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일 토요일

언론이 거세시킨 민중미술, 2016년 복권되다


[인터뷰] ‘민중미술가’ 박불똥 “리얼리즘의 부상, 정치사회 퇴행 현실과 맞물려”

정민경 기자 mink@mediatoday.co.kr  2016년 04월 03일 일요일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 기술의 발달이 원작이 갖는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원본만이 가졌던 특권인 아우라가 붕괴하면서 궁극적으로 예술의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중미술가이자 작가인 박불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 맥락의 작업을 해왔다. 포토몽타주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이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인화한다. 크기만 조금 다른 같은 작품이 나온다. 박불똥은 이런 자신의 작업에 “원본은 없다”고 말한다. (관련기사: 박불똥의 포토몽타주, “내 작품은 원본이자 복제품”)
작품 형식 때문에 박불똥은 다른 민중 미술가들과 구분되곤 했다.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는 평론 ‘불쌍한 포토몽타주: 박불똥의 사진의 심미적 정치와 그 자취’에서 “미술을 시각적인 언어와 그 실천으로 성찰했다”며 “그가 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가 미술을 언어로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썼다. 서 교수는 박불똥을 민중미술 작가로 구분하는 것이 무리라고 쓰기도 했다.
이는 ‘민중미술’ 용어 자체의 논쟁과 이어진다. 얼마 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리얼리즘의 복권>전시에서도 이 논쟁이 재연됐다. 왜 ‘민중미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리얼리즘’으로 쓰냐는 지적이다. 물론 민중미술가라고 분류되기 어려운 작가들과 함께 한 측면도 있지만 마치 낙인이 돼버린 ‘민중미술’이라는 용어에는 오해가 겹겹이 쌓여있다. 박불똥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민중미술가’냐고.
▲ 갤러리 175에서 열린 박불똥 개인전에서 작품을 설명중인 박불똥 작가.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민중미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왜 그런 건가?
“1980년대에 생겼던 ‘두렁’이라는 민중미술 그룹이 있다. 어쩌면 민중예술이라는 규정에 가장 근접한 활동을 했다. 민중미술이라는 것을 좁게 규정하면 두렁 방식의 미술이 될 것이다. 넓게 규정하면 노동의 세계관을 포괄하며 현실비판적인 정신을 담은 미술이 될 것이고.
공안정권은 그런 성향을 불온시하면서 민중미술을 친북이나 종북 경향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성향을 굳이 따지자면 거의 자유주의자들이다.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고유명사화돼 어쩔 수 없이 쓰긴 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의미로 국한되는 것에는 불만을 가진 이유다. 사실 이런 국한을 제도언론이 누구보다 하고 싶은 걸 거다. 민중미술에 대한 거세, 박제화 말이다.”
- 언론이 민중미술을 거세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민중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가담하는 작가나 이론가들 혹은 연구자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예술에 ‘민중’을 붙인 것은 1985년에 있었던 <힘 전>이라고 하는 전시장을 폐쇄하고 작가들을 구속 조치하는 사건 이후였다. 공안정권에서 ‘민중예술’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한 탄압 프로그램인데 일종의 언론 플레이를 했다.
조중동과 같은 제도언론에서는 민중미술 어쩌고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가장 앞선 게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에서 1980년대를 정리하는 기사를 내면서 민중미술이 1980년대에 국한되는 시효가 짧은 것이라는 식으로 정리했다. 조선일보가 그 기사에서 민중미술가 몇몇 작가를 뽑았다. 하지만 그 작가들의 모든 작품이 ‘허용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 기사에서 선별된 작가들의 선별된 작업만이 가치 있다는 식으로 정리한 거다. 굉장히 불합리한 정리였다."
-그 후유증일까. 민중미술이라는 언어가 마치 ‘빨갱이’라는 낙인과 같이 느껴진다. 제도권에서도 민중미술이라는 말을 붙이기 꺼려한다는 인상도 받았다. 최근 가나아트센터의 ‘리얼리즘의 복권’전에서도 ‘민중미술’이라는 말 대신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써서 비판이 제기된 적 있다.
“사실 그 전시에서 민중미술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 그 전시에 참여한 8인의 작가 가운데 5명은 1980년대 민중 미술 타이틀 아래 출품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3명은 거리를 뒀던 사람들이다. 사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전성기 이후 미술운동을 ‘포스트 민중미술’이라고 부르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어떤 작가들은 포스트를 붙인다고 해도 ‘민중미술’이라는 것 아래 묶기 어렵다는 평도 있었다.”
-이런 논란 안에서 당신을 ‘민중미술가’라고 부르는 것에 어떤 생각인가.
“나는 민중작가다. 민중미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지라도 나는 민중작가라고 말하고 다녔다. 사실 이런 문제에 있어 지속적으로 민중작가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은 신학철 화백 한 사람이다. 당시에 신학철 화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신학철의 가치나 방법론들이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이기 때문에 극단화시키면 신학철을 쳐내야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때 신학철이 “나는 내침을 당하면 속상하다”고 했다. 민중작가로 자신을 분류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현재 나도 마찬가지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단일화된 개념은 아니지만 고유명사화된 것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중작가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 박불똥, 軍府-사령관각하의부스럼, 1989~1993 옵셋 프린트. 
