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1일 토요일

“법무부, 유우성 무죄 확정되자 추방 가능성 물타기…뻔뻔”



[이영광 기자의 발로GO 인터뷰 4] 유유성씨 변호인단의 김용민 변호사
이영광 기자  |  balnews21@gmail.com

   
▲ 국가보안법 위반 등 간첩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은 유우성 씨와 변호사들이 지난 10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대로 대법원에서 열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대법 최종 선고'를 마친 뒤 대법원을 나서며 기자들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오른쪽부터 변호사 양승봉, 천낙붕, 유우성 씨, 변호사 김용민, 김진형.<사진제공=뉴시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잘 알려진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에서의 지난달 29일 대법원 판결이다. 이로써 그동안 간첩혐의를 받았던 유우성씨는 2년 9개월 만에 혐의를 벗었다.
그러자 유씨는 판결 직후 국정원과 검찰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밝혔으나 돌아오는 건 사과가 아닌 법무부가 추방을 검토한다는 소식이었다. 재판 과정이 궁금하여 유씨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했던 법무법인 양재 소속의 김용민 변호사를 지난 16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재판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김 변호사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유유성씨 변호인단의 김용민 변호사 ⓒ 이영광 기자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판박이”
- 지난달 29일 간첩 혐의를 받았던 유우성씨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많은 사건에서 무죄를 이끌어 냈지만, 이번 사건은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뻤죠. 증거 조작을 넘어 간첩 조작까지 확인된 것이거든요. 기존에는 증거조작 프레임만 가져갔지 처음부터 간첩 혐의가 조작됐다는 것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요.
그러나 저희 변호인단은 처음부터 간첩 조작이라고 주장 했어요. 그리고 대법원에서 여동생에 위법한 수사로 허위자백을 받아 간첩 혐의를 받은 것까지 확인을 해준 것이죠. 기쁘고 다행으로 생각해요. 특히 유씨 개인으로 보면 정말 힘든 시간이었거든요. 힘든 시간을 지내왔던 것에 대한 보상 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힘든 시간을 버텨왔고 간첩이 아니다’는 것을 국가에서 확인해준 게 큰 의미고 감사해요.”
- 기존 간첩 사건은 몇 십 년 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데 이 사건은 처음부터 무죄라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보통의 조작 사건들 보면 이 사건과 상당히 닮아있어요. 특히 강기훈 씨 유서 대필 사건의 경우는 거의 쌍둥이예요. 참고인을 허위자백하게 하고 참고인이 말을 바꿀까 봐 미리 증거 보전 재판을 했는데 이 사건에서 여동생에 대한 행동들을 판박이처럼 거의 똑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사건들은 조작을 조작이라고 부르기까지 30여 년이 걸려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고 인생은 망가지는데 유씨는 그에 비하면 천만다행인 거죠. 이 사건은 조작으로 기소된 이후 3년 만에 공식적인 조작사건으로 밝혀졌거든요. 그런 의미로 이 사건은 정말 다행이고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조작 당시 조작이 밝혀져서 조작한 사람은 처벌받고 조작당한 사람은 무죄를 받은 사례는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런 사례가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봐요. 특히 최근 ‘이명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주의가 퇴보하여 공안정국이 형성되는 등 한마디로 진보진영에 있어 총체적인 시련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거든요. 그런 어려움 속에 가장 완벽한 승리한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 재심을 통한 유죄가 아니라 처음부터 무죄로 한 건 이 사건이 유일하다고 하셨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출발점은 피의자였던 유씨 본인이 허위자백을 하지 않고 버틴 게 시작인 것 같아요, 기존 조작사건들을 보면 물론 물리적인 폭행이나 고문들이 물론 있었고 그걸 견디지 못해서 피의자 스스로 허위자백을 해요. 그래서 유죄가 나오고 한참 뒤에 고문 사실이 밝혀져서 무죄가 확인되는 것인데 이 사건은 10일 정도 변호인 없이 본인이 수사를 받았는데 끝까지 버텼어요.
그리고 변호인 접견 하자마자 국정원에선 수사를 그전처럼 강도 높게 하지 못했고 여동생의 허위자백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본인의 자백을 못 받은 상태로 서둘러 마무리해서 검찰이 기소를 한 거죠.
또한 허위자백 했던 여동생을 국정원이 관리 못 한 거죠. 왜냐면 국정원과 검찰은 여동생을 끝까지 자기들이 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저희가 허를 찔렀죠. 인신 구제 청구를 했어요. 여동생이 나와 사건의 진실을 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거짓말을 당했고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스스로 투지가 불타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섰어요.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재판 단계에서 이뤄졌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만약 재판이 유죄로 선고되고 한참 뒤에 그런 일 들이 벌어졌다면 재심도 어려웠을 거예요.”
“간첩조작 사건, 국정원‧검찰 개혁 없다면 반복될 것”
- 아쉬운 점도 있을 거 같아요.
“물론이죠. 대표적인 게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마무리가 안 됐거든요. 증거 조작한 사람들의 말단은 잡힌 것 같아요. 그러나 증거조작의 상부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더 나아가 간첩 조작에 대해서는 모두 책임을 안지고 있거든요. 이런 것이 밝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하게 무죄 받았다고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아쉬운 점은 이렇게까지 명백하게 밝혀진 사건들이 사건 하나로 끝나 버리는 분위기예요. 이 사건을 통해 검찰과 국정원의 개혁이 있어야 하거든요. 개혁되지 않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요. 그런데 그걸 제대로 못 건드린 게 물론 저희가 할 수 없는 일이죠. 정치권이 나서주거나 정부에서 나서서 대응을 해야 했는데 흐지부지 끝난 건 아쉽죠.
또 한가지 적용 법률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모해 증거 위조가 아니고 국보법 위반이에요. 국보법 혐의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증거 조작한 사람들은 국보법상 같은 형으로 처벌받게 돼 있어요.
그러면 국정원 직원만 놓고 보더라도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예요. 그러나 4년형 받았잖아요. 법 적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죠. 만약 국보법으로 기소했으면 지휘라인에 있는 사람들을 기소하기 훨씬 수월해지거든요. 저희가 국보법 문제 제기하면 방어하는 논리로 썼던 게 이 조문인데 막상 터지니 적용 안 하는 거죠. 심지어 황교안 총리도 자기가 쓴 국보법 책에 이런 경우 국보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썼는데 안 쓰잖아요.”
- 그럼에도 무죄가 나온 건 우리가 흔히 이명박 정권부터 민주주의가 1980년대로 후퇴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성숙된 민주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맞아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권 교체를 통해 민주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법원도 반성했고 그런 경험이 쌓여 이 사건에서도 판사들이 용기 내서 무죄 선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게다가 예전 7, 80년대 변론했던 선배 변호사님들은 변론하다 구속되어 같이 재판받는 웃 지 못할 상황이 발생했거든요. 그분들이 끊임없이 싸워왔고 그래서 형사소송법 등 법에 들어가서 제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는 결실을 본 게 아닌가 싶어요.”
   
