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세월호 선장보다 심재철·조원진이 더하다”

등록 : 2014.11.14 19:49수정 : 2014.11.1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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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씨가 12일 오후 국회 본청을 방문해 농성했던 장소를 살펴본 뒤 계단을 내려서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세월호 유가족’이 겪은 한국정치 206일

▶ 세월호가 304명을 싣고 침몰한 지 206일째인 지난 7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국회 본회의장 전광판에 특별법이 통과됐음을 알리는 숫자가 들어오자, 방청객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응원과 모욕을 동시에 받아온 세월호 유족들이었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광화문광장, 국회, 청와대 앞을 오갔던 단원고 학부모 이남석씨를 만나 한국 정치의 민낯을 목도한 소감을 들었다.
추석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차례를 지내는 심정으로, 9월5일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마침 단원고 교사와 학생들이 제자와 친구들을 만나러 와 있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제단 앞에서 그들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영정사진 앞엔 가족과 친구들이 쓴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 남은 아이들은 죄다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재주 많고, 사랑스러웠다.
안타까운 사연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편지가 있었다. 수신자는 단원고 2학년5반 이창현. 창현이 엄마는 더이상 볼 수 없는 그리운 아들을, 너무나 평범한 아이로 묘사하고 있었다.
“넌 그리 잘나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엄마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아들도 아니었고,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며, 배부르면 행복해하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평범한 아이였지. 그래, 그게 너였어. 드러나진 않지만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엔 분명히 네가 있었지. 그거면 충분했어. 그거면 너무 충분한 거였어. 그거면 되는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네가 있는 것 그거면 되는데…. 그거면 충분한데….” 곁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했던 평범한 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는 편지를 끝맺지 못했다.
“세월호 선장보다 심재철·조원진이 더하다”
그렇게 창현이 엄마를 글로 만난 지 55일째 되던 10월29일, 한 남자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정연설을 하러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찾은 날이었다. 국회 본관 앞에 깔린 붉은 카페트를 걸어오는 대통령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던 그는 대통령이 눈길 한번 안 주고 돌아가자, 김 대표에게 매달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되도록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던 그는 급기야 차에 올라타는 김 대표를 붙잡으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장면은 비정한 정치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 여야는 세월호 특별법에 최종 합의했고, 일주일 뒤엔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여당 대표에게 ‘죄인’처럼 빌던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지난 12일, 그가 주저앉았던 곳, 국회 본청 앞에서 그를 만났다. 이남석(50)씨. 만나보니 그는 바로 그 평범한 아이, 창현이의 아빠였다.
창현 아빠의 인생은 사고 이튿날인 4월17일 싸늘하게 식은 아들을 품에 안은 뒤부터 변했다. 비록 아들을 구할 순 없었지만, 왜 죽었는지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무능한 아빠가 되긴 싫었다. 10여년째 해오던 대리기사 사업을 접었다. 단원고 학부모 중심으로 꾸려진 가족대책위에서 자문위원을 맡았고, 대한변호사협회(변협),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함께 4·16특별법안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창현 아빠가 처음 국회를 찾은 것은 5월27일이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계획서가 채택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여야는 본래 이날 오전 국정조사 대상과 범위, 시기 등 특위 활동을 명시한 계획서를 합의한 뒤 오후에 본회의를 열어 이를 의결할 계획이었다. 창현 아빠는 국조 계획서가 통과되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도 즉각 제출하고 필요하다면 특검도 실시하겠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전국에 방송된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6·4 지방선거도 코앞이었다. 그러나 여당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국조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언론에만 오르내리던 ‘기춘대원군’의 힘을 새삼 느꼈다. “빨리 합의를 하고 오라고 여야 협상 대표를 회의장에 밀어넣었지만, 여당 의원들은 천장만 쳐다봤다. 왜 합의를 빨리 하지 않느냐고 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뉴스엔 정치인들이 좋은 얘기 몇마디 하는 것만 나와서 그러려니 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여당은 시간을 질질 끌다가 유족들이 나가떨어지길 바랐던 거였다.”
