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6일 금요일

“대한민국 어디에도 미국사드 필요없다”

‘성주촛불’ 50일 앞두고 전국 57곳에 펼쳐진 사드반대 평화촛불
▲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제안으로 진행된 50지역 촛불문화제 왼쪽부터 서울, 성주, 제주.
“성주에서 시작된 촛불이 전국으로 번져 서울과 제주까지 닿았습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미국사드는 필요없다’는 성주의 외침이 별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이재동 성주촛불 진행자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성주에서 사드철회 촛불이 타오른 지 45일째, 전국으로 퍼진 촛불은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울산, 광주를 거쳐 제주의 밤하늘까지 밝혔다.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제안에 따라 26일 57개 지역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린 것. 특히 이날 성주촛불 상황이 곳곳마다 생중계돼 성주의 외침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 성주 촛불문화제 [사진출처 성주투쟁위]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성주포대가 최적지라던 정부가 ‘제3부지’를 내세운 것은 스스로 자기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낸 것”이라며 “오늘의 촛불은 한미 당국에 맞서 온몸을 던져 싸우고 있는 성주와 김천 주민들에게 힘을 주고, 사드 한국배치 반대행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는 다짐의 촛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서울을 비롯한 인천, 대전, 광주, 대전, 대구, 부산, 울산등 광역시에 촛불이 타올랐다.
제3지대로 거론된 김천에선 롯데골프장 아래 농소면사무소 앞에 500여명이 모였다. 대구와 영주, 안동, 포항, 구미, 고령 등 대구·경북의 8개 지역에서도 촛불이 타올랐다.
매주 촛불을 밝혀오던 부산과 울산은 이날도 촛불을 밝혔다. 창원을 비롯한 마산, 진해, 김해, 양산, 밀양, 진주, 남해, 통영, 사천, 거창, 거제까지 경남은 가장 많은 촛불이 빛났다.
광주를 정점으로 무안, 나주, 목포, 순천, 여수, 영암, 광양, 화순, 완도, 장흥, 보성까지 전남에 쏟아진 폭우도 사드반대의 촛불을 끄진 못했다.
미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으로 알려진 제주 강정마을에도 ‘사드 반대’의 봉화가 올랐다. 제주도에까지 사드반대 촛불문화제가 진행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성주군민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 강정마을이 있는 제주도에도 촛불이 밝혀졌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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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논란…‘박정희가 짱이다’ 결론 정하고 논리 만들어”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82]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
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지난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올해를 ‘광복 71주년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새누리당은 이에 더해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하면서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사실 건국절 논란이나 법 제정 발의는 처음이 아니다. 건국절 주장은 2006년부터 꾸준히 있었고 18대에서 법도 발의됐다. 그러나 번번이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더구나 20대 국회는 여소야대다. 야당의 찬성이 없으면 법 통과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건국절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역사전쟁> 저자인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을 지난 22일 분당선 한티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났다.
심 소장은 건국절을 꺼낸 이유를 “4.13총선 이후에 정부의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남은 동안 자신들의 이슈를 달성해야 하는데 하나하나가 걸리는 상황이다. 때문에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 논쟁거리로 이슈를 옮겨 붙게 하려고 건국절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인데 1948년에야 다 갖춰졌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때도 이때다”라는 보수층의 주장에 심 소장은 “이들은 ‘박정희가 짱이다’는 결론을 정하고 결론을 지키기 위해 논리를 만드는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진을 빼기 위해 그때그때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독립운동을 한 것과 나라를 세운 건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 심 소장은 카이로 회담 전에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과 외무상이었던 김구와 조소앙이 장제스를 만나 조선의 즉각 독립을 요청한 예를 들어 “구분이 안 된다. 충칭 임시정부가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의 의결 사항이 나올 수 없고 그러면 포츠담이나 모스크바 의결 사항은 없는 건데 왜 독립운동사와 우리나라 정부수립의 연관성이 없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으로 말해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에 심 소장은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자리라면 그 발언에 대해 문장을 검토하는 팀들이 있을 텐데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하고 역사의식이 없으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냐는 거다”라고 한탄했다.
  
▲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 ⓒ 이영광 기자
다음은 심용환 역사&교육연구소 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박정희’ 결론 두고 거꾸로 이야기 만드니 ‘건국절’ 무리한 오류 등장”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서 건국절을 언급해서 다시 논란인데 어떻게 보고 계세요?
“저는 건국절 논란이 커지게 된 게 안 커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면 이게 작년 국정교과서 때처럼 이 이슈가 전면에 다뤄지는 상황이면 좋겠는데 그것이라기보다는 사드 등 4.13총선 이후에 정부의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남은 기간 자신들의 이슈를 달성해야 하는데 하나하나가 걸리는 상황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한 사회적 논쟁거리로 이슈를 옮겨 붙게 하는 거죠. 그래서 건국절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든 이슈에 대해 건별로 대응하며 자칫 사드 문제라든지 박근혜 정부가 하려는 일을 저지해야 하는 데 노선이 흐트러뜨리는 것 같아 조금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조만간 국정교과서가 나올 거고 건국절을 얘기하냐 아니냐의 말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문제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어요.
의도예요. 너무 집요해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얘기를 해 나아가고 관철시키고 싶은 거죠. 최소한 교과서를 못 뜯어고치더라도 자기 지지층만큼은 이렇게 사고하도록 하고 싶어 하는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어요. 보통 건국절 얘기라면 이들이 친일파기 때문에 한다거나 독재를 했기 때문이라는 게 틀린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이 사람들 사고는 거꾸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들은 ‘박정희가 짱이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박정희 유산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려면 그전에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 기초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승만이 등장하는 거죠.
사실 이 사람들은 박정희라는 그들이 정해놓은 결론을 두고 거꾸로 이야기를 만드니 무리한 논리적 오류로서 건국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시점에 건국절이 나온 건 정치적이죠. 이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집요하게 관철 시키려고 하는 사람이죠. 오직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얘기하기 위해서 거꾸로 가는 걸 이해해야죠.”
  
