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의 맛있는 우리말 [55] 한자어와 자주성

우리말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순우리말은 고려시대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고 그 자리를 한자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온·즈믄·골 등의 단어는 백·천·만 등의 한자어에 밀려나고, 개중에 살아남은 것은 ‘온’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도 ‘온세상·온천지·온마을’ 등과 같이 접두사의 역할에 머물 뿐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라는 책에서 “고려의 문인들은 한자로 된 시와 문만을 업으로 삼았다(高麗文士皆詩騷爲業)”고 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부터 순우리말이 쇠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글자만 고집하지는 않았다. 우리글을 가능하면 음에 맞춰 표기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중국에서는 논과 밭을 구분하지 않고 전(田)이라 표기하는데, 우리나라는 밭을 전(田)이라 하고 논을 답(畓)이라고 구별하였다. 답(畓)이라는 글자는 중국에는 없다. 한자어를 써도 자주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돌석(申乭石)·임꺽정(林巪正)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자어 거(巨)에 ‘ㄱ’을 넣어 ‘걱’이라는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 참으로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민족이다.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