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5일 화요일

항일무장투쟁의 싹이 활짝 피어난 겨울명월구회의

[항일연재40]항일무장투쟁의 싹이 활짝 피어난 겨울명월구회의
항일독립주투쟁의 성지 연변조서족자치주를 가다(40)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7/06 [07: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40)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8.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전후 만주 각지 유격대창건


6) 항일무장투쟁의 싹이 활짝 피어난 겨울명월구회의

(1) 조선북부국경의 종성에서의 무장투쟁 준비사업

1931년 가을부터 겨울사이에 벌어진 추수투쟁은 민중들의 대 승리로 끝났다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추수투쟁으로 앙양된 민중들의 반일감정을 항일무장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멈춤 없이 무장조직을 내오기 위해 활동을 하였다.

이미 앞선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9 · 18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강대성의 신화를 만천하에 과시를 했다고 대부분이 받아들였지만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의 지도자는 역설적이게도 일제의 커다란 허점을 보고 반일 · 항일무장투쟁대오를 앞당겨 내오기로 결심을 하였다그 일환으로 동만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조직 지도하여 추수투쟁을 이끌어 대 승리를 하였다.

이렇게 앙양된 반일감정과 추수투쟁의 승리로 반일투쟁에서도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신심을 항일무장투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조선경내에도 무장항쟁조직을 내오기 위해 추수투쟁이 한창이던 1931년 10월 조선북부국경지대인 종성을 다녀왔다.지도자가 종성지역에 지하조직원들을 지도하기 위해 가서 받은 것은 비록 반일감정이 높고 혁명성이 강하다해도 누군가에 의해 제대로 된 정치적 지도를 받고 각성되지 않으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종성의 지하조직원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받은 민중들의 혁명적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북측 자료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 우리는 간도에서 품을 팔러 나온 인부로 가장하고 로동자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간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로동자들은 추수투쟁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추수투쟁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비관적이였다왜놈들이 만주를 강점하기전에도 간도에서 숱한 폭동들이 일어났다가 실패했는데 하물며 그놈들이 만주를 침략하고있는 때에 추수투쟁 같은것이나 벌려가지고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이 투쟁도 결국은 5.30폭동의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다지금은 어떤 투쟁을 벌려도 소용이 없다보라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있고 게다가 강대국들이 모여있는 국제기구에서도 그놈들의 편역을 드니 약소민족이 바라볼데가 더는 없지 않은가 하는것이 로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때 로동자들이 우리에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세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바 하나는 혁명가가 민심을 잘 알려면 항상 대중속에 있어야 한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하겠다는것이였으며 또 다른 하나의 충격은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대중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되기전에는 성과를 거둘수 없다는것이였다.