▲ 1975년 9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서 모국을 방문한 브라질 동포 67명과 청와대에서 만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선물받은 브라질산 火石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 우병우 민정수석 사건도 포함된다고 보시는 거네요.
“네. 맞아요. 우 수석 외에도 논쟁점을 비틀기 위해 하는 거죠. 국정교과서는 만들어질 거고 그럼 관철하면 돼요. 근데 이 난국을 돌파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는 뭐가 있냐는 부분에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당 대표, 그리고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건국 68주년’이라고 했잖아요. 전 의심이 된다는 거죠. 연말에 해도 되는 걸 왜 이 시점에 했냐면 논란이 가열화가 될 것은 뻔한 거고 야권은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잖아요. 그래서 이슈를 덮기 좋다는 거죠.”
“국민‧주권‧영토 다 갖춰야 건국? 일제 조선총독부 다 있었는데?”
- 건국절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인데 1948년에야 다 갖춰졌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때도 이때다”라는 주장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이들은 결론을 정하고 결론을 지키기 위해 논리를 만드는 거예요. 이들은 애초 이렇게 주장한 적이 없어요. 첫째로 전제하고 싶은 건 건국절이라는 당위성을 밀어붙이기는 하는데 그때그때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것도 그럴싸하잖아요. 국민, 주권, 영토가 있는 게 국가라는 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 사람들이 건국절 이야기를 할 때 이런 주장을 한 게 아니에요, 그때마다 논란이 되면 그에 맞춰서 논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반대편의 진을 빼는 거죠. 왜냐면 이들은 자기들 논리를 주장하고 싶어서 하나 툭 던지지만, 여기에 맞서 싸우려면 몇 배의 논리로 공격해야 해요. 전형적인 지치게 하기 전략이죠.
일제시대를 예로 들어볼게요. 일제는 을사조약 전후에 한일 의정서나 정미 7조약 등 외견상으로 보면 적법한 절차를 통해 우리나라를 인수했어요. 그 이후 국민, 주권, 영토를 일본이 다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이 사람은 일제시대가 우리 역사의 정통적 시간이란 걸 보장해주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왜냐면 조선왕조와 고려왕조가 존재했듯이 일제시대때는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의 국민, 주권 영토를 정하고 있었잖아요. 그럼 이들의 입장에서는 일제시대가 하나의 정통적 시간이고 독립운동은 아니라는 얘기밖에 더 되나요? 그리고 미국이 독립 혁명을 다 하고 나서 건국했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의 건국 날짜부터 배우는 건 아니에요. 어떤 나라가 물리적으로 세워지기 전에 역사의 단계적 과정이 있죠, 이런 걸 보더라도 이게 다 있어야 건국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작위적인 주장이죠.”
  
▲ 17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간담회에서 이정현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심재철 의원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이날 “우리나라의 생일은 1948년 8월 15일”이라며 건국절 법제화를 주장했다. <사진제공=뉴시스>
- 해방 이후 건국 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이 존재했는데.
“건준은 있어요. 1944년 여운형이 만든 건국동맹을 확대한 단체죠. 이 단체가 조선 총독부와 협상을 해서 일본이 물러난 다음에 어떻게 우리나라를 운영할 것인지 합의를 봤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독립운동사를 보면 임시정부가 모든 역할을 다하지는 않았어요. 1919년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1920년대 초반까지는 독립운동사의 최고 기관 노릇을 했고 다시 1940년대에 최고 기관 노릇을 했죠. 하지만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었고 전체 독립운동을 총괄하지 않았고 지역마다 독립운동의 자율성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해방이 되었을 때 김구 선생 등은 당연히 임시정부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의 귀환을 강조하지만, 임시정부에 속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 혹은 좌파나 중도파들은 또 다른 형태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건준이 존재한 것 자체가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독립운동사가 넓고 컸다는 거예요. 보수층에서 말하는 건국과 관계없어요.
다만, 우리가 보통 임시정부를 얘기하는 이유는 3.1운동의 결과로 우린 대한민국을 세웠는데 ‘민’은 국민주권이잖아요. 그래서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갖는 거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설명해야 되잖아요. 정통성이 두 가지인데 헌법 전문을 보면 ‘유구한 역사’라는 말이 나와요. 이건 1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바뀐 거예요. 그게 뭐냐면 고조선 이래 우리 역사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에요. 그리고 기미 3.1운동을 계승하고 그 결과로 가장 확실히 표현되는 임시정부가 적합하니 헌법에서 임시정부를 쓰는 거죠.”
“임정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 의결 못나와…독립운동사‧정부수립 직접적 연관성”
-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했을 때 문제가 되는 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이잖아요. 하지만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은 “독립운동을 한 것과 나라를 세운 건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간단히 말할게요. 먼저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있어요. 그때 최초로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나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장제스에게 당시 주석과 외무상인 김구와 조소앙이 면담을 신청해서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끌어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해요. 아마 장제스 개인적 입장에서는 소위 말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계산했을 거예요. 장제스가 루스벨트, 처칠과 회담을 하죠.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처칠은 부정적이었어요. 그러나 설득해서 장제스의 원래 주장은 임시정부 주장처럼 즉각적 독립이었는데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키겠다고 타협을 본 거예요.
그럼 이 배경에 카이로 회담을 했기 때문에 1945년 포츠담회담 의결 사항을 확인해주고 해방 이후 12월에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를 통해서 정부수립을 구체화 시켜준 거예요. 충칭 임시정부가 없었으면 카이로 회담의 의결 사항이 나올 수 없고 그러면 포츠담이나 모스크바 의결 사항은 없는 거예요. 독립운동사와 우리나라 정부수립이 왜 연관성이 없어요?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 거죠.
두 번째 우리나라 제헌 헌법 이후 내려오는 헌법이 있죠. 보통 사람들은 1948년 제헌 헌법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유진오 박사의 제헌헌법은 1919년 임시헌법, 1940년 충칭 임시정부가 얘기한 삼균주의 같은 것의 내용을 계승한 게 오늘날까지 쭉 온 거예요.”
  
