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박근혜가 망친 대통령제, 시민 100명이 뽑은 대안은?

17.12.02 20:19l최종 업데이트 17.12.02 20:19l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성북공론조사. 참가자들이 테이블에서 정치 구조 개편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성북공론조사. 참가자들이 테이블에서 정치 구조 개편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 신상호


"4년 중임제를 추천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좋아하는 분들 계실 텐데, 선거 이벤트 공약이었어요. 지금 정의당보다 훨씬 좋은 복지 공약이 많았는데, 5년 안에 다 하겠다고 국민을 현혹했어요. 촛불집회 때 영하 날씨에 나가서 집회하는 거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정경훈씨)
 

"권력구조의 장단점 있다 생각해요. 안보 의식이나 정치 풍토를 봐서 5년 임기제를 더 추천합니다. 다 좋은 점이 많지만, 안보나 이런 실정에 맞게 하는 것으로 추천합니다. 효율적 국정 운영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광자씨)

70여 명의 시민들이 2일 오후 2시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 대강당에 모여 권력구조 개편 개헌 법안 마련을 위한 성북 공론 조사를 진행했다. 이날 10개의 원탁 테이블에 6~7명씩 모여 앉은 시민들은 4시간에 걸쳐 '개헌'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들은 저마다 대통령 중임제, 의원내각제 등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시민들은 숙의민주주의와 분임형 권력 등 대학교 강의에나 나올 법한 단어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정치 체제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대통령제 개헌에 대한 시민 의견 수렴, '박근혜 같은 실패 어떻게 막을까?'

이날 개헌 공론 조사는 대통령제 개헌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을 들으려고 마련됐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가진 공통된 문제 의식은 '어떻게 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였다. 

지난달 25일 1차 모임에 이어 이날은 2차 모임이었다. 공론조사에는 총 100명의 시민이 선정됐다. 성북구가 자체적으로 선정한 시민참여단 50명과 지역정당 추천 50명으로 구성됐다. 이날 참여한 사람들은 총 70명, 정확히 70%의 높은 출석률을 보였다. 

공론조사는 우선 권력 구조에 대한 4가지 입장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과 질의 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전문가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권력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저마다 20분동안 판촉 활동하듯 시민을 설득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현행 5년 단임제 유지, 고원 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4년 중임제 대통령제, 강상호 국민대 겸임교수는 혼합이원집정부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의원내각제를 각각 주장했다. 첫 번째 순서를 맡은 박동천 교수가 의원내각제 장점을 설명하자, 시민 3명이 질문하려고 동시에 손을 들었다. 

질문자들은 국내외 역사를 거론하면서, 박 교수 주장에 반박했다. 고광식씨는 "의원내각제는 제2공화국에서 실패를 맛본 제도"라며 "과반을 몰아줘도 내부 갈등, 대통령과 총리 불화로 비극적 최후을 맞는다"라며 의원내각제에 회의적인 의견을 밝혔다. 

정치 전문가 4명, 시민들의 반박성 질문에 진땀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권력구조 개편 개헌방한 마련 성북 공론조사'에는 총 70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권력구조 개편 개헌방한 마련 성북 공론조사'에는 총 70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 신상호

반박성 질문을 받은 박 교수는 자신의 논리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박 교수는 "제2 공화국이 넘어진 것은 박정희 때문"이라며 "스페인이 최근 연립정부가 구성 안돼 선거를 3번 했는데, 혼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안정적인 정치 변화가 가능한 게 의원내각제"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를 비롯해 나머지 전문가 3명도 역사와 정치이론을 동원한 시민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뺐다. 전문가들 설명을 모두 들은 시민들은 잠깐의 휴식 후 테이블 토론을 이어갔다. 시민 1명당 1분 동안 자신이 지지하는 개헌 구조를 이야기하고 토론했다.

종합토론서 의원내각제 두고 논박 이어지면서 분위기 절정

토론 분위기는 종합 토론으로 접어들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정주원씨와, 이에 맞서 홍광희씨는 단상 앞에서 5분 넘도록 토론했다. 의원내각제가 안보에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홍씨의 지적에 전혀 상관 없다는 정씨의 반박이 쉴새 없이 오갔다. 

홍광희: "안보 위기가 쟁점입니다. 의원 내각제를 하면 의회를 열고, 과반이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안보 위기 상황에서) 과반이 과연 신속하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정주원: "의원내각제는 정책이나 방향을 의회가 다 결정하는 게 아니라 다수 정당이 내각을 꾸려서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태 자체로는 (대통령제와) 다를 게 없습니다."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의원내각제를 위해서는 더 많은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마무리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한 시민이 "국회의원 임기를 2년으로 줄여야 한다"라고 하자, 테이블에선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조사에 참여한 박준식(24)씨는 "정치 소식은 대부분 신문이나 에스앤에스(SNS)로 단편적, 일방적으로 접했는데, 지금처럼 쌍방향으로 토론하니 더 배울 점이 많았던 것 같다"면서 "토론하면서 직접민주주의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말했다.  

시민들, '4년 대통령 중임제' 가장 선호, 현행 유지도 29%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권력구조 개편 개헌방한 마련 성북 공론조사'에는 총 70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평생학습관에서 열린 '권력구조 개편 개헌방한 마련 성북 공론조사'에는 총 70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 신상호

토론이 끝난 뒤 참석자 설문 결과도 흥미로웠다. 공론조사 참여를 전후한 시민들 생각의 변화가 뚜렷하게 읽혔다. 일단 선거 제도 개편에 공감한 시민들의 비율은 조사 참여 전 45%에 불과했지만, 조사 참여 이후 64%로 크게 늘었다.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하락했다. 국회의원을 '매우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사전 조사에선 49%였지만, 조사 참여 이후 59%로 늘어났다. 

시민들은 4가지 권력구조 가운데 4년 대통령 중임제를 가장 선호했다. 전체 참가자의 51%가 4년 중임제를 선택했고, 현행 5년 대통령 단임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비율이 29%로 뒤를 이었다. 반면 의원내각제는 10%, 이원집정부제는 6%에 그쳤다. 

공론조사를 주관한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은 "개헌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국내 최초로 기초 지방자치단체인 성북구에서 개헌과 관련한 공론 조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며 "개헌 공론 조사의 역사적인 물꼬를 튼 것"이라고 자평했다. 

곽 이사장은 이어 "사실 참여 시민들에게 2만 원 수준의 교통비 정도만 지급했을 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걸 방증한다"면서 "공론 조사 결과를 국회 등에 전달해 개헌 논의 불씨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정교회가 스탈린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

[유라시아 견문] 모스크바 : 혁명의 고층(古層)
2017.12.03 01:39:07




1. 부활 

1991년 소련이 붕괴한다.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구세주가 오신 날, 무신론 국가가 사라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혁명가를 대신하여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구세주 탄생했으니 다 찬양하여라. 이 세상의 만물들아 다 화답하여라. 은혜와 진리 되신 주 다 주관하시니, 만국 백성 구주 앞에 다 경배하여라." 

일국 사회주의가 무너진 자리, 만국과 만인과 만물을 주관하는 주님이 재림하셨다. 백성들은 찬양하고 화답하고 경배하였다.

1991년 이전 1988년이 있었다. 988년으로부터 1000년이 되는 해였다. 988년은 러시아가 출발한 때이다. 러시아의 옛 이름, 루시가 세례를 받았다. 크림반도에서부터 기독교를 수용했다. 지중해 북쪽 슬라브세계가 정교문명에 입문한 것이다.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온축되었던 그리스고전과 성경이 키릴문자로 전수되어 러시아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그 천주년을 기념하야 종교 해금을 단행했다. 신앙의 자유, 포교의 자유를 공인한 것이다. 페르스트로이카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즉 페레스트로이카의 요결은 시장화나 자유화가 아니다. 서구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성의 독재에서 영성을 해방시킨 것이다. 근대의 독재에서 전통을 회복시킨 것이다. 타는 목마름, 탈세속화와 재영성화를 수긍한 것이다. 과학과 합리만으로 체제가 온전히 굴러가지 않음을 뼈아프게 후회한 것이다. 겸허하고 겸손한 인간을 재발견한 것이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인간보다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거룩한 용기를 승인한 것이다.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만 살피는 '교조적 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 진단을 비웃기라도하는 양 21세기 러시아는 나날이 정교국가, 정통국가, 전통국가로 복귀하고 있다.

