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 상향 첫날인 12일 서울 종로에서 한 청년이 서울시 공공자전거인 ‘따릉이’를 이용해 배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단기 알바 등 취업자인 동시에 입사 시험 준비하는 ‘실업자’들 경제활동인구 4명 중 1명 해당
취업자: 수입을 목적으로 1시간 이상 일한 자 시간 관련 추가취업가능자: 취업자 중 취업시간이 주 36시간 미만이면서 추가 취업을 희망하고 추가 취업이 가능한 자 초단시간 취업자: 취업자 중 취업시간이 주 15시간 미만이면서 추가 취업 희망하고 추가 취업이 가능한 자 일시휴직자: 직업이 있지만 일시적인 병, 휴가·연가, 일기 불순, 노동쟁의, 사업 부진, 조업 중단 등의 사유로 일하지 못하는 자. 유급이나 무급휴직도 해당 실업자: 취업을 희망하고 4주 내 구직활동을 했고, 현재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비경제활동인구: 가사 또는 육아를 전담하는 주부, 학생 및 일을 할 수 없는 연로자 및 심신장애자, 의무군인, 불로소득자, 자발적으로 자선 사업 또는 종교단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 잠재취업가능자: 4주 내 구직활동을 했고, 일시적인 병 등의 이유로 현재 일을 할 수 없는 사람 잠재구직자: 4주 내 구직활동 없지만 일할 수 있는 사람
일을 하고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은 취업자일까, 아니면 실업자일까. 대한민국 청년경제활동인구 4명 중 1명이 이 같은 ‘경계 청년’으로 노동시장을 떠돌고 있다. 이들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취업자’인 동시에 입사를 준비하는 ‘실업자’들이다. 통계청은 완전한 실업도, 그렇다고 취업도 아닌 경계지대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실업의 시간과 기간을 기준으로 추가취업자·잠재취업가능자·잠재구직자·구직단념자·쉬었음 등으로 복잡하게 나눈다. 반면 1시간이라도 임금을 받고 일하면 취업자로 분류한다. 실업률이 낮다고 하지만, 체감실업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박성훈씨(30·가명)도 ‘경계 청년’ 중 한 명이다. 수년 전 대학을 중퇴한 이래 관공서나 대학 행사의 영상편집 일감을 받아 쉬지 않고 일했다. 회사에 정식으로 소속된 적은 없지만 학자금과 생활비는 벌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구직 상태였다. 불안정한 지금의 일자리 대신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으려 취업 준비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 사태가 터져 그나마 있던 일감마저 끊겼다. ‘프리랜서’라서 실업자로 인정되지 않아 실업급여는 받지 못했다. 최근에 그의 일자리는 패스트푸드점, 주 20시간짜리 아르바이트다. 그는 “아침에 나가서 기름솥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이러다가 평생 알바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구직활동을 계속한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많은 2030 청년들이 취업과 실업 사이에서 맴돈다. 지난해 청년층 확장경제활동인구(482만6000명) 중에서 경계취업자(14만9000명), 잠재경제활동인구(69만3000명)에다 실업자 37만명을 포함하면 25.1% 수준인 121만2000명이 ‘경계 청년’에 해당한다. 자발적으로 실업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자리 부족 또는 미스매칭 탓이라 엄밀하게는 ‘비자발적’인 선택이다. 코로나19 이후 경력직을 선호하는 기업이 늘면서 청년들은 경력을 쌓을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다. ‘MZ세대’가 직장 소속감이 낮다지만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일자리 질이 얼마나 좋은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낮은 임금,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채용 사이트를 뒤지며 노동시장 내 사다리 오르기를 시도하는 ‘경계 청년’이 늘어날수록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저출생 문제 역시 심화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청년 일자리 정책이 나오려면 일단 통계와 진단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코로나19 시대, ‘경계청년’의 위기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충격은 노동시장에서 청년들을 경계로 더 많이 몰아넣었다. 비교적 안정적 일자리를 갖고 있던 사람도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차현웅씨(34·가명)도 코로나19 이후 ‘취업자’와 ‘실업자’ 중간지대에서 떠도는 중이다. 차씨는 지난해 코로나19로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한국인 여행객을 상대로 운영하던 여행사를 접었다. 귀국한 이후 대기업 하청업체의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다 어려워진 회사가 희망퇴직을 받자 그 일도 그만뒀다.
현재는 간간이 벽지 시공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중이다. 통계청 분류로 보면, 현재 그는 주 36시간 미만으로 일하면서 추가 취업을 희망하는 ‘시간 관련 추가취업가능자’이다. 코로나19 확산이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크게 늘어난 이들 중 한 명인 셈이다. 여행사 사장이나 생산직 노동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그는 ‘취업자’로 묶이지만, 현실의 차씨는 계속 일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 취업자’로서 경계청년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노동시장 밖 경계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여행사에서 2년간 일한 이사라씨(28·가명)는 지난 4월 코로나19 타격으로 여행사가 문을 닫으며 실업자가 됐다. 이씨는 “사장님도 버틸 만큼 버텼지만 월세 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코로나19가 이렇게 길게 갈지 몰랐다”고 말했다. 실업급여와 퇴직금으로 생활 중인 이씨는 2개월째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여행 관련 일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터라 미래가 막막하다. 이씨는 ‘잠재구직자’로서 자신의 전공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직종으로 이동해야 하는 처지다.
코로나 등으로 일자리 잃은 사람들 알바로 버텨가며 다른 일거리 찾는 ‘시간 관련 추가취업가능자’ 신분 돼
취업에 성공해도 저임금·고강도에 자발적 퇴사 선택 ‘구직단념자’로
한국의 고질적 노동 문제도 경계청년을 만드는 원인이다. 어렵게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은 낮은 임금, 고강도 노동, 불예측적 해고, 책임없는 노사관계 등의 문제로 노동시장 밖으로 나와 자발적으로 경계청년이 되기도 한다.
김효은씨(20·가명)는 특성화고를 다니면서 반도체 공장 생산직 정규직원으로 취업했지만 수개월 만에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그는 “철제로 된 반도체를 오븐에 넣고 빼내는 작업을 했는데 생산량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며 “선배님들 손에는 화상 자국이 흔했다”고 말했다. 회사 밖은 더 지옥이었다. 코로나19로 단기 아르바이트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그는 일일 임상·생물학적동등성(생동성)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신의 몸을 약 부작용 시험 대상으로 맡긴다는 점에서 위험하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씨는 자발적으로 경계청년이 됐는데,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취업자’로 살게 될지는 몰랐다.
20대 윤정희씨(가명)도 2년간 치위생사로 일한 병원을 최근 그만뒀다. 의료계 집단 괴롭힘, 일명 ‘내리 갈굼’이 문제였다. 그는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로 아직 정신과 치료 중인데 현재는 실업급여를 받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쉰 지 반년이 넘은 윤씨는 ‘쉬었음’ 인구이면서 구직활동에 소극적인 ‘구직단념자’다. 2020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구직단념자는 전년 대비 7만3000명 증가한 60만5000명인데 이는 통계 작성 이래 최대 규모였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장을 떠나 경계청년이 되는 대표적 이유 중에는 낮은 임금도 있다. 2020년 기준 청년 취업자의 58.7%가 첫 일자리 월 임금이 200만원 미만이었다. 최저임금 월 환산액이 18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청년 절반이 첫 직장에서 매우 낮은 임금을 받는다는 얘기다. 첫 직장 근속 연수도 매년 짧아지고 있다. 2020년 5월 청년층 부가조사를 보면, 첫 직장 평균 근속 기간도 1년5.5개월로 10년 전과 비교해 1.5개월 줄었다.
