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4일 화요일

일본인의 혐한활동

  • 기자명 전기호 사월혁명회 전 감사 /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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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1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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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60주년과 오늘(8)

들어가는 말 
미완의 4월혁명 완수를 위한 기본목표를 가장 극명하게 말하자면, 외세 축출과 민족의 자주통일이다. 이와 같은 목표달성을 위해선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만이 이를 굳건하게 보장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4월혁명 완수에 가장 큰 장애를 초래하였던 친일청산과 외세문제는, 4월혁명 60주년을 맞은 오늘 현재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가장 큰 역사의 숙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과 함께 민족자주통일 2대 장애요인인 일본의 정체, 구체적이고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 일본인의 혐한 활동의 실체를 알아보려고 한다.
▲ 1970년 6월 18일 박정희는 일본총리를 지냈고, 아베총리의 외할아아버지이기도 한 기시 보누스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주고 만찬을 하는 장면. 기시 노부스케는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다.[사진 : 뉴스타파 캡처]
▲ 1970년 6월 18일 박정희는 일본총리를 지냈고, 아베총리의 외할아아버지이기도 한 기시 보누스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주고 만찬을 하는 장면. 기시 노부스케는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다.[사진 : 뉴스타파 캡처]
혐한이란?
혐한이란 한국을 혐오한다는 뜻이다. 혐오란 사전적 의미로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떠한 것에 대한 공포, 불결함 따위 때문에 기피하는 감정으로, 그 기피하는 정도가 단순히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정도를 넘은 감정, 즉 혐오는 강렬한 싫음과 강렬한 기피가 결합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이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재일한국인1) 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파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에 북한을 혐오하지만, 일본인 북한 납치 문제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교관계가 거의 없다. 따라서 외교적 갈등과 같은 문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혐한의 대상도 주로 대한민국과 재일한국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고에서는 혐한의 대상을 대한민국과 재일한국인에 한정해서 다루기로 한다.
주1) 국적이나 남북한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와 관계없이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를 가리킨다.
일본 극우파의 등장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사회 전체가 급격하게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1989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노사협조 노선으로 전환하여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連合)라는 어용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일본사회의 혁신성이 상실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쇠퇴와 집권했던 민주당정권의 실책, 일본공산당과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패배 등을 배경으로 하여, 1980년대에 우익단체들이 대거 결성되었다.
그 중심에 『신편일본사』 편찬운동(1985~1986)을 벌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있었다. 그들은 천황에 기반을 둔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1980년의 ‘교육칙어’전문을 게재하고,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칭하는 『신편일본사』라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출판한다. 이 책에는 일본의 전쟁은 자위전쟁, 난징 대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등 과거의 과오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가득 찼다. 이 단체와 1974년에 결성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합쳐져서 1997년에 ‘일본회의’를 결성한다.
이들은 전후의 평화주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고, 패전 이전의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2006년 제1차 아베내각이 등장한 것은 일본회의가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것을 의미하며, 이후 지금까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아베내각은 헌법 제9조를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
이들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행동주의 우익으로 테러2) 도 불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혐한활동을 주도해 나간다.
일본 극우파의 혐한활동
‘일본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파의 혐한활동 이전에도 혐한활동은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후 시작된 혐한활동은 주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를테면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은 심판의 오심 때문이었다”는 등이었다. 이때의 혐한을 고도 성장기에 국민이 균등한 행복을 공유했던 시기의 내셔널리즘과는 구별하여 다카하라 모토아키(高原基彰)는 ‘불안형 내셔널리즘’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3)
주2) 예를 들면,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사회당 당수의 살해, 모토지마 히토시(本島 等) 나가사키 시장의 권총 피격 등
