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일 월요일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 말고 문재인’

 2018 신년사, “북과 남이 마주앉아 우리 민족끼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폰트키우기폰트줄이기프린트하기메일보내기
승인 2018.01.01  16:04:36
페이스북트위터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오전 <조선중앙TV>에 나와 2018년 신년사를 발표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자 국무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는 대외관계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방점을 찍었다. 그에 반해 미국을 향해서는 ‘핵 억제력’을 강조했을 따름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과 손을 잡기로 한 것.
김정은 위원장은 1일 오전 9시30분(평양시각 9시) 관영 <조선중앙TV>에 나와 2018년 신년사를 발표했다. 특히 신년사의 4분의 1 정도를 남북관계에 할애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입장과 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혀 주목된다. [전문 보기]
문재인 집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먼저 김 위원장은 지난해를 결산하며 “남조선에서 분노한 인민들의 대중적 항쟁에 의하여 파쇼통치와 동족대결에 매달리던 보수정권이 무너지고 집권세력이 바뀌었으나 북남관계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남조선 당국은 온 겨레의 통일지향에 역행하여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 추종함으로써 정세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고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북남관계는 풀기 어려운 경색국면에 처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 등장에 대한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한 것은 물론 두 차례의 대북 독자제재에 나서는 등 대북 압박정책을 편 것에 대한 비판적 평가인 셈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을 하루 앞두고 문재인 정부가 두 번째 대북 독자제재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고 북한 당국이 굉장히 분개했다”며 “현 정부 내에서도 친미세력이 주도권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고, <조선신보>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실명으로 성토하는 기사를 낸 것도 이같은 북측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기류를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태를 끝장내지 않고서는 나라의 통일은 고사하고 외세가 강요하는 핵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없다”며 “조성된 정세는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며 자주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당장 북미관계 개선이 어려운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군사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고 그나마 대화상대가 될 수 있는 문재인 정부와 관계 회복에 나서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신년사의 메시지가 예상했던 범위에서 나왔다”며 “결국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 ‘우리 민족끼리’라는 민족공조론을 통해서 국면전환을 시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조성렬 위원은 “현재 미국과의 관계도 북중관계도 상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한국이 약한고리”라며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긴장완화의 필요성이 있고, ‘보수’정부가 아니라는 표현처럼 새로운 집권세력에 일말의 기대 내지는 가능성을 본 것”이라고 풀이했다.
한반도 군사적 긴장, 평창올림픽으로 돌파
김 위원장은 전환점의 매개로 북한의 ‘공화국 창건 70돌 대경사’와 남한의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를 부각시켰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북남 사이의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적 환경부터 마련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북과 남은 정세를 격화시키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며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며 남측에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두어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들을 거둬치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미연합군사연습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배치를 중지하라는 요구다.
또한 “미국이 아무리 핵을 휘두르며 전쟁도발 책동에 광분해도 이제는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억제력이 있는한 어쩌지 못할 것이며, 북과 남이 마음만 먹으면 능히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긴장을 완화시켜 나갈 수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한미합동군사연습 연기를 미국에 제안해 미측도 이를 수용, 사실상 발표만을 남겨둔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우리는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사실상 당국회담을 제안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북측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직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북측은 공식 참가신청 기간 내에 신청을 하지 않자 북측이 상황을 지켜본 뒤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대회를 한달여 앞두고 김 위원장이 전격 대표단 파견과 당국회담을 제안한 것.
평화3000 운영위원장인 박창일 신부는 “평화올림픽을 줄기차게 외쳐온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화답한 것”이라며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의 육로 방문과 ‘남북 평화콘서트’ 개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회담을 빠른 시간내에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석회의 70주년, “대화와 접촉, 래왕의 길을 열어놓을 것”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교류를 강조해 주목된다. “북과 남사이의 접촉과 래왕, 협력과 교류를 폭넓게 실현하여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통일의 주체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며 “남조선의 집권여당은 물론 야당들, 각계각층 단체들과 개별적인사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대화와 접촉, 래왕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여야 정당과 단체, 개별인사들의 접촉과 왕래를 언급한 것은 올해가 1948년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70주년인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6.15민족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남북해외 제정당.단체.개별인사들의 연석회의 준비위원회(추진기획단)’은 2016년 12월 중국 선양에서 실무접촉을 갖고 ‘조국의 평화와 통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전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고, 지난해 전민족대회(평화통일민족대회) 개최를 줄곧 추진했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돼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소식을 듣고 고무적인 생각을 하게 됐다”며 “대단히 환영할만한 제안이고 우리 정부도 상응하는 입장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창복 의장은 “우리가 추진했던 ‘남북해외 제정당.단체.개별인사 연석회의’ 방법 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 성격의 접촉과 회의 과정에서 새로운 교류와 협력 방안이 도출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은 또한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자극하면서 동족간의 불화와 반목을 격화시키는 행위들은 결정적으로 종식되여야 한다”며 “남조선당국은 지난 보수‘정권’시기와 다름없이 부당한 구실과 법적, 제도적장치들을 내세워 각계층 인민들의 접촉과 래왕을 가로막고 련북통일기운을 억누를것이 아니라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도모하는데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짚었다.
이전 보수정권들과 똑같이 전방지역에서의 확성기 방송 등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대북 접촉과 방북 등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요구다.
김 위원장은 “남조선당국은 북남관계문제를 외부에 들고다니며 청탁하여야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히려 불순한 목적을 추구하는 외세에게 간섭의 구실을 주고 문제해결에 복잡성만 조성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북과 남이 마주앉아 우리 민족끼리 북남관계 개선문제를 진지하게 론의하고 그 출로를 과감하게 열어나가야 할 때”라고 제시했다. 6.15공동선언의 핵심인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실천하자는 제안인 셈이다.
아울러 “나는 이 기회에 해내외의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다시한번 따뜻한 새해인사를 보내면서 의의깊은 올해에 북과 남에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인사까지 덧붙였다.
북측의 최고지도자가 올해 남북관계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까지 했으니 북측은 이 기조하에 당국과 민간을 불문하고 적극 대화와 접촉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우려에 비해서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유화적인 조치를 담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 정부 하기에 달린 것 같다”고 평하고 “한국 정부가 4월까지 시간을 벌었으니, 평화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핵단추가 내 사무실책상우에 항상 놓여있다”
김 위원장은 전문가들의 관측대로 ‘국가핵무력완성’을 지난해 성과로 꼽았고, “미국은 결코 나와 우리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오지 못한다”고 호언했다.
구체적으로 “지난해에 우리는 각종 핵운반수단과 함께 초강력열핵무기시험도 단행함으로써 우리의 총적지향과 전략적목표를 성과적으로,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으며 우리 공화국은 마침내 그 어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써도 되돌릴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미국본토전역이 우리의 핵타격사정권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책상우에 항상 놓여있다는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국가 핵무력 완성’의 결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핵타격 사정권에 두고 자신의 결심에 따라 언제든지 타격할 수 있다는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전체 인민이 장구한 세월 허리띠를 조이며 바라던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틀어쥐였다”며 “당의 병진로선과 과학중시사상의 정당성과 생활력의 뚜렷한 증시이며 부강조국건설의 확고한 전망을 열어놓고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필승의 신심을 안겨준 력사적장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올해의 과제로 “핵무기연구부문과 로케트공업부문에서는 이미 그 위력과 신뢰성이 확고히 담보된 핵탄두들과 탄도로케트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나가야 한다”면서 “적들의 핵전쟁책동에 대처한 즉시적인 핵반격작전태세를 항상 유지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당부했다.
이 외에도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지난해에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수행에서도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고 총화하고 올해의 구호로 ‘혁명적인 총공세로 사회주의강국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자!’를 제시했다. 특히 “인민경제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강화하고 인민생활을 개선향상시키는 것”을 주요하게 내세웠다.
김 위원장은 “당조직들이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온갖 잡사상과 이중규률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고 당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일심단결을 백방으로 강화하여야 한다”며 “전당적으로 당세도와 관료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업방법과 작풍을 뿌리빼는데 모를 박고 혁명적당풍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을 강도높이 벌려 당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련계를 반석같이 다져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조직 내부의 사상투쟁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지난해 연말 당 제5차 세포위원장대회에서 김 위원장이 ‘당세포를 충성의 세포, 당정책관철의 전위대오로 강화하자’고 호소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 소장은 “비사회주의 현상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지만 일방적인 통제나 단속보다는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힘으로 누르겠다고 했다”고 짚고 “세도라든가 부정부패 등은 거론됐지만 최근 몇 년 보다는 강도가 낮아진 것은 아마 지난 연말 당세포 대회에서 결속지은 영향이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추가, 16:16)

