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요일

국민과 당원을 배반한 국회의장 후보 결정

 

[정조준66] 국민과 당원을 배반한 국회의장 후보 결정

문경환 기자 | 기사입력 2024/05/18 [00:56]

민심과 당원을 배반했다

 

16일 민주당 국회 당선인 총회에서 예상을 깨고 우원식 의원이 89표를 얻어 80표를 얻은 추미애 당선인을 누르고 국회의장 후보가 되었습니다. 이 결과는 국민과 민주당 당원을 배반한 것입니다. 

 

미디어토마토가 4월 3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국회의장 선호도에서 추 당선인이 40.3%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정성호 의원 6.0%, 조정식 의원 5.9%, 우 의원 4.7% 등이 나왔습니다. 추미애:우원식의 비율이 대략 9:1 정도로 나온 것입니다. 민주당 지지층만 놓고 보면 추미애 70.6%, 우원식 3.7%로 비율을 따지면 대략 19:1 정도로 더 벌어집니다. 다른 여론조사들도 대체로 추 당선자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습니다. 

 

6:4, 7:3이 뒤집어지면 배반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려운데 9:1, 19:1이 뒤집어지면 이건 명백한 배반이고 배신입니다. 

 

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선출 결과는 앞으로 민주당이 22대 국회를 국민, 당원의 마음과 다르게 운영할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혁신공천이라 여기고 새로 당선된 의원들은 21대 의원들과 달리 국민과 당원의 뜻을 잘 받들어 실천할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가 허망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민주당은 국민이 압박하고 견인해야 할 대상임이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이재명 대표의 지도력 문제?

 

13일 자 한겨레 기사 「민주 국회의장 후보, ‘친명’ 아닌 추미애로 정리되나」는 “국회의장 후보 경선(16일)을 나흘 앞둔 12일 친이재명계의 조정식(6선)·정성호(5선) 의원이 잇달아 후보직에서 물러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의중이 또렷해졌다. 이른바 ‘명심’이 ‘원조 친명’ 측근이 아닌 개혁성과 당심을 앞세운 추미애 6선 당선자를 향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봐도 ‘명심’은 추 당선인이었던 것입니다. 

 

기사는 특히 친명계 핵심인 박찬대 원내대표가 조정식, 정성호 의원을 만나 “당의 주인인 당원이 뽑은 국회의원이 당원과 다른 결론을 내리면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라며 불출마를 종용하는 등 ‘교통 정리’를 했다고 전하면서 ‘명심’은 추 당선인이 확실하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명심’이 추 당선인이었는데 ‘명심’과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라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지금이 이 대표의 권위와 당내 장악력이 제일 강력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이 대표 뜻대로 일이 안 되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민주당 지지자 중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낙연 전 대표에게 실망하고 질려서 이 대표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민주당을 ‘이재명 민주당’으로 만들면 좋아질 거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원과 국민이 총선에서 이재명 민주당을 만들어줬는데 정작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이 대표의 생각과 별도로 움직인다? 그러면 이재명 민주당을 향한 지지자들의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이재명 대표의 변심?

 

이 대표가 추 당선인을 밀다가 나중에 우 의원으로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습니다. 

 

추 당선인은 13일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 대표가 ‘잘해주시길 바란다’고 얘기했다. 다른 후보들한테는 그렇게 안 했다”라며 이 대표가 자신을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우 의원도 같은 방송에 나와 “이재명 대표가 ‘국회는 단호하게 싸워야 하지만 한편으로 안정감 있게 성과를 내야 된다는 점에서 우원식 형님이 딱 적격이죠’라고 말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모순되는 상황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이 대표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으니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이틀 사이에 이 대표가 추 당선인에서 우 의원으로 지지 후보를 바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개연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와 추 당선인은 대선후보 경선에 나와 경쟁했습니다. 이 대표에게 추 당선인은 대선후보급 경쟁 상대입니다. 반면 우 의원은 대선후보급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또 이 대표는 그간 추 당선인보다 상대적으로 ‘고구마’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래서 추 당선인이 국회의장이 되면 이 대표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대표가 불안해할 요소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 의원은 오랫동안 이 대표와 호흡을 맞춰온 순응형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대표의 마음에 안정감을 줬을 수 있습니다. 우 의원도 이런 면을 친명 쪽으로 꾸준히 설득해서 이 대표의 마음을 바꿨을 수 있습니다. 

