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일 화요일

임진강 만난 한강은 바다처럼 넓고 거셌다

윤순영 2019. 04. 02
조회수 864 추천수 0
어로한계선 넘어 중립수역 직전까지…한국전쟁 후 첫 답사
김포시 남북정상회담 1돌 기념 '한강 하구 물길 열기' 행사 예정

크기변환_DSC_8355.jpg» 바다처럼 펼쳐진 김포시 시암리 앞 한강하구의 모습. 역류한 예성강물과 임진강, 한강의 물이 여기서 모두 만나는 세물머리이다. 건너편 산들이 황해도 개풍군이다.

늘 보던 한강이 아니었다. 황톳빛 물은 바다처럼 펼쳐졌고 세찬 바람에 파도가 높게 일었다. 황해도 개풍군의 나지막한 산들이 코앞에 펼쳐졌다. 태백산 금대봉에서 발원해 490여㎞를 달려온 한강물은 서해 바다와 만나기 앞서 여기에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강화도 북쪽 철산리 앞바다로 흘러드는 북한의 예성강 물이 조류에 떠밀려 이곳으로 역류하니 여기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물이 모두 만나는 세물머리인 셈이다. 민간 선박이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앞 세물머리까지 온 것은 65년 만의 일이다.

1일 김포시가 주관한 '한강하구 물길 열기 사전답사' 행사에 참가했다. 바람이 세차고 물결이 높아 쉽지 않은 항해였지만 역동적인 한강하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정하영 김포시장을 비롯한 환경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은 태운 배 10여 척은 김포시 전류리에서 출발해 한강하구 중립 수역 앞 시암리 습지까지 '물길을 열고' 돌아왔다. 민간인이 한강하구 어로한계선을 넘어 중립수역 직전까지 간 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다.

크기변환_DSC_8004.jpg» 한강하구 답사를 위해 김포시 전류리 포구에 대기하고 있는 선박들.

이번 행사는 한강하구 남북 공동조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민간에게 자유항행을 허용하기로 합의한 이후 첫 번째 항행 시도였다. 김포시는 이번 사전답사를 바탕으로 오는 27일 다시 한강하구 물길 열기 행사를 열 예정이다.

크기변환_DSC_8052.jpg» 한강하구 중립 수역 앞 하성면 시암리 습지를 행해 달려가는 배.

크기변환_DSC_8060.jpg» 멀리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보인다.

이번 행사는 오는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고,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을 축하하기 위해 벌이는 '평화의 물길 열기 행사'의 사전 답사였다. 김포시는 애초 전류리 포구부터 유도까지 왕복 45㎞ 구간을 운행할 예정이었으나 최근의 남북 관계를 고려해 중립수역 입구까지 구간을 축소했다.

크기변환_DSC_8252.jpg» 한강하구답사 선박이 한강 하구의 너른 물길을 달린다.

크기변환_DSC_8156.jpg» 북쪽을 향해 흐르는 한강 앞에 북한 개풍군의 산들이 가로막아 선 듯 나타난다.

한강하구는 1953년 정전협정에서 남북의 민간 선박이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민감 수역’으로 분류돼 사실상 어로한계선 이북으로는 민간선박 출입이 제한되어 왔다.

크기변환_DSC_8328.jpg» 이번 답사에는 정하영 김포시장과 환경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참가했다.

남과 북은 지난해 11월 5일부터 한 달간 강화도 말도∼파주시 만우리 구역에서 수로측량·조석관측 등 공동조사를 실시하고, 이달 1일부터 민간선박의 자유항행을 허용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김포시는 특히 중립지역에 위치한 유도에 대한 생태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한강하구의 유일한 섬으로 생태적 가치가 큰 이 섬에 대한 생태조사는 앞으로 비무장지대(DMZ) 생태보전을 위한 남북협력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크기변환_DSC_8375.jpg»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습지까지 물길을 열고 전류리 포구로 돌아오는 선박들.

