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9일 목요일

‘이한열 동판’ 제막…1987년 6월, 그날이 기록되다


[현장] 우상호 “정문에 새긴 것은 동판 아닌 이한열 열사가 이루지 못한 꿈”
김미란 기자  |  balnews21@gmail.com
1987년 6월9일.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직선제로 민주쟁취’,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스물 둘의 이한열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날도 오늘처럼 뜨거웠을까. 29년 전 오늘 이한열 열사가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 권력의 칼날에 피격 당한 그 지점에 6월, 그날이 기록됐다.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 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 지점에 새겨진 동판.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 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go발뉴스
‘이한열 동판’은 29년 전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상징물로, 열사 피격 지점인 연세대학교 정문 왼편 기둥 앞에 새겨졌다.
이날 제막식에는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를 비롯해 이한열기념사업회 김학민 이사장, 연세대 이재용 교학부총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최루탄에 피격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전 세계로 알린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등이 참석했다.
  
▲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87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가 배은심 여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go발뉴스
87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은 인사말을 통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울먹였다. 그는 “87년 6월9일 당시, 집회를 주도한 나는 절대 뒤로 물러서지 말자고 해놓고 막상 최루탄이 터졌을 때 교문 안으로 도망쳤다”며 “하지만 이한열 열사는 유일하게 물러서지 않았다가 최루탄에 맞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주의는 앞의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낸 것임을 국민들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며 “이한열의 죽음이 헛되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싸워가겠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특권층에 맞서 싸우겠다. 정문에 새긴 것은 동판이 아닌 이한열 열사가 이루지 못한 꿈”이라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의 인사말에 이어 사회자의 안내로 동판이 제막되고 배은심 여사를 시작으로 헌화가 이어졌다. 헌화가 진행되는 동안 배은심 여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헌화를 마친 일부 참석자들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마른 잎 다시 살아나’란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의 헌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가 생각에 잠겨있다. ⓒ go발뉴스
이한열 열사의 1년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동문은 ‘go발뉴스’에 “오늘의 이 자리가 그냥 한 번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두환 회고록 쓴다고? 수많은 죽음도 함께 기록해야”
동판 제막 후 참석자들은 ‘이한열 동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한열 동산’에서는 열사의 후배들이 준비한 노래공연 등의 순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 ‘이한열 동산’에서 연세대 재학생들이 이한열 열사 29주기 추모공연을 펼치고 있다. ⓒ go발뉴스
공연에 앞서 연세대 53대 총학생회장 박혜수 학생은 추도사에서 “다시 6월, 이한열 열사의 꿈을 다시 키워온 사람들이 있다”며 “선배의 의지가 담긴 동판이 우리를 지키고 민주주의에 한발 짝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30도가 웃도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열사의 어머니와 함께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날 제막식 행사에는 소설 <L의 운동화>로 이한열 열사의 삶을 복원한 김숨 작가도 참석해 소설 <L의 운동화> 증정식도 가졌다.
김 작가는 “소설은 이한열 열사의 훼손된 삶을 복원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L의 운동화>는 열사의 어머니와 그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열사에 누가 되지 않는 소설이길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날 행사는 배은심 여사의 발언을 끝으로 마무리 됐다. 배은심 여사는 “이한열은 더러운 전두환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며 “전두환이 회고록을 쓴다고 한다. 회고록을 쓸 자격도 없지만 만약 쓴다면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죽음에 대해 모두 기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 “이한열, 더러운 전두환 독재 권력에 의해 죽었다”>
  