 

이변의 가능성은 이재명이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국회의장 후보 선출의 이변 가능성은 처음부터 이 대표가 만들었습니다. 

 

원래 국회의장은 관례에 따라 원내 1당의 최다선, 최고 연장자인 추 당선인이 국회의장으로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친명계 조정식 의원이 관례를 깼습니다. 조 의원은 “‘명심’은 나다. 이재명 대표와 당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국회의장이 돼야 (한다)”라며 국회의장에 도전했습니다. 조 의원이 이 대표와 상의 없이 단독으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 이 대표는 처음에 추 당선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조정식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듯합니다. 

 

조 의원이 출마하자 ‘추대’라는 관례가 깨지고 ‘경선’을 하게 됐으며 경선 공간이 열리자 정성호 의원, 우원식 의원도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이 대표는 9일 병원 입원 직전 추 당선인과 여러 측근에게 “국회의장 선거 과열이 걱정된다. 순리대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순리’대로 추 당선인을 추대하는 방향으로 몰아갔으면 우 의원도 출마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대표가 ‘선거 과열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도 절대화하면 안 된다

 

국민과 당원이 추 당선인의 국회의장 도전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전 정권 시기 법무부장관으로서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격렬하게 싸운 ‘추-윤 갈등’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추 당선인은 2020년 1월 법무부장관에 취임하자 곧바로 검찰 인사를 단행해 윤석열 총장 측근을 좌천시켰고 그해 말 윤 총장을 직무에서 배제하고 징계에 회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추 당선인만큼 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강경하게 대처한 민주당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윤 총장의 기세에 겁을 먹고 추미애 장관을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사퇴 압박을 넣어 내리눌렀습니다. 

 

국민은 윤 대통령에게 당한 피해자이면서도 잘 싸운 추 당선인이 국회의장이 되어 윤 대통령을 제압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특히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무도하게 행사할 때 국회의장이 나서서 무력화시키는 통쾌한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국민이 추 당선인을 원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 추 당선인이나 우 의원이나 본질을 보면 민주당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추 당선인은 “협치가 아닌 민치”를 선택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추 당선인의 과거 경력을 보면 ‘민치’에 부합하는 행동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법무부장관을 사퇴하라고 압박했을 때 추 당선인은 끝까지 사퇴를 거부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민은 윤 총장과 끝까지 싸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추 당선인이 끝까지 사퇴를 거부했다면 문 전 대통령은 사퇴 압력을 거두든, 해임하든 선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 전 대통령 성향상 자기가 직접 해임해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것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사퇴 요구를 거뒀을 것입니다. 그렇게 국민 뜻을 받드는 ‘민치’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추 당선인은 당시 ‘민치’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추 당선인은 당시 문 전 대통령이 요구해서 사퇴했다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당시 국민이 원하는 대로 버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성이 없습니다. 자기 부족함은 없고 문 전 대통령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만 이야기합니다. 

 

물론 추 당선인이 개혁적이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추 당선인은 민주당 내에서 손꼽히는 개혁 정치인입니다. 하지만 추 당선인이 가진 한계도 잘 봐야 합니다. 어떤 정치인이든 마찬가지지만 추 당선인도 절대화해서 보면 안 됩니다. 추 당선인도 이 대표와 마찬가지로 국민이 직접 압박, 견인해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특검법 국회 논의 존중” 공수처장 후보자에 발끈한 국민의힘

 


조정훈, 공수처장 후보자에게 “공수처 위해 일하면 안 된다”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자가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2024.05.17. ⓒ뉴시스

‘채 상병 특검’에 관한 국회 논의를 “존중한다”는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자의 답변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인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이 발끈했다.