반도의 봄, 통일이 오는 길

반도의 봄, 통일이 오는 길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28)
▲사진 : 뉴시스
1. 반도의 봄
우리에게 통일은 과연 언제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갈망한다. 허나 보통 사람들의 통일 체감온도는 아직 낮고 멀게 느껴진다. 통일을 달리 말하면 오랜 ‘분단체제’가 허물어지는 것인데,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분단체제는 여전히 겨울얼음처럼 견고하고 강하기 때문이다.
새 기운이 찬바람을 밀어내며, 강 밑에선 얼음이 깨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계절이 완연해지기 전까진 그 변화를 잘 알 수 없다. 봄을 느끼려면 기운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도의 거대한 계절이 돌고 돌아, 새로운 문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시대를 지나 식민보다 길었던 분단, 불평등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새 청춘세대와 함께 우리는 통일시대로 가고 있다. 이 힘을 돌려세울 물리적 반동의 힘, 영원할 것 같던 제국의 힘도 기력을 거의 다 소진했다. 새 세대는 ‘77만원 세대’가 아니라 꿈에도 소원인 ‘통일세대’이다.
통일은 남북, 해외 온 민족 구성원의 노력으로 전진한다. 여전히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이 글은 평화적 방법을 중심으로, 남측의 통일운동보다 북-미간 대립과 상호 전략 변화를 중심으로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전망해보려 한다.
2. 미국의 ‘현상유지 전략’과 ‘2개 한국’ 정책(Two Koreas policy)
주변국들 모두가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상식이다.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미국도 통일된 한반도를 원치 않는다. 이들 나라가 원하는 것은 ‘현상유지’이다. 즉 남과 북에 분단 상태가 지속되거나 아예 영원히 2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살기를 원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 남과 북이 합쳐 통일된 강국이 새롭게 출현하는 것을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강력히 반대하는 세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이다. 주변국이 모두 반대해도, 민족 내부와 한국 내부에 강력한 통일세력이 존재한다면 통일 가능성은 열리기 마련이다. 한국 정치권 내부에서는 어떤 통일을 원하며, 실제로 통일을 위해 진정성을 갖고 움직이는 정치세력은 누구일까? 한국 수구보수세력은 통일 문제도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과 입장이 같다. 이들은 분단체제의 기득권 세력이며 분단을 지지하는 ‘통일 알레르기’세력이다. 이른바 안보, 종북, 반북 프레임으로 70여년을 유지해온 사실상 분단유지 정치세력이다. 이들이 선호하는 통일론이 있다면, 그것은 북이 붕괴하길 바라는 흡수통일이거나 미국이 주도하는 북진통일이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중도정치세력은 통일을 원하는가? 그들이 원하는 통일은 미국과 다른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의 통일론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 체제전복이나 붕괴를 기본으로 삼아 대(對)한반도 정책을 수립했다. 이른바 70년 대북 적대정책이다. 대북 적대정책의 한 방도가 평화협정을 거부하며 남북 정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의 붕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협상’의 방법으로 남과 북을 영구히 분리해버리는 남북 영구분단 전략이다. 일종의 후퇴전략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미국의 ‘2개 한국’(Two Koreas) 정책이다.
민주당이 평화를 희망하지만 그들이 선호하는 통일방식은 2개의 현존하는 남, 북의 국가를 서로 인정하고 마치 일본과 그런 것처럼 교류하며 살아가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이를 정치 용어로는 두 국가 사이의 ‘국가연합’이라고 한다. 이 역시 미국의 오래된 ‘2개 한국 정책’과 맥락을 같이한다. 결국 남과 북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2개의 국가로 굳어지는 것이다. 분단의 유지이지 통일이 결코 아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2개의 연합국가는 과도적이라면서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통일될 것이라고 말한다.
3. 북의 통일전략 변화, 4차 당대회와 7차 당대회
그러면 북은 어떠한가? 북이 통일문제에 더 적극적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북은 분단 70여년을 보내며 견지해온 통일방식에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조선) 전쟁 이후 가장 큰 변화상은 북미, 남북 간에 장기적 대치상황이 예견되는 것이었다. 전후 불과 7년 만에 발생한 남한의 4.19혁명을 보며 북은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했다. 북 노동당 4차 대회의 통일노선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였다.
1961년 9월 개최된 제4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 인민들이 반제·반봉건투쟁을 성과적으로 진행하며 이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며,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인민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 당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북한(조선) 민주기지론에 더해 남한 민주화, 남한 혁명에 의한 장기적 통일노선을 기본노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후 6~70년대 남한 내에 지하당 또는 진보정당을 만들려는 시도와 이를 깨고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간첩’을 만들려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사건조작이 뒤엉켜 통일혁명당, 인민혁명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진 : 로동신문 홈페이지
또 한 번의 커다란 통일정책 변화는 1990년대 초 동구권 사회주의와 소련 붕괴 이전부터 있었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비밀리에 추진한 핵과 미사일 개발노선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핵무력 개발은 미국의 체제 전복과 핵전쟁 위협에 맞서 북 체제를 유지할 군사적 담보인 핵 억제력을 확보하는 게 1차적 목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서는 핵과 미사일로 미국의 대한반도 영향력과 지배력을 끊어내겠다는 통일전략 구상이 장기전략으로 당시부터 이중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조국통일 방략의 무게중심이 ‘선(先) 남조선 혁명 통일론’에서 남측 혁명역량이 부족해도 북미 핵 대결과 대미 직접 타격역량 증강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파격적 전략이 장기적으로 추진된 것이다. 지난 2016년 30년 만에 열린 7차 당 대회에서 확인된 변화된 통일전략은 사실 지난 3~40년 동안 비공개로 추진해온 핵과 미사일 전략을 공개하고 재정리한 것이다. 김정은 시대의 통일노선으로 정식화하면서 말이다.
4. 코리아 핵과 통일 문제의 국제적 지위와 성격 변화
베트남 통일은 미국에게 충격과 패배를 안겨준 국제적 사건이다. 한반도 통일문제 역시 1990년대까지만 해도 베트남 통일 정도의 충격파에 비견되는 지역적 국제문제였다. 그런데 오늘날 북미 대결과 한반도 통일문제는 과거 베트남 통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한반도 문제는 이미 미국중심의 세계질서를 흔드는 거대한 국제현안이 돼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조선)이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적인 큰 문제”라며 연일 북의 위협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조선)의 핵무기프로그램이 “가장 절박하고, 위태로운 위협”이라고 말했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2017년 국제 안보 현안 가운데 최대 변화로 북 문제를 꼽았다. 북의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 이후 신임 마이클 팰런 영국 국방장관은 북핵 ‘런던 위협설’을 제기했다.
최근 북의 핵전략에서 더 놀라운 점이 발견되고 있다.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핵보유국 지위나 대미 핵억제력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과 실제적인 핵 균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미국과의 핵군축을 현실적 목표로 핵 기술과 무력을 계속 증강시키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것이 7차 당 대회와 ‘병진노선의 최종목표’라고 공식 보도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과 핵 경쟁을 시도하는 반제반미 국가가 다시 출현한 것이다. 북은 핵전략의 1차 목표에서 2차 목표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2차 목표의 종착역은 한반도 통일과 미‧중‧러 등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확고부동한 국제적인 정치군사적 지위 확보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북의 핵무력 완성으로 실제 미국의 대북 전쟁개시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아니 거의 불가능해졌다. 핵을 가진 나라를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국제 현실이다. 북이 또 짧은 기간에 미‧중‧러를 압도하는 핵과 미사일 기술을 질량적으로 계속 개발할 경우 미국에겐 냉전시기 ‘평화공존’을 추구하던 구소련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끔직한 재앙이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편에 서서 20여 년 동안 북핵을 반대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자기네보다 빠르게 더 높은 수준의 핵 기술과 전략자산을 자력 증강해가는 북한(조선)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게 그들의 속사정이다.
5. 지난한 북-미 비밀 비공개 협상 과정
오바마-트럼프로 이어지는 대북 적대정책 가운데서도, 지난 11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2~3개 채널이 열려있다”는 발언대로 북-미 비밀협상은 계속 있었다. 협상의 주요 내용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에 흘러나왔다. 이 비밀협상 또는 이른바 ‘반관반민(半官半民. 1.5트랙)’ 채널의 주요 흐름을 읽으면 차후 진행될 북미 평화협정의 내용을 예상할 수 있다. 뉴욕 채널과 쿠알라룸푸르, 제네바, 오슬로 등지에서 비록 비공개지만 미국이 더 후퇴한 평화협상 개시 조건과 가능성을 전환적으로 밝힌 것은 오바마 정부 말기다.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거다.