2016이한열 유물전, ‘유월이 이야기하다’…오늘 9월30일까지
한편, 오늘(9일)부터 오는 9월30일까지 이한열기념관에서는 이한열 열사 영정사진 속 조끼, 어린 시절 성적표, 육필 원고와 대자보 등을 전시한 ‘이한열 유물전’이 진행된다. 87년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과 피격 당시 이한열 열사가 입었던 옷과 운동화도 지난해 복원과 보존을 거쳐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이한열기념사업회는 2016년 2학기(16회) 장학금 신청도 받고 있다.
‘이한열 장학금’은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한열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 전국 전문대와 4년제 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지급된다.
특히 16회부터는 이한열 열사의 대학 선배인 김복영(정외 84) 열사 이름으로 장학생 1명을 추가 선정할 예정이다. 김복영 열사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병을 얻어 투병하다 사망했다.
장학생 선정 기준은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자의 가족‧사회적 약자‧깨어있는 시민으로 활동 하는자‧사회적 활동이나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 등으로, 오는 30일까지 이한열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leememorial.or.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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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눈먼 돈’

국민 개개인이 그렇다면 감시는 국회와 언론이 맡아야 한다
강기석 | 2016-06-10 08:43:17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2013년 자율협약을 체결한 후에만 4조 5,000억 원의 자금이 투입된 STX조선해양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정부는 막대한 부실을 안고 있는 대우조선해양 5조 3000억 원 등 조선 3사의 구조조정 자구안 규모를 총 10조 3,000억 원으로 확정했다. 수주 절벽이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에는 5조 6,000억 원을 추가해 총 15조 9,000억 원가량의 자구안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조(兆)는 돈도 아니다.
누가 그렇게 조 단위의 돈을 펑펑 써 댈까. 친박 최경환 일당이다. 그들이 나라 경제를 살릴 일념으로, 최대한 법과 원칙에 맞춰 그런 막대한 돈을 썼을까. 아니란 것이 홍기택 전 산업은행장의 폭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명박, 이상득 일당도 마찬가지다. 4대강을 오염시키는데 20조 원 이상을 쳐 박았다. 포항 토건 패거리들이 날파리처럼 달라붙었다. 해외자원개발은 내 건 사기질에는 몇 십조 원을 빼돌렸는지, 수사는커녕 청문회 하나 제대로 열린 적이 없으니 전혀 알 수가 없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나라의 돈을 몇몇 악당들이 아무 제제도 받지 않고 멋대로 빼돌릴 수 있을까. ‘합리적 무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선택학파 맨커 올슨에 따르면 정치는 경제활동의 하나다. 각종 특수 이익집단들이 똘똘 뭉쳐 사회의 효율을 빨아먹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령 어떤 정책이 자신들(10명)에게 10억 원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그로 인해 전 국민(1,000만 명)이 입는 피해가 1,000억 원에 이른다 한들 이들은 서슴지 않고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로비를 한다. 이들은 각자의 이익이 너무 크므로(1인당 1억) 결사적인 반면, 국민 개개인은 자신에게 돌아 올 피해가 워낙 작으므로(1인당 1,000원) 별 신경을 안 쓴다. 여기에 조 단위로 넘어가 버리면 너무 규모가 커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도 없고, 그러므로 ‘나 까지 것’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국민 개개인이 그렇다면 감시는 국회와 언론이 맡아야 한다. 악당들이 정부 재정으로 국책은행 자본금을 늘리지 않고, 한국은행더러 돈을 더 찍어 내라고 악을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국회의 감시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언론은?
언론은 거악을 파헤칠 능력도 없는데다 오래 전부터 그 악당들과 한 패거리가 돼 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56 

세월호 선원들, 골든타임에 왜 캔맥주만 홀짝였나?


2016.06.10 09:32:05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⑨] 해경 123정 2

9시 35분경 123정은 사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당시 세월호는 50도 정도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계속해서 침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고 시급하게 승객들을 퇴선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 지휘함인 123정은 세월호에 교신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세월호의 상황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승객에 대한 퇴선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123정은 현장에 도착하여 세월호를 향해 접근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서고,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8인승 고무 단정을 바다에 내립니다. 

