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3일 화요일

‘최순실 중형’ 미끼로 ‘이재용의 삼성’ 앞에 또 무릎 꿇은 사법부

강경훈 기자 qa@vop.co.kr
발행 2018-02-13 19:26:06
수정 2018-02-13 19: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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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0년형,  벌금 180억 원을 선고 받은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0년형, 벌금 180억 원을 선고 받은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민중의소리




서울고법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에 이어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도 ‘이재용의 삼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13일 수백억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선고 공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관련한 제3자 뇌물죄를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앞서 이 부회장의 뇌물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같은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가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은 정형식 부장판사가 오히려 측은해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 판결의 초점은 오로지 이 부회장에 맞춰져 있었던 반면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말 그대로 최순실의 ‘형량’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 모두 똑같은 ‘삼성 봐주기’ 판결이지만, 이번 재판부의 경우 최순실에게 징역 20년과 벌금 180억원이라는 중형을 선고함에 따라 이 부회장에 면죄부를 준 부분은 자연스럽게 희석됐다.
요약하면 서울중앙지법 김세윤 부장판사는 최순실 중형에 기대어 ‘이재용의 삼성’에 다소 편하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재용의 삼성’ 지켜주려 재판부가 내세운 해괴한 논리
삼성 면죄부 판단의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최씨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와 달리 두 사람의 핵심 혐의들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최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들을 압박해 거액의 재단(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금을 내도록 했다는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는 근거로만 이용하는 데 그쳤다.
같은 자료의 증거능력에 대한 두 재판부의 상반된 입장은 각각 이 부회장과 최씨의 주요 혐의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됐다.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배척해 뇌물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고, 최씨의 1심 재판부는 같은 자료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결국 두 재판부는 ‘이재용 집행유예’, ‘최순실 중형’이라는 각각의 정해진 결론을 도출해내고자 핵심 자료의 증거능력을 매우 주관적으로 판단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두 재판에서의 핵심 쟁점은 이 부회장과 최씨가 주고받았다는 수백억원과 관련한 제3자 뇌물혐의 성립 여부였다. 결과적으로 두 재판부 모두 이 혐의를 일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사람의 뇌물 범죄 액수는 크게 줄었다.
법리상 제3자 뇌물 혐의가 인정되려면 ‘부정한 청탁’이 존재했어야 했다. 이 사건에서 ‘부정한 청탁’의 존재가 인정되려면 이 부회장이 부친인 이건희 회장에 이어 삼성 지배력을 세습하기 위한 ‘승계작업’이라는 청탁의 배경도 입증돼야 했다.
특검은 ‘부정한 청탁’의 배경인 ‘승계작업’의 개별 현안으로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 도입 ▲삼성SDS 및 제일모직의 유가증권 시장 상장 ▲삼성중공업-삼성엔지니어링 합병 ▲삼성테크윈 등 4개 비핵심 계열사 매각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위한 삼성물산 주식 처분 최소화 등을, 포괄적 현안으로는 ‘이 부회장이 최소한의 개인자금을 사용해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들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두 재판부는 이 현안들을 ‘승계작업’의 일환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개별 현안들을 두고,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현안들의 진행 과정에 따른 결과를 놓고 평가할 때 이 부회장의 지배력 확보에 효과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지, 이런 사정만 갖고 ‘승계작업’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최순실 재판부도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개별 현안들의 진행 자체가 ‘승계작업’을 위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며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건넨 뇌물의 결과물로 ‘그룹 지배력 확보’라는 이 부회장의 현실적 이익이 있음을 명백히 인지한 상태에서, 형식적인 법리로 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온 국민이 알고 있고 특검도 한국사회의 고질적 ‘정경유착’ 현상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던 재벌 세습을 위한 ‘승계작업’이 포괄적이고 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사법부만 눈 감고 있는 꼴이다.
이 두 재판을 거치면서 이 부회장과 삼성은 뇌물죄 피고인에서 부정한 정치권력의 직권남용·강요의 피해자로 둔갑될 수 있었다.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으로서는 정유라 승마 지원이 뇌물에 해당한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두 사람(박근혜·최순실)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해 수동적으로 뇌물공여로 나아간 것”이라고 했고, 최순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와의 오랜 사적 친분을 바탕으로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수수하고 기업들을 강요했다”고 친절히 두 사람의 처지를 규정해줬다.