미국이 오바마 정부 시절 구상한 비밀 평화협상안은 북핵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평화협상이었다. 이들 협상안엔 앞서 설명한 대로 북 비핵화와 주한미군 지위변경 주둔, 즉 ‘2개 한국’ 유지 평화협상안과, 주한미군 철수가 포함된 더 후퇴한 비핵화 평화협상안 등이 있었다. 과거 9.19공동성명에서 실현하려던 방안과 유사하다. 만약 이것이 성사되었다 하더라도 한반도의 지각변동은 지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은 핵 포기와 연관된 어떤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정부 후반부터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9.19성명의 공식은 북의 핵무력 완성으로 현실에서 완전히 의미를 상실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는 죽은 자식 뭐 만지듯 9.19와 6자 회담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지만 북은 흘러간 옛 노래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북미협상의 최대 핵심 쟁점은 미국의 북 비핵화전략과 북의 핵 보유강화전략의 충돌이다. 한반도 평화협정과 핵문제는 같은 뿌리에서 산생했지만 별개의 문제이다. 북은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연계한 회담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비핵화 문제는 상호 군축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 발 더 후퇴해 북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한 북이 북-미 협상에 응할 가능성은 현재 전혀 없어 보인다. 미래의 평화협상의 내용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 협상이 지난하고 어려운 근본 이유이다. 싸움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바마 정부 말기부터 북미 핵 전쟁위기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공개든 비밀협상이든 세계가 이 세기의 협상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6. 평화협상과 통일은 동전의 양면
가까운 미래 진행될 북미 평화협상의 내용이 한반도 남북 정부와 정치권에 미칠 영향은 메가톤급이다. 아무런 연관성 없이 분리, 운영되던 남북 정치의 기존 틀이 해체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과 체제로 들어선다. 오래전 기억이라 우리는 남북의 경계선이 점차 사라져가는 정치를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지각변동이 남한 정치권, 즉 자유한국당, 더불어민주당, 민중당 등 정치세력의 재편과 몰락, 부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45년 해방 직후에 이어 두 번째 맞이하는 전 한반도 차원의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미국이 염두에 둔 평화협상안은 대략 아래의 3가지 수준과 형태로 보인다. 물론 미국의 기본적인 대한반도 정책은 협상자체를 무시하고 정전상태를 유지하는 오만한 ‘현상유지’ 전략이었다. 미국은 협상자체를 불가피한 후퇴로 인식하고 있었다. 평화협정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서로 주고받는 ‘균형교환 협상’과 승패가 명확한 ‘승리협상’(강화조약)이다.
1안) 북 비핵화 평화협정 ; 주한미군 주둔(평화유지군 지위변경)→ 남북 연합제(‘2개 한국’ 정책). 이는 필연적으로 완전한 북미 적대관계 해소로 나가지 못한다. 북미 수교도 평화협정과 분리해 시간차를 두고 진행될 수 있다. 베트남의 경우 미국과 수교는 1995년에 이뤄졌다. 북미 관계, 북한(조선) 상황, 남한 정권 교체에 따라 평화협정이 다시 깨질 수도 있다.
2안) 북 비핵화 평화협정 ; 주한미군 철수→ 남북 연합연방제(사실상 연방제)→ 북미수교. 이것은 과거 6자 회담과 9.19공동성명이 성실히 추진되었다면 가능했을 모델이다. 북은 핵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권리만 갖고 과거 핵무력을 폐기하고 추가 개발을 포기하며, 상응하여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방안이다. 미국이 이를 두려워한 이유는 이 평화협정과 6.15선언이 결합되면 한반도가 사실상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통일국가로 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을 잃는다고 본 것이다.
3안) 핵보유 평화협정(핵문제 분리 평화협정) ; 주한미군 철수→ 북미 적대관계 해소→ 즉각 북미수교 추진. 북의 핵보유 문제를 평화협정과 분리해 상호 비핵화, 상호 군축 문제로 다루는 원칙적 방법이다. 북이 평화협정에서 미국의 핵 존폐 문제를 다루지 않듯이, 미국도 북핵 문제를 별도 처리하는 방안이다. 절충적으로 북의 ‘과거 핵’을 인정하고 ‘미래 핵’을 동결하는 방안도 있다. 사실상 북 핵보유 인정 방안이다. 모든 게 미국이 패퇴하는 협상이다. 미국이 영원히 한반도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된다. 협상이라기보다 패배한 종전 처리과정에 가깝다.
평화협상은 본질적으로 남·북‧미가 한반도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다. 미국이 70여 년간 유지해 온 대북 적대정책을 중단하고, 말 그대로 상호 평화적 관계로 전환하는 문제이다. 이 협정 자체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통일은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앞서 본 것처럼, 통일의 주요 장애물이 이 협상을 통해 거의 제거된다. 따라서 평화협상 후 통일을 위한 남북 정치협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진행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평화협정은 우리시대 통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사진 : 뉴시스
7. ‘미치광이 전략’의 끝과 미국의 혼돈
미국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어쩌면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최대의 압박과 관여전략)은 미칠 지경인 미국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협상도, 전쟁도 답이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 들어 최소한 표면적으로 공고해 보이던 미국의 대북정책은 크게 금이 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 행정부, 의회의 대북정책도 일대 혼란이다.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오락가락 대북정책의 연속이다. 지난해 10월 미 의회에선, 의회 동의 없는 대통령의 대북 선제 핵공격 결정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틸러슨 국무장관, 맥마스터 안보보좌관 등 권력 핵심들의 불화와 엇박자도 언론에 여과 없이 노출되고 있다.
지난 70년 대북 적대정책의 결과는 한마디로 “미국이 졌다”는 게 미국 주류 정치권의 솔직한 자평이자 흐름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1월29일자에 “북미대결은 이미 끝났다. 북한(조선)은 이미 핵무장 국가다”는 제프리 루이스의 주장을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앞서 8월8일자에 “이제는 북한(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 할 때”라는 그의 기고도 실었다. 권위 있는 정치잡지 포린 폴리시는 “게임은 끝났고 북한(조선)이 이겼다”고 했다. 지난달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은 핵 국가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놀라운 변화다.
과거 수십 년간 대북정책에 관여했던 주요 전문가와 인사들(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 윌리암 페리 전 국방장관, 북미 제네바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 핵전문가 지크프리트 해커, 제임스 울시 전 CIA국장,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도 즉각 협상을 주문하고 있다. 최근 틸러슨 국무장관이 들고 나온 “조건 없는 북미대화”는 쇼로 끝났으나 결코 우연히 제기 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은 사실 오래 갈 수 없는 고육책이다. 미치광이 전략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숨어있는 것은 ‘승전’이기보단 미국에 유리한 협상전략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트럼프가 제 임기를 마칠지조차 비관적이다. 미국이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을 얼마나 더 유지하고 버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망조를 자초하든 위기를 해소하든 미국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더 패퇴한 협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바로 2018년에 그런 방향전환이 이뤄진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8. 중단 없는 2018년과 시대정신
크게 보면, 해방 후 치열하게 전개돼온 한국사회변혁 경로와 조국통일 경로의 선후 순서가 바뀌고 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평화협정 국면이 열린다 해도 통일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화협정은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할 뿐이다. 통일의 방향, 속도와 질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이기 때문이다. 통일의 목적은 하나의 절멸이 아니라, 민족의 공동번영과 하나의 나라로 남과 북이 상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미 반전평화운동, 평화협정 촉구운동, 자주통일운동의 변화 흐름을 주체적으로 읽고 임해야하는 이유이다.
지난 2017년 북미관계는 매우 격렬했다. 그러나 2018년 북미관계는 더욱 더 격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이상, 북미 대결은 세계사에 보기 드문 ‘끝장 대결’로 치달을 것으로 예상된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북이 2018년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평창올림픽 참가 용의를 전격적으로 밝혔다. 문제는 미국의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정책 변화인데, 미국이 훈련 연기로 대응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자주통일’이 한국 진보만의 오랜 고민과 숙제인 시대도 이제 지나고 있다. 한국 정치권은 주요한 시기에 미국을 무조건 따라가는 망국적 한국 주류학계와 언론의 함정을 경계해야한다. 특히 민주당과 정부는 6.15공동선언과 그 정신을 견지하고 미국의 낡은 ‘2개 한국 정책’에 기대지 말아야한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냉엄한 국제정세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하며, 북의 전략과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북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돌아가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촛불정신 계승과 자주통일은 결코 돌려세울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이정훈 국제팀장  webmaster@minplus.or.kr