지난 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23정이 교신을 통해서든 사람을 보내서든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후에 123정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어떤 근거로, 어떤 판단 하에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후의 123정의 행위들은 대부분 의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무 단정을 내린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만약 123정 승조원 일부가 고무 단정을 타고 세월호로 가서 선내에 진입하여 선원이나 승객들을 통해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였거나 승객의 퇴선을 유도하였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무 단정에 탑승한 승조원은 세월호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애초에 단정을 내릴 때 단정을 내리는 목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123정이 세월호 근처에 접근하였을 때 누군가 '단정을 내려라'는 말을 하여 저와 박○○ 경사가 함께 단정을 내리고, 단정을 내리라는 말은 당연히 단정을 내려서 세월호에 접근하라는 내용까지 포함한 말로 알아듣고 단정을 내리자마자 저와 경사 박○○ 2명이 단정에 올라타 세월호로 접근을 한 것입니다." (김모 경장 참고인 진술조서 3회)

당시 단정을 내리고 조정했던 김모 경장의 진술입니다. 경찰이라는 계급사회에서, 그리고 구조 활동을 펼치는 엄중한 상황에, 누가 말한 것인지도 모른 채 그냥 누군가 내리라니까 단정을 내렸고, 또 세월호로 접근을 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내리라는 말은 가라는 말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세월호로 접근하였다고 합니다. 납득이 되시나요? 

당시 123정이 상식적으로 취해야 했던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크게 3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해군함정이든 해경 함정이든 선교 위 마스터에 고성능 대공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외부로 방송이 나가고 있습니다. 대공 마이크를 통해서 (퇴선)방송을 하면 됩니다. 두 번째로는 123정이 세월호 선체로 접근하여 세월호 내로 구역을 나누어 123정 대원들을 선체로 진입시켜 퇴선을 유도하고, 세 번째로 조타실 쪽으로 1개 팀을 보내 그 곳에 있는 방송설비를 이용해 퇴선안내방송을 했어야 합니다." (심모 전 제독 참고인 진술) 

고무 단정을 내릴 것이 아니라 123정 자체를 세월호에 접안시키고 일부는 조타실로 보내 퇴선 방송을 하고 나머지는 분산하여 승객 퇴선을 유도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23정 자체적으로 퇴선 방송도 하여야 했던 것이고요. 설령 고무 단정을 내리더라도 위와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내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배가 침몰하고 있으니까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123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고무 단정은 아무런 목적 없이 내려져 세월호를 향해 다가갑니다. 

고무 단정이 첫 번째로 출발한 시각은 9시 38분경입니다. 세월호를 향해 출발한 고무 단정은 세월호를 향해 곧장 직진하여 9시 39분경 세월호 3층 좌현 갑판에 있던 5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123정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모두 세월호의 기관실 선원이었습니다. 

▲세월호 기관실 선원 명단
이 표는 세월호 기관실 선원 명단입니다. 이 명단에서 1번부터 5번까지의 5명이 처음으로 고무 단정에 의해 구조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도 고무 단정이 두 번째 출발하였을 때마저 구조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이 기관실 선원들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최초에 사고가 발생하는 순간, 기관실 선원 7명은 세 군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관장 박모 씨는 5층 조타실에 있었고, 1등 기관사 손모 씨, 조기장 전모 씨, 조기수 김모 씨 등 3명은 3층 기관실선원 선실에 있었으며,  3등 기관사 이모 씨와 조기수 박모 씨, 이모 씨 등 3명은 지하 1층 기관실에 있었습니다. 

사고 직후 기관장 박 씨가 기관실에 전화를 두 번 걸어서 기관실에 있던 3명에게 위로 올라오라고 지시하였고 자신은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기관실 선원 7명은 3층 기관실 선원 선실 앞 복도에 집결하게 됩니다.