주3) 노윤선, 혐한의 계보, 글항아리, 2009,p.35.
다음으로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사죄한다면 일왕 방한도 가능하다는 발언을 계기로 발생했다. 이 시기의 혐한은 거리의 시위로 확산되었는데, 이를 중심에서 이끈 단체가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준말)였다. 이들은 2013년부터 1000건이 넘는 헤이트 스피치를 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한국인을 죽이자”, “강간하자”, “재일한국인 목을 매달아라!”, “바퀴벌레 구더기”, “서울거리에 불을 지르자” 등이다. 이때 카운터스의 오토코 구미라는 반재특회 결사대가 등장하여 이를 막았다. 이들은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에 물든 혐한시위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온 일본의 양심적인 행동주의 시민들이다.
일본 극우파의 혐한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한 이후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침략전쟁을 확대해 갔다. 일본 군인들은 곳곳에서 여성들을 폭행하고 강간했는데 대표적으로 1937년 난징의 집단 강간과 학살이 꼽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이 쏟아졌고, 일본군 간부는 오로지 일본 군인을 위한 일본군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설치를 계획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일본군이 점령한 동남아시아, 태평양 일대에는 수많은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직업적 윤락행위를 하는 일본인 여성이 위안소로 이송되었으나, 전쟁이 길어지고 일본이 점령하는 국가가 늘어날수록 식민지국가인 조선의 여성, 타이완의 여성, 중국의 여성들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그중 조선의 여성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4)
일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언론뿐만 아니라 인터넷, 만화 등 서브켤쳐를 통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서브컬쳐의 발달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가 이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형성된 담론들이 현재 혐한론자들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 현지 매춘업자들이 가난한 집의 딸들을 모아서 ‘위안소’에서 일하게 했고, 그녀들에게는 고액의 급료가 지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 모집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와 동일한 주장은 소위 한국의 역사전문가라는 집단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근 한일 양국에서 보이는 『반일 종족주의』 수요 현상이 결코 실체가 아니라, 일본에서 패배한 역사수정주의가 한국에 수출된 뒤, 일본자본에 의해서 다시 역수입되어 일본 역사수정주의 부활에 이용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5)
또한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해서』에서 “조선인 업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일본군 내지 일본국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 명확합니다만 나는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모집에 관여한 조선인 업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해도, 원래 ‘위안부’가 필요해서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위안부’를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적인 성적 착취를한 주체는 일본군이기 때문에 후자의 근본적 책임을 애매하게 만드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6)
이들은 오늘날의 토왜(토착왜구의 줄인 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주4) 상게서 pp.121~122.
주5) 이영채•한홍구, 한일 우익근대사 완전정복, 창비, 2020,p.20.
주6) 徐京植、高橋哲哉 , 책임에 대하여, 돌베개, 2019,p.133, 高橋哲哉의 주장.
혐한론자들의 몇 가지 논점과 그것에 대한 반박
첫째는 일본군 ‘위안부’ 뿐만 아니라 일제 전시하의 노동력 동원까지 강제성은 없었으며, 자발적이었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에 관한 것이다. 심지어 동경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는 한국 병합은 조선이 스스로가 바란 것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물론 이완용 등 일부 친일파들의 동조가 있었지만 무력의 위협에 의한 강점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가 자기나라를 외국에 스스로 갖다 바쳐서 노예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위안부’에 관해서 말하자면 일본 육군성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전부터 일본군 ‘위안소’설치를 계획했다. 당시 후카다 마스오(深田益男) 군의관이 작성한 「인도네시아 위생 상황 시찰 보고서」에 따르면, ‘촌장에게 할당해서 매독 검사를 하고, 위안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며, 여성들을 강제동원해 위안소를 만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일본군 ‘위안부’가 결코 민간업자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모집된 것이 아니며, 전쟁터에서의 일본군 ‘위안소’운영 또한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동원 없이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7)
일본군이 연합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일본군 ‘위안부’를 잔인하게 학살했으며,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도 학살과 집단자결이 이루어지고, 일본군 위안부를 간호부 명부에 올려놓으면서까지 위장한 이유는 이들 존재를 은폐하고,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다음으로 노동자의 강제동원에 관해서 보면, 일제는 1938년 4월에 국민총동원법, 이를 기초로 하여 1939년 4월에 국민징용령을 공포한다. 전쟁 중 그들의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한국에 있는 노동력 동원 방법은 모집 ⟶ 관알선 ⟶ 징용으로 강제성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필자는 노동자동원의 강제성에 관하여 그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 한 바 있다.8)