창현 아빠는 “당시만 해도 가족대책위 집행부는 정치적으로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유가족’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여야 협상이 파탄나고, 국조가 파행을 겪는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여야를 모두 함께 비판했다. 여야가 대립하며 상임위가 파행되면, 일부 언론들은 싸우는 이유가 뭐든 상관없이 텅 빈 회의장을 가리키며 “국회의원들은 일도 안 하면서 매달 세비는 꼬박꼬박 받아간다”고 보도한다. 유족들도 국조 협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국회는 제발 일 좀 해라”라고 부르짖었다.
가까스로 국조가 시작됐지만 곳곳에 암초가 널려 있었다. “국조 방청하러 여러 번 회의장에 갔다. 여당 의원들은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았다.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해경과 청와대 사이에 오간 통화 녹취록을 얘기하다가 ‘브이아이피(VIP)가 영상 중계 화면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꼬투리가 잡혔다. 김 의원이 사과했는데도 여당은 계속 사퇴를 요구하며 회의를 열지 않았다.”
창현 아빠는 가장 가슴 아팠던 일로, 국정조사 특위의 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이 세월호 참사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했던 것과 심재철 국조 특위 위원장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달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글을 지인들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냈던 것을 꼽았다. 창현 아빠는 “솔직히 36년 징역형 받은 세월호 선장보다도 심재철·조원진 의원이 더 밉다”고 말했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공전을 계속하자, 7월14일 유족들은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족들이 모여서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하니 뭘 해야 하나 의논하던 중 누군가가 단식하면 어떻겠느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엔 유족 모두 함께 단식하자고 했다가 변호사들이 말렸다. 단식농성은 계획된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하게 된 거였다.”
창현 아빠는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가 나흘째 되던 날 쓰러졌다. 사흘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로는 청와대 앞과 국회를 오가며 특별법 투쟁에 동참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호소했다. 세월호 침몰 당시 가까스로 빠져나왔던 단원고 학생들은 특별법을 통과시켜 달라며 안산에서 국회까지 1박2일 동안 37㎞를 걸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유족들은 안산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빗속을 걸었다.
10월29일 오전 이남석씨가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 꼭 도와주십시오”라며 무릎 꿇고 간절히 요청하는 장면. 오마이뉴스 제공
10월29일 김무성 대표 앞에서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빌던
창현이 아빠를 잊을 수 없었다
세월호 특별법 최종 합의 뒤
국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여야 협상 파탄과 국조 파행
목격하며 국회 본청 앞서 농성
광화문서 단식 중 쓰러진 적도
야당과도 소통 불가 절감했다
‘노숙자’ 소리도 들어야 했다
만약 광화문 아닌 국회서 단식했다면?
7·30 재보궐선거는 특별법 통과의 고빗사위였다. 특별법 협상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선거 승패에 달려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동작을 공천 파동이 벌어지면서 초반만 해도 야당에 유리할 듯하던 분위기는 날로 바뀌었다. 마음이 급했다. “야당은 공천하면서 민심을 잘못 읽었다. 동작을을 보니 노회찬(정의당), 기동민(새정치연합) 후보 두 사람 다 나오면 도저히 새누리당을 이길 수 없을 거 같았다. 농성장을 방문했다가 명함을 건넨 의원들한테 문자까지 보냈다. ‘국민이 누구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서 민주당이 대의를 지켜달라’고.”
7·30 재보궐선거가 야당의 참패로 끝난 뒤, 유족들에겐 계속 불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유족들과 새정치연합 사이엔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족들은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가 서명한 세월호 1차 협상(8월7일), 2차 협상(8월19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야성이 강하고 똑부러진다고 생각했던 박 원내대표가 왜 그렇게 급히 합의를 해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의원들한테 물어봐도 자기들도 모른다며 고개만 젓더라.”
