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7일 수요일

"한미워킹그룹이 심리적 속박...남북협력 한번은 시도해봐야"

미국 견제, 북한 호응이 관건

정부가 최근 북미관계 교착 상황을 돌파할 수단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성과를 올해 안에 내려는 의지를 표명한 가운데, 핵심 사업으로 거론되는 남북철도 연결과 개별 관광, 의료보건 협력 분야의 실효성을 둘러싸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27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주제로 개최한 제1회 전파(前派) 포럼에 토론자로 참석한 김기정 연세대학교 교수는 "정부가 5.24 조치의 운을 띄운 것은 올해 남북관계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진단했다.

앞서 지난 20일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5.24 조치는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유연화와 예외조치를 거쳐왔다"며 "사실상 그 실효성이 상당 부분 상실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수는 향후 남북 협력의 구체적 사업으로 "남북 철도 연결과 개별 관광, 의료 및 보건협력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철도 연결의 경우 (제재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유엔 대북 제재에서 공공재는 예외라고 염두에 두고 있다. 또 의료‧보건 협력이나 개별 관광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일차적으로 (남북 관계 개선의) 목표로 설정해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18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2018~19년에 걸쳐 두 번의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음에도 2020년 현재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한의 전략적 선택의 폭이 좁혀졌고 거기에 남북관계도 포함됐다"며 "동북아 전체 구도에서 보면 (북한이) 중국에 기대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2018~19년이 지나면서 한미 워킹그룹이 심리적인 속박을 준 점이 아쉬웠다. 원래 한미 워킹그룹을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의도가 좀 넘어서서 이게 한국 정부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상황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제재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는 큰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며 "2019년 이전으로 남북관계가 되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번쯤 시도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을 설계한 주요 인사 중 한 명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최종건 국가안보실 평화기획비서관 등과 함께 이른바 '연정(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라인의 핵심 인사로 꼽힌다.

▲ 27일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주제로 제1회 전파포럼을 개최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북한이 여기에 호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도 나왔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김성한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장(전 외교부 차관)은 "북한의 시선은 여전히 워싱턴에 있다. 북한이 말한 새로운 길 역시 (미국 대선이 있는) 11월까지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즉 뭘하든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것이고 여기에 99.9% 의 신경을 쓰고 있다"며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5.24조치를 해제하고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북한이 여기에 호응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김 원장은 "통일부 대변인의 (5.24조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정부가 북미 관계 촉진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남북관계 개선이 가능한 부분을 찾아서 성과를 내보겠다는 것으로 읽힌다"며 "어떠한 전략적 계산 하에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를 이끌어내려면 미국이 제시한 방안 (미북 연락사무소 개설, 종전선언 논의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신경써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 개별 관광이나 철도 연결 추진하겠다고 하면 한국이 유엔의 제재를 앞장서서 허물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남북관계는 보건 협력 지원에서 가능한 부분을 하는 정도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와 관련 서주석 전 국방부 차관은 "통일부에서 최근에 취하고 있는 대책들은 국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는 것 같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6.15 20주년 즈음해서 인도적 문제를 중심으로 한 메시지가 나와야 하지 않겠나 싶다"고 말해 남북 간 인도적 차원에서의 돌파구를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늙은 기자

한명숙 사건의 ‘첫 수사’-직권남용,위증교사,그리고 뇌물
강기석 | 2020-05-28 08:22:2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요 며칠 여기저기 방송 출연 하느라고 바빴다. 그제는 KBS 라디오 「최경영의 이슈 오도독」에 출연했고 어제 녹화한 뉴스타파 「죄수와 검사 완벽 정리 좌담회」가 조금 전 업로드됐다. 내일은 TBS 「정준희의 해시태그」에 등장할 예정이다.
모두 최근 뉴스타파가 시리즈로 특종보도한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서의 검찰 측 증인 조작 의혹과 관련한 프로그램들이다.
나는 2010년 1월부터 2015년 8월 20일까지 이루어진 한명숙 전 총리 1, 2차 사건 재판 40여 차례를 거의 빠짐없이 방청하고 취재해 보도했다. 비록 오래 전 신문사를 떠나(2005년 1월) 정규 기자는 아니었지만 내 평생 그때처럼 치열하게 현장을 지키며 ‘기자질’ 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 적은 일찍이 없었다.
내가 정치 사회적으로 비중있을 뿐 아니라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방송프로그램에 잇따라 출연하게 된 것은 순전히 한 총리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 분노하고 그 현장을 지치지 않고 지킨 덕분이다.
「최경영의 이슈 오도독」에서는 박주민 의원과 주로 검찰개혁에 대해 이야기했고 뉴스타파 좌담회에서는 김용민 당선인(변호사), 김경래, 심인보 기자와 함께 한명숙 총리 사건 조작 의혹을 전면 재검토했으며 「정준희의 해시태그」에서는 주로 언론개혁에 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던 인물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평소 하고 싶었던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주제로 실컷 떠들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검찰과 언론. 이 무뢰배 집단들을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우리나라가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때로 나아간 것 같이 보일지라도 곧 뒷걸음질 치게 될 것이다.


