씨는 "김정일은 영양소가 풍부합니다"라는 농담을 적은 글까지 해명해야 했다.

2012년 10월 당시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던 김정도 씨도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계정의 글을 리트윗하고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동영상을 올렸다는 혐의로 압수수색 등 조사를 받았다.

'막걸리 보안법'이 시간이 흘러 '리트윗 보안법'이 된 셈이다.

이들 사건들은 박 씨의 무죄 이후 줄줄이 '무혐의' 등으로 종결됐다. 권 씨는 수사를 받은 지 6년여 지난 2018년 12월에서야 검찰로부터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으며, 김 씨는 압수수색으로부터 4년여가 지난 2016년 5월에 '내사종결' 처분을 받았다.

전교조 교사 공안탄압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2015년 1월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개최한 전교조 교사 공안탄압 1심 재판 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교조 교사 공안탄압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2015년 1월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개최한 전교조 교사 공안탄압 1심 재판 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된다" 정부 분위기 따라 달라지는 국보법 7조

정부의 분위기에 따라 국보법 7조의 적용도 달라졌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참여정부에서 금강산 관광이 진행되는 등 남북민간교류가 활발해졌던 당시에는 규제를 받지 않던 것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는 국보법 7조 위반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박미자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은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 2005년, 전교조가 한국교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남북교육자 교류 행사 당시 평양 시내 서점에서 아동만화로 그려진 '봉이 김선달' 등 서적 몇권을 구입했다. 해당 서적을 남측으로 가지고 올때도 당국으로부터 받은 검열 절차를 받아 정상적으로 통과됐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인 2013년 2월 박 전 부위원장 등 전교조 소속 교사 4명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과거에 평양에서 구매해 가져온 서적에 대한 국보법 7조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도 받았다.

1심에서 재판부는 이적단체 구성과 이적행위 동조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만은 인정해 1년 6개월, 자격정지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도 일부 무죄로 봤지만 일부에 대해서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지난 1월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서적 중에는 아동만화 뿐 아니라 '조선의 력사' 등 국내 도서관의 '북한자료센터'에서 열람이 가능하거나 한 때 국내에서도 구입이 가능했던 서적도 포함돼 있다. '이적표현물'을 규제하는 국보법 7조의 '고무줄 기준'이 지적되는 부분이다.

정부의 성향에 따라 국보법 7조의 적용이 달라진 것이다.

이른바 '종북콘서트'라는 오명을 쓴 신은미 작가와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토크콘서트 사례도 비슷한 경우다.

당시 토크콘서트에서는 재미동포로 비교적 북측의 왕래가 자유로운 신은미 작가가 북측을 방문한 소감을 전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진행됐다.

참여정부 시절 금강산은 물론 평양까지 왕래가 가능했던 시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일보' 등 보수 매체로 인해 '대동강 맥주가 맛있더라'는 신 작가의 소감은 '북측은 지상낙원'이라는 표현으로 둔갑해 '종북콘서트'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고, 이에 수사기관은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결국 신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2015년 1월경 강제 출국과 5년간 입국 금지를 당해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함께 토크콘서트를 진행한 황 대표도 경찰의 수사를 받았으나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표현하는 등의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경찰은 황 대표에게 50여개의 국보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황 대표는 1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6월을 선고받았으나, 올해 2월 2심에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자료사진)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자료사진)ⓒ제공:뉴시스

국보법 7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막걸리 보안법'에서 '리트윗 보안법'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보법 7조는 남북정상이 여러차례 만난 문재인 정부에서도 적지 않은 사건이 접수되는 등 현재진행형인 상태다.

법무부에서 입수한 지난 10년간 찬양·고무죄 접수 건수를 보면 앞서 사례를 든 박정근 씨 등이 수사를 받은 지난 2011년 121건으로 세자리를 기록한 이후 2012년 108건, 2013년 112건이 접수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2014년 82건, 2015년 87건으로 다소 높은 수치를 보였다.

박근혜 정권 말기인 2016년과 대선이 있던 2017년에는 각각 31건 씩으로 줄어들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2018년, 2019년에 각각 67건, 62건으로 증가했다.

최근에는 "김정은은 계몽군주"라고 표현한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고발당하고,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북측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등 국보법 7조 적용 사례는 계속되고 있다.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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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남본, 내년 8.15이후 ‘남북해외 연석회의’ 제안

 

범민련 30돌 기념대회, “희생.헌신의 역사, 투쟁의 역사”

  • 기자명 김치관 기자 
  •  
  •  입력 2020.11.22 00:38
  •  
  •  수정 2020.11.22 04:50
  •  
  •  댓글 1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범민련 남측본부는 21일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에서 ‘범민련결성 30돌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국통일 3대원칙, 6.15공동선언, 판문점선언이 가리키는 대로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면 민족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는 21일 오후 5시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에서 ‘범민련결성 30돌 기념대회’를 갖고 사업제안을 내놓았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기념사에서 “분단이후 최초로 결성된 남북해외 3자연대 조직 범민련이 결성 30돌을 맞이한다”며 “지난 30년간 범민련이 걸어온 노정은 원칙과 조직을 사수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역사이며 민족자주와 대단합, 조국통일의 길을 헤쳐온 간고한 투쟁의 역사”라고 요약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이 대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대표는 범민련 30돌 기념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준비위원회 과정에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급기야 1997년 5월 16일, 대법에서 범민련 남측본부를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결정적인 탄압을 가했다. 대법 판결 이후 범민련의 모든 활동이 불법으로 이적행위로 매도되어 국가보안법으로 지금까지도 탄압을 받고 있다”고 짚었다.