▲세월호 기관실 계단 구조도. ⓒ선장 선원 재판 1심 제13회 공판조서

하 1층에 있던 3명이 3층까지 올라온 길을 나타낸 것입니다. 선미 쪽에서 선수 쪽을 바라본 그림이므로 왼쪽이 좌현, 오른쪽이 우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초기에 세월호는 왼쪽으로 약 30도가량 기울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기관실에 있던 3명은 그림의 엔진컨트롤룸에서 나와서 아래로 조금 내려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선미 쪽으로 조금 걸어가 또 다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갑니다. 1층에서 3층까지 연결된 이 계단의 각도는 62도인데, 당시 세월호가 좌현으로 30도 정도 기울었으므로, 처음 올라가는 계단은 90도 정도의 각도가 되었을 것이고 그 다음 계단은 다소 평평한 수준의 각도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세월호가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의 이동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3등 기관사 이모 씨는 여성임에도 다른 선원들이 도와주어 이동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렇게 기관실 선원 7명이 3층 복도에 집결했던 시간은 9시 6분경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무 단정에 의해 구조되는 시간은 9시 39분경입니다. 이 7명의 선원들은 30여 분의 시간동안 무엇을 하였을까요? 놀랍게도 이들은 3층 복도에서 무작정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구명조끼를 가지고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관장과 1등 기관사는 3등 기관사 방에서 가지고 나온 캔맥주를 한 캔씩 마십니다. 3등 기관사도 한 모금. 기관장 박모 씨가 담배를 피웠다고 진술하는 선원도 있습니다만, 박 씨는 맥주는 마셨지만 담배는 안 피웠다는 입장입니다. 그 입장을 존중하여 맥주만 마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들이 했어야 하는 행위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선장이 있는 조타실에 연락하여 사고가 왜 발생하였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123정이 세월호에 교신을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기관실 선원들은 조타실에 연락하지 않습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선원도 있었고, 각 선실에는 선내전화도 있었습니다. 구명조끼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으므로 전화를 하러 들어가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들은 '기관실' 선원이므로 발전기나 엔진의 상태를 파악하고 문제가 있다면 일정한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발전기나 엔진과 관련한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층간 이동이 가능했음에도 이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선원'이므로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일정한 행동을 했었어야 합니다. 구명벌(구명뗏목)이나 슈터(팽창식 미끄럼틀) 등을 터트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승객들의 상황이라도 파악하고자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무작정 30여 분을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맥주 한 잔 하면서. 

이러한 기관실 선원들의 행태는 명백한 의혹 사항입니다. 자신이 구조되리라는 확신이 있지 않는한 침몰하는 배 안에서 연락 한 번 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관실 선원들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대기만 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어떤 행위를 했는데 숨기고 있는 경우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자신이 구조되리라는 확신을 어딘가에서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확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밝혀져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데 숨기고 있는 경우라면 이 역시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진상규명이 필요합니다. (계속) 

'세월호, 의혹의 확정'은 '국민참여를 통한 세월호 진상규명' 후속 연재입니다. 박영대 위원은 세월호 연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원순의 늦은 사과, 12일 만에 치러진 장례식


16.06.09 18:10l최종 업데이트 16.06.09 18:14l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9일 오전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지난달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안전문)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은 김아무개(19)씨의 발인을 앞두고, 가족들의 오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여러 사람들이 쭈뼛쭈뼛 서성였다. 이들 중 한 남자가 유가족을 돕고 있는 권영국 변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메트로 간부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사죄드린다는 말씀을 유가족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권영국 변호사는 발인 직전, 빈소에서 김씨 어머니를 만났다. 권 변호사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김씨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힘을 내셔서 (김씨를) 잘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메트로 간부가 전한 사죄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한은 너무 컸다.

"자식은 이미 죽고 없는데, 사죄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권영국 변호사는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참 아팠다"면서 "유가족이 이미 사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보상에 합의를 하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유가족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추모 열기가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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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수리하다 사고로 숨진 김아무개군의 영결식이 9일 오전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려 김군의 영정과 운구가 장례식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

유가족들은 사고의 책임을 고인에게 떠넘긴 서울메트로에 큰 상처를 받았다. 또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소극적인 태도도 유가족들을 실망시켰다. 김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후, 먹을 것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박원순 시장과 서울메트로의 사과를 이끌어낸 것은 시민들의 추모 열기 때문이었다. 고인의 이모는 언젠가 권영국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시민들이 조카의 죽음에 공분하고 힘을 모아주지 않았다면, 조카가 누명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그게 두려웠다. 같이 슬퍼해준 시민들이 참 고맙다."