김 의원은 17일 열린 공수처장 인사청문회에서 오 후보자의 답변에 “고발내용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그 말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뭘, 특검 입법 존중한다는 그 말을. (왜 하나?) 고발사건이나 충실히 수사하라”라고 꾸짖듯 말했다.

오 후보자는 이날 여러 차례 ‘채 상병 특검’에 관한 국회의 논의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특히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순서에서,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반복하여 행사하며 국회의 입법을 가로막는 행위를 언급하며 “국회의 권능은 매우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듣고 싶은 답변이 나오지 않자, 김 위원장이 직접 끼어들어 “공수처장, 작년 9월 5일 민주당에서 공수처에 고발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틀 뒤에 이거 관련한 특검법이 발의됐다. 그걸 알고 답변해야 할 거 아닌가”라며 이같이 나무란 것이다.

김도읍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2024.5.17. ⓒ뉴스1

특검 막기 위해 “공수처 수사 잘 한다”
공수처 폐지 위해 “공수처 못한다”
공수처·특검 두고 이랬다저랬다 국민의힘 의원들


오 후보자에게서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모순되는 질문과 다소 기이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먼저,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국회에서 공수처) 인력도 안 늘려주고, 수사범위도 협소하고, 수사권과 기소권도 불일치하면, 솔직히 어떤 공수처장이 와도 (수사) 못할 것”이라며 “3년 뒤 (임기가 끝나) 소임을 밝힐 때 ‘이럴 바에는 없애자’ 이런 양심선언을 할 의사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하지만 오 후보자는 조 의원이 바라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오 후보자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 관련해서도 업무를 착실히 하겠다. 염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고 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조 의원은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런 결론을 내릴 양심과 용기가 있나”라고 재차 물었고, 이번에도 오 후보자는 “공수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하겠다”면서 답변을 이어가려고 했다. 당황한 조 의원은 답변을 자르며 “공수처를 위해 일하면 안 된다”라고 강요했다. 조 의원은 “3년 해봤는데 공수처는 태어나면 안 될 조직이었다고 결론 내주는 게, 우리 사회 엘리트이자 법률적으로 해박한 경험을 가진 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오 후보는 “저는 공수처가 권력기관 견제와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를 위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조직이 되도록 만들어가겠다”라고 밝혔다.

오동운 후보자에게 질의하는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 ⓒ국회방송 화면 갈무리

공수처 무용론·폐지론에 관한 조 의원의 질의에서 의미 있는 답변이 나오지 않자,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은 정반대의 논리로 특검이 불필요하다는 답변을 유도했다.

장 의원은 “(일반론적으로) 필요하면 대통령에 대한 소환조사와 대통령실에 대한 압수수색도 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공수처에서 진행하는 다른 사건에 비해 (이 사건은) 수사 속도가 늦지도 않고, 충분히 수사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왜 특검이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도 오 후보자는 국민의힘이 원하는 답변을 꺼내지 않았다.

오 후보자는 “특검에 관한 입법부 논의는 존중하고, 장기적으로는 공수처가 수사권과 기소권이 일치되어서 꼭 채 해병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런 특검 수요가 있을 때 공수처에 수사를 맡길 수 있는 있었으면 하는 게 제 소신”이라고 답했다.

한편, 공수처장 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 29일 판사 출신 오동운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 변호사를 제2대 공수처장 후보로 선정했다. 당초 여권 측 후보추천위원들은 공수처장 후보자로 ‘윤심’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선호했으나 김 부위원장은 추천 후보가 되지 못했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오동운·이명순 중 판사 출신 오 변호사를 공수처장 최종 후보로 지명했다.


