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트럼프에게 한국은 미국의 속국인가

18.10.12 09:38l최종 업데이트 18.10.12 09:38l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이 "북한의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응한 5·24 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고 묻자 강 장관은 "관계부처와 검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야 의원들이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 검토는 아니다"라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북이 평화공존과 협력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교류의 걸림돌인 5·24 조치를 해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주권자들의 여론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 조치는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언제라도 해제할 수 있고 유지하겠다고 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원수가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5·24 조치 해제 문제가 국회에서 도마에 오르자마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한국 정부)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AP통신은 트럼프가 대북 독자 제재를 해제할 것이라는 한국의 제안은 "자신이 허락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오만방자한 언행이다. 트럼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대북한 경제 제재조치'라 하더라도 "나의 승인 없이는 그것을 해제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을 텐데, 한국의 대북정책인 5·24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천만부당한 일이다.

트럼프의 한국 주권 모독 발언에 대해 국내의 여야 정치인 대다수가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유독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만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유엔 제재사항은 유엔 제재위원회의 승인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그 외에 우리나라의 5·24 조치나 미국의 대북제재 등 한·미 단독 제재 사항은 상호 '협의' 사항이지 누구의 '승인'을 받아야 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는 "'승인'이 아니라 '긴밀한 사전협의' 취지였음을 트럼프 대통령이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도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트럼프의 식민지 지배자 같은 행태 비판해야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들어간 직후부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에 종속되는 속도가 아주 빨라졌다. 그런 길로 가게 만든 결정적 동인은 미국과 한국이 1953년 10월 1일 조인한 뒤 이듬해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그 조약 4조에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이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한국은 군사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체결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과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에 얽매어 군사적으로 미국은 '갑', 한국은 '을'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는 얼마 전에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를 100% 부담하라"고 말한 바 있다. 식민지나 속국에 대해서만 내릴 수 있는 오만한 '명령'처럼 들렸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한반도의 남반부를 속국처럼 여기는 미국의 권력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자주적 태도를 보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에다 막강한 비밀정보기관까지 보유한 미국의 지배세력에 저항했다가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에 힘입어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정부들보다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자주권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서, 북한 정권과 손을 잡고 냉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바탕을 다져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이 함께하는 '종전선언', 그리고 훨씬 더 나아가 평화협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하겠지만 트럼프의 식민 지배자 같은 행태는 엄중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종철(1944년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1967년 11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하지만 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거쳐 <한겨레> 논설위원과 <연합뉴스> 대표,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 2016민주평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통일 트랙터야, 분단의 선을 넘자” 농민들 북에 트랙터 100대 보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11일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8-10-11 18:32:11
수정 2018-10-11 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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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가자 통일트랙터야, 한반도 분단의 선을 넘자"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남측의 농민들이 트랙터 100대를 북에 보내는 계획을 추진한다. 남북 교류의 물꼬를 열었던 1998년 소 떼 방북의 정신을 하겠다는 취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본관 2층 중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 결성을 선언했다. 대북제재 해제와 남북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해 꾸려진 운동본부에는 전농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약 20여개의 농민·노동·시민 단체들이 참여했다.
운동본부는 발족 선언문을 통해 "대북제재와 남북의 교류 협력 증진은 함께 갈 수 없다"며 "통일트랙터를 통일 대장정의 선봉에 세우자"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분단의 철조망을 녹여 통일의 농기구를 만들자'는 민중의 염원이 통일 트랙터에 있다"며 "통일트랙터로 남북 민간교류의 첫 삽을 뜨자"고 덧붙였다.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북에 통일 트랙터를 보내자는 제안을 가장 먼저 한 것은 전농이다. 박행덕 전농 의장은 "우리 민족이 5천년을 같이 살아왔고, 불과 70년 떨어져 살았다"면서,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철조망을 트랙터로 깔아뭉개고 걷어내고 통일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도 운동본부 발족식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 상임대표는 "남측 농민들이 북측 농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 계획 안에 스며있다"면서, "대북제재 완화 또는 철회, 5.24 조치 해제 등 통일 장애물을 제거하는 핵심적인 통일 운동이 될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날 조직 결성에 참여한 단체들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밝혔다.
윤여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상임대표는 "북의 농업하고 우리 농업하고 협력하면, 세계 어느나라와 FTA(자유무역협정)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에 없는 게 우리한테 있고, 우리가 많은 게 북에 없다"며 남북 농업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표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2005년 평양 시내 공단에 농기계 조립공장을 설립했고, 2010년 5.24 조치 이전까지 4~5년 동안 농기계를 만들어 북에 공급했다.
그는 "북에는 지금 농기계가 거의 없다"며 "가을에 가서 보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못 앉아 있고, 전부 나와 벼베기 전쟁에 다 나간다. 우리가 콤바인으로 한 나절이면 벨 것을 북은 낫으로 한 달동안 벤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이 약 15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의 경지 면적은 남보다 넓지만, 같은 면적에서 나오는 양이 남의 절반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대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화를 일치시켜나가는 아주 중요한 운동"이라면서, "우리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들이 앞장서서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통일을 할 때 만이 통일 이후 8천만 겨레와 민족이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더불어 잘 사는 평등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트랙터 자료사진
트랙터 자료사진ⓒ정의철 기자
이날 운동본부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통일트랙터는 제2의 소 떼 방북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98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며 소 1001마리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거쳐 방북했다. 당시 소떼 방북을 계기로 남북 민간 교류가 급물살을 탔고 이는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 공단이 세워지는 초석이 됐다.
또 이들은 "통일트랙터는 전 국민의 지지와 환호 속에 분단선을 넘을 것"이라며 "통일트랙터를 밀고 당겨달라"고 국민적 참여를 호소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내년까지 장기적으로 트랙터 100대 보내기를 추진할 것"이라면서 "향후 40억 원(트랙터 100대)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북 교육자, 조만간 만나리라 기대”