1988년 이전 1982년이 있었다. 11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사망한다. 국영방송을 통하여 장례식이 소련 전역에 전파되었다. 놀라운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미망인이 남편을 보내며 십자가를 긋는 모습이었다. 신의 가호와 가피를 빌어준 것이다. 천국행을 소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흑해부터 극동까지, 북극부터 초원까지, 소비에트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데올로기의 왕국은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과연 1980년대 태어난 내 또래 이름들이 흥미롭다. 재차 기독교 전통에서 따온 이름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름만 살펴도 세대 차이, 역사의 귀환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공산당 고위 간부들조차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생애를 걸쳐 무신론을 설파했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장마저도 1994년 사망하자 정교의 예법을 따라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과학은 형이하(形而下)만 다룬다. 영물(靈物)로서 인간은 형이상(形而上)을 갈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아편' 이념만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는다. 신학 없는 과학 왕국은 백년도 못가 주저앉았다.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병한

그 성/속 대반전의 상징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이다. 크렘린의 서쪽에 자리한다. 1812년 나폴레옹에 맞선 조국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만들어졌다. 1931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기도할 시간에 노동을 하라고 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부가가치를 올리라 했다. 유물론을 신봉하고 물신을 섬기라고 했다. 그래야 과학적 인간, 합리적 인간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 있었다. 성당의 종과 탑을 녹여 총과 칼, 낫과 삽을 만들었다. 생산력을 더욱 중시한 것이다. 복리와 복지를 따질 뿐 복음은 팽개친 것이다. 성당을 허문 자리에는 50m 크기의 레닌 금동상과 소비에트궁전을 세울 계획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불행 중 다행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히틀러 덕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에 급급했다.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또한 복원된 것이다.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1994년부터 복구가 시작되었다. 2000년, 예수가 태어난 지 두 번째 천년에 맞추어 완성된다. 바로 그 밀레니엄에 집권한 이가 푸틴 대통령이다. 2009년, 새 구세주 성당에서 취임식을 올린 첫 총주교가 키릴이다. 현재 성/속 양면에서 러시아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이다. 

2017년 외부에서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조망한다. 21세기하고도 17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20세기 시각으로 러시아를 접근한다. 정작 러시아인들은 시쿤둥하다. 공산혁명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2018년을 훨씬 더 고대한다. 모스크바 (재)천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수도를 되돌렸다. 그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도 개최한다.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간주하는 러시아의 세계관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러시아의 중심이 옮아간 때가 16세기이다. 몽골세계제국의 영향이 지대했다. 몽골 치하에서 중국의 중심이 남방에서 북방, 오늘의 북경으로 이전된 것처럼, 러시아 또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정치의 중심지가 전이한 것이다. 몽골의 대칸이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으로 구축했던 물류망의 상당부분을 모스크바가 물려받았다. 언어에서부터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다. 길은 울리짜(у́лица)이요, 돈은 뎅기(де́ньги)이다. 전자는 국가를 의미하는 몽골어 '울루스'에서 왔고, 후자는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화폐와 도로, 러시아의 하부구조는 명백하게 몽골의 유산이다.  

몽골의 육체에 로마의 영혼을 얹은 곳이 모스크바이다. (동)로마의 카이사르와 몽골의 칸이 합류하여 모스크바의 차르가 등극한 것이다. 모스크바가 정교의 성지(聖地)로서 자부심을 더욱 고취하게 된 계기에는 비잔티움의 몰락도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대체된 것이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 이제 모스크바가 기독교문명을 수호해야 했다. 즉 모스크바는 정치적, 군사적 위상보다 종교적 권위가 훨씬 더 높다. 북방의 예루살렘을 자처한다. 명장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이반 대제>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반 대제가 모스크바 귀족들을 앞에 두고 두 개의 로마(로마와 콘스탄티노플)가 모두 몰락하고, '제3의 로마'가 섰음을 선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에이젠슈타인을 <전함 포템킨>의 감독만으로 기억하는 것 또한 편향이다. 

2017년 3월 16일, 성도 모스크바에서 또 한 번의 획기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정교회의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고의식파'의 모스크바 주교와 정식으로 회동한 것이다. 2020년에는 고의식파의 태두로 불리는 아바쿰 장사제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동상도 세우기로 했다. 외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고의식파를 낯설어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좌/우를 막론하고 고(古)가 부재함이 고질병이다. 허나 러시아 문명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면 충격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350년 만에 국가권력과 이단파 사이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러시아 정교회도 신교와 구교가 갈리어 오래 반목해왔다. 러시아의 프로테스탄트가 고의식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러시아판 종교개혁과 신/구 갈등이 20세기 러시아혁명과 소련 해체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그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부상하여 공식서사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혁명 전후사의 재인식, 러시아 혁명사를 다시 써야한다.  

▲ 부활절. ⓒ이병한
▲ 부활절. ⓒ이병한

2.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죄와 벌>이 있다. 출간된 해가 중요하다. 아무 때나 출판한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정교사상가였다. 1866년에 발표한다. 1666년으로부터 200년이 흐른 해였다. 1666년은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을 상징한다. 종교논쟁이 일어난 해이다. 당시 니콘 총주교는 '근대화'를 추진했다. (서)로마교황과 동방정교 사이 동/서 합작을 추구했다. 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하는 강성한 오스만제국에 공동 대처하여 이스탄불로 전락한 콘스탄티노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북방의 십자군', 성지 탈환을 위해 정교회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서로마적, 라틴적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가톨릭 세력이 우세한 우크라이나 서쪽까지 합병하는 정치적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제국화에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 동방정교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옹호하며 저항한 세력(프로테스탄트)이 바로 '고의식(古儀式)파'이다. 문자 그대로 옛 의례를 고수하는 세력이다. 선봉에 선 사람이 장사제 아바쿰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죄와 벌>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라스콜니코프'이다. 라스콜(раско́л)은 분열이라는 뜻이다. 고의식파에 대한 속칭, 멸칭이었다. 보수파라고도 불리지 않았다. 분열파로 치부되었다. 신의식파가 러시아제국의 주류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일등공신이 표토르 대제이다. 러시아의 제국화, 서구화, 근대화에 일로매진했다. 고의식파의 아성인 모스크바마저 버렸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성도(聖都)에서 제도(帝都)로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고의식파의 눈에는 불경한 짓이었다. 천박하고 위엄 없는 새파란 신도시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성토했다. 표토르 대제 또한 정교회의 적으로 간주했다. 동로마식 차르라는 명칭마저 서로마의 황제로 바꾸어버린 그를 '독사의 자식'으로 쏘아붙였다. 봉합되지 않는 갈등 끝에 표토르는 국가가 직접 종교를 관리키로 한다. 총주교직을 폐지하고 종무원을 설치하여 성당을 통제했다. 주목적은 고의식파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의식파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이요 모스크바마저 등지기로 한다. 볼가강을 지나고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일대까지 망명을 선택했다. 고독하고 고아하게 고립되어서 성스러운 러시아를 고수키로 한 것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제국 인구의 얼추 3할, 3500만이 고의식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알음알음 살금살금 러시아판 '태평천국운동'을 도모한 것이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호시탐탐했다.  

기회는 1905년에 열린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다. 제국이 흔들거렸다. 휘청거렸다. 그러자 대항국가, 대안국가가 자태를 드러내었다. 종무원 관할 밖에 있는 고의식파는 무교회 운동, 독자적인 민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일종의 '인민 교회'를 세운 것이다. 제국의 탄압 속에서 고난과 수난을 겪으며 단련이 되었다. 주류문화에 맞서는 저항문화, 하위문화도 형성했다. 엄격한 종파인 만큼 청교도처럼 근검절약과 근면성실과 성심성의를 덕목으로 쌓았다. 공권력 밖에서 자조하고 부조하며 경제기구, 협동기구, 금융기구도 만들어내었다. 독자적인 산업도 일구고 기업 활동도 전개한다. 고의식파 윤리를 갖춘 자본가들을 배출한 것이다. 국회에 맞서는 민회 또한 작동시켰다. 시민사회를 이룬 것이다. 두마의 마주 편에 섰던 그 민회의 이름이 바로 '소비에트'이다. 고의식파 신도들이 영성생활과 물질생활을 공동으로 영위했던 민간 조직이 소비에트의 기원이다. 즉 소비에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파리 꼬뮨을 복제한 것이 아니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사후 합리화였을 따름이다. 소비에트는 철두철미 러시아적 현상이었다. 제국 아래 복류하던 거대한 뿌리, 정교문명의 고층(古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래서 1917년 러시아제국이 붕괴하자 이듬해 곧바로 수도를 옮긴다. 제3의 로마, 북방의 예루살렘, 모스크바로 되돌아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되돌리기(re-volution), 회심(回心)의 회향(回向), 혁명(革命)이었다.  

▲ 성 바실리 성당. ⓒ이병한

3. 이바노보 소비에트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917년 러시아제국 인구 1억 가운데, 노동계급은 고작 200만 남짓이었다. 도무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될 수 없었다. 끼워 맞추기 억지논리를 구사하면 더덕더덕 잔말과 군말이 붙는다. 볼셰비키 또한 소수파였다. 불과 5000명에 그쳤다. 한 줌 모래였다. 그 중에서도 레닌은 극소수파, 티끌이었다. 멘셰비키는 제국의 서남부가 근거지였다. 유럽 지향적인 세력이었다. 볼셰비키는 동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포진했다. 볼가 강과 우랄 산맥 일대가 터전이었다. 고의식파가 오래 진을 치고 있던 장소이다. 700만 농민병들이 볼셰비키와 결합한다. 러시아판 의병들이었다. 결정적으로 고의식파도 합세한다. 무려 3000만이 넘었다. 토착파가 외래파에 승리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아니라 '러시아적' 혁명이었다. 그리하여 레닌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라고 외쳤던 것이다. 공산당으로! 가 아니었다. 고의식파의 민간 네트워크가 국가를 접수한 것이다. 1918년 '제3 로마' 모스크바 천도에 이어, 1919년에는 '제3 인터내셔널'이 출범한다. 선민사상이 전위사상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세계선교가 세계혁명으로 업데이트되었다. 1918년 테러 이후 레닌이 은거하며 지낸 별장 또한 고의식파 마을에 자리했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사체를 방부 처리키로 결정한 것 또한 마르크스주의와는 일말의 관련이 없었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과학적 공산주의자들은 줄곧 반대했다. 왜 혁명 지도자를 '정교의 성인'처럼 기념한단 말인가? 반박하고 반발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다. 레닌은 고의식파의 전통에 따라서 성인으로 추앙된 것이다. '빈자의 차르', '프롤레타리아트의 신'이 되었다. 레닌이 안치된 곳 근방에는 이반 대제 등의 유체들도 보존되어 있다. 모스크바 천도도, 소비에트연방 국명도, 레닌의 시신 처리도, 종교의 입김이 지대했던 것이다. 일종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방불했다고 하겠다. 

