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1일 월요일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우리역사] 14. 단재 신채호 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사상(仙人思想)의 쇠퇴(衰退) 몰락(沒落) 3(최종)
[우리역사이야기]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4/07/22 [08:05] 최종편집: ⓒ 자주민보
[우리역사 이야기 – 14]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우리 겨레의 얼과 넋 선배(仙人)) ‧ 선배사상(仙人思想)의 쇠퇴(衰退) 몰락(沒落) 최종
5) 묘청의 서경천도론과 김부식파의 토벌 – 자주파와 사대주의파의 쟁투
우리겨레의 얼과 넋을 소중하게 여기며 이를 고수하여 나라를 강국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자주파(自主派)인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화하족의 사상인 유학을 중시하고 이를 고려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했던 사대주의파 유학파(儒學派)간에는 고려 예종대에 이르러 그 극한을 달리게 된다.
자주파들은 서경에 고려의 새 궁궐을 지을 것을 예종에게 권하였고, 우리겨레의 얼과 넋인 선가(仙家) ‧ 랑가사상(郞家思想)을 중흥시키고 이를 토대로 고려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졌던 예종은 자주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평양에 고려의 새궁궐을 지었다.
또한 예종은 선가(仙家) ‧ 랑가(郞家)인 자주파 윤관(尹瓘)을 시켜 여진을 치고 북방에 구성(九城)을 구축하였다. 물론 후일 사대주위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예종이 획득했던 북방의 구성(九城)을 되돌려주기는 하였지만 이때에 고려는 그래도 우리겨레의 기상이 살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선가(仙家) ‧ 랑가(郞家)간에는 직접적인 투쟁이 시작이 되었다.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유학파간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를 하게되니 두 파간에는 사투를 벌이는 쟁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고려 예종기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유학파간에 사투를 벌인 쟁투를 보기로 하자.
고려 예종시기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유학파(儒學派)간의 쟁투(爭鬪)는 단순히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쟁투가 아니었다. 이는 바로 우리겨레의 얼과 넋을 지키고 자주적인 나라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이민족의 사상을 숭배하고 우리겨레의 얼과 넋이 사라져 남의 얼과 넋으로 살아가는 얼과 넋이 빠진 치욕의 민족으로 사느냐의 사투였다.
고려 예종시기 본 사건은 우리겨레에게 있어서는 우리겨레가 겨레의 얼과 넋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대사변(大事變)이다. 단재 선생이 고증한 본 사건에 대해 보기로 하자.
① 묘청(妙淸)의 기이한 행위와 서경의 거병(擧兵))
❝ 〈고려사〉에서는 묘청을 요적(妖賊: 요먕한 도적)이라 하였다. 이는 묘청이 음양가(陰陽家)의 풍수설(風水說)로 평양 천도를 주창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대개 신라 말엽부터 평양의 임원역(林原驛)은 대화세(大華勢: 크게 번창할 지세)의 땅이라 하면서, 여기에 천도하면 36개국이 항복하고 찾아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비결(秘訣)이 유행하였다. 이는 아마 고구려가 망하고 평양 구도(舊道)가 황폐해지자 신라의 비열한 외교를 분하게 여기는 불평가들이 이런 비결을 조작하여 퍼뜨림으로써 그것이 세간에서 일종의 미신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고려사〉에 묘청을 요적이라고 묘사를 한 것은 위 단재 선생도 논증을 하고 있듯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이용하여 고려의 도읍지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遷都)를 주장한 것도 그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래에서도 논할 것이지만 자주파들인 선가(仙家) ‧ 랑가(郞家)들이 사대주의파인 유학파(儒學派)들과의 치열한 쟁투에서 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묘청이 선가(仙家) ‧ 랑가(郞家)는 아니고 불가(佛家)라 해도 묘청은 사대주의파들이 숭배하고 있는 유학(儒學)을 배격하고 우리의 얼과 넋을 중히 여기는 선가(仙家) ‧ 랑가(郞家)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앞선 장들에서 보았듯이 신라말엽 불가는 선가(仙家) ‧ 랑가(郞家)에 흡수되었다. 단재 선생은 이를 “가까워졌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기 불가들은 선가(仙家) ‧ 랑가(郞家)들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을 하였다. 묘청 역시 불가로서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같은 자주성을 가진 중(僧)이었으며 자주파(自主派)였다.