첫째, 일제의 한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은 초법적인 일본의 파쇼 독재정권이 전쟁이라는 국가 존망이 걸려 있는 중요한 시기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군수부문에 부족한 노동력을 식민지체제가 앞서 정착된 한국에서 집단적으로 동원•사용한다는 정책적 강제인 것이다.
둘째, 앞서 식민지 지배체제가 정착된 한국에서는 신체적인 구속이나 폭력 말고도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와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협박, 법적 강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셋째, 강제연행•강제노동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삼엄한 감시, 붙들렸을 때의 혹독한 폭행 등에도 불구하고, 33.3%에 이르는 도주율이다.
다음으로 일본 우익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전쟁 후 주변국들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보상할 것은 다 보상했는데, 계속해서 사과하고 보상하라고 한다면서 역사피로감을 이야기한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특히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에게 표명했다.9)  이를 계기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라는 재단법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물론 ‘위안부’들을 위한 기금이다. 이 기금은 일본 정부 국고에 의한 기금이 아니고, 민간 기금의 형태였기 때문에 피해 당사자들이 거부하여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권 때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를 하면서 이 문제가 불가역적으로 해소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에도 기금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화해•치유 재단’이다. 이 기금에 일본 정부는 100억 엔을 출연했지만, 공식적인 사과를 하거나 포괄적인 배상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
합의하는 과정 속에서 당사자 원칙을 지키고, 교과서에 게재한다든지, 재발 방지 노력을 한다든지 하는 여러 조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 없이 또 다시 최대한 노력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화해•〮치유 재단 해체까지 한 것이다. 그 와중에 2018년 10월에는 강제징용 재판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1965년 조약을 지키지 않는, 합의를 하고도 언제나 파기를 하며,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국가라고 비난하고 나섰다.10)
여기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체결로, 다시 말하자면 국가 간의 조약으로 강제동원 노동자와 이들을 고용한 회사 간의 사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이 주장했던 것을 번복하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피폭자들에 대한 피해보상과 미국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권이 문제로 되었다. 이 때 일본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청구권 협상은 양국 간의 재산권 협정이며, 개인의 피해 및 재산권에 대해서는 개별청구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폈다.
1955년 일본이 소련과 국교정상화를 하며, 평화협정을 맺을 때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된 일본 군인들의 사망, 강제동원, 임금 미지불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때 일본 정부는 전후 강제 억류자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구제해 주었지만, 이 법에 국적조항을 만들어서 한국인들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해결된 것으로 하여 배제했다.
일본정부는 2000년대까지 개인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2007년도 일본 대법원도 중국인 노동자의 강제동원 재판과 ‘위안부’ 재판에서 개인청구권은 소멸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그간 자신들이 인정해 온 개인청구권까지 부정하고 있다.
맺는 말
한국이 민주화하며 군사정권이 퇴조한 후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 극우보수세력은 한반도의 변화에 긴장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대중 및 노무현 정권의 대북 유화 정책을 비판했고, 그 후 이명박 및 박근혜 보수 정권의 등장으로 잠시 안심했는데, 촛불혁명에 의해 문재인 정권이 등장하여, 남북 및 북미 평화 프로세스가 급격히 추진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트집잡는 국가 한국’을 특집으로 다룬 우익월간지 윌의 2019년 12월호 표지에는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를 우려하는 한국 정부를 겨냥해 ‘문재인 너야말로 오염수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만약에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한반도 분단 유지 정책이 실패한다면, 일본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극우보수 세력들은 38선이 쓰시마까지 내려왔다고 하면서 제2의 한국전쟁을 기획할 수 있는 정치토양을 만들어 갈 것이다.11)
이 이야기는 참으로 전율을 느낄 만큼 끔찍한 이야기다. 그러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북한은 물론 최종적으로는 통일국가를 만들어야 되겠지만, 그 이전이라도 대일관계에서는 민족의 이름으로 공동 대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국제관계에서는 힘의 논리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이나 시민 단체와의 연대활동도 매우 중요하다.■ 
주7) 노윤선, 전게서, pp.146~147.
주8) 전기호, 일제 강점기 재일 한국인 노동자 계급의 상태와 투쟁, 지식산업사, 2003. pp 179~180 참조.
주9) 徐京植、高橋哲哉, 전게서, pp267~269, 무라야마 담화 참조.
주10) 이영채•한홍구, 전게서, p.27.
주11) 상게서, p.49.
전기호
경희대 명예교수
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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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41415385088858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사상 최초 '코로나 선거'... 이대로면 또 세계표준