▲ 붉은 광장. ⓒ이병한
▲ 붉은 광장. ⓒ이병한

소련의 탄생 밑바닥에 종교가 자리함을 가장 날카롭게 간파한 이가 스탈린이다. 제국의 남부 조지아 출신이었다. 조지아 정교회, 신학생이었다. 종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도 알았다. 철저한 무신론자 트로츠키를 누르고 후계자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스탈린 별장에서의 최측근 모임에서는 종종 성가도 울려 퍼졌다. 소련을 구하는데도 종교를 이용한다. 1941년 독소전, 나치의 탱크가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까지 밀고 들어왔다.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우랄 산맥 동편, 시베리아와 몽골과 만주와 극동에서 총동원된 병사들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응당 고의식파 신도들이 다수였다. '제3의 로마'를 수호해야 한다는 성전(聖戰)을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1943년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와의 화해를 선언했던 것이다.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을 파괴한 것이 착오였음을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명명 또한 '대조국전쟁'이었다. 불과 20년에 불과한 신생국가 소련를 위해서 헌신했던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인이 아니라 정교도 신자로서, 러시아문명을 호위하기 위하여 분투한 것이다. 오늘날 정교회(의 보수파)가 유독 스탈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스탈린 사후, 우크라이나 군산복합체 출신의 후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성당은 재차 트랙터 보관소로 전락해버린다. 이성이 영성을, 이념이 종교를, 과학이 신학을, 속이 성을 압도했다.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이바노보가 있다. '어머니의 강' 볼가 유역에 자리한 지방도시이다. 한때는 '러시아의 맨체스터'라고 불렸던 신흥공업도시였다. 19세기 중반 방직산업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소비에트'가 가장 먼저 출연한 도시로 유명하다. 소비에트연방, 소련의 발원지이다. 과연 20세기 초 시민의 2/3가 고의식파였다. 러시아 상징주의의 카리스마적 존재, 시인 블로크가 혁명을 포착하여 써내려 간 시 <12>(1918)가 상징적이다. 12란 명백하게 예수의 열 두 제자를 의미한다. 혁명병사가 곧 예수의 사도였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들고 혁명에 나섰지, <공산당 선언>을 읽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은 것은 런던과 파리 등 서유럽의 대도시에 유학 갔던 극소수 엘리트뿐이었다. 혁명을 설파했던 <이스크라> 또한 고의식파 자본가가 자금을 댄 잡지였다. 그러고 보니 <이스크라>(и́скра)도 <프라우다>(пра́вда)도 종교적 메타포로 가득하다. '불꽃'과 '진리'이다. 진리의 불꽃을 전도하는 신심 깊은 열 두 제자의 후예들이 성상을 들고 구체제를 전복시킨 것이다. 세속화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 종교를 탈색시켜버린 기왕의 혁명사관이야말로 러시아 문명에 대한 커다란 무지에 기반한 교조적 해석이었던 셈이다. 

▲ 이바노보의 부활절.ⓒ이병한

2017년 이바노보를 둘러보면서 뜻밖의 사실도 접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사랑했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고향이 바로 이바노보였다. 비디오로 소장까지 했던 <희생>과 <노스텔지아>, <솔라리스> 하나 같이 원죄와 구원을 주제로 삼은 수작들이었다. 고의식파였음에 틀림이 없을 듯하다. 펜을 든 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메라를 멘 20세기 타르코프스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백년을 넘어 천년이 한 줄에 꿰어지는 듯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스크바로, 동로마에서 북로마로. 1500년 '다른 기독교'의 유산이 바로 이바노보에 착근되었던 것이다. 이반(Ива́н)은 요한(John)의 러시아어식 표기이다. 즉 이바노보는 '사도 요한의 도시'이다. 

▲ 모스크바 지하철 역. ⓒ이병한
▲종교화가 그려진 모스크바 지하철 역. ⓒ이병한

4. 승천 

본래 이름이 이바노보가 아니었다. 스탈린이 집권 초기 바꾸어버린 지명이다. 1932년 스탈린 체제에 저항하며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응당 성화를 들고 투쟁했다. 이바노보 이전에는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Ива́ново-Вознесе́нск)'였다. 요한의 '승천'(вознесе́ние)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하늘로 오르는 곳이었다. 요한마저 지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천상 대신 지상에 묶어둔 셈이다. 2032년 다시 '이바노보 보즈네센스코'로 복귀할지도 모르겠다. 정교문명 대국을 표방하는 푸틴-키릴 체제 아래서 능히 가능한 일이다. 2009년 키릴 총주교의 취임 연설이 흥미롭다. '탈-세속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본디 정치와 종교의 심포니, 성과 속의 교향(交響)을 추구했던 동로마제국의 원리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포스트-투르스(Post-Truth) 시대, 교조적 계몽주의 시대와의 작별과도 정합적이다. 

2014년 푸틴의 대통령 취임식도 인상적이다. 맨 앞줄에 총주교가 섰다. 사실상 2인자이다. 이미 준국교로서 위상을 누린다. 공교육에도 '정교문화의 기초'라는 과목이 도입되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비롯한 주요 대학에도 정교회 사원을 가지고 있다. 군대에도 종군성직자 제도가 마련되었다. 사령관을 보좌한다. 외교부와도 갈수록 밀접해지고 있다. 외교부 직속의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도 정교회 대외관계 지도자가 교육을 맡는다. 여론 또한 호의적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제도는 대통령, 더 정확히 말해 푸틴 대통령이다. 두 번째가 정교회이다. 키릴을 국가 지도자로 여긴다. 세 번째가 군대이다. 네 번째가 외교부이다. 정당과 언론과 은행과 노조는 최하위에 속한다. 적폐로 취급된다. 이미 정교국가의 틀에 상응하는 꼴을 상당 부분 갖춘 것이다. 고로 오늘날 러시아를 알고자 한다면 천 년 전 비잔티움에 비추어보는 편이 유익하다.  

▲ 러시아 외교부 청사.ⓒ이병한

21세기 정교국가의 수장 푸틴과 20세기 혁명국가의 지도자 레닌의 인연이 오묘하다. 레닌은 1918년부터 고의식파 마을에 은닉했다. 1922년 발작 이후로는 언어기능을 상실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말년의 레닌을 수발하며 보살펴 준 요리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푸틴이다. 러시아에 푸틴(Путин)이라는 성, 흔치 않다. 지금도 대략 3000여 명, 희귀성이다. 우랄 산자락에 위치한 집성촌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1770년 볼가 강을 따라 이주한 이들의 후손들이다. 그 푸틴이라는 요리사가 바로 현직 대통령의 할아버지다. 즉 레닌과 푸틴 또한 혈연과 종교로 연결된다. 레닌 묘를 철거하지 않고 보존해야 한다며 논란을 종식시킨 사람 역시 푸틴이었다. 자연스레 푸틴을 탐구해볼 차례가 되었다. 2000년 이래 17년째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2020년대에도 변함없이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 전반기를 상징하는 지도자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민주냐, 독재냐? 20세기형 적폐적 관점일랑 폐기처분한다. 그 모든 선입견을 청산하고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70억분의 1' 블라디미르 푸틴을 직시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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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동아시아 현대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논문보다는 잡문 쓰기를 좋아한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했던 박은식과 신채호를 역할 모델로 삼는다. 뉴미디어에 동방 고전을 얹어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인천 해상서 낚시배 전복, 22명 중 17명 구조...일부 사망, 실종자 수색 중

문재인 대통령 “마지막 한명까지 혼신의 노력 다하라”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7-12-03 10:46:28
수정 2017-12-03 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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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6시12분께 인천 옹진군 영흥도 영흥대교 인근 남방 해상에서 급유선과 충돌사고로 전복된 낚싯배를 해경 구조대가 인명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3일 오전 6시12분께 인천 옹진군 영흥도 영흥대교 인근 남방 해상에서 급유선과 충돌사고로 전복된 낚싯배를 해경 구조대가 인명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뉴시스