나는 로동자들의 허무주의적이고 자포자기적인 견해를 들으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여 우리 민족에게 재생의 희망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어야겠다는것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날 우리는 광명촌청년회 회장으로 사업하고있던 최성훈의 집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과 관련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나는 회의참가자들에게 9.18사변후의 급변한 정세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력사적교훈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릴것을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고있다는것과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것은 우리 혁명투쟁의 합법칙적인 요구이며 질적인 비약이라고 강조하고나서 두가지 큰 과업 즉 군사적준비를 튼튼히 갖추는 과업과 함께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축성해야 할 과업을 제기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라는 격동적인 사변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무장대오의 조직을 돕기 위한 창발적인 의견들을 내놓고 열변을 토하였다.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혁명력량준비문제는 1931년 5월의 공수덕회의에서 이미 론의되고 확정되였다이런데 기초하여 광명촌회의는 무장투쟁이라는 새 사변을 앞두고 국내혁명조직들앞에 나서는 실천적과제를 토의한셈이였다이 회의는 국내인민들과 혁명가들에게 보내는 무장투쟁의 예령이였고 사전신호였다회의과정에 표현된 무장투쟁에 대한 국내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공명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반일 ·항일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선 노동자농민들과 같은 기층민중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잘 지도를 받지 못하면 신심을 잃고 투쟁의지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렇게 나약한 조직원들을 데리고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혁명활동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확고하지 않은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지도를 하랴한편으로 항일무장대오를 내오기 위한 조직지도를 하려 보통 사람들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인용문을 보면 조선북부국경인 종성지역에 조직원들조차도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이전 공산주의 세대들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강대성의 신화에 주눅이 들어 투쟁의 신심을 잃어버리고 반일민족투쟁을 접어버린 것과 똑같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보라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있고 게다가 강대국들이 모여있는 국제기구에서도 그놈들의 편역을 드니 약소민족이 바라볼데가 더는 없지 않은가 하는것이 로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노동자들 특히 반일투쟁의 길혁명의 길에 나섰다는 계층의 사람들이 이 정도였으니 9 · 18만주사변이 가져다준 반일민족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더구나 국제기구에서조차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편에 서 있으니 약소민족은 어디 의지할 데가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신심이 약해져 있고 투쟁성과 혁명성이 나약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비록 혁명가라 하더라도 사상적으로 튼튼히 무장이 되어있지 못하고또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있지 못하면 결국 투쟁도 혁명도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렇게 신심이 나약하고 투쟁성과 혁명성을 잃어버린 민중들을 반일 ·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사상적으로 각성시키고 나약해질대로 나약해진 그들의 신심을 북돋워주어야 곧 내오게 될 항일무장대오에 그들을 주력으로 내세울 수가 있다.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사이에 카륜에서 있었던 카륜회의》 이후그리고 1930년 5 · 1폭동》 《5·30폭동》 《8 · 1폭동의 대 실패를 하고 그 후과로 어렵게 꾸려놓은 합법조직뿐 아니라 지하조직까지 혹심하게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고 확대하기 위해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를 오가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이전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이나 공산주의운동가들이 벌여왔던 반일독립운동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활동이다.

우리는 본 문제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는 1930년 카륜회의 이후 그리고 대 폭동의 후과를 극복하고 조직을 회복하고 확대를 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주체적인 사상을 토대로 하여 우리민족의 힘에 의해 자주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그런데 인용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반일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선 조국의 노동자들마저도 자주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여 조국을 독립시키고 혁명을 하고자 하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이러한 점을 해결하지 않고는 장차 있게될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길에 내적으로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종성을 방문하여 조직활동을 하는 과정에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하였다.

첫째그것은 줄곧 주장을 해온 것처럼 혁명가나 모든 조직을 지도하는 활동가들은 언제나 민중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때 로동자들이 우리에게 한 말을 듣고 나는 세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바 하나는 혁명가가 민심을 잘 알려면 항상 대중속에 있어야 한다는것이라고 하여 혁명가나 모든 조직을 지도하는 활동가들은 언제나 함께 투쟁을 하고 혁명을 해야 할 다수의 민중들 속에 들어가야 그들의 진심을 알고 그들이 올바르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또 가는 길이 어긋났을 경우 바로 잡아주면서 투쟁과 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위에서도 이미 언급을 했지만 아무리 투쟁의 길에 나서고 혁명의 길에 나섰다고 하지만 민중들이 정치적으로 각되어있지 않으면 그들을 올바른 투쟁과 혁명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이는 첫 번째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즉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서 투쟁이나 혁명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야 그들의 진심을 알고 그들의 정치적 각성된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용문은 다른 하나는 무장투쟁을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하겠다는것이였다.”라고 하여 당시 반일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섰던 사람들조차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어있지 못했음을 말 해주고 있다.