[완벽정리]한명숙 사건의 ‘첫 수사’-직권남용,위증교사,그리고 뇌물(뉴스타파 / 김경래 / 2020-05-27)
뉴스타파는 지난 5월 6일부터 <죄수와 검사Ⅱ: 한명숙>시리즈를 다섯 편 연속 보도했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줬다고 검찰에 진술한 증인 한만호가 감옥에서 쓴 비망록을 입수해 공개했다. 비망록에는 검찰의 회유와 추가 기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허위 진술을 한 과정과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은 이유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뉴스타파는 또 한만호의 진술 번복 뒤 급박해진 검찰이 죄수들을 회유하고 협박해 한만호를 음해하는 거짓 증언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이 죄수의 미성년 자녀까지 이용해 협박하고, 죄수에게 접대까지 받았다는 죄수H의 증언도 보도했다.
▲ 뉴스타파가 발굴해 보도한 한만호 씨의 옥중 비망록. 이 속에는 한 씨가 검찰에서 거짓진술을 했다는 이유,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배경 등이 상세히 적혀있다.
죄수와검사Ⅱ 뜨거운 반향..법무부는 ‘진상 조사’ 움직임
반향은 뜨거웠다. 유튜브만 따져도 누적 조회수는 200만 건이 훌쩍 넘었다. KBS와 MBC를 비롯한 주류 언론들도 관련 기사를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도 ‘재조사’에 대한 입장들이 터져나왔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해 “정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명숙 사건 ‘입체적 조망’ 위한 특별 좌담
뉴스타파가 보도한 내용은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전반이라기 보다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보인 행태였다. 선거에 개입하고 재소자를 겁박하는 수준을 넘어 증인과 증언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한명숙 사건의 또 다른 축은 1심과 2심, 3심에 걸친 재판에 대한 논란과 당시 정치적인 맥락이다. 정치적, 사법적 맥락을 포함해 검찰의 수사과정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이른바 ‘한명숙 사건’은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뉴스타파는 이 같은 ‘입체적 이해’를 돕기 위해 ‘특별 좌담’을 마련했다.
▲ 왼쪽부터 김경래(뉴스타파 기자), 김용민(변호사, 국회의원 당선인), 강기석(언론인,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심인보(뉴스타파 기자). 이들이 말한 ‘한명숙 사건의 모든 것’은 방송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한명숙 사건 재판을 직접 참관하고 관련 책(<무죄>)을 집필한 강기석 전 기자(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와 한명숙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고 회자되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을 맡았던 김용민 변호사(국회의원 당선인)가 함께 했다. <죄수와 검사Ⅱ: 한명숙> 시리즈를 보도한 김경래, 심인보 기자도 생생한 취재 뒷이야기를 전했다.
재수사가 아닌 ‘첫 수사’… 뇌물도 포함해야
김용민 변호사는 한명숙 사건과 관련해 흔히들 이야기하는 ‘재수사’가 아니라 지금부터 사건의 ‘첫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가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 수사를 했다면, 지금 해야 하는 것은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위증교사 등 범죄 행위를 저질렀는지 밝히는 ‘첫수사’여야 한다는 뜻이다.
김 변호사는 또 죄수H가 증언한 ‘검찰청 스시 배달’(죄수와 검사Ⅱ 5편 참고)과 관련해, 죄수가 검사나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으면서 음식을 조달해 접대를 했다면 뇌물에 해당된다며,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수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죄수H는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영수증과 출입기록이 확인된 스시 접대 뿐만 아니라 수시로 검사들에게 고급 음식을 배달해서 먹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387 

나눔의집 일본인 직원 "책장에서도 의문의 돈봉투 발견... 장부가 없다"

20.05.28 07:15l최종 업데이트 20.05.28 07:15l
 나눔의집 국제실장 야지마 츠카사씨.
▲  나눔의집 국제실장 야지마 츠카사씨.
ⓒ 김종훈
 
"나눔의집 민주화."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집에서 일하는 일본인 직원 야지마 츠카사씨가 25일 <오마이뉴스>를 만나 '내부고발'의 이유를 묻자 꺼내든 말이다.