20.04.14 19:27l최종 업데이트 20.04.14 21:02l


21대 국회의원 배지 공개 총선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국회 사무처에서 21대 국회의원 배지를 공개했다.
▲ 21대 국회의원 배지 공개 총선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국회 사무처에서 21대 국회의원 배지를 공개했다.
ⓒ 국회사진취재단
 
코로나19가 터지기 전만 해도 정치권은 '정부심판' '야당심판' 등의 이슈를 제기하면서 각자에게 유리한 어젠더를 총선에 장착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역대 선거와는 달리 정치권이 인위적으로 제조한 이슈는 바이러스 앞에서 맥없이 꺾였다. 대신 후보자와 유권자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구했다. 객관적 심판의 거리가 유지됐지만, 속도는 여러모로 빨랐다.

선거를 앞두고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을 3개 키워드로 정리해 봤다.

[키워드 ① 사회적 거리두기] 또 다른 세계 표준... 자가격리 투표

사전투표가 진행된 지난 10일과 11일, 마스크를 쓴 채 1미터 간격으로 늘어선 투표 행렬이 많은 언론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투표소 앞에서 손소독제로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비닐장갑을 끼었다. 기표소 앞에서도 투표 안내인들은 가급적 말을 삼갔고, 몸짓과 눈짓으로 1미터 거리 유지를 부탁했다.

35개 정당이 기재된 비례대표 투표용지도 48.1cm. '거리'로 표현할 만큼 길었다. 많은 선택지로 인해 잘못 찍었다며 투표용지를 다시 달라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유권자들은 가급적 사람들이 밀집한 기표소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집에서 나올 때부터 마음 속으로 결정한 듯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질서'를 요구했고, 시간도 절약했다.

자가격리 수준으로 치러진 사전투표에 이어 15일은 최종 투표일이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자가격리 중인 유권자는 5만명에 달한다. 이 중 투표 의향을 밝힌 자가격리자들은 1시간 40분 동안 합법적으로 거리로 나올 수 있다. 단, 다음과 같은 지침을 지켜야 한다.

"지자체에서 자가격리자를 1:1 동행해 투표합니다. 이를 집행하기 어려운 지자체의 경우, 자가격리앱을 통해 이동동선을 확인할 수 있는 GIS(지리정보시스템) 상황판으로 관리합니다. 이동경로에서 벗어나면 이탈로 간주하고 경찰에 신고합니다. 앱이 깔리지 않은 분은 출발할 때 '출발한다'는 의사를 이메일이나 전화 등으로 담당공무원에게 통보하고 집에서 나섭니다.

이때 추정 가능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도 투표소에 나타나지 않으면 이탈로 간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거꾸로 집에 돌아갈 때도 집에 도착할 추정 시간이 있는데 도착했다는 통보를 해야 합니다. 통보가 없으면 역시 이탈로 간주하고 신고를 합니다." (박종현 범정부대책지원본부 홍보관리팀장)


투표 의사를 밝힌 자가격리자는 발열·기침 등의 증상이 없으면 15일 오후 5시 20분부터 7시까지 외출할 수 있다. 4.15 총선 출구조사는 자가격리자들의 투표 시간을 감안해 투표마감 15분 후인 오후 6시 15분에 방송 3사를 통해 공표된다.

한편, 프랑스와 영국은 지방선거를 연기했고 폴란드는 대선을 우편투표로 진행한다. 미국의 15개 이상의 주에서는 대선 경선이 연기됐다. 이 때문에 세계가 한국 총선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 일정정도 성공해온 가장 큰 중요한 키워드는 '봉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두기'였다. 2020년 4월 15일 우리는 방역선거라는 또 다른 실험을 벌인다.