인천 옹진군 영흥도 앞바다 낚시배 침몰과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3일 “해경 현장 지휘관의 지휘하에 해경, 해군, 현장에 도착한 어선이 합심해 구조작전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께 청와대 위기관리 비서관으로부터 1차 보고를 받고 이같이 밝혔다고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전했다.
인천해경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12분께 인천 옹진군 영흥도 영흥대교 남방 약 2해리 해상에서 9.77톤급 낚시배가 급유선(336톤)과 충돌해 전복됐다. 사고 당시 배에는 선원 2명과 낚시객 20명 등 총 22명이 타고 있었다. 출동한 해경에 의해 22명 중 17명이 구조됐고, 이중 일부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해경 소속 선박 8척과 해군 선박 3척, 소방헬기 2대, 민간구조선 6척 등이 현장에서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이번 침몰 사고와 관련해 두 차례의 전화보고와 한 차례의 서면보고를 받고, 필요한 조치를 지시했다고 박수현 대변인이 전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9시25분께 위기관리센터를 찾아 해경·행정안전부·세종상황실 등을 화상으로 연결해 상세보고를 받고 “현장의 모든 전력은 해경 현장지휘관을 중심으로 실종 인원에 대한 구조 작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또 “현재 의식불명의 인원에 대해 적시에 필요한 모든 의료조치가 취해지길 당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장의 선박 및 헬기 등 많은 전력이 모여 있는데, 구조 간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신원이 파악된 희생자 가족들에게 빨리 연락을 취하고, 심리적 안정 지원과 기타 필요한 지원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 필요 시에는 관련 장관회의 개최를 행안부 장관이 판단해서 할 것도 주문했다.
이밖에도 문 대통령은 현장 구조 작전과 관련해 “국민들이 한치의 의구심이 들지 않도록 필요한 사항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론에 공개해 추측성 보도로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더해 "지금 현재 총력을 다하고 있는데 그래도 정부가 추가로 지원할 것이 있으면 현장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건의하라”고 김부겸 행안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어 “실종자 3명이 선상 내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해상표류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항공기·헬기 등을 총동원해 광역항공수색을 철저히 하라”고 박경민 해경청장에게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은 “안전조끼를 입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므로 아직까지 생존 가능성이 있으니 마지막 한명까지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달라”고 주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찾아 해경·행정안전부·세종상황실 등을 화상으로 연결해 상세보고를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찾아 해경·행정안전부·세종상황실 등을 화상으로 연결해 상세보고를 받고 있다.ⓒ청와대 제공

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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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죽음의 바닷길 따라 국민생선 명태가 온다

가난과 죽음의 바닷길 따라 국민생선 명태가 온다

등록 :2017-12-02 09:29수정 :2017-12-02 10:24

[토요판] 커버스토리 명태가 오는 길 
명태잡이 어선 사조 오룡501호 침몰 3주기
우리의 밥상을 차리는 ‘1천만원짜리 목숨들’

명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고기다. 수십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한국인의 쓰린 속을 달래고 밥상에 윤기를 더해왔다. 그 명태가 한국 바다에서 말라버렸다. 동해에서 자취(1981년 16만t→ 2007~2013년 1t 이하→ 2016년 6t)를 감춘 뒤에도 명태는 한국인들이 한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이다. 그 명태들이 거저 우리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한국인이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던 가난한 나라의 선원노동자들이 한국인이 타지 않는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 베링해로 간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송입-송출의 사슬에 묶여 그들의 삶과 노동은 깎이고 파인다. 2014년 12월1일 사조 오룡501호가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다 침몰했다. 사망·실종자 53명 중 42명이 외국인이었다. 침몰 뒤 3년이 꽉 찼다. 그사이 ‘갑’ 사조산업은 필리핀·인도네시아 유족들을 ‘을’로 삼아 ‘비밀해결합의서’를 체결했다. 6개월 뒤 사조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요구한 유족들의 소송은 각하되거나 기각됐다. 사조가 합의서에 넣은 ‘조항 하나’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의 ‘국민생선’ 명태는 그렇게 온다. ‘목숨값 1천만원짜리’ 이주 어선원들의 가난과 죽음의 바닷길을 따라 명태는 우리 밥상 위에 도착한다.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오룡501호 침몰사건 검찰 공소장, 사망자·실종자 가족의 손해배상 소장, 법원의 손배소 판결문, 사조-유족 ‘비밀해결합의서’, 전국원양산업노조-한국원양산업협회 ‘2014년 외국인 어선원 단체협약서’, 듀런·에포크 송출계약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무크타르 시체검안서, 공익법센터 어필과 국제이주기구의 ‘이주 어선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바다에 붙잡히다’), 조사팀의 생존자·사망자 가족 현지 인터뷰(2015년 11월~2016년 2월) 녹취록. 비밀해결합의서와 유족 현지 인터뷰는 처음 공개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출처 123rf.com
명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고기다. 수십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한국인의 쓰린 속을 달래고 밥상에 윤기를 더해왔다. 그 명태가 한국 바다에서 말라버렸다. 동해에서 자취(1981년 16만t→ 2007~2013년 1t 이하→ 2016년 6t)를 감춘 뒤에도 명태는 한국인들이 한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이다. 그 명태들이 거저 우리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한국인이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던 가난한 나라의 선원노동자들이 한국인이 타지 않는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 베링해로 간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송입-송출의 사슬에 묶여 그들의 삶과 노동은 깎이고 파인다. 2014년 12월1일 사조 오룡501호가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다 침몰했다. 사망·실종자 53명 중 42명이 외국인이었다. 침몰 뒤 3년이 꽉 찼다. 그사이 ‘갑’ 사조산업은 필리핀·인도네시아 유족들을 ‘을’로 삼아 ‘비밀해결합의서’를 체결했다. 6개월 뒤 사조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요구한 유족들의 소송은 각하되거나 기각됐다. 사조가 합의서에 넣은 ‘조항 하나’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의 ‘국민생선’ 명태는 그렇게 온다. ‘목숨값 1천만원짜리’ 이주 어선원들의 가난과 죽음의 바닷길을 따라 명태는 우리 밥상 위에 도착한다.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오룡501호 침몰사건 검찰 공소장, 사망자·실종자 가족의 손해배상 소장, 법원의 손배소 판결문, 사조-유족 ‘비밀해결합의서’, 전국원양산업노조-한국원양산업협회 ‘2014년 외국인 어선원 단체협약서’, 듀런·에포크 송출계약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무크타르 시체검안서, 공익법센터 어필과 국제이주기구의 ‘이주 어선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바다에 붙잡히다’), 조사팀의 생존자·사망자 가족 현지 인터뷰(2015년 11월~2016년 2월) 녹취록. 비밀해결합의서와 유족 현지 인터뷰는 처음 공개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출처 123rf.com
12월1일은 사조 오룡501호 침몰 3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오룡호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 명태를 잡는 어선이었습니다.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를 찾아 러시아 베링해로 나아갔던 그 배의 선원 60명 중 48명이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짊어지고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그들은 한국인이 가기 꺼려하는 원양의 바다에서 한국인들의 ‘국민 생선’을 잡다 사망했습니다. 오룡호 출항 전과 후, 침몰 전과 후, 그 돌이킬 수 없는 항로를 따라가며 죽어서도 서러운 그들의 머나먼 길을 밟았습니다
냉수성 어류(수온 2~10℃ 서식)인 명태는 바닷물보다 차가운 삶들을 헤엄쳐 온다.
분류. 동물계. 척삭동물문. 조기강. 대구목. 대구과. 산란기. 12월~4월. 이름. 북어, 동태, 춘태(봄에 잡은), 추태(가을에 잡은), 망태(그물로 잡은), 조태(주낙으로 잡은), 왜태(큰), 애기태(작은) 등 수십가지. 분포. 알래스카, 북태평양, 오호츠크해, 베링해, 그리고 동해.
동해로부터 명태도 가닿지 않는 직선거리 2800여㎞. 7107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 필리핀에서 에포크 엘메(2014년 당시 41살)는 가족 4명(아내·장모·두 아이)을 부양했다. 그 섬들 중 6번째로 큰 파나이섬 안티케에서 그의 노동은 바다에 뜬 조각배처럼 출렁였다. 그는 농장, 식품공장, 건설현장을 단기직으로 떠다니며 일주일에 2천페소(4만3천원)를 벌었다. 실업 상태일 때가 많았고, 돈이 떨어지면 빚을 졌다. 아내의 친정 오빠가 바다 멀리 나가 이국의 배를 타라고 권했다. 일자리는 없고 바다는 많은 나라를 떠나 형님도 더 크고 더 넓은 바다에서 일본 배를 탔다.
에포크의 마을로부터 섬과 섬을 건너야 닿는 민다나오섬 남동쪽 제너럴산토스(직선거리 590여㎞)에서 듀런 리처드(당시 38)도 출렁였다. 대학교를 1년 다니다 중퇴했고 바나나 농장과 통조림공장에서 띄엄띄엄 일했다. 혼자 수입으로 지켜야 할 아이만 넷이었고 다섯째가 아내 뱃속에 있었다. 아내의 사촌이 뱃일을 제안했다.
듀런의 집으로부터 직선거리 2230여㎞. 정확하게 몇 개의 섬(1만3천~2만여개)으로 이루어졌는지 측량할 수 없는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헤루 세티아완(당시 23)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선원이 됐다. 그의 고향 테갈(자바섬 항구마을)에선 성년에 이른 남자들 대부분이 배를 탔다. 대부분이 한국 배를 타는 선원이 됐다.
헤루의 항구로부터 자동차로 300여㎞를 달려야 닿는 자카르타 우타라에서 무크타르 모코돔핏(당시 35)은 10여년간 3차례 한국 배를 탔다. 자카르타로 돌아와 3개월가량 쉬며 그는 4번째 한국 배 승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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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태잡이 어선을 타다
2014년 국가별 명태 어획량. 러시아 151만8천t, 미국 142만7천t, 일본 19만6천t, 캐나다 8천t, 그리고 한국 2t. 명태가 그물을 가득 채우던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다. 1970·80년대에 7만t 수준(1981년 16만t으로 역대 최대)이던 명태 어획량이 1990년대 들어 6천t, 2000년대 100t, 2007년 이후 1t 이하로 급감(2016년 6t)했다. 노가리(명태 새끼) 남획 탓이 컸고 수온 상승 탓도 있었다. 한국 소비자들이 시장과 마트에서 구입하는 명태 중 현재 국내산은 없다. 그래서 러시아.
한국 어선들이 명태를 찾아 세계 최대 어장 러시아 베링해로 향했다. 그 배를 탈 선원들을 모집하는 구인행사가 2014년 6월께 필리핀 제너럴산토스의 한 스포츠 단지에서 열렸다. 사조에 자국 노동자를 공급하는 송출업체 팔콘이 주최했다. 듀런은 아내의 사촌동생과 행사장을 찾았다. 그에게 한국 어선원 취업을 제안한 아내 사촌은 정작 구직을 포기했다. 처음 3개월치 월급이 지급되지 않고 취업 넉달째 돼서야 한달치 첫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망설이는 듀런을 “‘미스터 김’이 설득”(아내)했다. 듀런은 7월2일 팔콘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가 탈 배는 사조 포세도니아(1016t·사조인터내셔널)였다.
동해서 사라진 국민생선 명태 찾아
러시아 베링해로 향하는 원양어선
한국인이 외면한 일 찾아서 떠나온
멀고 가난한 나라의 이주 어선원들
일부는 계약서 배와 다른 배 승선