통일국가건설 1082주년,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

[개벽예감280] 통일국가건설 1082주년,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1/01 [22:18]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1082년 전에 등장한 통일국가 고려의 위용
2. 1012년 역사를 파괴한 1948년 분단체제 
3. 민간인 165만7,000명이 희생된 참극과 재난
4. 민족대표 695명이 모란봉극장에 모였다
5.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정치대결

▲ <사진 1> 위쪽 사진은 왕씨 가문 족보에 나오는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이다. 개성에 사는 왕건의 31대손 왕지송 노인은 왕씨 가문에서 수 백 년 동안 소중히 보관해오던 가문 족보와 왕건이 사용하였다는 옥새를 들고 1992년 9월 개성시당위원회를 찾아가 그 족보와 옥새를 김일성 주석께 드린다고 하였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왕건릉을 몸소 돌아보고, 그 릉을 훌륭히 개건하여 통일국가 고려를 건설한 왕건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고 지시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지송 노인은 너무 감격하여 족보와 옥새를 김일성 주석께 드린다고 하였던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의해 훌륭히 개건된 왕건릉이다. 918년에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사적 위업을 마침내 완수하였다. 통일국가 고려를 건설한 것은 반만년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1082년 전에 등장한 통일국가 고려의 위용  

2018년은 통일국가건설 1082주년,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 뜻깊은 새해의 첫날, 반만년 민족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통일국가건설역사와 통일국가건설운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조 왕건이 통일국가를 건설한 해는 936년이다. 918년에 고려를 창건한 그는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사적 위업을 완수하였다. 왕건이 통일국가 고려를 건설한 것은 거대한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 대사변이다. 그 의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단순히 통일국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천년강국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점에서 거대한 의의를 지닌다. 고려라는 나라이름 자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국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진 1>

첫째, 통일국가 고려는 고구려의 첫 계승국이었던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켰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강역에서 698년에 창건되어 926년까지 존재했던 동방대국이다. 고려가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통일국가 고려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로 확립하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추종하였고,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결하였으므로, 고려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로 확립한 것은 민족의 자주성을 첫 통일국가의 기초로 마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 통일국가 고려는 이전에 고려의 국경선으로 알려졌던, 압록강 하구에서 강원도 원산을 잇는 선을 훌쩍 뛰어넘어 발해의 드넓은 강역을 자국 영토로 포괄하였다.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경로를 확립하였으므로, 발해의 강역을 자국 영토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윤한택 연구교수가 요나라 역사서 ‘요사(遼史)’와 ‘고려사’를 대조하여 연구한 내용을 2017년 5월 26일에 발표하였는데, 그는 옛 문헌들에 고려의 서북방 국경선으로 기록된 압록은 오늘의 압록강이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에 흐르는 랴오허(遼河) 지류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2017년 11월 17일 러시아 과학원 고고학자들은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고려의 유적과 유물들이 최근 연해주에서 발굴되었다는 정보를 공개하였다. 이런 새로운 사실들은 통일국가 고려가 서북방으로는 압록강을 넘어 요하 인근까지, 그리고 동북방으로는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강역에 세워진 동방대국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통일국가 고려는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고, 오늘의 개성인 송악을 수도로 삼았으며, 천자국(天子國)으로 자처하였다. 천자는 곧 황제이므로, 천자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통일국가 고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고, 천자국으로 자처한 것은, 세계문명중심에 천자국 중국이 있고, 그 변방에 미개한 네 무리의 오랑캐들과 여덟 무리의 야만족들이 있다고 보았던 이른바 사이팔만(四夷八蠻) 천하관(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천하관을 정립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92년 10월 개성 인근에 있는 왕건릉 개건공사장에서 땅을 파던 굴착기 삽날에 걸려 출토된 특이한 청동유물이 있다. 그 유물은 의자에 앉은 청동좌상이었는데, 큰 귀, 가늘고 긴 손가락, 사각형에 가까운 발, 평평한 발바닥을 가진 벌거벗은 형상이었다. 출토될 때, 그 나신청동상에는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청동좌상은 금으로 장식한 옥대 장식물이 함께 출토되는 바람에 고려의 불상이 아니라 왕건의 청동좌상으로 고증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건의 청동좌상은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통천관(通天冠)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왕건의 통천관은 중국의 황제들이 쓰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건의 통천관에는 태양을 표상하는 8개의 동그란 장식물들이 달려있는데, 이런 장식물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통일국가 고려가 자주성을 건국기초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92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 왕건릉 개건공사장에서 땅을 파던 굴착기 삽날에 걸려 출토된 왕건 청동좌상의 얼굴 부분을 촬영한 것이다. 이 청동좌상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형상되었는데, 큰 귀와 가늘고 긴 손가락, 사각형에 가까운 발과 평평한 발바닥을 가진 나신좌상이다. 출토될 때, 그 나신좌상에는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진에 나타난 왕건의 청동좌상은 천자(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통천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왕건의 통천관에는 태양을 표상하는 8개의 동그란 장식물들이 달려있는데, 이런 장식물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에서 찾아볼 수 없다. 통일국가 고려는 자주성을 건국기초로 삼은 천자국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셋째, 통일국가 고려의 건설은 우리 민족이 사상 처음으로 통일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동질의식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주 먼 옛날 아사달에서 단군조선이 개국된 이후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온 민족의 동질성을 공고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우리 민족은 통일국가 고려가 건설되었던 936년부터 1948년까지 1012년 동안 통일국가 안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강화, 발전시키며 함께 살아왔다. 1012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분단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했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1910년 일제는 974년 동안 우리 민족의 존립거점으로, 생활터전으로 되어왔던 통일국가를 무력으로 강탈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일제의 악독한 식민통치를 받았지만, 남북으로 갈라지지는 않았다. 