나눔의집에서 '국제실장'으로 일하는 그는 "2019년 2월에 다시 나눔의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느낀 것이 '나눔의집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라면서 "안신권 소장과 김정숙 전 사무국장 등 운영진과 조계종 출신 이사진들은 철저하게 비즈니스 마인드로 할머니들과 직원들을 대했다. 그것이 호텔식 요양원을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야지마 츠카사씨가 본 '나눔의집' 사태
야지마씨는 지난 19일 나눔의집에서 근무하는 6명의 동료들과 함께 "법인이 막대한 후원금을 모금해 70억 원이 넘는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실상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무료 양로시설일 뿐 그 이상의 치료나 복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면서 "이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국민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한 돈은 대한불교조계종의 노인요양사업에 쓰이게 될 것"이라고 폭로했다.

강일출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활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은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집'이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2019년 한 해 동안 법인이 거둬들인 후원금은 총 26억 150만 원이지만 이 가운데 피해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시설로 넘어간 '전출금'은 6400만 원에 불과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야지마씨는 2003년 초부터 2006년까지 3년간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2년 봄과 가을 나눔의집을 찾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후 야지마씨는 2006년 독일 여성과 결혼한 후 그곳에서 13년을 머물렀다. 독일에 머물면서도 그의 생활은 '위안부 피해자'들에 집중됐다. 그는 "나눔의집에서 일하다 독일로 간 건데, 그곳에서도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과 영화제를 진행했다. 이옥선 할머니도 독일에 두 번 모셔서 증언 활동을 했다"라면서 "13년 동안 독일에 살다왔지만 이번 복귀도 그 연장선에 있다"라고 설명했다.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2015년부터 있었다. 당시에는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 2018년에 이옥선 할머니의 건강이 너무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먹게 됐다. 돌아가야겠다고."

2019년 2월 그는 나눔의집으로 돌아왔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야지마씨에게 궁금했던 것이 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일하는 동안 지금과 같은 문제가 없었느냐는 것이다. 야지마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때는 후원금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다. 후원금 규모도 지금과는 차이가 컸다. 다만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에게 직접 들은 말이 하나 있다.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전보다 위안부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많은 후원금으로 이어졌다고." 

야지마씨는 당시 일화도 덧붙였다.

"지금도 기억한다. 나눔의 집 운영진 중 한 명인데 대외적으로는 일본군 피해자 할머니들이 있어서 나눔의집이 있고 자신도 월급받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할머니들이 운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면 '착각하지 말라. 나눔의집이 있어야 할머니들이 편하게 생활하는 거'라는 말을 했다."
 
 나눔의집 전경
▲  나눔의집 전경
ⓒ 김종훈
 
2006년 독일로 떠나면서 그는 후임으로 무라야마 잇페이씨를 소개했다. 무라야마 잇페이씨는 야지마씨에 이어 2006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약 5년 동안 나눔의집 역사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초 "할머니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 운영, 할머니의 생활복지를 충실히 할 것, 할머니의 식사와 영양에 관심을 기울일 것, 후원금의 출납을 투명하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가 '업무지시 미이행'을 이유로 해고됐다고 한다. 

독일에 있던 야지마씨는 "무라야마 잇페이씨에게 연락이 왔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복기했다. 

"먼 곳에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정말로 미안한 건 할머니들에게다. 내가 나눔의집에 없었던 13년 동안 후원금이 원래의 목적대로 쓰였다면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포함해 다들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들 드시고 싶은 거 다 드시고, 가시고 싶은 데 다 가고, 입고 싶은 거 다 사드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러라고 후원해 주신 건데, 운영진은 호텔식 요양원 짓는다고 하나도 쓰지 않았다."

후원금의 행방

야지마씨는 나눔의집에 복귀한 직후부터 내부 직원들과 함께 '나눔의집 민주화'를 위해 연대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 폄훼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 내부에서 우선 해결하고자 했던 거다.