▲ 2014년 3월, '국정원과 검찰의 간첩 증거조작 사건 설명회'에 참석한 유우성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야기”
- 유우성씨 말에 의하면 국선 변호인들이 대부분 변호를 꺼렸다고 하던데 어떻게 변호인단으로 참여하게 되셨나요?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처음 사건을 접수하였고, 민변에 변론 요청을 받아 장경욱 변호사가 변호인단을 꾸리면서 연락을 해 참여하게 되었어요. 보통 민변은 사건을 설명하고 변호인단에 참여해달라고 하고 자발적 참여를 통해 변호인을 꾸리거든요. 그러나 이 사건은, 처음 사건을 안 장경욱 변호사가 일일이 변호사들에게 전화해서 사건 소개를 하며 변호인단 참여를 독려했죠. 저도 사건을 처음 접한 게 장 변호사 전화였어요. 그땐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죠(웃음).
당시 언론에 간첩이라고 이미 보도가 되었던 사건이었잖아요.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유씨를 처음 접견하니 밥도 안 먹고 자기 억울함을 계속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유씨 본인은 화교라는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은 집요하게 몰고 가는 상태여서 ‘이 사람은 그런 약점 때문에 흔들릴 수밖에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며 자기 무고함을 주장하는 부분에서 귀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죠.
또한 사건을 접하면서 유씨에 대한 변호인단의 신뢰도 쌓여 갔지만 사건 자체에 강한 흡입력이 있어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고 여동생이 그렇게 자백한 것도 이례적이긴 했지만, 공소사실 자체도 우습거든요. 과정 자체가 말이 안 되고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더 접근하게 됐어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형사사건을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나름 형사사건은 자신감이 있지만 억울하고 탈북자 사건을 마비시켰던 사건이라 제가 뭔가 해보고 싶었어요.”
- 혼자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팀워크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
“주요 국가보안법 사건은 일반적인 형사사건보다 증거가 방대하고 쟁점이 많기 때문에 변호사 혼자 변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검사도 마찬가지예요. 이 사건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비중 있고 중요한 사건이었거든요. 처음엔 변호인단이 더 크게 꾸려졌어요. 그래서 유씨 접견을 꾸준히 했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당시 국보법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뉘었죠.
남아있던 변호사님들의 팀워크는 좋았던 것 같아요. 각각 변호사님들은 개성이 강하신데 강한 개성들이 부딪힐 수 있거든요. 당연히 변론 과정에서 열띤 논쟁은 필요한데 부딪히면 힘이 빠지는 경우가 생겨요. 그러나 여기는 그렇지 않았던 게 좋았고 각각 튀는 개성들이 서로 부족한 데를 메꿔주는 변호인단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변호인단이 꾸려지면 주심 변호사를 선정하고 역할 분담을 하는데 주로 주심 변호사가 이끌어 가게 되죠. 때문에 다른 변호사들은 보조하는 수준에 멈추는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된 팀워크를 발휘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변호사들 문제라기보다는 각각 자기 일을 하다 모이니 그런 한계가 생기는 것이거든요. 저희도 그런 한계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특정 변호사에게 일이 몰리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어요. 그럴 수 있었던 게 운이 좋게 그 당시 변호인단의 변호사들은 자기 사건이 별로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다 같이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고 그게 좋은 팀워크를 끌어낸 것 같아요.”
“무죄 입증 위해 중국까지…현장 보고나니 사건 주도할 힘 생겨”
- 무료 변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중국까지 다녀오셨어요.
“무료 변론이라는 특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요. 중국을 저희가 갔었던 건 여동생의 거짓말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족들을 만날 필요가 있었고 무죄를 끌어내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거든요. 중국에 가서 여동생이 거짓말을 하는 걸 가족들을 어떻게 보는지 들으러 중국에 간 거예요. 경비의 상당 부분은 유씨를 후원했던 단체 등이 지원해 주셨어요. 저희 자비만으로 간 건 아니에요.
하나 에피소드를 말하면 가족들은 저희를 이해를 못 해요. 그분들이 ‘우리가 알기로 한국 변호사들은 돈을 많이 받고 일하고 돈을 밝힌다던데 어떻게 한국 변호사들이 돈도 한 푼 안 받고 중국까지 와서 우릴 만날까?’라고 의심하고 저희가 변호사가 아니란 결론을 내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를 국정원 직원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첫날 만나서 식사까지 하고 좋게 해어졌는데 그 다음 날 이분들이 사라진 거예요. 저희를 국정원 직원으로 알고 도망가셨죠. 저희는 또 반대로 이분들이 들켜서 국정원에 납치된 것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며 걱정했어요.
보통 일반적인 사건의 경우도 변호사가 현장을 가보면 도움 되는 게 많아요. 변론을 준비하거나 결과를 이끌어 내는데 큰 도움이에요. 저는 이 사건 이전에도 현장을 한 번씩 가본 적 있긴 한데 여러 번 가서 증거 찾은 건 이 사건이 처음이긴 해요. 장경욱 변호사님이 강하게 주장하셔서 따라가긴 했는데 그게 중요했던 것 같고 현장을 보고 와서 재판을 진행했어요. 판사와 검사는 현장을 안 봤거든요. 저희가 유일하게 현장을 보니 사건을 주도할 힘이 생겨요. 저희는 여동생이 건넜다는 두만강도 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생생하게 다툴 수 있는 거예요. 현장의 중요성이 강조된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간첩조작 사건 유죄, 기존 관행 제대로 깨져…역사적인 일”
- 국정원 직원들은 유죄를 받는 건 어떻게 평가하세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긍정적인 평가는 이것 자체가 역사적인 일인 것 같아요. 조작한 국정원 직원이 조작으로 인해서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거의 없었거든요. 조작하는 현행범 비슷하게 잡혀서 재판까지 간 건 역사적인 일이고 앞서 말했지만, 우리 민주주의가 성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이게 기존 관행을 깬 것이거든요. 기존 관행은 조작이나 무리한 기소를 한 후 무죄를 받더라도 무리한 기소를 한 검사나 수사에 관여한 사람들은 다 좋은 자리로 갔어요. 흔히 말해 다른 차원의 보상을 받는 거죠. 그러다 보니 ‘내가 기소만 하면 되는구나. 증거는 애매하더라도 만들면 되지’란 유혹에 시달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걸려도 손해가 없다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거든요. 그 관행이 이번에 제대로 깨진 거죠, 제도적인 부분을 만들진 못했지만, 수사 관행에서 자기들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계기는 만들었죠.”