‘며느리 사표’와 ‘졸혼’ 선언하고 새로운 삶 찾아나선 김영주씨

시월드를 퇴사하다, 며느리 사표

등록 :2018-02-14 09:00수정 :2018-02-14 10:55

[한겨레21]
결혼 뒤 24년을 며느리·엄마·아내로 그림자처럼 살다
그의 사표로 서로에게 마이너스였던 가족은 어떻게 변했을까
며느리가 됐다. 어머어마한 ‘시월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모, 시아주버니 등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명절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시간이 됐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부엌데기가 됐다. 남편의 반대편, 항상 일하는 자리에 있었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묵묵히 나를 지워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24년 동안 며느리로 살아온 김영주씨는 추석을 앞두고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씨는 며느리를 그만두고 김영주라는 온전한 ‘나’로 살기로 결심했다. 김씨가 시월드를 향해 던진 사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시월드를 퇴사한 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며느리 김영주’가 아닌 ‘김영주’의 목소리로 전하는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씨의 며느리가 되는 2030세대 여성들의 삶은 어떨까. 웹툰 <며느라기>의 민사린, 다큐멘터리영화 《B급 며느리》의 김진영씨를 통해 ‘이 시대 며느리’의 모습을 분석했다. 제사 없애기 등 명절 문화를 바꾸는 남편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_편집자
“맏며느리 역할 그만하겠습니다.” 53살 김영주씨가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진수 기자
“맏며느리 역할 그만하겠습니다.” 53살 김영주씨가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진수 기자
‘사표’.
김영주(53)씨는 ‘사표’라는 두 글자를 흰 봉투 겉면에 썼다. 2013년 추석 이틀 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표를 들고 그가 향한 곳은 회사가 아닌 시댁이었다. 김영주씨는 시댁 초인종을 누르고, 당황스러워하는 시부모님께 ‘며느리 사표’를 전했다.
“맏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
단단한 결심이었지만, 목소리도 손도 흔들렸다. 김씨는 인생의 첫 24년을 어머니의 착한 딸로 살았고 이후 24년을 며느리, 엄마, 아내로 살았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더 이상 내 뜻과 관계없이 강요된 역할로 살고 싶지 않았다. 며느리 사표는 그가 김영주라는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누군 며느리 하고 싶어서 하니?”
김영주씨는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책 를 펴냈다. 김진수 기자
김영주씨는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책 를 펴냈다. 김진수 기자
물론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누군 ‘며느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니?” 김영주씨의 친한 언니는 느닷없이 화를 냈고, 남편의 친구는 “그런 여자와는 이혼하라”고 조언했다. 친정엄마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니가 그라믄 안 된다. 시부모님께 미안해서 어떡하면 좋노…. 내가 사위 낯을 으찌 보노.” 친정엄마는 ‘사표를 거두라’고 읍소했다. 사람들은 사표, 그것도 며느리 사표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김씨를 지난 1월1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사표를 낸 뒤 5년 동안 그와 가족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김씨는 사표를 낸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결정이 아니었다”고 했다. 가족관계에 파묻힌 자신을 찾아내려고 거쳐온 무수한 고민과 행동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김씨는 24살이던 1989년 10월21일 결혼했다. 1988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1년9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편을 만났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했어요. ‘아, 이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죠.”
친정엄마는 딸을 말렸다. 시아버지는 9남매 중 장남이었고, 남편은 3형제 중 장남이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자 시부모님은 결혼하면 며느리가 당연히 시댁에서 함께 사는 걸로 생각했다. 직장도 ‘당연히’ 그만두는 것으로 돼 있었다. 시댁 바로 옆엔 시조부모님 집이 있었다. 사실상 삼대가 같이 사는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는 결혼이었다. “따로 살고 싶다. 무섭고 두렵다”는 말에 남편은 “내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했다. “그땐 그 말이 믿음직스러웠어요. 내가 너무 무지하고, 순진했던 거죠.”
결혼과 함께 연인의 말에 다정하게 귀 기울이던 믿음직스러운 ‘남자’는 사라져버렸다. 김씨에게 남은 건 ‘어마어마한 시월드’와 동반자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뿐이었다. “시댁이 있던 마을은 두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에요. 길 가다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집안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죠. 결혼하고 두 달 뒤 시할머니 생신이었는데 아침 6시부터 잔칫집 인원이 몰아쳤어요.” 이방 저방으로 불려다니며 인사하고, 다시 부엌으로 와 음식을 차리고, 술안주를 날랐다. 수십 차례 이층집을 휘젓고 다니느라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그가 밥을 먹는지 아는 사람도,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김씨를 가장 당혹스럽게 한 것은 ‘노동’에서 남편은 철저하게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제사나 명절 차례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모든 가사노동에서 남편은 제외됐다. 남편이 설거지라도 하려 하면 시어머니는 “네가 있으면 방해된다”며 부엌 밖으로 내몰았다. 결혼 전 모든 가사노동·돌봄노동에서 배제돼 있던 남편은, 결국 결혼 뒤에도 한 사람의 독립된 성인으로 살기 위해선 꼭 익혀야 하는 노동을 해볼 기회를 놓치고 만다.
남편과 아이는 손님, 난 집사
김씨가 분가에 성공한 것은 결혼한 지 8년 뒤인 1997년이었다. 주말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찾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허락받은 분가였다. 김씨가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가는 동안, 남편은 혼자만의 여가를 즐겼다. 남편은 결혼 일주일 만에 조기축구회에 가입해 일요일이면 축구를 비롯한 각종 활동으로 바빴다. 분가 뒤에도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김씨는 “결혼해 23년 동안 살며 우리 가족이 집주인인 적은 없었다. 남편과 두 아이는 ‘손님’이고, 나는 집을 돌보는 ‘집사’였다”고 말했다.
육아는 당연히 김씨 혼자의 일이었다. 김씨는 큰아이가 3살 되던 1995년 ‘부모 역할 훈련’(P.E.T)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어 2004년 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서 부모교육 강사를 시작했고, 2005년에는 대학원에 입학해 청소년복지학을 공부했다. 유능한 부모교육 강사가 되고 싶어 시작한 공부였다. 시아버지는 그런 김씨에게 “아이들 공부시켜야지, 네가 공부를 하면 어떡하냐”고 꾸중했다.
김씨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그만뒀고,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을 모시는 결혼생활을 받아들였다. 1965년생인 김씨 또래의 여성들에게 이는 보편적인 삶이었다. 이재경 전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자신의 논문 ‘여성의 경험을 통해 본 한국가족의 근대적 변형’에서 1960년대에 출생한 기혼여성 24명(전체 연구 대상은 당시 40∼50대를 포함한 28명)을 심층 면접해 1990년대 한국인들의 가족 의식을 분석했다. 1960년대생은 1980∼90년대 이뤄진 민주화와 그 무렵 새롭게 대두된 성평등 문화를 경험한 첫 세대였지만,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마지막 세대기도 했다. 이 세대의 여성들은 전업주부와 취업주부를 막론하고 ‘바람직한 아내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살림 잘하는 것”(전업주부)이라거나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교사)이라 답한다.