야지마씨를 비롯해 내부고발 직원들은 2019년 3월부터 8월까지 3회에 걸쳐 내부개선안을 작성해 운영진과 이사회에 올렸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직원들은 횡령 의혹도 제기했다. 무라야마 잇페이씨의 후임으로 온 일본인 A직원이 자신의 급여 중 일부를 나눔의집 기부금으로 김정숙 사무국장에게 전달했지만 행방이 묘연해진 것. 그 금액이 2700만 원 상당이다.

"이 사실도 우연히 발견했다. 내부고발자 중 한 명이 A씨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동안 김 전 사무국장을 통해 기부해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김 전 사무국장이 관련 내용을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김 전 사무국장을 찾아 관련 이체 기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사무국장은 '이름 없이 기부했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더라."

직원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김 전 사무국장이 지난해 8월 돌연 잠적해 사실 확인 불가 상태가 됐다. 김 전 사무국장의 행방은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다.

후원금을 관리하던 김 전 사무국장이 떠나자 직원들은 회계 업무를 확인하려고 그의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놀랍게도 거기서 엔화와 달러, 원화 뭉치가 든 봉투가 나왔는데 현금만 624만 원이었다고 한다.

지난 4월 야지마씨는 김 전 사무국장의 책상 근처 책장에서 다시 한 번 의문의 돈봉투를 발견했다. 당시 야지마씨는 나눔의집 인포센터에 있는 책장에서 위안부 관련 일본 자료를 찾다가 책장에 '일본관련'이라고 적힌 폴더를 발견했다. 폴더를 열어보니 봉투가 나왔다고 한다.

"봉투에 연도가 적혀 있었는데 2014년, 2015년, 2016년이었다. 2014년만 따져도 6년 전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시민들이 할머니들 위해 쓰라고 건넨 돈인데 그대로 방치했다. 문제는 이렇게 현금으로 들어온 후원금을 기록한 장부가 없다는 점이다."

야지마씨는 인터뷰 도중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화가 난다. 할머니들을 위해 쓰라고 후원금이 전달된 건데 그 금액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태다. 이것이야말로 할머니와 후원자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야지마씨를 포함해 직원들은 지난 3월 김 전 사무국장을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김 전 사무국장은 횡령 및 배임 혐의 이외에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준 의혹도 받고 있다.

나눔의집 직원 야지마가 바라는 것
  
 나눔의집 국제실장 야지마 츠카사씨.
▲  나눔의집 국제실장 야지마 츠카사씨.
ⓒ 김종훈
 
이날 인터뷰에서 야지마씨는 "나눔의집 사태의 데드라인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조계종 이사회에서 새로운 사람을 뽑아서 보내도 문제는 반복된다. 나눔의집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조계종이 나눔의집에서 100% 손을 떼면 된다. 시민 여러분들이 나눔의 집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대책위'를 만들어 저희와 함께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 문 열고 민주적으로 해결해나가겠다."

야지마씨는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나눔의집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을 살피며 식민지 문제, 전쟁범죄, 여성범죄, 노동착취 등을 세계인들과 공유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가 법적인 배상을 받고, 일본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사과를 받아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마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문제처럼 공유되고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역사를 계속 대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오마이뉴스>는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의 답을 듣기 위해 전화를 걸고 문자를 남겼지만 안 소장은 응답하지 않았다. 나눔의집 법인에도 문의를 했으나 "여기저기서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안 소장이 통화가 어려운 상태"라면서 "질문은 전해드리겠다"라는 답만 전해왔다.

한편 정의기억연대는 26일 성명을 통해 "오늘 새벽 나눔의집에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별세하셨다"라면서 "할머니와 유가족 뜻에 따라 모든 장례 과정은 비공개로 한다.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라고 밝혔다.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17명으로 줄었다.

