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체제선 ‘환경보다 경제’ 불가피 하지만 기후위기 대응 방법 찾아야 더 일찍 준비할수록 더 쉬워진다
미국 대선은 정치를 넘어선 사안 트럼프 재선 타당하지 않다
그레타 툰베리가 16일 한겨레 취재진과 화상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재인 대통령이 내가 하는 일을 존중해준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증명해달라.
행동이 말보다 훨씬 의미 있다.” ‘기후위기 운동의 얼굴’이자 ‘미래 세대의 대변인’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17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그는 지난 16일 <한겨레>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후위기 대응에 소극적인 각국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꾸짖어온 10대 환경운동가가 한국의 지도자에게 보낸 첫 메시지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스웨덴 총리 방한 당시, 툰베리가 <타임>이 선정한 역대 최연소 ‘올해의 인물’이 된 것을 축하하며, “세계 최초의 화석연료 없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스웨덴의 노력이 세계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이어 툰베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린’(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그린뉴딜’로 그리고 있는 장밋빛 미래를 비판적 시각에서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툰베리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 석탄발전에 투자한 사실에 대해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답했다. 이어 “(세계를 이끄는) 리더로 불리는 나라들도 경우에 따라 ‘악당’이 될 수 있다. 기후위기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경제를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거의 다 하는 경우들이 있다”고 말했다.특히 다음달 3일 치러지는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툰베리는 “(일국의) 정치를 넘어선 사안”이라며 “지금까지 배출된 온실가스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에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새 대통령은) 과학을 근거로 기후변화를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이번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미국은 곧바로 세계 197개국이 합의한 파리기후변화협정을 공식 탈퇴하게 된다.툰베리는 2018년 8월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1인시위를 시작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시위는 각국으로 확산됐고 현재는 한국을 포함한 133개국 160만명이 동참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다. 여러분이 우리를 저버린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각국 정상들을 쏘아보던 그의 눈빛과 말투는 기후위기 문제를 단숨에 전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9월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 중인 그레타 툰베리. 그는 이 자리에서 분노를 드러냈다. 세계 정상들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다. 여러분이 우리를 저버린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세계인들에게 기후위기 운동을 각인시켰다. 연합뉴스.
2019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그레타 툰베리를 선정했다. 역대 최연소였다.
아래는 툰베리와의 인터뷰 전문
“지구의 가장 위대한 변호인”지난해 9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그레타 툰베리를 이렇게 추켜세웠다. 미국을 찾은 툰베리를 만난 직후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말대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이자 대표적 환경운동가로 떠올랐다. 2007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뒤 잠잠해진 기후위기 담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8년 학교에 가지 않는 ‘결석 시위’를 시작해 각국으로 확산시킨 그는, 새로운 환경운동을 ‘하드캐리’(실력자가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는 뜻)하고 있다. 수백만명의 팔로어(트위터 420만명, 인스타그램 1050만명)가 있고, 담당 미디어팀이 따로 있는 세계적 ‘셀럽’(유명인)이기도 하다. 지난 16일에는 툰베리의 활동과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아이 엠 그레타>가 개봉돼 국가별로 순차 상영을 시작했다.툰베리는 기후위기 문제는 엄중한 데 비해,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의 행보는 더디다는 현실에 주목해왔다. 현재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인 100여년 전보다 1도가량 올랐다. 이대로 인류가 온실가스를 계속 배출해 지구 평균기온이 1.5도 이상 오르게 되면 지구 기후는 인류의 노력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변화를 겪게 된다.지난 16일 화상으로 이루어진 툰베리 인터뷰는 <한겨레>가 올해 4월 기후변화팀 신설 뒤 수차례 요청한 끝에 성사됐다. 이날도 ‘미래를 위한 금요일’ 결석 시위를 마치고 온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집에서 7000㎞ 떨어져 있는 서울의 기자들과 눈을 맞췄다.
분노하고 저항하는 미래 세대의 아이콘
―올해 기상이변, 코로나19 등 환경 이슈가 많았다. 당신에게 올해는 어떤 해였나?“모든 사람에게 올해는 위기의 해다. 우리는 인간이 매우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됐다. 우리의 위기 극복 능력을 지금까지 과대평가해왔는데, 우리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점검할 때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결석 시위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어떤 변화를 느꼈나?“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이 놀라웠다.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매우 놀라웠다.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그저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공동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청소년들이 결석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우려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각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위기로 생각하지 않고 온실가스도 크게 줄고 있지 않다.”그는 전사다. 기후위기 문제를 가해자(온실가스 과배출 정부, 기업, 이를 방조한 어른 세대)와 피해자(저배출 국가, 미래 세대)로 나누어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묻는다. 더는 북극곰을 살려달라는 호소에 그치지 않고, 더는 교양 있는 지구인의 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자녀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라고 한 지난해 9월 유엔에서의 연설은 기후위기 문제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어른 세대의 심장에 화살을 꽂아넣었다.“모두가 잘못한 게 아니라 몇몇이 잘못한 거예요. 지구를 구하려면 그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 그리고 그들에 돈에 맞서 싸워야 해요. 그들이 잘못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고요.” (그의 가족이 쓴 책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133쪽 그가 한 말)그의 솔직하고 용감한 발언이 전세계 수백만명의 청소년과 청년을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나오게 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태평양 섬 나라가 물에 잠기는 것은 안타깝지만, 나의 삶과 솔직히 상관이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사람들도 10대 청소년들의 분노와 절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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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툰베리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일부 사람들이 그에게 ‘보여주기식’ 행동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는 질문에 그는 “내 행동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라기보다 기후 위기 논의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그레타 툰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는 지지 않는다. 그에게 “분노 조절 문제에 신경쓰라. 진정해”라며 조롱하듯 트위터 글을 남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고 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기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분노조절 문제에 신경쓰는 20대 청소년. 현재 진정하고 친구와 좋은 옛 영화를 보고 있음”이라고 자기 소개를 바꾸며 트럼프의 조롱을 가볍게 방어했다. ‘스트롱맨’들과 맞서는 용감한 10대 소녀는 환경 운동을 넘어 어른 세대에 저항하고 분노하는 미래 세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진보적 사고로 젊은 세대로부터 지지를 받는 루스 베이다 긴즈버그 미국 대법관을 추모하는 글이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와있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스트롱맨’과 맞서는 그레타 툰베리는 젊은 세대의 분노와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일러스트 이민혜.