첫 일자리에 실망한 청년들은 더 나은 일자리로 전환하기 위해 퇴사와 동시에 자격증이나 취업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실업-교육으로 이행하는 사람을 두고 고려대학교 한국사회연구소 등 학계에선 ‘요요 이행’이라고 부른다. 더 나은 직장에 가기 위한 이 ‘이행 행위’에는 돈이 든다.
최유진씨(26·가명)는 지난해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했지만 정규직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자 일을 그만두고 언론사 취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포기했다. 그는 “언론사 취업 준비를 하려면 서울에 자취방을 구해야 하는데 월세 포함 100만원 정도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며 “최근 본가인 대구로 내려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얼어붙은 취업시장 때문에 단 한 번도 노동시장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주변만 맴도는 경계청년들도 적지 않다. 8월 대학 졸업예정인 서지현씨(28·가명)는 올 상반기 50곳에 입사 서류를 냈지만 서류 합격은 손에 꼽는다. 그는 “이제 상반기 채용 공고도 거의 안 올라오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원서를 안 넣고 있다”며 “매일 일어나서 상식시험 대비 모의고사를 풀고, 채용 사이트를 뒤지고, 자기소개서를 이런저런 방향으로 수정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고 말했다.
이성원씨(25·가명)도 올 초부터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용돈벌이를 하던 알바도 모두 정리했다. 그는 “부모님에게 월 50만원의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한다. 가뜩이나 돌아갈 곳 없는 신분이라 불안함이 큰데 부모님에게 손까지 벌리고 있어서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구직활동 없이 취업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유경준씨(22·가명)는 조만간 현재 다니는 서울 소재 대학교를 그만둔다. 유씨는 “스펙이 좋은 동년배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주변을 보면 자격증을 따고 바늘구멍을 통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못 사지 않나. 크게 한탕 노리자는 생각에 주식투자자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지난 4월부터 주식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최근엔 생계를 이어갈 만큼 돈을 벌고 있지만 어딘가에 소속돼 있지 않기에 ‘취업자’는 아니다. ‘실업자’는 물론, 취업을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구직자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지금은 노동시장 외부에 머물기로 마음먹었지만 언젠가 내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늘 컴퓨터 앞에서 돈이 오가는 것만 보니 머리도 아프고 외로움도 탄다. 외로움은 해소하기보다 그냥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 정책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기존 정규직과 취업준비생의 반발에 부딪쳤다.
지난해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 비정규직 직접고용이 발표됐을 때는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정규직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공정' 담론이 등장했다. 지난 6월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담센터 비정규직이 파업에 들어가고 정규직이 이에 반대하는 가운데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이 비정규직의 파업 중단과 정규직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협의 테이블 참여를 요구하며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잘못된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6월 <경향신문>에 실은 칼럼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거짓말이고 경제의 도덕화'라며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아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해소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 격차 해소와 관련해서는 야권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4월 '첫 정책 과외교사'로 정승국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만난 뒤 정 교수의 평소 지론인 '직무급'이 주목받는 일도 있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잘못된 정책일까. 한국사회의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를 위한 바람직한 정책 대안은 무엇일까. 사회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인 조돈문 노회찬재단 이사장(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을 만나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조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문재인 정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 평가',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 '바람직한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 방안' 등 을 주제로 세 편에 걸쳐 게재된다.
▲ 조돈문 노회찬재단 이사장. ⓒ노회찬재단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 단식, 정권에 메시지 보낸 것"
프레시안 :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를 둘러싸고 여러 일이 있었다. 가깝게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상담센터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기 부딪치는 가운데 단식에 들어갔다. 강준만 교수가 칼럼을 통해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정규직 임금을 낮추고 비정규직 임금을 올리는 식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해 6월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 검색 비정규직의 직접고용 발표 당시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과 정규직을 위주로 이른바 '공정' 담론이 부상했다. 임금 격차 해소와 관련해서 보면 지난 4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정승국 교수를 만나며 정 교수가 이야기해온 '직무급'이 주목받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노동 문제를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러려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비롯한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을 곰곰이 뜯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조돈문 : 강준만 교수 칼럼은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다. 주요 근거는 대선 공약이었다. '약속했던 거 지켜라'였다. 핵심적인 공약을 지키지 않으니 비판했다. 그렇다고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거나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보다 못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프레시안 : 먼저 최근 이슈였던 건보공단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상담센터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에 대한 정규직의 반대를 보며 비정규직 정규직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문제가 또 나왔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조돈문 : 사실 정규직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할 이유는 별로 없다. 정규직에게 가는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자세히 설명해달라.
조돈문 :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직접고용될 때 고용안정성은 강화되지만 임금 등 다른 노동조건은 별로 개선되지 않는다. 기존 정규직에 비해 차별받는 '무기계약직'이 된다. 공공부문에서는 '공무직'이라는 표현도 쓴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을 합해 무기계약직이라는 말을 쓰겠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이 시행된 공공부문의 정규직 정원은 정해져 있다. 기존 정규직 인건비와 무기계약직 인건비는 별도 예산에서 지급된다. 무기계약직은 기존 정원에 영향을 주지 않고 정규직 인건비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이는 문제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고용을 잠식한다는 공시생의 비판도 있는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새 일자리를 만들거나 돈을 더 들여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게 아니다. 이미 일을 하던 비정규직을 고용형태만 바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다. 공공기관의 고용 여력을 잠식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그런데도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정규직이 반대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조돈문 :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데 반대하는 건 '기분이 나쁘다. 나는 시험을 봐서 들어왔다. 비정규직은 시험을 안 봤는데 비슷한 걸 시켜주냐'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이건 도덕적으로도 잘못됐지만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시험은 인력을 충원하는 최선의 선발 방식이 아니다. 최선의 선발 방식은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거다.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시험이라는 간접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거다. 시험은 차선 혹은 차악의 선택지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대상 비정규직은 이미 지금 하는 일을 잘해왔다. 업무 수행 능력이 검증되어 그 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용형태가 바뀌더라도 그 일을 맡기기에 충분하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정규직은 왜 반대하는 것인가.
조돈문 : 불안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문재인 정부보다 더 친 노동적인 정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정부가 들어서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건비를 통합하면 자기네들이 받을 임금 인상분이나 상여금 같은 것을 덜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 같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 친 노동적인 정부가)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난 20년 동안 겪어온 대통령을 보면 어떤 대통령도 그 정도로 친 노동적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려고 할 때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했지만 되고 나면 그렇게 했나? 아니다.
프레시안 :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이 단식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돈문 : 김 이사장이 단식하고 낸 문건을 보면 '비정규직은 파업과 농성을 거둬 달라. 정규직은 전환 협의 테이블에 들어와 달라'고 되어 있다. 사실 노사가 교섭하면 당사자가 테이블에 들어오면 된다. 건보공단 정규직 전환에서 당사자는 상담센터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정규직이 들어오지 않으면 상담센터 비정규직과도 협의할 수 없다고 한 건 잘못됐다.