2차 협상까지 불발된 뒤 유족들은 8월 말부터 새누리당과 접촉을 시작했다. 추석 전까지는 타결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변한 게 없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한테 ‘유족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주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더니, 이 원내대표는 ‘엥? 무슨 소리냐? 나는 박영선 원내대표한테 기소권 달라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발뺌했다.”
창현 아빠는 애초부터 여야와 유족들이 함께하는 ‘특별법 제정 3자협의체’가 만들어졌더라면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이고, 솔직히 야당조차도 유족들이 협상장에 나서기를 바랐는지 잘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항상 정치는 자기네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야당이 3자협의체를 주장한 것은 2차 협상이 무산된 뒤 궁지에 몰리고 난 뒤였다.
국회에서 특별법 협상은 꼬일 대로 꼬여갔고, 유족들의 페이스북엔 비난하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카카오톡엔 유족들에 대한 마타도어가 나돌았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곁엔 늘 함께 아파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어느날 청와대 앞 농성장에 경북 문경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여고생이 찾아왔다. 수학여행비를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수학여행 기간인 2박3일 동안 우리들과 노숙농성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가지고 왔는데 반찬이 모두 24가지나 됐다. 어느 날 밤엔 취직준비 한다는 젊은이들 두명이 박카스를 들고 찾아왔다. 직장이 없으니 주머니에 돈 한푼 있을까 싶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광화문이 아니라 국회에서 단식을 했더라면 46일 동안이나 단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농성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한 여당 의원은 우리를 ‘노숙자’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광화문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화장실 사용 놓고 사무처 직원과 갈등
창현 아빠는 유족들이 긴 밤을 새웠던 본청 앞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수리가 아프도록 햇살이 꽂히던 잔인한 여름은 지나가고 이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됐다. 국회 사무처는 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인 지난 8일, 텐트, 깔개, 의자 같은 비품을 모두 치웠다. 말끔해진 그곳은 수없이 고함치고, 울부짖고, 절망했던 장소였다. 유족들은 이곳에서 화장실 사용 같은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들을 놓고 국회 사무처 직원들과 수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유족들의 국회 농성을 곁에서 지켜봤던 직원들도 눈물을 훔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하러 국회에 온 창현 아빠 얼굴을 알아본 한 방호원은 “때로는 유족들이 우리를 향해 욕설을 퍼붓곤 했다. 그러나 나도 자식이 있는 사람 아닌가. ‘애들 잃은 저 사람들 속이 얼마나 시커멀까’ 생각하면서 견뎠다. 그런데 정작 새누리당 최고위원(김태호)이 유족들이 전깃줄에 수건 널어놓은 걸 가리키며 ‘노숙자’라고 말하는 걸 보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창현 아빠는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했을 때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말을 걸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고 했다. “살려달라고 외치면 눈길이라도 돌릴 줄 알았다. 우리는 대통령 온다고 국회 경내에 들여보내지 않을까봐 아예 전날 밤부터 국회에 와서 기다렸는데…. 대통령이 그냥 가버리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김 대표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가 참 미웠지만, 내가 힘없는 아빠니까, 자식 죽은 이유도 밝히지 못하는 무능한 아빠니까 무릎을 꿇었던 거다.”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던 지난 7일, 창현 아빠는 그날도 ‘유족의 뜻을 반영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키라’며 국회 본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였다. 이미 여야 합의가 끝났고, 합의안 대로 본회의를 통과할 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아이의 평범했던 아빠 이남석씨. 어떤 사람들의 눈엔, 그는 더이상 ‘순수한 유가족’이 아닐지 모른다. 그는 가족대책위 안에 꾸려진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내 최순화(50)씨 역시 지역 시민단체들이 마련한 각종 간담회에 참석하느라 매일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암컷 바람기와 수컷 고환의 ‘군비경쟁’