‘∼해야 한다’ 강요하는 가부장제
명절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은 극심한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명절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은 극심한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전통적인 가족관과 성역할을 질문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 체화한 이들이 부모가 되고, 이들의 자식인 1980∼90년대생이 결혼해 가족을 이루면서 ‘며느리’의 고민은 반복된다. 가족 갈등은 심화됐고 ‘명절증후군’은 보편적 질병이 됐다. 이 지루한 쳇바퀴를 어떻게 멈출까. 김영주씨는 ‘내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남편의 말을 믿은 “무지하고 순진했던” 자신의 맨얼굴을 직시하는 것에서 변화를 모색했다.
김씨는 결혼과 동시에 서울 신촌에 있던 문화 공간 ‘또하나의문화’에서 하는 강의와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며 ‘여성학’과 ‘여성주의’를 만났다. “또하나의문화에서 나온 무크지 6호 <주부, 그 막힘과 트임>을 단숨에 읽었어요. 조한혜정 전 연세대 교수, 여성학자 박혜란 등에게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땐 여성주의와 제 일상을 연결하진 못했어요.” 그러나 김씨는 점차 ‘왜 여성들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한가’ 자문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해요. 이를테면 ‘여자는 순수해야 한다’ ‘인내하며 헌신적이어야 한다’ ‘목소리가 크면 안 된다’ ‘예의 바르고 상냥해야 한다’ ‘순종적이어야 한다’ 등등. 저 역시 이런 목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살았죠. 이런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것 같아요.”
김영주씨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여성이 남편 집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결혼제도를 꼽는다. “결혼과 동시에 제가 힘을 잃은 이유는 시부모님 집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결혼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편은 결혼하며 경제력, 집, 부모, 동네 등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남(편의) 집으로 들어간 거죠.” 어찌 보면, 명절 때 며느리들이 힘을 잃고 시댁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부엌데기’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2016년 남편과 ‘졸혼’하다
‘고통의 바다’를 직시하고, 분가와 공부 등으로 자신의 힘을 키워가면서 김씨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가사노동의 극히 일부인 설거지를 분담하는 데 5년이 걸렸다. 다음 목표는 주말 휴식이었다. 가족 모두는 주말에 쉬고, 모두 “집이 가장 좋은 공간”이라 말하는데, 김씨에겐 “집이 가장 힘든” 공간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 김씨는 “나도 주말엔 쉬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그럼, 밥은 누가 하냐”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다시 남편을 설득해 주말 휴식을 쟁취해내는 데 4년이 걸렸다.
김씨가 며느리 사표라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기반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적 독립이다. 김씨는 부모교육 강사 등으로 활동했지만,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지 않았다. 그러다 독립하기 위한 생활비를 계산해보고, 강의료 등을 모아 6년 동안 2천만원을 저축했다. 김씨는 “이 2천만원이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아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은 것이다. 김씨는 어느 날 한 달에 16만원짜리 고시원을 얻어 글을 쓴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봤다. “기사를 읽자마자 ‘나도 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여주인공처럼 김씨는 한 달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김씨는 많은 힘을 얻었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데, 공간에는 그곳만의 에너지가 있어요. 나만의 공간을 가진 뒤 알게 됐어요. 이 공간이 며느리, 아내가 아니라 김영주 개인에게 집중할 에너지를 준다는 것을.”
며느리 사표를 낸 뒤 김영주씨와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씨가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시부모님은 긴 침묵 속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아무 때든 네가 편안히 오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와라.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안 와도 괜찮다.”
사표를 쓰고 1년이 흐른 뒤 김씨는 처음 집 밖에서 하는 가족 정기모임에 참석했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어서 가족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시중을 들거나 잡일을 하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며느리’를 그만둔 것일 뿐이니까. 생각보다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어요. 모두 개인으로 만날 수 있는 수평의 관계가 된 느낌이었죠.” 김씨가 사라진 1년 동안 가족들은 많이 바뀌었다. 시아버지는 제사와 명절 의식을 간소화했고, 시할아버지·시할머니 제사를 하나로 합쳤다. 또 명절 때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대신 성묘를 갔다.
김씨는 며느리 사표에 이어 또 하나의 실험에 들어갔다. 2016년 11월부터 남편과 집을 공유하지 않고 각자의 공간에서 사는 (잠정적) ‘졸혼’을 감행한 것이다. 졸혼 기간에 부부는 각각의 공간에서 지내다 토요일에만 함께 시간을 보냈다(이 생활은 김영주씨가 2017년 9월 무릎 수술을 하면서 중단됐다).
김영주씨는 졸혼 기간에 지난 2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며 느낀 것을 글로 써 2018년 2월 <며느리 사표>(사이행성)라는 책을 냈다. 그가 책에서 강조한 것은 건강한 관계의 기본은 “각자가 일인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심리적, 경제적, 물리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숙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돌보자 풍요로워진 관계
김씨는 현재 꿈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꿈 심리강사 ‘로바’로 활동하며 ‘가족꿈심리작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심리 공부를 하던 2007년에 꿈 작업 워크숍 수업을 들었고, 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냈다. 김씨의 다른 이름 ‘로바’는 서양 민담의 여신 이름이다. 로바는 강으로 산으로 다니면서 늑대 뼈를 모아 형체를 만든다. 로바가 노래를 부르면 뼈에 살이 붙고, 피가 돌고, 털이 나고, 생기가 돌고, 숨을 쉬고, 눈을 번쩍 뜨고, 뛰어가다 결국 여자로 변한다. “로바는 여성의 몸속에 있는 ‘늑대 같은 야성’을 살려내는 여신이에요. 저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며느리 사표를 내고, 주부 휴식년을 선언하고, 졸혼을 선언하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았어요. 나를 살리고, 내 딸을 살리고, 주변의 많은 여성을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글로 쓴 거죠.”
김씨의 남편은 어떻게 됐을까. 10개월의 졸혼 동안 남편은 비로소 진짜 ‘집주인’이 됐다. “남편은 전에도 설거지를 ‘내 일’이라 여기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내가 없으니 자신이 집주인이 될 수밖에요. 이제는 집에 먼지가 쌓였는지 볼 줄 아는 사람이 됐어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빨래를 하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죠. 혼자서는 라면도 못 끓이고, 달걀도 못 부치던 사람이 변한 거예요. 함께 있을 때는 마이너스였던 관계가 스스로 자신을 온전하게 돌볼 수 있게 되자 풍요로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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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드를 퇴사하다, 며느리 사표