셋째모든 투쟁이나 혁명의 길에 나설 때 민중들은 자신들이 왜 투쟁을 해야하는지혁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인식을 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점이다이는 투쟁이나 혁명의 길에 나선 민중들 자신들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을 할 때만 투쟁이나 혁명의 길에 부딪히게 될 난관을 극복을 할 수가 있으며이럴 때에만 투쟁과 혁명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바로 이 점을 인용문은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대중이 그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동원되기전에는 성과를 거둘수 없다는것이였다.”라고 하여 투쟁과 혁명의 길에 나선 민중들이 투쟁과 혁명의 길에 자신들이 왜 나서야 하는지 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그래야만 투쟁과 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을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도 어떤 조직을 동원하여 투쟁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말 같이 쉬운 것이 아니다물론 불완전한 평화시기이기는 하지만 당시 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현대사회에서도 조직성원들을 투쟁을 길에 내세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투쟁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모두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는 주장만을 하고 있다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이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내가 속한 조직 즉 학교라는 공간에서 퇴학조치를 당하면 다음 취업을 할 수 없고 그리하면 내 먹고사는 길이 막히기에 정치적 투쟁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투쟁의 길에 나설 수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또 직장조직들이 노동자들의 권익수호를 위한 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할라치면 또 내가 투쟁을 하다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면 우리식구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다고 구구절절 해명을 하고 있다교나 직장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 현재 남쪽사회에서 정치투쟁이나 권익투쟁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먼저 내세우는 이유가 바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대고 있다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 현재 우리가 분석을 하는 1930년대 초에 비해 열악하다고 누가 말 할 수 있겠는가결코 아니다.그만큼 남쪽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투쟁력이 약화가 되었기 때문이다이는 곧 신념의 문제요 신심이 나약해졌음을 말 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투쟁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들고 있다물론 현재 남쪽사회에서 정권을 책임진 자들이 계급간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충돌에서 어느 일방의 이익만을 보호하면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을 가혹하게 그리고 갖은 이유를 가져다 붙이면서 탄압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그리고 그 탄압의 강도 역시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다하지만 정권을 담당한 이들이 민중들에게 가하는 탄압의 강도만 해도 사실 세월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다가까운 예로 1980년의 광주대학살과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고 갈라진 겨레의 하나 됨을 위하여 투쟁의 길에 나섰던 이들이 과연 얼마나 무리죽음을 했는가. 1980년대이후 9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의 길에 무려 264명이나 목숨을 바쳤다그 이전 세대들이 투쟁의 길에서 당한 희생은 또한 얼마인가하지만 이에 비해 비록 가혹한 탄압이라고 비난을 받지만 2000년대 이후에 정권을 담당한 자들이 가하는 탄압의 강도 역시 대단히 약해졌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1930년과 1931년의 만주와 조선국내의 상황은 어떤가두 말 할 필요가 없다당시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숫자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우리겨레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식민지지배에 들어간 이후 무려 124만여 명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목숨을 잃었으며, 840여만 명이 징병 및 징용에 끌려갔으며, 20여만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 가혹한 성 학대를 받았다이렇게 당한 숫자를 계산하여 한 해에 얼마씩 인명의 피해를 입었는가를 보면

㉠  살해당한 인명 :1,240,000÷36=34,445하루 평균 약 100여 명
㉡ 강제징용 및 징병 :8,400,000÷36=233,334하루 평균 약 640여 명
㉢ 성노예피해자 :200,000÷36=5,556하루 평균 15.3
------------------------------------------------------------
총 피해자 수 :9,840,000
한 해 평균 피해자 수 :273,335
하루 평균 피해자 수 :755.3

이다일본제국주의 식민지치하에서 우리겨레가 얼마나 참혹한 인명피해를 당했는지 상상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이다당시 조선인들에게 가해지던 폭압이 어떤 수준이었는가한 해 평균 약 3만 5천여 명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하루 평균 1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이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지배시기 전 기간에 당한 인명피해에 대해서 평균해서 산출한 것일 뿐이다그럼에도 우리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하루 평균 당한 숫자가 얼마인가일제의 우리민족에 대한 탄압의 마수는 갈수록 더 심해졌다특히나 만주지역이나 일제에 강하게 항거해 나서는 집단이나 세력들에게 가해지는 학살만행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가혹한 학살만행이 가해지던 그것도 가장 혹심하게 탄압을 하던 1930,40년대 만주지역과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반일 · 항일무장투쟁에 나선다는 것이 상상이나 가는가아마 현재 남쪽의 젊은이들에게 거의 매일 100명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이에 맞서 과감하게 항거해 나서고 투쟁에 나설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면 아마 말로야 나설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실제로 나서는 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으로 필자는 본다.

상황이 이러한데 현재 남쪽 상황에서 탄압이 심해서 투쟁에 나설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결코 아니다모든 것은 신념의 문제요 투쟁의지의 문제이며 왜 투쟁을 해야 하는지 그 의의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진정 나아가야 할 투쟁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결코 외적요인이 이전 시대보다 강화가 되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다그만큼 남쪽민족 구성원들의 의지가 나약해져있기 때문이다.참으로 걱정스러운 우리민족의 미래이다.