 10.4 평양대회 참석한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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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9: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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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남측 전교조와 교총, 북측 교직동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한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10년간 중단된 남북 교육교류가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이미 북측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에 남북 교육교류를 제안, 조만간 첫발을 뗄 것이라고 밝혔다.
교직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라고 소감을 밝힌 조창익 위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통일뉴스>가 만났다.
처음 방북한 조창익 위원장,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5만여 명의 전교조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직의 위원장이기에 앞서 교사이기도 한 조창익 위원장의 눈에는 북녘 아이들이 먼저 들어왔다.
새벽녘 고려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조 위원장은 탁아소 풍경을 바라봤다. 등원하는 아이들에게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모를 이가 하나하나 아이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보기 좋았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한 그는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며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어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관심을 보였다.
남쪽 인사들에게 처음 공개된 과학기술전당에서 “전율을 느꼈다”던 조 위원장은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점, 그런 부분들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평양을 방문한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파트너인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6.15북측위 관계자들과 만났다. 사진은 6.15북측위 소속 강승일 씨와 찍은 사진.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남북 교육자모임, 조만간 성사될 것”
조 위원장은 이번 방북 기간 북측 파트너인 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만간 남북 교육자모임이 성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교조는 지난 8월 서울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기간 북측에 △남북교육자 교류협력체계 복원과 유지, △2019년 1월 전국참교육실천대회 북측 대표단 초청, △남북교육자 합동연구대회 추진, △남북학생 교류사업, △남측 학생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상호방문, △역사바로세우기 공동사업,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 등을 제안한 상태.
조 위원장은 “(남북 교육단체 간)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면서 남북 교육교류 가능성을 크게 내다봤다.
다만,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북미 정상회담, 종전선언 등이 있어, 북측이 속도를 내기보다는 현 상황을 지켜본 뒤 나설 뜻을 밝혀, 본격적인 남북교류는 내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관측했다.
“정부, 시민사회진영 통일운동 배려해야.. 통일운동진영 재편도”
조창익 위원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아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 교육부문 위원장 자격으로 방북했다. 6.15남측위가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던 것도 사실.
이를 두고, 조 위원장은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대신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꾸준한 노력,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했다.
조 위원장은 남북교육교류 외에도 교사와 학생들의 통일 감수성을 높이는 자체적인 사업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남북교육교류가 전교조에 국한된 것은 아닌 만큼,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협력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첫 방북,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 통일뉴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으로 다녀오셨다. 평양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신가?
■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 처음이다. 사실 올라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양보심이 강해서, 선배님이 가신다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다. 분위기 좋아서 다음에 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됐다. 10년이 넘으니 아쉬웠다.
□ 첫 방북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하셨는가.
  