그래도 김 이사장이 그렇게 밖에 할수 없었던 입장을 이해해보려 하면, 정규직이 반대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어렵고 정규직 전환 뒤에도 계속 시끄러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김 이사장이 단식을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모양이 안 좋았다.
다만, 김 이사장 입장에서는 메시지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만 던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 초기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지 않았나. 그 직후 이런 일이 생겼다면 건보공단 상담센터 비정규직도 직접고용 전환이 됐을 것이다. 김 이사장은 그렇게 감각이 둔하거나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안다. 그때였다면 정규직이 펄펄 뛰어도 직접고용 전환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김 이사장의 생각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럼 단식을 하며 낸 메시지의 진짜 청중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그 수신처가 현 정부라고 판독한다. '정규직이 이렇게 반대하고 비정규직이 농성하고 나는 단식까지 하지 않냐. 항복할 테니 정부가 알아서 해라' 이런 거다.
프레시안 : 왜 정부에서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생각하나
.
조돈문 : 이건 문재인 정부의 변화와 관련돼 있다. 집권 초와 달리 노동 정책이 유턴했다. 임기 말에 보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과 관련해 정권이 일선 기관에 보내는 메시지는 '직접고용하지 말라'는 거다. '건보공단 이사장이 자기가 뭔데 정권 생각과 달리 직접고용을 하려 하냐'는 데 대해 항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생각한다.
김 이사장이라고 안 좋은 모양새로 건보공단을 그만 두고 싶겠나. 인간다운 일을 하려는데 정권 눈치가 보이니 단식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그런 수순으로 본다.
프레시안 :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진행 중인 공공기관 입장에서는 정규직 반대가 심하고 정권도 반대하면 '자회사 직고용 선에서 마무리하자'는 식의 절충안으로 물러서는 듯하다.
조돈문 :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진정성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정책의지가 실종되면서 알리바이 찾기에 급급했다. 대표적인 알리바이가 정규직의 반대다. 그런데 이건 너무 유치하다. 뻔히 예측 가능했다.
넓게 보면, 그보다 세련된 게 중소영세기업 핑계다. 이걸로 최저임금 인상도 유턴하고 노동시간 단축도 유턴했다. 전체적으로 정부 핵심 인사들이 실력과 의지는 없는데, 꼼수에는 능하다.
▲ 지난달 15일 강원 원주시 국민건강보험공단 본관 로비에서 김용익 이사장이 단식을 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고객센터 직원들이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나서자 이 문제를 대화로 풀자며 단식에 나섰다. ⓒ연합뉴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조돈문 :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정규직 전환 대상을 '직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잡고 기간제 노동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고용안정을 보장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에 비해 더 나은 점은 정규직 전환 대상에 간접고용 노동자를 포함한 거다. 정부는 간접고용을 파견·용역과 민간위탁으로 구분했다. 파견·용역을 먼저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민간위탁을 마지막 단계로 뒀다.
그런데 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잘못된 점이 있다. 하나는 자회사 직고용 방식을 정규직으로 규정한 거다.
다른 하나는 정규직 전환 과정을 개별 기관에 맡긴 거다. 기관 단위로 노동자 대표, 사용자 대표, 전문가가 모여서 노사전 협의를 거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했다. 개별 기관에 맡겨놓으면 고용 형태나 처우에서 기관별로 편차가 많이 생긴다. 어떤 기관은 흑자고 어떤 기관은 적자다. 어떤 기관은 전환 대상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 인력의 70, 80%인데 어떤 곳은 서너 명에 불과하다.
프레시안 : 상황과 조건이 다른 기관에 이를 맡겨두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한 듯싶다.
조돈문 : 1단계인 직접고용 기간제 노동자를 전환할 때는 문제가 덜 생겼다. 2단계인 파견·용역 노동자를 전환할 때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행되긴 했는데 '직접고용이냐 자회사냐'를 놓고 기관 상황에 따라 갈등이 있었다. 민간위탁 단계에 와서는 정부가 아예 손을 놨다.
바람직한 방안을 말하자면, 직접고용을 원칙으로 두고 초기업 단위 교섭을 하게 해야 했다. 공공부문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중앙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지방공기업, 교육기관.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낼 때 다섯 가지 유형별로 초기업 노사정 협의를 하게 하고 여기에서 나온 결과를 모든 기관에 적용하게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사업장마다 텐트 치고 농성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엄청난 노사 갈등을 겪는 건 자회사 방식을 열어두고 각 기관에 정규직화 과정을 맡겨놔서다.
프레시안 : 산별교섭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을 추진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조돈문 : 맞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각 기관에서 사용자와 정규직, 비정규직이 다 자회사 방식이 잘못됐다는데 동의하고 직접고용으로 전환하는 거다. 그러면 문제없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최악은 정규직 전환 사업장에서 비정규직이 조직화돼있지 않은 경우다. 그러면 비정규직은 노사전협의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사용자와 정규직이 담합해 자회사 방식으로 가는데, 그럴 경우 고용 보장이 조금 더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정권 바뀌어서 기관이 자회사 지분을 매각하면 언제든 원천무효돼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회사 방식을 믿을 수가 없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문 대통령 뒤에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프레시안 : 이명박 대통령 때 정부의 노동정책이 크게 후퇴한 경험이 떠오른다.
조돈문 :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회사 전환을 못 받아들이는 거다.
차악은 정규직과 기관이 담합해 반대해도 비정규직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다. 그러면 비정규직이 전환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공공기관에 비정규직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등으로 조직된 곳들이 있다. 그래서 인천공항처럼 그나마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목소리를 내고 30% 정도라도 직접고용으로 전환될 수 있는거다.
정권 초만해도 처음에는 공공부문 간접고용 노동자가 100% 직접고용 되는 줄 알았다. 문 대통령이 직접 찾은 인천공항 사장도 다 직접고용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막상 정규직 전환 절차가 시작되고 보니 정부 입장도 좀 달라보였고 정규직도 반대했다. 공항에 노동조합이 여러 개인데 상급단체에 따라, 현장 조직별 상황에 따라 온도가 다 달랐다. 그러니 인천공항 사장도 직접고용 안 해도 되는 줄 알게 됐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좋은 일자리 만들기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공항, 건보공단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은 당연한 일"
프레시안 : 인천공항 보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던 일은 공항에서의 핵심업무다. 일한 경력이 10년 이상 된 사람도 많다. 그런데도 직접고용에 대해 내부 논란은 물론 사회적 논란도 있었다.
조돈문 : 시험을 봤냐 안 봤냐를 두고 공정성 타령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시험은 차선 혹은 차악의 간접적 선발수단에 불과한데 말이다. 공항에서는 다들 안전하고 싶어한다. 비행기 타기 전부터 목숨에 위협을 느끼거나 테러를 당하거나 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가면 보안, 마약탐지, 경비견 다루는 노동자는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은 사무실 안에 근무하는 일부 밖에 없다.
프레시안 :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핵심적인 안전 인력이다.