조홍섭 2014. 11. 14
조회수 2850 추천수 0
  수컷의 새끼 살해에 암컷 여러 수컷 교미로 맞대응
  수컷끼리 정자 경쟁을 촉발 시켜 큰 고환으로 진화

Cornelia Kraus.jpg» 유아살해에 대항해 암컷이 바람기 전략을 펴면 수컷 사이에 정자전쟁이 불가피하다.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쥐여우원숭이의 거대 고환은 이렇게 생겼다. 사진=코넬리아 크라우스, 케임브리지 대학.

사자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가장 불편한 장면은 새로운 우두머리가 돼 무리에 들어온 수컷이 암컷의 저항을 뚫고 새끼 사자를 죽이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야 암컷이 다시 임신할 수 있게 되고, 수컷은 기껏 2년 정도인 지배 기간 동안 최대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 새끼 사자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이렇게 죽는다.
 
그러나 유아살해는 사자만의 일은 아니다. 원숭이, 토끼, 다람쥐, 곰, 물개, 담비 등 포유류에 널리 퍼진 행동이고,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진화했다. 우연하거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란 뜻이다.
 
wa1.jpg» 새끼를 죽이려는 수컷 개코원숭이에 암컷이 저항하고 있다. 사진=엘리스 허처드

wa2.jpg» 수컷이 죽인 새끼 개코원숭이를 암컷이 옮기고 있다. 사진=앨리스 바니엘 

포유류의 유아살해를 포괄적으로 조사해 ‘암컷과 수컷 사이의 진화적 군비경쟁’으로 설명한 연구가 나왔다. 디에터 루카스 영국 켐브리지대 박사후 연구원 등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14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유아살해를 하는 119종을 포함한 260종의 포유류를 대상으로 한 이번 연구에서 유아살해는 주로 사회성 동물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외톨이 생활을 하거나 일부일처 생활을 하는 포유류에서는 드물었다.
 
적은 수의 수컷이 많은 암컷을 독점해 번식하는 사회성 동물에서는 수컷끼리 경쟁이 심하다. 그런 곳에서 수컷은 번식 기회를 늘리기 위해 다른 수컷의 새끼를 죽이고 그 새끼의 어미를 임신시켜 자신의 새끼를 낳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유아살해를 하는 집단에서 수컷의 지배는 평균 2차례 번식을 하는 기간으로 그렇지 않은 집단의 4번에 견줘 매우 짧았다.
 
wa3.jpg»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쥐여우원숭이. 유아살해로 인해 수컷의 고환이 비대해졌다. 사진=엘리스 허처드

수컷의 유아살해에 대한 암컷의 대응책은 뭘까. 기존 가설은 암컷끼리 뭉치거나 기존 수컷과 힘을 합쳐 침입 수컷을 막아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번 연구 결과는 달랐다. 암컷은 여러 수컷과 교미해 부성을 희석시키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수컷은 자기 자손일지도 모르는 새끼를 죽이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암컷의 ‘바람기’ 전략은 수컷 사이의 정자 경쟁을 촉발했고, 이는 고환이 큰 수컷이 번식에 유리한 자연선택을 이끌었다. 연구진이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유아살해가 진화한 지 오랜 동물일수록 고환의 크기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고환이 어느 정도 커지면 유아살해도 사라졌다. 암컷의 바람기 전략이 수컷의 번식 독점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암컷과 수컷 사이의 전쟁은 현재 진행중이다. 유아살해는 암컷과 수컷 사이의 진화적 군비경쟁 과정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행동이다”라고 논문에서 설명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D. Lukas and E. Huchard, “The evolution of infanticide by males in mammalian societies,” Science, 14 November 2014 . Vol 346 Issue 6211,http://www.sciencemag.org/lookup/doi/10.1126/science.1257226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60주년 즈음에 바라 본, 가톨릭학생운동은?