등록 :2018-02-14 09:00수정 :2018-02-14 10:55

[한겨레21]
결혼 뒤 24년을 며느리·엄마·아내로 그림자처럼 살다
그의 사표로 서로에게 마이너스였던 가족은 어떻게 변했을까
며느리가 됐다. 어머어마한 ‘시월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모, 시아주버니 등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명절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시간이 됐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부엌데기가 됐다. 남편의 반대편, 항상 일하는 자리에 있었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묵묵히 나를 지워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24년 동안 며느리로 살아온 김영주씨는 추석을 앞두고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씨는 며느리를 그만두고 김영주라는 온전한 ‘나’로 살기로 결심했다. 김씨가 시월드를 향해 던진 사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시월드를 퇴사한 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며느리 김영주’가 아닌 ‘김영주’의 목소리로 전하는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씨의 며느리가 되는 2030세대 여성들의 삶은 어떨까. 웹툰 <며느라기>의 민사린, 다큐멘터리영화 《B급 며느리》의 김진영씨를 통해 ‘이 시대 며느리’의 모습을 분석했다. 제사 없애기 등 명절 문화를 바꾸는 남편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_편집자
“맏며느리 역할 그만하겠습니다.” 53살 김영주씨가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진수 기자
“맏며느리 역할 그만하겠습니다.” 53살 김영주씨가 ‘며느리 사표’를 냈다. 김진수 기자
‘사표’.
김영주(53)씨는 ‘사표’라는 두 글자를 흰 봉투 겉면에 썼다. 2013년 추석 이틀 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표를 들고 그가 향한 곳은 회사가 아닌 시댁이었다. 김영주씨는 시댁 초인종을 누르고, 당황스러워하는 시부모님께 ‘며느리 사표’를 전했다.
“맏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
단단한 결심이었지만, 목소리도 손도 흔들렸다. 김씨는 인생의 첫 24년을 어머니의 착한 딸로 살았고 이후 24년을 며느리, 엄마, 아내로 살았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더 이상 내 뜻과 관계없이 강요된 역할로 살고 싶지 않았다. 며느리 사표는 그가 김영주라는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누군 며느리 하고 싶어서 하니?”
김영주씨는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책 를 펴냈다. 김진수 기자
김영주씨는 며느리 사표를 내고 자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책 를 펴냈다. 김진수 기자
물론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누군 ‘며느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니?” 김영주씨의 친한 언니는 느닷없이 화를 냈고, 남편의 친구는 “그런 여자와는 이혼하라”고 조언했다. 친정엄마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니가 그라믄 안 된다. 시부모님께 미안해서 어떡하면 좋노…. 내가 사위 낯을 으찌 보노.” 친정엄마는 ‘사표를 거두라’고 읍소했다. 사람들은 사표, 그것도 며느리 사표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김씨를 지난 1월1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사표를 낸 뒤 5년 동안 그와 가족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김씨는 사표를 낸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결정이 아니었다”고 했다. 가족관계에 파묻힌 자신을 찾아내려고 거쳐온 무수한 고민과 행동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김씨는 24살이던 1989년 10월21일 결혼했다. 1988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1년9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편을 만났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했어요. ‘아, 이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죠.”
친정엄마는 딸을 말렸다. 시아버지는 9남매 중 장남이었고, 남편은 3형제 중 장남이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자 시부모님은 결혼하면 며느리가 당연히 시댁에서 함께 사는 걸로 생각했다. 직장도 ‘당연히’ 그만두는 것으로 돼 있었다. 시댁 바로 옆엔 시조부모님 집이 있었다. 사실상 삼대가 같이 사는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는 결혼이었다. “따로 살고 싶다. 무섭고 두렵다”는 말에 남편은 “내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했다. “그땐 그 말이 믿음직스러웠어요. 내가 너무 무지하고, 순진했던 거죠.”
결혼과 함께 연인의 말에 다정하게 귀 기울이던 믿음직스러운 ‘남자’는 사라져버렸다. 김씨에게 남은 건 ‘어마어마한 시월드’와 동반자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뿐이었다. “시댁이 있던 마을은 두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에요. 길 가다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집안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죠. 결혼하고 두 달 뒤 시할머니 생신이었는데 아침 6시부터 잔칫집 인원이 몰아쳤어요.” 이방 저방으로 불려다니며 인사하고, 다시 부엌으로 와 음식을 차리고, 술안주를 날랐다. 수십 차례 이층집을 휘젓고 다니느라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그가 밥을 먹는지 아는 사람도,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김씨를 가장 당혹스럽게 한 것은 ‘노동’에서 남편은 철저하게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제사나 명절 차례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모든 가사노동에서 남편은 제외됐다. 남편이 설거지라도 하려 하면 시어머니는 “네가 있으면 방해된다”며 부엌 밖으로 내몰았다. 결혼 전 모든 가사노동·돌봄노동에서 배제돼 있던 남편은, 결국 결혼 뒤에도 한 사람의 독립된 성인으로 살기 위해선 꼭 익혀야 하는 노동을 해볼 기회를 놓치고 만다.