“법무부, 무죄 확정되자 추방 가능성 흘려 물타기”
- 무죄 판결 후 정부는 유우성씨의 추방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국가가 조작의 피해자에게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사과는커녕 피해자를 추방하겠다는 얘기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뻔뻔하죠. 그럼 법무부가 저 얘기를 왜 했을까 생각하면 그 것은 유씨의 무죄가 확정됐고 조작이란 것이 확인되니 법무부에서 나름의 입장 발표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것보다는 추방 가능성을 흘려서 물타기 한 것으로 보여요. 그게 어느 정도 먹혀서 유씨 개인이 파렴치범이란 얘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물론 그가 재북 화교 신분을 숨기고 들어와서 일정 부분 권한이나 지휘를 누린 부분이 범죄라면 처벌을 받으면 되고 실제 유죄가 확정됐어요. 하지만 그 자신이 재북 화교로서 북한 주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느낀 것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현실성은 별개 문제예요. 유씨는 현재 대한민국 국민과 결혼을 했고, 재판 중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외국인이더라도 강제추방하지 않고 체류자격을 주거든요. 그래서 강제추방할 가능성도 낮아요.
또 하나는 유씨가 외국인이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법무부는 유씨가 중국 국적자라는 걸 전제로 하는데 중국에서는 유씨를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 그는 무국적자가 되는데 그러면 무국적자를 우리나라는 보낼 데가 없어서 국내 체류자격을 주거든요. 따라서 유씨 소한 국내체류 자격이 주어질 가능성이 크고 당연히 체류 자격을 줘야 해요. 왜냐면 유씨가 잘못한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국가가 한 사람의 인권은 침해했고,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나라가 인권국가라면 최소한 그 사람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보상이나 배려는 해줘야 하거든요. 그래야 우리가 다른 나라 인권을 얘기할 수 있지 내부에서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 해결 못 해서 추방한다는 것은 잘못된 얘기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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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6월만에 평양 방문하고 온 김정태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이사장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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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1.21  13: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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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3일부터 7일까지 평양시 동대원구에 있는 공장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태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이사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달 초 3일부터 7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평양시 동대원구에 있는 공장을 찾은 김정태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이사장.
2005년 10월 1일 선교구역 영제동에서 창업식을 하고 2008년 11월 부분 준공을 시작한 이후 이듬해인 2009년 2월 28일 마지막 방문을 했으니 그로부터 약 6년 6개월 만에 자신이 설립한 공장을 찾은 것이다.
간간히 열렸던 평양 가는 길이 지난 8.25합의 이후 종교·노동을 중심으로 조금씩 규모가 커지기도 했지만 남북경협 사업자의 평양 방문은 처음이다.
특히 분단 60만의 첫 합영회사라는 기대 속에 평양시 한복판에 대규모 설비를 넣은 후 시험가동을 시작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평양을 떠나와야 했던 김정태 이사장으로서는 이번 평양방문이 말 그대로 고대해 마지않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공장방문이 얼마만이냐고 묻자 전화기 너머에서 “80개월 3일만”이라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린 간절함이 잔뜩 묻어났다.
올해 73살의 나이에 평생을 투자한 공장의 기계가 멈춰 서 있는 꼴을 보고 온 김 이사장의 가슴속엔 남 모를 아쉬움과 억울한 사연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어느새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새로운 구상에 몰두해 있었다.
오랜 현장 경험을 살려 완성한 리포트도 발표해야 하고 남북의 산업별 균형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발전플랜을 짜는 일도 구체화하고 있다. 실물경제로 들여다 본 남북관계 발전의 효과라는 주제로 완성한 20쪽 짜리 리포트는 필요하다면 제대로 된 자리에서 발표하고 관계 요로에도 전달해 정책화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다.
대마의 상용화 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는 지금도 끊이질 않고, 관련 주제만 나오면 누에가 실 뽑아내듯 술술 말도 빨라진다. 조선 산업의 성장과 쇄락을 목격한 이 사업가에게 폐 선박 수리는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 중 하나일 뿐이다.
분명한 건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의 대표인 김 이사장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역시 녹슬고 있는 방직 기계들이 24시간 힘찬 동음을 울리며 17~18년 전 그가 구상했던 대로 대마, 비단, 면 등 천연 직물을 마구 뽑아내는 것이리라.
지난 18일 서울시 송파구 신천동의 사무실에서 김 이사장을 만나 최근 방문한 평양 공장의 현황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그동안 무르익힌 여러 구상을 들었다.