실제 사고 발생 첫날, 서울메트로는 고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김씨가 '점검하러 왔다'고 말하고 역무실을 나섰다. 작업일지도 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서울메트로는 시민들의 추모 분위기를 방해해, 유가족의 상처를 깊게 만들었다(관련기사 :추모 쪽지 떼어지는 사고 현장 "박원순 시장님 꼭 와주세요"). 사고 이후 김씨가 목숨을 잃은 구의역 승강장에 시민들이 추모메시지를 붙이고 국화를 놓았다. 하지만 서울메트로는 지하철 운행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서, 국화와 추모메시지를 치웠다.

사고가 일어난 지 사흘째였던 지난달 30일 고인의 작은 아버지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미안해! 너무 힘들었지? 이제 편히 잠들어.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나자!'라는 추모메시지를 붙였다. 서울메트로 쪽은 곧 이를 떼어냈다.

결국 김군의 어머니가 31일 아들이 죽은 구의역에서 눈물의 호소문을 읽어야 했다(관련기사 : "산산조각 난 아이에게 죄 뒤집어 씌웠다"). 유가족의 호소로 여론이 뒤집히자, 서울메트로는 그제야 사과문을 냈다. 유가족이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발인이 이뤄진 것은 사고 발생 12일만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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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수리하다 사고로 숨진 김아무개군의 영결식이 9일 오전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려 김군의 운구차량이 장지로 떠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

시민들의 추모 열기에 떠밀려, 박원순 서울시장과 서울메트로는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박 시장은 지난 7일 기자회견을 열어 "시민안전을 위협하는 특권과 관행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2013년 성수역과 2015년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작업자가 목숨을 잃은 뒤 재발방지대책을 내놓았지만, 김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당시 서울메트로가 '2인 1조' 규정처럼 실제로는 지켜질 수 없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박원순 시장이 큰 관심을 두고 살펴보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정치권 쪽에서는 박 시장이 대권 행보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만약 박 시장이 이번에도 시민 안전 약속을 소홀히 여긴다면, 대권은 불가능한 꿈이 아닐까. 1000만 서울시민이 지켜보고 있다.

일촉즉발 서해 '꽃게전쟁', 해법은 10.4선언


 서해 NLL, 남북공동어로수역으로 긴장해소 필요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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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09  14: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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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에 정박 중인 불법조업 중국 어선. 서해 꽃게어장을 확보하려는 경쟁은 남북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안고 있다. [자료출처-연평도 어촌계]
지난 4월부터 서해는 꽃게철을 맞았다. '꽃게 중에 꽃게는 연평도 꽃게'라고 할 만큼 6월 현재 연평도 인근은 꽃게를 잡기 위한 남북한과 중국 어선의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이 지역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해당돼 이맘때만 되면 군사적 긴장상태에 들어간다.
서해는 올해도 어김없이 군사적 긴장 고조돼
지난 1999년과 2002년 1.2차 연평해전은 모두 6월 꽃게잡이 조업으로 인해 촉발됐다. 교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지난달 27일 북측 단속정이 서해 NLL을 남하했다며 해군이 경고사격을 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북한은 같은 날 최고사령부 중대보도를 통해 남측 해군과 해양수산부 소속 어로지도선이 먼저 자신들이 주장하는 해상분계선을 4차례 침범해, 조난당한 부업선을 예인하고 돌아오던 비무장 연락선을 정조준해 40mm 기관포를 연발로 난사했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북한 총참모부는 '서해열점수역'을 침범할 경우 조준타격하겠다고 통첩장을 발표했다.