2014년 7월 오룡호 타고 부산 출항
망망한 바다 위에 붙잡혀 감내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용의 복잡한 사슬
세 달치 월급 이탈보증금으로 보류
한국 선원 최저임금의 3분의 1 급여

뱃일은 4D로 불렸다. 3D(Dirty·Difficult·Dangerous)한데 멀기(Distant)까지 했다. 명태를 잡기 위해 바다 위의 4D를 감내하는 한국인은 드물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고 살아왔던 가난한 외국인들이 한국 배를 탔다.
한국 원양어선원이 되기 위해 듀런은 다단계로 꼬인 고용 절차를 거쳤다. 한국 선사들은 노동력을 모집(현지 송출업체)하고 수입(한국 송입업체)하는 외주 대행업체를 뒀다. 송출·송입업체 사이에 제3의 브로커가 끼어들기도 했다. 단계가 쪼개질수록 노동의 값이 깎이고 가족의 삶이 흔들렸다.
듀런의 첫 3개월치 월급은 ‘이탈보증금’ 명목으로 지급 보류될 예정이었다. 송출회사는 그 돈을 ‘리드 머니’라고 표현했다. 계약기간 동안 도망가지 않으면 계약 종료 뒤 귀국한 다음에야 입금되는 돈이었다.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는 송출비용을 별도로 뗐다. 무크타르는 송출업체(코인도)에서 빌리는 방식으로 300만루피아(24만원)를 냈다. 헤루는 누나에게 250만루피아를 빌렸다.
계약 뒤 마닐라에서 일주일 교육을 받은 듀런은 7월9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날 오후 부산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 승선할 배로 안내됐다. ‘이탈 방지’를 이유로 원양 이주 어선원들의 한국 체류 기간은 최소화됐다. 육지를 밟을 땐 한국 송입업체 직원들이 따라다녔다. 듀런의 눈앞에 정박한 배는 계약서에서 외운 포세도니아가 아니었다. 그는 오룡501호(사조산업) 갑판에 발을 디뎠다.
그해 3월 남태평양 미드웨이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오룡501호는 7월2일 부산 감천항에 귀항해 있었다. 선장은 본래 오룡503호(건조 1966년·무게 1555t)를 운항했다. 사조는 미드웨이 출항 전 48년 된 오룡503호를 폐선하고 선장과 선원들을 501호로 옮겨 태웠다. 9명의 필수승선 인원 중 자격기준(선박직원법)을 충족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선장과 2등 항해사, 기관장, 1등 기관사가 기준에 못 미쳤고 2등·3등 기관사와 통신장은 아예 승선하지 않았다. 사조는 타인의 항해사 면허증과 선원수첩을 도용해 선장 승선 허가를 받아냈다. 부산지방해양수산청 공무원들은 승무원 명부와 선원수첩의 직책을 수정해 자격을 갖춘 것처럼 꾸몄다.
인도네시아 테갈에서 4950㎞를 날아온 헤루와 자카르타를 떠나 5125㎞를 올라온 무크타르가 오룡501호에 올랐다. 그들은 필리핀 루손섬 타기그 출신 로얼 알제세라(당시 30)를 그 배에서 만나 동료가 됐다.
오룡501호도 36살 된 늙은 배였다. 듀런보다 2살 적었고 헤루보다는 13살이 많았다. 1978년 스페인 선사가 건조해 아르헨티나 해역에서 조업했다. 2010년 사조산업이 인수해 러시아 국적선(사조-러시아 법인 합작선)으로 운영했다. 인수 당시 선박 흔들림을 보완하기 위해 철제 보강재 140t을 씌웠다. 선미 피시폰드(fish pond·어획물 선별 및 보관 창고)는 2배 확장했다. 명태를 한번에 2.2t씩 운반선으로 옮길 수 있는 인양하중 3t의 하역설비를 2011년 새로 설치했다. 무게 1753t과 기관출력 3238㎾로 개조된 오룡호는 2014년 2월 한국 국적선으로 등록(트롤)됐다. 사조는 하역설비 안전하중 3t을 0.9t으로 속여 한국선급에 검사를 신청(2014년 1월29일)했다. 2월28일 한국선급이 검사증서를 발급했다. 세월호 참사 47일 전이었다.
로얼이 501호에 승선했을 때 에포크와 재회했다. 로얼과 에포크는 503호를 타고 러시아~부산~하와이를 오갔다. 503호 계약 종료 뒤 에포크가 필리핀 송출업체(벤허)와 새로 계약한 배는 오양105호(사조오양)였다. 듀런과 에포크처럼 승선 당일 엉뚱한 배로 보내지는 경우가 잦았다. 계약대로 이행됐다면 타지 않았을 배가 그들을 회항할 수 없는 ‘그날 그 바다’로 데려갔다. 인도네시아 선원 36명(러시아에서 1명 하선), 필리핀 선원 13명, 한국 선원 11명이 2014년 7월10일 부산 감천항에서 러시아 베링해로 명태를 잡으러 출항했다.
러시아 서베링해에서 조업 중 침몰(2014년 12월1일)한 사조 오룡501호의 생존 선원 6명과 사망 선원 21명의 시신을 태운 러시아 운반선 오딘호가 2014년 12월26일 오전 부산 감천항(사하구)으로 입항했다. 사망 선원들의 관이 배에서 내려지고 있다. 부산/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러시아 서베링해에서 조업 중 침몰(2014년 12월1일)한 사조 오룡501호의 생존 선원 6명과 사망 선원 21명의 시신을 태운 러시아 운반선 오딘호가 2014년 12월26일 오전 부산 감천항(사하구)으로 입항했다. 사망 선원들의 관이 배에서 내려지고 있다. 부산/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바다 깊이 잠기다
2014년 4만t. 한·러 어업협정 체결(1991년) 뒤부터 양국은 매년 협상을 벌여 한해 명태 어획량을 결정했다. 러시아는 바다를 내주고 한국은 어획량에 따라 톤당 입어료(14년 350달러)를 지급했다. 러시아는 극동 항만개발에 한국의 가시적 투자가 없다는 이유로 2015년부터 2만500t(2017년 2만3500t)으로 물량을 줄였다.
바다로부턴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이 한번 바다에 뜨면 아내와 부모는 그들의 무사 여부를 하늘에 물어야 했다. 전화통화와 다음 전화통화 사이의 간격은 출항과 귀항 사이의 시간과 일치했다.
듀런의 아내는 2014년 8월 또는 9월 남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룡501호가 러시아에 정박했을 때 듀런은 동료의 전화기를 빌려 고향집 번호를 눌렀다.
“‘미스터 김’의 비서에게 5천페소(10만8천원)를 빌려서 보냈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그걸로 버티라”고 남편은 말했다. 3개월치 월급이 이탈보증금으로 지급 보류되자 듀런은 생활비가 다급한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돈을 꿨다.
가장 확실한 이탈보증은 바다가 하고 있었다. 망망한 원양의 바다 위는 도망하고 싶어도 도망할 길을 찾을 수 없는 천연의 감옥이었다. 그 바다에서 ‘듀런들’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가족과 생활을 어쩌지 못해 이해되지 않는 ‘고용의 복잡한 사슬’을 감내했다. 듀런이 송출회사 팔콘과 계약(12개월)한 월급은 250달러(26만9천원·초과근무 수당 75달러 별도)였다. 듀런 아내가 4번째 달에 송금받은 남편의 첫 월급은 3천페소(약 59달러)뿐이었다. 남편이 말한 5천페소는 11월20일께 들어왔다.
이주 어선원은 자신의 임금을 두고 협상할 권리가 없었다. 그들의 최저임금(한국 선원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고시)은 한국인 노사가 단체협약으로 정했다. 2014년 한국원양산업협회와 전국원양산업노조가 합의한 이주 어선원의 월 임금은 435달러(경력 36개월 이상의 ‘유능한 선원’은 585달러)였다. 2016년 원양어선 한국인 선원의 최저임금이 164만1천원(평균임금 662만9천원)일 때 이주 어선원은 52만원이었다.
듀런의 월급 250달러는 그해 최저임금 435달러보다 185달러 적었다. 초과근무 수당 75달러를 합쳐도 110달러가 낮았다. 에포크가 송출회사 벤허와 계약한 월급은 200달러(초과근무수당 60달러)였다.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35달러가 모자랐다. 월급이 현지 송출회사를 거쳐 가족에게 송금되는 과정에서 일정액이 사라지기도 했다.