     
   
▲2008년 10월 30일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준공식에서 김정태 이사장(오른쪽 두번째)이 북측 박창련 민경련 부위원장(오른쪽 세번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최근 평양에 다녀 온 것으로 알고 있다.
■11월 3일부터 7일까지 4박 5일간 회사 이사진 두 명과 함께 평양에 있는 공장을 방문했다. 2009년 2월 28일 마지막 방문을 했으니 80개월 3일 만에 방문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5.24대북제재조치를 발표하기 1년 전부터 기업의 방북을 막았기 때문에 실제로 기업인으로서 평양 방문은 내가 가장 최근에 갔다 온 것이고 그 전에는 가장 마지막에 갔다 온 경우이다.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왔나.
공장 현장상태, 운영상태, 설비 상황 등을 검토하고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는 분단 60년 만에 처음 만들어진 합영회사로 우리의 주식회사와 유사하게 운영된다. 북측 이사 4명과 남측 이사 4명이 있으며, 대표자가 김정태 이사장이다.
□설비 상태는 어쨌나.
■기계 설비, 그중 자동직기는 통상 6개월 중단이 되면 부품은 완전히 못쓰게 된다. 또 컴퓨터의 인버터 등이 손상되기 때문에 복구 가능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자동직기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동안 북에서 기계를 사용하진 않았었나.
■북쪽에서는 기계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 수준이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가 기술지원이다. 다음으로 계획한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일이다.
□기계를 방치하면 못쓰게 된다는 것은 북에서도 알고 있을 텐데.
■사실은 그쪽에서도 일부 가동을 했다. 우리가 있을 때 이미 시운전이 끝나서 40%정도는 기계가 가동되고 있었고 여러 공장 중 대마 공장은 거의 90% 가동되도록 해 놓고 왔다.
우리 기술진이 들어갈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가동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마는 50% 정도가 가능할 것 같고 타월 공장은 25대 중에 7%, 4대가 돌아가는 제직공장은 10~11% 정도, 3대가 겨우 돌아가는 편직공장은 11%정도, 가공공장·염색공장은 올 스톱 상태이고, 양말공장은 80대 중 6대가 돌아가고 있다.
별도로 물류회사가 있는데, 8.5톤 트럭 20대, 11톤 트럭 20대 등 총 40대가 들어간 트럭 중에 현재 8.5톤과 11톤 트럭 각각 7대씩만 운행하고 있고 나머지는 거의 폐차 수준이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일부 돌아가긴 하는 것 같은데, 북측이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은 한 것인가.
■북측에서도 노력을 했다. 경공업성 방직국장 등 최고기술자들이 동원돼서 해보려고 노력을 했더라.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에 있는 걸 뽑아서라도 조금씩 가동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원단을 제직하는 편직기계 중 텐타기, 쉐어링기, 염색시설 등 고급시설은 원체 크기도 한데 써보지도 못하고 전부 정지된 상태이다. 준비 공정에서 직물 정경기 등도 제대로 사용 못했다. 대형 건물에 한 대 놓을 정도의 대형 장비인 정경기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하자가 발생한 것뿐이었는데도 연속된 공정에 대한 기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보니까 전혀 활용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다.
실크공장 안에 60미터 길이로 전시됐던 이탈리아제 연사기 30여대는 한 번도 가동하지 못해 썩어가고 있는 정도이다.
일하는 사람에게 기계는 그저 쇳덩어리가 아니라 때론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김 회장은 한 가지 사례만 더 기록해 달라며 기계 종류별로 꼼꼼하게 현재 상태를 설명했다.
□기계 외에 건물 같은 것에는 별 문제 없었나.
■2009년 2월 말 평양에 갔을 때 당시 평양시 통일로 옆에 3층 건물 2동과 부속건물 등 건물 3동을 지으라고 지시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다 되어 있었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면서 관리하기가 어려우니까 5천 평 정도 증축을 하라는 것이었다. 기계 설비도 이쪽으로 다 옮겨놓았더라.
□3년 전쯤 평양대마방직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중국 박람회에 나온 적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양말, 타월 등 첫 설비를 시운전해서 나온 제품들을 내 보냈던 건데, 마지막 후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제 값을 못 받았던 일이 있다.
□손실규모에 대해 계산을 해보았을 텐데.
■애초 북에 440만 달러어치를 새 설비로 넣었고 나머지는 중국 공장에서 사용하던 기존 설비와 국내에서 컨테이너 200개 규모로 올려 보낸 자동직기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부품, 경비를 포함하면 1천600만 달러 정도가 평양에 들어갔다.
기계·설비는 폐기될 것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여기서만 400만 달러 정도 손실로 봐야 하고 물류쪽은 전액을 손실로 봐야 한다. 총 40대 트럭 중 지금 14대가 돌아다니긴 하지만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약 300만 달러 손실로 본다.
더 중요한 건 영업손실인데, 이건 뭐 계산할 수가 없지만 수백억 달러 수준에 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많이 가보고 싶었을 텐데...이번 평양방문은 어떻게 성사됐나.