“그린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말라”
―1년 전 유엔에서 당신을 향해 박수 친 각국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이 당신의 연설 내용을 정책에 반영했다고 생각하는가?“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을 보면 거의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 아직 기후위기를 위기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내 답은 ‘아니다’이다. 지금까지 배출한 온실가스 총량 등 역사적인 책임을 봐야 할 필요도 있다. 어떤 나라들은 다른 나라보다 많은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고,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파리협정에서도 부유한 나라들이 저개발 국가에 삶의 질을 개선할 기회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 참석할 당시, 청와대는 툰베리의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후 문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가 한국을 찾았을 때, 미국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역대 최연소 ‘올해의 인물’에 툰베리가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고 전했다. 툰베리에게 보인 관심과 달리, 한국은 대외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에 미온적이며, 심지어 석탄발전에 여전히 투자하고 있는 ‘기후악당’으로 꼽혀왔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을 두고, ‘무늬만 그린’이라는 혹평이 제기되기도 했다.그는 한국의 이러한 상황을 알리는 사전 질문지에 “특정 국가만의 잘못이 아니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잘못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실제 인터뷰에서는 ‘그린’을 앞세운 정치인과 정부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여한 그레타 툰베리가 ‘미래를 위한 금요일’ 결석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도 세계 11위의 온실가스 배출국가(2017년 기준)다. 한국의 그린뉴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전세계 여러 나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그린, 그린딜, 그린뉴딜, 친환경 투자 (green investments)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린은 단지 색깔에 불과하고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누구도 그린이 어떤 의미인지 결정한 적이 없다. 그린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다. 단지 좋게 들릴 뿐이다.”―한국에선 ‘환경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논리가 여전하다.“현재 시스템에서는 그들이 맞다. 과학이 지적한대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우리 사회 자체를 완전히 폐쇄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수십년 전부터 준비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더 일찍 시작할수록, 더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한국의 한국전력이 베트남에 석탄발전소에 투자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매우 큰 문제다. 기후 문제에 ‘리더’라고 불리는 국가들이고 ‘악당’인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기후문제 앞장선다고 알려져있지만 하고 싶은 일들은 거의 다 하고 있다. 어떤 국가들은 리더 국가들이 해 놓은 일들 비판받기도 하는데 매우 정당하지 않다”―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문 대통령이 내가 하는 일을 ‘존중한다’(admires)고 말했다면, 행동으로 증명해주면 좋겠다. 행동이 말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11월3일 치르는 미국 대선은 요즘 그의 최대 관심사다. 툰베리는 지난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 투표하자”는 글을 남겼다. 올해 미국 대선은 기후위기 문제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 짐작된다.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이전 오바마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정책을 무력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그는 ‘왜 트럼프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웃으며 “(웃으며) 나는 어떤 경우라도 정치 관련된 이야기는 해오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정치를 넘어선 문제다. 올해 미국 대선은 정치를 넘어선 사안”이라며 “다음 미국 대통령은 다른 모든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근거로 기후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은 매우 부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한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배출된 전세계 온실가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탄광 속 카나리아…툰베리를 움직이는 동력은?
그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탄광 속 카나리아’였다. 쉬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온실가스로 포위된 지구에서 숲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사라져가는 소식에 그와 같이 환경감수성이 충만한 이들은 아프기 시작한다. 마치 탄광의 차오르는 가스를 미리 감지하고 죽어가는 카나리아같다고 생각했다.섭식장애가 있어 평소 매우 소량의 식사만 매우 천천히 하는 그는 지난해보다 더 야윈 모습이었다. 야스퍼거 증후군(사회관계형성에 어려움을 겪으며 특정 상황에 집중을 잘 하는 발달장애 일종)을 겪는 그는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렌즈를 통해 눈을 맞추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두고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작은 몸에서 큰 에너지를 내기까지는 그에게 기후위기 문제가 매우 극심한 스트레스라는 것은 분명했다.
8살의 그레타 툰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한겨레>는 청소년기후행동을 통해서도 그에게 궁금한 질문을 모았다. 많은 청소년들이 그와 같은 슬픔과 아픔을 경험한다고 했다. 그들은 기후위기 문제로 인해 미래를 저당잡힌 삶, 그리고 이 미래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이미 지구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어른 세대의 무관심과 무책임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때문에 더욱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와 함께 한국에서 ‘결석 시위’에 참여했고, 지난 3월 “기후위기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정부와 국회때문에 생명권 등 기본권이 침해받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당신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운동에 함께 하는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 모두와 함께 기운을 북돋고 있다. 우리 가족과 강아지. 그리고 이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하고 있다. 앞으로 있을 일을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다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이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해야 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족과 강아지, 청소년들과의 연대 등을 꼽았다.
2018년 8월 시작한 ‘미래를 위한 금요일’ 결석 시위는 160개 국가로 확산됐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그저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공동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청소년들이 결석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우려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청소년들은 당신에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푸틴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같은 기후위기 부정론자들과 싸우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흥미로운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어디에도 숨을 데가 없다. 그래서 청소년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기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신들이) 논리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 대한 공격이 다른 무엇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기특하다, 잘 한다”고 하면서 정작 청소년들의 외침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어른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물었다.“그건 매우 좌절감을 주는 일이다. 우리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기특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나 우리와 셀카를 찍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변화를 위해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얼마나 서로 큰 간극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지난 2월 영국 브리스톨에서 기후 파업에 나선 시민들과 그레타 툰베리. 연합뉴스.
―기후위기 문제를 알아갈수록 미래가 어둡다는 사실에 우울하다고 느끼는 청소년들이 많은 것 같다.“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우울했고 슬펐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 했고 우울감을 느꼈다. 그러다 가장 좋은 약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바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한지, 누가 불편한 질문들을 하는지, 누가 낙관적 생각을 갖고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한국의 청소년들에게 할 말은.“우리는 함께 맞서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그 크기는 다르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는 모두 결속해 함께 행동해야 하고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레타 툰베리가 지난 3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의회 환경위원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건강은 괜찮나. 1년 동안의 안식년을 마무리하고 학교에 돌아왔는데 기분은 어떤가.“좋다. 학교에 돌아와 평범한 10대가 돼 좋다.”―지구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나.“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만큼의 시간은 언제나 있다. 기후위기를 막지 못하게 되는 특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시간이 있다. 앞으로의 시간이 중요하다. (더 나빠지지 않고) 현재 상태를 유지시키는 시간 말이다.”그가 요트를 타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대서양을 건너갔을 때 일부 언론과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보여주기식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은 비행기를 타지 않아 온실가스를 배출시키지 않았지만, 요트를 수리하고 조종하는 노동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시켰다는 분석이 더해지면서 그의 활동을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사람들이 나를 돕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나의 행동은 우리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행동”이라며 “요트를 타는 것은 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후 관련 논의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단호하게 설명했다.미래 어느 순간 지구인들은 오늘을 돌아볼 때 어떤 감정이 들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지구를 대변하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할까. 그의 야윈 얼굴과 대비되는 형형한 눈빛이 계속 미안함을 느끼게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기후위기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달라”는 당부였다.(※인터뷰 전문과 동영상은 <한겨레> 누리집(www.hani.co.kr)과 한겨레 티브이,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최우리 김지은 기자 ecowoori@hani.co.kr
지난해 12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COP25에서 연설 중인 그레타 툰베리. 연합뉴스.
그레타 툰베리는 ‘탄광 속 카나리아’같다. 탄광의 가스 농도를 가장 먼저 알아채는 카나리아처럼, 지구인들 중 지구와 환경의 위기를 가장 먼저 느끼고 아파한다. 모든 지구인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 택배연대노조가 최근 숨진 택배노동자 고(故) 김원종씨를 기리고, CJ대한통운을 규탄하기 위해 17일 오후 서울 도심에서 행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사진 : 뉴시스]
택배노동자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CJ대한통운 40대 김원종씨를 비롯하여 불과 일주일 사이에 3명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올 들어서만 10번째 사망사고이다.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니 채찍만 없을 뿐 고대 노예나 다름없는 참으로 잔인한 죽음이다.