코로나19 검진키트에 이어 '사회적 거리두기 선거'의 세계 표준을 만들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게시한 투표인증샷 유의사항이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게시한 투표인증샷 유의사항이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키워드 ② 조용하다] "제발 좀 쓸데없는 소리 말라"

4월 14일 0시 기준 국내 확진환자는 하루동안 27명이 늘었다. 최근 10여일 동안 이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31일 0시부터 4월 14일 0시까지 2주간 신고된 778명의 확진환자 중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자는 3.6%인 28명에 머물고 있다.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은 인원이 50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 100명당 1명꼴로 음성 판정을 받은 셈이다.

이젠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14일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최근 신규 확진자 숫자가 계속 줄어들며 증가폭이 완연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감소세가 코로나19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중략) 내일은 총선으로 인한 휴일이고 날씨가 완연한 봄날이 계속되고 있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이 더욱 약화되지 않을지 방역당국으로서 걱정이 되는 상황입니다."

방역당국이 계속 경고음을 날리는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이다. 환자도 모르는 사이 무증상, 경증에서도 전염되기에 조용하고 빠르게 전파된다. 이번 선거도 바이러스의 특성과 여러모로 닮았다.

우선 선거 때마다 여론을 들썩이게 했던 '뜨거운 한 방'이 없었다. 미래통합당은 한 때 '텔레그램 n번방' 관련한 폭로가 있을 것이라고 군불을 지폈지만, 불발됐다. 지난 11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이 황교안 대표를 만나 "당 지도부에 '제발 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 달라'고 지시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막판에 차명진 전 미래통합당 후보의 세월호 막말도 터졌다. 과거 선거 때 이런 사건이 터졌다면 선거막판까지 여야간 격렬한 공방이 오갔을 법한 이슈다. 하지만 더 큰 공방으로 확전되지는 않았다. '조국 대전'을 치르려 했던 미래통합당의 의지도 제대로 관철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거리에서 시끌벅적한 후보자 선전전을 볼 수 없었고, 바이러스의 침투 때문에 인증샷을 찍기도 부담스러운 선거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정치권의 작은 공방도 모바일을 통해 빠르게 전파될 개연성이 많은 선거다.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온라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좁혔고, 여론 전파 속도를 높였다.

[키워드 ③ 코로나19 성적표] 바이러스가 마술처럼 짜놓은 선거 프레임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부근에서 미래통합당 황교안 후보가 연설을 하는 가운데,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지원을 위해 참석하고 있다.
▲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부근에서 미래통합당 황교안 후보가 연설을 하는 가운데,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지원을 위해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이번 총선은 '코로나 선거'라고 할 수 있다. 당초 미래통합당 등 야당은 '문재인 정권 심판' 프레임을 짜려 했지만, 방역당국과 국민들이 일군 코로나19 대응 성과를 정권이 가로채고 있다고 비판 프레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가령 부산 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인 서병수 부산진갑 국회의원 후보는 "문재인 정권이 코로나 사태를 악용하고 있다"면서 "국민들과 의료진이 대처를 잘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자신들이) 대처를 잘하고 있다고 그 공을 가로채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한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 3개월여 동안 방역당국이 움켜쥔 코로나19 방역 성적표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은 총선 하루 전인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거가 다가오자, 의심증상이 있어도 X-레이로 폐렴이 확인돼야 코로나 검사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며 "총선까지는 확진자 수를 줄이겠다는 건데 선거 끝나면 확진자 폭증할 거라고 전국에서 의사들의 편지가 쇄도한다"고 주장했다. 전날 <중앙일보>가 보도한 "총선 다가오자 마술처럼 급감…" 기사의 의혹을 다시 재점화하려는 발언이다. (관련기사 : 총선 앞둔 '중앙'의 3가지 의혹 제기... 방역당국 "강한 유감")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총괄조정관(보건복지부 차관)이 13일 정례브리핑에서 "이런 보도가 나간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고 강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면서 "검사대상 환자의 예시로 원인미상 폐렴 등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며, 의사의 의심에 따라 진단검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음을 누차 설명드린 바 있다"고 밝혔지만,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또 다시 의혹을 제기했다.