선가(仙家) ‧ 랑가(郞家)와 가까웠으며 자주사상이 강했던 묘청은 고려의 도읍지를 개경에서 서경(西京)으로 옮길 것은 강하게 주장을 하였다. 이 과정에 묘청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이용하여 그 정당성과 과학성을 무시한 면도 있기는 하다. 물론 고려시기 당시 묘청이 이용을 하였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이 정당성을 상실했고 과학성을 무시했다는 관점은 현대적 해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당시를 사는 백성들 다수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였는지 과학적 타당성이 있었다고 여겼는지는 기록이 없기에 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위 단재 선생의 고증을 보기로 한다. “ 대개 신라 말엽부터 평양의 임원역(林原驛)은 대화세(大華勢: 크게 번창할 지세)의 땅이라 하면서, 여기에 천도하면 36개국이 항복하고 찾아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비결(秘訣)이 유행하였다 ” 하였다고 논증을 하고 있다. 이 이러한 주장을 현대에도 했다면 아마도 일부에서는 〈황당하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측에서는 〈다탕하다〉고도 할 수도 있다. 인류사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기는 주장들이나 설들에 의해서 일어난 사변들이 오히려 더 많다. 위 문장을 긍정적으로 보자면 나라의 융성번영을 위해서 주장을 한다고 하면 아마도 긍정을 하는 이들도 꽤 있을 것이라고 본다. 위 문장은 어쩌면 고려시대를 사는 우리겨레의 염원이 짙게 배어있는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단재 선생 역시도 “ 고구려가 망하고 평양 구도(舊道)가 황폐해지자 신라의 비열한 외교를 분하게 여기는 불평가들이 이런 비결을 조작하여 퍼뜨림으로써 그것이 세간에서 일종의 미신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라고 하여 고려시기 당시의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조작〉이니 〈미신〉이니 하는 단어에 중점을 둘 필요는 없다. 본 문장의 방점은 바로 〈신라의 비열한 외교를 분하게 여기는〉 〈세간에서 일종의 미신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에 있다. 고려시기 당시를 사는 백성들은 신라의 대당(對唐) 사대주의를 통해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겨레를 멸망하게 한 외교에 대해 불평을 가진 세력들이 상당히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서는 백성들이 이 주장에 동의를 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대에는 믿음을 서양인들이 조작해낸 〈야훼 – 하느님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삼신교의 주요한 믿음의 대상이다)〉 〈예수〉등을 믿으면 ‧〈믿음〉이요 〈신앙〉이요 하고 마치나 대단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듯 받아들이고 있으면서 적어도 5천년 이상을 내려온 우리네 ‧〈삼신교(三神敎)〉의 주요한 믿음의 대상인 〈삼신(三神)〉을 믿으면 미개한 자들이나 어리석자들의 믿음인 듯 〈미신(迷信)〉으로 비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평 역시 사대주의의 일단일 뿐이다. 따라서 위에서 단재 선생이 말한 〈미신〉에 집착을 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당시 백성들 사이에 이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광범위했으며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백성들이 당시까지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이 상당히 널리 퍼져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백성들의 염원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담아 묘청이 ≪서경천도≫를 주장했다고 보아야 한다.
❝ 그르므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의 김헌창(金憲昌)과 17년의 김범문(金梵文)이 모두 평양에 도읍지를 건립하자는 주장에 의탁하여 반란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그 뒤 궁예(弓裔)도 이상(理想)으로 여겼던 새 도읍지는 평양이었으며, 고려 태조도 그 「훈요(訓要)」에서 평양은 지덕(地德)의 근본(根本)이라 하여 후대 왕들에게 연간 사중(四仲: 仲春, 仲夏, 中秋, 仲冬의 총칭. 사계절)에는 그곳으로 가서 머물 것(巡駐)을 권하였으며, 혜종(惠宗)은 아예 평양에다 굉장히 큰 궁궐을 짓고 도음을 옮기려고까지 하였다. 예종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평양에 새로운 궁권을 짓기 시작하였다. ❞
신라 당시부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는 염원이 상당히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게 해주는 문장이다.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기는 것은 곧 나라의 강토를 넓히고 강성했던 고구려의 천년강국을 되살릴 수 있다는 염원이었을 것으로 본다. 신라의 김헌창이나 김범문 모두 평양천도를 주장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니 평양이 우리겨레에게는 도읍지로서 길지(吉地)라는 믿음이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궁예 역시 평양이 길지이므로 도읍지로 정하고자 했으며, 특히 고려 태조 역시 평양이 길지라고 여기고 “ 「훈요(訓要)」에서 평양은 지덕(地德)의 근본(根本)이라 하여 후대 왕들에게 연간 사중(四仲: 仲春, 仲夏, 中秋, 仲冬의 총칭. 사계절)에는 그곳으로 가서 머물 것(巡駐)을 권하였으며 ”라고 하면서 후대 임금들에게 매년 매 계절의 중간에 평양에 머물라고 했다. 이는 태조 역시 평양을 매우 중시했다는 증거이다.
고려의 혜종은 아예 평양에다가 커다란 궁궐을 짓고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려고까지 하였으니 당시 평양이 길지라고 여겼던 집단이 일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 앞선 연재에서도 보았듯이 고려 예종은 이미 평양에 새 궁월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평양이 도읍지로서 길지라는 인식이 하루아침에 생성된 것이 아니며, 또 고려의 백성들 극히 일부만이 그렇게 믿었던 것도 아닌 듯하다. 임금 이하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평양이 나라의 도읍지로서 길지라고 믿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평양이 나라의 도읍지로서 길지라는 오래된 우리겨레의 믿음이 고려시대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묘청을 위시한 자주파의 일단이 평양천도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이용하여 강하게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선배 ‧ 화랑정신」을 연재한 이래 줄곧 주장을 하는 것은 「선배 ‧ 화랑정신」의 계승은 우리겨레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나라로 든든하게 일으켜 세우자는 당시의 염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 ‧ 화랑정신」의 계승은 곧 우리겨레에게 강성했던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대함을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선배 ‧ 화랑파」들 역시 같은 염원이었을 것이다.
❝ 이처럼 평양에 도읍을 세우는 일은 역대 왕조가 기도하였던 일이지만, 사실은 평양으로 천도하면 북쪽 외적에게 매우 가까워져서, 만일 적의 기마(騎馬)가 압록강을 건너는 때에는 도성(都城)이 먼저 적의 공격의 목표가 되므로, 나라의 근본인 중앙(中央)이 동요하여 한 번의 작은 패전만 있어도 전국이 놀라서 벌벌 떨게 될 것이다.
평양은 사실 당시에 도성(都城)이 될 지점으로는 천만 부당하거든, 칭제북벌론 자들이 언제나 평양 천도를 전제로 하였던 것은 엄청난 실책(失策)이었다. 따라서 윤언이(尹彦頤)가 칭제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평양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과연 탁견(卓見-탁월한 견해)이라 할 것이다. ❞
본 글은 단재 선생의 판단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당시까지는 위 글이 타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지(물론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는 도읍지를 공식적으로 일곱 번을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마지막 도읍지가 바로 평양이었다. 후일 논할 것임)를 하여 무려 천년강국을 유지했었기에 단재 선생의 논증은 그리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를 주장할 수도 있다. 즉 적과 가깝기에 적을 치기에 더욱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선재적인 공격을 할 경우에는 더욱더 유리하다. 또 방어전을 한다고 해도 적보다 우세할 경우에는 적들을 물리치고 적의 근거지 깊숙이 추격하여 적들을 초토화시키기에 더욱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위와 같은 단재 선생의 고증은 아군이 약세일 경우에나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칭제북벌론 자들이 언제나 평양천도를 전제로 하였던 것은 엄청난 실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단재 선생은 아마도 후일 묘청일파가 사대주의파인 김부식 일파에 패한 것을 염두에 둔 비판이 아닌가 한다.