문제는 이것이 예견된 사태라는 데 있다. 공짜노동, 장시간노동, 신속노동, 저임금노동, 불안정노동이라는 5중고에 코로나19로 폭증하는 배달물량을 소화하다보니 예년에 비해 사망률이 3배나 증가했다. 5만여 택배종사자들이 지금 멀쩡하다고 볼 수 없는 심각한 지경이다. 택배노동자들은 주당 71시간, 야간·초과근무가 일상화됐지만 순소득은 약 234만원 수준으로 시간대비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택배배송업무는 실제 7~8시간이나 택배업체는 거의 6시간 정도의 분류, 상‧하차 작업에 택배노동자를 공짜로 부려먹는다. 결국 하루 노동은 13~16시간으로 늘어난다. 숨진 한진택배 김씨는 하루 420개의 물량을 배달했고 새벽 4시까지 일했다고 카카오톡에 남겼다. 20년 경력의 택배기사 김원종씨는 매일 하루 14~15시간 일했다. 심할 경우 3분에 한 가구씩 배달을 해야 한다. 초보자나 배송구역이 넓은 노동자는 끼니를 거르면서 뛰어다녀도 배송을 다 마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코로나19로 배달물량은 예년 평균에 비해 30%가 늘었고, 추석명절 시기에는 50%나 폭증했다.
택배노동은 분류·상차·하차·운송·배달 작업을 진행하는데, 여기에는 하청·특수고용·단기 고용 등 온갖 비정규직이 다 몰려있다. 쿠팡에서 일하는 일용공이었던 장씨가 정규직이 되고 싶어 오후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조로 근무하면서 신속배송시간을 맞추기 위해 강도 높은 실시간 노동을 하다가 쓰러진 비극에는 바로 이러한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CJ대한통운, 한진택배, 쿠팡은 대표적인 택배물류재벌들이자 코로나사태의 최대 수혜자이다. 그런데 이들이 사죄와 책임은커녕 택배노동자의 사인을 놓고 과로사를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쇠로 나오는 파렴치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을 조작한 정황까지 나오고 있다. 당장 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고,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공짜노동의 원흉인 장시간 분류작업문제를 해결하고, 산재보험 적용제외신청제도 자체를 폐기하는 것은 시간을 끌 문제가 아니다.
▲ 한진택배 택배기사 김동휘 씨가 세상을 떠나기 4일 전 동료에게 보낸 SNS 메시지 [사진 : 택배연대노조]
그러나 택배물류산업이 계속 확대되는 조건에서는 보다 구조적인 특단의 대책을 내와야 한다. 마치 코로나19 중환자에게 복합집중처방을 가하듯이 택배산업과 택배노동전반에 대한 집중적 대책을 정부와 정치권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대 40대 건장한 노동자들이 쓰러지는 비극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장적 측면에서 산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생활물류서비스산업법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신속하게 입법해야 한다. 생활물류는 디지털화와 비대면 시대 국민들의 일상을 책임지는 필수산업이 되었지만, 탈법이 횡행하고 과로사가 속출해 왔다. 기존 화물운수법은 대형·중량의 기업 간 화물운송산업물류에 적용되는 법으로 소형·경량의 소화물을 배송하는 생활물류 관련조항이 아예 없거나 예외조항으로 되어 있어 사각화되어 있다. 이에 이미 20대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처리하지 못했고, 최근에는 노동조합, 정부여당, 시민단체가 입법협약식까지 맺은 만큼 택배·퀵·배달 생활물류산업의 특징을 반영하고 해당 노동자들의 보호조항을 일정하게 담은 생활물류서비스산업법을 차질없이 의결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대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과 대표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과로사하게끔 방치한 것은 중대 과실이다. 최근 잇단 창고화재사건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살인기업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거나 미약한 형편이다. 제도적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해 고의·중과실을 응징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에게 저항권을 주는 것이다. 지금 택배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응당 누려야 할 노동3권을 특수고용노동자라는 핑계로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물류재벌들이 마음놓고 공짜노동을 시키고 과로사로 내모는 중요한 이유는 택배노동자들이 중층적 다단계 비정규직 고용구조속에서 일하고 있고 자본의 횡포에 저항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도 주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택배노동자들의 연이은 과로사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은 택배노동자 자신이다. 그들이 자기문제를 풀 수 있는 손발을 묶어 놓았으니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이건 반칙이다.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주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큰 일은 지금 택배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전태일법이라고 불리우는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권리는 마땅히 주어야 할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미군의 남한 점령과 미군정 체제의 수립
9월 9일 8시부터 미 24군 본진이 서울역에 도착해 총독부를 비롯한 서울시내 중심부 요소에 배치되었다. 주요 위치마다 일본군이 늘어선 가운데 미군의 행진이 계속 되었다. 군중들은 조용히 미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미군 부대는 주요 시설에 분산, 배치되었다. 미군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비행함으로써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미군의 군사적 힘을 과시하였다.
9월 9일 오후 4시 연합군과 일본측 사이에 항복문서 조인식이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미국측은 재조선 미군사령관 하지 육군중장과 미해군 대표 킨 케이드 해군대장이, 일본측은 조선군관구 사령관 카미츠키 요시오 육군중장, 진해만경비사령관 야마쿠치 기사부로 해군중장,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육군대장 출신)가 참석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25분에 걸쳐 영문과 일문으로 된 항복문서에 일본측과 미국측이 서명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4시 45분, 일본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려졌다. 일본을 대신해 미국이 남한의 통치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주1)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미군과 시민들.
한편, 양측이 서명한 항복문서 제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은 면직되지 않는 한 현직에 유임한다”고 되어 있었다. 미군은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고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남의 모든 행정권은 본관(맥아더)에 귀속된다’는 9월 9일자 맥아더 포고 제1호와 배치되었다. 미 점령군은 남한 주민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 등을 고려하여 군정체제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내각을 존속시킨 채 간접통치를 시행했으나 한국에는 그럴만한 정부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던 것이다.(주2)
그러나 남한에는 이미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인민공화국(인공)을 비롯해 각 지역에는 인민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권력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이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이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등을 통합해 좌우합작 형태의 인민정치위원회 등으로 개편하도록 하여 간접통치를 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남한의 경우, 그렇게 하면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군으로서는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소련이 했던 것처럼 기존의 인공과 우익을 결합시켜 좌우합작 형태의 자치기관을 조직하도록 하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미국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남한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없었다. 이남지역에서 혁명을 방지하고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군정을 통한 직접 통치 방식 밖에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9월 12일 하지 중장은 아베 총독과 경무국장 니시히로츄우난을 정식으로 해임하고, 제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38선 이남의 군정장관에, 조선주둔군 헌병대장 쉬크(L. E. Shick)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했다.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아놀드 소장 또한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야전군인 출신으로 1946년 1월 4일 러치 소장에게 인계할 때까지 114일 동안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아놀드는 군정장관 자리를 아놀드에게 넘겨주면서 “총독부는 일본인이 착취하기 위한 기구였지만 당분간 사용할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미군정의 행태를 합리화했지만 이는 한국인의 의사와 실정을 무시한 지극히 기능적이고 편의적인 발상이었다.(주3
한편, 하지는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모든 관리들은 그 직책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일본인에 대한 해고는 계속되었다. 9월 15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는 경성의 명칭을 ‘서울’로 통일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수도 명칭이 ‘서울’이 된 것이다. 9월 16일 한국인 전규홍이 군청부 법부국 특별감찰청장에 임명되었으며, 경무국장 쉬크는 군정부포고령 위반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주4)
9월 15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엔도 정무총감과 국장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정무총감에 해리스(C. S. Harris) 준장, 재무국장에 고든(C. J. Gordon) 중령, 광공국장에 언더우드(J. C. Underwood) 대령, 농상국장에 마틴(J. Martin) 중령, 법무국장에 우달(E. J. Woodall) 소령, 학무국장에 라카드 대위, 교통국장에 해밀턴 중령, 체신국장에 헐리(W. J. Herlihy) 중령 등을 임명했다.(주5)
한편,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9월 12일 오후 2시 반 부민관에서 조선의 각 정당 대표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국인들이 시위를 그만 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일본의 항복 접수와 법과 질서의 회복이라면서,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적절한 시기에 이뤄질 것이라고 했지만 시간이 필요하고 만일 무리하게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면 도리어 원치 않는 혼란과 파국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언론과 출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으나 조선인들이 그것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주6)
무장한 차량을 타고 미군들이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 미군군표를 법화로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3호’. 통화권 장악은 국민생활의 실질적인 기초가 되는 경제 질서를 장악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물질적 사회적 토대인 것이다. 군대와 경찰, 그리고 통화권 장악은 미군정의 일차적인 출발점이었다.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 제3호
조선주민에게 포고함. 본관은 태평양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아래와 같이 포고함.