▲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온화했다. 사람은 따뜻했다. 새벽에 뭐도 모르고 호텔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이들 보고 싶어서. 8시 25분경 탁아원에 갔어요. 아이들을 맡기는데,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아침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아픈 데 없니’ 하고 검사하더라.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건강을 아침부터 챙겨주더라. 너무나 보기 좋았어요.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평양과 북한에 대한 사전인식과 현장에 가서 직접 목도하고 느낀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안도감이라고 할까. 황금 들녘을 봤다. 식량난 등 항간에서 이야기하는데, 다른 지역은 모르지만, 평양 인근 들녘은 남녘의 들녘과 다름없이 황금색이었고, 추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자체적으로 넉넉하게 만들고 공급하는 토대는 되어있었다.
흥분상태였다. 산천, 들녘, 건물, 농촌, 도시. 그 전에 있었다는 혁명적 구호나 선전선동 구호, 그것과 현재 나와 있는 인민의 경제적 자립성을 강조하거나, 생활에 대한 강조나 인민존중사상,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한다’는 구호 등 과거에는 우리에게도 좀 있을 수 있는 구호이지만, 강성대국이나 군사강국으로 위용을 떨치고자 하는, 그런 전쟁의 분위기가 많이 잊혀지고 수그러들고 극복하면서 변하고 있는 북의 모습에,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응원하고 싶고 감격했다.
뭐랄까, 새벽에 붉은 닭이 홰치는 소리,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이랄까, 우스개로 개구리가 뛰려고 웅크리고 있는, 도약하는 모습, 그런 느낌이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둘러보니,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과학기술전당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 이번 방북에서는 아쉽지만, 학교를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는데, 교사로서 느낌이 어떠했는가.
■ 사전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다만, 듣는 정도였는데, 하루 5천여 명이 방과 후 원하는 학생들 와서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예컨대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것이 일반화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만 아니었을 것이라는, 교육을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목표 등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우리로서는 갖고 있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교육을 우선시하고 국가책임제로 관철시키는 그런 모습은 한편 시장화되어있고 경쟁과 효율성을 따지는 우리의 교육질서에 견주어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유훈과 현재 살아있는 언어로 교육의 방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은 사회주의국가, 혁명을 성취한 국가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부심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 남북이 정치.사회적인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보면서 우리 교육 현실에도 접목할 만한 점이 있었는가.
■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국가책임제가 관철되는 북한하고 우리는 공교육 체제가 일정 정도 책임지는 상황에서 운용해야 하는 환경이 있다 하더라도, 교육방법과 내용, 교수방식에서 현장에서 구현되는 모습들은 소인수 학생들을 상대로 각 영역별로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책임지고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모습들은 우리 대한민국 교육체제에도 차용될 부분이 있었다.
교육이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느냐는 부러움이 있었다. 우리 교육에 비하면, 소수 아이들이 각 분야에서 자기 재능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내려는 국가의 목표와 의도성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이 지난 4일 평양 과학기술전당을 방문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이번에 북측에서 남측 인사들에게는 처음으로 과학기술전당을 공개했다. 어떠했는가.
■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전율이 느껴졌다. 건물 구조 자체가 각자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학생들이 끝나고 와서 공부를 각자 컴퓨터 앞에서 하는데, 상대가 어떻게 하는가도 보이지만, 모든 것을 집중, 최고의 목표, 하나의 목표, 과학기술혁명의 하나의 목표는 은하 3호로 구현되는 발사체,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핵 무력에 대한 기초공사가 그런 과시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과학기술 인력을 키워내겠다는 것, 여명거리, 과학자거리 보면, 과학자를 고급아파트로 이주시키고 대우하고 이러면서 과학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 과학을 앞세우고 교육을 앞세우고, 군사가 있지만, 산업에 대한, 빛나는 조국에서도 주제영역별로 펼치는데,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지침. 그런 부분들은 중요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중고생도 오더라. 컴퓨터를 다루는 데 고개만 들면 발사체가 있다. 눈앞에 있는 거다. 과학이. 그게 인공위성이라고 하는 우주에 대한 진출에 대한 욕망, 꿈이 있고, 무장으로서 세계지배력 확보하겠다는 그 꿈만이 아니고, 과학기술, 우주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력을 증진시킴으로해서 아이들에게 과학 인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렇게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하면 그렇게 진지하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다 다른 주제인데, 텍스트 보고 어떤 사람은 동영상 보고 자기 글을 쓰고 다양하게 주제별로 다르고, 모두가 다. 굉장히 많이 와있는데, 지켜본다고 조용할까? 자기 집중력을 보이고 있고, 억지로 온 학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양의 교육기관들을 둘러보면서 남측에도 접목할 만한 내용이 있었는가.
■ 문화예술자산, 교육자산에서 국가책임제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존엄한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 중심부에서 인적 영혼에 대한 가치, 자유로운 상상력 영역은 오롯이 국가책임제로 뒷받침하는 무상교육 등이 와닿았다.
방북 기간 북측 ‘교직동’ 관계자 못만나... 그러나 “조만간 남북교육자모임 열릴 것”
□ 전교조의 북측 파트너는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이다. 이번 방북 기간 동안 교직동 관계자와 만났는가.
■ 만나지 못했다. 직총 관계자도 못 오고, 교직동도 못 오고, 여성, 농민 각 분야가 못 왔다. 6.15북측위 중심으로 만났다. 남측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 북측 교직동을 만나지 못했지만, 전교조 차원에서 남북 교류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을 북측에 제안하려고 하는가.
  