김종인 위원장은 이날 또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대거 국회에 들어온 소위 '탄돌이'들이 지금도 이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며 "이번에 코로나를 틈타서 청와대 돌격대 '코돌이'들이 대거 당선되면, 국회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이 나라는 진짜 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코로나19 방역 성과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14일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180석을 내다본다며 기고만장하고 있다"면서 "나라를 망쳤는데도 180석이면, 이 나라의 미래는 절망"이라고 호소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180석 논란'을 부추기며 문재인 정권의 과거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미래 권력에 대한 우려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다.

미래통합당은 이처럼 총선에서 코로나19와의 거리 두기를 호소하고 있지만, 표의 향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여당은 사사건건 국정에 발목 잡은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조용하고 빠르게 총선 프레임을 마술처럼 짜놓았다. 야당은 이 프레임을 깨려고 하고 있고, 여당은 지키려 하고 있다. 누가 덕을 볼 수 있을지는 곧 알 수 있다. 그 결과와 상관없이 코로나19에도 추가 확진자를 억제하면서 사전투표에서 보여줬던 역대 최고 투표율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또 다른 성적표를 거머쥘 수 있다.

분노의 DNA, 정의의 DNA, 그리고 연대의 DNA

<4월혁명을 증언한다⑦> 김동선 사월혁명회 회원
김동선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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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14  16: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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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4월혁명을 증언한다>

올해는 4월혁명 60주년입니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헌법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4월혁명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합니다. 특히 민족민주운동단체들도 매년 수유리 4·19묘역에서 합동참배식하는 일회성 행사로 알고 있습니다.
사월혁명회(연구소)는 창립선언에서 “4월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와 싸워…독재의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하였고, 또한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여 민족자주이념을 올바로 세우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4월에 완결된 것도 아니며 오늘의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통일이 달성되는 그날 비로소 그 이념이 정립되는 현재 진행형의 혁명입니다.
사월혁명회는 올해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월15일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함께 “4월혁명60주년행사준비위”를 구성하여 4월혁명의 의의와 과제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사월혁명회

김동선 / 사월혁명회 회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 김동선 사월혁명회 회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사진제공 - 사월혁명회]
1960년 3월 15일, 그날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재학 중이라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투표를 위해 그 전날 인천 소래에 있는 본가에 가 있었다.
투표일에 동네 반장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셋이 같이 투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왜 그래야 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투표장에 들어서니 셋이서 한 조가 되어 같이 투표하도록 투표 부스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세 사람 사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그래서 가운데 칸에서 투표하는 조장이 좌우의 투표자가 누구를 찍는가를 쉽게 감시할 수 있었다. 이것이 후에 알려진 그 악명 높은 3인조, 5인조 투표다.
나는 순간 격분하여 소리쳤다.
“이게 무슨 비밀선겁니까? 민주국가에서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가 보장되는데 이게 무슨 비밀선겁니까? 공개선거이지. 이러고도 하늘이 두렵지 않소!? 당신네들이 이렇게 불의한 일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 나라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 현장에는 선거관리위원, 동사무소 직원, 경찰 등 여러 사람들이 배석해 있었지만 그들은 나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나의 기세가 매우 거세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들 중 제일 높은 사람이 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묻자 대학생이라고 말하자 그냥 돌려보내라고 이르고는 별 해코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어찌 자기들이 저지르는 일이 부당하고 불법이며 정의에 반한 짓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단지 하수인일 뿐이다. 죄는 더 높은 곳에 있다. 권력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다.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젊은 지식인인 나는 절망했고 고뇌는 깊었다.
정부통령 선거라지만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는 선거운동 기간 미국에서 위 수술을 받다가 운명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은 자동 당선된 셈이다. 그런데 앞서 제3대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대통령 후보 신익희 씨가 운명하였다.
야당 대통령 후보 두 분이 연달아 돌아가시다니! 이 나라가 민주주의 할 운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구나! 국민들은 탄식하고 개탄하였다.
제4대 선거는 결국 부통령 후보 만송(晩松) 이기붕과 운석(雲石) 장면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선거를 얼마 앞두고 각 신문마다 이기붕을 찬양, 칭송하는 글이 매일 실렸다. 참으로 너무나 치졸하고 노골적인 자유당 정권의 행태였다.
그즈음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있었는데 그 시위에 참가했던 청년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 처참하고 끔찍했다. <동아일보>를 위시한 각 일간신문에 그 시신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1960년 4월 19일 바로 그 전날에 고려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여 반정부 시위를 하였는데 그때 땃벌떼 정치 깡패들이 학생들을 각목으로 무차별 폭행하여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부상당했다. 시민들은 분노하였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음 날 대학에 가는 중인데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단체로 시위하는 소리가 신설동까지 크게 들려왔다. 그들은 시내로 뛰쳐나오려 했지만 경찰들이 문을 막고 못나오게 방해했다.
동숭동 대학에 이르렀을 때 교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경찰들이 겹겹이 문을 막고 있었다. 교정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이미 와 있었는데 잠시 후 그들은 힘을 합쳐 문을 밀쳐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경찰은 곳곳에 저지선을 치고 막으려 했지만 노도와 같은 학생들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화동 종로4가를 거쳐 광화문에 도달했을 때 거기엔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성난 시민들의 최후 진출 목표지점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현 청와대)였다.
중앙청(현 경복궁) 정문에서부터는 더욱 강력한 철망 저지선이 구축되어 있었지만 의로운 시민들이 하나하나 분쇄해 길을 텄다. 경무대 코앞인 효자동까지 데모대는 진출 집결했다. 경무대 정문 바로 앞에 경찰은 최후의 강력한 저지선을 구축했다.
  