조돈문 : 인천공항의 안전은 그 분들이 책임진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직접고용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대통령도 상시 업무는 직접고용한다고 했고 생명·안전 업무도 직접고용한다고 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업무는 상시 업무다. 몇 년 씩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인천공항의 업무는 거의 모두 공항 이용객의 생명과 안전에 관련된 일이다. 그럼 정부가 말한 조건을 200% 충족하는데 일부만 직접고용 됐다. 대통령이 인천공항에 직접 가서 선언한 게 안 지켜졌다.
프레시안 : 지금 문제가 되는 건보공단 상담센터 비정규직도 우리가 항상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책임감을 갖고 상시적으로 대민 업무를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직접고용 되지 못하고 있다.
조돈문 : 우리가 건보공단에 전화해 '보험료 왜 이렇게 됐냐. 제대로 책정됐냐. 산출근거 뭔지 알려 달라. 잘못된 건 바로 잡아 달라'고 하면 전문성을 갖춘 상담센터 비정규직이 1차로 전화 받고 필요하면 건보공단으로 토스해 실제 업무가 수행된다. 실제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업무가 서로 긴밀하게 통합돼있다. 보통은 상담 직원과 업무 처리 직원이 다 같은 건보공단 직원인 줄 안다. 그런데 아니다.
건보공단 상담센터 비정규직이 다루는 정보에는 민원인이 어느 병원에 다녔고, 무슨 검사를 받았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가 다 들어가 있다. 의료정보만큼 민감한 사적인 정보가 없다. 그런데도 상담업무를 민간에 위탁했다.
이건 태초에 민간위탁하면 안 됐다. 위탁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 상담업무는 민간위탁하기 전에 정규직이 하던 업무다. 정규직들이 전화 받기 싫어해 순환근무 시켰다. 그래도 하기 싫으니 외주화했다. 그러니 직접고용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계속)
‘어!’‘아!’ 같은 출연진의 헤픈 추임새와 이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연출이 돋보였지만, 내용은 허접했고 구성도 엉성했다. 매우 치밀해야 할 출연진의 멘트(해설.설명) 모두 두루뭉술했다. ‘아웅산 사건 = 북한의 테러’라는 메시지 전달 효과만을 노린 딴따라 쇼의 전형.
전두환과 장세동이 탄 차는 행사장에서 몇 분 거리에 떨어져 있고, 버마주재 한국대사(이계철)이 대통령 비서실장(함병춘)까지 대동한 채, 태극기와 버마기를 양 사이드에 달고 앞뒤로 싸이카가 배치된 벤츠를 타고 행사장에 왔고, - 꼬꼬무는 이처럼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 테러범들이 이 대사를 전두환으로 착각해 기폭 장치를 눌렸다면, 마땅히 왜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파고들어야 한다. 시키는대로 토막 대본을 읽는 출연진도 궁금한 표정을 짓지 않던가.
처음에는 서울에서 왔고 영등포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진술했던 범인 강민철이 갑자기 ‘나 북한 공작원이요’ 했다면 그 진술 번복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자폭용 수류탄을 줬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껴서 그랬다고? 그러면 손목이 날아간 채 몇 날 며칠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그 수류탄이 자폭용인 줄 몰랐어? 그게 곰곰이 생각해 보고서야 깨달을 일이야? 꼬꼬무는 이런 엉성한 논리로 역사를 농단했다.
정작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에서는 딴청을 피웠다. 버마 수사당국이 남북한을 특정하지 못해 “코리언이 범인이다”라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1983.10.17), 그 다음날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성용욱. 훗날 감사원 사무총장, 국세청장)과 과장(한철흠)이 급히 버마로 날아가 강민철에게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아냐!” 하며 설득한 뒤 강민철이 말을 바꿨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한철흠이 누군지는 아나? 이 자는 4년 뒤 전두환네와 미국이 또 한 번 자작테러를 조작한 뒤 바레인 병원에 - 실신한 척 하고 - 누워있는 김현희를 데리려 간 인물이다. 전 국정원 해외담당 차장을 지낸 라종일 씨가 2013년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서 “강민철은 김현희와 같은 부서에 있었다”고 쓴 것과 연결되는 지점. 이렇게 전후좌우로 통시적.공시적으로 살펴야 겨우 그 진상이 보일까 말까 한 ‘1983 버마 사건’을,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수준으로 하면 되겠어?
‘아웅산 테러 = 북한의 테러’를 강조하려 기를 쓰는 모습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출연자들이 ‘DIPLOMATIC POUCH’라고 새겨진 검은 가방에서 클레이모아(폭탄)와 묵직한 쇠덩어리 모양의 격발장치를 꺼내는 느릿한 영상. 외교행랑 이야기는 세세연연 ‘1983 버마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계속 추가되는 가공의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1983 버마 사건’과 관련해 가장 먼저 출간된 장세동의 책 <일해재단>(1995)에도 외교행랑 이야기가 없다. (장 씨의 이 책은 이후 나오는 ‘1983 버마 사건 관련’ 책자의 기준 역할을 하고 있다.) “[범인들이 모처에서] 2주간 머물며 ... 범행에 필요한 폭약과 폭파 장치 등 모든 장비를 이곳에서 준비하였다.”(64쪽) 그의 책에 실린 버마 법원 판결문에도 “[범인들이 랭군 모처에] 도착한 지 2일 후 그들은 그 방에서 폭발물을 받았으며...”로 돼 있다(316쪽). (*외교행랑으로 받았다고 하면 버마 정부가 책임을 질 부분이 생기니 그랬을 것이라고 상상들 하지 마시라. 외교행랑으로 받건 현지에서 만들었건 어떻게 설명해도 버마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버마 법원 판결문에 외교 행랑 이야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3년 나온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 “[범인들이] 거처를 잡은 지 이틀 후 ... 폭발물이 외교 파우치 편으로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갔다. 그런데 출처가 없었다. 전에 거론되지 않았던 사실을 밝히려면 출처가 있어야 한다. (*이 책에는 이처럼 출처불명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고, 지명도와 신뢰도가 높다는 ‘창비’에서 낸 책 답지 않게 구성이 매우 엉성하다.)
이북(북한)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떠벌리다 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몄지만, 외교행랑으로 클레이모어 폭탄을 나른다는 발상은 터무니없다. ‘북한 공작원들’(?)이 1주일 걸려 북한 화물선을 타고 와 버마에 온 뒤 다시 2주일 동안 은신처에 숨어 있었다는 각본만큼이나 웃기는 얘기다.
버마는 5개국과 접경하고 북동부 산악은 여러 무장 소수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태국에서 밀입국이 가능한 나라다. 전대미문의 테러를 저지를 특수공작원이 화물선에 실려 1주일, 다시 안가에 틀어박혀 2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테러의 배후와 범인들의 잠입 경로를 북한 화물선(동건애국호)의 버마 입항 일정과 꿰맞추려다 나온 웃기는 각본이다.
2.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연예든 다큐든 강연이든 책이든 반(대)론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역사 인식은 그 시대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그래서 ‘역사적 사실’은 항상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꼬꼬무가 감히 ‘1983 버마 사건’을 제멋대로 다루는 만용은 전두환 정권 및 그 시절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무식하니 용감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아웅산 테러를 포함해 우리 국민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자작테러가 무려 4건이나 자행됐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때문이다.
아웅산 테러의 진상을 재대로 인식하려면 위 네 건의 테러 각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왜 전두환 정권은 이런 끔찍한 자작테러를 네 건이나 자행했을까에 대한 사유가 따라야 한다. 이 사유는 우리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제로 한다.