가톨릭학생운동, "하느님 나라 구현이라는 도전에
응답하다"
60주년 즈음에 바라 본, 가톨릭학생운동은?
정현진 기자  |  regina@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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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4  19: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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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학생운동이 1954년 10월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 창립으로부터 60주년을 맞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육십갑자를 모두 살아 낸 시간, 가톨릭학생운동 역시 한 사람의 인생 못지 않게 탄생과 성장, 그리고 때로는 좌절과 정체의 시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가톨릭학생운동의 조직적 단초는 1945년 10월 서울가톨릭여학생회 결성이다. 그 후 생긴 서울가톨릭학생회, 서울여자가톨릭학생회, 서울대가톨릭연구회가 1949년 ‘서울가톨릭학생회’로 통합됐지만, 이듬해 6.25 전쟁 발발로 활동이 중단됐다. 전후, 부산, 대구, 서울 지역에서 다시 가톨릭학생회가 결성됐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교구 학생회와 함께, 1954년 10월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가 창립됐다. 
이후 가톨릭학생회 조직은 전국 차원에서 점차 성장하고 또 부침을 겪는다. 지성인 운동으로 출발한 가톨릭학생운동은 1950년대에는 ‘첫 전국 대학생 사도직 운동’으로서 가톨릭 사상을 연구하고 <빡스>지와 같은 출판물을 보급하며 학생 지성인을 위한 신앙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 지난 11월 8일 가톨릭학생운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시된 초창기 역사. ⓒ정현진 기자
1960년대는 5.16군사 정변, 산업화, 교회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 1980년 5.18광주민주화 항쟁, 1987년 6월 항쟁과 통일 운동 등은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참여와 대학 내 가톨릭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학생운동에서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요구를 하면서부터 가톨릭학생운동 역시 현실 참여와 순수 신앙 사이에서 갈등과 논쟁을 겪었다. 신앙과 참여, 이 두 간극 사이를 어떻게 포용하느냐는 이후 오랫동안 가톨릭학생운동의 큰 과제로 작용한다.
지난 11월 8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60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해, 가톨릭학생운동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가톨릭학생운동이 한국사회안에서 어떻게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이들은 오늘, 지난 시간을 어떻게 새기고 있는지 들어 봤다.
좌담회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했던 홍태희(한양대 78), 황재현(연세대 82), 이창호(성균관대 87), 백승덕(연세대 02) 4명이 참석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부정과 부패가 범람하여.... 우리 가톨릭학생들은 사회의 각 분야에 확고한 투쟁적 이념의 기수로서.... 과거 가톨릭인의 사회 참여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미비했으며....  이러한 각오를 거울로 삼아 영원한 질서의 창조자로서 우리의 결의를 다진다.”(1967년 전국대회 결의문 중)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적 징표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는 초대교회 창설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과 자발성을 본받아야 한다. 주교, 사제, 평신도가 서로 형제적 사랑을 나누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고 평신도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목활동에 참여하고 주교와 사제는 헌신적으로 도와야 한다. 본당, 액션단체 그리고 200주년 기념사업 및 행사에서 평신도의 적극적 참여와 자발성을 교회는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1984년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 성명서 중)
1960년대와 1980년대 한국가톨릭학생운동 조직의 두 목소리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톨릭교회, 그리고 신앙인이 사회적 문제에 침묵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각기 다른 시기와 상황에서 활동한 참가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가톨릭학생회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했다. 60년이라는 시간을 관통한 핵심적인 문제인 ‘가톨릭학생회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지금껏 가톨릭학생회의 존재, 그리고 그 활동을 규정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 지난 11월 13일 '가톨릭학생운동 60년을 되짚는 좌담회가 열렸다. ⓒ정현진 기자
가톨릭학생운동은 무엇인가, 신앙인의 역할을 묻는 도전에 응답하는 것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가톨릭학생의 신앙 고백
이들은 가톨릭학생회는 사회, 정치적 문제와 상황, 교회 내적인 문제 그리고 일반 학생운동의 흐름 등 대략 세 가지 조건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왔다고 설명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과 내부 조건에 맞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정하는 건강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태희 씨는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몫을 찾는 과정은 그 조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지만 한계도 있었다면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간의 연결성이 없다는 것. 가톨릭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이 단절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각 시기별 활동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보니, 서로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면서, “서로가 강조하는 부분에 대해 약한 것을 배우고 채우기보다는 앞선 것을 버리고 가는 경향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이창호 씨 역시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80년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그 당시 가톨릭학생회 또는 개인으로서 ‘신앙고백’이었다”면서, “각각의 시대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해 왔던 것은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교회가 침묵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당시 우리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가톨릭학생운동이 하고자 했던 것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예수를 닮을 것인가였고, 그것은 일반 학생운동과 다른 우리만의 모습이었다. 예수 안에서, 성경 안에서 길을 찾으려는, 그리고 교회 밖이 아닌 교회 안에서 길을 찾고 노력하려는 모습이었다.”(이창호)
어느 때보다 ‘운동권’ 이미지가 컸던 80년대 후반에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했던 이창호 씨 역시, 문화와 사회 과학을 공부하면서도 신학과 성서 공부를 놓은 적은 없다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이 무엇인지 정리하기 위한 우리만의 작업이 진행됐고, 가톨릭학생회로서 논리와 실천 방향을 찾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가톨릭학생회, 세상의 촛불과 같은 존재
황재현 씨는 1980년대 초반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직격탄을 맞았던 시기, 1970년대와 1980년대 후반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가톨릭학생운동을 경험했다는 황재현 씨는 대학 교정과 도서관에도 경찰이 상주하고, 탱크 사이로 등교해야 했던 시절, 가톨릭학생회는 촛불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1984-85년의 이야기를 해보면, 사회적 의사표현 자체를 거의 못했다. 집회도 학내에서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고, 거리로 나가면 거의 구속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때에, 가톨릭학생회는 위험을 무릅쓰고 300여 명이 참여했다. 그만큼 가톨릭학생회는 결속력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황재현)