▲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 <사진제공=뉴시스>
- 1919년을 건국으로 하면 5000년 역사가 유지되지만 1948년을 건국절로 할 경우 5천년 역사가 사라지고 신생국가가 된다던데.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할 때 아프리카 빈 땅 가서 깃발 꽂는 것처럼 한 게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아편전쟁에 의한 난징조약이라든지 일본 가서 빼리 제독이 총 쏜 다음에도 미·일 화친 조약과 미·일 통상조약을 맺어요. 이게 국제법적 전통이거든요. 왜냐면 전 세계열강이 경쟁을 하니 제국주의라도 절차와 형식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를 일본이 식민지할 때 어떻게 했냐면 잘 알다시피 을사조약과 한일병합 조약이 유명한데 그전에도 많은 조약을 맺잖아요. 일본이 합법적으로 조선왕조를 먹었다는 걸 입증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3.1운동 전 1915년에 대동단결선언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베이징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서 주장한 게 1910년 우리나라가 말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 넘어간 건 민권의 시작이라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우리나라가 군주정이잖아요. 그러나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어요. 그러면서 조선이 일본의 나라가 된 게 아니라 군 주권이 망하면서 이제 민권의 시대가 열렸다는 거예요. 독립운동가들이 아주 창의적인 생각을 한 거예요. 3.1운동 때 ‘대한제국 만세’나 ‘고종황제 만세’ 안 하잖아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건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져서 이어지는 거죠.
중요한 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우리나라가 먼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 일본을 미국이 국제사회에 데뷔시킬 때라는지. 그때 우리는 피해 받은 게 있으니 미국에 요구를 해서 받아낸다든지 혹은 우리가 일본과 국교 수립할 때에도 우리는 피해보상을 받아 내야잖아요. 그때 우리는 법률적 근거를 제시해야죠. 그때 제시했던 것이 ‘우리는 조선왕조가 망한 후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거예요. 때문에 임시정부의 법적 근거를 인정하라는 근거 속에서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기 때문에 우리가 정통 정부로서 일본에게 배상을 받으려고 한다는 협상을 이승만 정부가 계속했어요.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과 협상할 때 신생국가가 아니라는 걸 증명 해야지 식민지 때나 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잖아요, 최소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법적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거냐는 거죠. 임시정부부터 이어진다는 법적 정통성을 이야기해야 이어지는 거고 그렇게 했거든요. 그걸 미국과 일본이 안 받아 주긴 했지만요.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배상이라든지 미국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적 근거성에 의존해서 설명했어요. 왜냐면 우리가 국제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게 임시정부밖에 없어요.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가 공인을 해줬고 공인은 안 했지만 영국이나 미국이 조사하거든요. 그걸 토대로 이승만 정부가 밀어붙인 거죠.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김구 주석 때는 임시정부 특사였단 말이에요. 건국의 아버지께서 임시정부 인사였다는 사실을 무시하니 앞뒤가 안 맞는 거죠.”