"방역·의료협력 계기로 관광산업 연계 모색하자"

민경태 교수, 민화협 통일정책포럼서 제안...'한반도 뉴딜구상으로 평화경제 확대'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
승인 2020.05.27  11:48:53
페이스북트위터
  
▲ 민경태 통일교육원 교수는 26일 민화협 통일정책포럼에서 소강상태인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보건의료 협력을 계기로 삼아 남북경제협력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개성에 남북협력 의료센터를 설립해서 의료산업 클러스터로 만들 수도 있고 의료진 육성과 교육의 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에 남측의 의료기술과 헬스산업을 접목해서 국제적인 의료·휴양관광지로 개발하면 대규모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호텔·리조트·컨벤션 산업의 노하우를 북측에 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유례없는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이른바 'K-의료', 'K-방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소강상태의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상호 필요가 절실해진 보건·의료 협력을 계기로 삼아 남북경제협력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민경태 통일부 통일교육원 교수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2020 통일정책포럼-한반도 평화와 남북경협을 위한 제안'에서 '현 시점에서 북이 가장 필요로 하는 보건·의료협력으로 시작하여 의료협력과 관광산업을 연계하는 상호보완적, 상생적 협력모델을 발굴'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민경태 교수가 주목한 대목은 최근 북에서 집중하고 있는 평양종합병원 건설 계획. 그리고 자력갱생에 기초한 경제건설을 강조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을 들여온 원산 갈마, 양덕 온천, 삼지연 등 관광사업이 코로나 여파로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코로나 확산 와중에 올 10월 당창건 75돌까지 완공을 목표로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전례없는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미루어 의료분야 수요가 시급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민 교수는 특히 평양종합병원 건설이 만수대언덕 김일성·김정일 대동상과 축선상에 있는 대동강변 당창건기념탑 앞 비워 놓았던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에 주목했다.
도시계획을 고민하는 실무자의 결정이 아니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마음먹고 파격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번 더 들여다보면 김 위원장이 자력갱생 정면돌파전의 돌파구로 생각했던 관광이 난항에 부딛힌 상황에서 당면한 현안으로 떠오른 의료시설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부터 제안하는 것이 좋겠다"며 "우선 보건·의료 분야 협력 방안부터 모색하되 단순한  의약품·물자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첨단 의료기기 제공이나 운영인력과 의료진 육성 등 의료시스템 선진화 차원의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건·의료 분야 협력은 남북 주민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해외 관광객이 들어갔을 때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민 교수는 이어 앞서 제시한 개성 남북협력의료센터와 원산 갈마 의료·휴양관광지 아이디어에 더해 "'남북이 힘을 합쳐 새로운  여러가지 K-모델을 개발해보자'고 북에 제안해보자"는 구상도 펼쳐보였다.
이미 나와 았는 '개성-판문점 평화협력지구' 구상에 대해서는 국제기구 유치를 통해 평화협력 거점으로 육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은 기존 제조·생산 위주의 산업단지 성격을 벗어나 4차산업혁명시대에 맞게 교육·지식·문화·컨벤션·공연·전시산업이 자리잡는 국제적인 신도시로 육성해 보자고 말했다.
개성공단을 포함한 'DMZ 국제평화도시'는 북한의 인재를 양성하는 경영, 의료, ICT분야 교육시설과 관광, 호텔, 서비스 관련 대학 등 교육과 의료산업, 그리고 국제회의와 전시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는 MICE(Meeting, Incentive tour, Convention, Exhibition) 산업이 자리잡는 남북협력의 글로벌 허브로 키우자고 했다.
9.19 평양남북공동선언 4조 2항에서 합의한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은 서울과 평양을 통합된 도시네트워크로 하나의 광역경제권을 구축할 수 있는 '작은 통일', '먼저 온 통일'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중간지점인 개성에 올림픽 공동준비위원회, 프레스센터, 데이터센터를 갖추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민 교수는 또 강남·북을 연결하는 한강교량만 25개가 넘는 상황인데, 남북의 경제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철도·도로 몇개만 가지고는 안될 것이라고 하면서 기존 경의선은 설계구조상 고속화가 어렵다면 개·보수하여 화물 전용선으로 쓰고 별도의 고속철 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2022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인 수도권 광역교통망 GTX-A(파주-운정)구간을 개성-해주를 경유해 평양까지 확장하는 구상도 덧붙였다.
교통 인프라가 지나는 단둥·신의주(중국), 나선·하산(러시아), 단천주변(미국), 원산항 주변(일본) 등 주요 지역을 경제특구로 개발하는 사업을 벌이고 여기에 주변 4개국이 직접 참여하여 필요한 이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유도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민 교수는 남북관계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서 북을 설득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통령이 언급하고 있는 '한국판 뉴딜'을 국내에만 한정하지 말고 한반도 뉴딜로 확장해서 미래에 북한을 포함한 평화경제로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고 말했다.
  