▲ 조창익 위원장이 북측에 제안한 남북교육교류제안서를 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지난 8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당시 북측에 우리의 남북교류제안서를 보낸 바 있다. 교육교류를 촉진하자는 내용이다. 남북 간 교육교류는 상당히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먼저, 남북교육자교류를 복원하고 복원해야 한다. 남북 교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오는 1월 부산대에서 열리는 참교육실천대회에 북측이 오셨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교류의 발판을 굳건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로는 교사교류이다. 교사들이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크게 할 수 없지만, 교사교류를 통해서 교육내용, 방법, 통일, 판문점선언의 교육적 이행을 실천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 등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교류이다. 학생들의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등을 꾸리고 싶다. 이밖에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이와 별도로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도 제안한 상태이다. 저희들은 하고 싶은 게 많다.
□ 10년간 단절된 남북관계는 민간영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북 단체들이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는 단계라고들 한다. 전교조는 어떠한가.
■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 북에서 전교조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연민의 정을 느끼고 연대하고 싶다고 하고 응원하는 그럼 마음들은 확인된다.
다만,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 이후에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쪽으로 가는데, 상수 관계는 거기에 있으니까. 연말 이전에 큰 변화가 종전선언 다음 평화선언 등 여러 정치적 변수들이 작동함으로써 이후에 교육 분야에도 협의할 수 있지 않나 싶다.
□ 북측이 남북교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가.
■ 제가 있는 데서 북측이 직접 이야기를 했다. 곧바로 속도 내기 어렵다. 예를 들면, 대학생 교류 이런 것들은 안 해본 부분이라 새롭게 하는 것은 하기 어렵다. 기왕 해오던 것, 예를 들면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동과의 교류는 해오던 것이니까 북에서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은 부담이 되는 것 같다.
지자체가 열정적으로 남북사업에 관심이 높은데, 수십 수백 개가 몰려들며 교통정리가 안 되니까, 우선은 어렵다는 의사를 북측이 표명했다. 농민, 지역, 여성 등도 안 해온 부분이라 북측이 자신이 없다, 천천히 가자고 했다.
□ 남북교류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연대도 필요하다. 협력방안이 있는가.
■ 교총 회장과 제가 만나서 약속했다. 사무처장과 실무협의하고 가서 이야기 나누고, 필요하다면, 남북교육교류사업 이전에 합동기자회견을 해서 양 단체의 교류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양 집행부 만나서 논의구조 확보하자고 했다. 교총과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 조창익 위원장은 정부의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를 주문했다. 그리고 통일운동진영도 재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부,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해야 한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 6.15남측위 소속으로 방북하셨다.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었다. 어떻게 보고 있는가.
■ 시민사회단체가 10년 동안 줄기차게 투쟁으로 돌파한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시민사회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시당한 처사로 절망을 안겨준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
다만,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그동안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온 노력에 대해서, 통일운동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좋은 시기라고 해서, 과실 따 먹는 형식으로 집권세력 내부에 기득권이 부활해서 차지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투쟁 양상이 비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 해야 한다.
지향점을 크게 깔고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통일운동은 너와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일이다. 6.15 남측위도 최대한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본다.
서울로 내려오는 민족통일대회는 내년에 해야죠. 그때는 이제 6.15남측위를 존중해주는 정부의 모습을 기대한다.
  