“대통령 ‘하얼빈’ 발언…보좌진들 얼마나 역사 무지하면..”
- 헌법에 보면 우리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시죠. 그런데 1948년을 건국으로 하면 북한은 우리 영토가 아닌 게 되잖아요.
“맞아요. UN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해서 입국했지만, 북한은 못 가봐요. 남한만을 실사한 후 UN 소총을 열고 가능 지역에서 선거하는 걸로 해요. 가능 지역은 38선 이남 지역이죠. 지역에서 선거해서 정부가 수립됐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상태에서 UN이 합법적 정부로 인정을 해주잖아요. 그것만 강조하면 38선 이남만 우리 땅이죠. 그럼 통일신라만큼도 못해요. 통일신라는 대동강 이남이거든요.”
- 헌법을 부정하는 거죠.
“맞아요. 헌법 1~9차 개정의 특징이 뭐냐면 3.1 운동만 얘기하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이 꼭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내려온 나라라는 거예요. 영어 의미로 우리나라 건국절은 개천절이에요. 즉 우리는 단군부터 개국 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라는 건데 1948년을 건국으로 얘기하면 단군왕검을 무시하는 거죠. 고조선은 역사적으로 실존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지만 단군은 신화라고 쳐도 주몽이나 이성계 등을 무시하는 거죠.
제가 왜 계속 1차부터 9차까지를 강조하냐면 중간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고 전두환도 있었고 그 앞에 이승만 대통령도 있었잖아요, 소위 말하는 독재정권 시절에도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라든지 기미 3.1운동을 건든 적이 없어요. 다만 거기에 ‘~와 5.16’이나 ‘~와 5공’이란 식으로 붙이죠. 그들은 그들이 강조하고 싶은 이승만, 박정희의 뜻조차도 위배라는 거예요. 왜냐면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사람이고 박정희는 그들의 식인 5.16군사 혁명의 정당성을 3.1운동과 4.19에서 찾았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과 박정희하고도 상관없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 보수층이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지금은 그때를 살아본 사람이 없어요. 무슨 얘기냐면 그때를 경험한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이런 이야기 못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생존자들이 사라지고 기억에 의존하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이제는 기록과 기억이 중요하죠. 군대 가보면 매주 3시간씩 정신교육이라는 걸 시켜요. 한국전쟁 때 있었던 사건을 굉장히 극우적 입장으로 가르쳐요. 증언자들이 사라지는 시대에 기억을 조작해서 왜곡된 기억을 사실인 것처럼 만들려는 거죠.”
- 건국절 논란도 있지만, 박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닌 하얼빈으로 말해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요.
“좀 충격적이었어요. 하지만 헷갈릴 수 있어요. 근데 문제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자리라면 그 발언에 대해 문장을 검토하는 팀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이들이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하고 역사의식이 없으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냐는 거죠. 건국절도 마찬가지죠. 뭘 좀 알고 얘기하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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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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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5  22: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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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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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태백산(백두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8월 21일 백두산 북파로 올라 마주한 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망국과 맞물려 갓 출범한 대종교가 일제 무단통치의 등쌀에 베겨내지 못하고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옮겨간 곳은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이다.
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 단군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은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까지 순례하고 일찌감치 백두산 북록 청파호(청호촌)를 점찍어 두었다.
홍암 나철은 당시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이 산은 곧 우리 천조(天祖)산이시며 천산이시며 상산(上山)이시며 제석산이시며 삼신산이시오 이 산신령은 곧 한울을 열으신 큰 신령 임검이시라”라고 백두산을 예찬했다.
“화장해서 고래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 청호촌에서 3종사 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 인근에 대종교가 설립한 청일학교와 총본사 고경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최삼룡 문학평론가(왼쪽)가 이경선 청호촌 서기(오른쪽) 등 청호촌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78) 선생과 오랫동안 중국에서 취재해온 조천현 티브이조선 대표와 함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을 찾은 6월 22일은 비가 내렸다. 연길시에서 택시로 100위안(한화 약 1만 6천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화룡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최삼룡 선생은 청호촌 이경선 서기(촌장)와도 금방 말문을 텄다. 최 선생의 아들과 이 서기의 사위가 연변대 박사과정을 함께한 막역지우였던 것.
이경선 서기는 “역사연구소 강룡원 선생이 사망됐는데, 서일이라는 분을 찾아서 여기를 많이 다녔다”며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대종교 3종사인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의 묘가 청호촌에서 바라보이는 청호종산에 모셔져 있다.
이경선 서기와 마을 주민들은 대종교 3종사 묘비가 새롭게 발견된 일, 단군 초상을 모신 집이 있었던 일 등을 회고했지만 정확한 연도와 구체적 사실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강룡원 선생과 한 직장에 근무하기도 했던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강룡원 선생이 초기에 고생 많았다. 반성문 숱하게 썼다”며 “문화대혁명 전에는 ‘종교’ 한 마디면 무조건 반동이다. 항일이고 뭐고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경선 서기도 “화룡 공안들이 여기 와서는 누구 왔나 암암리에 조사하고, 누구를 데려왔다면 그 사람 조사하고”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따라서 3종사묘역은 한동안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고, 지금은 비석과 묘비가 재단장됐지만 역시 구체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마을 주민은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3종사묘역에 묻힌 유골함(고래함)을 민가에서 보관하다 이장했다는 증언은 주목된다.
“화장해서 고래(유골)를 가져다가 여기다 모셨다.”
“밀산도 가보니까 없지. (백포 서일의) 고래라도 찾겠다고 다녔는데 못 찾았다.”
“석문철이라고, 고래함이야 그 집에서 허근천이라고 이분이 여기에 있으면서 단군상을 모셨다. 초상화. 고래는 그런데 통해서 거기다 보관했다가. 딴 데다 어디 보관할 데 없으니 여기와 보관했다가 묻고...어디서 사망됐는지 그 고래를 여기 갖다고 보관했다가 저기다(3종사묘역에) 묻어.”
“나도 모르는데 우리 형님이 이런 걸 잘 아시는데,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 모실 때 한국 아들(사람들) 마차에다 하룻밤 싣고 와서 거기다 모셨다는 거다. 올림픽 횃불 들듯 인계해서 모셨다고 하더라.”
“청명날에 우리 갔다. 강룡권 선생이 편지 써서. 비석은 없고, 어간에 금이 갔더구만. 노인들 데리고 갔는데 그걸 두드려보니까 고래가 있다. 개인들이 비석 뽑아 집돌로 썼다. 맞추니 맞지. 와서 물로 씻고 먹으로 쓰고 하니까.”
“청파호라는 그런 게 적힌 게 있었다. 시 통전부에서 가져가 보라고 해서 찾은 거다. 그 거이 와서 서일의 묘지를 찾았다.”
“처음에는 비석문에다가 다 썼는디, 이전 사람들이 이런 걸 모르니까 비석인 줄 모르고 더러는 없어졌다.”
대략 종합해보면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단군 천진(초상화)를 모신 가정이 있었고, 흩어진 비석들을 발견해 삼종사묘역을 재정비했지만 무원 김교헌 묘비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분명치 않지만 백포 서일로 추정되는 유골함(고래함)을 작고한 석문철 씨 집에 모셨다가 안장한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 성화 봉송’ 방불케 한 홍암 장례식
  