물론 1931년 10월 조선북부국경인 종성에서 반일의 길혁명의 길에 나섰던 노동자들의 실태가 당시로서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약화가 되었다고 지도자는 우려를 하고 있다모든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가 되기 때문이지 현재 남쪽 사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약화된 노동자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길은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이를 위해 지도자는 아래와 같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노력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나는 로동자들의 허무주의적이고 자포자기적인 견해를 들으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무장투쟁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여 우리 민족에게 재생의 희망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어야겠다는것을 더욱 절감하였다.”

라고 하여

지도자는 신심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져있는 노동자들을 반일 · 항일혁명의 길에 불러일으켜 세우기 위해 무장투쟁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가장 효과적인 것은 부정의의 폭력에는 정의의 폭력으로 대항을 해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심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바로 이 점을 지도자는 정확히 인식하고 결정을 하였다이를 위해 지도자는 종성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이때 개최된 회의가 광명촌회의이다.

인용문을 봐서 알 수 있지만 광명촌회의의 주제는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항일무장대오를 내오는 문제이다. 1930년의 대폭동의 실패와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조작된 9 ·18만주사변》 이를 빌미로 전광석화처럼 만주 전역을 점령한 살벌한 시대상황에서 무장력의 강대성의 신화를 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과 맞서 과감하게 무장투쟁을 벌일 결심을 하고 무장대오를 하루 빨리 내오기로 했다는 지도자의 선택은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부정의(不正義)의 폭력에는 정의(正義)의 폭력만이 우리민족이 처한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고 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지도자는 알았던 것이다.

1930년 대폭동의 실패이후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벌인 모든 활동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무장대오를 내오기 위한 것이다추수투쟁이 한창이던 1931년 10월 종성에로의 걸음도,그곳에서 광명촌회의를 개최한 것도 모두 항일무장대오를 내오기 위한 것이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날 우리는 광명촌청년회 회장으로 사업하고있던 최성훈의 집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과 관련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에 대하여 토의하였다.”고 하여 토의 주제가 무장투쟁을 위해 국내조직들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과업토론이었다고 말 하고 있다.

무장투쟁의 당위성에 대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아래와 같이 혁명조직성원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나는 회의참가자들에게 9.18사변후의 급변한 정세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력사적교훈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릴것을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고있다는것과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것은 우리 혁명투쟁의 합법칙적인 요구이며 질적인 비약이라고 강조하고나서 두가지 큰 과업 즉 군사적준비를 튼튼히 갖추는 과업과 함께 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축성해야 할 과업을 제기하였다회의참가자들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이라는 격동적인 사변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무장대오의 조직을 돕기 위한 창발적인 의견들을 내놓고 열변을 토하였다.”

라고 하여

9 ·18만주사변이 일어난 엄혹한 상황에서 무장투쟁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제기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내었다는 점을 말 해주고 있다역시 지도자가 선택한 길이 대단히 옳았으며그 길만이 신심을 잃고 좌절하여 방황하고 있는 조선의 반일투쟁가들과 혁명가들을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불러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광명촌회의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조선 국내 민중들과 반일혁명투쟁가들에게 무장투쟁의 길에 나서야 한다는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물론 만주에서만 반일· 항일무장투쟁을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무장투쟁의 목적 지향 점은 바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다그렇기에 국내의 백성들과 투쟁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결속을 짓고 있다.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혁명력량준비문제는 1931년 5월의 공수덕회의에서 이미 론의되고 확정되였다이런데 기초하여 광명촌회의는 무장투쟁이라는 새 사변을 앞두고 국내혁명조직들앞에 나서는 실천적과제를 토의한셈이였다이 회의는 국내인민들과 혁명가들에게 보내는 무장투쟁의 예령이였고 사전신호였다회의과정에 표현된 무장투쟁에 대한 국내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공명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다.”