황재현 씨가 이야기하는 1982년 전후는 “활동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없고, 다만 운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지가 있었을 뿐”이라면서, “대학생들의 의사 표시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 가톨릭학생회는 촛불처럼 암울한 시기를 비췄다. 가톨릭학생회만이 할 수 있는 일, 긍정적 역할이 정말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동료가 눈앞에서 잡혀가고, 교수가 수업 중에 끌려가는 상황에서 결단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서, “늘 그렇듯 사회 참여와 신앙, 영성 사이의 고민은 남아 있었지만, 집회에 나오지 않은 이들에게도 부채의식은 있었다. 무언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 가졌던 가톨릭학생회의 결속력이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됐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가톨릭학생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회원들의 자율성
가톨릭학생회는 각 대학별 학생회가 교구별로 연합회를 구성하고 전국조직으로 묶인다. 총연, 전협, 전가대협을 거쳐 현재 한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회원들의 자치권이 현저히 약화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홍태희 씨는 “물론 자치권이 없어지고, 교구 조직이 된다는 것이 장단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학생회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자율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스스로 어떻게 시대적 징표가 될 것인지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창호 씨 역시 최근의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가톨릭학생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면서, “회원들이 현장에 가더라도 진짜 체험을 하면서 현장과 자기 자신이 동시에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체험이 없다면 1회성 경험이 될 뿐”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선배들이 바라보는 현재의 가톨릭학생회는 어떤 모습일까?
“솔직히 작년에 처음 재학생들을 봤을 때, 이 친구들 뭐 하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은근히 하는 활동이 많았다. 아픈 아이들을 위해 모자를 뜨기도 하고, 세월호 미사를 제안했을 때는, 흔쾌히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을 하겠다고 나섰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찾는 영역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재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이창호)
이창호 씨는 “가톨릭학생회는 언제나 그 시대적 현실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신앙고백”이라면서, “외형적인 부분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60년 전부터 지금까지 표현 양식이 달라졌을 뿐, 가톨릭학생회가 추구하는 본질은 여전히 같다고 본다. 정형화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승덕 씨는 “예전 선배들이 광장에서 세상을 만났다면, 지금은 만나서 광장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런 만남에서 우선 교회가 형성되고, 함께 사회로 나가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면서, “과거의 모습에 머무는 것보다, 현재에서 과거 역사를 발견하는 것, 과거와 현재의 체험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홍태희 씨는 지난 날에도 모든 활동이 조직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개인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졌던 것들도 많다면서, “그런 다양한 실천과 활동이 쌓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 2014년 가톨릭학생회 재학생 회원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정현진 기자
가톨릭학생회는 학생 시절에 그치는 운동 아니야
여전히 동문들의 삶 속에 있는 가톨릭학생운동의 가치
다시 ‘가톨릭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이 돌아갔다.
백승덕 씨는 가톨릭학생회가 그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톨릭학생회 회원들이 1970년에까지 지식인, 80년대는 스스로 민중이 되었다면, 현재는 자기 스스로에게서 가난과 소외를 찾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난과 소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생각해야 하며, 그 방법은 개인적으로 ‘관찰-판단-실천’이라는 '셀방법론'에서 찾기를 바란다”고 제안했다.
또 홍태희 씨는 60년 간 가톨릭학생운동을 거쳐 간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 신앙’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공동체에서 체험했던 것, 그 모든 것이 우리 신앙의 증거다. 학생, 사회인, 성직자, 수도자로 어디에서든 그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를 계속 이어 주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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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朴공약 기초연금, 왜 성남시민이 40%나 부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 지방정부 식물로 만드는 것”
나혜윤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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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4  17:53:36
수정 2014.11.14  19: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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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성남시장이 야당에 “예산을 통한 지방정부 탄압을 막아달라”며 공개서한문을 보내고 “대통령 공약이자 국가사무가 명백한 국민기초연금을 왜 성남시민이 40%나 내야 하느냐”며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 이재명 성남시장 ⓒ 페이스북
14일 이재명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회 예산심의와 관련하여 야당에 요청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내년도 예산에서 지방재정을 악화시키는 정부의 예산편성이 이뤄지고 있다”며 “대표적인 예가 국고보조사업의 국가부담률을 낮추거나 없애 지방정부 부담이 2천600억원 이상 늘어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시장은 “국고보조사업은 정부가 필요한 사업으로 인정하여 시작했지만 대부분 주민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라 국고보조가 줄어든다고 하여 사업을 축소 취소할 수 없어 국가부담이 줄어든 만큼 지방정부가 추가 부담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 시장은 “국고보조사업 국비부담율의 일방적 인하 외에도 지방정부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은 많다”며 “새로운 세원 대책없이 지방정부 재정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은 안 그래도 취약한 지방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지방정부를 식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특히 “기초연금 무상보육 예산의 경우는 국가 사무이자 대통령 공약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와 일언반구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지방정부에 부담 시켰다”며 “성남시의 경우 기초연금을 예로 들면 40%를 부담하게 돼 2014년은 320억원을 부담했고 2015년에는 480억원을 부담한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이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라며 “대통령 공약이자 국가사무가 명백한 국민기초연금을 왜 성남시민이 그것도 40%나 내야 한단 말이냐”고 반문했다.
  