제1조 법화 제1항 점령군에서 발행한 보조군표인 “A”인(印)의 원(圓) 통화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공사의 변제에 사용하는 법화로 정함. 제2항 점령군에서 발행한 보조군표 “A”인의 원 통화와 현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통용되는 법화인 보통의 원 통화는 일본은행과 대만은행에서 발행한 태환권을 제외하고는 액면대로 교환 가능함. 제3항 기타의 통화는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에서는 법화로 인정하지 않음.
제2조 일본군표인 원 화폐 제4항 일본제국정부나 또는 일본육해군에서 발행한 군표와 일본점령군이 사용한 통화는 모두 무효, 무가치하고, 또한 이와 같은 통화의 유통은 어떠한 거래에서라도 금함.
제3조 통화의 수출입금지 제5항 지폐, 보조화폐 또는 채권의 수출입을 포함한 대외금융거래는 본관의 허가한 경우 이외에는 금함. 제6항 금융거래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내에서 시행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대외금융거래로 간주함.
제4조 다른 통화에 관한 법규 제7항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현재의 통용되는 법화인 보조군표나 또는 원 지폐 외에 다른 통화의 유통은 본관의 허가없이는 이것을 금함.
제5조 처벌 제8항 이상의 군정포고조항을 범한 자로서 점령군군율회의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은 자는 동 회의의 정한 바에 의하여 이를 처벌함.
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미국육군대장 D.맥아더
미군정의 한국인화 정책과 ‘고문정치’ ‘통역정치’의 폐해
미군의 진주 이후 총독부 고위관리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미군 장교들을 앉히면서 미군정 체제가 등장, 가동하기 시작했는데, 9월 20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이 설립되어 미군사정부(미군정)의 남한 통치가 본격화했다. 미군정청은 처음 일본인을 행정고문에 임명했으나 이들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10월 5일에는 한국인 고문 11명을 임명했다. 그 11명은 김성수, 전용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송진우, 김용무, 강병순, 윤기익, 여운형, 조만식 등이었는데, 여운형을 제외하면 한민당 일색이었다. 이들 가운데 평양에 있던 조만식은 이북에서의 일이 바빴던 탓에 서울로 오지 못했고, 여운형은 한민당 일색인 것에 항의하며 10월 14일 사임하고 말아 한민당이 모두 장악한 꼴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한국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해 미국인과 한국인의 양국장제를 시행하고, 1946년 가을부터는 각부서 책임자를 한국인으로 임명하고 미군은 자문역으로 물러앉음으로써 한국인화를 가속화했다. 또한 1947년 2월 민정장관으로 안재홍이 취임하고 같은 해 5월 17일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함으로써 군정의 한국인화 정책이 결실을 맺었다.(주7)
그러나 이처럼 외형적으로 한국인을 주요자리에 앉혔다고 해서 군정청(남조선 과도정부)을 한국인의 자주적인 기관으로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구개편은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인의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 기관에서 일본인은 점차 배제되었지만 일제 시기 일본인들 아래서 협력했던 친일파들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면서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변신하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인간들이 권력기관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내용은 거의 유사했다. 미군정의 정책자문 역할이 점차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었지만, 처음 일본인들이 친일파를 천거했고, 친일파들이 다시 친일파를 천거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에서 한국인 통역의 역할이 막강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미국이나 유럽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미군정당국도 인정했다. 하지의 정치고문이었던 랭던(William R. Langdon)은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1945년 11월 26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군정에서 대중적인 좌익인사들을 배제시키면서 부호들을 끌어들인 점에 대해서는, 사실 초기에 우리가 지나치리만큼 부호와 보수적인 인사들을 많이 선발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면부지의 민중 가운데서 누가 누군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현실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임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사실 영어란 것이 한국인들 사이에선 사치스러운 것이었을 만큼 이들 인사들과 동료들은 자연히 돈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주8)
그런데 미군정이 영어를 아는 부자출신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그 ‘통역정치’의 폐해가 너무 심각했다는 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1월 8일자로 관방정보과장보로 발령받은 이묘묵의 경우이다. 미군은 시러큐스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리아타임즈 창간 기자로 활동했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이묘묵에 대해 단순히 영어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고 신뢰하여 하지의 통역 겸 고문역을 맡겼는데, 국내정치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런데 이묘묵이 하지를 만나자마자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장장 8쪽에 걸친 보고서를 제출하며 음해 활동을 하였다. 조선주둔 일본군과의 무선 통신을 통해 받은 나쁜 인상도 있었던 하지는 여운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음험한’ 공산주의자 내지는 ‘악질적인’ 친일파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주9)
하지는 이묘묵의 이런 보고서를 바탕으로 여운형에 대해 아주 나쁜 판단을 하고 있었으나 여운형이 이끄는 인민공화국이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가져야 했다. 10월 5일에야 여운형을 만난 하지 중장의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다. 여운형이 ‘아무 관련 없다’고 대답하자 “왜놈으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지?”라고 물었다. 남한 점령군사령관 하지를 비롯하여 미군정 지휘부는 이묘묵 등이 여운형을 친일파, 일제의 앞잡이, 공산주의자, 일본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공금을 횡령한 자 등으로 모략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1946년 12월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존 하지 중장. 하지 중장의 왼쪽은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인 이묘묵이고, 뒤쪽에 의장 김규식의 모습이 조금 보인다. 앉은 사람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인 브라운 소장(왼쪽)과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대신해 참석한 찰스 헬믹 준장이다. 앞쪽은 전규홍 사무총장이다.(주10)(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겨레, 2019.7.20.)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으로 보고 공산당과도 통할 수 있는 여운형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인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였다. 총독부의 요청에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 석방, 식량 확보, 치안 활동에 대한 간섭 불허 등 5개 요구요건을 내걸고 이를 받아들였고, 이에 총독부는 여운형의 활동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재정지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묘묵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일제의 앞잡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공금횡령자’ 등으로 중상모략과 악선전을 했던 것이다. 이묘묵은 1945년 9월 10일 음식점 명월관에서 미군 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을 초청한 연회 자리에서 “건준지도부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왜곡”하고 “해방 후 남한 정세를 왜곡해 브리핑”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주11)
하지의 두 번째 물음에 또 다시 여운형이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는 “군정청 고문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운형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미군정 고문으로 임명된 11명 중 조만식은 평양에 있어서 올 수 없었고, 나머지 10명 중 여운형을 제외한 김성수, 송진우 등 9명은 하나로 움직여 9대 1의 구도가 형성된 상황에서 여운형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10월 14일 군정 고문을 사임하고 말았다.(주12)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이 된 이묘묵이 1945년 9월 10일 미군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에게 남한 정세를 왜곡하고 건준의 여운형 등을 비방하는 내용의 8장짜리 보고서 중 마지막 부분. 마지막에 이묘묵(Myo-Mook Lee)의 이름이 보인다. 이묘묵의 이글 첫 페이지 상단에는 ‘연희전문학교’라는 머리말이 타자되어 있다. 이 보고서의 절반가량은 일본 패망 이후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 법과 질서의 유지, 식량과 연료 확보, 일본인 귀환과 그들의 조선내 재산의 처리, 통화량 증발과 인플레, 재일조선인 귀환 등 일제의 패망에 따른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건준’에 대한 왜곡이었다.(주13)(사진=정용욱/ 한겨레, 2019.7.20.)