“ 윤언이(尹彦頤)가 칭제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평양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과연 탁견(卓見-탁월한 견해)이라 할 것이다 ”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도 윤언이가 위 단재 선생이 비판을 했던 평양이 적들에게 가깝기에 적의 기마병이 침략을 할 경우 나라의 중추가 위태로움을 염려해서 평양천도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윤언이의 결단성이 좀 부족햏던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도 할 수 있다. 물론 윤언이가 단재 선생의 논증대로 평양천도를 했을 경우 적들의 기마병을 앞세운 침략에 대해서 우려를 해서 평양천도를 주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들의 기마병이 침략을 했을 경우 나라의 중심이 그리도 쉽게 무너질 것 같다면 그건 나라가 허약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코 배달겨레는 그리 약하지 않았다. 후일 논하겠지만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은 불과 일만여 명의 병사로 화하족 수십만 명을 물리치는 강국이었다. 고구려의 기상과 정신을 이어받은 배달겨레가 그리도 허약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위 단재 선생의 논증에 대해서는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 그러나 비결(秘訣)과 풍수설(風水說)로써 평양천도를 주장한 것은 묘청이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므로, 이로써 묘청을 요적(妖賊)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판결이다. 그러나 묘청이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지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대동강 바닥에 기름병을 가라앉혀 놓고는(그로부터 떠오르는 기름을 가리켜) 신룡(神龍)이 침(浸)을 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관(百官)들이 축하하도록 만들 것이 어찌 요적(妖賊)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일은 고려 이전에는 항상 있었던 일이니, 고대에 종교상, 정치상의 인물들은 언제나 모호한 천신(天神)에 기탁하여 군중을 우롱하였던 것이니, 이런 일로 묘청에게 죄를 추궁하는 것 또한 공평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묘청을 미쳤다고 하였는가? ❞
묘청이 요적이라고 기록된 고려사의 기록에 대해 단재 선생이 위와 같이 고증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 역시 고려 이전에는 묘청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다스렸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기 묘청이 풍수설이나 비결을 이용해서 평양천도를 주장했다고 하여 그것이 곧 요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단재 선생은 묘청이 비정상적인 행위로 보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다.
“ 고대에 종교상, 정치상의 인물들은 언제나 모호한 천신(天神)에 기탁하여 군중을 우롱하였던 것 ”에 대한 해석 역시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일부 독자들은 본 문장을 가지고 우리겨레가 어리석고 또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모호하고 불명확한 허언(虛言)이나 요설(饒舌)로서 우롱하였다고 하는 것은 단재 선생답지 않은 해석이다. 본 해석은 그동안 단재 선생이 고증한 단군조선의 「선배」 고구려의 「선배 ‧ 조의선인」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또 선출된 「대선배」들이 백성들에게 보이는 충성심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등과는 논리적 모순을 보이는 해석이다. 따라서 본 논증에 대해서는 그리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단재 선생이 위와 같은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해주려다 보니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해석을 했다고 보여 진다.
❝ 예종본기(睿宗本紀)나 묘청전(妙淸傳)으로 보면, 당시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으로 기운 자가 거의 전 백성의 반이 넘었으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仁宗)도 십중팔구 묘청을 신임하였다. 비록 김부식 ‧ 문공유(문공유(文公裕)) 등 몇몇 사람의 반대자가 외적의 형세를 과장하면서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보루를 고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 이같이 성숙한 시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김부식의 상소문 하나로 인종(仁宗)이 평양천도 계획을 중지한 것에 문득 화를 내고는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견충의군(천遣忠義軍:하늘이 파견한 충의의 군대)이라 자칭하고,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는 인종에게 상경의 새 궁궐로 옮겨와서 그 국호, 그 연호를 받기를 요구하니, 그 시대의 신하의 예(禮)로 볼 때 그 얼마나 제멋대로 날뛱 설친 행동이었던가. ❞
이제 왜 단재 선생이 묘청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고 했는지 이해를 할 것이다. 결코 앞서 논증했던 요적론을 가지고 묘청을 미친 사람으로 묘사를 하지 않았다. 위에 보이는 것처럼 묘청이 평양천도를 주장하던 시기 칭제북벌론을 받아들이는 백성들이 거의 반이 넘었을 정도라니 고려의 인종 역시도 이러한 백성들의 염원을 무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인종이 심사숙고를 하여 칭제북벌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했었다는 점을 단재 선생은 논하고 있는 것이다.
“ 예종본기(睿宗本紀)나 묘청전(妙淸傳)으로 보면, 당시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으로 기운 자가 거의 전 백성의 반이 넘었으며 ”라는 문장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백성들의 염원을 비록 그가 나라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백성들의 칭제북벌론에 대한 강력한 지지는 결국 칭제북벌론과 평양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에 대해서 인종 역시도 십중팔구는 신임을 했을 것이라고 단재선생은 논하고 있다.