이땅의 분단체제는 남녘의 대북 적대감을 기본 인자로 한다는 사실, 이 적대의 인자가 불식될 즈음이면 또 수상한 사건이 일어나 대북 적대감을 다시 부풀린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적지 않은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깊은 사유는커녕 개별 사건에 대해서조차 천박한 인식에 머문 채 역사를 논하는 것은 역사를 모독하는 것이다.
꼬꼬무는 올 2월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최병효, 박영사)가 나온 데 고무됐던 것일까. 이 책을 보여주며 저자의 멘트를 몇 개 땄다. 그런데 그 멘트가 영 어색하다. “비동맹 외교는 허수아비와의 싸움이었다.” “비동맹 외교를 한다고 하면 정부가 예산을 잘 배정해 줬다.” 일정부분 맞는 지적이지만 ‘1983 버마 사건’의 진상을 찾는 입장에서 보면 샛길로 빠지는 얘기다.
최 전 대사는 사건 당시 외무부 서남아과 서기관이었고 36년의 외교관 이력을 갖고 있다. 아마도 ‘1983 버마 사건’에 대해서는 가장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다. 그런 이가 은퇴 직후 책을 내고 ‘아웅산 테러 =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니 모두들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기록에 가깝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 뿐이다. 개인의 경험은 역사적 사유를 거쳐야 비로소 사회적 의의를 지닌다. 사유의 깊이에 따라 사회적 의미가 달리 부여된다. 그는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 현대사 및 국제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는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에 심하게 경도돼 있다. 이런 협소한 역사 인식에 갇힌 상태로 남북 분단의 모순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폭발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최 전 대사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졸고.「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 한-미의 버마 공작의 시원」<진실의 길> 2021.7.9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5155&table=byple_news 그가 말하는 비동맹 외교론이 얼마나 협소하고 몰역사적인지를 지적하고 싶었다.)
TV가 우리 역사의 음지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일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이 그랬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kbs <역사스페셜>. <이제는 ...>은 문세광 사건(1974.8.15, 육영수 살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계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말짱 거짓말이며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을 오래 전부터 주시해 왔다는 사실, 문세광을 사건 현장인 국립국장에 들인 것은 바로 청와대 경호실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mbc <PD수첩>은 KAL 858 사건에 대한 안기부 해설이 엉터리였음을 입증했다. 그 주인공 행세를 하는 김현희의 행로를 추적해 그의 증언과 안기부 해설이 모두 거짓임을 밝혀냈다.
이들 프로를 통해 분단체제의 늪에 빠져 있던 역사의 진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이들 프로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1983 버마 사건’의 진상도 어느 정도는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꼴통 정권’ 10년 간 언론 생태계가 엉망진창이 됐고, 이 지저분한 생태계를 살아가는 언론은 역사의 진실을 다시 구정물통에 빠뜨리려 한다. 제대로 된 다큐는 없고 빈머리 딴따라들의 잡담이 판을 치고 기레기들의 잡문만 넘쳐난다.
꼬꼬무도 지난 4월 ‘문세광 사건’을 다뤘다. https://www.youtube.com/watch?v=lDLMrNm_r78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16년 전 밝힌 사건의 진상이나 박정희네 청와대 경호실 및 중앙정보부가 사건에 개입돼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은 모두 빼거나 건성건성 다뤘다.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간간이 ‘음모론’ 운운했다. 사건의 진상에 대한 논의를 ‘음모론’으로 폄훼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런 현실을 단지 언론(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아웅산 테러나 KAL 858 사건 등은 이 나라 분단체제의 말뚝이고 쐐기와 같은 것이라 자칫 이 말뚝과 쐐기가 뽑힐까 두려워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분단체제의 말뚝과 쐐기를 박으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키워온 분단적폐 세력이 그들이다. 같잖은 책을 내고 이 방송 저 방송에 같잖은 프로를 만들게 하는 것은 이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3년 아웅산 테러 30주년에 맞춰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등 여러 책들이 동시다발로 출간됐고, 장세동의 <일해재단>도 이때 <역사의 빛과 그림자>로 재출간됐다.)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가 없는 것도 문제다. 역사학자니 남북관계 전문가니 하는 이들 누구도 우리 분단체제의 근간이 무엇인지, 이 반인륜적 체제를 누가 어떻게 70년 동안 유지하고 보수하며 지탱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이가 없다. 전두환 정권의 수상한 언동의 내막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전두환을 ‘대인배’라 칭하기까지 하니 ...
( 오마이뉴스 2016.2.27)
꼬꼬무 진행자도 아웅산 테러 직후 전두환 정권이 보복전쟁을(?) 하려다 말았다며, ‘어느 역사학자’를 들먹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울분을 참고(?) ‘제2 한국전쟁’을 촉발하지 않은 데 대해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고 말한 이가 있다고. 그런데 그 역사학자가 누군지를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코멘트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사학자’는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씨다. 2013년 KBS 다큐멘터리 ‘아웅산 테러 그리고 2013’에서 “저는 민주진영이기 때문에 전두환을 그렇게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전두환이 집권 기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이 아웅산 사태를 평화적인 무드로 갖고 갔고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은 것”이라며 “지나 놓고 보면 그래도 전두환 정권에 점수를 줘야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진보에 나름 기여하고 있고 사석에서는 자신을 ‘친북.종복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그가 ‘1983 버마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그래서 코멘트를 거절한 것은 아닐까? (끝)
“오늘 새벽 4시 출근, 경부선 마지막 승무를 마쳤다. 기관차 운전실의 높이가 2m30cm 정도라 저 멀리까지 시야가 확 트인다. 객실에서 보는 차창 밖 풍경과는 다르다. 부산역을 발차한 열차는 경부선 물금에서 밀양까지 낙동강과 함께 간다. 저 멀리 산자락에 유달리 연두빛은 대나무 숲이며 희끗희끗한 뭉치는 밤꽃들이다. 우리 강, 우리 산. 참 좋다. 매화에서 시작하여 저 멀리 산자락 마른 가지 사이 진분홍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 벚꽃, 라일락, 배나무, 사과나무, 오동나무, 아카시아, 이팝나무. 오늘은 저 집 뜨락의 석류나무 담벼락 능소화가 제법이다. 봄 내내 꽃 잔치이다. 꽃잔치는 이파리가 나기 전부터 시작하여 진녹색 산과 들에서 계속된다. 희한한 게 피는 시기마다 꽃 색이 비슷비슷하게 닮아있다. 분홍, 노랑, 흰색, 보라, 여름이 다가올수록 붉은색이 많다. 눈 호강 31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철도 노동자 김재하는 정년퇴직을 코 앞에 둔 지난 6월 18일 경부선 마지막 승무를 마치고 SNS에 글을 올렸다. 김재하는 1990년 철도청에 입사해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 배치된 뒤 철도 노동자로 31년 동안 일했다. 기관사로 일해온 시간을 지나 정년퇴직한 철도 노동자 김재하를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교남동 한국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6월 30일 정년퇴직 후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로 활동하기 위해 곧바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철도 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삶의 변곡점에 서다
“1990년 7월에 철도청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정년퇴직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니깐, 특별히 그만둔다는 느낌이 들진 않아요. 그래도 마무리할 때가 되니깐 30년 넘게 잘 살았는지, 활동을 잘했는지 조금은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60년생 79학번으로 올해 환갑이에요.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이 삶의 변곡점으로 느껴집니다. 삶의 절반을, 제 청춘의 대부분을 보낸 철도를 떠나는 거잖아요.”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김재하. 2021.07.03ⓒ김철수 기자
철도 노동자로, 노동운동가로 살아 왔던 시간이 일단락되고, 활동은 계속되지만 활동하는 장은 달라지는 변화를 그는 ‘삶의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김재하는 지난 1월 정년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철도 현장에 복귀했다. 철도 일선을 떠나 철도노조 부산본부장으로 2년을 일하고,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8년 동안 전임으로 일한 뒤 10년 만의 복귀였다. 지난해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민주노총이 위기를 딛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현장으로 돌아온 그에게 6개월은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10년 동안 바뀐 시스템을 공부하고, 견습 승무를 거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으로 열차 운전실에 올랐다.