2. 1012년 역사를 파괴한 1948년 분단체제 

미국의 분할점령정책과 단독정부수립정책에 의해 한반도에 세워진 것이 1948년 분단체제다.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에 따라 북위 38도선이 분단선으로 고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의 열망을 짓누르면서 남조선단독선거가 강행되었으며, 그 선거결과에 의거하여 남조선단독정부가 출현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들춰낼 필요가 있다.

(1)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밑에서 부관으로 복무했던 에드워드 로우니(Edward L. Rowny)는 2013년 6월에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 ‘미국 병사의 코리아전쟁 무용담(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에서 1945년 8월 초 미국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회의에서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앤드루 굿패스터(Andrew J. Goodpaster)를 비롯한 영관급 장교들이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으로 분할점령하자고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직속상관인 죠지 링컨(George A. Lincoln)은 북위 38도선으로 분할점령하자는 주장을 관철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만주전투에서 일제관동군을 제압한 소련군이 한반도를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한 미국이 허겁지겁 북위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획정하였다는 기존 정설을 뒤엎는 것이며, 미국이 한반도분할점령을 오랜 시간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검토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3> 

▲ <사진 3>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점령군으로 들어간 미국군은 일제의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일제가 조선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던 바로 그 건물에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내걸었으며, 점령군 군사정부를 세우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위쪽 사진은 성조기를 게양한 미국 점령군 군사정부 청사의 모습이다. 점령군 군사정부는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분할점령정책을 실시하였다. 아래쪽 사진은 미국 점령군 병사들이 개성 인근 38도선의 남북통행로에 초소를 세워놓고 경비를 서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은 1947년 5월 25일에 촬영되었다. 미국은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폭력으로 짓누르고, 한반도분할점령정책과 남조선단독정부수립정책으로 고려의 통일위업달성 이후 면면히 이어져온 1012년 역사를 무참히 파괴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45년 11월 20일 당시 점령군 군사정부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John R. Hodge)의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은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단독정부수립구상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직후부터 단독정부수립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명백하게도, 미국은 1000년 통일국가를 계승하여 새로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 민족의 투쟁과 노력을 분할점령과 단독정부수립으로 좌절시키고 1948년 분단체제를 세웠던 것이다. 

1947년 8월 26일 미국군 수송기 한 대가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수송기 출입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당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앨벗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였다. 중국을 방문한 뒤 서울에 나타난 웨드마이어 특사는 서울 방문을 마치고 일본 도꾜를 거쳐 워싱턴으로 돌아갔는데, 중국 및 남조선 시찰활동을 정리한 장문의 보고서를 1947년 9월 9일 트루먼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정책을 확정하는 데서 결정적인 요소로 되었다. 그 보고서에 제시된 권고사항이 눈길을 끄는데, 그 부분을 번역,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에서 미국의 철수는 소련의 비례적 철수에 영향을 주는 합의에 근거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담보조치들과 함께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적절한 담보조치들이 시행되는 것을 지지하고, 예상하는 남조선에 군사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 조선국립경찰과 조선해안경비대에 무기와 장비를 계속 제공한다.
- 북의 위협에 대처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미국군이 지휘하는 조선정찰군(Korean Scout Force)을 창설하여 현존 경비대를 대체한다.
- 조선에 대한 미국군의 임시점령(interim occupation)을 계속한다. 
- 기술전문인력과 전술부대들의 훈련에 조언을 준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47년 9월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에서 미국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그에 대비한 조치들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철군에 대비한 조치라는 것은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담보조치들”이다. 웨드마이어 보고서는 그 담보조치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지만, 역사자료를 읽어보면, 트루먼 행정부가 아래와 같은 담보조치들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미국은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해결하려던 기존 전략을 포기하고, 그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 왜냐하면 집권야욕에 사로잡혀 정세를 오판한 남조선 우익세력이 모스크바 삼국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바람에 그 세력을 앞세워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계획추진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친미반소성향을 지닌 우익세력을 내세워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전략구상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자, 그 위원회를 깨버리고 자기의 전략구상을 유엔무대에서 실행에 옮기려고 획책한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받아본 날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현저하게 남아있지만, 1947년 당시 유엔은 미국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가면 미국이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2) 미국은 한반도분할점령에 계속 집착하였다. 미국군은 38도선 이남지역에 진주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그 지역의 공식명칭은 남조선이었다.) 명백하게도, 그들은 남조선주둔군이 아니라 남조선점령군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의 공식문건들에서 남조선주둔군이라는 용어는 찾을 수 없고, “남조선점령군(occupation force in South Korea)”이라는 용어만 나온다. 미국은 그 점령지에 군사정부를 세우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점령군 군사정부는 8.15 직후 남조선 각지에 건설된 모든 인민위원회를 폭력으로 제거하였고, 친미반소의 옷으로 갈아입고 변신한 부일반민족세력이 주도하게 될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광분하였다. 하지만 점령군 군사정부의 그 전략수행은 진보정치세력의 반대와 민중의 저항에 부딪쳐 그들이 예상한 대로 순탄하게 추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점령군 군사정부는 진보정치세력을 제거하고,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부와 경비대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정은 아래와 같다. <사진 4> 

▲ <사진 4> 백악관의 한반도분단정책을 현지에서 집행한 점령군 군사정부는 남측 각지에 건설된 모든 인민위원회를 폭력으로 제거하였고, 부일반민족세력이 주도하게 될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광분하였다. 점령군 군사정부의 그런 전략수행은 진보정치세력의 반대와 민중의 저항에 부딪쳐 순탄하게 추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점령군 군사정부는 진보정치세력을 제거하고 민중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부와 경비대를 증강시켰다. 남조선경찰부를 확대, 개편한 한국 경찰청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정규군으로 확대, 개편한 한국군은 1950년 6.25전쟁 직전부터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후까지 남측 전역에서 113만명의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위쪽 사진은 미국군 장교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현장에서 한국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1950년 7월 한국군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학살한 사진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45년 10월 21일 점령군 군사정부는 일제강점기 경무부에 소속되었던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아 남조선 각 도에 경찰부를 설치하였고, 이듬해에는 그것을 경찰청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1월 15일 점령군 군사정부는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으고 광복군 출신자 몇 사람을 끌어들여 1개 연대 규모의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는데, 1948년 8월 15일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할 때 그 경비대를 정규군으로 개편, 증강시켰다. 
점령군 군사정부가 부일민족반역자들을 긁어모아 창설하였고, 미국산 무기로 무장시켜 지휘통제하였던 남조선경찰청→한국경찰청과 남조선국방경비대→한국군은 6.25전쟁 직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까지 남측 전역에서 진보적 민중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학살하였다. 1960년 10월 20일에 결성된 전국피학살유족회가 당시 민주당 정부에 제출한 공문에 따르면, 자기 가족이 학살당했다고 신고한 피학살자 총인원은 남측 전역에서 113만명이었는데, 이를 지역별로 보면, 경상남도 25만명, 경상북도 21만명, 전라남도 21만명, 전라북도 19만명, 제주도 8만명, 경기도 6만명, 충청북도 5만명, 충청남도 3만명, 강원도 3만명, 서울 2만명이었다. 