미군정의 성립과 국가구조
미군정의 남한통치는 우선 미군이 남한 전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 전술군(전투와 작전을 위한 군의 단위부대)의 38선 이남 지역의 점령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경기 일원에서 시작해 11월 10일 제주도를 점령하기까지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9월 12일부터 23일까지 사이에 서울 주변 50마일 둘레의 개성·춘천·수원 등에 대한 점령을 완료하였다. 제7사단의 3개 연대와 24군단지원단(인천지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제2단계는 경남북지역의 점령이었다. 4개 연대, 727명의 장교, 1만2,939명의 사병으로 구성된 40사단이 9월 22일 인천으로 들어와서 10월 15일까지 경남북지역의 점령을 완료했다. 이 시기 7사단의 점령지역도 확대되어 10월 10일까지 경기 전지역과 강원 전지역이 작전지역에 포함되었다. 제3단계는 제96사단 대신 들어온 제6사단 1만3,584명이 10월 25일까지 전남북 지역의 점령을 완료하였다. 제6사단 20보병연대가 11월 10일 최종적으로 제주를 점령함으로써 미전술군의 남한 배치는 완료되었다. 미군의 군사적 점령은 시, 도, 군, 읍, 면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서울과 부산, 전주에 각각 사단사령부를 두었고, 주요도시에는 연대본부를 두고 예하 각 대대가 수개 군의 관할지역을 담당하면서 관할지역 내의 시, 읍에 분견대를 두었다.(주14)
미전술군은 남한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던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민중정권기관과 충돌, 대립하였다. 8.15 직후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등이 조직되는 것과 함께 각 지역에서 그 실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자주적인 인민정권기관들이 건설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전술군은 처음 주둔과정에서 일정기간 이들 민중자치기관과 유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실상 이중권력 상태를 형성했다. 그러나 1945년 말경에는 미군정에 우호적인 지방권력은 잔존하여 개편되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장갑차까지 동원한 미군의 물리력에 의해 진압, 제압되었다.
1946년 1월 14일 하지 사령관은 각 지역의 군정부대들에 대한 통제권을 전술지휘관으로부터 분리하여 군정사령관으로 이관하였다. 그동안 전술군에 의한 작전군정이 각 지역을 통제하던 것을 정치훈련을 받은 민사반 혹은 군정부대로 구성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주한미군정’. USAMGIK: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으로 전환한 것이다. 군정청의 최고 책임자인 군정장관은 처음 아놀드 소장이었으나 1946년 1월 4일 러치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미군의 한반도 남단 점령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총독부로부터 항복을 받은 다음, 이를 대체할 미군정 국가권력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군정 국가권력은 남한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을 형성, 육성하여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한반도 전역에 세워질 임시정부 또는 한국인의 정부가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남단에서 좌익세력의 발호를 단호히 제어,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물리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가권력과 이를 뒷받침할 국가기구들이 필요했다. 미군정은 간단히 말해 남한 지역에 소련과 공산세력의 팽창, 발호를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반공체제가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전술군의 강력한 물리적 지원을 바탕으로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남한에 대한 통치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행정 관료기구를 구축해야 했다. 미군정은 일본의 통치기구였던 총독부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고 필요한 부분에서 손질하고 재편하는 방식으로 행정관료 기구를 구축하였다.
남한에서 미군 점령군의 효력이 발생한 것은 1945년 9월 조선총독이 미군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의 대리인인 하지 중장에게 항복한 그 시각부터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이날자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를 각각 발표했는데 독립국가의 헌법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 포고 제1호는 38도 이남의 모든 통치권과 행정권이 맥아더 사령부의 군정 아래서 시행된다고 밝혔으며,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어떤 조직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미군사령부만이 배타적이고 유일한 주권의 주체라고 선언했다.(주15)
1945년 9월 12일 하지 사령관은 아베 일본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을 임명했으며, 9월 17일 미군사령부는 총독부 기존 기구를 활용하여 8개 국장(총무, 경무, 재무, 농림, 재무, 학무, 식산, 사정)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미군정은 10월 15일 총독부 기구를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표2> 참조)
이후 미군정은 국가기구 개편을 통해 통치체제를 정비해갔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미군정의 국가기구 개편(주요 내용)
- 1945.8.17. 총독부기구 존속시켜 8개 국장 임명 - 1945.10.5. 군정장관의 고문 한국인 11명 임명(위원장 김성수) - 1945.12.5. 군사영어학교 설립 - 1945.12. 한국인과 미국인 양국장제 - 1946.2.14.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하지 사령관의 자문기구로 출범 - 1946.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좌우합작 지원(여운형의 중간파 분리 위해) - 1946.12.19.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의장 김규식) - 1947.2.10. 과도입법의원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 - 1947.4.5. 중앙정부를 13부 6처로 확대 개편 - 1947.5.17. 각 부처의 장을 한국인으로 임명, 미국인 고문으로 후퇴. 미군정청, 한국인으로 운영되는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 - 1947.9.17.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 1945.8.15. 대한민국정부 수립(미군정 폐지)(주16)
1945년 말에는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기존의 군정청 기구에 군무국을 설치하고 기존의 경무국과 통합하여 국방사령부를 발족시켜 국가 기구의 단일 통제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1945년 12월부터는 한국인화 정책에 따라 군정청 기구에 미군 장교 1명과 한국인 관료 1명을 임명한 양국장제를 시행하였다.(<표3-1>, <표3-2> 참조)
<표2> 미군정청 기구 조직표(1945년 10월 15일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표3-1> 미군정청 중앙 조직(1945년 12월 31일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표3-2>미군정의 국가구조(1945년 말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지방행정조직의 경우 1945년 말 대부분의 지역에서 틀을 갖추었는데, 도 군정관 아래 비서처가 조직되고, 지방행정 관할기구로 6개국이 두어졌다.(<표3> 참조)
<표3> 미군정청 지방 행정 조직(1945년 12월 1일 현재)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3쪽
전국적으로 군정 행정통치기구가 조직, 정비되면서 1946년 3월 29일 중앙조직의 경우 국(局)을 부(部)로 승격했으며, 1947년 7월 남조선 과도정부 수립과 함께 13주 6처의 기구를 갖추게 되었다.(아래 <표4> 참조)
<표4> 미군정의 중앙 조직(1947년 7월 현재)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4쪽
입법, 사법, 행정 각 기관을 망라하여 남조선 과도정부가 성립되고 민정장관 안재홍을 비롯하여 각 부장 및 입법, 사법 기관의 관리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교체되었으나 군정장관의 거부권 행사, 각 부처 내의 미국인 고문의 부결권 행사와 간섭 등으로 사실상 자율적인 행정 통제 권한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6월 29일 한국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입법기관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였고, 군정 법령을 제정한 뒤 1946년 말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립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입법의원은 군정장관의 해산권 및 새 의원 임명권, 선거 요구 권한 등으로 한국인의 대표기구가 아닌 미군정 통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입법의원은 관선의원 45명, 민선의원 45명 등 9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선의원의 경우 군정장관이 임명권을 갖고 있었고, 민선의원 선거 또한 10월 항쟁 와중에 좌익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검거된 상황에서 이루어져 좌익의 참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던 제주도에서만 인민위원회 출신이 선출되었고, 대부분 한민당과 독촉계 등 극우인사들이 당선되었다. 한국민주당 12명, 독촉국민회 17명, 무소속 13명, 한독당 4명, 기타 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무소속은 이승만, 신익희, 이갑성, 이종근 등 한민당과 친이승만계열의 단정지지자, 극우인사들이었다.(주17)