“ 이승훈 기자 ” 응원하기

군인 김오랑, 그리고 박정훈…정부는 국민에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박세열 칼럼] 아직도 계속되는 이 '모욕감'들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5.18. 05:03:06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1995년 검찰이 내놓은 논리다. 당시 이 논리를 내세웠던 검찰에 따르면 내란 미수는 처벌할 수 있지만 내란이 기수(행위 완료)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윤석 검사(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이 법리를 설명하며 이성계가 쿠데타로 이씨 조선을 세웠는데, 조선이 이성계의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검사들은 그런 족속들이다. 이 발언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되자 검사들은 새로운 논리인 '사정변경의 원칙'을 내걸고 수사에 돌입한다. 법률 행위의 기초가 된 사정이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을 받게 되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뒤집게 됐다는 말이다. '예견치 못한' 중대한 변경이란 김영삼 정권의 등장이 되겠다.

'모욕감'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에 온 국민은 집단적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게 검찰은 '전두환 신군부'를 위한 '완벽한 형법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국가가 국민이 모여 이뤄진 것이란 사실은 망각했다. '성공한 쿠데타'라는 집단 기억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 검찰 집단이 간과한 건 국민들이 겪을 모욕감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김오랑 소령이나 정선엽 병장 같은, 신군부의 군사 반란에 저항한 '제복 입은 영웅들'이 있어서였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반란의 '증거'를 남겼고, 역사는 일부나마 바로 세워질 수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서울 마포구 웨스트브릿지 라이브홀에서 음악인, 연극인, 역사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열린 '오픈콘서트-기억록'을 16일 저녁에 찾았다. '사랑 많은 세상'이라는 단체가 주관해 '기억'을 주제로 한 이 콘서트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키워드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의 하나회에 맞서다 전사한 고(故) 김오랑 소령(후에 중령으로 추서)을 선정했다. 작곡가 윤일상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박학기, 김장훈, 이정렬, 손병희, 배우 이기영, 이원종 등이 참여해 제각각의 재능을 녹여 김오랑을 기렸다.

최근 영화 <서울의봄>에서 많은 이들이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김오랑(극중 이름은 오진호)의 마지막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잊혀져 가던 김오랑을 불러낸 건 1000만 영화였지만, 매해 5월이 되면 제각각의 기억을 더듬어 온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개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기억은 개인적이지만 또한 집단적인 것이다. 콘서트장을 꽉 메운 사람들과 함께 앉아 하나의 기억을 위해 집단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기억의 원동력은 저마다 다를 터다. 내가 김오랑을 떠올리며 내내 떨치지 못한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된다.

김오랑은 같은 관사에 사는 '절친' 박종규 중령에 의해 교전 중 전사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김오랑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마치 "죽은 강아지(김오랑의 조카 김영진의 말)" 마냥 묻어버렸다. 국가를 지키려 한 군인을 암매장해버린 것은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남겼고, 아직도 그 모욕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김오랑의 모친은 홧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의 부인은 눈이 먼 채로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을 뛰어다니다 실족사했다. 온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했는데, 대한민국 군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김오랑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다. 좋다. 이 모욕감은 기억의 집단화를 자극한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사진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군사 반란은 전두환이 주도했지만, 그걸 완료해 '성공한 쿠데타'로 만든 사람은 노태우다. 노태우는 전두환이 위기에 빠지자 국가 안보의 대의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전방을 지키던 9사단을 출동시켜 서울 광화문을 점령했다. 김오랑과 같은 군인들의 죽음을 기어이 '개죽음'으로 만들어 모욕감을 줬다. 노태우는 2021년 죽었는데 그가 속죄 했는지 안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나라는 그를 국가장으로 예우했다. 내란죄로 처벌받은 사람도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얘기다. 노태우에 대한 예우는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윤석열 정부라고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석비서관이 노태우 정권의 언론인 회칼 테러를 기자들 앞에서 농담이랍시고 내뱉어 또 다른 모욕감을 주고 떠났다.