라고 하여

조선북부국경에 접해있는 종성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조직사업이 대 성공을 거두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1930년의 대 폭동의 실패와 1931년 9월 18일에 발발한 9 · 18만주사변으로 인하여 신심을 잃고 반일 · 항일혁명의 길에서 좌절하여 맥을 놓고 있던 조선국내의 혁명조직들에게 항일혁명에서 승리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그들이 반일 ·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이끌어준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종성에서의 활동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이는 후일 조선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맞서 승리를 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2) 반일 · 항일무장투쟁의 대문을 활짝 연 겨울명월구회의

사진1-1. 겨울명월구회의가 개최되었던 장소
▲ 1931년 12월 16일 겨울명월구회의가 개최되었던 개발되기 이전의 오래 전 사진. 사진은 적어도 50여 년 전 전경을 찍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사진에서 절벽처럼 보이는 움푹 들어간 장소에 회의기념비석이 세워져 있다. 회의가 열렸던 장소를 먼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만 해도 도로가 없고 논이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사진1-2.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회의장소의 현재의 모습.
▲ 겨울명월구회의가 개최되었던 장소의 도로확포장공사를 한 현재모습. 먼 거리에서 보면 산과 절벽의 형태는 남아있지만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마도 이전 사진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현재의 모습만 보면 그 곳이 과연 명월구회의가 열린 장소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도로 한 가운데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가옥이 있었다. 사진은 절벽쪽에서 회의가 열렸던 가옥이 있던 방향을 찍었다. 따라서 비석이 세워져 있는 절벽은 사진에서는 볼 수가 없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는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이때 가졌던 겨울명월구회의에서는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나서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투쟁의 방향설정과 방법 그리고 투쟁의 영역 등이 논의되었다또 겨울명월구회의는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사이 카륜 진명학교에서 가졌던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이자는 노선이 항일무장투쟁의 을 활짝 피운 회의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결국 1930년 이후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백두산 지대에서 가열차게 벌이던 항일무장투쟁의 씨앗은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아버지인 김형직 선생이 물려준 두 자루의 권총이었고그 씨앗을 틔운 것은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사항이었으며 또 항일무장투쟁의 을 으로 활짝 피어나게 한 회의가 바로 1931년 12월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이다이를 간략히 도식화하면

두 자루의 권총 → 카륜회의 무장투쟁노선 결정 → 겨울명월구회의 항일무장투쟁 구체화 이다.

1931년 12월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는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독립투쟁가들의 무장투쟁노선에 있어 씨앗과 뿌리 그리고 그 줄기를 이어주는 주요한 회의였다또 이러한 기조는 제국주의연합세력과의 대결에 있어 현재까지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 날에는 이를 북에서 선군정치》 혹은 선군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서는 지난 장들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본 장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과 현재 북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선군정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 때문에 상세히 분석을 하고자 한다본 분석에 있어 지난 장들에서 인용을 하였던 북측 자료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학술자료그리고 남쪽의 학술자료를 중복이 되기는 하지만 또 다시 인용하여 비교분석함으로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대해 고증하고 논증을 하고자 한다.


①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이미 지난 장들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간략히 다룰 때에도 분석을 하였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보면 모든 것이 중국공산당의 지시와 주도아래 동북만주와 남만에서의 무장투쟁이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가 되어있다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 역시 이에서 조금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를 보도록 하자.


❝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공산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후 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조선인)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파견하였다. 12월 16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공산당공청단 열성분자 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후인 9월 21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말았다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동만 각 현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리광채수항,김일환량성룡오빈오중화오중성구봉운김철김증권리청산김일룡김정룡한일광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이들중 리광량성룡,오중화오중성김철 등은 왕청현대표들이고 채수항김일환은 화룡현대표들이며 오빈리청산 등은 연길현대표들이다그런데 한가지 의문하는 점은 왕청현대표인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각급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공회농민협회부녀회소년선봉대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제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춘황투쟁을 준비할데 관한 문제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데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의 의의에 대한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 