이에 대해 1946년 11월 4일 좌우합작위원회 공동의장인 김규식은 선거 부정이 심하고 친일파가 주류인 민선의원에 대해 재선거를 요청했으나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은 이를 거절했다. 관선의원의 경우는 민선이 끝난 후 당시 좌우합작위원회의 심사위원이었던 김규식, 원세훈, 최동오, 송남헌 등이 추천한 자들 중에서 하지 중장이 최종 결정했는데, 합작위원 6명, 우익 12명, 중간파 12명, 기타 15명으로 결정되었다.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단정수립을 준비하는 입법기구 수립에 반대하여 선거에 불참했으며 관선의원에 지명된 민전 위원을 제명하겠다고 했다.(주18) 이렇게 해서 미군정 국가 행정기구뿐만 아니라 입법의원조차도 친일파, 한민당계, 친이승만계 등 친미세력 일변도로 구성되었다.
한민당계·친일파의 요직 장악과 친일관료의 재기용
미군정은 통치기구를 지극히 중앙집권화된 형태로 재편했으며, 그 요직에 일제시기의 친일관료들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로 충원했다. 관료 충원에 대한 군정청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구사력이 있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적 성향의 인물이어야 했다. 한국정부 수립 직전까지 행정 분야에서 영어에 유창한 인물이 400여명 가량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지주나 부농 출신으로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시라큐스 대학 출신의 이묘묵, 콜롬비아 대학 출신의 오천석, 위스콘신 출신의 이훈구, 임영신 등과 같은친미인사들은 대부분 한민당 지지자들로서 인공 등을 극도로 폄하하는 극우인사들이었다. 이들 ‘통역관’ 출신들의 영향력이 컸던 탓에 에스가 스노우는 미군정을 “통역관 정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료 충원에 한국인 통역관 못지 않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극소수의 미군정 요원들이었다. 개성에서 전도 사업을 했던 목사의 아들 윌리엄스(G. Z. Williams)는 한민당 간부들과 절친했고 미국에서 교제가 있었던 조병옥을 경무국장에 발탁한 것을 비롯해 관료 충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출생한 윔즈(C. Weems) 또한 관료 충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주19)
미군정의 관료 충원의 두 번째 원칙은 공산주의와 관계가 있는 한국인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은 비협조적이며 소련에 의해 조종되는 공산당의 노선에 집착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원칙 때문에 군정 관료 충원에서 조선공산당 계열의 인물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칙은 행정 관료뿐만 아니라 경찰, 군, 사법부에 대해서도 일관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서 군정청 관료기구에는 한민당계 인사들을 비롯하여 친일파 출신들이 대부분 진출하였다.(주20)
미군정은 1945년 말까지 군정 초기 3개월간의 기간 동안에 약 7만5천여 명의 한국인 관리들을 유임 또는 신규 임용하였는데, 공개 채용이 아니라 추천에 의한 임용으로 충원되었다. 이러한 임명 방식은 좌익세력을 배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4월 20일 군정법령 제69호를 공포하여 중앙인사행정 기관인 인사행정처를 신설하고 공개시험에 입각해 성적 위주로 임용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러나 미군정 전기간을 통해 공경경쟁 시험은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주21)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12쪽
이렇게 해서 행정, 입법, 사법의 핵심 요직을 한민당계 인사들이 대부분 장악하였다. 1945년 10월 5일 한국인 군정 자문위원 11명을 임명했는데, 독립운동을 한 인사는 여운형과 조만식밖에 없었다. 김성수, 송진우, 김용무, 강병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윤기익 등 한민당계가 대부분인 이 고문회의는 초기 미군정청 관료 엘리트 충원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한민당원들이 군정청 요직에 진출하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 대법원장 김용무,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문교부장 유억겸, 지방법원장 윤원상·강병순·윤명용 등이 모두 한민당원들이었다. 또한 김준연, 김도연, 홍성하 등 한민당의 핵심인사들이 5명으로 구성된 중앙노동조정위원회에, 한민당 선전부원이었던 백낙준은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총장에 임명되었고, 중앙방송국 편성부장에 임명된 임병현, 한국상품공사 이사에 임명된 이동제, 서울시 행정처장에 임명된 이운 등도 한민당계였다. 그 외에도 대법관 김찬영, 노진설, 사법부장 김병로, 법제처장 권승렬, 형정국장 최병석, 수사국장 구자관, 경무부 공안국장 함대훈, 제주감찰청장 김대봉, 제5관구경찰부청장 강수창, 공안과장 이만종, 보안과장 박찬현, 정보과장 김헌, 여자경찰과장 황현숙, 노동부장 이훈구, 농무부장 윤보선, 보건후생부장 이용설, 체신부 총무국장 박종만, 외무처장 문장욱, 물가행정처장 최태욱, 인사행정처장 정일형, 기획처 통계국장 이순택 등 중앙조직의 핵심요직에 한민당계열 인사들이 기용되었다. 한민당 세력은 군정청의 중앙기구뿐만 아니라 지방의 도·군 행정기구에서도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주22)
미군정 행정 관료의 충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총독부 친일관료들이 대거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한민당계의 친미적 인사들이 요직에 진출했지만 이들은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하위 수준의 직위에는 친일관료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미군정은 포고령 1호를 통해 구총독부 관리들의 유임을 명령했고, 이에 해방 직후 친일파로 비난받아 도피, 은둔했던 중앙과 지방의 경찰·행정관료들이 재차 복귀하였으며, 대부분 하급관리였던 이들은 일본인 관료들이 해임됨에 따라 중간급 관리자로 상승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5년 가을 친일파에 대한 처단이 조기에 이뤄짐에 따라 친일관료들이 대거 월남함으로써 미군정이 활용할 수 있는 총독부 출신 친일관료의 가용자원은 2배로 늘어났고, 이들은 미군정 기구의 비대화로 대부분 승진, 흡수되었다.(주23)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친일관료들이 대부분 한민당 인사이거나 한민당과 연결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모스크바 협정을 둘러싸고 신탁통치 분쟁이 벌어지면서 ‘반공애국주의’를 구실로 과거의 원죄에서 벗어나 이승만의 남한 단정노선에 기대어 국가권력을 장악, 운영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친일경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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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최영희, 『격동의 해방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26쪽
2) 이완범, “전후 세계질서와 미국의 대한 정책”, 『한국사17-분단구조의 정착(1)』, 한길사, 1994, 157〜158쪽
제주도는 한국에서 자연생태의 원형이 그나마 남아있는 드문 땅입니다. 그리고 현재 난개발에 따른 갈등의 섬,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의 섬입니다. 살아야하고 살려야한다는 절박감에 동료 시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환경부 장관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류가 뭇 생명과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노력만이 아니라 정책과 노선의 전환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주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가 임박해 위기의식 가운데 연재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환경부가 동의하고 국토부가 기본계획을 고시하면 제주 제2공항 사업은 법적 지위를 갖게 됩니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한 환경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글을 이어갈 것입니다. 제주 제2공항 사업만이 시대와 지역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구체적인 사안을 배경으로 우리의 제주발 문제의식은 펼쳐질 것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십명의 강정마을 주민들이 그의 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국제 활동가는 망설이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저 말 못하는 생물들을 위해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위해 말해주겠습니까?”