정하영 김포시장은 “한강 최북단 전류리 포구를 출발해 어로한계선을 넘어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강하구 중립 수역까지 다녀왔다. 비록 한강과 임진강, 조강이 만나는 세 물머리 중립수역을 넘어가지는 못했지만 김포의 한강하구에, 대한민국에, 봄이, 평화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차라리 '주52시간 노동시간단축법안'을 폐기하라

[사설] 차라리 '주52시간 노동시간단축법안'을 폐기하라
▲ 연행되는 민주노총 임원[사진 : 노동과 세계 제공]
억이 막힌다. 오늘 국회 본관 진입을 시도한 민주노총 임원 8명 전원이 무참하게 연행되었다. 이유인즉, 탄력근로제 확대법안과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악안을 국회가 4월 3일 고용노동소위와 환노위 전체회의를 잇달아 열고, 4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강행처리하는 수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을 대동하고, 1일 국회를 찾아 탄력근로제 확대를 위한 근로기준법과 새로운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오는 5일 본회의에서 처리해달라고 당부했다는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목숨걸고 개악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홍 부총리는 홍영표 원내대표와 만나 "최저임금법과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관련 법이 굉장히 절실하고 절박하다"면서 "국회에서 오는 5일까지 꼭 좀 이 법을 처리해 달라"고 말했다. 누구에게 절실하고 절박하다는 것인가. 결국 자본가 아닌가. 또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과정이 사실상 시작됐다"면서 "이번 주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이 이뤄져 내년 최저임금이 새로운 결정 방식에 의해 잘 진행되도록 해달라"고 했다는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결국 고용노동부 관료들을 위해서 아닌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도 "탄력근로제 확대는 우리 사회에서 52시간제 근로시간 단축 입법의 안착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안착’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 또 "최저임금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논의되도록 하는 결정체계 개편을 담아 입법이 완료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는데,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객관적인가. 고용노동부 장관이면, 한쪽에서는 위험노동으로 죽어나가도 다른 한쪽에서는 100억대의 연봉잔치를 벌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용과 노동에 아무리 편파적으로 신경써도 표시도 안날텐데, 합리, 객관, 공정은 또 무슨 말인가.
홍영표 원내대표는 "산업현장에서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는 탄력근로제 확대나 최저임금 제도 개선은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 ‘산업현장’의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재벌과 자본의 목소리인가, 노동자의 목소리인가. 노동운동가 출신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입에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나 쓰던 ‘산업현장’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탄력근로제만 해도 국회에서 논의만 하면 몇 시간 만에도 다 통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수차례에 걸쳐 간곡하게 호소했지만 현재까지 전혀 진전되지 않아 정말 안타깝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급한 쪽은 자유한국당이니, 그것들이 몽니 부리면 그만두면 될 일을 왜 목숨걸고 통과시키려고 하나. 그냥 놔둬도 알아서 국회에 기어들어와 통과시키자고 애걸을 할 터인데 거꾸로 누가 구걸을 하나. 배짱도 없다.
그릇된 상식 중의 하나가 자유시장경제는 평등을 훼손하나 성장과 경쟁력에 능하고,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개혁정책은 평등을 지향하나 성장에는 잼병이라는 식의 평가이다. 자유시장경제가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금융공황의 주범이며, 양극화와 빈곤의 악순환을 만드는 근본토양으로, 성장에도, 평등과 복지에도 실패를 거듭해 ‘시장의 실패’라는 저주스러운 경제학 용어가 탄생했는데, 노동자 서민의 피와 원한이 묻어 있는 말이다.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에서 성장의 정체가 발생하는 것은 반동지배계급의 저항과 사보타쥬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복지와 평등을 강화하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2차 대전 이후의 경제의 황금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왕 소득주도 성장을 내건 문재인 정부가 해야할 일이란 경제적폐세력을 청산하는 강도 높은 개혁이지 우경화와 투항, 역주행이 아니다. 이렇게 가면 문재인 정부는 개혁도 놓치고, 성장도 놓칠 것이며, 결국 촛불시민의 지지도 놓치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 국회 진입을 시도하는 민주노총 임원[사진 : 노동과 세계 제공]
탄력근로제 개악과 최저임금법 개악은 노동자 앞에 밥상 차려놓고 솥단지를 엎는 짓이다.
차라리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는 게 나았다. 최저임금을 두 번 올려놓고, 산입범위를 개악할 때만 해도 밥상차려놓고 숟가락 뺏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자의 직접참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최저임금 결정구조 자체를 개악하려고 하니, 촛불정신이 밝혀준 직접정치를 완성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겠다. 그러나 이미 시행되고있는 노동자의 직접 참가에 의한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훼손하려 해서는 안된다. 촛불혁명정신의 근본을 건드는 짓이며, 직장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길에 역행하는 일이다. 오늘 오르지 않은 임금은 내일 올리면 되고,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살아있게 된다. 그러나 결정구조 자체에서 노동자의 직접참가를 봉쇄하는 식으로 개악해 버리면, 이제 노동자들의 투쟁의 명분까지 앗아가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솥단지를 엎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솥은 놔둬야 할 게 아닌가. 정책적 시행착오를 만회하려는 것은 필요하나,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행해야 한다.
차라리 주52시간제 노동법을 폐기하라.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지금 왜 노동시간을 단축하자고 하는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누고, 장시간 노동의 오명을 털어내고 과로사와 위험노동을 극복하자는 것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대통령부터 휴가를 챙겨 쓰는 액션을 취한 것이고, 주52시간제는 뭐하러 시행하자고 했는가. 사용자들이 주52시간제가 임금상승을 유발하여 문제라고 한다는데,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고용을 늘리고, 임금비용을 더 내라고 시행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전에 받던 야간수당, 연장근로수당도 못 받게 생겼다. 보완책을 찾으려면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고용증가와 임금상승분에 대해 사용자측 부담과 정부지원책의 연관성을 찾아서 해결을 해야지 탄력근로제를 늘려줘 버리면 난무하던 편법과 불법이 합법화되지, 주52시간제가 어떤 식으로 안착된다는 말인가.
민주노총과 진보진영도 부족한 것이 많으니, 촛불혁명이 만들어준 지지를 2년 만에 다 까먹은 것을 굳이 탓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정도껏 해야 한다. 최저임금구조 개악안과 탄력근로제 연장안은 그 동안의 정책적 시행착오를 만회할 회심의 한 수가 될 수 없고 역풍만 불 뿐이다. 경제성장도, 명분도, 지지도 잃게될 정책을 목숨 걸고 밀어붙여야 하겠는지 정부여당은 재고해 봐야 한다.
현장언론 민플러스  webmaster@minplus.or.kr