그 노태우의 딸 노소영 씨 측은 최근 이혼 소송 과정에서 재산 분할을 요구하면서 "아버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경 비자금 300억원을 사돈인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건넨 뒤 어음을 담보로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기여해 일궈낸 '부'가 '노태우 비자금'에 근거하고 있다고 당당히 주장하는 그 모습에 국민들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순수한 '탐욕'은 얼굴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사 반란의 후손들이 군인 김오랑을 모욕하고 있고, 그 모욕감은 1979년 12월과 1980년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단단하게 벼려지고 있다.

총선에 패배한 집권 세력은 "방향은 옳았지만, 국민이 체감하기에 부족했다"고 강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모두 발언을 통해 지난 2년의 국정 추진 상황을 보고한다면서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한민국의 외교 지평을 넓혔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렇게 잘 하고 있다. 국민들은 왜 몰라주고 있나'라는 식이다. 국가를 잘 운영한다고 (실제 잘 운영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해서 선거를 이길 순 없다. 정치란 국가를 이루는 '유권자'들의 복합적인 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존감'을 건드리는 순간 모욕을 느낀다.

그런 모욕감들이 이번 총선을 윤석열 대통령의 심판으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죽은지 80년만에, 그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철거당할 상황에 처했다. 집단 기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런 인식들이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줬다. 스스로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착각한 자들은 타인에게 '모욕'을 주면서도 그것이 '모욕'인지 모른다. 해병대 채상병 사건 외압 의혹이 특히 그렇다. 채상병 사망 진상 규명을 위해 초동 조사를 맡은 해병대 박정훈 대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한 후에 갑자기 '항명 수괴죄(후에 항명죄)'로 입건됐다. 그가 조사해 국방부장관 결재를 거친 서류에 적혀 있던 채상병 사망의 책임자 리스트는 '윗선'의 개입으로 갑자기 쪼그라들었고, 채상병 죽음에 책임을 느껴야 할 '별'들은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급급하다.

부당한 지시에 항의했다가 졸지에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혀 재판을 받고 있는 군인 박정훈의 모습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게 대체 뭐겠나? 군인 김오랑을 야산에 묻어버리고, '성공한 쿠데타'를 위해 '불의'에 저항한 그의 행동을 역사에서 지우려 한 것들과 같은 모욕감을 주는 일들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면서 '집단 기억'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모욕 주지 않는 사회는 우리가 품격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다. 거듭 말하지만 정부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줘선 안 된다. 박정훈 대령에게 국가가 행하고 있는 일들이 그걸 지켜보는 국민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는 걸 깨지 못하는 한 윤석열 정부에는 희망이 없다.

아직도 명예회복이 요원한 김오랑 소령을 5월에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그는 군의 본보기같은 인물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김오랑의 명예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모욕감'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김오랑 중령, 박정훈 대령,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박세열 기자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무기를 모두 옮겨라"... 5·18 이튿날 전두환 거품물게 한 경찰이 있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전라남도경찰국 안병하 도경국장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24.05.17 20:30최종 업데이트 24.05.17 21:59

▲ 전남지방경찰청이 세운 안병하 치안감 흉상 ⓒ 연합뉴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실정법 준수가 큰 의미가 없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실정법을 뛰어넘는 저항권 행사가 용인될 수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전두환과 신군부를 향해 총을 들고 무장한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볼 만한 상황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른바 준법투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병하 도경국장이 이끄는 전라남도경찰국에 의해 전개됐다. 신군부의 영향을 받는 내무부 치안국은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지시를 거듭거듭 내렸다. 하지만 전남도경은 총을 내려놓고 시민 안전에 역점을 뒀다. 전남도경은 이런 식의 비협조를 통해 결과적으로 전두환에 맞서는 형국을 만들었다.