▲ 홍암 나철 대종사 묘. 묘비에는 한자로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적혀있다. 한국 선양회가 사진과 안내문 등을 부착해뒀지만 최근 중국 당국에서 모두 철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의 경우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뒤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공개리에 안장했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이하 음력 기준) 순교한 홍암 유해는 24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해 25일 남도본사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9월 17일 남대문역에서 백두산으로 향했다. 22일 청진에 도착했고, 25일 용정촌에서 추모예식을 거행했다. 10월 6일 청호에 도착, 총본사 수도실에 모셔졌으며, 11월 19일 총본사 추모예식을 치른 뒤 11월 20일 봉장식(奉藏式)을 거행했다.
2대 도사교(교주)인 무원 김교헌은 1923년 11월 18일 영안 총본사 수도실에서 56세를 일기로 서거했고 “종사의 장례는 유촉(遺囑)에 의하여 영안현 황기둔에서 화장식을 거행한 후 홍암신형의 유해 봉장지인 화룡현 청파호에 유해를 봉장하고”라는 기록에서 보듯 역시 곧바로 안장된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인 백포 서일 종사는 1921년 9월 8일 밀산에서 서거해 그곳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묻혔다가 1927년 4월 3일 청파호에 이장, 안장됐다. “개천 4380년(1923년) 계해 정월 15일에...밀산현 대흥동에 있는 백포종사 묘소에 원, 방, 각의 목책을 건립하고 또한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 에 충당케 하다”(대종교중광60년사)라는 기록도 있다.
  
▲ 원분옥 할머니가 유골함을 집에 모셨던 일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원 할머니 아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스물 다섯살에 이 마을에 시집와서 살고 있다는 원분옥(85) 할머니는 “이 기(이 곳이) 석문철이 집”이라며 “저 우에 어드메에 모셨다가 또 떨겨 와서 여기를 가져다가 뒀다가 저기 갖다 모셨다”고 지금은 작고한 석문철 집에 유골함을 모셨다고 증언했다.
또한 “따로 따로 있는 것, 비석이 있더만. 비석이. 그래 그 비석이 번져져서 땅에 묻히고 어데 가고 그래 그 세 곳을 파서 한 군데다 모셨지”라며 “우리가 (산에)가서 열고 뼈를 봤지”라고 말했다. 아마도 비석을 발견해 묘역을 재정비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2011~2012년 사이 현지조사를 진행한 임찬경 당시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대종교 성지 청파호 연구」를 통해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누구도 대종교를 거론할 수 없는 등의 시대적 상황에 묻혀 삼종사묘역조차도 무성한 수풀에 덮이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구술에 의하면, 1989년 초 연변역사연구소(소장 강용권)에서 보낸 서신을 화룡현 통전부에서 받아 청호촌이 소속된 용성향으로 내려 보냈는데, 그 내용은 청호촌에 삼종사의 무덤이 있다는데 찾을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며 이를 계기로 3종사 비석과 묘비를 재확인했다고 적었다.
“삼종사 무덤 근처에서 1개 그리고 근처 개인들의 묘지에서 제단으로 사용하던 비석 1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비석의 문구를 확인하니, 하나는 홍암 나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포 서일의 것이었다고 한다... 비석 기단의 아래를 들추니 그 밑에 화장하여 넣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교헌의 비석은...끝내 찾지 못하여, 연변주정부에서 새로 제작하여 보내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대종교
  
▲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이른바 '대종교 3종사'의 묘역.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로 공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에서 바라본 대종교 총본사터. 나무에 가려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방향으로 백두산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은 1914년 왜 만주 화룡 청파호(청호촌)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기고 자신의 묘를 이곳에 쓰도록 했을까?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대종교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긴 이유에 대해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항일운동의 거점을 구축하며, △포교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다.
임찬경 인하대 교수는 “백두산과 불과 100㎞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지역이고, 동포들이 많은 연길, 용정과 가까우면서도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역”이라며 “용정에 일제의 간도총영사관이 있었고 두도구(頭道溝)에 분소가 있는데, 화룡지역까지는 (일제가) 안 들어갔다”고 지리적 이점을 설명했다.
홍암과 대종교 교우들의 백두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고, 홍암에게 도를 전수해준 백봉신사 집단의 본거지가 백두산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만한 사안이다.
「삼일신고」와 「대종교포명서」 등을 전해준 백봉신사 집단은 백두산에서 우리 전통 천신교를 단군교로 중광했음을 발포했고, 포명서에서 “우형(愚兄) 등 13인이 태백산(지금 백두산) 대숭전에서 본교 대종사 백봉신형을 배알하고”라고 밝혀 백두산에 대숭전이 있었고, “태백산 대숭전 동무 고경각에서 13인이 같이 서명함”이라고 명시해 고경각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고경각은 대종교 도사교(교주)가 집무하는 곳이다.
  