▲ 왼쪽부터 박상돈 통일부 남북경협과장, 민경태 통일교육원 교수, 김성민 민화협 정책위원장, 김용현 동국대학교 교수, 박종철 경상대학교 교수.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토론회에서 김용현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때 북이 받을 수 있는 것을 주어야 하고 이걸 찾는 것이 우리 정부의 시급한 과제"라며 "그중 긴요한 것이 K방역"이라고 지적했다.
박종철 경상대학교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지난 2017년 극단적인 남북 대치 상황을 평창올림픽으로 이어간 것은 문재인정부의 훌륭한 리더십이었으나 하노이 이후 상황관리에 실패한 대북 안보라인의 실책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북한과 전혀 대화가 불가능한 지금의 안보라인은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남북관계를 너무 주도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소 무질서해보이더라도 민간이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하반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한시 판문점 방문, 북중간 백두산 남파와 삼지연 연계 관광시 한국관광객 포함 등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주 악행] 친일의 뿌리, 독재자와 한통속...방 씨 일가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5/27 [16:51]
  • <a id="kakao-link-btn" style="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font-stretch: normal; font-size: 12px; line-height: 16px; font-family: dotum, 돋움, Arial; color: rgb(102, 102, 102); text-size-adjust: none;"></a>
조선일보가 올해로 창간된 지 100년이 되었다.

100년의 조선일보 역사는 친일과 독재의 한 몸이었으며, 왜곡과 거짓 뉴스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주 악행을 고발하는 기획기사를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 공동으로 연재한다. 

-----------------------------------------------------------------------------


조선일보하면 떠오르는 말이 ‘방 사장’이다.

‘방 사장’이라 하면 방응모를 시작으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 그리고 방상훈에 이르기까지 조선일보 사주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조선일보하면 친일, 밤의 대통령 이라는 단어들도 떠오른다. 

조선일보의 논조가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을 띠게 된 데에는 사주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일보 사주들의 행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 법원도 인정한 방응모의 친일 행위

2009년 6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방응모에 대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1935년 10월, 방응모창간한 조선일보 자매지)’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한 점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낸 점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발기인·평의원으로 활동한 점 등 3가지를 친일행위로 결정했다. 

이에 방 씨 일가가 2010년 1월, 결정을 취소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방응모에 대해 잡지 발행과 주요 간부로서 적극 협력한 부분을 친일행위로 규정했고, 군수품 제조업체 운영을 통한 친일은 인정하지 않았다. 2심은 잡지 발행과 군수품 제조업체 설립을 친일로 판단했다.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은 위 소송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그 취지는 방응모 조선일보 사주가 ‘조광’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쓴 것만 친일행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항소심과 달리,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조선항공공업’ 군수회사에서 감사를 지낸 전력은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반민족규명법의 취지를 너무 좁게 해석한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전범단체인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과 감사를 맡은 것은 그 자체로 전쟁에 대한 협력 행위다. 구체적으로 회사를 직접 운영하지 않았으니 일제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부역은 했는데 친일은 아니다’라는 식의 논리적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2017년 5월 12일 서울 고등법원에서 방응모가 펴낸 잡지 ‘조광’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실은 행위만 친일행위로 봐야 한다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조선일보가 소송까지 하면서 지우고 싶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빙산의 일각만 판결 받은 방응모의 친일행위

조선일보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한 대정친목회 대표 예종석을 앞세워 조선총독부의 발행허가를 받은 신문으로 태생부터 친일신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응모가 1933년 7월 조선일보의 사장이 된 뒤부터 ‘황태자 전하의 어탄생’(1933년 12월24일 자) 사설 등 일본 왕실 찬양 기사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 직후인 1933년 일본군에 고사포를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1933년 4월 15일 작성된 일본 육군성 정무차관실 문서에 따르면, 조선과 중국에 거주하던 은행장과 기업가, 현역 장성 등이 ‘3년식 기관총’ 21개와 고사포 등을 일제에 헌납한 사실이 있다. ‘국방헌납 병기 수령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기관총과 고사포 등을 헌납한 20여 명의 명단 가운데 방응모가 포함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응모가 수많은 친일단체에 적극 가입했다고 밝혔다.

방응모는 ▲1937년 5월 조선문예회 회원 ▲1937년 8월 애국금차회 발기인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44년 9월 조선항공공업회사 자본출자·중역 등으로 활동했다.