3. 민간인 165만7,000명이 희생된 참극과 재난

점령군 군사정부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지휘통제하였으며, 경비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면서 무력을 체계적으로 증강시켰다. 웨드마이어 보고서에 따르면, 점령군 군사정부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무력을 증강시키는 목적은 “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놓고 봐도, 미국은 7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무력을 증강하는 구실로 ‘북의 위협’을 내세워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점령군 군사정부가 추진해온 남조선국방경비대 무력증강에 따라 그 경비대가 한국군으로 확대, 개편된 것에 한껏 고무된 이승만 정부는 무력으로 북을 점령하려는 이른바 ‘북벌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7월 17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대한청년단 훈련장에 나타나 연설하면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49년 10월 7일 이승만은 <UP통신> 회견에서 “나는 우리가 3일 안으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주와 한국의 국경은 38선보다 방어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5>

▲ <사진 5> 미국은 단독정부수립정책에 따라 점령군 군사정부와 이승만을 앞세워 남조선단독정부를 세웠다. 위의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서울에 있는 점령군 군사정부 청사 앞마당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최고 귀빈으로 참석한 미국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한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맥아더와 이승만은 이른바 '북벌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국군의 무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승만 정부의 ‘북벌정책’ 뒤에는 당시 일본-남조선 점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버티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20분 중앙청 앞마당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축하연설에 최고 귀빈으로 나선 맥아더는 “정의의 군대가 용진하는 이 시각, 그들의 승리는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인위적 장벽과 분단으로 무색해졌다”고 하면서 “이 장벽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며, 무너질 것이다. 자유국가에서 살게 된 자유로운 한국인들의 궁극적인 통일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북벌정책’의 실질적인 추진자가 맥아더 자신이었음을 드러내준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1948년 분단체제를 수립해놓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북벌정책’까지 추진하였으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이 한반도에 그어놓은 분단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남측 시각에서 보면, 분단선은 대한민국과 그 북반부지역인 ‘북한’을 갈라놓은 것이고, 북측 시각에서 보면, 분단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남반부지역인 ‘남조선’을 갈라놓은 것이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국가로 양립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는 오직 하나의 국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국가는 어떤 나라인가? 남측에서는 대한민국이 유일국가라고 하고, 북측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유일국가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다른 한 쪽은 국가가 아니면서도 국가를 참칭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남측에서는 북측을 ‘반국가단체’라고 부르고, 북측에서는 남측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 그리고 국가가 아니면서도 국가를 참칭하는 집단 사이의 대립과 충돌은 결국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극과 재난이 닥쳐왔다. 1012년 동안 함께 살아온 단일민족이 ‘한국사람’과 ‘조선사람’으로 갈라져 싸우면서 서로 죽이고 죽였고, 미국군은 조선사람을 죽였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6.25전쟁 중에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파괴된 평양의 모습이다. 얼굴에 부상을 당한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 사이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이들은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6.25전쟁에서 민간인 사망자를 추산하면, 남측에서 24만5,000명이 죽었고, 북측에서 28만2,000명이 죽었으니, 민간인 57만7,000명이 희생당한 것이다. 우리 민족을 그런 참극과 재난 속에 빠뜨린 원흉은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짓누르고, 1948년 분단체제를 수립해놓은 미국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누구도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으나, 6.25전쟁에서 군인 전사자를 제외하고 민간인 사망자만 추산하면, 남측에서 24만5,000명이 죽었고, 북측에서 28만2,000명이 죽었으니 민간인 사망자는 총 52만7,000명이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6.25전쟁 직전부터 정전협정 체결 직후까지 남측에서 민간인 113만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대량학살을 명령한 미국군 고위지휘관들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 한국 정부 고위관리들과 한국 경찰 고위간부들은 요즈음 같으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어야 하였으나, 그들이 되레 피학살자 유족들을 처벌하는 정치탄압을 자행하였다.    
전쟁 3년 동안 군인을 제외하고 민간인만 165만7,000명이 희생당했으니, 이보다 더 끔찍한 참극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가혹한 재난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민족을 그런 참극과 재난 속에 빠뜨린 원흉은 분할점령과 단독정부수립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짓누르고, 1948년 분단체제를 수립해놓은 미국이다.   

6.25전쟁으로 더욱 굳어진 1948년 분단체제는 마땅히 자주적 발전을 위해 분출되어야 할 민족역량을 언제나 분열과 대결에 소모하도록 강제하였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의 의지와 지향을 끊임없이 도려내었다. 우리 민족이 단일한 언어와 혈통, 단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운명공동체로서 존립하고 발전하려는 의지와 지향을 끊임없이 도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1948년 분단체제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 생명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가장 험악하고, 가장 해악적인 요인이 아닐 수 없다.


4. 민족대표 695명이 모란봉극장에 모였다

1948년 당시 우리 민족에게 들이닥친 사태는 너무도 긴박하고 위중하였다. 점령군 군사정부와 이승만을 앞세워 단독정부수립을 집요하게 획책한 미국은 1948년 5월 10일을 선거일로 정해놓고, 선거준비사업을 강행하였다. 고려의 통일위업달성 이후 면면히 이어진 1012년의 민족사가 파괴되고, 통일국가건설운동이 좌절될 절체절명의 위기가 우리 민족의 보전과 존립을 시시각각 위협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남조선단독선거와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강행하려는 미국과 맞서 싸우며 기어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민족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그 운동의 정점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가 있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 5분 평양에 있는 모란봉극장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56개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1948년 4월 19일 평양에 있는 모란봉극장에서 개막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주석단을 촬영한 사진이다. 김일성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하여 전조선인민은 단결하자!'는 구호가 내걸렸고, 한반도 지도 옆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남북연석회의가 진행된 시점에는 남북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이었으므로, 아직 국기를 공식 제정하지 못한 터라 북조선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사용하였던 태극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한반도분단정책을 파탄시키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민족적인 투쟁의 고귀한 결실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는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한반도분단정책을 파탄시키고, 고구려→발해→고려→근세조선으로 이어진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민족적인 투쟁의 고귀한 결실이었다. 이 위대한 민족사적 과업을 실현하는 투쟁에 민족구성원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적극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익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김구 한국독립당 대표와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대표는 남북연석회의에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김구는 4월 20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김규식은 4월 22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남북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줄곧 밖에서 맴돌았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모란봉, 영천암, 만경대, 혁명자유가족학원을 방문하였으나, 회의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소련군 연해주관구 25군사령부 군사위원이었던 니꼴라이 레베데브(Nikolai G. Lebedev)가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김구는 “나는 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구는 4월 22일 회의 셋째 날이 되어서야 남북연석회의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인 오후 12시 45분경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5분 동안 축하연설을 하더니, 곧바로 퇴장하여 자기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김규식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남북연석회의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나중에 축하연회에만 잠깐 나타나 축하연설을 하였을 뿐이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이튿날인 4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내가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대표들(그를 수행한 한국독립당의 다른 대표들-옮긴이)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구차한 변명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간 진짜 목적은 자기들이 바라던 남북요인회담(4인회담)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 두 우익정객은 왜 남북요인회담에만 집착하였을까? 원래 김구는 이승만과 손을 잡았었고, 김규식은 점령군 군사정부가 조작해놓은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 들어가 활동했었다. 하지만 김구는 단독정부수립야욕을 품은 이승만에게 이용당했고, 김규식은 단독정부수립음모를 꾸미던 점령군 군사정부에게 이용당했을 뿐, 우익정치세력 내부에서 극우파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그런 정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요인회담 추진이었다. 