“집안 상황이 어떠냐”고 듀런이 물었다. “돈은 없고 임신으로 힘들다”고 아내는 답했다. “일할 만하냐”고 아내가 물었다. 듀런은 “다 괜찮다”고 답했다. 남편은 평소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통화는 6개월쯤 뒤에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2014년 12월1일 새벽 6시. 오룡501호가 투망했다. 서베링해 북위 62도 07분과 서경 176도 27분 지점이었다. 사조산업 본사로부터 추가 어획량이 하달된 상태였다. 한·러 정부가 한해 명태 어획량을 결정하면 선사별로 할당량이 배정됐다. 선박 규모(총톤수와 엔진마력)에 따라 쿼터가 주어졌다. 쿼터 배정 뒤 선사들 사이에선 할당량을 사고파는 ‘전배’가 이뤄지기도 했다. 2014년 12월 러시아 수역에선 한국 명태잡이 어선 5척(2017년 3척)이 조업했다. 오룡501호의 선박 규모는 5척 중 4번째(전체의 12%)였지만 전배로 재조정된 물량은 두 번째(7928t·전체의 19.8%)였다. 허락된 조업 기간(협상 타결부터 그해 연말) 내에 할당량을 채우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오전 10시께. 풍속 20~25㎧와 파고 4~5m로 기상이 악화됐다. 다른 선박들은 아침 7시30분께부터 인근 항구로 피항하고 있었다.
오전 11시30분께. 명태 20t을 포획한 그물을 끌어올렸다. 침수를 우려한 갑판장이 말렸으나 선장이 피시폰드를 열고 명태를 넣으라고 지시했다. 피시폰드가 열리자 바닷물이 10여차례 쏟아져 들어갔다. 해수가 전기모터를 덮쳐 조타기 고장을 일으켰다.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다.
낮 12시30분께. 우현으로 기울어진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선장이 피시폰드의 명태를 왼쪽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오후 2시33분. 일몰이 시작됐다. 오른쪽에서 들이치는 파도로 왼쪽으로 배가 크게 기울면서 오물배출구로 해수가 유입됐다.
오후 4시28분. 선미부터 침몰이 시작됐다. 선장이 퇴선을 지시했다. 그는 명태와 배에 남았다.
오후 5시6분. 오룡501호가 완전히 침몰했다.
퇴선 지시가 내려졌을 땐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이 각자의 언어로 “살려달라”며 고함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고 매달렸던 선원들을 파도가 쓸어갔다. 로얼은 바지와 재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러시아 어선 카롤리나77호의 불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배에 끌어올려지기까지 45분 동안 나뭇조각 하나에 의지해 얼음물을 견뎠다. 승선 인원 60명 중 27명이 사망하고 26명이 실종됐다. 인도네시아 선원 32명, 필리핀 선원 10명, 한국 선원 11명이 희생됐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한국 선원 최다 송출국 1위(2014년 기준 전체 2만2695명 중 29.6%)와 2위(24.2%)였다. 인도네시아인 무크타르(사망)·헤루(실종)와 필리핀인 에포크(사망)·듀런(실종)도 그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오룡501호에서 실종된 필리핀 선원 듀런의 사진을 아내가 지갑(왼쪽)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의 품엔 남편이 한국 배를 타러 떠날 때(2014년 7월) 뱃속에 있던 아기가 안겨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 제공
오룡501호에서 실종된 필리핀 선원 듀런의 사진을 아내가 지갑(왼쪽)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의 품엔 남편이 한국 배를 타러 떠날 때(2014년 7월) 뱃속에 있던 아기가 안겨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 제공
죽음도 차별받다
국적선과 합작선. 러시아 베링해에선 한국 국적선뿐 아니라 한·러 합작선도 한국인이 먹을 명태를 잡는다. 러시아 정부의 조업 쿼터(2001년엔 20만t) 축소 뒤 한국 선사들은 러시아 업체와 합작법인(현재 14개사)을 만들어 명태를 거둔다. 사조산업은 얀타(Yantar), 오리온(ORION), 케이에스에프시(KSFC) 등을 합작법인으로 운영하고 있다. 합작선이 조업한 명태는 수입 물량으로 잡혀 국내로 들어온다.
로얼은 카롤리나77호에서 엿새를 머물렀다. 12월7일 생존자 및 사망자 주검들과 오양96호(사조오양)로 옮겨졌다. 오딘호(러시아 운반선)로 바꿔 타고 12월26일 부산 감천항에 도착했다. 필리핀 대사관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사조 관계자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선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날 밤 해경에 침몰 상황을 진술했다. 12월27일 아침 사조가 제시한 돈 5500달러(6개월치 급여, 캐치 보너스 등)를 현금으로 받고 ‘합의’ 서명했다. 12월28일 사조가 사준 티켓으로 필리핀행 비행기를 탔다. “제대로 처리됐다면 치료와 위자료 등이 제공돼야 했지만”(공익법센터 어필 김종철 변호사) 사조는 생존 이주 어선원들을 신속하게 내보냈다.
12월2일 오후 필리핀의 에포크 아내는 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있었다. 송출회사(벤허) 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안의 음성이 “진정하라”며 남편의 사망을 전했다. 울음이 터진 아내는 5년 전 통화가 생각났다. 남편에게 원양어선 일을 권했던 친정 오빠의 선박사고(실종) 소식도 그 전화로 받았다. 5년 뒤 남편의 사망을 말하는 송출회사는 마닐라로 오라고 했다. 사조가 사망·실종자 가족을 한데 모아 설명하는 자리가 예정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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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크 아내가 전화를 받은 다음날 듀런 아내에게도 연락(팔콘)이 갔다. 남편이 탄 배가 빙산과 충돌했다며 “그를 찾을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하라”고 전화기의 음성은 말했다. 그에게도 ‘마닐라 회의’가 통보됐다. 사조는 자사 선박 사고로 사망·실종한 이주 어선원들의 유족을 직접 찾아가는 대신 현지 송출회사를 통해 마닐라로 불러 모았다.
12월17일께 유족들이 사조가 지정한 호텔방에 모였다. 서로 다른 송출업체(벤허·팔콘·크루링크)를 통해 오룡501호를 탄 선원 가족 10여명이 사조 관계자를 기다리며 울었다.
‘미스터 김들’이 한꺼번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족들은 ‘미스터 김’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웠다. 사조도 직원 김○○과 송입 대행업체 ㅎ교역 대표 김○○을 마닐라로 보내 ‘합의’를 처리했다. 듀런의 아내는 “제너럴산토스 스포츠 단지에서 남편을 설득한 ‘미스터 김’(사조 관계자인지 송입·송출업체 관계자인지 불분명)”을 다시 봤다. 사조는 보상금과 장례비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남은 가족이 살아가기에 충분치 않다”(에포크 아내)는 이야기가 유족들 사이에서 나왔다. “세 시간을 기다리게 한 사조가 한 시간 만에”(에포크 아내) 설명을 끝냈다.
12월1일 서베링해 악천후 속 침몰
인니 32명, 필 10명, 한 11명 희생
필리핀 유족들 마닐라로 불러모아
1천만원에 일괄합의 서명받은 사조
합의서 “완전히 최종적·영구적 해방”