물론 단재 선생은 위 예종본기나 묘청전에 나와있는 기록을 토대로 하여 논증을 하였지만 우리겨레의 얼과 넋 즉 나라를 충성으로 받들고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는 민족의 기상이 어디로 가겠는가? 따라서 단재 선생의 논증 그 나름의 타당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묘청은 그 인내심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묘청은 단재 선생이 예종본기와 묘청전을 토대로 논증을 하였던 것처럼 당시에 칭제북벌론을 주장했던 파들에게 유리하게 주어져있던 시기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데 대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 김부식의 상소문 하나로 인종(仁宗)이 평양천도 계획을 중지한 것에 문득 화를 내고는 서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라고 하여 그 아쉬움을 진하게 토로하고 있다. 지나치게 성급했던 묘청의 성정에 대해 아쉬움을 넘어 분노가 끌어 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참으로 안타갑기 그지없는 우리네 역사이다. 만약 당시 묘청이 참을성 있게 때를 기다리고 또 철저한 준비를 했더라면 자주파들이 승리를 했을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배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묘청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끝내 군사를 성급하게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반면 인종 역시 사대주의파인 김부식의 상소문 하나로 칭제북벌과 같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국사중에 국사를 그리도 쉽게 포기를 했다는 것 역시 대단히 성급한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이니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이에 대해서 역사적 판단을 할 뿐이다. 다만 이와 같은 겨레의 발자취를 통해서 현재를 사는 우리겨레의 앞길을 가는 길에 교훈으로 삼았으면 해서 본 글을 길게 올려주는 것이다. 결코 쓸데없는 기록이 아니다.
묘청 역시 성급하기는 했지만 그가 국호를 정하고 연호를 제정한 것을 보면 그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국체를 세우려고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 ”에서 보듯이 묘청은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스스로 하늘에서 파견한 충의의 군대라고 하면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고 하면서 고려를 자주적인 나라로 일으켜 세울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자주적인 사상과 주체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했음에도 묘청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단재 선생은 이를 대단히 안타가워 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닌 우리겨레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나라를 세울 기회를 상실함에 대한 안타까움인 것이다. 만약 이때 묘청의 의지대로 평양으로 천도를 하고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북벌을 성공적으로 하여 단군조선과 고구려가 경영했던 광대한 영토를 회복했더라면 후일의 우리겨레의 역사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지나간 과거이니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사속에 우리는 끈임 없이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을 미래의 겨레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정책으로 반영이 되어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설치는 행동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내부가 공고해지고 그 실력이 웅대하고 두터워진 뒤에 발표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묘청의 거병 밀모(密謀)에 윤언이와 정지상이 함께 참여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묘청의 심복 제자인 백수한(白首限)까지도 송도(松都)에 있으면서 사태 진행의 내막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 공모자(共謀者)는 불과 일시 서경에 와 있던 병부상서(兵部尙書) 유담(柳白+山),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뿐이었다. 이들이 갑자기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이중(李仲)을 잡아 가두고 그 병력을 빼앗아 거사하였으니, 인종(仁宗)이 비록 나약하나 어찌 대위국황제(大爲國皇帝)라는 허명(虛名)을 탐내어 제멋대로 날뛰는 신하들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기꺼이 옮겨가려 하겠는가. ❞
역시 묘청의 성급함과 준비부족을 비판하고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거사를 그리도 쉽게 준비도 없이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만약 묘청의 거사가 성공을 했다해도 만약 그러한 나라가 고려였다면 그 역시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단재 선생 말대로 묘청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찌 거사 중에서도 거사를 단행하면서 함께 할 인물들이 겨우 두 명 이었다니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아무리 작은 나라들도 비록 군사쿠데타라는 오명을 쓰기는 하지만 그 반란 혹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해야 하는 것은 수학법칙과 같이 어길 수 없는 철칙이다. 그런데 묘청은 그 준비의 철저성에서 결국 실패를 예고를 했다.
또한 함께 할 인물들도 역시 철저하게 규합을 해나가야 함에도 묘청은 거사를 할 때 병부상서 유담과 분사시랑 조광뿐이었다니 겨우 두 사람을 가지고 어떻게 거사가 성공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서경병마사 이중을 제압하고 그의 병사를 빼앗아 거병을 하였다고 하나 이는 겨우 현대식으로 말하면 겨우 사단장 하나 죽이고 그 병사를 토대로 거대한 나라를 뒤겠다는 것 밖에 그 무모함을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서경병마사를 죽이고 그 병사를 빼앗고 그 병사를 토대로 서경을 접수하였다고 하나 이는 찻잔속의 태풍일 뿐이며 결코 그 거사는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적어도 거사가 성공을 하려면 중앙에 탄탄한 조직이나 지원세력이 없이는 거사가 성공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단재 선생이 묘청을 제 정신이 아닌 인물로 묘사를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묘청의 거사는 준비 부족과 성급한 결정과 거사의 단행 그리고 함께 할 인물의 부족등은 시작부터 이미 그 실패가 예고가 된 것이었다. 아무리 의지가 정당하고 옳다고 해도 준비성이 없고 함께할 인물이 없이는 어떤 일이던 그 성공을 장담 할 수 없다. 아니 그런 거사나 일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100%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묘청 역시 다를 바 없다.
또 이와같이 성급하고 허약하면서 전략전술도 없이 단행된 거사에 아무리 그 임금이 허약하다 해도 이를 선뜻 받아들일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개인 간에도 어떤 조직이 무어지면 그 조직의 장은 결코 허투루 행동할 수 없으며 만약 그가 일부 조직원들의 이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 그 조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한데 어지 한 나라의 임금이 그리도 성급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이는 묘청을 성급함과 준비부족 전략전술의 부재를 비판할 수밖에 없다. 단재 선생이 바로 이 점을 비판한 것이다.