늙은 우익정객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각계각층 민중들은 남조선단선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남북연석회의 방침에 따라 한반도 전역의 도, 군, 면에 남조선단선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남조선단선반대투쟁전국위원회는 이승만을 앞세운 점령군 군사정부의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격렬한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테면 남조선 각지에서 선거사무소 습격사건들, 경찰서 습격사건들, 공공시설물에 대한 파괴 및 방화사건들, 야간봉화시위들이 계속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단선반대총파업투쟁에 궐기하였고, 청년학생들은 단선반대동맹휴학투쟁에 궐기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점령군 군사정부는 단독선거를 준비하는 선거인등록을 1948년 3월 30일부터 강행하였다. 1948년 4월 12일 서울에서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는 선거인등록이 강제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일보>가 1948년 4월 15일에 보도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선거인등록에 참여한 사람은 934명(74%)이었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328명(26%)이었는데, 참여한 934명 가운데 850명(91%)은 강제로 등록하였고, 84명(9%)만 자발적으로 등록하였다는 것이다. 경찰, 시청, 동회, 선거위원회, 우익청년단, 초중등학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인등록을 강요하였다. 다른 사람의 도장을 갖고 가서 명부에 찍는 대리등록도 있었고, 있지도 않은 사람을 명부에 올려놓는 유령등록도 있었다. 이런 불법사례들은 선거인등록 자체가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위반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8> 

▲ <사진 8> 이 사진은 1948년 5월 10일 점령군 군사정부가 점령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전민족적인 반대와 저항을 짓누르고 강행한 남조선단독선거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남녀청년 5명은 남조선단독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대중투쟁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남조선 각지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단독선거반대투쟁에서 사망자는 128명, 중상자는 137명, 검거투옥된 사람은 5,425명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48년 5월 8일 점령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린 점령군 군사정부는 5월 10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하였다. 당시 언론보도는 “장총을 들은 경관, 곤봉을 들은 향보단원들이 길목마다 지켜 엄격한 경비를 섰고, 관공서, 각 학교, 상점, 음식점, 극장 기타 일체 신문사, 사회기관들은 설날처럼 문을 꼭꼭 닫고, 나다니는 길손도 미군 자동차 외에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무섭게 흐리터분한 하늘에 미군 비행기의 폭음소리가 한갓 고요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중략) 무장경관 70명, 사복경관 30명, 향보단원 등 물샐틈없는 경비전 속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선거현장의 공포분위기를 전하였다. 단독선거반대투쟁에서 사망자는 128명, 중상자는 137명, 검거, 투옥된 사람은 5,425명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되었으므로, 단독선거를 감시한다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전 세계 민주국가들이 공인한 선거원칙에 따라 단독선거를 무효화해야 하였지만, 미국의 추종국들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필리핀, 시리아, 엘쌀바돌, 대만, 프랑스가 파견한 친미대표들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은 미국의 단독정부수립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1948년 2월 12일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기 전,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단장 벤갈릴 메논(Bengalil K. K. Menon)은 서울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니, 그들은 결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극악한 망언은 늘어놓았다.   


5.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정치대결

1948년 남북연석회의 이후 오늘까지 장장 70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계속해온 통일국가건설운동의 대척점에 미국이 있다. 그 대척점에서 미국은 1948년 분단체제를 합법화, 영구화하려고 끊임없이 획책하고 있다. 지난날 미국의 분할점령정책과 단독정부수립정책은 오늘날 분단영구화정책과 대조선적대정책으로 전이되었다.  

미국이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 추구하는 목적은 군사분계선을 국경선으로 만들어 1948년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라는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방대한 핵전략자산을 투입한 전쟁연습을 계속하여 정세를 고의적으로 긴장시키고, 친미세력의 장기집권을 보장해줌으로써 1948년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1948년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면, 그 체제를 수립해놓고 유지, 관리하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켜야 한다.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이 존속되는 한, 1948년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킨다는 말은 미국과 전면적인 정치대결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 정치대결은 남북연석회의 역사를 계승한 전민족적인 통일국가건설운동과 그 운동을 짓누르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이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숙명적인 정치대결이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시작된 통일국가건설운동사에 어느덧 70년의 연륜을 새겨넣은 올해 2018년은 한반도 전역에서 자주통일을 열망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총단합하여 통일국가건설운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9> 

▲ <사진 9>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시작된 통일국가건설운동사에 어느덧 70년의 연륜을 새겨넣은 올해 2018년은 한반도 전역에서 자주통일을 갈망하는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총단합하여 통일국가건설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위의 사진은 2016년 8월 15일 서울 대학로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최로 열린 8.15 전국노동자대회의 한 장면이다. 대학로를 가득 메운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드배치 철회, 평화협정 체결,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을 요구한 거대한 함성은 그들의 통일열기만큼 강렬하였다. 선대들로부터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위대한 유업으로 넘겨받은 후대들에게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키고 기어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가 넘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948년 4월 23일에 진행된 남북연석회의 넷째 날 회의에서 ‘전조선동포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이 발표되었다. 70년 전 통일국가건설운동을 벌였던 선대들은 그 격문에서 70년 뒤 통일국가건설을 벌이고 있는 후대들에게 이런 절규를 남겼다.

“....조선민족은 죽지 않았다. 우리 조선민족은 또 다시 외국의 노예로서 암흑의 길을 결코 밟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조국도 하나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한다.... 우리 조국에 위험이 박두한 이 엄숙한 순간에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어찌될 것이며 그들은 얼마나 우리를 원망할 것인가....”

하지만 후대들은 선대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 선대들로부터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위대한 유업으로 넘겨받은 후대들에게는 미국의 분단영구화정책을 파탄시키고 기어이 자주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가 넘친다. 통일국가건설운동 70주년을 맞이한 그들의 앞길에 2018년 새해 첫날이 밝았다.

트위터페이스북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박성민 | 정치컨설턴트
입력 : 2018.01.01 21:38:00 수정 : 2018.01.01 21:39:13