그 순간은 섬광처럼 뇌리에 남았다. 2010년 10월 20일 또는 그 즈음의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체포와 구속을 무릅쓴 투쟁에도 불구하고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었다. 연산호, 붉은발말똥게, 맹꽁이, 제주새뱅이, 기수갈 고동, 남방큰돌고래 그리고 구럼비 바위와 바위틈의 용천수와 강정바다를 집으로 삼았던 수 많은 생물들을 우리는 지켜주지 못했다. 그들은 죽거나 강제로 떠나야 했다.
제주해군기지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친구가 한 장의 사진을 보냈다. 한 공사장 노동자가 건설 현장인 구럼비로부터 양동이 하나를 들고 나았다. 더러운 양동이에 몇 마리의 멸종위기 붉은발말똥게가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2011년 인가 한 건설 업자는 제주해군기지 반대자들을 지극히 혐오하며 ‘시멘트에 같이 공구리 하겠다’고 말했다. 공구리 된 것은 구럼비의 수많은 생명들이었다. 멸종위기 생물들이 빠짐 없이 이주되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설령 이주 되었더라도 그들이 안녕하다는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꼭 사람들에게 말해주세요. 강정의 바다는 다른 제주 바다와 달라요. 거기는 아직 큰 물고기들이 살아 있고 깨끗해요. 제주에서 가장 청정하고 아름다운 바다예요”
바다 환경 보호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주 일대를 수영으로 완주한 50 대 호주 여성 쉐린의 말은 진지했다. 그 역시 10년이 넘은 일이다.
남방큰돌고래 들이 떠난 바다에 미핵잠수함이 온 것은 3 년 전의 일이다. 민군복합항 크루즈 터미널에 첫 공식 입항을 한 것은 크루즈가 아니라 미핵항공모함이다. 2년 전의 일이다. 생명과 평화의 바다는 호르무즈 포함 아덴만 일대로 파병되거나 하와이로 공격적인 군사 훈련을 떠나는 군함들의 연기로,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의 전세계 72일간 순항훈련 출발을 축하하는 소음들로 대치되었다. 노을을 감싸던 구럼비의 곡선은 면도날 처럼 날카로운 군함의 직선으로 대치되었다. 6년 전 제주해군기지에 올 과적 철근을 실은 세월호는 지금도 사건의 진실이 은폐된 채 30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터무니 없이 큰 수산 시장 건물이나 찾아올 사람 없을 것 같은 마리나 시설이 항구에 세워지고 서귀포 시민의 70% 식수를 제공하는 강정천 옆에 군사기지 진입도로가 추진 중이다. 마을은 타협의 자리를 해군에게 내주었고 민군상생협약이란 이름아래 마을이 군의 공식 식민지가 된 것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제주 강정 마을의 군사기지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국가가 한 마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며 ‘식민화’ 할 때 우선적으로 하는 것은 그 곳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폄훼하여 소멸의 근거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한 장소가 소멸될 때 절멸의 위험에 처하는 것은 우선, 그 장소 안의 수많은 이름들이다. 군사기지에 반대한다는 것은 그러한 장소들과 그 장소들과 관련된 기억들의 강요된 소멸에 대한 투쟁을 포함한다.
연산호가 있는 유네스코 지정 바다를 마주한 강정마을 해안 구럼비는 1.2km 길이 하나의 커다란 통바위였다. 수많은 용천수가 존재했다. 한 용천수는 ‘할망물’로 불리웠다. 그 물은 마을 주민들이 새벽에 지내는 제사의 정한수로 쓰였다. 그 물은 또한 저항 공동체의 밥물로 쓰였다.
수많은 부드러운 구름들의 형상을 한 구럼비는 뭇 생물들의 서식지요, 아이들의 놀이터요, 공동체 모임을 위한 장소요, 마을의 신성한 제단이었다. 구럼비는 ‘제주 4.3 항쟁과 학살’ 기간 (1947, 3,1-1954, 9, 21) 때 학살을 피해 몸을 숨긴 사람들의 피난터이기도 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구럼비가 발파되기 직전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한 중년 남자는 말했다. “그것 아시나요? 강정이 구럼비고 구럼비가 강정이요” 석양이 그의 눈물을 검붉게 비추고 있었다.
구럼비는 강정의 심장이자 제주의 몇 안되는 해안 절대보전지역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도의회는 국가와 기득권 세력에 타협하여 그 절대보전지역 지정을 강제로 해제했다. 국가는 기지 건설을 위해 부셔도 좋은,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바위라고 말하며 구럼비를 틀 지웠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구럼비와 비슷한 곳은 전 세계에서 3곳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구럼비는 그 곳의 생명들과 함께 사라졌다. 해군은 기지 안에 구럼비의 매우 적은 부분을 남겨놓고 사실 괴기하고 비극적이게도 ‘공원’이라 이름 지었다.
3. 평화의 섬은 어떻게 평화를 배신하는가?
제주는 평화의 섬이다. 그러면 제주에 군사기지를 짓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러 이유들 중 한 가지를 말해본다.
2005년 1월 27일 당시 노무현 정부는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 으로 지정하였다. 선언은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가 삼무(三無)정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12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평화의 섬 선언에는 1990년대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러 번 거론된 ‘비무장’ ‘비핵’ ‘중립화’의 단어들이 담겨있지 않았다. 세계 평화의 섬 논의는 2005년 한미군사동맹이 강조되는 가운데 왜곡과 변절의 길을 걸었으며 비무장을 논했던 초기의 주창자들은 해군기지와 평화가 병행가능하다는 궤변을 내세웠다. (참조: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2013년 창립 취지문).