1980년 5월 19일, 안병하 국장은 경찰의 총기와 실탄을 광주 시내 제31보병사단(충정부대)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5·18 이튿날에 광주 경찰을 비무장으로 전환시킨 이 소산 조치에 관해 당시의 현지 경찰관 일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5·18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이 쓴 <안병하 평전>은 그런 평가들을 소개한다.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 최아무개(전남도경 상황실)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 안아무개(광주경찰서 수사과)

일선 경찰의 말에서도 느껴지듯이, 전남도경이 계엄사령부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면 1980년 5·18은 '시민군 대 계엄군'이 아니라 '시민군 대 군·경'의 대결이 됐을 것이다. 5·18이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데 전남도경이 일조한 셈이다.

물론 전남도경도 당시 국가권력의 죄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가 작년 12월 26일 펴낸 보고서인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한 연행, 구금, 조사과정 등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건>은 "5·18 기간 중 체포된 사람들은 제31사단, 상무대, 공군 헌병대, 광주교도소, 지역 경찰서/파출소 등으로 연행·구금"됐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전남도경의 지휘를 받는 광주 경찰에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5·18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안병하 국장을 비롯한 전남도경의 발포 거부는 그런 한계점과 더불어 인식될 필요가 있다. 신군부의 인권 탄압에 동조한 측면과, 신군부의 강경진압 요구를 거부하고 총을 들지 않은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병하의 판단

▲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 ⓒ 김종성

1928년 7월 3일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안병하는 도쿄의 중학교와 서울의 광신상고에서 공부한 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이듬해 5월 23일 소위로 임관한 그는 22세 때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춘천전투와 음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러고 나서 5·16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11월에 육군 중령으로 군을 나와 경찰의 길을 걸었다.

지난 9일 경기도 하남YMCA교회에서 인터뷰한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는 "부친은 처음에 경찰 발령을 받고 치안국에 있다가 곧바로 부산중구경찰서장으로 갔다"고 말했다. 특채 형식으로 총경 계급장을 달고 첫 발을 내디딘 34세의 안병하는 그 뒤 승승장구했다. 간첩 검거와 대간첩작전에서 성과를 거둬 내무부장관 표창과 중앙정보부장 표창도 받았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치안국 과장, 강원도경국장, 경기도경국장을 거친 그는 51세 때인 1979년 2월에 전남도경국장에 취임했다. 마지막 임지가 될 광주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쓰러지고, 12월에 전두환이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했다. 이는 안병하의 경찰 내 위상을 높이는 원인이 됐다. 그는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와 막역한 사이였다. 노태우와는 밤중에 만나 술도 마실 정도로 각별했다고 안호재 대표는 말했다.

안 대표는 1980년 전반기 상황과 관련해 "항간에 이야기 돌기로는 부친이 공직자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다 그런 소문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탁하러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랬어요"라고 한 뒤 아버지가 전두환과 가까워진 계기를 설명했다. 아버지가 경찰 지위를 활용해 전두환의 인맥 관리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 안 대표의 말이다.

"전두환이 정치군인이잖아요. 정치군인을 하려면 옛날에는 경찰 없이는 안 됐거든요. 누구를 만나게 해달라는 연락이 오면 (부친이 만나게 해주고). 특히 사업가들."

안병하는 대간첩작전뿐 아니라 시위 진압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안병하 평전>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시위 진압도 남 못지않게 잘한다며 유능한 경찰로 평가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신군부 실세인 전두환·노태우와도 친밀했다. 그랬기 때문에 1980년 5월 19일부터 안병하가 보여준 모습은 전두환·노태우에게는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안병하는 5월 18일 새벽부터 치안본부의 강경진압 지시를 받았다. 평전에 따르면, 손달용 치안본부장은 그와의 통화에서 "계엄당국의 시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안병하의 판단은 이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압 강도를 더 높이면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합세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안 국장은 어떻게든 시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서 시위대가 제풀에 지쳐 가라앉도록 하는 게 서로 피해를 줄이면서 사태를 수습하는 현명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안병하를 움직인 배경

▲ 경기경찰국장 시절 안병하 치안감(왼쪽) ⓒ 안호재

안병하는 시위 진압에 능한 경찰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시민에게 총을 들면 사태가 악화될 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일선 경찰관들에게서 총기를 거둬들였다. 평전에 따르면, 전남도경이 작성한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 상황'이란 문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광주권 2개 경찰서 무기·실탄 및 비밀문건 소산 완료(5.19. 22:00)."