▲ 백두산 소천지(은환호).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종교시설들이 철거됐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모든 종교시설이 철거된 가운데 백두산 소천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약왕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 전통수련 관계자는 백봉신사 집단이 백두산 소천지 일대를 근거지로 했을 것이란 추정을 전해줬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백두산 너머 첫 마을인 내도산에 자리잡은 ‘천불교’가 대종교라는 일부 전문가의 해석도 있다. ‘왜놈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 신도들은 소천지에 ‘덩덕궁’이라는 99칸 절간을 지어놓고 1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드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랫동안 이 지역을 취재해온 조천현 대표는 “문화대혁명 시기 소천지 일대에 세워진 많은 종교시설들이 헐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확인했다. 소천지에는 많은 종교시설이 헐렸지만 지금도 도교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종교가 처음으로 화룡 일대로 진출한 1910년 11월 무렵, 총본사에서 파견한 박창익(난파 박찬익의 이명) 시교사가 안중근 의사의 큰아버지인 안태진이 기부한 청호마을 가옥에 시교당을 마련해 포교에 나서고 있었던 상황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홍암 나철은 1911년 “7월 21일 고적 및 영적 답사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평양을 거쳐 천산 북록 청파호에 이르”(대종교중광60년사)렀고, 1912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에는 청파호 시교당에 천여 명이 모여 개천대경절일을 지낼 정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창용은 『백농실기』에서 “(10월) 3일 바람 불고 춥다. 이 날은 개천대경절일이다. 일직부터 시교당 안에 머물렀다. 천궁은 건축되고 수리되어 그 모습이 새로워졌다. 여러 곳의 교우 형재자매를 합하여 7백여 명이 모였다. 먼 곳으로부터 3백여 명이 와 있다....첫째 천진전, 둘째, 천궁, 셋째 수도실, 넷째 경배실, 다섯째 자매경배실, 여섯째 학도창가실, 일곱째 전강실, 여덟째 전무사무실, 아홉째 외교교접실 등이다. 교궁이 아주 넓고 확 트였다...그 날의 광경 중 기뻐하며 박수친 것을 헤아릴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즉시 봉교한 사람이 백여 명이다. 밤에는 화등 천여 개를 높이 걸고 학생들의 노래 부름과 예원들 서로의 놀이와 오락에 밤을 새우다“라고 일기 형식으로 적었다.
실제로 1909년 음력 1월 15일 단군교가 중광한 뒤 총본사가 서울 북부 재동에서 원동, 중니동, 자문동, 상마동으로 한 해에만 네 차례나 옮겨다닐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지만 이듬해인 1910년 6월 29일 교우실태 조사 결과 서울 2,748명, 지방 18,791명, 계 21,539명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일제는 탄압의 방법으로 박멸을 기도하여 소위 사내총독 암살의혹을 일으켜 수백명의 중진급 교도들을 불법 체포하여 악랄하게 고문, 악형을 가하고 심지어 사형 또 불구 폐인까지 만드는” 정도였고, “‘종교인은 자유가 없다’하고 교주이하 중요간부의 사생활과 출입 거조(擧措)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또 헌병․경찰을 미행시켜 자유를 속박하는가 하면 교우들의 가두검색이 혹심하고 특히 쟁송이 있을 시는 종교인은 불문곡직하고 패소처분하는 학대를 자행”했다.
따라서 1914년 5월 13일 마침내 총본사를 화룡 청호촌으로 옮기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4도교구를 설치했다. “대종사께서 교의 본거를 백두산록으로 옮겨 포교운동이 자못 활발하여서 지금까지 동북만주 일에 흩어져 있던 독립전선이 흡연히 이리로 귀일되어 종교는 그 정신적 지주와 구심점이”됐다는 것이다.(대종교중광60년사)
<1914년 설치한 대종교 교구>

교구
소재지
책임자
관할지역
총본사
화룡
홍암 나철
총괄
동도교구
왕청
백포 서일
동만 일대와 노령.연해주
서도교구
상해
신규식 이동영
남만부터 산해관까지
북도교구
소학령
이상설
북만주 일대
남도교구
경성
강우(호석)
한반도 전역
외도교구


중국 일본 구미
* 자료 - 『대종교중광60년사』를 근거로 재작성.
백두산과 발해 수도, 그리고 부여주족론
  
▲ 청호촌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가 옮겨간 발해의 수도였던 영안시 소재 '상경 용천부'(동경성).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만주에서 급격히 교세를 불려가는 대종교를 일제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고 그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253호」를 발포해 대종교를 불법종교로 규정했다.
이에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대보름 많은 유서를 남긴 채 30만 교도들에게 호소하며 스스로 숨을 멈췄다. 홍암은 유언장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를 통해서도 “반도의 땅에 지금 이 몸을 묻을 곳이 없다”고 밝혔고, “타고 남은 유해를 거두어 싸서 반드시 조상(祖上)의 아래 즉 총본사 가까운 곳에 묻을 것”이라고 유언을 남겼다.
홍암을 비롯한 3종사 묘역은 서남쪽 아래 총본사터와 더 멀리는 백두산을 바라보도록 봉분의 방향이 자리잡았다.
또한 화룡 청파호에 멀지 않은 곳에 고려성으로 불리웠던 곳은 발해의 ‘중경 현덕부’가 있었던 곳으로 나중에 일제의 발굴조사로 드러났고, 이후 대종교 총본사는 영안의 발해 ‘상경 용천부’(동경성)터로 옮겨간다. 대종교의 대륙사관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들이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통합을 논의한 회의는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로 명명됐고, 그 결과 신민부가 탄생했다.
임찬경 교수는 “당시 대종교 역사관에 의하면 우리 민족을 단군에서 부여로 계승되고 고구려, 발해, 여진으로 계승됐고, 이같은 역사체계가 대륙사관”이라며 단재 신채호가 1908년 「독사신론」에서 부여주족론(夫餘主族論)을 폈다고 강조했다. 배달겨레의 주류가 부여족이라는 인식이다.
청일학교, 독립군 사관 양성 기지
  