남편과 아이는 손님, 난 집사
김씨가 분가에 성공한 것은 결혼한 지 8년 뒤인 1997년이었다. 주말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찾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허락받은 분가였다. 김씨가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가는 동안, 남편은 혼자만의 여가를 즐겼다. 남편은 결혼 일주일 만에 조기축구회에 가입해 일요일이면 축구를 비롯한 각종 활동으로 바빴다. 분가 뒤에도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김씨는 “결혼해 23년 동안 살며 우리 가족이 집주인인 적은 없었다. 남편과 두 아이는 ‘손님’이고, 나는 집을 돌보는 ‘집사’였다”고 말했다.
육아는 당연히 김씨 혼자의 일이었다. 김씨는 큰아이가 3살 되던 1995년 ‘부모 역할 훈련’(P.E.T)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어 2004년 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서 부모교육 강사를 시작했고, 2005년에는 대학원에 입학해 청소년복지학을 공부했다. 유능한 부모교육 강사가 되고 싶어 시작한 공부였다. 시아버지는 그런 김씨에게 “아이들 공부시켜야지, 네가 공부를 하면 어떡하냐”고 꾸중했다.
김씨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그만뒀고,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을 모시는 결혼생활을 받아들였다. 1965년생인 김씨 또래의 여성들에게 이는 보편적인 삶이었다. 이재경 전 이화여대 교수(여성학)는 자신의 논문 ‘여성의 경험을 통해 본 한국가족의 근대적 변형’에서 1960년대에 출생한 기혼여성 24명(전체 연구 대상은 당시 40∼50대를 포함한 28명)을 심층 면접해 1990년대 한국인들의 가족 의식을 분석했다. 1960년대생은 1980∼90년대 이뤄진 민주화와 그 무렵 새롭게 대두된 성평등 문화를 경험한 첫 세대였지만,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마지막 세대기도 했다. 이 세대의 여성들은 전업주부와 취업주부를 막론하고 ‘바람직한 아내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살림 잘하는 것”(전업주부)이라거나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교사)이라 답한다.
‘∼해야 한다’ 강요하는 가부장제
명절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은 극심한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명절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은 극심한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전통적인 가족관과 성역할을 질문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 체화한 이들이 부모가 되고, 이들의 자식인 1980∼90년대생이 결혼해 가족을 이루면서 ‘며느리’의 고민은 반복된다. 가족 갈등은 심화됐고 ‘명절증후군’은 보편적 질병이 됐다. 이 지루한 쳇바퀴를 어떻게 멈출까. 김영주씨는 ‘내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남편의 말을 믿은 “무지하고 순진했던” 자신의 맨얼굴을 직시하는 것에서 변화를 모색했다.
김씨는 결혼과 동시에 서울 신촌에 있던 문화 공간 ‘또하나의문화’에서 하는 강의와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며 ‘여성학’과 ‘여성주의’를 만났다. “또하나의문화에서 나온 무크지 6호 <주부, 그 막힘과 트임>을 단숨에 읽었어요. 조한혜정 전 연세대 교수, 여성학자 박혜란 등에게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땐 여성주의와 제 일상을 연결하진 못했어요.” 그러나 김씨는 점차 ‘왜 여성들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한가’ 자문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해요. 이를테면 ‘여자는 순수해야 한다’ ‘인내하며 헌신적이어야 한다’ ‘목소리가 크면 안 된다’ ‘예의 바르고 상냥해야 한다’ ‘순종적이어야 한다’ 등등. 저 역시 이런 목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살았죠. 이런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것 같아요.”
김영주씨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여성이 남편 집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결혼제도를 꼽는다. “결혼과 동시에 제가 힘을 잃은 이유는 시부모님 집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결혼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편은 결혼하며 경제력, 집, 부모, 동네 등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남(편의) 집으로 들어간 거죠.” 어찌 보면, 명절 때 며느리들이 힘을 잃고 시댁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부엌데기’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2016년 남편과 ‘졸혼’하다