▲ 지난 4일 10.4민족통일대회 환영공연이 열린 평양대극장 앞에서 단일기를 펼쳐보이는 조창익 위원장.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전교조, ‘판문점선언’ 시대 본격 준비”
□ 전교조 교사들의 통일역량, 통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어떻게 내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 이제 본격적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위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사업을 해왔다. 이제 실제로 대중운동적 차원에서 북한 바로 알기, 북한 교육내용 등에 대해서 정보가 공유되어 있지 않은 데,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교육교류를 계기로 조금 더 대중운동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 학생들의 통일감수성도 중요하다. 과거 6.15 계기 수업 같은 것도 있었다. 판문점선언 시대에서는 어떻게 준비하는가.
■ 판문점선언은 역사적 계기이다. 교과서가 새로 나올 것이라고 본다. 계기 수업 자료도 만들 것이다. 통일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꾸는 등 사실 굉장히 할 일이 많다. 애정을 갖고 북측을 바라보는 등 구체적인 지침서도 마련하고 힘차게 나갈 것이다.

30년전 10대 동독 소년, 지금은 어떻게 살까?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⑤] 동독 1020세대가 기억하는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기존 동독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30~50대의 동독 주민들 중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똑같은 변화를 겪은 10~20대는 이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동독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프레시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며 청년‧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요하네스 빈클러(Johannes Winkler, 1965년 생), 세바스티안 플뤼겔 (Sebastian Flügel, 1973년 생), 칼 에릭 다움 (Carl Erik Daum. 1978년 생) 씨를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독일 재통일과 동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통일로 인해 동독 사회와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과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인터뷰는 지난 9월 9일(현지 시각) 신 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중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에 위치한 예나 시에서 진행됐다.  

재통일의 출발, 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김나지움 6학년(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6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이었던 다움 씨는 동독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먼저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이자 소위 '비밀 경찰'로 악명 높았던 '슈타지'(Stasi)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동독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그런데 가게에 이따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슈타지 요원들이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슈타지 요원이 들어오면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당신 슈타지 맞지?"라고 말하면 그 요원은 그냥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슈타지 요원들이 정보를 캐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움)

다움 씨에 따르면 슈타지는 교회나 환경단체와 같이 동독 내에서 활성화된 주민들 모임에 이른바 '정보원'을 한 명씩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 정보원은 단체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누가 정보원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플뤼겔 씨는 교회를 관리하는 고위층은 누가 슈타지인지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목사들은 오히려 슈타지가 한 명씩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독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의 경우, 슈타지가 교회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설명이다. 
▲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서 슈타지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교회가 반정부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월요 시위'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독 내에서 교회가 민주주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 플뤼겔 씨는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교회나 환경 단체가 큰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 하고 있으면 편하다,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는 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동독 시절에는 지금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놀러갈 수도 있지만, 동독 시절에는 교회를 가는 것외에 다른 여가 생활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독 내에서) 재통일을 주도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교회나 환경 단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소련의 지원도 떨어지자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나 환경단체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플뤼겔)  

동독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슈타지의 활동도 많이 위축됐다. 플뤼겔 씨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1989년 12월 즈음부터 슈타지가 교회나 다른 단체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슈타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재통일 이후 슈타지들이 보험회사나 운전 학원, 부동산 중개소 등으로 전업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누가 슈타지였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여라  

동독 정부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열어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던 빈클러 씨는 동독 체제가 이어졌다면 자신의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내가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치르고 대학 공부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급이 25명이라고 한다면 동독 정부는 그 중 3명 정도만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의 소년단이라고 불리는 FDJ(Freie Deutsche Jugend, 자유 독일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SED의 당원도 아니었다" (빈클러)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광학회사인 칼자이스(Carl Zeiss)가 운영하는 엔지니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장벽이 무너진 뒤인 1990년에는 이 교육기관의 본부가 있는 예나에서 공부했다.  