‘이름 없는 역사 제주 4·3’

[제주 4·3 71주년] ‘이름 없는 역사 제주 4·3’
제주 ‘월정리 해변가’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임병도 | 2019-04-03 08:29:24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독립언론 제주의 소리와 1인 미디어 아이엠피터 공동기획 영상 ‘이름 없는 역사 제주 4·3’
1947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기리는 3.1절 기념행사를 하던 날, 별안간 6살 난 꼬마 아이가 외지인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숨을 거둡니다. 아이를 친 경찰은 그대로 경찰서까지 도망쳐 버립니다.
이를 본 도민들은 분노해 돌을 던지며 기마경찰을 쫒아갑니다.
“폭도다.! 민란이 일어났다.! 저들을 막아라.!”
경찰은 항의하던 도민들을 폭도로 오인해 총을 발포합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시뻘건 불을 내뿜는 99식 총구에 길을 지나던 아무 죄 없는 젖먹이 아이와 여성들이 쓰러져 나갑니다. 총알이 박힌 가슴팍 한가운데가 너무 뜨겁고 눈앞에 피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젖먹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어찌하지도 못한 채 숨이 꺼져갑니다.
그렇게, 통곡의 70년을 만들어낸 피맺힌 광란의 시대가 서막을 올립니다.
“제주도 사람은 빨갱이다.”
오로지 이 한 마디만 알고 있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눈에 보이는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토벌해갑니다. 어쩌면 그들은 조금이나마 재미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차가운 새벽하늘을 가르며 봉화가 올라가고 광기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돌아가라. 우리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는 단독선거를 반대한다.”
무기를 든 남로당원들은 그대로 경찰서에 쳐들어가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합니다.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죽여라, 저들은 폭도이고 빨갱이들이다. 다 쓸어버려라!”
오라리에서는 매서운 불길이 타오르고 서로를 향한 눈빛에는 피가 서려 있습니다. 옆집 삼촌은 뒷덜미가 잡힌 채 질질 끌려갑니다.
별안간 천둥번개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꼬꾸라져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거리에는 공포로 가득 찬 비명만이 들립니다.
대부분 노인과 아녀자,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누구네 딸은 옷이 벗겨진 채, 누구네 아이는 두 다리를 잡힌 채 바위에 패대기 쳐져, 누구누구는 마치 굴비 새끼 엮듯이 엮여서,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쓴 제주도민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방법들로 죽어갑니다.
해안가 5km를 벗어난 중 산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진해서 해안가로 내려와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명령에 따라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슴팍에 총칼이 박힐 때까지 이유를 모르고 죽는 사람도 허다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살인이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자 피서지인 제주 월정리 해변에 끌려오는 것은 곧 사형을 의미했습니다. 해안가를 등지고 매일 수 십 명이 총살당하고 대검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남자가 모조리 죽어 ‘무남촌’이라 불리던 제주 북촌리에서는 이틀 만에 40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이제는 증오도, 분노도 없습니다. 오직 겁만이 남아 마치 온통 시커먼 늪 속에 빠진 것처럼 집요하게 괴롭혀 왔습니다.
수 만 명의 생명이 동백꽃의 그것처럼 소리 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여러분이 걷고, 즐기고, 휴식을 얻는 이 땅 어느 곳이 학살 터가 아닌 곳이 있을까요?
제주도민 가운데 유족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들의 기억은 70년 전 그날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70년 전 그날에 갇혀 영원히 풀려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4.3 희생자들은 아직까지 이름 지어지지 못한 채 애처로이 70년 전 그날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기억할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이름 없는 역사 제주 4·3’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770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①] 극우개신교 뿌리는 제주 4.3 학살 주도한 서북청년단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19-04-03 07:18:06
수정 2019-04-03 07: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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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기타
극우세력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 극우적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광주항쟁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된다. 심지어 이런 주장이 국회에까지 등장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 사회의 극우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은 바로 한국개신교다. 개신교는 지금 태극기집회 등 극우세력 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각종 극우적 성향의 정치 논리들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행동하고 유포한다. 개신교가 극우주의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 극우화의 맥락을 읽는 데도 중요한 요소다. 극우개신교의 역사와 배경을 짚는 기사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형제․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습니다. 싸늘한 주검 위에 흙 한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긴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십자가 아래 화해의 여정에 무릎을 꿇고 참여합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이에 앞서 3월28일엔 제주를 직접 방문해 제주 4.3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의귀리의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에 식수를 하며 “아직 우리는 유족들이 내밀어 주시는 용서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족들이 전해 준 고결한 화해의 메시지를 값싸게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 기독교는 4.3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사실을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4.3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유족들의 손을 덥석 잡기에는 우리 손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피로 적셔져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제주4.3항쟁 제70주기였던 지난해 4월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제주4.3희생자들의 분장을 한 시민들이 4.3항쟁을 추모하는 403광화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제주4.3 학살에 함께한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개신교인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였다.