‘고통의 바다’를 직시하고, 분가와 공부 등으로 자신의 힘을 키워가면서 김씨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가사노동의 극히 일부인 설거지를 분담하는 데 5년이 걸렸다. 다음 목표는 주말 휴식이었다. 가족 모두는 주말에 쉬고, 모두 “집이 가장 좋은 공간”이라 말하는데, 김씨에겐 “집이 가장 힘든” 공간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 김씨는 “나도 주말엔 쉬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그럼, 밥은 누가 하냐”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다시 남편을 설득해 주말 휴식을 쟁취해내는 데 4년이 걸렸다.
김씨가 며느리 사표라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기반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적 독립이다. 김씨는 부모교육 강사 등으로 활동했지만,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지 않았다. 그러다 독립하기 위한 생활비를 계산해보고, 강의료 등을 모아 6년 동안 2천만원을 저축했다. 김씨는 “이 2천만원이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아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줬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은 것이다. 김씨는 어느 날 한 달에 16만원짜리 고시원을 얻어 글을 쓴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봤다. “기사를 읽자마자 ‘나도 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여주인공처럼 김씨는 한 달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을 얻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김씨는 많은 힘을 얻었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데, 공간에는 그곳만의 에너지가 있어요. 나만의 공간을 가진 뒤 알게 됐어요. 이 공간이 며느리, 아내가 아니라 김영주 개인에게 집중할 에너지를 준다는 것을.”
며느리 사표를 낸 뒤 김영주씨와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씨가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시부모님은 긴 침묵 속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아무 때든 네가 편안히 오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와라.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안 와도 괜찮다.”
사표를 쓰고 1년이 흐른 뒤 김씨는 처음 집 밖에서 하는 가족 정기모임에 참석했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어서 가족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시중을 들거나 잡일을 하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며느리’를 그만둔 것일 뿐이니까. 생각보다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어요. 모두 개인으로 만날 수 있는 수평의 관계가 된 느낌이었죠.” 김씨가 사라진 1년 동안 가족들은 많이 바뀌었다. 시아버지는 제사와 명절 의식을 간소화했고, 시할아버지·시할머니 제사를 하나로 합쳤다. 또 명절 때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대신 성묘를 갔다.
김씨는 며느리 사표에 이어 또 하나의 실험에 들어갔다. 2016년 11월부터 남편과 집을 공유하지 않고 각자의 공간에서 사는 (잠정적) ‘졸혼’을 감행한 것이다. 졸혼 기간에 부부는 각각의 공간에서 지내다 토요일에만 함께 시간을 보냈다(이 생활은 김영주씨가 2017년 9월 무릎 수술을 하면서 중단됐다).
김영주씨는 졸혼 기간에 지난 2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며 느낀 것을 글로 써 2018년 2월 <며느리 사표>(사이행성)라는 책을 냈다. 그가 책에서 강조한 것은 건강한 관계의 기본은 “각자가 일인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심리적, 경제적, 물리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숙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돌보자 풍요로워진 관계
김씨는 현재 꿈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꿈 심리강사 ‘로바’로 활동하며 ‘가족꿈심리작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심리 공부를 하던 2007년에 꿈 작업 워크숍 수업을 들었고, 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냈다. 김씨의 다른 이름 ‘로바’는 서양 민담의 여신 이름이다. 로바는 강으로 산으로 다니면서 늑대 뼈를 모아 형체를 만든다. 로바가 노래를 부르면 뼈에 살이 붙고, 피가 돌고, 털이 나고, 생기가 돌고, 숨을 쉬고, 눈을 번쩍 뜨고, 뛰어가다 결국 여자로 변한다. “로바는 여성의 몸속에 있는 ‘늑대 같은 야성’을 살려내는 여신이에요. 저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며느리 사표를 내고, 주부 휴식년을 선언하고, 졸혼을 선언하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았어요. 나를 살리고, 내 딸을 살리고, 주변의 많은 여성을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글로 쓴 거죠.”
김씨의 남편은 어떻게 됐을까. 10개월의 졸혼 동안 남편은 비로소 진짜 ‘집주인’이 됐다. “남편은 전에도 설거지를 ‘내 일’이라 여기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내가 없으니 자신이 집주인이 될 수밖에요. 이제는 집에 먼지가 쌓였는지 볼 줄 아는 사람이 됐어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빨래를 하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죠. 혼자서는 라면도 못 끓이고, 달걀도 못 부치던 사람이 변한 거예요. 함께 있을 때는 마이너스였던 관계가 스스로 자신을 온전하게 돌볼 수 있게 되자 풍요로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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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씨를 이렇게까지 북 동포들과 격리시켜야만 하는가