“마지막 운행을 나서며 이제 운전실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은 끝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실에서 보는 풍경은 너무 좋아요. 기관사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혜이고, 행운이에요.
“짧은 시간이지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간이 지나면 ‘승무하고 싶어도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에 너무 소중한 시간이라고 느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네요.”
소중했던 6개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그에게 남았던 가장 큰 아쉬움은 철도 기관사만이 느낄 수 있는 행운을 이젠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행운은 그가 “눈 호강 31년”이라고 표현했던 벌판을 앞서 달리며 그 누구보다 계절을 먼저 만나는, 기관사들에게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기차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마지막 운행을 나서며 이제 운전실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은 끝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실에서 보는 풍경은 너무 좋아요. 기관사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혜이고, 행운이에요. 운전실이 꽤 높아서 쫙 뻗어 있는 선로가 멀리까지 보여요, 700미터마다 신호기가 있어 그걸 살피며 운행을 하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계절을 느끼고, 만나요. 겨울이 오는 것도, 꽃피는 봄이 오는 것도 가장 먼저 느끼거든요.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절경도 많이 봤어요. 예를 들면 해 뜨는 풍경이 대표적이에요. 부산 해운대에서 송정 사이에 있는 동해남부선 구간에 웨딩 촬영도 많이 하는 명소가 있어요. 경주에서 출발해 동해로 가는 새벽 열차가 해 뜰 때쯤 그 구간을 통과하는데 말 그대로 절경이에요. 일부러 보고 싶어도 못 보는 풍경이에요. 기관사를 그만둔다니 ‘이제 그런 풍경을 볼 수 없겠구나, 계절을 먼저 만나는 행운도 이제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노협이 만들어지자마자 그해 몇 개월 시험을 준비해서 철도청에 들어갔어요. 현장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거든요.”
남들보다 먼저 계절을 만나는 행운의 직업인 기관사로 그가 일하게 된 건 노동 현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산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김재하는 그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그러했듯 공장 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86년 부산 사상공단에 있던 알루미늄 주물 공장인 남일금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공장을 떠나 부양노련(부산양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교육선전 국장을 맡아 1990년 1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만들어질 때까지 활동했다. 하지만, 노동단체 간부 생활이 길어지면서 현장노동자로 일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전노협이 만들어지자마자 그해 몇 개월 시험을 준비해서 철도청에 들어갔어요. 간부 생활을 오래 하니깐 시간이 지나면서 현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현장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거든요.”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김재하. 2021.07.03ⓒ김철수 기자
1990년 7월 철도청에 입사한 그는 4주 동안 교육을 받은 뒤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 배치돼 기관조사(부기관사)로 일을 시작했다. 철도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현장에서 부딪치며 기관사 업무를 하나둘 몸으로 익혔다.
“기관조사는 기관사를 보좌하면서 기관사 업무를 익혀요. 기관사들은 선로를 외워야 하거든요. 객실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선로는 곡선도 많고, 오르막 내리막도 있어요. 곡선 코스마다 제한속도가 있고, 노선을 운행하려면 선로 상황을 눈감고도 그릴 수 있어야 해요. 거기에 기관차가 화물열차일 때와 여객열차일 때 운전법도 서로 달라요. 그런 과정을 기관조사를 하며 배우는 거예요. 또한, 안전 때문에 꼭 2명이 타야 합니다.”
햇병아리 기관조사 시절 열차 탈선으로 울산 태화강 추락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에요”
1991년 8월 입사 1년이 갓 넘은 아직은 햇병아리였던 김재하에게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열차운행 중에 큰 사고가 난 것이다. 기관조사로 일하던 당시 동해남부선 열차운행을 하다가 울산 명촌철교에서 탈선해 태화강에 떨어진 것이다. 당시 사고는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사고였다.
1991년 8월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 사고 기사. 기사 본문엔 김재화라고 이름이 틀리게 나와 있다. 당시 사고로 김재하는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왼쪽은 당시 신문기사. 오른쪽은 울산시 블로그에 있는 명촌철교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울산시청 블로그
“기관조사로 일할 때예요. 과적 트레일러가 지나가면서 철교 아랫부분에 충돌했어요. 당시는 휴대전화도 없고, 신호시스템도 전자연동도 아니어서 기관사는 사고가 난 줄 알 수 없었어요. 트레일러 기사는 연락하려고 자리를 떴고, 우리는 반대 방향에서 운행하고 있었는데 선로가 휜 걸 보고 뒤늦게 제동을 했지만, 강물에 떨어졌어요. 그나마 화물열차여서 승객이 다치진 않았고, 속도도 줄어들었고, 열차가 연결된 상태에서 기관실이 있던 부분만 반쯤 물에 빠져 피해가 적었어요. 그러나 기관사와 제가 태화강에 떨어져서 크게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했다 복귀했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에요.”
김재하가 철도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청 소속의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직종은 아니었다. 당시 공무원은 박봉에 시달렸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월급은 적었고, 노동조건도 열악했기 때문에 대졸자들은 지원을 꺼렸다. 그가 입사할 당시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서 일하던 700여 명 가운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열차운행 시간에 따라 근무가 이뤄지는 교번근무여서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했어요. 거기에 노동시간도 월 240시간으로 길었어요. 요즘은 월 165시간이거든요. 지금보다 한 달에 75시간이나 더 일했어요. 더구나 당시 기관차는 열기와 냉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구조였고, 냉난방도 안 됐어요. 엄청난 소음이 나는데 방음이 안 됐어요. 그래서 소음성 난청에 시달리는 기관사들이 많아요. 지금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날 거에요.”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렸지만, 철도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무기인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당시 철도청은 공무원 조직이었지만 노동조합이 존재했다. 공무원 조직 가운데선 철도청과 우편을 담당하는 체신부만 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철도노조는 사용자인 철도청의 입장만 대변하는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했던 어용 철도노조의 굴욕적인 역사
철도노조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철도노조는 해방 후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태동시킨 조직이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이 조직한 총파업을 주도했던 주력부대였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 청년단은 전평을 공격했고, 철도노조도 당시 서북청년단 등 우익 출신 간부들에 의해 장악당했다. 철도노조는 1947년 우익 청년단들이 주도해 만든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약칭 대한노총) 산하 조직으로 바뀌었고, 철도노조 강령엔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한다는 구절이 담기게 됐다. 이후 이 구절은 57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개정을 통해 철도노조 강령에서 빠졌다.