(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위에서 인용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보면 1931년 12월 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구성원들을 보면 대부분이 조선인들이다물론 아래에서 인용하여 비교분석하겠지만 북측 자료에 의하면 회의에 참가한 총인원은 40여명이고 중공당에서 참석한 인원은 7명 정도 된다고 하였다그런데 그 회의를 개회하라고 지시를 한 것도 중공당이고 주최를 한 것도 중공당이라고 한다면 조선인들은 그저 중공당의 명령만 받고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말인가물론 중공당에서 지시문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자료에 언급되어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중공당에서 결정하고 조선인들이 수동적으로 회의에 참석을 한 것처럼 묘사를 한 것은 동의할 수가 없다다음에 인용되는 북측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북측 자료를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겨울명월구회의에서 결정된 주요한 사항들은 무장투쟁에 대한 내용과 후일 조선인들이 어떻게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이미 전 장들에서 남측 자료나 북측 자료 심지어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에서까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인원의 85~90%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참가 인원에서뿐 아니라 무장투쟁을 이끌어가는 간부진들은 최저 90% 이상이었다고 고증을 하였다그런데 어찌 조선인 투사들이 일방적으로 중공당의 지시만을 받아 움직였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남측 자료에서까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는데 주저하였으며 투쟁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재리고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그런데 위 인용문을 보면 모든 것은 중공당이 조직지도 하였으며 회의를 이끌어간 것도 역시 중국공산당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이는 명백한 왜곡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그건 중국공산당 산하 동만특위에서 겨월명월구회의의 결정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이는 인용문의 맨 마지막 문장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동만의 어떤 공산당이며 공청단인지 그 구성원들이 중국인들인지 조선인들인지 구분조차 해놓지 않고 있다회의 참가자 구성원을 보면 아마도 조선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이는 북측 자료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그럼 결국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이 주도하여 이끌어갔다는 이야기가 되며 젊은 조선인 투쟁가들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밖에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하지만 북측 자료를 보면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조선인들의 반일 · 항일무장투쟁과 조선의 혁명에 대해 말 하고 있다-중간에는 함께 투쟁을 하는 연대에 의미를 두고 있지 결코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조선의 젊은 투사들이 받아들였다고 하지 않았다오히려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북측의 입장이며 자료로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대하고 분석을 해야 한다후일 상세하겠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서 겨울명월구회의를 이끌었다고 하는 동장영은 후일 조선인 투사들의 커다란 희생을 가져온 반민생단투쟁을 이끈 인물이었다이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예정이기에 여기서 그친다.

다만 위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을 하고 만주의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중국공산당과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연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된 회의였다는 점이다겨울명월구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중국공산당만주성위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조선의 항일투사들과 연대하여 함께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 가치와 의미를 둘 수 있다.


②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자료

1931년 12월 열린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 자료 역시 그리 상세한 것은 아니다.그저 간략히 언급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그나마도 중국측 자료만 분석대상으로 삼았으며북축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인 시각만 보여주고 있다물론 이해는 한다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를 하는 조선족들이나 남측 학자들 역시 처한 상황이나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지만 학술자료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근거해서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이 점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나 남측 학술자료는 대단히 미흡하다.

비록 미흡하지만 아래에서 남측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해보기로 한다.

사진2-1,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당시의 가옥전경과 내부
▲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가옥. 사진에서 보이는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여일간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다.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카륜회의와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겨울명월구회의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들이 토의되었다. 이때 토의결정된 유격대창설에 관한 의안은 반일·항일투쟁의 분기점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사진2-2.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당시의 가옥전경과 내부
  
▲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가옥 내부모습이다. 그리 넓지 않은 가옥에서 무려 40여명의 인원이 참석하여 10여일에 걸쳐 회의를 하였다. 사소한 것 같지만 당시의 사람들의 인내심이 현대인들에 비해서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존경스럽기만 하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이러한 동만의 분위기 속에서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났다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9월 22일 국민당(國民黨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로 소비에트구의 확대와 소비에트 혁명 노선을 제기하였다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만주사변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민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비록 9월 22일의 결의문에 파업과 파시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점령에 반대하라” “유격전쟁을 일으키라” 등의 슬로건을 미미하게나마 내놓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중공당 중앙위는 반일(反日)’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주에서 동북군벌계통의 군대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대일무력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당연히 중공당에서도 반일항쟁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이에 1931년 10월 12일 중공당 중앙위는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조직을 명확하게 제시하게 되었다중앙위의 지시를 받은 만주성위에서는 1831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결정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연길현·화령현·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여 10일간이나 계속된 이 회의는 중공당 중앙위와 만주성위에서 제출한 유격대 창건에 관한 지시를 토론한 뒤 동만에서도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전근거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명월구회의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전근거지 창설 방침을 밝히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이 이 회의의 소집 책임자를 동장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김일성의 당시 직위(안도현의 당 간부로 추정된다)로 보아 결코 그가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북한 문헌 중 명월구회의가 처음 등장하는 백봉의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1931년 11월 장군의 참가하에 명월구회의가 열렸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활동지역인 안도현의 당 간부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의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근현대사 중에서