▲ 청호촌에 있는 500년 이상 됐다는 비슬나무. 최근년에 벼락을 맞았지만 살아남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2000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서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금도 조선족 가구만 거주하는 청호촌은 1937년 일제가 집단부락을 건설하면서 산재호(散在戶)들을 집단호로 이주시키고 바둑판 같은 정사각형 마을을 만들어 외부는 흙벽과 해자로 철저히 차단하고 네 방면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흙벽이 사라졌고, 해자 바깥 쪽으로도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주민들이 500년 이상된 것으로 알고 있는 ‘비슬나무’는 최근년에 벼락을 맞기도 했지만 여전히 든든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 표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러나 이곳 역시 기독교의 바람은 피할 수 없는 듯 2000년에 ‘화룡시 용성진 청호기독교활동점’이 들어었고 여전도사는 마을 할머니들을 이곳에 불러모아 함께 점심을 나누고 있었다.
이경선 청호촌 서기는 청호촌의 역사를 정리한 31쪽 분량의 「청호촌 촌사」(이경식, 1999)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보여줬다.
이 자료에는 함북 길주에서 현주일 일가가 1895년 처음으로 청파호에 이주 정착했고 “1910년에는 현대 교육 체계를 갖춘 청일학교(淸一學校)가 건립 되었다. 이 학교는 형식상에서 단군교를 교수하는 학교인 것 같았으나 실질은 종교를 방패로 내세우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는 기지였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한 “이 학교 건립에 라철(羅喆) 선생의 역할이 컸었다고 한다...청일 학교 교장에는 라중식(羅仲植)(1910-1912), 교무에는 라철(羅喆), 서일(徐一 ), 계화(桂和), 박찬익(朴贊翊), 백순(白純), 박상환(朴尙煥), 김원시(金元時), 남세구(南世柩), 현천묵(玄天黙) 씨 였다(이 자료는 광산 김씨 김성수씨가 제공 하였음)”는 기록도 보인다. (朴尙煥은 朴祥煥의 오기-필자 주)
사드 여파로 한국 선양회가 세운 안내판 철거돼
  
▲ 3종사 묘역 입구.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종사 묘역 입구에 한국 선양회에서 세운 안내판들. 사드 여파로 중국 당국에 의해 모두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청일학교 자리는 청호촌에서 큰 도로 건너편 삼종사묘역 방향으로 바라볼 때 공장 굴뚝이 보이는 곳으로, 대종교 총본사 고경각도 바로 이곳에 함께 자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3종사묘역으로 가는 길은 질척거렸지만 입구에서 ‘대한민국 (사)나철선생(항일지사) 선양사업회’가 세운 안내판이 반겨주었고, 오는 11월 2일 벌교 기념관에서 열릴 ‘홍암나철선생100주년기념관 준공식 및 개천대제 추모문화행사’ 안내판도 눈에 띄었다.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가 건립한 ‘반일지사무덤’ 표지석은 화룡시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공포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의 공적을 뒷면에 간략히 새겼다.
“반일지사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공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羅先生神骸之藏)이라 한자로 적힌 비석 앞에서 3종사에 재배를 올리고 공장 굴뚝 방향으로 옛 총본사터를 더듬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백두산 자락이 보일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흐린 안개만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8월 9일 3종사묘역을 다녀온 양현수 선양사업회 회장은 “지난 5월 25일 우리가 세운 안내판을 중국에서 싹 치워버렸고 영사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다고 ‘참배하지 말라’고 했다”며 “사드 문제가 한중관계의 큰 걸림돌이라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앞서, 보성군은 중국 화룡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사업비를 보내서 화룡시에서 3종사묘역으로 가는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까지 만들기로 협의됐지만 사드 문제로 보성군 부군수와 양현수 회장 등의 방중이 무산돼 7월 20일로 예정됐던 자매결연은 취소됐다.
만주의 겨울 돌위에서의 72일간 단식 기도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한 뒤 1914년 화룡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홍암 나철의 종교적 수행이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해서 1916년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을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수행을 통해서 생을 마감했다”며 “중광 이전의 관료주의 모습에서 중광 이후의 모습은 철저하게 수행주의의 모습”이라고 규정했다.
  
▲ 1916년 음력 8월 초 닷새, 경성역을 출발해 구월산 삼성산으로 향하던 홍암은 사리원역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손에 단주를 쥐고 있다. [사진출처 - 대종교]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 소장은 “유서 중에 중광가에 보면 여러 정황상 수련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며 “남은 사진 3장 모두 단주를 쥐고 있는 모습인데 삼일신고독법에 나오는 수련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짚었다.
「삼일신고」에 부기된 ‘삼일신고독법’에는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고, 삼백 예순 여섯 알의 박달나무 단주를 쥐고 한 마음으로 읽되, 원문 삼백 예순 여섯 자로 된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주에 맞춰 일관할지니라”라고 명기돼 ‘단주’가 중요한 수행도구임을 알 수 있다.
신철호 전 대종교 삼일원장은 홍암 나철이 무송(撫松)의 산에서 “만주의 그 추운 겨울 눈 내리는 아래 돌위에 앉으시어 72일 간을 단식 기도”했다는 백강(白崗) 조경한(趙擎韓)의 증언을 『한국중흥종교 교조론: 홍암 나철 대종사』에 기록했다.
홍암의 72일 단식 기도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40일 금식 기도에 비교하더라도 엄청난 고행이 아닐 수 없다. “도리어 홍암 선생은 불그레하신 얼굴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어서 마치 신령님이 눈 내리는 산에 내려와 앉아 계신 듯 하였다. 이 엄청난 광경이 소문으로 퍼지자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한국사람과 중국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앞에 죽 엎드려 백두산신령님이 내려오셨다고 절을 해대면서...”
또한 괴질로 죽어가는 단촌마을에서 ‘以身代命’ 네 글자를 집 문기둥마다 써붙여 하룻밤에 41명의 환자를 고친 이적(異蹟)은 홍암 자신이 중광가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물론, 대종교의 지감, 조식, 금촉 삼법수련과 홍암 나철의 수행, 이적 등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추가, 26일 09:00)

인구 증가만큼 생활여건도 최악으로 바뀌는 ‘제주’

‘땅값 상승률은 전국 최고, 그러나 도민 소득은 제자리’
임병도 | 2016-08-27 09:17:2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인구60만시대
▲제주도는 지난 2013년 인구 60만 명을 돌파했고, 제주도청 앞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제주도청 방송 캡처