동독 시절에 정부에 충성하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빈클러 씨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성경의 십계명에 써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을 소신있게 이야기한다고 가르쳤다"며 정부에 거짓으로 충성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 요하네스 빈클러 씨 ⓒ특별취재팀

다움 씨 역시 동독 내에서 대학을 가려면 충성심을 증명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움 씨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면 동독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FDJ에 속하거나 당원이 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군대에 3년동안 복무해야 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형은 동독이 계속 유지됐다면 (군 복무를 했더라도) 대학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통일이 되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다움)  

동독 TV를 누가 봐?  

슈타지와 충성 유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 정부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특히 서독의 TV 채널이 동독에서도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동독의 몇몇 지역만 빼고 서독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동독 사람 중에 동독 TV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끔 동독 TV에서 좋은 영화를 보여주거나, 호네커(동독 최고 집권자, SED의 서기장)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만 동독 TV를 봤다. 

요즘도 그렇지만 뉴스 시작하기 전에 시계가 나오지 않나. 당시 서독 방송에는 동그란 시계가, 동독 방송에는 네모난 시계가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TV 속 시계 모양을 물어봤는데, 학생들 대부분 당연히 동그랗다고 대답했다. 다 서독 TV만 보니까.(웃음) 

1989년 가을 서독 방송에서 헝가리가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넘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한 엄마가 수 미터 정도 되는 (서방국가의) 높은 대사관 담장 위로 자기의 아이를 넘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동독인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무런 폭력적인 상황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교회를 주축으로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100명이 모였다가 다음날 500명이 됐고, 학생이나 젊은층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같이 나갈 정도였다. 방송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플뤼겔) 

▲ 세바스티안 플뤼겔 씨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에 1989년 5월 사람들의 시위에 불을 당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SED가 부정선거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SED는 98.9%가 자신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실제 어느 정당에 투표했냐고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는 SED가 말한 것과 너무 달랐다" (빈클러) 

"당시 선거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후보를 찍는 비밀선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비밀선거를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밀투표를 하겠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에 낙인이 찍혔다" (다움)  

"기표소에 들어가면 비밀투표를 했다고 표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직장 상사가 불러서 기표소에 좀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지원을 못 받는다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플뤼겔)  

동독이 소위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소련의 태도 변화도 동독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주요한 촉매제가 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소련은 모범적인 국가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개방을 한다고 하니까 동독에서 혼란이 커졌다. 소련에서 동독으로 보내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그 잡지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정부에 더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게 됐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게 "도와줄게"가 아니라 "변화 늦게 하면 너한테 벌을 줄거야"라고 이야기하니까 동독 주민들은 "이게 뭐지" 싶었다" (플뤼겔)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이 시위를 막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시위에 나서게 됐다" (다움) 

장벽 붕괴를 전후로 학교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움 씨는 동독으로부터 도망친 선생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다. 동독 정부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했던 선생님들도 그 발언 수위가 약해졌다. 

동독은 당시 매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기 시작 첫 날에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안 계셨다. 알아보니 프라하에서 (서방국가 쪽) 대사관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서독으로 넘어간 친구들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다움) 

통일이 아니었다면?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다움 씨와 플뤼겔 씨는 당시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연방주(구 동독)가 서독에 흡수되고 화폐 개혁도 예정보다 몇 달 더 빨리 이뤄졌다. 동독에서는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 매일 매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독 내에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혁된 동독을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흡수통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다움)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거나 훔쳐갔다고 보지 않는다. 동독에서 그 상태로 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제를 비롯해 동독 내의 많은 것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플뤼겔) 

빈클러 씨 역시 당시 시위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통일로 인해 유토피아가 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동독 말기에는 (1989년 5월 지방선거와 같은) 부정선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SED에서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에 나갔다. 사회주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당시 시위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에서 여행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동독 내에서 억압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인데 그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흡수통일이 내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긴 했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빈클러 씨는 튀링엔 주 천문관측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낙원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빈클러)  

빈클러 씨와 다움, 플뤼겔 씨에게 통일이 나름의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움 씨는 본인이 통일로 인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모님 세대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전히 서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우도 있을 거라고 전했다.  