육지와 달리 서해에는 해상 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근본적인 맹점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남측은 NLL을 사실상 분계선으로 삼고 있고, 북측은 이와 다른 해상분계선을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어 충돌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어 지난 5일 서해 NLL 인근에서 불법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남측 어선이 나포한 것을 두고 북한은 남측 해군이 연평도 인근 남측 어선 19척을 해상분계선을 넘어 밀어넣었다고 주장했다. "유치한 날조극이자 서해열점수역의 정세 긴장 격화"라는 것.
9일 북한은 남한군이 지난 7일 오후 2시경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서해 해상에서 무인정찰기를 동원해 북한 영공을 최대 10km까지 3차례 침범했으며, 같은 날 오후 5시 30분부터 5차에 걸쳐 해군 쾌속정 1척과 어선 4척이 북측 해상을 1.5km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일련의 사건은 불법조업 중인 중국 어선도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 어선은 지난 4월 이후 기준으로 하루 평균 총 216척에 이른다. 이중 연평도 북방에 141척, 소청도, 백령도 북방에 각각 43척, 32척 등이 조업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NLL에서 최단 1마일(1.6km), 최장 8.85마일(14.2km) 이남에 조업통제선이 그어져있고, 이 구간은 연평도 북쪽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남북 어선들 대신 중국 어선의 주요 꽃게 싹쓸이 지역이다. 분단선을 교묘히 악용해 NLL을 넘나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군과 해경은 어선의 정상조업을 위해 중국 어선을 나포하려다 자칫 NLL을 우발적으로 침범할 가능성이 있다. 북측 해군도 자신들의 어선을 보호한다며 NLL 이남으로 침범하기도 한다.
실제 지난 1.2차 연평해전의 발단은 꽃게를 따라 남하한 북한 어선이었다. 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북한 경비정이 NLL 근처까지 내려오면서 남북간 교전이 발생했고, 남측 해군은 6명이 사망했고, 북한 경비정 7척도 부서졌다. 이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예측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1.2차 연평해전 당시는 남북 간 화해무드가 무르익던 시기임에도 벌어졌다는 점에서, 현재 남북 대치국면에서 남북간 교전이 발생할 경우, 확전 가능성을 전혀 배제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심각하다.
꽃게철만 되면 군사적 긴장도가 높아지는 서해 앞바다를 불법조업 중국어선으로부터의 피해를 막고 남북한 어민이 공존하는 평화의 수역으로 만드는 해법은 없을까. 해답은 지난 2007년 10.4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
  
▲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했다는 지도. 서해NLL을 중심으로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해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 담겨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서해 NLL 열점수역, '10.4선언' 공동어로수역 논의로 식혀야
2007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에서 핵심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이다. '10.4선언' 3항과 5항에서 밝힌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은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나가며, 해주경제특구 건설을 통한 민간선박 직항로를 개설하고 한강하구를 공동으로 이용해 서해에서의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자는 것.
특히, 남북공동어로수역은 서해 NLL 인근 해역 중 일부를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해 남북 어민들이 공동으로 조업해 공동이익을 향유하자는 계획이다. 즉, 서해상 특정구역에 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해 남북간 긴장을 완화하고 제3국의 불법조업을 방지해 남북간 공동번영의 기반을 확충한다는 의미다.
이는 '10.4선언' 후속으로 열린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우리 측이 NLL을 기준으로 남북수역이 맞물리는 등거리, 등면적으로 설정한 직사각형의 4군데 수역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은 NLL을 기준선으로 남쪽으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12해리 기점 사이의 수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제시했고, 이는 정권교체와 맞물려 더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2012년 '10.4선언 대화록' 공개사건으로 노무현 정부가 서해 NLL을 포기했다는 논란이 일면서 남북공동어로수역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안보를 헤치는 행위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남북공동어로수역에 대한 논의는 '10.4선언'이 처음이 아니다. 구체적 논의는 없었고 동해에 해당되는 내용이었으나 7.4남북공동성명 후속으로 공동어로가 언급됐고, 1982년 정부는 평화통일을 위한 20개 시범사업으로 '남북 어부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유로운 공동어로 구역을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1990년 남북총리회담에서 공동어로구역 설정 등의 논의로 이어졌고, 1992년 당시 수산청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고 상호조업하도록 하며, 심지어 여건이 성숙되면 남북 수역에 서로들어가 어로활동과 양식을 하는 방안을 업무추진계획에 포함시켰다. 2005년 제1차 남북수산협력실무회의에서 서해공동어로에 공감대를 형성한 바 있다.
이 밖에도 2004년 남북은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합의서에 서명, △서해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 조치와 관련해 서해에서 남북한 함정간 공용주파수 설정 및 운영, △불법조업선박의 동향 관련 정보의 일일 1회 교환 등을 담았다. 여기서 중국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제3국이라고 표현해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을 근원적으로 차단한 조치였다.
  