ㆍ박성민의 2018 정치 기상도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미국 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교수는 2016년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에서 뛰어난 통찰을 보여 주었다. 이 책에는 ‘건국 이후 첫 주류 교체와 미국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미국을 한국으로 바꾼다면) 이 제목, 이 부제에 딱 어울리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건국 이후든, 해방 이후든 주류 교체는 (정권교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혁명적 사건이다. ‘이 나라는 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한 보수로서는 상상할 수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항상 주류였던 한국의 보수는 좋게 말하면 ‘주인 의식’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유욕’이 너무 강하다. 회사, 학교, 신문사, 교회도 ‘내 거니까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의 연장에서 ‘국가’도 내 거다. 아무리 보수(우파)는 ‘재산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보(좌파)는 ‘인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지만 한국의 보수는 지나치게 소유에 집착한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는 보수의 민낯은 (국민이 위임한) 공적 권력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한 국정농단 사건에서 숨김없이 드러났다. 
반면 진보는 좋게 말하면 ‘비판 정신’이 강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비주류 의식’이 너무 강하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야당 후보였던 한나라당 이회창은 마치 챔피언처럼 행동한 반면 여당 후보였던 노무현은 도전자처럼 싸웠다.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의원 수도 많았고 이회창이 노무현보다 나이가 더 많은 탓도 있었겠지만, 이회창의 보수적 이미지와 노무현의 개혁적 이미지는 그들 속에 잠재된 주류 의식과 비주류 의식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비주류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건 과반 의석을 넘긴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잠재의식을 넘어서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그런 보수의 나라에서 지금 주류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제국 같았던 보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붕괴의 조짐을 눈치챈 사람들은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렇게 무기력하게 몰락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빈틈없이 강고해 보였던 지배권력은 대개 그런 식으로 한순간에 와해적 최후를 맞았다. 히말라야가 무너지면 에베레스트의 아우라도 사라진다. 보수의 페르소나 박근혜가 몰락하자 보수의 아우라도 사라졌다.
지난 60년간 보수우위 시대를 지탱해온 보수의 히말라야인 일곱 개 기반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지식인, 보수 언론, 문화, 재벌, 권력기관, 기독교, 보수 정당의 물적 토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담론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보수 지식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문화계 인사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광장에서 보수 권력을 조롱한다. 숫자가 너무 많아 (보수 정권은) 리스트를 만들고 관리하기도 버거웠다. 존경받는 (보수) 언론인, 종교인, 기업인도 보이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 보수에 대한 이미지를 물어보면 “존경할 인물이 없다” “부패했다” “촌스럽다”는 것이었는데 최근에는 “능력도 없다”가 추가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보수 몰락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지난 6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혹은 이끌어) 온 보수의 두 축, 즉 세상을 ‘북한’과 ‘돈’이라는 프리즘으로만 보는 ‘안보 보수’와 ‘시장 보수’는 1987년과 2017년 광장에서 탄핵당했다. 
보수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시대의 새로운 강자인 애플과 삼성으로부터 패권의 지위를 다시 찾아올 가능성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혁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순간에 몰락했다. 
이제 와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신보수’와 ‘개혁보수’를 내세우지만 말장난에 불과한 느낌이다. “별의별 것을 다 갖다 붙여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던 노무현의 비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 2>의 후기인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에서 “보수주의적 태도의 근본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 보수주의는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 결국 속도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비판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1987년 이래로 보수가 서서히 몰락한 이유는 ‘선거’ 때문이다. 선거는 보수의 가장 약한 고리다. 다른 영역의 수구·보수 카르텔이 강고했던 것에 비하면 비교적 평평했던 선거는 치를 때마다 보수의 성을 조금씩 무너뜨려왔다. 오는 6·13 지방선거에서는 아마도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즉 ‘북한에는 강경하고 시장에는 관대한’ 전통적 보수 세력의 몰락을 볼 수도 있다. 1980년대는 김영삼·김대중의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세력이 손을 잡고 집권 보수 세력에 맞섰다. 1990년대는 김영삼·김대중의 자유주의 세력에 보수 세력이 투항한 시대였다. 자유와 개혁의 시대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이회창·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면서 보수 정당 주도권이 자유주의 세력에서 보수 세력으로 넘어가면서 보수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 정당 안에서는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 세력이 ‘개혁’과 ‘보수’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낸 다양성이 당을 강하게 만들었고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정체성이냐 외연 확대냐, 집토끼냐 산토끼냐의 치열한 논쟁은 당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고 한목소리로 충성을 보이라고 몰아붙이더니 급기야 국정교과서라는 자폐적 광기의 정점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때 보수는 끝났다. 민주당도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다른 목소리를 막는 순간 정당은 죽는다. 
한국의 유권자 지형을 거칠게 분류하면 30% 대 20% 대 30% 대 20%다. 맨 앞의 30%는 2007년 정동영과 권영길의 지지율 합이다. 마지막 20%는 이른바 ‘태극기’다.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은 앞의 세 세력이 손을 잡은 결과 80%의 압도적 지지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2012년 대선의 50% 대 50% 구도에서 세 번째 그룹이 이탈해 박근혜를 찍은 것이다. 이들을 중도 보수, 합리적 보수, 중도 우파, 자유주의 우파 등 뭐라 부르든 현재 한국 정치 지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집단이다. 적어도 다음 대선까지는 이들의 선택이 정치 지형을 좌우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70%라는 현실에는 ‘홧김에 서방질’하는 중도 보수의 풀리지 않은 분노가 숨어 있다. 앞의 50%는 문재인 당선으로 화가 풀렸지만 오히려 세 번째 그룹은 박근혜를 찍었었다는 부끄러움과 자괴감, 그리고 ‘쪽팔림’이 뒤엉켜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이들이 돌아올 것으로 믿는 모양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들 중에는 이미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을 찍은 사람도 꽤 된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찍은 사람 중 정몽준을 찍은 사람은 거의 없지만 박근혜를 찍은 사람 중엔 박원순을 찍은 사람이 꽤 있다. 박원순이 13%가 넘는 큰 차로 승리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때보다 훨씬 명분, 인물, 매력을 잃은 자유한국당을 찍을 것이라 볼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의 배경에는 비견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한다면 2003년에는 다섯 명의 전직 대통령이 생존해 있었다. 그중엔 상왕 이미지가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있었다. 야당에는 박근혜, 이명박이 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당은 소수당이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네 명의 대통령이 생존해 있지만 아무 영향력이 없고, 민주당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대중·노무현·김근태 세 분은 돌아가셨다. 여야를 막론하고 강력한 차기 주자도 없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슷한 위상이다. 
보수 세력이 분열하기 전에도 선거 지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2010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20~40대 유권자층에서 보수는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다. 2017년 대선 때는 50대마저 잃었다. 이미 자유한국당은 전의를 상실하고 한강 전선을 포기했다. 홍준표 대표가 대구의 당협위원장을 맡겠다고 선언한 순간 수도권 승부는 끝난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서는 호남을 국민의당에 완전히 잃은 민주당에 1석을 내주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뚫리지 않았던 보수의 아성 강남과 대구도 뚫렸고, 부산·경남은 누구의 텃밭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정치적 의사결정의 핵심으로 떠오른 30~40대 여성에게 자유한국당은 혐오스러운 ‘마초 정당’으로 보일 뿐이다.
무엇보다 자유한국당의 위기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두 당의 통합이 무산된다면 자유한국당이 민주당의 대척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통합이 된다면 신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은 있겠지만 ‘보수의 대안 정당’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세 번째 30%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다면 일거에 당 지지율이 2등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다. 앨버트 허쉬먼이 <이탈, 항의, 충성(Exit, Voice, and Loyalty)>에서 통찰한 대로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에서 이탈할 정당이 생기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통합에 성공하더라도 안철수와 유승민 두 사람의 정치 행로는 험난할 것이다. 안철수를 정치로 불러낸 세 그룹인 2030·중도·호남은 이유가 다 달랐다. 2030 젊은층은 기성 정치가 싫어서 안철수를 불러냈고, 중도는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인 박근혜가 싫어서 불러냈고, 호남은 박근혜의 유일한 대항마인 문재인이 싫어서 불러냈다. 안철수가 ‘새정치’를 하려고 했다면 2030을 중심으로 중도의 지지를 받는 정치를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호남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둑에서 수순이 중요하듯이 정치에서도 수순이 중요한데 안철수는 호남을 기반으로 국민의당을 창당한 순간 2030의 지지를 거의 잃었고 중도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잃었다. 뒤늦게 수순을 바로잡아보려고 하지만 열 배는 어려운 길을 자초한 셈이다. 
정치가·군인·기업가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반면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정치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학자,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정치가와 군인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공산주의 소련과 ‘연합’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강자가 된 것도 구글의 안드로이드 ‘동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것도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회창이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대쪽 같은 원칙 대신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양김 정치의 절반만 배웠어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는 합리적인 사람보다는 합목적적인 사람이 해야 한다. 정치적 반대자들과 싸우는 건 작은 용기만 있어도 되지만 지지자들에게 욕먹는 결단은 큰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다. 정치가 어려운 이유다. 우디 앨런이 영화 <지골로 인 뉴욕>에서 장사가 안되는 중고서점을 폐업하면서 “요즘은 이런 귀한 책 찾는 놈들이 더 귀해”라고 한탄했지만 요즘은 지지자들에게 욕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치가를 볼 수 없다.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하면 위대해진다고 믿는 시대다. 예능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다. 지도자도 없고, 위대함도 없다. 
정치는 단순하다. 지지기반을 넓히면 살고 좁히면 죽는다. 지난 30년간 연합을 한 정치세력은 승리했고 분열한 세력은 패배했다. 예외가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수가 정치적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30년간 유지돼온 민자당 대 반민자당,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의 보수 우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당 대 반민주당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주류가 바뀌고 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에 성공한다면 6·13 지방선거는 통합신당과 자유한국당의 반민주당 연대, 민주당과 통합신당의 반자유한국당 연대, 그리고 연대 없는 3당 경쟁의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분명한 것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담대한 연대’를 결단하는 지도자가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박성민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