제주4.3항쟁 제70주기였던 지난해 4월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제주4.3희생자들의 분장을 한 시민들이 4.3항쟁을 추모하는 403광화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제주4.3 학살에 함께한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개신교인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였다.ⓒ임화영 기자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교회협이 사죄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의 중심세력이 바로 개신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개신교 세력은 이후 한국개신교의 주류가 됐고, 지금 거리에서 극우세력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극우개신교의 사상적 기반이다. 
북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이 
중심이 돼 만든 ‘서북청년단’… 
제주 4.3 토벌대로 참여해 민간인 학살 자행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서울 종로YMCA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출범한 단체로 공식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4.3항쟁 당시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로 제주에 있었던 윤태웅 씨는 지난 2001년 진상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서북청년 이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을 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1945년 12월 베다니전도교회로 시작해 1946년 영락교회로 개명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하자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어 대항했다. 이후 지부 결성 과정 등에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했고, 결국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난 2월 발간한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 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의 집결지였다”고 설명한다. 
지난 지난 2011년 성탄특집으로 KBS에서 방영된 고 한경직 목사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화면
지난 지난 2011년 성탄특집으로 KBS에서 방영된 고 한경직 목사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화면ⓒ뉴시스
이런 사실은 한경직 목사가 생전에 한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1982년 규장문화사에서 출간된 ‘한경직 목사’라는 제목의 자서전 형식의 책에서 한경직 목사는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라고 증언했다.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의식을 가지고 제주4.3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통해 1948년 5월10일 열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최태육 목사는 “당시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공산주의에 먹힌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개신교가 생존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북에서 이런 경험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정치·생존적 입장으로 5.10 선거를 만났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주 4.3과 여순사건 진압 등에 개신교인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한경직 목사 설교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개신교인들이 이런 정치 생존적 입장만으로 학살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학살의 죄의식을 지워줄 장치가 필요했다. 남한 단독정부, 친미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악마화한 것이다. ‘교회와 권력’이란 책에서 김진호 목사(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공산주의자들은 적이고, 그들을 궤멸하면 우리에게 종교적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영락교회를 이끈 한경직 목사가 1946년과 1947년에 한 설교를 살펴보면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2009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 설교선집1’에 수록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1946년)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자의 사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교화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고,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국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퇴영적(退靈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 전후(戰後)에 각국의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시오! 일어나 일합시다!”라며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한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해 11월 설립된 서북청년회에 영락교회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선 이렇게 말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했다. 이듬해 제주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 4.3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개신교인)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로 개신교인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4월 20일 서울 경무부경찰공보실이 발행한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이라는 책자를 통해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 영 불 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육 목사는 지난해 쓴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 자아로,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부정적 타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신학화한다”며 “공산주의 진영, 즉 ‘사탄의 진영’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다. 그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사탄의 진영과 의의 진영으로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개신교인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조병옥, 김동성, 장면(1949년 유엔한국대표단)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개신교인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조병옥, 김동성, 장면(1949년 유엔한국대표단)ⓒ국가기록원
서북청년단을 비롯해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반공은 단순히 사상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과 ‘사탄’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 장군과 이세호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
 