“사인 안 하면 시신 못 받을까봐”
유족 손배소 각하·기각…대법 상고
고리의 사채 쓰며 생활고 시달려
고인 아내 “왜 하필 그 배였어요

이튿날 유족들은 개별 송출회사 사무실로 찾아가 ‘갑’ 사조가 내민 합의서에 ‘을’로서 서명했다. 듀런 아내는 12월23일 팔콘 사무실에서 “비밀해결합의서”에 사인했다.
“(보상) 갑은 을에게 위로금으로서 미화 1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책임의 부인) 을은 본 합의서의 어떤 조항도 갑 측에서 불법행위 또는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합의한다. (클레임의 포기) 을은 … 501 오룡호의 침몰 및 고인의 사망에서 발생하는 관련이 있는 모든 청구 및 권리로부터 갑과 그의 대리인 또는 대표자를 완전히,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해방시키고 면제하기로 약속한다. (소송) 을은 … 어느 국가에서도 민사 또는 형사 소송, 중재 또는 기타 소송에도 착수하거나 참여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 소송에 착수하거나 참여한 경우 갑이 보상금을 지급할 의무는 즉시 취소되며, 을은 ㉮ 이자를 더한 보상금을 갑에게 환불하고 ㉯ … 갑에게 발생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 … 법원이 재정한 모든 손해배상액을 지불해야 한다. (비밀유지) 을은 본 합의서의 조건, 합의에 이르게 된 사실이나 상황, … 등을 …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여서는 안 된다.”
팔콘이 듀런의 아내에게 사조의 ‘보상금’을 송금했다. 달러가 페소로 송금되는 틈에 일부가 증발했다. 아내가 실제로 받은 금액은 43만페소(8544달러)였다. 남편의 석달치 월급(이탈보증금)으로 팔콘은 3만3천페소(655달러)를 보냈다. 계약서상 최소 월급(수당 없는 250달러×3)보다도 100달러가 적었다.
에포크 아내는 ‘호텔 회의’ 이튿날 벤허 사무실에서 사인했다. ‘목숨값 1천만원’으로 사조의 책임 면탈을 확정짓는 합의서에 유족들은 동의했다. “사인하지 않으면 남편 시신을 받을 수 없다”는 벤허 쪽의 말에 동요했다. 정말 그럴까 싶으면서도 아내는 “그 말이 위협으로” 들렸다. 아내는 “하루라도 빨리 남편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은 마음에 사인”했다. “1만달러를 현금으로” 받은 뒤 아내가 사조 쪽에 말했다.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무크타르 아내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남편 친구의 전화로 소식을 접했다. 침몰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필리핀 쪽과 달리 사조는 인도네시아 유족을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송출회사로부터 침몰 소식을 먼저 전달받은 유족은 없었다. 유족이 직접 전화해야 송출회사(코인도)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항의하는 무크타르 아내에게 코인도는 “사망 여부가 최종 확인되지 않아 연락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송출회사가 유족들을 자카르타로 불렀다. 헤루의 아버지는 사조로부터 1억8500만루피아(1500여만원)를 받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미지급 임금 1250만루피아(100만원)과 장례비용 2500만루피아(201만원)가 더해졌다. 보험금 1억5천만루피아(1209만원)를 ‘다행히’ 받았지만 아들의 최저임금으로 계산할 때보다 900만원이 적었다.
거칠고 아득한 일터에 불안해할 때마다 자신을 달래던 듀런의 말을 아내는 잊지 못했다.
“괜찮아. 안 죽어. 죽더라도 걱정하지 마. 보험에 가입돼 있대. 우리 식구들 괜찮아.”
원양 이주 어선원은 죽어서도 차별받았다. 선주들은 한국인 승선 평균임금(2014년 해수부 고시 302만9천원)이 아니라 이주 어선원 최저임금으로 보상금을 산정하고 보험(송출국)에 가입했다. 대법원은 이주 어선원 재해보상에도 한국인 승선 평균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2013두5821·2016년 12월 선고)했으나 현실은 법으로부터 멀었다. 재해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송출국 보험금조차 유족 다수는 수령하지 못했다. 듀런의 아내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팔콘에 전화했을 때 담당자는 “1~4년은 걸린다”고 답했다. 최종 사망 판정을 받지 못한 실종자여서 보험금 수령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듀런 아내의 전화를 더는 받지 않았다. 법과 제도에 서툰 이주노동자와 가족들이 법과 제도에 세련된 사람들 앞에서 항변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검안한 무크타르의 주검은 169㎝였다. 얼굴과 가슴과 왼쪽 어깨에 표피 박탈이 있었다. 양쪽 다리에선 멍이 발견됐다. 한국 검찰은 12월4일 무크타르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라”고 사건 지휘했다. 그의 주검은 2015년 1월8일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에포크는 사망 두달이 찬 2015년 1월31일에야 필리핀의 아내 품으로 돌아갔다. 12일 전 해수부는 “사측 주관으로 외국인 선원 보상이 2014년 12월23일 완료됐다”고 발표(‘원양어선 안전관리 개선 대책’)했다.
2011년 5월13일 이른 아침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항에서 오랜만에 소량의 명태가 잡혔다. 동해에서 모습을 감춘 명태는 2007년 이후 1t 미만(2016년 6t)으로 잡혔다. 고성/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2011년 5월13일 이른 아침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항에서 오랜만에 소량의 명태가 잡혔다. 동해에서 모습을 감춘 명태는 2007년 이후 1t 미만(2016년 6t)으로 잡혔다. 고성/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그렇게 우리 밥상에 온다
국민 생선. 동해에서 명태가 말라버린 뒤에도 한국인들의 ‘소비량 1위 어류’는 늘 명태였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인들은 매해 평균 23만2083t(2위 멸치 20만2860t)의 명태를 먹었다. 한국의 수산물 수입 물량 1위도 줄곧 명태(2016년 25만5766t)였다. 수입 명태의 절대량(85.3%)은 러시아(2016년 21만8392t) 베링해에서 왔다.
2015년 10월19일 검찰은 사조산업 대표이사와 전·현직 임원 1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업무상 과실 선박매몰, 업무상 과실치사, 선박직원법 위반 등을 적용했다. 오룡501호 침몰의 핵심 원인으로 선장 등 주요 승무원들의 해기 능력 부족을 지목했다. 침몰 3년이 꽉 찼지만 지금까지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기소 2년이 넘도록 1심 선고는 물론 검찰 구형도 내려지지 않았다(2018년 4월6일 심리 속행).
필리핀·인도네시아 유족 22명은 자국과 한국 변호인(법무법인 가을햇살)에게 의뢰해 2015년 6월 사조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사조가 시신 인도 등을 지연하며 합의서 서명을 강요했고, 충분한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듀런과 에포크, 무크타르와 헤루가 한 배에서 사망·실종된 지 6개월 만에 그들의 가족이 하나의 소장 안에서 만났다. 필리핀 생존자 로얼이 유족과 변호인을 만나 침몰 당시를 증언했다.
재판부는 사조의 손을 들어줬다. 1심(2016년 11월17일)은 각하됐고, 항소심(2017년 8월25일)은 기각됐다. 합의서에 적힌 부제소 조항(추가 법적 대응하지 않겠다)이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부제소 합의에 반해 제기된 소송은 부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시신 인도와 연계한 합의 강요 주장도 “증거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들은 대법원에 상고(2017년 9월25일 사건접수)했다.
“생계를 책임지던 남편이 죽고 생활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합의서에 서명했다. 부제소 조항을 이유로 유족에게 불리한 합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김종철 변호사)
사조산업 관계자는 “외국인 선원들과의 모든 합의는 종결됐다”고 했다. “우리가 외국인들을 직접 고용한 게 아니라 현지 대행사를 통해서 했으므로 합의금(1천만원)도 그 시스템 속에서 결정됐다.”
듀런의 아내는 사채를 쓰며 살고 있다. 고리(20%)의 은행 빚도 졌다. 마을 가게에서 빌린 돈은 식료품을 살 때마다 값을 얹어주는 방식으로 상환하고 있다. 듀런의 아내는 그를 만나러 찾아온 한국인들(김종철 변호사 등 ‘이주 어선원 인권 실태조사팀’)에게 울며 소리쳤다. 아빠가 한국으로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칭얼댔다.
“남편이 러시아에서 전화했을 때 그랬어요. 배(오룡501호) 아주 크다고. 밧줄도 굵고 구명조끼도 많다고. 큰 파도 쳐도 끄떡없다고. 하느님, 당신을 저주해요. 왜 사조였어요? 왜 하필 그 배였어요? 왜 하필 내 남편을 데려갔어요?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어요. 그냥 가족 먹여 살리려고 안간힘을 썼을 뿐이에요.”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는 우리 밥상에 그렇게 온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내년엔 사드뽑고 평화심자. 더 치열한 시작하겠다"

소성리 6차 범국민평화행동, "사드 나가지 않는 한 물러날 생각없다"(전문)
성주=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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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2  23: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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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김천·원불교와 대구·경북, 부울경,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 등은 2일 오후 성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6차 범국민평화행동을 개최하고 '사드뽑고 평화심자'를 내년 구호로 채택, 끝까지 사드철회를 위해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해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전면 중단에 앞서 검토를 지시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배치는 온 나라를 뒤흔든 촛불항쟁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강행돼 지난 9월 새 정부하에서 실제 배치가 강행되고 지난달 말에는 운용을 위한 공사장비가 반입되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의 과도기인 4월 26일 야음을 틈탄 사드 기습배치, 새 정부 출범 이후 9월 7일 사드발사대 4기 추가배치, 11월 21일 사드 운용을 위한 공사장비 반입 등 일련의  절차는 성주군 초천면 소성리 주민들과 성지를 수호하려는 원불교, 그리고 사드배치가 북핵 방어에 무용할 뿐 아니라 안보위기를 초래할 뿐이라고 우려하는 평화시민단체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된 절차였다.
'임시' 꼬리표를 달고 주한미군의 사드 1개포대 배치가 마무리된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달마산 아래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2일 오후 성주·김천·원불교와 대구·경북, 부울경,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 등 그동안 줄기차게 사드배치 철회를 요구해 온 '6주체'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참여연대 등 연대자 400여명이 모여 2017년 한 해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는 6차 범국민평화행동을 개최했다.
범국민평화행동 참가자들은 이날 발표한 결의문을 통해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정부마저 박근혜 적폐세력에 이어 미국을 쫓아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엮이는 사드배치 완성의 길로 돌아서고 말았지만 사드는 단순한 무기체계가 아니라 북·중·러를 겨낭한 한·미·일 삼각동맹에 동참하는 문제라고 하면서 "우리의 주권과 평화·안보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며, "그 누구보다도 평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기필코 사드 철회의 길을 열어젖혀야 한다"고 밝혔다.(전문은 아래 상자)
이들은 '사드뽑고 평화심자'는 구호 아래 이날로 468일째 타오르는 김천 촛불과 267일을 넘기고 있는 원불교의 진밭교 평화기도와 연대해 사드를 철거하는 그날까지 주민들의 손을 놓지 않고 사드 철회의 의지를 강화하면 사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며, "2018년을 사드를 뽑아내는 희망의 해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사드철회가 적폐청산! 소성리 범국민평화행동-촛불은 계속된다'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대회장에는 '사드철회는 적폐청산, 주권회복, 평화실현의 길-이게 촛불정부인가? 우리는 미국앞에 당당한 정부를 원한다'는 현수막이 무대를 휘감았다.
  