❝ 윤언이가 비록 칭제북벌론에는 동의하였던 사람이지만 어찌 이같이 미쳐 날뛰는 거동에야 함께할 수 있었겠는가. 윤언이의 일파는 고사하고 묘청의 친당(親堂)인 문공인(文公仁)등도 거병했다는 소식이 처음 송도에 전해졌을 때에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소식을 거의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전해온 소식이 점차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자 칭제북벌론자들은 모두 와해되고, 반대자 등이 작약(雀躍 - 너무 좋아서 날뛰는 행위)하여 김부식이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묘청 토벌의 길에 올랐다. 정지상 백수한 등은 출병 전에 김부식에게 피살되었으며, 윤언이는 묘청과 같은 칭제북벌론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막하(幕下 - 신하, 참모장)가 되어 묘청 토발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
더 이상 말해 무얼 하겠는가? 치밀한 계획과 준비 없이 단행한 거사는 위에 보이는 것처럼 자파(自派)들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반대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묘청의 성급한 거사로 말미암아 자신과 같이 칭제북벌을 주장하던 자파세력들이 반대파인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피살을 당하고 심지어는 자파 중 한 사람인 윤언이가 묘청이 거사한 거병을 토벌하러오는 반대파의 참모장이 되는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 얼마나 무모한 거사였고 거병이었던가. 단재 선생은 바로 묘청의 성급하고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거사를 단행한 짓을 한 것에 대해 〈미친 묘청〉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풍수설이나 비결 등을 통해서 칭제북벌과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을 요적 혹은 미친 짓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우리겨레역사의 흐름이 결정이 된 것이다. 참으로 애석하고 통탄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위에서도 보는 것처럼 이 사건으로 자주파인 「선배 ‧ 화랑파」들의 씨가 마르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단군조선 이래 근 4천여 년을 이어온 우리겨레의 얼과 넋인 「선배 ‧ 화랑정신」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고려시기 외래 사상을 숭상하고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었던 파들에 의해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선배 ‧ 화랑파」들이 패한 일을 두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안타까움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 표현은 물론 정확한 사실에 근거를 한다거나 증거를 두고 떠도는 소문이 아닌 풍문을 가지고 떠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이 당사자들에게는 더 뼈아픈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일단을 보기로 하자.
❝ 정지상(鄭知常)은 시재(詩才)가 고금(古今)에 절륜(絶倫: 비슷하거나 비슷한 자가 없는 상태를 말함)하여 문예가(文藝家)들의 숭배를 받다가 김부식에게 죽었으므로, 후의 시인들이 이를 불평하여 그에 대한 일화(逸話)가 많이 유행하였다. 그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詩) 중에서 “임궁(琳宮)의 경(磬)쇠 소리 그치니, 하늘색이 유리처럼 맑구나(琳宮擊磬罷. 天色淨琉璃. 림궁격경파. 천색정류리)”라는 양 구(句)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정지상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살해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정지상이 “그대 술 있거든 부디 나를 부르소서.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또한 청하오리. 그래서 우리의 백년세월을 술과 꽃 사이에서 지내보세”라는 시조 한 수(首)를 지었더니, 김부식이 보고는 “이놈이 시조까지 나보다 잘 한다”고 하여 살해하였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문예상 시기심도 한 원인이 되었을지 모르나, 대체로 김부식은 사대주의자의 괴수(魁首)였고, 정지상은 북벌파의 대장(大將)이었던지라, 만일 정지상을 살려두어 그 작품이 유행하도록 허락한다면 혹 그의 북벌주의가 부활할지도 모르므로, 이것이 김부식으로서는 정지상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대의 원인일 것이다. ❞
김부식이 단순히 정지상의 시재(詩才)에 대한 시기심에서 정지상을 살해했다거나, 혹은 정지상이 그의 시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음에도 주지 않아서 살해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겨레의 글속에는 항상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아래 단재 선생도 논증을 하고 있듯이 “만일 정지상을 살려두어 그 작품이 유행하도록 허락한다면 혹 그의 북벌주의가 부활할지도 모르므로, 이것이 김부식으로서는 정지상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최대의 원인일 것이다”가 정확한 이유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정지상의 예만 들었기에 정지상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만약 김부식이 정지상을 살려두고, 정지상은 그의 시재를 통하여 끈임 없이 칭제북벌과 서경천도를 주장했거나 아니면 암시라도 했다면 정지상을 따르던 많은 자주파들이 정지상의 주위에 몰려들 것이며, 이들은 정지상의 의도에 따라 칭제북벌을 주장하고 자주적인 고려를 세워나갈 것을 강하게 주장을 하였을 것이다. 이는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파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부식을 수괴로한 사대주의파들은 결코 정지상을 살려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묘청의 치밀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서두른 거사로 인하여 송도에 근거를 두었던 정지상, 백수한 등 자주파의 핵심들이 김부식을 수괴로 하는 사대주의파들에게 살해를 당하는 비극을 연출하고 만 것이다. 치밀한 준비나 철저한 대비도 없이 일으킨 거사는 자주파들에게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갔으며, 이 거사의 실패는 결국 우리겨레의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분기점이 되고 만 것이다. 즉 단군조선 이래 지켜온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강력했던 겨레의 역사적 흐름을 사대주의적이고 왜소한 역사의 한켠으로 들어서게 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② 자주파(自主派) 묘청의 패망(敗亡)과 윤언이의 말로(末路) - 자주파의 패망(敗亡)‧몰락(沒落)
❝ 인종(仁宗) 13년 정월에 묘청이 서경에서 거병하자 인종은 김부식을 역적 토벌 원수(元帥)로 임명하고, 김정순(金正純) ‧ 윤언이(尹彦頤) 등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김부의(金富儀) ‧ 김단(金旦) 등에게는 좌우(左右) 양군을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불과 수십일 만에 조광(趙匡)이 묘청의 목을 베고 항복하기를 청해 오자 조광의 사자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조광은 다시 항거하고 지킴으로써 그다음 해 12월에 가서야 비로소 성을 함락시키고 조광의 목을 베었다 ❞
결국 화랑파에 호의적이었던 인종도 치밀하지 못하게 거사를 한 묘청에 대해 더는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인종은 나라를 반역한 묘청일파에 대해 토벌을 단행하였다. 김부식을 괴수로하는 사대주의파인 유가(儒家)들은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자주파들인 「선배 ‧ 화랑파」들을 제거하지 못하지 못하여 온갖 술수를 모의하고 있었을 것인데 묘청이 스스로 그 빌미를 제공해주니 얼마나 환호했겠는가. 역사의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묘청이 거병을 하자 인종은 묘청일파를 토벌한 토벌군을 꾸리게 되는데 위에서 보듯이 대부분이 유학파들이다. 물론 자주파의 한 사람인 윤언이가 속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후일 철저하게 소외가 되면 그를 토벌군에 막라한 것은 〈토사구팽(兎死狗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윤언이가 토벌군 부원수로 참여를 하여 토벌에서 공을 세웠겠지만 윤언이 역시 철저하게 밀려날 것은 명백한 것이다.