또한 주목할 것은 평화의 정의가 ‘개발’과 ‘신자유주의’의 중앙정부 실험실인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별법에 의해 조건지어졌다는 것이다. 자본과 개발에 의해 규정된 평화, 무장과 등치된 평화는 평화를 배신하고 소멸시킬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국제 관함식에서 제주해군기지를 ‘평화의 거점’으로 만들겠다 했듯 군사주의는 평화의 가면을 쓰고 나왔다.
김종환(63)은 마을에서 태어난 자랐다. 구럼비는 그의 삶의 핵심이었다. 구럼비가 콘크리트로 발라지고 그 위에 기지가 건설된 이후에도 그는 그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기지 옆 투쟁 공동체 식당에서 시위자들과 연대자들의 식사를 만들기를 자원했다. 그 것이 10년이 되었고 그는 그 10여 년간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한다. 술을 마셔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구럼비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는 최근 큰 수술을 받았다. 하필이면 그 날은 기지 건설을 위한 펜스가 강제로 세워지고 구럼비로 가는 길이 막히던 9주기였다. 그가 병원으로 떠났던 날은 그 이틀 전, 마을이 해군과 기만적인 민군상생협약을 맺던 날이다. 질병은 보이지 않는 몸의 저항이라고… 나는 말한다.
송강호(62)는 강정 싸움에 같이 한 지 10년이 다 된다. 그는 올해 구럼비 발파 8주기를 기억하는 3월 7일, 동료 활동가 류복희와 함께 기지에 들어갔다. 3월 30일 수감되었고 9월 24일, 실형 2년을 선고 받았다. 류복희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송강호로서는 강정해군기지 반대 투쟁으로 인한 네 번째 구속이다.
2020년 10월 16일은 그가 제주교도소에 수감된 지 2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수감번호 219는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편지를 기다린다.
강정의 질병과 투옥의 서사는 정부가 2015년 제주 동쪽 성산에 제2 공항(공군기지)을 짓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 곳으로도 이어졌다. 성산 난산리에서 태어난 김경배(52)는 제2공항 반대를 위해 이제까지 네 번의 노숙 단식을 진행했다. 그 중 두 번은 각각 42일, 38일 이었다. 추석 전에 환경부/ 국토부 건물 앞에서 19일 단식을 하던 그는 추석 휴일 기간을 고향에서 보내고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의 집은 공항 예정지 한가운데에 있다. 집의 정원에는 멸종위기 2급 맹꽁이와 천연기념물 송골매가 있다. 그들의 소멸을 막는 것, 그가 저항하는 한 이유다.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해야 하는 생태 그리고 생존의 이유는 너무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숨골이다. (영상 캡쳐: 1회 KBS제주방송총국 개국 70주년 보도특집 다큐멘터리 '제2공항, 제주의 미래인가?')
5. 소멸에의 저항
“제 2공항은 100% 공군 기지 입니다”
그 말을 두 도의원으로부터 똑똑히 귀로 직접 들었다. 국토부와 제주 도정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공군은 남부탐색구조부대(공군 기지)를 “반드시” 짓고자 한다. 유엔 우주 조약에 위배하여 우주군 창설을 꿈꾸는 공군이 군사화 백년 대계를 위해 제주국제자유도시와 공동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항공우주 박물관을 대정 안덕면에 지은 것은 2014년이다. 공군 갤러리는 박물관 1층에서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띠며 사람들을 맞는다. 아래의 이야기 나눔으로 글을 맺는다.
“미 뉴 멕시코 주 클로비스 하이랜드 낙농장(Highland Dairy)의 소유주인 아트 샤프는 독특한 종류의 재앙에 직면하고 있다. 그는 매일 15,000 갤론 우유를 버리고 있으며 40여 명의 피고용인들을 떠나 보내야 했다. 그는 4천 마리 암소 모두를 죽일 계획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13개 중 7개 우물이 캐논 공군기지(Cannon Air Force base ) 근처 지하수로 흘러 들어간 폴리플루오로알킬 물질들 polyfluoroalkyl substances(PFAS)이라 불리는 독소들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샤프는 그의 삶을 뒤집을 물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소와 송아지들이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샤프 자신이 그의 혈류에 정상치 PFAS 의 8-10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같은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일하고 돌본 모든 것을 유독물질로 오염시켰어요.” 샤프는 뉴 멕시코 폴리티칼 리포트(New Mexico Political Report)에 말했다. “저는 우유를 팔 수 없어요. 고기도 팔 수 없어요. 소도 팔 수 없어요. 저는 농작물이나 재산도 팔 수 없어요. 공군은 그들이 오염시켰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왜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었던 거죠?”
미 국방부는 지하수가 PFAS 에 의해 영향 받은 121 시설들을 공개했다. (미 위스콘신 주 파머 저널지, 2019, 2, 19 기사 중)
게다가 군대는 미국의 많은 곳을 과염소산염 (perchlorate)으로 오염시켰다. 그 독소 물질은 상추와 암소 젖에서 자주 발견된다.
과염소산염은 고체 로켓 연료와 미사일 연료의 폭팔 하기 쉬운 주요한 요소로서 필수적인 호르몬들을 만드는 갑상선의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 갑상선 호르몬 레벨 교란은 태아, 유아, 어린이들에게 지능 저하, 정신 지체, 듣고 말할 능력의 상실, 그리고 운동기능 결함을 가져올 수 있다.
대부분의 군사 기지들 또는 군수 공장들에서 유출되는 과염소산염은 최소 미국 20개 주에서 2천만에서 4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500 개의 식수 공급처를 오염시킨다. 과염소산염으로 오염된 주요 공급처 중에는 콜로라도 강이 있다. 이 강은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 주 1백 40 만 에이커 지역을 관개하는데 사용된다. 공무원들은 캘리포니아 주 319개의 우물에서 이 과염소산염을 찾았다. [..]
미국방부와 미의회는 군대가 우리를 보호한다 주장하면서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에 대해 큰 이슈를 만들기 원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꽤 분노하며 이 기지들이 폐쇄되길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보상과 정화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워싱턴 정계가 관심이 없는 일이다. 이는 오랜 세월 고엽제 사용에 대한 부인과 꼭 같다. [..]
(미 평화할동가 브루스 개그논 블로그 중, 2019, 3, 4 글, ‘유독한 군사기지 오염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 중 번역 발췌)
▲미국 내 공군 기지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의 군사 기지들은 오염 물질을 배출한다. 사진은 오키나와 가데나 미 공군 기지 근처. 지하수가 오염되었으니 물을 마시지 말라고 경고 하고 있다. 강정은, 성산은 어떠할 것인가? ⓒ사진: 카를로스 바즈케즈/ CARLOS VAZQUEZ/ STARS AND STRIPES , 2019, 5, 10)
최성희는 지난 10여 년 전 부터 제주 강정 마을에 산다.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는 것을 보았다. 최근에는 군사기지 진입도로 건설 계획에 의해 위협받는 강정천 옆 천연 기념물 담팔수의 큰 몸의 일부가 태풍과 관리 소홀로 스러진 것을 보았다. 군사기지가 어떻게 트러우마를 남기는 것을 보았다. 기지의 완공은 투쟁의 끝이 아니라 투쟁해야 할 과제를 계속 증폭시킨다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