 
한편, 이 시장은 예산을 통해 지방정부를 옥죄는 것은 야당출신 단체장이 주축인 지방정부를 약화시키는 탄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시장은 야당 의원들에게 “민주주의의 보루인 지방자치가 살아날 수 있도록 보편적 복지에 대한 국가사무 지방소비세율 인상 등 지방의 자주재원 확충을 통한 지방재정 강화에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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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측근-메릴린치 합작 ‘글로벌 호구’ 스토리


메릴린티 장밋빛 사업평가 석유공 12조 투자 회수 5.4%
육근성 | 2014-11-14 14:28:4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조1000억원에 인수, 시설투자 명목으로 4763억원 투입, 4년 간 운영손실 5830억원. 이러더니 황급히 부채 7260억원을 떠안은 채 200억원에 매각했다. 이게 석유공사 소유의 캐나다 자회사에서 벌어진 황당한 사건의 대강이다. 증발해버린 2조 수천억 원의 출처는 국민 혈세다.

2조 수천억 들여 인수 200억에 매각, 그래도 뻔뻔한 석유공사
2009년 석유공사는 하베스트 인수에 돌입한다. 하베스트가 제시한 인수 옵션은 자회사인 NARL(정유사업체)도 함께 인수하는 것. NARL을 끼워 팔려 했던 것이다. 골칫덩이를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NARL의 연간 적자폭은 1000원. 섬에 위치해 입지도 좋지 않은데다 설비 노후화도 심각한 상태였다. 1986년 NARL을 소유하고 있던 캐나다 국영석유회사는 이 회사를 단돈 1달러에 매각한 바 있다.
혈세 수조원을 날리고도 뻔뻔하다. 석유공사는 “NARL을 갖고 있을수록 적자만 발생하니 빨리 처분하는 게 좋다”며 “팔아치운 것만도 당행”이라고 주장했다. 하베스트사를 손에 넣기위해 어쩔 수 없이 ‘끼워팔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투의 해명이다. 앞뒤 안 맞는 소리다. 매입 후 4년 동안 시설 투자에 수천억원을 쏟아부었다. 이건 어떻게 해명할 텐가.
석유공사가 ‘끼워팔기’ 농간에 넘어간 것이다. 대놓고 사기 치겠다는 하베스트사에게 무력하게 당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인수과정을 들여다보자. 세 군데에 방점이 찍힌다. 이명박 대통령(MB), 석유공사-지경부, 그리고 투자자문회사 메릴린치 서울지점이 그것이다.

자원 자주개발률 20% 외치며 닦달했던 MB
MB는 인수위 시절부터 해외자원외교를 강조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에는 “자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며 관련부처를 독려했으며, 자신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과 측근인 박영준 전 지경부차관 등을 선봉에 세워 해외자원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업적을 강조했다.
석유-가스 자주개발률을 2010년까지 10%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한 것도 부족해 2012년 2월에는 광물자원공사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갖고 “올 연말 자원 자주개발률 20% 달성”을 외쳤다. 대통령이 직접 독려하고 정권의 실세들까지 앞장서서 설쳐대니 해외 광구와 유전, 광산 등을 손에 넣으려는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베스트와 NARL에 대한 인수작업이 시작됐던 것이다. 당시에는 입 열지 못하던 석유공사가 최근 이렇게 실토했다.
“MB정권의 정책적 목적에 공기업이 발맞추다 보니 이런 있을 수 없는 국부유출이 일어난 것이다.”