- 민중미술가로서 한 인터뷰에서 “이미 민중미술의 전성기인 80년대는 지나가버렸다”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민중미술이 낡았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인가.
“낡은 건 너무나 당연하다. 1994년 이후 포스트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이 나오기도 했지만 우선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민중미술은 지나갔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초대전을 했다. <민중미술 15년>이라는 전시에서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다. 민중미술의 성과나 증거를 모아서 보여줬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어떤 선별이 일어났다. 조선일보가 재단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미술이 국립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재단이었다. 물론 미술관이라고 하는 공간, 국립미술관이라는 성격 때문에 울타리를 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민중미술을 이와 같이 국공립의 이름을 내걸고 정리해서 일단락 짓는 것이 다음 단락으로 가기위한 모습이라기보다 이런 성향의 미술은 여기까지 유효하고 기대할 것이 없다는 단죄에 가까웠다는 말이 많았다. 결국 그게 민중미술의 장례식이었다."
- 민중미술의 전성기는 지나갔다지만 민중미술이 2016년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많다. 관련 전시도 활발하다.
"정치사회가 퇴행하는 현실과 맞물린다고 생각한다. 지금 민중미술 혹은 리얼리즘 미술을 다시 부각시키는 움직임이 2년 정도 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이를 새롭게 부각시키려는 세력이, 시장이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해 상품의 가치가 있다고 본 거다.
과거지사가 되버린 작업들을 다시 부각시킨다는 점은 반가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본연의 맥락을 살리지 못하고 상품으로서 시장과 기계적으로 만난다면 단지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2016년의 민중미술 바람이 1980년대의 전성기와 어떻게 다른가.
"이 바람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지나면서 역사적 퇴행을 느끼고 민의의 반란이라든지 이런 정서로 인한 게 아니다. 상업화랑들이 민중미술의 복권을 주도했다. 1970년대 추상미술이, 단색화라고 하는 경향들이 뜨면서 수십년 만에 민중미술의 형식이 주목을 받고 홍콩을 통해 세계무대로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1980년대 민중미술의 바람이 시대비판적인 민의에 의해 일어났다면 이번에는 시장이 일으킨 거라는 말이다."
▲ 박불똥 작가와 '박불똥 1985-2016' 공동기획자 중 한명인 홍태림씨가 작품을 보고 이야기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홍태림
-민중미술작가도 시장에서 인정받고 돈도 잘 벌면 좋지 않나.
"물론 누가 그런 작전을 펼치든 간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다만 시장의 접근과 달리 작가와 비평가는 그와 다르게 자기동력화를 해야한다. 새로운 기회가 오는 것 같지만 그 기회의 잣대가 시장의 것이라면 그 잣대에 들지 못한 작가들을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다. 지금의 새로운 움직임을 기회로 접수하되, 작가로서는 민중미술 연대의 맥락을 명심하고 그 이야기를 건넬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개인전(‘박불똥 1985-2016’)은 그런 맥락이어서 반갑다."
-그럼 이번 전시가 가나아트센터에서 했던 ‘리얼리즘의 복권’ 전시보다 애정이 가겠다.
"화랑에서 나를 초대한 것은 기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이번 전시만큼의 반가움은 아니다. 애정이 더 갈 수 밖에 없다. 특히 젊은 친구의 시각이면서 리얼리즘이든 민중미술이든 이야기를 풀어줘서 좋다. 나는 무기력해져있는 참이었고, 비평은 떠나버렸고 작품을 들러리 세워서 상품화시키는 그런 류만 극성을 부린다면 처참해진다."
- 이번 기획자들이 두 젊은 청년이다. 두 젊은 청년에 의해서 30년 전 작품이 불려온 셈이다.
"지금 전시에 걸린 그림들이 1980년대 만든 작품이다. 당시에 내가 20대 후반~30대 초반이었다. 지금 전시기획자들 나이도 같다. 민중미술의 전성기를 지나고 올수록 그런 민중미술이랄까, 사회비판적인 미술에 대한 열기가 주목도가 많이 떨어졌다. 솔직히 개인 작업하는 개인으로서 힘들었다. 1980년대 같이 어울렸던 작가들의 상당수가 변화를 꾀해서 어떻게 보면 다른 지점으로 갔다. 내 경우는 그런 변화가 덜한 편이다. 변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반갑고 고마웠다. 내 또래나 선배가 인정해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다."
▲ 박불똥- '자화상- 흔적'. 박불똥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은 미디어오늘 민중미술 갤러리(http://special.mediatoday.co.kr/minjungart/)에서 볼 수 있다.
-전시를 보면서도 그런 작가의 마음이 전해졌다. 이번 전시의 <자화상>을 보고 ‘작가가 지쳐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그림이 이야기하는 게 상처와 흔적들이다. 내 나름대로는 나를 버티게 만드는 세계관이 있는데 그게 녹아내리고 함몰되고 엉망이 되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래도 작품을 보면 자화상 속의 내 눈에서는 빛이 난다."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떤가.
"<자화상>의 그 눈빛에서 출발하겠다. 자기긍정의 작업이다. 안 그러고는 이걸 할 수가 없다. 당분간은 나 자신에 대한 처절한 응시가 더 필요하다. 현재는 너무 처참한 터널 같은 걸 통과하고 있다. 지금은 저 멀리 빛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고. 그런데 터널이 끝나기 전에 이미 나이가 60이니까. 생이 먼저 끝나버릴 수도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