이규재 의장은 “정세는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과 기상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며 “오늘 우리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절절한 염원을 안고 민족자주 민족단합 실현을 위한 실천적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적극적인 호응을 주문했다.

원진욱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은 ‘정세보고 및 사업제안’을 통해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투쟁, ‘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를 외쳐야 할 때”라며 세 가지 사업을 제안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원진욱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이 ‘정세보고 및 사업제안’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먼저, “반미투쟁 세력들의 총단결로 이제는 반미투쟁을 전국화, 대중화, 상설화 해 나가야 한다”며 “반미투쟁의 상시화는 전국적, 상설적 반미투쟁체를 건설하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로 “전국적 반미투쟁을 모아내는 4차 조국통일촉진대회를 내년 8월 14일과 15일 개최할 것”이라고 밝히고, “앞으로 있을 2021년 제 4차 조국통일 촉진대회는 다시 한 번 전국의 반미투쟁을 모아내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중심이 되는 대중적 행사로 다양한 통일대축전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제안했다.

세 번째로 “가칭 민족의 자주와 민족단합 실현을 위한 남북해외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오늘 이 자리에서 제안하고자 한다”며 “연석회의는 내년 8.15이후 적절한 시기에 개최하며 민족의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도를 모색하고 8천만겨레의 민족의 총의를 모아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석회의 주제로는 △평화를 수호하고 미국의 전쟁위협을 근원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대책 △미국의 내정간섭을 거부하고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 △각계각층의 단합을 더욱 강화 확대하기 위한 대책 △우리 민족의 통일과 공동번영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들을 토론하게 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원진욱 처장은 “6.15민족공동위원회가 앞장서서 각 소속과 정견 차이를 뛰어넘은 남북해외 모든 애국적인 단체와 인사들이 범민련의 제의에 적극 호응하고 나서줄 것을 호소한다”며 “범민련 남측본부는 남북해외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성사를 위해서 범민련부터 연석회의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한 운동, 민족의제토론 운동을 대중적으로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들이  ‘범민련 기념사’를 낭독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회를 맡은 모성용 부의장(오른쪽)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범민련 진국가]를 부르며 투지를 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회를 맡은 모성용 부의장(오른쪽)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범민련 진국가]를 부르며 투지를 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범민련 남측본부 김준기, 노수희, 김동순 부의장은 범민련 공동사무국의 ‘범민련 기념사’ 공동낭독을 통해 “범민련은 이 땅에서 전쟁을 막고 나라의 평화와 겨레의 안녕을 수호하기 위하여 누구보다 희생적으로 투쟁하였다”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 6.15시대를 전진시켜나가기 위한 투쟁은 곧 이를 가로막으려는 내외호전세력의 악랄한 동족대결과 전쟁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공동사무국은 “결성 30돌을 맞이하는 범민련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비상한 각오와 의지를 안고 온 겨레와 함께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힘차게 열어나갈 드높은 결의와 신심에 넘쳐있다”며 “민중과 더불어 통일의 그날을 반드시 앞당겨 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기념대회에는 위원장 선거가 진행 중인 민주노총의 각 후보들을 비롯해 각계의 연대사와 영상축사, 축하공연 등이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준비해 온 연대사를 낭독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흥식 전농 의장이 연대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이 연대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이 연대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연대사에 나서 “수많은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해 온 이규재 의장을 비롯한 남측본부 동지들께도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드린다”며 “언제나 통일운동의 가장 앞에서, 가장 거친 길목을 마다치 않고 행동해 왔다. 탄압과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행동해 왔다. 통일을 가로막는 것들과 맞서 자주통일투쟁의 한 길을 걸어왔다”고 인사했다.

특히 “정부는 더 이상 외세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말로만 공동선언 실현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면서 “6.15공동선언, 10.4선언, 4.27판문점선언, 9.19평양공동선언이 한결같이 밝힌대로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민중공동행동을 대표해 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은 “올해 반미투쟁과 통일투쟁을 진행하면서 민중공동행동은 온라인을 통해서 많은 연대단체와 함게 투쟁했지만 한계를 느꼈다”면서도 “민중공동행동과 6.15남측위원회와 진보연대, 그리고 범민련이 걸어왔던 그 길에 서로가 하나된 목소리로 내년에 모든 시민사회, 국민들과 함께 장을 열어나간다면 새시대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대표해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남북해외 3자연대의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한반도 통일운동의 구심체로서 또한 전위대로서,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30년동안 해왔다”고 상찬하고 “투쟁의 역사는 조국통일 3대원칙인 평화통일, 자주,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통일운동의 깃발로 세우자는 거대한 조국통일 운동의 노선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규재 의장이 범민련 후원회 관계자들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념대회를 마친 참석자들이 무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석운·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와 민주노총 김재하 비상대책위원장과 한국노총 김동명 위원장 등 각계 대표들이 영상으로 연대사를 전했으며, 한국노총 허권 통일위원장과 민주노총 엄미경 통일위원장이 무대에 올라 연대발언을 하기도 했다.

기념대회에서 이규재 의장은 ‘범민련 후원회’에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축하공연은 ‘아코드 앙상블’이 피아노 콰르텟으로 <조선은 하나다> 등을 연주하고, 노래패 희망새가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 등을 노래했다.

모성용 부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념대회에는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 통일원로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자리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제한된 인원만 참석했다.

아코드 앙상블’이 피아노 콰르텟으로 [조선은 하나다] 등을 연주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아코드 앙상블’이 피아노 콰르텟으로 [조선은 하나다] 등을 연주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노래패 '우리나라'가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 등을 불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노래패 '희망새'가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 등을 불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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