▲ 칼 에릭 다움 씨 ⓒ특별취재팀

"통일될 무렵에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후 서독 교육 시스템에 바로 안착해서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0살 많은 형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또 연금과 관련, 재통일 체제에서 동독 사람들이 동독 시절 직장에 다녔다는 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독 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이 있는 공장도 있었지만, 재통일 체제에서 이런 공장을 없애버린 경우도 많다. 기존 서독 지역에 경쟁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서독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동서독 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독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가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첫 1년은 뮌헨에 있었다. 당시 회사 사장이 동독 사람에게 '프로젝트가 언제 끝나냐'고 물으면 동독 사람은 '한달 후'라고 대답하고 정말 한 달 후에 끝냈다. 그런데 서독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주일 후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하지만 절대 그 기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은 불평도 많고 좀 딱딱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은 지키는 성향이 있는데, 서독 사람들은 말은 다 해줄 것처럼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플뤼겔)  

"서독 출신들은 동독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다르다. 유머감각도 좀 다르고. 예를 들어 서독 출신 사람들은 동독 출신에 비해 자산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또 동독 사람들은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지 않았나? 그래서 물건을 샀는데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서독 사람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동독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동독의 잔재 같은 것이 남아있다. 동독 시절에 언론 매체가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언론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일단 덮어놓고 믿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클러)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독 시절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밖에서 자유롭게 말하면 안 되는 사회였는데, 서독의 경우에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발표 수업을 한다. 자꾸 자기를 보여주는 교육을 십수 년 동안 배우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움)  

동서독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차이도 여전하다.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전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 서독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출발할 때의 자본이 두 배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자손 세대 정도가 되어야 서독과 대등한 경제적 출발 자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 기업들도 40년 동안의 동독 시절에 다 망가졌다. 지금 동독에 큰 회사들이 이따금 있지만 나머지는 굉장히 영세하다. 겨우 겨우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키워 놓으면 서독에서 그 회사를 사버리곤 한다. 앞으로 두 세대는 더 지나야 동서독이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플뤼겔)  

동서독은 40년 동안 따로 살다가 재통일됐지만 남북은 분단만 해도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전화나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도 할 수 있었던 독일에 비하면 남북은 교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북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동독의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독 정부는 개인의 의견을 통제하지 못했다. 서독에서 친척이 오고 가면 동서독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정보가 왔다갔다 했는지 동독 정부는 몰랐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독은 남북 상황과 비교되지 않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다움) 

"동서독은 재통일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남북은 이런 식으로 통일하면 안된다" (플뤼겔) (통역 : 조경혜) 

"너희도 통일할 것 같아?"  
플뤼겔 씨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바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조경혜 번역가다. 조 번역가는 1996년 예나로 유학을 왔고 이후 지금의 남편인 플뤼겔 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22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바깥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 9월 10일(현지 시각)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 조경혜 번역가 ⓒ특별취재팀

우선 1990년대 중반, 독일이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나라는 구 동독 지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서독 지역에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많았을텐데 왜 하필 예나였을까?

"1996년이면 재통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알아보던 중 교수님이 요즘에는 동독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서독 지역에도 지원하고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와 예나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는데 예나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입학허가서 들고 바로 왔지.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예나에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짐 싸서 왔다. 예나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당시 한국 사람이 5명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인을 만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여기가 예전 동독 지역이다 보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물어봤다. 어르신들 중에는 동독 시절에 북한 사람 많이 알고 지냈다는 분도 계신다"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독일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백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특히 요즘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떠오르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도 늘어가고 있어 독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독일 극우 집단들의 타깃이 동아시아 쪽은 아니라서 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건 없다. 그런데 지난해 60대 여성이 한 난민에 의해 강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다만, 이슬람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터키계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데도 그렇다.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경우 전략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동독 지역을 공략한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난민 때문이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반감은 극우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낸 세금을 가지고 난민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인다"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주로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얻은 이유가 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면서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예전 서독 지역에 가면 분위기가 동독 지역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예전 서독 지역 중에서도 주로 큰 도시를 가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동독 지역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 기준으로 외국인도 훨씬 많고. 

또 예나는 대학이 있어서 동독 내에서도 발전이 좀 이뤄진 도시이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 도시들은 좀 어렵다. 라이프치히만 해도 큰 공장 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리할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빈 건물로 놔둔 곳이 상당수 있다.  