▲ 왼쪽부터 박석민 사드한국배치전국행동 집행위원장, 강해윤 성주성지수호원불교비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 김대성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석주 소성리 사드배치철회 성주주민대책위 공동위원장, 김찬수 사드배치반대대구경북대책위원회 대표,  신종관 민주노총 경남본부 통일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석주 소성리 사드배치철회 성주주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들을 짓밟으면서 웃음을 짓는 것이 미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미국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배치하는 사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그들이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짓밟고 사드장비와 공사 자재를 기어코 들여갔지만 그걸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놀랄만큼 잘 싸웠다. 끝나지 않았다. 더 치열한 시작이 내년에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올 한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실망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2018년에는 꼭 사드를 뽑아내겠다는 각오로 싸우겠다"며, 올 한여름에 소성리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계속 주민들과 함께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성주성지수호원불교비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인 강해윤 교무는 "지난 4월 26일과 9월 7일, 11월 21일 수천명의 경찰병력과 세 번에 걸쳐 싸우고 있는 동안 세상의 관심은 멀어지고 걷어내려고 했던 사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며,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지적했다.
이어 "겨울에 접어든 저 산야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사드가 나가지 않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다. 비행기로 넘어가든 샛길로 가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막고 있는 진밭교로는 넘어갈 수 없도록 오늘 아침에도 막아나섰고,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사드로는 북핵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며, 하위동맹국인 한국의 안보불안을 빌미로 미국이 무기장사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본질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에서 83개에 달하는 한국내 미군기지에 소성리를 추가하려는 한미당국의 시도는 진퇴양난에 빠질 것"이라고 확언했다.
강 교무는 "이 겨울을 보낸 후 내년에는 사드를 들고 이 땅의 모든 평화세력, 민중과 함께 청와대를 향한 평화의 행진을 벌일 것이며, 그동안에는 한시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지키겠다"고 다짐을 밝혔다.
김대성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찬수 사드배치반대대구경북대책위원회 대표와 신종관 민주노총 경남본부 통일위원장도 무대에 올라 "사드로는 북핵을 막을 수 없고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안보불안과 전쟁만 불러오게 된다"며, 2018년에도 최선을 다해 사드철회를 위해 나서겠다는  각오를 표명했다.
박석민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 집행위원장은 "사드배치는 끝난 것이 아니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사드 추가배치와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대에 오른 6주체 대표들과 함께 "'사드뽑고 평화심자'는 더 큰 힘으로 단결하고 연대하려는 우리의 내년 구호"라고 역설했다.
  
▲ 소성리 할매들도 '사드뽑고 평화심자'는 구호를 들고 자리를 지켰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진밭교 방향으로 행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각 대표들이 진밭교 교당 옆에서 평화염원을 담아 6개의 솟대를 설치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경찰이 사드 포대로 접근을 막고 있는 저지선이 처져 있는 진밭교 평화교당 앞까지 행진을 하고 교당 옆에 평화를 염원하는 6개의 솟대를 설치하는 상징의식을 치른 후 이날 범국민평화행동을 마무리했다.
성주·김천·원불교를 비롯한 사드반대 6주체 단체는 매주 수요일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진행하는 평화집회는 계속 돌아가면서 주최하되 전국 집중 평화행동은 이날 마무리한다고 밝혔다.
한편, 종교인협의회를 중심으로 내년 3월께 제주 강정과 밀양, 소성리, 진도 팽목항 등을 경유하면서 청와대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드배치 주요 일지>

-2016.7.8. 사드1개 포대 한국배치 공식 발표(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 토머스 벤달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2016.7.13. 사드 배치지역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공군 성산포대 발표, 성주 촛불 집회 시작
 
-2016.8.21. 사드배치반대 김천 촛불 시작
 
-2016.9.30. 국방부 사드배치지역 성주군 초전면 달마산으로 변경 발표
 
-2017.4.26. 주한미군 사드 레이더와 발사대 2기 배치 후 즉시 실전운영상태 유지 발표
 
-2017.9.7. 사드발사대 4기 추가배치 강행
 
-2017.11.21. 사드운용을 위한 공사장비 반입
결의문(전문)
6차 소성리 범국민평화행동을 맞는 우리의 다짐
2018년은 사드를 뽑아내는 희망의 해로 만들자 !
백해무익한 사드가 강제 배치된 울분과 통한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한미일을 군사동맹으로 엮으려는 미국을 좇아 박근혜 적폐세력에 이어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마저 사드 배치 완성의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제 공사가 시작되면 사드가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한미 당국이 사드 배치의 명분으로 삼은 안보 환경은 더욱 악화되는 실정이다. 동맹 강화에 대한 미국의 요구는  거세기만 하다. 사드를 뽑아내기에 더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드로는 북한 핵미사일을 막을 수 없으며, 사드의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촛불의 염원을 저버리고 사드를 받아들인 문재인 정부도 추가 사드 배치, 미국 MD 참가, 한미일 동맹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드가 자국의 안보이익을 해칠 것을 걱정하는 중국과 러시아는 계속 사드 철회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사드를 둘러싼 정세로 보면, 우리는 사드가 뿌리를 내릴 수도, 사드를 뽑아낼 수도 있는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다.
사드는 단순한 무기체계가 아니다. 한미일 MD 구축을 위한 핵심체계이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겨냥한 삼각동맹에 동참하는 문제이다. 전쟁과 핵 대결을 불러와 우리의 주권과 평화·안보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이에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굳게 손잡고, 전쟁과 대결의 가장 큰 피해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평화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기필코 사드 철회의 길을 열어젖혀야 한다.
2017년 우리는 평화의 땅 소성리에 사드를 심으려는 미국과 이에 부역한 적폐세력에 맞서, 또한  갖은 패악질로 주민들을 괴롭힌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세력의 행패에 맞서 서로 투쟁의지를 세워주고 의지하며 신뢰를 다져왔다. 회유와 이간질, 보상이라는 사탕발림도 극복해내었다.
소성리 할매들은 사드가 들어온 그 순간부터 이 길의 맨앞을 막아 나섰다. 연대자들은 다치고 넘어져도 소성리로 달려와 주민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하여 마을회관 앞길은 사드를 막는 길,  미군, 기름, 장비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우리는 비록 사드를 막아내지 못했지만 절대 패배한 것이 아니다. 고되고 험난한 평화의 길을 우리가 닦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제 다가오는 2018년에는 사드가 결코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공사를 막아내고, 사드 철거의 평화 정세 조성을 위한 투쟁에 더욱 힘을 기울임으로써 평화의 길을 더 넓게 내야 한다.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매일 아침마다 소성리 진밭교에서는 “사드 뽑고 평화 심자”는 구호가 울려퍼진다. 김천 촛불은 468일째 타오르고 있다. 원불교의 진밭평화기도는 267일을 넘기고 있다. 그렇다! 사드를 철거하는 그 날까지 주민들의 손을 잡고 더욱 힘차게 투쟁하자! 우리가 사드 철회의 희망이 되자! 전쟁과 핵군비 대결 반대, 조건 없는 대화 재개, 사드의 조속한 철거를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자! 그리하여 반드시 2018년을 사드를 뽑아내는 희망의 해로 만들자! 
2017. 12. 2.
6차 소성리 범국민평화행동 참가자 일동
  
▲ 소성리가 낳은 '세계적인 평화 가수' 정진석 씨가 '평화'와 '영일만 친구'를 개사한 '소성리 친구'를 열창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트럭에서 북치면서 '우리에게 평화를 달라. 전쟁반대 사드도 반댈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율동맘과 율동천사들의 공연은 언제나 어른들이 좋아하는 단골 순서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구평화합창단의 공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진밭교 앞 통행제한 안내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잡귀 잡신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세워진 솟대 뒤 다리를 따라 멀리 달마산이 보이고 그 끝에 사드 기지가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사드뽑고 평화심자'는 평화의 구호와 함께 미국을 저주하는 구호라며 선창이 나오자 참가자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따라 외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원불교 진밭평화교당 앞 기념촬영.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사드철거, 미군철거.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