이러한 극우적 신앙은 고스란히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8월30일 장충체육관에서 재향군인회(회장 박세환)와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금란교회(감독 김홍도), 청교도영성훈련원(전광훈 목사)등 보수 단체와 대형교회 신도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반공·애국국민총궐기대회에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목회만 하면 되지 무슨 정치운동에 참가하고 앞장서냐고 말하는 이 있다. 나도 목회만 하고 싶은데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보수개신교 정당인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준비대회 성격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의 이런 발언은 극우적 성향 개신교인들의 정치 활동이 과거 서북청년단처럼 마치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듯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 목사는 역시 북의 서북지역인 평안북도 출신의 피난민이다. 
김용옥 교수는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에서 내려온 이 열혈한 정년들을 이승만은 정권장악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 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좌우 맥락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 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고 밝혔다. 
개신교 ‘진보’와 ‘보수’  
모두 가졌던 반공의식…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화해와 변화
 
그런데 반공의식은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칭하는 개신교 일부 진영만의 의식이 아니라 ‘진보’까지 포함해 한국개신교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진보적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신대와 기독교장로회를 세운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강원룡 목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1970년대부터 반독재투쟁에 나선 개신교계 인물들도 강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해방 직후 북에서 소련 등에 의해 교회가 탄압받던 현실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2014년엔 대표적인 민중신학자인 안병무 박사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을 지냈다는 의혹이 기사로 나오기까지 했다.
1988년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목사가 육촌동생 문익준, 문순옥 등 친척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바뀌었다.
1988년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목사가 육촌동생 문익준, 문순옥 등 친척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바뀌었다.ⓒ통일의집 제공
하지만 개신교의 반공의식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통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라고 고백했고,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정권에 대하여 깊고 오랜 불신과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반공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해 왔다”고 반성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는 등 분단 극복을 위한 물꼬를 열었다. 문 목사는 만주에서 태어나 북을 거쳐 월남했고, 한국전쟁 당시엔 유엔군 통역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개신교계의 이런 변화에 대해 최태육 목사는 “반공주의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체적으로 극복해냈다고 보긴 힘들다. 해외 통일 운동과 19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과 함께 젊은 목회자들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수개신교, 한기총 만들며 반공의식 강화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개신교 일부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988년 선언에 반대해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만들었다. 한기총 초대회장이 바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였다. 이후 보수개신교 진영의 반공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서북청년단 활동을 사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개신교에선 이들을 건국세력으로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2012년 4월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경직과 대한민국 건국운동:1945-1948’을 주제로 발표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우익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서북청년들은 남한에서 좌익이 활개를 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영락교회는 이런 서북청년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1일 한국기독교총연합 주최로 서울 광화문 에서 열린 ‘문재인 탄핵 3·1절 국민대회’에서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반공의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1일 한국기독교총연합 주최로 서울 광화문 에서 열린 ‘문재인 탄핵 3·1절 국민대회’에서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반공의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한국기독교총연합 홈페이지
이런 시각은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과도 일치한다. 뉴라이트 역사학자 등이 중심이 돼 출간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번째 책으로 ‘서북청년회’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건국세력의 하나인 서북청년들의 존재에 대해 거의 완전히 잊어 왔다. 그들은 해방 직후에는 건국운동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는 국군이나 유격대원이나 청년단원으로 좌익과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며 서부청년단을 숨은 건국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과거 반성 없는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극우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은 대한민국은 과거 서북청년단 등 개신교 세력이 개신교인인 이승만 박사와 함께 세운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기총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2월15일 열린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붙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가 세운 나라다. 결단코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고려연방제로 갈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일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신교 일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반공주의 시대에 인식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 최태육 목사는 “개신교가 서북청년회 활동 등 과거의 잘못을 아직 반성하지 않았다. 개신교인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 나이 든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라며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KAL858 외교문서 공개, ‘무지개 공작’ 전면공개 될까?