■우리 회사는 합영회사이기 때문에 이사장인 내 쪽에서 희망하면 북측에서는 초청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북측에서 기업이 돌아갈 방향을 연구해서 올라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정부쪽에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보내지 않다가 이번에 부처 간 합의를 봐서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 73세의 노 사업가는 섭섭함도 잊고 어느새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새로운 구상에 몰두해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공장이 평양에 있는데 지난 6년간 가질 못하게 했으니 정부쪽에 많이 섭섭한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5.24조치는)솔직히 말하면 이명박 정부가 한 실책 중에 가장 큰 실책이다. 노태우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정부는 남북 민간경협과 교류를 장려하고 지원해 왔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대결정책을 도입하면서 기존 남북관계를 깨뜨렸다. 잃어버린 10년이다 뭐다 하면서 국내 여론을 악화시키고 남북관계를 훼손한 것이다. 남북관계는 일관성있게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이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실책이라고 본다.
□정책의 실패뿐만 아니라 정부가 민간 기업에 직접적인 손실을 발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보상도 없지 않았나.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의 대북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북한 내륙에 투자한 기업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개성공단은 똑같은 대북업체인데, 개성공단은 살려놓고... 실제 북한은 내륙이지, 조그마한 변방 도시가 아니거든...내륙을 깨뜨린 것이다.
이 점에서 엠비정부가 남북관계에서 가장 불행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를 가동중단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5.24조치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5.24조치 이야기를 하는데 당시 상황에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하더라도 남북경협의 주축인 민간 경협은 그대로 놓아두었어야 한다. 민간교류, 민간경협은 꾸준히 투자가 되어있는 것이라면 전시(戰時)에도 남겨두어야 한다.
기업을 보호해주고 그것은 유지하되 정부가 과거처럼 지원했던 쌀이나 비료 같은 것을 중단하는 등의 조치로 대처했다면 지금과 같이 남북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은 (남측 민간과의 관계 등 많은 것이) 중단되면서 대결구도가 되니까 핵이나 인공위성 각종 무기개발 등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았나. 원래 그 정도까지 군사력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5.24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군비증강으로 위험부담만 더 늘리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5.24조치는 북의 군사력 증강을 오히려 방조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민간교류를 막은 5.24조치가 왜 잘못된 것이냐 하면 북한 옆에는 중국이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20년 동안 피땀 흘려서 키운 기술인력을 중국이 손도 안대고 앉아서 접수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중국이라는 경제대국이 없다면 북한이 재정적으로 피해를 볼 수 있었지만 5.24조치 이후에 실제로 북한은 거의 300%이상 외화 수입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5.24조치로 우리 기업만 망하게 됐지, 북한 경제 제재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실물경제에 몸담았던 경험으로 볼 때는 노무현 정부 5년간 꾸준히 남북교류가 신장되다가 2007년에 남북관계는 피크에 달했다고 본다. 그 전에는 노태우 대통령부터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까지 10년 동안 남북교류 규모가 약 30배 늘어났다.
김대중 대통령 들어서는 아이엠에프(IMF)위기로 오히려 남북 교류가 축소됐다. 그랬던 것이 노무현 정부 들어서면서 23%정도 신장되어서 2007년이 된 것이다. 당시 북한이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벌어들인 외화가 10억 달러 정도였다.
지금 북한은 해외 인력 송출을 통해서 20억 달러, 상품 수출로 20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호텔에 중국 관광객이 가득 차는 등 관광 수입도 만만치 않다. 그밖에 추가 수입 등이 있다고 보면 북한 경제는 과거에 비해 외화 수입면에서만 보더라도 300%이상 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 평양 방문에서 북측과 어떤 협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북측에서 나한테 한 요구는 합영회사 대표로서 이 회사가 돌아가도록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니 만약에 남북관계가 안 풀리면 평양에서 생산된 제품을 1월부터는 중국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1월까지 생산되는 제품들을 모아서 그때부터는 중국업체를 모아서라도 판매하자고 말했다.
중국업체가 들어오면 나에겐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회사 대표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겠노라고 답변하고 온 것이다.
혹시 북쪽에 다시 못 들어가면 2월에 중국에서 이사회를 다시 개최해서 중국업체와 거래하는 문제에 대해 조율할 예정이다.
□6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신 건데, 특별히 눈에 띄었던 점은.
■시장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거기서 창출되는 소득이 북 경제의 30~40% 신장에 기여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았다. 평양 시내를 두 바퀴 둘러보면서 이야기도 들어보니까 건설 경기가 평양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확산됐다고 말하더라. 원산, 신의주, 나진·선봉 등. 그 정도 건설을 했으면 인력이 있을 텐데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지방도 하고 평양도 하고 확산이 되고 있다’고 대답하더라. 건설로 인한 경제성장은 상당한 수준일 것으로 판단한다.
내 느낌으로는 건설경기와 시장경제가 가져다주는 경제성장률과 과거에 비해 더 많이 늘어난 외화수입 등 이런 걸 감안할 때 북한은 지금 상당한 성장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지표상으로는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런 면을 실제 볼 수 있었다.
   