김련희 씨를 이렇게까지 북 동포들과 격리시켜야만 하는가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2/14 [05: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 예술단을 환송하기 위해 대구에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까지 불원천리 찾아온 김련희 씨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 북 예술단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는 김련희 씨 옆 모습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 북 예술단원에게 손을 흔들며 반가운 인사를 전하는 김련희 씨 뒷모습, 흰 털모자 옷을 입은 사람이 김련희 씨이다.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김련희 북녘 동포가 12일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공연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는 북 예술단원들을 환송하는 애틋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이재훈가 본지에 보내왔다. 

12일 본지 박한균 기자가 보도한 바 있듯(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960) 사진을 보니 김련희 씨는 예술단이 버스에서 내리는 바로 앞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김련희 씨가 도라산에까지 나타날 줄은 공안당국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북 예술단원들이 김련희 씨를 못 알아보았는데 "평양시민 김련희입니다."라고 외치자 금방 알아보고 기쁘게 응대했다고 한다. 

▲ 김련희 씨를 바로 제압하는 정부 관계자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 정부 관계자들이 떼로 몰려와 몰지각스럽게 김련희씨를 구석으로 끌고 가고 있다. 끌려가는 김련희 씨의  충혈된 눈에는 피눈물이 맺혔다.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 끌려가는 김련희 씨를 보면서 북 예술단원들은 "김련희 씨를 어서 북으로 돌려보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 김련희 씨가 멀리 끌려간 후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 쪽을 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북 예술단원들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라산 출입관리소 경비원이 김련희 씨를 완력으로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어 달려온 정부관계자들이 거칠게 김련희 씨를 예술단원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했다.  

김련희 씨는 “내 부모 형제가 있는 집에 나를 빨리 보내줘”라고 외쳤으며, 북 예술단원은 약간 격앙된 표정으로 "김련희씨가 북으로 가고 싶다는데 보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라고 항의하였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조금이라도 북 응원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여러 명이 거의 떠 매다시피 끌어내는 바람에 결국 김련희 씨는 고향의 이웃 처녀들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멀리 끌려나왔다.

사진에서는 여러 명이 달려들어 구석에 김련희 씨를 꽁꽁 얽어매놓고 그 앞에서 한 요원은 웃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김련희 씨의 등장에 기가 막혀 나온 헛웃음이라고 볼 수는 없는 미소였다. 

▲ 김련희 씨를 구석으로 끌어다 놓고 웃음짓는 정부관계자. 도대체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웃음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하다.     ©  사진: 이재훈, 설명글: 이창기

정권도 바뀌었는데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가.
북녘 예술단원들과 잠시 인사라도 나누고 얼싸 안아 보게 해주면 지진이라도 일어나는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가. 그렇다고 김련희 씨가 예술단과 함께 버스에 탈 리는 없지 않는가.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얼마나 부모형제와 딸자식이 보고 싶었으면 대구에서 불원천리 이 머나먼 도라산출입사무소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겠는가.

김련희 씨의 심장에도 부모형제를 그렇게나 그리워하고,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뜨거운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심정을 어쩌면 그렇게나 몰라줄 수 있는가.
이러고도 남녘이 사람을 위한 나라라고 볼 수 있는가.
사람이 먼저, 사람중심 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아직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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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사업 '1조원 손실' 흔적 지우려다 딱 걸린 수공

18.02.14 10:33l최종 업데이트 18.02.14 10:33l



 18일 한국수자원공사가 4대강 관련 문서를 대량으로 파기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국가기록원은 파기예정 문서가 실려 있는 트럭을 봉인하고, 19일 한국수자원공사에 가서 사실 확인을 하기로 했다. 사진은 국가기록원 직원과 한국수자원공사 직원, 더민주대전시당 관계자, 문서파기업체 직원 등이 트럭 봉인과 문서확인작업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 모습.
▲  지난 1월 8일 한국수자원공사가 4대강 관련 문서를 대량으로 파기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은 뒤, 국가기록원은 파기예정 문서가 실려 있는 트럭을 봉인했다. 사진은 국가기록원 직원과 한국수자원공사 직원, 더민주대전시당 관계자, 문서파기업체 직원 등이 트럭 봉인과 문서확인작업에 대해 상의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한국수자원공사(수공)의 공공기록물 불법무단 파기 실태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경인아라뱃길(경인운하) 사업으로 1조 원 손실이 예상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기록물 파기 대상에 포함돼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한국수자원공사의 기록물 파기와 관련해 현장을 점검한 결과, 법에서 규정돼 있는 기록물평가심의회를 거치지 않은 채 원본기록물을 파기하거나 파기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이번이 첫 사례가 아니다. 지난 1월 9일 국가기록원 실태 점검 당시 한국수자원공사 해외사업본부의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 의혹이 제기됐다. 한국수자원공사는 2016년 12월 과천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종이 서류 등을 폐지업체를 통해 처리했는데 당시 폐기 목록을 남기지 않아 기록물 무단 파기 의혹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점검 결과는 국가기록원이 국무회의까지 보고했던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런 지적이 있었음에도 그동안 계속된 무단 파기를 시도한 것이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의도적으로 파기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여러 정황상 이 사안의 해결은 간단하지 않아 보인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법상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보도록 하자. 