통일뉴스, 서울고법 항소중...채희준 변호사 ‘준비서면’ 제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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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2  15: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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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통일뉴스>가 국정원으로부터 행정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부분 공개'받은 '무지개 공작' 문건. 결정통지서에 '부분공개'로 표기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외교부의 30년 경과 외교문서 공개로 87년 발생한 KAL858기 사건과 ‘무지개 공작’이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무지개 공작’ 문건 전면 공개를 둘러싼 법정공방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 사건을 추적해온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는 2007년 3월 국가정보원에 ‘무지개 공작’ 문건 행정정보공개를 청구해 ‘정보 부분 공개 결정’을 받았지만 절반 이상의 내용이 비공개돼 2017년 10월 ‘전면 공개’를 재청구했다가 거부당하자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 음모 폭로공작’, 일명 ‘무지개 공작’ 계획 문건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발전위)가 2006년 8월 1일 KAL 858기 사건 의혹 1차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
‘무지개 공작’ 문건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주도로 KAL858기 사건 발생 사흘만인 12월 2일자로 작성됐고, “11.29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 실종된 대한 항공 여객기 사건이 북괴의 테러 공작임을 폭로,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7년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 음모 폭로공작’(무지개 공작) 문건은 절반 이상이 공란으로 가려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87년 11월 29일 115명(한국국적 113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버마(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사라진 KAL858의 잔해도, 혐의자의 신분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괴 만행’으로 몰아가 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 활용하려한 것. 당시 전두환은 6월항쟁에 밀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고 노태우를 후계자로 내세운 상태였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실제로 외교부가 대통령 선거 이전에 폭파 혐의자 ‘하치야 마유미(김현희)’와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김승일)’ 사체를 바레인 정부로부터 인도받기 위해 외교력을 쏟아부은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바레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조기 인도 요구에 “마유미가 KAL 사건에 연루 되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음”이라는 이유로 한국 인도를 머뭇거리고 있었고, “신이찌와 마유미가 사용한 AMPLE 독약물이 반드시 북괴제조라고 단언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 없음”이라고 판단했다.(BHW-0339, V4.0105)
한국 정부는 87년 12월 10일 ‘마유미’를 북한 공작원으로 보는 이유 등을 문서로 바레인 외교장관에게 제출하고 모든 외교력을 쏟아 부어 결국, 대통령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김포공항에 마유미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뉴스로 내보낼 수 있었다.
<뉴스타파>는 지난달 31일자 <“대선 전에 김현희 압송”..비밀 외교문서로 본 ‘무지개 공작’“> 제목의 보도에서 “14일 밤 9시 40분 바레인을 떠난 김현희는 대통령선거 전날인 15일 오후 2시 5분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낸다. 김현희가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대통령 직선제 부활, 군사정권 종식, 이른바 양김의 대결 등 모든 대선 이슈를 집어 삼켰다”며 “군사정권 연장의 결정적 역할을 한 김현희 신병인도 작전은 안기부 무지개 공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실행과정에서 외교부는 사실상 안기부와 한몸이었다”고 보도했다.
  
▲ 외교부는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들을 3월 31일 공개했고, KAL858기 사건 관련 외교문서도 대량 포함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결국 외교부가 30년이 지나 공개한 외교문서들을 통해 보더라도 ‘무지개 공작’이 실제로 이 사건과 12대 대통령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무지개 공작’ 문건의 전면 공개의 필요성도 충분히 확인됐다.
무지개 공작 문건 정보공개거부처분취소 소송을 담당한 채희준 변호사는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에 이번 외교문서 공개와 언론보도 등을 반영한 ‘준비서면’을 제출, 1심 서울행정법원이 기각한 사유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원고는 언론인으로서 오로지 사실 보도를 위한 공익적 차원에서 이 사건 청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깊이 감안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희준 변호사는 “1심에서 비공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는데, 해당 내용은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대부분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무지개공작 문건에서 비공개된 부분도 공개해야 마땅하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무지개공작 문건이 비밀로 지정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도록 공개하지않는 것은 결국, 영원히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국정원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지개공작 문건도 국민을 위해 작성한 것이어야 하며, 국민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외교부는 생산된 지 30년이 경과한 1988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1,602권(약 25만여쪽)의 외교문서를 3월 31일 정오를 기해 공개했고, KAL858기 사건 관련 문서 1만여 건이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