▲북측 근로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둘러보고 있는 김정태 이사장. [자료사진-통일뉴스]
□초기 합영회사 합의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처음에 북에서도 합영회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평양에 주재하면서 직접 경영을 하고 내가 회사를 대표하는 이사장으로 합의가 되지 않았나. 이런 합영회사는 우리 밖에 없었다.
개성공단에 쉽게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잘 돌아가는 중국 공장을 평양에 넣은 이유는 우리 기업이 평양에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대북 사업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적인 모델이 이루어져야 남북관계가 된다고 봤다.
그는 평양에서 첫 합영회사를 설립한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과거 자신이 정말 어려웠을 때 퇴임한 김대중 대통령과 1시간씩 두 차례에 걸쳐 독대를 하면서도 북의 중심이 평양인데, 개성공단 같은 변방(?)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하기도 했다.
■100억 원 정도 쓸 수 있는 돈이 있었을 때, 아들과 딸을 불러 놓고 내가 어쩌다 보니 북한을 알게 됐는데 대마, 실크 등 천연섬유 소재 사업을 북에 심어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하는 게 남북관계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 사업에 손을 대면 너희들에게 한 푼도 줄 게 없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 때 선뜻 자신의 뜻을 이해해 준 자녀들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섬유산업에는 화학섬유와 천연섬유가 있는데 이미 남쪽에서는 천연섬유를 하기 어려우니까 차라리 북으로 옮겨서 남의 화학섬유와 북의 천연섬유로 특화 발전시키는 방향을 모색했다.
초기경제에서 섬유는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이 분야만 발전시켜도 중국을 얼마든지 견제하고 최소한 우리 기술이 북에 떨어지니까 북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3억5천만 달러에서 5억 달러 규모까지는 쉽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개성공단 전체 해보아야 1억 달러 정도 되는 걸 생각해보면 평양에서 섬유 제조업을 하는 것은 그 몇 배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타산이 섰다.