MB-지경부 석유공-메릴린치가 합작한 ‘국부유출’
당시 주무부처였던 최경환 지경부장관(현 경제부총리)도 MB의 닦달에 못이겨 하베스트사를 인수했음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지난 24일 기재부 국감에서는 하베스트 인수와 관련해 보고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기억나지 않는다”며 오리발을 내밀던 최 장관이 말을 바꿔 의미 있는 몇 마디를 했다.
야당 의원이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석유공사 강영원 사장이 지경부장관(최경환)을 찾아가 ‘하베스트를 인수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한 사실이 있다고 했는데 맞느냐”며 추궁하자 최 장관은이렇게 답했다.
“그런 보고 받았다. 당시 NARL이 어떤 회사인지 석유공사도 파악이 덜 돼 있었다. 석유공사가 정유사업에 경험이 없으니 위험도가 높지 않나 잘 판단해보라고 말해줬다.”
당시 지경부장관도 NARL 인수에 부정적이었으며, 석유공사는 NARL에 대해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인수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얘기다. 당장 실적을 내놓으라는 MB의 닦달 때문에 잘못된 인수임을 알고도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몰아붙인 MB와 부당한 지시에 맞서지 못한 지경부 장관과 석유공사 사장이 합작한 국부유출이다.

메릴린치 2조 투자 결정 직후 서울지점장으로 발탁된 MB 집사의 아들
일조한 사람이 더 있다. 김형찬 메릴린치 서울지점장이 바로 그다. 메릴린치는 하베스트 인수 등 총 4건의 해외사업에 대해 투자자문을 해주고 석유공사로부터 248억원을 받았다. 해외 4곳에 투자한 규모는 12조원. 하지만 회수된 금액은 6730억원에 불과하다. 하베스트 뿐 아니라 다른 곳도 손실을 내고 있거나 현지 정부 승인문제로 생산 자원의 국내반입이 어려운 상태다.
김형찬씨가 메릴린치 서울지점장으로 발탁된 건 2008년. 한국투자공사(KIC)가 메릴린치에 2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직후다. ‘발탁’이 2조원 투자 유치에 대한 대가였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메릴린치는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파산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거액의 투자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김 지점장의 아버지가 모종의 역할을 했을 거라는 설이 파다하다. 그의 아버지는 MB의 ‘40년 집사’로 불리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다. MB와 고대 상과대학 동문인 김백준씨는 MB와 막역한 사이여서 인수위 때부터 영향력이 상당했던 인물이다. 영향력 때문일까. 메릴린치의 투자요청이 전광석화처럼 통과된다. KIC 사장을 통해 인수위 강만수 간사에게 보고된 지 불과 이틀 만이다.

현지 언론 눈엔 한국정부는 ‘글로벌 호구’
메릴린치가 석유공사의 해외투자자문회사로 선정된 데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투자자문사 선정에 참여한 다른 업체보다 평가가 낮았는데도 최종 선정된 것이다. 1,2차 심사 모두 계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하는 비계량 평가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여기에도 ‘MB 집사’인 아버지의 영향력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석유공의 하베스트 인수를 의아한 시선으로 봤던 현지 언론 / 켈거리 해럴드>
인수 당시 모회사격인 하베스트에너지 역시 부채비율이 2000%에 달하는 부실기업이었다. 석유공사가 거액을 내놓으며 하베스트를 인수하자 현지 언론들은 한국정부를 비웃는 기사를 내보냈다. 캘거리 헤럴드는 ‘한국인들 대체 무슨 생각이었나?(What were the Koreans thinking?)’라는 칼럼을, 월스트리트 저널은 하베스트가 받은 매각 대금을 ‘신이 내린 선물(godsend)’라고 놀리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정부를 ‘글로벌 호구’로 본 것이다.
MB의 닦달과 황당한 조급증, 석유공사 사장과 지경부장관의 무책임, 여기에 메릴린치의 과장된 장밋빛 사업성평가가 더해져 탄생한 것이 바로 ‘하베스트 글로벌 호구 스토리’라는 작품이다. 메릴린치와 MB정권의 유착관계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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