방응모는 단체 가입뿐만 아니라 강연과 글을 통해서 친일 행위를 벌였다. 

방응모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강연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해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정한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국민적 행위라면 일제에 반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응모는 1938년 2월 일본인 천황주의자 도쿠도미 소호에게 정중한 연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어 편지를 번역한 것임)

신년 인사

“천리나 떨어졌지만 같은 바람 속에 있습니다. 우선 집안 여러분들이 더욱 건승하시고, 나이를 더 잡수셨으니 더욱 몸을 보중할 수 있기를 빕니다. / 저도 이제 무사히 신년을 잘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뜻밖의 보살핌을 내려주셔서 위로가 됩니다. / 위의 보내주신 말씀 곁에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써 두었습니다. /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 총총 이만 줄이고, 편지의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 2월 초에 방응모가 / 소호 선생께 / 삼가 경성부 조선일보사 방응모가 드림“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 당하자 방응모는 월간지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 

방응모는 1940년 11월 ‘조광’ 머리말에서 “국민된 자로서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소식을 들은 뒤 감상을 적은 1942년 2월호 글에서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칭하며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1942년 조광 2월호를 통해 ‘타도 도양의 원구자’ 논문을 발표했다. 

1943년 11월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해 일본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학도병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방응모가 이처럼 친일행위를 벌였기에 조선일보의 논조도 자연스럽게 친일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 독재자에게 훈장 받은 방일영, 방우영 형제

방응모는 아들이 없자 형의 아들인 방재윤을 입양한다. 방일영과 방우영은 그 방재윤의 아들들이다. 

방일영은 1954년에 조선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방일영이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방일영과 방우영이 조선일보에서 대표로 있던 시기는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조선일보가 이른바 ‘밤의 황제’, ‘밤의 대통령’이라 일컬어지기 시작한 것은 방일영, 방우영 형제 때문이다.

방일영과 박정희는 술자리를 함께할 정도로 매우 가까웠던 사이라고 한다. 

박정희와 방일영 이 두 사람이 언제, 어떤 인연으로 친해졌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방일영의 자서전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신문사 사주들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졌고 여기에 방일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방일영과 박정희가 가까워졌으리라고 판단된다.

이런 과정에서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일영, 방우영 형제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은 이미 60년대부터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리아나 호텔 건립을 둘러싼 일본 차관 특혜 제공이다. 

“1968년 5월인가 조선일보하고 권력 사이에 아주 굉장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을 짓는데 일본으로부터 400만 달러에 달하는 상업차관을 들여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400만 달러라면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그때 시중 은행의 금리가 연 26%였는데, 조선일보가 부담한 금리는 7% 정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박정희 정권이 조선일보에 굉장한 특혜를 준 겁니다. 그것이 저는 조선일보와 권력 간의 유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고 있거든요.”(신홍범 전 조선일보 기자/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1970년, 박정희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방일영은 8월 15일 광복절에 ‘국가와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방우영은 이에 앞서 5월 13일 “언론의 창달과 언론계 육성, 언론인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박정희 3선의 길을 연 1971년 4.27대선 결과에 대한 조선일보의 4월29일 보도를 보면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4년간의 집정 공약을 다짐한 끝에 안겨진 승리의 영광이란데서 더욱 보람있는 순간의 감격은 값있는 것”이라고 축하했다.

박정희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언론 통제에 적극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5년 조선일보 기자들이 대량 해직된 사건이 발생한다.

기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제작거부와 편집국 점거농성에 들어가자 32명을 무더기 해고한 것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박정희 군대가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언론 혁명을 성공시킨 방우영의 혁명군”이라고 말했다.

방 씨 형제의 독재자 사랑은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에도 이어졌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출범시킨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한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

이에 대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언론사 사주가 국보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조선일보가 신군부와 밀착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사주의 신군부 지원은 신문 논조에도 영향을 미쳐 5·18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들을 ‘난동자’로 보도하고, 전두환을 ‘새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두둔했다. 또 방우영의 국보위 참여로 조선일보는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 통폐합에 포함되지 않아 조선일보가 최대 발행 부수 신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일본 편에 붙어 민족을 배신하고 군부 독재 시절에는 권력에 야합해 민중을 배신한 것이 조선일보 역사의 100년이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주 악행] 일본이 좋아하는 조선일보 일본어판-> http://www.jajusibo.com/50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