□그에 앞서 1998년 신의주 건너편 중국 단둥지역에서 대마 이모작 농장을 경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해 전인 1997년에 미국에 있는 신부님들과 함께 국수나누기운동을 하면서 북측 탄광촌에 국수를 보내주는 일을 했었다. 단둥에 꽃제비들이 많이 넘어와서 고생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하러 갔다가 차라리 이거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문시 월청진에 228만평의 땅을 사서 건물 짓고 농장 만들어서 탈북자 돕는 사업을 했다.
그러다가 그 아이들 때문에 중국 공장을 북으로 넣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북 1인당 GDP 3만3천달러 되면 남은 5만달러 된다. 김정태 이사장, 남 성장정체 10년...신성장동력은 북
김정태 이사장은 사업 초창기부터 이후 합영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 지금에 이른 모든 과정을 담은 회고록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또 40여년을 제조업에 종사하고 18년간 남북경협의 현장을 누볐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올해 8월 15일, 20쪽 규모의 리포트를 작성했다며, 조만간 공식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발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동안에도 김 이사장은 과거의 경험에 대해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 구상을 밝히고 싶어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별도로 소개한다.
   
▲ '말하자면 대북 교역으로 거둔 세금으로 북을 도와준 것'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최근 3~4개월 걸려서 2050년까지의 경제성장 등에 대해 연구한 결과 남측은 1인당 국민소득(GDP) 10만 달러, 북측도 5만 달러에 도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다. 미래학자들이 제시한 전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륙진출기업들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으로 먼저 지난 20년 동안 누계 100만명 정도의 고용창출을 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때 24%씩 성장한 것을 20%씩만 적용해 보면 올해에만 17만명 정도의 신규 일자리가 생겼을 것이다.
앞으로 내륙진출기업들이 활성화되면 남쪽에서만 앞으로 400만 명까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완전고용까지 나오는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점에서 남북교역은 북한에 퍼주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길이다.
더욱이 이젠 우리의 성장 동력을 북한 외에는 찾을 수 없다.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러시아를 포함한 18개 동구권 국가와 교류하는 북방정책을 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만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노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하지 않았고 아직도 중국과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도 우리는 1만 달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일 것이다. 노 대통령 때 1인당 GDP가 2만2천 달러로 올라갔었고 지금도 2만 달러 대에 멈춰있다. 곧 10년이 된다.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북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을 살려주면 그것은 고스란히 구매력이 된다. 우리가 북의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면 20년간 남측 건설, 토목은 북 한 곳만으로도 엄청난 호황을 누릴 수 있다. 북의 노동력을 800만 명이라고 추정, 우리는 북과 상호연계해서 꼭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도 살리고 그밖에 고급인력은 그것대로 활용하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북한의 지하자원을 공동 개발해서 고급품을 만든다면 거기서 오는 이득이 엄청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세계의 부국이 된다는 미래학자들의 전망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런 안목에서 남북관계를 보아야 하는데 이걸 너무 정권적 차원으로 낮추어서 정책을 펼치는 것은 굉장히 가슴 아프다.
과거 개성공단을 제외하고도 남북경협 규모는 총액 104억 달러 정도였으며, 남측 경제에 미치는 부가가치 규모만 240억 달러에 달했다. 부가세만 24억달러, 즉 2조 5~6천억원 규모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쌀·비료 도와 준 것이 1조 8천억원 정도 밖에 안 된다.
말하자면 대북교역으로 거둔 세금으로 북을 도와준 것이다.
따져보면 실물경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이런 점이다. 이런 기조로 2050년까지 남북 교류가 활성화된다는 가정 하에 거둘 수 있는 세금만 1천조 원이 넘는다.
특히 7천조 원으로 평가되는 북에 매장된 지하자원의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제가 낙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은 가난한 나라만은 아니다.
몇 백 조에서 몇 천 조까지 든다고 하는 통일비용도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정치논리를 개입시키지 않고 민간경협만 활성화시키면 북에 돈 한 푼 주지 않아도 경제를 살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북의 1인당 GDP가 지금 남쪽 수준인 3만3천 달러가 되도록 도와주면 우리 경제는 5만달러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남, 화학섬유+북, 천연섬유=남북 상생·발전 모델
대마, 버릴게 없는 작물...세계적 기업 만들 수 있다
 
 
   