위 인용문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1931년 9월 18일에 발발한 만주사변 직후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차원에서는 이에 대처하여 강력하게 대일 항쟁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지 못하였다물론 인용문에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922일 국민당(國民黨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로 소비에트구의 확대와 소비에트 혁명 노선을 제기하였다.”라고 언급을 했듯이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에 행태에 대해 반대하여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기는 하였지만 전면적이고도 강력하게 투쟁을 하거나 항전으로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인용문을 보면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반제민족투쟁을 전개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중국공산당차원의 전국적인 항쟁국면으로까지 확대시킬 정도의 인식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은 분명해보인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만주사변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민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 당시 만주사변을 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인식이 절박하다거나 급박한 상황으로까지 보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용문은 비록 9월 22일의 결의문에 파업과 파시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점령에 반대하라’ ‘유격전쟁을 일으키라’ 등의 슬로건을 미미하게나마 내놓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중공당 중앙위는 반일(反日)’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았다.”고 지적을 하면서 1931년 9월 말까지의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만주사변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안일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1931년 9월 말까지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주점령에 대해 중국공산당차원에서 전면적이고도 강력하게 대응을 하지 않았는데 그보다 겨우 2달 후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를 어떻게 주제를 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겠는가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지역만 해도 드넓은 동만일대 모두에 걸쳐 있으며참가자들 또한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는데 그들이 회의에 참석을 하기위해서는 동원을 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기록을 보면 회의에 참석한 조선인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다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동원을 하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필자는 이에 대한 답으로 그동안 우리가 이전 장들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것처럼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꾸려놓은 조직성원들을 동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본다물론 북측 자료 역시 이러한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위에서 인용한 남측자료에서는 그러나 만주에서 동북군벌계통의 군대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대일무력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당연히 중공당에서도 반일항쟁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여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직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반일행동지침은 능동적인 것이 못되고 만주지역에서 반일항전에 수동적으로 대처했다고까지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1931년 11월 중순 들어서서는 중국공산당차원에서 일본침략자들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였다이에 대한 인용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이에 1931년 10월 12일 중공당 중앙위는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조직을 명확하게 제시하게 되었다중앙위의 지시를 받은 만주성위에서는 1831(1931년의 오타임)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결정하였다.”

라고 하여

그 해 11월 중순에 들어서서는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말 해주고 있다. 11월 중순이라면 겨울명월구회의가 개최되기 한 달도 못되는 시기이다그 짧은 기간에 명월구회의에 참석할 인원들을 소집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더구나 회의 참석인원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하지 않은 비공산당원들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물론 11월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기로 만주성위차원에서 결정하기는 하였지만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기로 하였다고 하여 유격대창건에 참여할 성원들에 대한 조직사업이 되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북측 자료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중공당 만주서위차원에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동장영이 회의를 위해 안도로 파견되어왔다는 사실에 대해 기록을 하였다하지만 동장영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만사정에 어두워서 회의장소를 오던 도중 밀정들의 밀고에 의해 경찰서에 잡혀서 감옥살이신세를 하였다이러한 동장영이 어떻게 겨울명월구회의를 주제할 수 있으며 또 동만과 북만 그리고 남만일대에 유격대를 창건할 수 있는 안()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다음 장에서 논하겠지만 여기서 당시 상황을 비교하기 위해 관련된 사실에 대해 북측자료를 인용하도록 한다.