또 묘청과 함께 거병을 하였던 조광 역시 자기만 살고자 묘청의 목을 베고 사대주의파들에게 항복을 했지만 그 역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걸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였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들인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한 목숨만 부지하고자 안달한다면 결국 자신의 목도 달아난다는 교훈을 뼈 속 깊이 새겨야 한 걸이다.
❝ 처음에는 김부식이 행군하는 도중에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 군사회의를 열고 급히 공격할 것인지 천천히 할 것인지를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윤언이 등 여러 장수들은 모두 급히 공격할 것은 주장하였으나, 김부식은 묘청이 흉모(凶謀)를 꾸민 지 5,6년이나 되므로 그 수비가 완전하고 단단할 것이니 수일 만에 공격해서 함락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천천히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
김부식 역시 묘청이 거사를 오랫동안 준비를 했기에 묘청일파에 대한 토벌작전을 성급하게 벌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을 하였다. 물론 고려시기의 사건을 현시대의 시각으로 보기에 묘청이 성급한 거사를 했다고 필자 역시 비판을 하였지만 묘청 역시 김부식이 말한 것처럼 5,6년을 준비해왔다고 하니 그리 쉽게 단행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이기에 성급한 거사였다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물론 묘청이 더 참을성 있고 치밀한 계획하게 거사를 단행하여 그 거사가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하는 바램 즉 자주파들이 승리를 거두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고려를 건설하고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더라면 하는 아위움에 그런 비판을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묘청의 거병을 토벌하러 간 김부식은 당시 상대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야 당연히 성급하게 토벌을 하지 않고 천천히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한 다음에 토벌을 한다는 판단은 정확한 결정이 아닌가 한다. 비록 사대주이파이지만 김부식은 매우 신중했던 인물인 듯하다. 물론 아래 논하겠지만 묘청일파가 분열을 하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대응을 했더라면 혹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
❝ 그러나 묘청이 음모를 쌓아온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미치광이 같은 망령된 생각에서 서경을 차지하고 거병하여 인종의 천도를 재촉하면 김부식 등 사대주의파는 자연히 놀라 흩어지고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토벌군이 이르자 묘청에 대한 그 도당(徒黨)의 신망(信望)이 갑자기 무너져서, 드디어 묘청의 목을 베고 항복을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하는 바이다. ❞
결국 위 글을 보면 묘청을 우두머리로 한 자주파들의 결속력이 형편이 없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결속력이 얼마나 허약했으면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에 묘청에 대한 신망이 한순간에 무너졌겠는가. 결국 김부식의 원수로 한 토벌군에 의해 거병을 한 묘청일파가 부너진 것이 아니고 내부분열에 의해 무너졌다는 말이다.
결국 김부식은 묘청이 그 준비를 해온 기간이 5,6년 정도 되므로 거병이 꽤 철저할 것으로 판단을 했지만 묘청의 거병이 철저하기는커녕 허술하기 그지없는 성급한 것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다.
또한 묘청일파의 판단력 역시 유아기적 판단력을 뛰어넘지 못한 듯하다. “다만 그 미치광이 같은 망령된 생각에서 서경을 차지하고 거병하여 인종의 천도를 재촉하면 김부식 등 사대주의파는 자연히 놀라 흩어지고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라는 문장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 얼마나 유아기적 유치한 판단력인가. 아니면 당시 고려가 그리도 허약한 나라였다는 말인가.
어쩌면 둘 다 해당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첫째 – 묘청의 유아기적 유치한 판단력의 소유자였고, 단재 선생이 고증한 것처럼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과대망상증 소유자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둘째 – 묘청과 그 일파가 거병을 하고 서경을 차지하게 된다면 김부식을 수괴로하는 사대주의파들은 겁을 먹고 놀라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망상을 할 정도로 고려 조정이 허약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묘청 단 한 사람만 그러한 거병을 했다면 몰라도 당시 서경에 와 있던 병부상서(兵部尙書) 유담(柳白+山),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도 묘청과 합세하여 거병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병부상서라 함은 병권을 쥔 자가 아닌가. 병권을 쥔 유담이 묘청과 함께 거병을 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고려가 그만큼 허약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고려가 허약했던 묘청이 단재 선생이 비판을 한 것처럼 유아기적인 유치한 사고를 소유한 미치광이였건 묘청일파는 중앙에서 토벌군을 조직하고 토벌에 나서자 자중지란에 빠져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역시 모든 국사는 철저하고도 치밀한 전술‧ 전략을 세운 다음에 단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찾는 것이 우리겨레에게는 중요하다.