▲ 경무대 앞으로 몰려든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했다. [자료사진 - 사월혁명회]
효자동에서 경무대로 꺾여 들어가는 길목에 시위대에게 최루액을 뿌려대던 소방차가 운전수가 도망간 채 멈춰 서있었다. “소방차 운전할 사람 없소?”라고 누군가 소리치자 한 사람이 “나요”하고 나서서 그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는 소방차 뒤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경무대 바로 앞에 다다랐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의 최루탄 발사 소리와는 다른 총탄의 발사 소리였다. 데모대는 깜짝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총에 맞은 시민들이 팍팍 쓰러졌다. 나도 정신없이 달아나다 근처 민가에 숨었다. 주인의 고마운 배려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경찰들이 집집마다 뒤져 시위꾼들을 잡아갔는데 나도 발각되어 결국 잡히고야 말았다. 정권의 경찰들은 잡혀 온 우리들에게 “이 새끼들은 빨갱이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야”라고 욕하며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우리들은 트럭에 태워져 고개도 못든 채 깜깜한 칠흑 속에서 어디론가 실려 갔는데 알고 보니 서대문 형무소였다. 넓지 않은 감방에 수십 명이 갇혀있었다. 식사를 제공받는데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곤 고추장 하나뿐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 나는 도저히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무려 3일간 아홉 끼를 굶었다. 나중에는 앉아있을 힘이 없어서 그냥 누워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 그랬다.
감방에 잡혀있는 동안 아버지는 내가 죽지 않았나 4·19 사상자들이 누워있는 병원들을 찾아다니며 시신을 가려놓은 천을 일일이 들춰보고 확인하셨다고 한다.
3일이 지나자 갇혀있던 우리는 의외로 빨리 풀려났다. 잡혀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들을 더 이상 가둬둘 감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풀려나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그야말로 죽은 자식 돌아온 듯이 기뻐하셨다.
  