이 조치는 신군부를 경악시켰다. 시위가 들끓는 광주에서 무기를 치워버린 이 사건을 신군부는 황당해 했다. 그런 신군부의 반응을 1980년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작성한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 사건'이란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전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치안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 무기를 폭도들로부터 피탈을 방지하겠다는 소극적인 발상하에 치안본부장에 건의한 후 경찰 2개 서(署) 및 4개 기동대의 무기 약 1300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소개시킴으로써 5.21. '진도개 둘'이 발령되고 5.22. 자위권이 발동되었음에도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하였고."

광주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한 안병하의 조치에 대해 '친한 후배' 전두환은 한심하다는 어투로 혹평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전두환은 광주 상황이 확산된 것은 안병하 국장 때문이라며 이렇게 서술했다.

"광주사태 초기에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데 시위진압을 지휘해야 할 전남경찰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며 경찰국 청사를 떠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연락두절 상태가 된 것이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가 치안본부장뿐 아니라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김종환 내무부장관 등의 압력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 압력하에서도 안병하가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소신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4월 7일 자 <경향신문>에 보도됐듯이, 안병하는 일선 경찰관들과의 소통에 신경을 쓰는 상관이었다. 그래서 경찰 직원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라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군부 핵심부가 자신과 절친하다는 점도 자신감의 요인이 됐을 수 있다.

그에 더해, 안호재 대표는 참전 군인인 아버지가 전쟁 경험이 없는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 앞에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경찰이라면 마땅히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소신에 더해, 그런 소신을 관철시킬 만한 자원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 1980년 5월의 안병하를 움직인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전남도경이 총을 들었다면

▲ 2018년 10월 22일 전남지방경찰청은 5·18 당시 순직 경찰관 4명의 부조상을 청사 입구에 세우고 '5·18 순직경찰관 부조상 제막·추념식'을 열었다. 사진은 함평경찰서 소속 정충길 경사와 이세홍·박기웅·강정웅 경장의 부조상과 안병하 치안감 흉상(왼쪽)의 모습. ⓒ 연합뉴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뒤인 5월 25일, 안병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의 강경진압 요구에 대해 "경찰이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발포를 거부했다. 다음날 그는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8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6월 2일 의원면직 형식으로 경찰복을 벗은 그는 6월 13일 귀가한 뒤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8일간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8년간이나 이어졌고, 국회 광주청문회 출석 요구를 받은 상태에서 1988년 10월 10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에서 쫓겨난 뒤에 안병하는 유럽과 미국의 병원들을 다녔다. 고려대 의대 구로병원, 국립경찰병원, 국립의료원에서도 치료를 받았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은 이유를 육체적 요인보다는 정신적 요인에서 더 많이 찾았다. 후배 군인들에게 고문과 수모를 당한 것이 훨씬 더 큰 상처가 됐다고 말한다. 안병하는 고문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안병하가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자신이 참전 군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 자부심이 후배 군인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안병하는 사후 5년 뒤인 1993년에 5·18 피해자로 인정됐다. 2017년에는 '제1호 경찰영웅'으로 선정되고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특진됐다. 2019년에는 전남경찰청에 안병하공원이 개장됐다.

전두환은 안병하 때문에 광주 상황이 악화됐다고 핑계를 댔다. 경찰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계엄군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고 둘러댔다. 전남도경이 총을 들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지는 확단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안병하가 총을 치우지 않았다면 전남도경이 국민들을 상대로 무기를 드는 역사의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점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남도경 #광주경찰 #5·18발포

프리미엄 김종성의 '히,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