1945년 11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대회 장면. 단상에 미국, 영국, 소련 등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걸려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라는 구호도 보인다. 철도노조는 당시 전평의 주축 세력 가운데 한 곳이었다.ⓒ기타
철도노조가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하며 ‘어용노조’를 50년 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건 ‘3중 간선제’ 때문이었다. ‘3중 간선제’는 세 번 간접선거를 거쳐서 철도노조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다. 각 지역 지부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이 각 지역본부 대의원을 뽑고, 그 대의원들이 다시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을 뽑아서, 그 대의원들이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다. 당시 조합원은 3만 명이 넘었지만,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은 93명에 불과했다.
“간접선거로 뽑히다 보니 조합원들은 단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노조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이런 현실을 바꾸려고 노조에 민주적으로 활동하라고 요구하면 오히려 노조에서 해당 조합원을 징계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저항하면 아예 조합원을 제명했습니다. 저도 당시에 규율을 위반했다고 징계당한 적이 있어요. 이런 게 다 어용노조의 전형적인 수법이에요. 징계를 당하면 출마를 못 하거든요. 민주파를 거세하기 위한 용도로 징계를 활용한 거지요.”
1988년과 1994년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뿌린 민주노조의 씨앗
이런 철저한 견제와 방해 속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철도 노동자들은 꿈틀거렸다. 노조 지도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관사들이 독자적으로 나서 파업을 조직하는 등 격렬하게 투쟁했다. 그렇게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씨앗은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제가 입사하기 전인 1988년에 기관사들이 파업에 돌입했어요. 일종의 불법 파업이었습니다. 노조에서 공식적으로 쟁의권 얻어서 한 파업이 아니었거든요. 당시 기관사들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교대 없이 운전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던 근무 환경을 바꾸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해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지급할 것 등을 요구하며 싸웠어요. 그런데 깨졌습니다.”
당시 1988년 올림픽을 50여 일 앞두고 벌어진 파업을 전두환 정권은 강경하게 진압했다. 곧바로 전국의 농성장에 전투경찰을 투입해 1,653명이 연행됐고, 파업지도부 11명이 구속됐으며, 3명이 파면됐다. 무참하게 깨졌지만, 이때의 투쟁은 1989년 5월 훗날 민주노조의 토대가 된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기협은 1994년 서울지하철노조, 부산교통공단노조와 함께 기차, 지하철 총파업에 나섰다.
1994년 6월 24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철도 파업 기사ⓒ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94년엔 전기협이 파업에 나섰어요. 철도와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이 함께 변형근로제 철폐를 요구하며 싸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탄력근로제 철폐를 요구한 거예요. 서울 지하철하고, 부산지하철은 합법노조였고, 철도는 기관사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지만, 노조 조직은 아니었어요, 이 세 주체가 모여 파업을 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산에선 부산지하철과 같이 파업했는데 저도 당시 간부로 일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저와 함께 있던 부산기관차 소속 동료들이 10명이나 파면됐어요. 아마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파면 됐을 겁니다. 동료들이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 모두들 철도노조를 민주화하지 않고는 우리들의 초보적 권리도 얻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철도노민추)를 만들고, 노조 민주화에 나섰어요, 저도 그때 징계를 당했습니다. 파면 동지들은 이후 10년이 지나 복직을 했고요.”
철도노조 민주화에 나선 노동자들 어용노조를 지탱해온 토대인 ‘3중간선제’를 ‘직선제’로
1995년 철도 노민추가 만들어진 뒤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은 본격화됐다. 1996년 철도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평소 1%인 조합비를 상여금 지급한 달에는 2% 징수하도록 인상한 것에 반발해 투쟁을 조직하는 등 여러 활동에 나섰다. 아울러 어용노조를 지탱해온 토대인 ‘3중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투쟁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1999년과 2000년 철도노조 직선제 쟁취를 요구하며 격렬하게 싸웠어요. ‘3중간선제’로는 민주노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당시 투쟁 과정에서 저도 1년 넘게 부산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동해 지역으로 일종의 유배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동해에 있던 2000년 1월에 기대하지 않았는데 대법원에서 ‘3중 간선제는 무효’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철도노조 직선제의 길이 열리게 됐어요.”
2001년 열린 철도노조 첫 직선 선거에서 민주후보인 김재길 위원장이 당선되자 환호하는 철도 노동자들. 사진은 철도노조 창립 기념영상에서 캡쳐한 장면이다.ⓒ유튜브 캡쳐
2000년 1월 14일 나온 대법원의 ‘3중 간선제 무효’ 판결은 1996년 철도 노민추가 조합비 부당 인상에 맞서 싸웠던 투쟁과 연관이 있다. 당시 조합비 인상 반대 투쟁 과정에서 철도 노민추 소속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1996년 5월 전국철도노조가 ‘96년도 전국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보선하고, 조합비 납입방법 등을 개정한 것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간선제에 의한 전국대의원 선출 방식 등이 ‘대의원을 조합원의 직접·비밀·무기명투표에 의해 선출’하도록 규정한 노동조합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위법한 방식으로 선출된 대의원 조직의 결의는 무효라며 ‘대의원회결의부존재확인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1심과 2심에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대의원을 간접 선출토록 한 규약이나 선거관리규정 등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7조 제2항(대의원은 조합원의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에 위배된다”며 ‘무효’라고 판결했다.
직선제 쟁취로 드디어 올린 민주노조의 깃발
“대법원 판결 이후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만들고 본격적인 직선제 투쟁에 나섰어요.”
공투본은 규약개정 없이 대의원선거를 강행하려는 당시 지도부에 맞서 용산역에 있는 철도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66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공투본 지도부를 제명하는 등 직선제를 막으려했지만, 결국 2001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2001년 2월 열린 첫 직선제 선거를 앞두고 철도노조 민주파에선 ‘생존권 사수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철도노동자 투쟁본부’를 만들었고, 투쟁본부 김재길 위원장이 출마해 당선되면서 철도노조는 54년 만에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민주노조가 생긴 뒤 김재하는 2002년 노조 정책기획실장을 했고, 2003년엔 철도, 발전, 가스가 공동으로 민영화 저지 파업을 할 때, 공동투쟁본부 상황실장을 하는 등 열심히 투쟁에 나섰다. 그는 함께했던 민주노조 지도부들의 고생이 컸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해방시기 전평 이후 처음으로 나섰던 2003년 전면파업… “힘든 투쟁이었지만,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어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철도 관련 산업재해로 많은 노동자가 죽었어요. 노동강도는 높았고, 복지나 처우는 좋지 못했어요.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하는데 직선으로 민주파가 지도부를 차지했지만, 아직 기층은 역량이 부족했어요. 당시 노조 숙소에서 생활했는데, 일 년 동안 숙소에 간 날이 며칠 안 됐어요. 기초부터 다져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각종 현안이 쌓인 상황이었는데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국토교통부가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1기 지도부로 함께 일한 동지들이 거의 집에도 못 가고 싸웠어요. 그러다 민영화 저지를 두고 발전, 가스와 함께 2003년 공동파업에 나섰어요. 철도 노동자들로 보면 해방 직후 전평 시절 파업을 한 뒤 노조 차원의 전면파업은 처음이었어요. 힘든 투쟁이었지만,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어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당시 철도, 발전, 가스가 같이 했는데 철도와 가스는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었고, 발전은 민주노총 소속이었어요. 그런데도 의기투합하고, 동지적 의리를 잘 지키며 함께 싸웠어요. 당시 김대중 정권 시절인데 민영화 반대 투쟁에 국민적 지지도 나름 있었어요.”