기록물 16톤 파기... 개인 PC에 기록물 보관하기도
 지난 12일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 원본. 이미지 속 문서는 '경인 아라뱃길 사업 국고지원'이다. 왼쪽 문서 좌측 상단에 '대외주의'라고 적혀 있다. 또한 우측 문서에는 "국고지원을 전제해도 1조원 이상 손실 발생'이라고 쓰여 있다.
▲  지난 12일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 원본. 이미지 속 문서는 '경인 아라뱃길 사업 국고지원'이다. 왼쪽 문서 좌측 상단에 '대외주의'라고 적혀 있다. 또한 우측 문서에는 "국고지원을 전제해도 1조원 이상 손실 발생'이라고 쓰여 있다.
ⓒ 국가기록원

 이명박 대통령이 6일 오후 인천 서구 시천동 '경인아라뱃길' 중앙전망대에서 열린 경인 아라뱃길사업 현장보고회에 참석했다.
▲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은 2009년 5월 6일 오후 인천 서구 시천동 '경인아라뱃길' 중앙전망대에서 열린 경인 아라뱃길사업 현장보고회에 참석한 모습.
ⓒ 청와대 제공

우선 국가기록원이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수공은 이번 점검 대상 407건 중 302건의 원본기록물 파일을 개인 컴퓨터(PC)에 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한국수자원공사가 공식적인 시스템에서 기록을 생산 및 등록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게 관례화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개인 PC에서 기록 생산이 일상화돼 있으면, 기록물을 선별적으로 등록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요기록물로 등록해야 하는데, 파기를 시도한 기록들도 다수 발견됐다. 이번에 파기를 시도하다 발견된 문건은 '소수력발전소 특별점검 조치결과 제출' '해수담수화 타당성조사 및 중장기 개발계획 수립' '4대강 생태하천조성사업 우선 시행방안 검토요청' 등 수자원공사에서도 매우 민감하고 엄중한 자료들이다. 

특히 1월 9일부터 1월 18일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기록물 반출 및 파기가 반복적으로 이뤄졌고, 1차~4차에 걸쳐 16톤 분량의 기록물 등이 폐기목록, 심의절차 없이 이미 파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향후 검찰 수사 및 감사원 감사 등에서 16톤 분량 기록의 업무담당자, 파기업체 대표 조사를 통해 어떤 유형의 기록이 파기됐는지 집중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기록물 심의과정' 생략 가능성 크다
 지난 12일 국가기록원이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 파기 건을 현장점검 한 뒤 발표한 기록물 원본. 이 문서는 '4대강 생태하천조성사업 우선 시행방안 검토요청'으로 수기 결재까지 돼 있는 '업무연락'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도 파기 대상에 포함됐다.
▲  지난 12일 국가기록원이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 파기 건을 현장점검 한 뒤 발표한 기록물 원본. 이 문서는 '4대강 생태하천조성사업 우선 시행방안 검토요청'으로 수기 결재까지 돼 있는 '업무연락'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도 파기 대상에 포함됐다.
ⓒ 국가기록원

다음으로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평가심의회가 제대로 구성 및 운영됐는지 조사해야 한다. 대부분 공공기관은 기록물평가심의회를 구성해 기록물을 폐기할 때 외부 심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필자도 일부 지방자치단체 기록물평가심의회에 참석해 폐기 목록을 검토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엑셀로 구성된 폐기 대상 기록목록을 분석한 후, 보존연한 책정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한다.

보존연한은 1년, 3년, 5년, 10년, 30년, 준영구, 영구 보존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폐기 대상은 30년 이하 기록들이다. 보존연한이 도래했지만 내용의 중요성이 의심되는 기록들은 실물로 확인해서 보존연한을 늘리거나 중요기록으로 보존할지 결정한다. 하지만 한국수자원공사의 경우 공공기록들을 개인 PC에 보존하고 있어 이런 과정을 생략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수자원공사, '마비'된 기록물관리 시스템 
 1월 19일 국가기록원이 한국수자원공사에서 '4대강 문서 고의 파기 의혹'과 관련, 민간 업체에게 파기 의뢰된 문서들 중 국가기록물을 확인하고 있다.
▲  1월 19일 국가기록원이 한국수자원공사에서 '4대강 문서 고의 파기 의혹'과 관련, 민간 업체에게 파기 의뢰된 문서들 중 국가기록물을 확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마지막으로 현 한국수자원공사 기록물관리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수자원공사 각 부서에서 기록물을 생산·등록·분류·이관·평가하는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다는 뜻이다.

현재도 한국수자원공사에는 '4대강 영상화 기록' 등이 보존돼 있어, 이 같은 중요기록이 제대로 관리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기록관리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공공기관의 한 기록물전문요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자원공사의 '처리과(부서) 기록관리' 실태가 이런 중요문서가 파기 되는 것조차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화되었다는 것이고, 한국의 공공기록관리 체계가 처리과(부서) 단위의 부실을 지금껏 콘트롤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한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 이소연 원장은 "수자원공사 직원이 5000명이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거대 공공기관인데, 기록물전문요원은 단 1명이다. 이런 구조가 이런 사태를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라면서 "제도 개선을 통해 업무의 중요성 및 기관의 규모에 따라 기록물전문요원을 정원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국가기록원도 관리책임이 없는지 점검하고 있다. 모든 공공기관 업무담당자들이 기록관리가 자신의 업무 중 중요한 일로 인식해야만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덧붙이는 글 | 전진한 기자는 알권리연구소 소장이자 국가기록관리혁신 TF 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