▲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자료사진 - 사월혁명회]
계엄령이 선포되어 시위가 금지 되었다. 그런데 4월 26일 교수들의 시위가 있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그들의 용기있는 외침이 시위의 불을 다시 살려냈다.
며칠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조건을 구차하게 붙이고 말이다.
국민이 이겼다. 시민이 승리한 것이다. 12년의 독재가 종식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몇 달 후 편한 마음으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런데 다음 해 5월 16일 느닷없이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4·19 후 나라가 한동안 각 집단, 단체들의 많은 데모로 혼란에 빠졌었는데 여당인 민주당은 신, 구파로 나뉘어져 서로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모로 이룩한 민주정부이니 그 데모를 물리적으로 막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 혼란상태가 대부분 진정될 무렵 군사 쿠데타라니…. 부패한 이승만 독재시대에는 꼼짝 못 하더니….
이렇게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는가? 너무나 허탈했다. 그 후 군부세력은 18년, 아니 무려 25년의 독재를 자행하였다.
4월혁명 60주년인 지금, 80여 년의 현대를 몸소 살아온 나에게 우리 시민,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기본 감정은 한마디로 증오애(憎惡愛)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외형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실제 정치는 정파적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이 되풀이 되고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지만 원칙과 정도를 벗어난 행태가 비일비재하다.
요즈음 여야를 막론하고 소위 꼼수정당, 위장정당인 비례정당을 만드는데 분주하다. 편법,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자기당 국회의원 수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여 제1당이 되겠다는 열망에 분주하다.
경제는 어떠한가?
양극화의 정도가 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하루에도 4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산업 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살률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사회적으로는 지역감정,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보수 진보의 진영 논리가 나라를 가른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현실을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의 현대를 냉철히 돌아볼 때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1960년 4월혁명,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민주항쟁, 그리고 2017~18년의 촛불혁명. 우리 시민들은 정치사회적 불의, 부정이 극에 달했을 때 결코 좌시하거나 체념하고 굴종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연대하여 분연히 불의한 정권에 맞서 희생을 무릅쓰고 끝까지 투쟁하여 결국 승리를 쟁취했고 그래서 결국 정의를 실현하였다. 우리에게는 분노의 DNA, 정의감의 DNA, 그리고 연대의 DNA가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나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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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테러 발생! 오세훈 후보 낙선운동하던 여대생을 남성이 폭행

하인철 통신원 | 기사입력 2020/04/14 [21:02]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소속 여대생이 오세훈 후보 또는 미래통합당 지지자로 보이는 남성에게 3차례나 폭행을 당했다.

지난 3월 말부터 대진연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는 오세훈 후보에게 국회의원직 자격이 없다며 한 표도 주지 말자는 낙선운동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오세훈 지지자와 선거운동본부의 많은 방해가 있었다. (관련기사 : http://www.jajusibo.com/50160)

14일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대진연 회원은 "120만 원 금품 제공,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는 오세훈 후보에게 한 표도 주지 맙시다", "오세훈 후보를 떨어뜨릴 당선 가능한 후보에게 투표합시다"라고 호소를 했다. 시민들과의 충돌이 우려된 광진경찰서 등에서도 일찍부터 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낙선운동을 하던 도중 오세훈 후보 또는 미래통합당 지지자로 보이는 시민에게 폭행을 당했다. 근처에 있던 경찰들은 사건 현장을 보지 못해 현장에서 바로 검거를 하지 못했다.

  © 하인철 통신원
▲ 대진연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피해자의 상해 사진(좌)과 상해범의 사진(우)  © 하인철 통신원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경과는 다음과 같다.

"오세훈 후보 낙선운동을 하던 도중, 폭행범이 와서 저를 때리고 가운뎃손가락 욕을 했다. 이후 기록을 남기기 위해 촬영을 하며 도망가는 폭행범을 따라가던 도중 지하로 내려가는 폭행범을 따라가는 게 무서워 올라왔다. 그 후 폭행범이 다시 위로 올라와 저를 넘어뜨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물통을 빼앗아 이마를 여려 차례 때렸다. 그 후 다시 역사 안으로 도망가버렸다"라고 증언했다. (관련 영상 : https://youtu.be/wse_dbQGVcw)

피해자가 찍은 영상을 보면, 폭행범이 갑자기 다가와 몇 차례 때린 뒤 도망가며 "빨갱이 X"이라고 소리를 지른 뒤 도망가던 다시 올라온다. 이후 물통으로 여러 차례 가격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영상 : https://youtu.be/d9qq3wg_XGA)

이후 피해자는 경찰에게 진술했다. 경찰 측에서는 "왜 우리 가까이서 (낙선운동을) 하지 않았느냐"라며 오히려 폭행범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대진연 회원들의 공분을 샀다.

현재 피해자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안정을 취하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