“철도공사 등에선 조합원을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서로를 믿으며 집단성과 투쟁성으로 맞설 수 있었어요.”
전평 이후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하며 빼앗겼던 철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고 철도를 멈추며 감격스러운 투쟁을 벌였지만, 김재하는 이 투쟁으로 인해 구속·해직되고 말았다. 2008년 복직되기 전까지 그는 해고자 신분으로 궤도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2004년 파업을 이끌었고, 전국철도노조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철도노조는 다른 노조와 비교해 민주노조가 늦게 만들어졌다. 다른 노조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지만, 철도노조는 2000년 들어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민주노조가 늦게 만들어졌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의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 잡으며 여러 차례 파업 투쟁에도 나섰다. 이런 투쟁이 가능했던 건 해고를 각오하고 나섰던 철도 노동자들의 의지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집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민영화저지 공동파업 당시 철도노조원들을 강제로 집안하는 경찰들. 사진은 철도노조 창립 기념 영상 중에서 캡쳐한 장면ⓒ유뷰트 캡쳐
“철도는 2000년 이후 파업을 많이 했어요, 때문에 많은 해고자가 나왔어요. 임금 인상 이외에 민영화 등 정부 정책에 맞선 파업은 다 불법이기 때문이에요. 지부별로 파업하면 누가 해직될지 거의 알아요. 그런데도 각오를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을 땐 조합원 절반은 필수유지 인력으로 절반은 파업에 나섰어요. 파업에 나서면서 1천만 원 정도 손해가 생겼는데, 그 손해도 전체가 균등 분배해 나눴어요. 철도공사 등에선 조합원을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서로를 믿으며 집단성과 투쟁성으로 맞설 수 있었어요.”
"제가 후배들을 만나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노동자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그래야 내 권리도, 자신도 보호받는다고 말해요. 이 시대에 철도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해야 합니다.”
아울러 민주노조 건설로 인해 더욱 커진 철도 노동자의 단결된 힘은 그들의 일터를 바꿨고, 국민을 위한 공공재인 철도가 민영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철도노조 민주화는 직장 내에서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철도 조직은 그동안 매우 권위적이었거든요. 규율도 세고요. 폭언, 폭행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등 매우 전근대적인 직장문화였어요, 그런 부분들이 민주노조 건설 이후 개선됐습니다. 또 철도 사유화에 제동을 건 것도 민주노조 건설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에요. 신자유주의 민영화, 사유화 물결을 가스 발전과의 공동파업 등으로 제동을 걸었거든요.”
민영화 물결에 제동을 걸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철도 노동자들에게 더 큰 사명감으로 요구한다. 김재하는 철도 내부 구성원들이 공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꼭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쟁을 시키겠다면서 SRT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SRT는 정식 직원이 기관사밖에 없어요. 철도 차량 정비는 물론 선로도 철도공사에서 유지보수를 합니다. 우리는 공사에서 월급을 받지만, 넓게 보면 국가 세금으로 받는 거라고 봐요. 돈벌이해서 월급 받는 게 아니거든요. 이윤을 이야기하지만, 철도는 이윤이 안 남아도 공익을 위해서 해야 하는 공적 기능이에요. 내부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등 노력이 필요한 건 맞지만, 이윤과 경쟁의 논리로 운영하겠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다른 공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철도는 특히 그러합니다. 물론 내부 구성원들이 고칠 부분도 많아요, 공적 기능에 맞는 사명감도 필요하고요. 제가 후배들을 만나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노동자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그럼으로써 내 권리도, 자신도 보호받는다고 말해요. 이 시대에 철도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해야 합니다.”
2015년 9월 16일 부산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소속 조합원들이 ‘노사정 야합 주범 노동부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당시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을 맡았던 김재하는 삭발을 했다.ⓒ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철도를 떠나지만,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도에 대한 애정이 여전한 철도 노동자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믿고 함께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노조 간부 생활을 오래 했어요. 1990년에 입사해 지부 간부로 시작해 지도부로 오래 일해왔습니다. 그동안 지도부를 믿고 따라준 동료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요. 활동하다 보면 지도부는 맡은 역할에 의해 지침 내리기도 하는데, 현장의 간부나 조합원들이 안 따라주면 소용이 없어요. 자신들 입장에선 어떤 건 감내하기 힘든 투쟁이었을 것이고, 또 지도부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릇된 판단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지도부를 믿고 단결하며 지침에 따라 투쟁해준 조합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철도노조 간부로 일했던 게 복이에요.”
“지금 청년은 고통받는 세대예요. 사회 구조에 자유로울 수 없어요. 사회 시스템, 제도를 변화시켜야 출로가 열려요. 진보진영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사회개조에 같이 나서야 합니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다. 이번에 많은 동료가 함께 정년퇴직했다. 철도 노동자로 첫발을 내딛던 30년 떠올려 보면 김재하는 자식 세대인 지금의 2030세대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그는 오늘의 청년들이 고통받는 세대라며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함께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서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월 8일 서울 중구청이 노점상을 대상으로 행정대집행하려 하자 이를 막기위해 현장에 함께한 김재하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페이스북 캡쳐
“청년들을 두고 개인주의가 심화됐다는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나이에 의한 차이, 시대의 흐름에 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청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 아버지도 날 그렇게 봤을지 모르거든요. 지금 청년은 고통받는 세대예요. 사회 구조에 자유로울 수 없어요. 대부분 취직, 주거, 앞으로의 전망 등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절망적인 표현까지 나올 정도예요. 모든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실업문제만해도 청년실업 해소는 노년 정년 연장과 충돌해요. 절대 개인이 풀 문제가 아니에요. 노동력의 재배치 등 모두가 연동됩니다. 사회 시스템, 제도를 변화시켜야 출로가 열려요. 진보진영도 이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사회개조에 같이 나서야 합니다.”
“불평등을 넘자면 우선 불평등에 저항하는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
31년 철도 노동자 생활을 마감한 김재하는 이제 ‘삶의 변곡점’에 섰다. 그동안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 각종 사회운동의 선두에서 일해온 그에게 이후의 삶도 이전의 여정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와 전국민중행동 조직강화특위장을 맡은 그는 얼마 전 ‘민플러스’에 기고한 글에서 “재벌과 수구보수세력은 말로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떠들지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과실을 따 먹는 세력이다. 집권여당은 불평등을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의심스런 집단이다. 누굴 쳐다보고 어디에 기댈 것인가. 바로 노동자 민중, 우리 자신들”이라며 “불평등을 넘자면 우선 불평등에 저항하는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내년 봄 대선판과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예상된다. 권력이 어디로 가든 누가 집권한들 불평등의 사회는 그대로라는 것을 우리들은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열전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도 그가 외친 건 투쟁이었다.
“한반도의 자주와 평등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대중조직,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투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