❝ 조광(趙匡) 등이 묘청을 참수(斬首)한 뒤에 조정에서 용서해 줄 뜻이 없음을 보고 이에 급히 배반하여 서경의 성을 근거로 싸웠다. ❞
본 문장은 위에서 설명한 당시 고려가 대단히 허약했음을 알 수 있는 문장이다. 만약 묘청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그 준비가 철저했더라면 묘청의 거사가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조광이 묘청의 목을 베고 조정에 항복을 청했음에도 조정은 조광 등 묘청일파를 용서해줄 수 없다는 의지를 확인한 후 서경(西京)의 성(城)을 근거로 항거를 해서 무려 2년간이나 버티었다니 당시 고려 조정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증명해준다. 이는 반대로 묘청의 거사가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어쨌건 지나간 과거의 일이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니 역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뼈저린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하는 과제가 우리게에 주어진 것이다.
❝ 만일 김부식이 윤언이를 믿고 그의 말대로 하였더라면 수일 만에 반란군을 쳐서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거늘, 김부식이 끝까지 윤언이를 의심하여 완공책(緩攻策)을 쓰다가 결국 2년이나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속공(速攻)을 하지 못한 이유가 밝혀졌다. 김부식이 묘청일파가 일으킨 반란을 신속히 토벌하지 않고 천천히 진압을 하자고 한 것은 김부식이 신중해서도 아니고 치밀한 계책을 세운 다음에 진압을 하자는 것아 아니다. 다만 신속히 진압을 하자고 계책을 낸 윤언이에 대한 믿음이 없고 오히려 그를 의심을 했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계책대로 신속히 토벌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단재 선생은 논증하고 있다.
물론 단재 선생의 이와 같은 비판이나 논증에 대해 나름대로 다양한 의견은 있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단재 선생의 고증도 또 하나의 역사 해석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여 년 전의 일을 오늘 우리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객관적이요 증거요 하고 주장하는 것 역시 자신들이 주장하는 설일 뿐이라고 또 다른 이들은 주장을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 해석이란 정답이란 없다. 마치나 19세기말 서구인들이 주장했던 실증사학이 역사해석의 유일한 도구요 모든 역사해석을 정확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온당치 못한 주장이다. 무릇 역사 해석이란 무수히 많은 분야를 동시에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재 선생이 묘청의 거사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한 논점이라고 본다. 즉 단재 선생은 우리 겨레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묘청의 거사를 해석하고 분석을 했다는 점에 그 방점이 주어졌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 그리하여 안으로는 인종의 의구심이 적지 않고 밖으로는 금국(金國)이 쳐들어올 염려가 있어서 다급해지자, 그때 가서야 윤언이의 말을 듣고 기술자(技術者) 조언(趙彦)이 만든 석포(石砲: 돌을 쏘는 기계)로 성문을 부수고 화구(火求: 불을 붙인 공)를 던져 성을 함락시키는 공을 이루었으니, 〈고려사〉의 묘청 ‧ 윤언이 ‧ 김부식 세 사람의 열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 전쟁의 성공은 모두 윤언이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김부식은 한 치의 공로도 없음이 명백하다. ❞
본 글은 독자들이 읽어보면 알 수 있기에 특별한 해석은 하지 않는다. 핵심은 김부식이 신중해서도 아니고, 전술전략을 완벽하게 구사해서 토벌작전을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해석이 없다면 앞서 설명한 김부식이 주장한 천천히 토벌할 것이라는 문장만 보면 혹 김부시기 신중론자이자 치밀한 전략전술을 수립하자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이다. 김부식은 결코 신중론자라거나 치밀한 전술전략가도 아닌 그저 겁 많고 결단성도 부족한 자라는 해석을 단재 선생이 하고있는 것이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단재 선생의 해석의 옳고 그름을 평할 수는 없다. 다만 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마음을 먹으니 토벌에 필요한 무기도 개발하고 이를 이용하니 순식간에 토벌을 하였다는 문장을 단재 선생의 해석에 일견 타당성도 있다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 토벌의 성공할 수 있었던 전술전략 역시 김부식이 수립을 한 것이 아니라 윤언이가 수립한 전술전략이라는 것이 〈고려사〉 묘청‧ 윤언이 ‧ 김부식 등 세 사람에 대한 열전을 분석하면 증명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을 겨레의 자주정신과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의 얼과 넋으로 살아가는 넋 빠진 겨레, 얼을 상실한 겨레로 살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 윤언이는 원래 묘청과 동일한 칭제북벌론 자였으면서도 이제 도리어 묘청 토벌에 힘을 다 하니, 이는 곧 자신의 주의(主義)를 배반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는 묘청의 허물이지 윤언이를 나무랄 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
어쩌면 단재 선생은 묘청을 우두머리로 한 서경천도와 북벌론을 주장하고, 서경에서 거병을 단행하여 인종을 서경으로 옮겨올 것을 주장한 세력들에 대한 분노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지나간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분노할 필요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분석을 한다 할지라도 논자 개인의 주관성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이 사회과학을 분석하고 논증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객관성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단재 선생 역시 고려시기 칭제북벌론 자들이 성공을 하여 우리겨레가 19세기말 ~ 20세기 초 민족의 수난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묘청의 거사 실패를 뼈아프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는 결국 치밀한 준비와 철저한 전략전술 없이 성급하고 조급하게 거사를 단행하여 실패를 가져오게 한 그 책임을 묘청에게 무겁게 지우는 의미에서 묘청에 대한 비판의 날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면 자주파들에 의해서 단행된 서경거병에 대해 토벌군으로 참여를 하여 결정적인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여 토벌에 공헌을 한 윤언이에 대해서는 관대한 평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윤언이가 적극적인 자주파요, 「선배 ‧ 화랑파」라고 한다면 자주파에 합세를 하여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한 발 양보해서 자주파들의 거사에 합세는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지 못했다면 차라리 모든 직을 내던지고 초야에 뭍히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적어도 자파들에 대한 토벌에는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윤언이는 자파라고 할 수 있는 자주파들의 거사를 토벌하는 토벌군에 참여를 하여 적극적으로 자파를 토벌했으니 필자는 개인적으로 윤언이 역시 묘청의 실패에 못지않은 비겁자 혹은 배신자라고 본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윤언이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단재 선생이 윤언이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건 필자가 윤언이에 대해 비겁자 내지는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었건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이니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필자 역시 단재 선생의 역사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간혹 동의를 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다. 윤언이에 대한 행위 역시 필자는 단재 선생의 논지에 동의를 할 수 없다.