▲ 2007년 11월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과 같은해 12월 제7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남북이 각각 제시한 공동어로수역을 종합한 지도. 노무현 정부가 서해 NLL을 포기했다는 일각의 주장과 사뭇 다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이렇듯 서해 꽃게잡이 등 어업문제는 20여년이 넘는 남북간 공통된 의식에서 출발해 '10.4선언'에서 공동어로수역을 통한 평화수역화로 확대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조성사업과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경시되고 있다.
고경빈 평화재단 이사는 "남북공동어로수역 설정은 가장 완벽한 해결방안이다. 통일 이전에 남북한이 공동어로수역을 함께 관리하고 중국어선을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진단했다.
공동어로수역 설정이 서해 NLL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면서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NLL의 지위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고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서로 나누자는 것이다. 다만, NLL에서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즉, 개성공단이 군사분계선(MDL)를 무력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이익을 공동으로 창출했듯, 서해 공동어로수역은 NLL을 그대로 유지하되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을 막고 어족자원 보호를 통한 이익분배로서의 의미가 크다는 설명이다.
노호래 군산대 해양경찰학과 교수도 "공동어로수역은 남북간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평화적으로 분명한 진리에 가깝다"고 평했다.
3차 연평해전 막으려면 남북대화 필요
꽃게철을 맞아 남북간 군사적 충돌 위험이 증가하는 상황은 그래서 남북대화가 절실하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남북대화의 주제는 2007년 12월 제7차 남북장성급회담의 내용에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단된 공동어로수역 설정은 곧 서해 NLL에 대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5월 초 열린 당 7차대회에서부터 서해 NLL을 '열점수역'으로 규정하고 남북대화 의제로 설정하고 있다. 당시 김정은 당 위원장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우선 북남 군사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군사분계선 일대 충돌위험 제거와 긴장상태 완화 등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자고 했다.
나아가 북한 국방위원회는 지난달 20일 공개서한에서 "외세에 의해 강요된 군사분계선과 서해열점수역을 사이에 두고 서로 총부리를 겨눈 험악한 사태가 지속되면 될수록 무장충돌과 전쟁발발을 피할 수 없게 되어있다"며 남북군사당국회담을 제안했다. 인민무력부도 3개월만에 폐쇄한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열고 두 차례에 걸쳐 실무접촉을 제의했다.
  
▲ 2007년 12월 제7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남북은 서해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지 못한 채 헤어졌으며, 이후 지금까지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 남측 이홍기 수석대표와 북측 김영철 단장이 악수하는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하지만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 우선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북측의 대화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비핵화 조치가 대화의 전제조건이 된 상황에서 남북대화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고경빈 이사는 "공동어로수역 설정을 실현할 만한 여건과 의지가 현 정부에 있는지가 문제"라며 "새롭게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추진할 만한 동력을 만들기 힘든 상황이다. 현 정부의 대북압박의지가 분명해서 당분간 실현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런 가운데, 서해 꽃게철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으로 남측 어민들의 피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올해 연평도 일대 꽃게 어획량은 5월 현재 51t 수준으로 예년의 70% 수준에 그치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9일 서해 NLL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두고 "먹장구름이 자주 끼면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며 "계단식으로 확대되는 군사적 도발은 기필코 무자비한 보복대응을 유발시키기 마련"이라고 경고해 서해 긴장은 더 고조되고 있다.
이는 서해 꽃게철을 맞아 중국어선 불법조업과 맞물려 자칫 남북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북대화가 단절된 서해는 다리에 가시가 있어 '곶(串)게'라고 불렸던 꽃게로 인해 6월 현재 3차 연평해전 가능성을 안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