▲ 김정태 이사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천연 섬유 원료로서 대마의 경제성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대마는 한국과 미국만 까다롭고 중국만 해도 전혀 제재를 받지 않고 재배한다. 세계에서 재배되는 대마는 104가지 정도가 있는데 한국에서 재배되는 대마는 최고 A급이고 중국산은 목질이 많이 섞인 저급품이 많다. 캐나다는 대마 종자의 고단백을 이용해 식품, 화장품, 바디유 등 용도로 많이 쓴다.
□방직에는 줄기만 쓰지 않나. 씨앗 등은 더 개발할 여지가 있을텐데.
■(웃음)화장품까지 개발이 다 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마의 항균력을 이용한 스킨로션은 여드름 같은 것을 많이 잡는다. 또 대마 잎사귀는 액화시켜서 에센스를 추출, 의약품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 대마에는 피부 알러지와 녹내장 등에 좋은 성분이 있다.
다 되면 남북 학자 20명을 뽑아서 바이오 쪽으로 연구개발을 하려고 한다. 대마는 버릴 것이 없다. 대마속대로 제지개발까지 돼 있다. 대마 속대에서 섬유질 50~60%을 채취해 커피 필터지, 티백용 종이 등 고급 용지를 다 실험했다. 제지만 해도 6천만 평에서 대마를 재배하면 1억달러 매출 금방 올릴 수 있다.
버릴게 없는 대마의 무궁무진한 활용에 푹 빠진 김 이사장은 여러 가지 새로운 용도와 기술을 개발했으나 대마에서 실을 뽑는 기술 외에 일체의 특허 출원을 하지 않았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한 재배지도 없는 상태에서 특허 출원은 전력노출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측에 6천만 평의 대마 재배지를 요청했고 현재는 1차로 평안도 선천군 등에 6백만 평의 대마 밭을 운영하고 있다.
□대마와 함께 실크와 면도 함께 다뤘던 특별한 구상이 있나.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박정희 정부 당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실크 한 품목이 25%를 차지했다. 그때 정부가 육성한 양잠이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실크를 쓰고 있는 일본은 지금도 잠사공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100년 전에 브라질에 단지를 만들어서 지금도 거기서 가져오고 있다.
우리 경제가 취약한 점 중의 하나가 이처럼 기존 산업 중 유지되어야 할 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약간의 보완을 거쳐 양잠 등이 북에 자리를 잡도록 하면 북의 수준에서는 최선일 수 있고 우리 경제에도 힘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북한을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보고 서로 상생 발전하는 길이다. 한반도 전체를 구상하고 키워나가려는 이런 관점에 입각해야 올바른 대북정책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이사장은 남과 북에서 분야별로 10여명 전문가들을 뽑아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한반도 플랜을 만들어 나라에 내놓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또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를 남북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모델로 만들고 싶다며, 정부가 원하면 주고 싶다는 말도 했다.
제대로 투자해서 양잠, 대마, 면을 생산하는 농촌(양잠-황해도, 자강도, 대마-평안도 선천군 일대, 면-황해남도)도 살리고 여기서 원자재를 공급함으로써 공장도 가동하고 제품 만들어서 수출하면 외화벌이도 할 수 있는 만큼 정부가 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기업을 농촌특화사업부터 시작해서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높이고 제조업의 살길을 만들며, 거기에 부가가치를 얹어서 천연소재 제품을 파는 회사로 만든다면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건전한 모델이자 민간교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시했다.

김정태 이사장 북한 내륙투자사업 연혁

1998년 신의주 맞은 편 중국 지역에서 대마 2모작 등 실험-합영회사 설립구상
2000년 북측 해주 농업과학원과 함께 대마 재배 기술지도
2001년 북측 새별 총회사와 대마 임가공 사업
2004년 10월 통일부 협력사업자 승인, 북측과 합영기업 설립 합의
2005년 4월 직기 육로운송
2005년 10월 1일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 창업식(평양시 동대원구 선교구역 영제동)
2007년 11월 물류운송사업 시작(트럭20대, 북측 내륙운송 위주)
2008년 10월 30일 부분 준공식(남북 1천500만달러씩 5:5투자, 부지 4만5천m2, 고용인원 500명, 15개 공장에서 실뽑기, 제직, 염색, 가공 등 전 공정 처리하고 이불, 옷, 양말, 넥타이 등 완성품 생산)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 적극 추진해 나가야”

김 위원장, “최후승리 앞당겨야” 강조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 적극 추진해 나가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11/21 [16: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정은 제1위원장은 청년들과 새세대들의 이색적인 생활 풍토를 지적하며 3대혁명붉은기 쟁취운동으로 최후승리를 앞당길 것을 당부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조선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사상과 기술, 문화 등 3대혁명 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을 독려했다.

연합뉴스는 21일 조선중앙통신을 인용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날 평양에서 개막된 제4차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선구자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람들의 사상개조나 생산보다 꾸리기 같은데 편중하는 현상들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단위들에서는 조건에 빙자하면서 패배주의에 빠져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적극적으로 벌리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당의 지도도 현실발전의 요구에 따라가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것과 같은 편향들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편향을 극복하고 강성국가건설의 최후승리를 앞당겨야 한다"며 "모든 당조직들은 당의 의도를 똑똑히 알고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새로운 단계에서 더욱 힘 있게 벌려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 제1위원장은 이어 "당원과 근로자, 특히 청년들 속에서 이색적인 생활 풍조를 철저히 배격하고 사회주의적이며 민족적인 생활양식을 철저히 확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날 회의에는 박봉주 내각 총리와 김기남·최태복 당비서를 비롯한 당과 국가의 책임일꾼, 도당 책임비서, 해당 부문의 일꾼들이 참석했다. 김기남 당비서는 보고를 통해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유훈을 강령적 지침으로 틀어쥐고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확고히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조선로동당의 총노선인 사상과 기술, 문화 혁명 등 3대혁명을 관철하기 위해 전사회적으로 전개되는 대중운동이며, 선구자대회는 1986년 11월과 1995년 11월, 2006년 2월에 열린 바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0시21분 서울대병원서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정치를 이끌어왔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사의 길을 걸었지만, ‘3당 합당’으로 권위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고, 군정을 종식시키고 ‘문민시대’를 열었지만,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쓸쓸히 퇴임해야 했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정권에 맞섰다. 양김이 이끈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민주정의당ㆍ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최초의 문민 대통령으로 하나회 숙청,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도입 등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 말기 아들인 김현철씨가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고, 1997년 12월 국가 부도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라이벌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쓸쓸히 상도동으로 돌아갔다.

‘대도무문’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 등 무수한 말들과 에피소드를 남겼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김현철씨 페이스북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