물론 예나도 재통일 전에는 좀 어두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에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색을 칠하고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밝아졌다고 한다. 예나의 건물 중에 웬만한 건 다 수리했다고 보면 된다. 하다못해 페인트칠이라도 다 새로 했다" 

분단 40년에 통일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동서독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분단 100년이라는 시간표를 받아들지도 모를 남북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남북 간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여기가 한국보다 더 난리다. 지난해에는 저도 걱정되더라.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너희도 통일할 거 같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고 분단됐을 때 교류도 안했고. 또 이산가족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고. 

독일은 40년 분단 기간 20년 정도는 TV부터 시작해서 통신 등을 허가하면서 동서독 간 교류를 해왔다. 이게 기반이 되어 국제 정세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통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남북이 교류하는 게 선행되어야 통일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남북이 이질화가 심각해졌다는 것이 가장 문제 아닐까 싶다. 남한은 문명과 변화에 너무 민감하고 북한은 너무 통제돼서 사실 극과 극이다. 이 둘이 융화되려면 남북이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면서 조금씩 통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사법부냐!”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 발표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12 [01: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사진 : 참여연대)     © 편집국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원로 및 시민사회민중단체정당 등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11일 오전 930분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를 개최하고이어 11시 같은 장소에서 시국선언 및 활동계획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 인사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며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사법부를 향해 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며 성실한 수사협조관련 모든 자료 제출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국회를 향해서도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하며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끝으로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국민들을 향해 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며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했다.

한편 기자회견에 앞서 진행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사법농단 법관 탄핵과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캠페인 나는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을 파면한다를 10월 동안 진행해 11월 초 국회에 제출하고, 11월 탄핵돼야 할 법관 명단과 탄핵소추 사유를 발표하기로 했다또 20일엔 3차 사법농단 규탄집회 및 행진을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하고 영장 기각 규탄 1인 시위지역별 시국선언신문광고 등의 행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번 시국선언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김중배 전 MBC 사장한승헌 변호사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해동 목사함세웅문정현 신부명진 스님 등 시민사회원로와 각계 인사 318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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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법부냐!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문

오늘 우리는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누적된 사법적폐를 뿌리 뽑을 것을 다시금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주지하다시피양승태 대법원은 박근혜 적폐정권의 비위를 맞추며 재판을 거래하고이를 통해 제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7~80년대 노동탄압 관련 소송쌍용차 정리해고 소송, KTX 여승무원 소송강제징용 소송긴급조치 국가배상 소송전교조 법외노조 소송키코 피해자 등 중소상공인 소송그리고 강제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등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렸다가히 민주주의와 헌법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법농단이었다.

사법농단의 전모가 드러나면서그리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를 공개하고 성실한 수사협조를 약속하면서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정권 당시의 사법 적폐가 낱낱이 청산되기를 기대했다이를 주도한 적폐 법관들이 퇴출되고 사법부의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그러나 사건이 공개된 지 넉 달이나 지난 지금그간의 기대는 실망과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그러는 사이에 사법 농단의 증거자료들은 파기훼손되고 있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 범죄의 최고 책임자인 전직 대법원장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청구에 대해서는 주거안정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유로 연거푸 기각하였다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사법부가 실정법 준수에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조직적으로 수사방해를 일삼으면서 법질서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법관들이 사실상 법위에 군림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법관들 스스로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부정하고국민 기본권보장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의 존재의의를 짓밟는 실로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금우리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양심적인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촉구한다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스스로 국민들에게 공개 약속한 대로 성실하게 수사협조하라사법농단과 재판거래 관련 모든 자료를 제출하라이 길만이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촉구한다국회는 더 이상 뒷짐지지 말고 직접 나서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그것만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의 수사방해와 셀프재판으로 인한 재판왜곡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다또한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에게 호소한다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한다.

이에 우리는사법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담아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양승태 전 대법원장그리고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있는 적폐법관들을 즉각 구속처벌하라!
둘째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즉각 제정하라!
셋째사법농단 적폐법관들을 지체없이 탄핵하라!
넷째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원상 회복조치를 실시하라!

2018년 10월 11일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해결 촉구를 위한 각계 시국선언 참가자 318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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