❝ 특위서기로 임명된 동장영도 일본군대의 토벌에 죽을번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룡정시가지에 들어와있으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룡정시가지에 들어가는것은 위험한 일이였으므로 나는 그를 명월구로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만특위에서는 아직 간도실정에 어두운 동장영이 특위가 이동된것도 모르고 그 행방을 수소문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밀정들에게 걸려들어 감방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그 뜻밖의 소식은 나를 실망케 하였다만주성당 서기 라등현과 성당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은 9.18사변후 심양을 떠나 행처를 감추고있었고 양정우는 아직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여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관련사실에 대한 인용된 북측 자료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동만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동장영 뿐 아니라 대다수 중국공산당 동만 소속의 지도자들은 1931년 12월 중순에 개최된 겨울명월구회의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중국공산당의 기록이나 회의개최를 위한 지시문만을 근거로 해서 당시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소속의 동만특위에서 주최하고 전적으로 전담을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이는 1932년 초부터 동만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창건되기 시작한 유격대조직에 대한 역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지역사정 특히 인민들의 사정은 물론이고 지리사정에 대한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유격대창건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겨울명월구회의를 대할 때에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 자료를 좀 더 분석해보기로 한다남측자료는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연길현·화령현·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여 10일간이나 계속된 이 회의는 중공당 중앙위와 만주성위에서 제출한 유격대 창건에 관한 지시를 토론한 뒤 동만에서도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전근거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열렸던 회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물론 남측자료에서도 “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라고 하면서 당 회의를 중국공산당이 소집하고 개최를 하였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또 인용문은 연길현·화령현(화룡현의 오타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였다.”고 하여 당시 드넓은 동만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성원들이 모두 참가하였음을 말 하고 있다연길 · 화룡 · 왕청 · 훈춘 · 안도는 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에서 돈화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다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따라서 위 북측 자료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동만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동장영이 겨울명월구회의》 소집하고 주최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예의 남측자료들의 북측 항일투쟁자료에 대한 불신을 인용문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명월구회의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전근거지 창설 방침을 밝히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이 이 회의의 소집 책임자를 동장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김일성의 당시 직위(안도현의 당 간부로 추정된다)로 보아 결코 그가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북한 문헌 중 명월구회의가 처음 등장하는 백봉의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1931년 11월 장군의 참가하에 명월구회의가 열렸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활동지역인 안도현의 당 간부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면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북측의 자료를 불신하고 있다하지만 위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소속 동만특위 서기로 파견되어온 동장영이 동만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회의를 소집하고 주최를 했겠는가물론 중국에서는 인용문에서처럼 기록할 수 있다어차피 아무리 우호친선을 강조한다고 해도 내 나라 우선주의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인용하고 있는 중국측 자료에는 구체성과 사실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근거가 대단히 미약하다다만 회의개최를 지시한 지시문과 이에 대한 중국측 자료만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하지만 북측의 자료에서는 회의 개최 전후로 한 모든 상황들이 대단히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회의를 준비해가는 과정회의도중 논의되었던 사항그리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 뿐 아니라 회의에 임하는 성원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해놓고 있다.

물론 다음 장에서 겨울명월구회의와 관련된 북측 자료를 상세하게 분석하겠지만 북측의 자료에는 회의전후로 조성된 동만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일제와 그 주구들의 동정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회의에 참석하는 성원들에 대해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또 회의 의제는 무엇을 위해 정해지는 것인가회의 진행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그리고 회의의제가 결정이 되고 나면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언급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에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북측자료를 분석하고 또 결론지을 때 또 다시 언급하겠지만 북측에서는 오늘 현 시점에까지도 겨울명월구회의를 카륜회의와 함께 북의 선군정치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회의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한 나라의 변할 수 없는 정치사상과 연관된 사안을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남의 것을 가져다가 과연 국가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더구나 온 누리 어느 민족이나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체와 자주를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북에서 남의 나라가 주최하고 진행한 회의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국가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나 남측자료에서 언급하고 있는 회의 주체에 대한 문제는 크게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다만 두 자료 모두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 즉 당 회의를 통해 조-중인민들의 반일 · 항일공동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나가는데 있어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방도가 논의되고 결의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이견이 없다이에 대해서는 북측 자료 역시 동일한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2015년 7월 4

이 용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