지난 2013년 8월 13일 제주도청에는 ‘제주 인구 60만 시대 개막’ 기념행사가 개최됐습니다. 당시 우근민 도지사는 “전문가들이 2020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인구 60만 시대 개막이 7년 이상 앞당겨졌다”면서 “인구 60만 시대는 인구증가의 의미를 넘어 제주의 경제사회적 규모가 커지고 자립경제의 바탕이 확보되면서 앞으로 제주경제 성장에 필요한 밑거름이 마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2021년 제주인구 70만 시대도 앞당겨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근민 지사의 말처럼 제주 인구는 2021년이면 70만 명이 넘을 듯합니다. 이미 2016년에 65만 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 지사의 주장처럼 인구 증가가 경제 성장과 지역발전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고 있을까요?
인구가 늘어난 만큼 제주도민의 생활 여건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각종 통계로 살펴봤습니다.

‘인구가 증가했더니 쓰레기 발생량과 범죄율도 높아져’
제주인구증가에따른생활폐기물발생량및성폭력범죄발생건수
2005년 제주도 1일 생활폐기물 발생량은 643.6톤이었습니다. 2014년은 976.2톤으로 무려 51.7%가 증가했습니다. 전국 생활폐기물 발생증가율과 비교하면 제주도 증가율은 17배가 높습니다.
요새 제주도 마트에 가면 물건을 담아갈 수 있도록 비치된 빈 박스를 더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곳이 나옵니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2014년 전국의 쓰레기 매립률은 15.7%로 2005년과 비교해 12.5%P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고립된 섬인 제주는 오히려 매립률이 7.5%P 증가하면서 제주 전역이 쓰레기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범죄율도 높아졌습니다. 진선미 국회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인구 당 4대 강력범죄 발생건수’가 제일 높은 곳이 제주였습니다.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도 2011년 259건, 2012년 285건, 2013년 495건, 2014년 370건, 2015년 437건으로 최근 5년 사이 30% 넘게 증가했습니다.
‘만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범죄 발생 비율 1위’, ‘만 15세 이하 청소년 성범죄 발생 비율 1위’, ‘성범죄 재범률 전국 2위’ 제주의 모습을 보면 아이들과 여성이 안전하게 살기 좋은 땅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인구 증가와 함께 교통 문제도 심각해져’
제주인구증간에따른자동차등록대수와교통사고
제주의 자동차 등록대수를 보면 2005년 21만 대, 2010년 25만 대였습니다. 5년 동안 4만 대가 증가했던 자동차는 2015년 43만 대로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렌터카도 2010년 1만4천 대에서 2016년 2만9천 대로 늘어났습니다.
자동차 등록대수가 늘어나면서 교통사고도 증가했습니다. 2010년 3,617건이었던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2015년 4,645건이나 발생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부상자를 보면 2010년 982.6명에서 2014년 1,145.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제주공항이나 우도 등 관광객이 몰리는 곳은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으면서 이 지역 도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시내 곳곳에는 주차장이 부족해 불법주차가 기승을 부리며, 출퇴근 시간이 아닌 평일 낮에도 교통 혼잡과 정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희룡 도지사는 지난 7월 ‘△차량총량관리의 법제화 검토 △간선도로 일방통행제 검토 △대중교통 우선차로제 실시 △공영버스 공기업 전환 △도시형 신교통수단 도입 검토’ 등을 포함한 제주교통혁신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트램 도입은 2012년 우근민 도지사 시절 추진하다 포기했다는 점을 미루어 쉽게 도입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땅값 상승률은 전국 최고, 그러나 도민 소득은 제자리’
제주인구증가에따른표준공시지가변화
2015년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전국 표준지 공시지가를 보면 제주지역 땅값 상승률은 9.20%였고, 2016년은 서귀포시 19.63%, 제주시 19.15%로 전국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2010년 0.43%, 2011년 1.06%, 2012년 2.80%, 2013년 2.01%, 2014년 2.98%와 비교하면 10배 이상 급상승했습니다.
2016년 5월 제주지역 건축허가를 보면 1297동 50만7111㎡로 지난 해 같은 기간 975동 34만4649㎡ 대비 면적기준으로 47.1%가 증가했습니다. 지난 해에 대규모 아파트 분양이 완료됐지만,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상업용 건축물의 건축허가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 제주의 땅값은 계속 오를 전망입니다.
제주 땅값이 올라 부동산 가격은 상승했지만, 제주도민들의 소득은 많이 증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주도민의 1인당 개인 소득은 2005년 1,074만 원에서 2014년 1,567만 원으로 45% 증가했지만, 전국 증가율 47%보다 낮았습니다.
도민 소득의 증가율보다 제주 땅값이 높다는 말은 소득만으로는 집을 구입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제주 도내 청년들의 임금이 낮다는 점을 본다면 미래 세대의 주택 구입은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통계의 위험보다 더 무서운 장밋빛 계획들’
연도별제주의주요통계-min
2013년 제주는 “2021년 상주인구 70만 시대”를 준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발표했던 계획을 보면 이주민을 위한 지원 정책 등에 초점을 맞춰져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인구가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제주의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점을 사전에 예측하고 대비했어야 합니다.
원희룡 도정은 인구 100만 명을 기준으로 정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가 인구 65만 명에도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데, 과연 인구 100만 명 시대를 대비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단순히 통계나 숫자만으로 제주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통계가 말하고 있는 경고를 무시한다면 실제 체감하는 생활 여건은 더 나빠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제주도는 발전과 증가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쉼을 가져야 할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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