어쩌면 단재 선생은 윤언이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묘청의 거사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오히려 실패에 대한 반감으로 묘청에게 그 책임을 무겁게 지우고 있으며 윤언이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 묘청의 행동이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여서 그와 동당(同黨)인 정지상(鄭知常) 등을 속여 사지(死地)에 빠지게 하고, 기타 주의(主義)를 같이 하던 모든 자들을 진퇴양난의 지경에 서게 함으로써 칭제북벌(稱帝北伐)의 명사까지도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게 하였으니, 윤언이가 비록 천재인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개선(凱旋) 후에 김부식은 윤언이를 정지상의 친구라 하여 얽어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그는 전공(戰功)의 상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6년간 먼 곳으로 귀양 갔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
자주파의 한 사람이자 주역이었던 묘청의 성급한 거사는 위에서 보듯이 자주파들에게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아니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망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는 묘청가서의 실패이후 우리겨레의 사상사나 역사전개에 대해 고찰을 해보면 뚜렷이 증명이 된다. 이후 우리겨레의 역사는 겨레의 자주사상과 주체적 나라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음이 역사적 사료로서 증명이 되고 있다. 물론 혹자는 후조선 역시 화하족과 아시아 각 족속들을 거느렸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자의적이고 극히 일부를 확대왜곡해석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필자는 완전한 객관성도 부정하지만 근거가 미약한 사실을 침소봉대하는 것 역시도 경계를 하고 있다.
단재 선생은 묘청의 성급한 거사로 인하여 자주파들인 「선배 ‧ 화랑파」가 사대주의파들인 유학파(儒學派)들에 의해 토벌을 당하고 이를 강력하게 이끌어가던 주측세력들이 죽임을 당하고 또 유배를 당하는 등 위상이 뿌리채 뽑혀나감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한 자주파 주측세력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자주파들인 「선배 ‧ 화랑파」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한다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지경으로 빠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따라 묘청의 거사실패는 우리겨레의 얼과 넋을 살리려는 시도는 언감생심 꿈도 꿀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후조선이 명백히 증명을 해주고 있다.
❝ 윤언이가 자신을 변명하는 상소문, 즉 자명소(自明疏)에서 “임자년에 왕께서 서경으로 행차하실 때,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 칭호를 쓸 것(稱帝)을 청하였는데 ‧‧‧ 이 연호를 세우기를 청ㅇ한 것은 왕을 높이려는(尊王)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왕조에서도 태조(太祖), 광종(光宗) 때에 그런 사실이 있었고, 과거 왕조의 문건을 상고하면 신라와 발해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在任子年 西幸時, 上請立元稱號 ‧‧‧ 緊是立元之稱. 本乎尊王之誠. 在我本朝 有太祖‧光宗之故事. 稽諸王牒. 雖新羅‧渤海以得爲. 재임자년 서행시, 상청립원칭호 ‧‧‧ 긴시립원지칭. 본호존왕지성. 재아본조 유태조‧광종지고사. 계제왕첩. 수신라‧발해이득위)”라고 하여, 연호(年號)를 세우는 일(立元) 한 가지만 변명하고 칭호(稱號: 황제라 칭함)의 일은 묵과하였으니, 칭제북벌의 논자로서 사대주의자들의 조정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니 그 신세가 거북하였음과 언로가 자유롭지 못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
윤언이는 사대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그의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전전긍긍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명소≫라 하겠다. 위 자명소의 내용에서 보듯히 그 자신을 변명하는 문서이다 보니 자신의 주견을 당당하게 펼치지 못했음은 물론이려니와 오히려 자주파들의 중요한 주장인 ≪칭제≫에 대해서 마져도 언급하지 못하는 비굴함을 보이고 있다.
윤언이가 조상들의 역사인 신라와 발해까지 언급을 하면서 고려에서도 연호를 사용할 것은 주장하였으나, 차마 칭제만은 자명소에 넣지 못하는 절름발이 자명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윤언이 개인적인 비굴성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겠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속해 있던 자주파들의 몰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에 윤언이 자신이 힘을 잃고 ≪자명소≫의 내용 자체도 비굴하게 작성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윤언이의 ≪자명소≫는 결국 「선배‧ 화랑정신」을 일으켜세워서 겨레의 얼과 넋을 공고하게 유지함으로서 강대한 고려를 세우고자 했던 자주파들이 화하족의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강한 힘을 가진 대국에게는 사대주의를 해야한다는 사대주의파들에게 패하여 그 힘을 완전히 소멸한 역사적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윤언이의 아래 기록은 사대주의파들에게 패한 자주파들의 참담한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윤언이가 웃으면서 “스님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구나”고 말하고는 벽에다 글을 써서 이르기를 「봄 지나 다시 가을 되니, 꽃 피는가 싶다가 어느덧 낙엽 지네, 동(東)에서 서(西)로 가고 또 가는데, 나의 본성(本性:眞君)이나 잘 기르리로다. 생사(生死) 도중에 선 오늘 이 몸 다시 돌이켜 보니, 아, 모든 것이 만리 장공(長空)의 한 조각 한가한 구름이로세!(春復秋兮 花開落葉. 東復西兮 善養眞君. 今日送中 反觀此身. 一片閑雲. 춘복추혜 화개락엽. 동복서혜 선량진군. 금일송중 반관차신. 일편한운.)”라고 하고는 부들 돗자리에 앉아서 영면(永眠)하였다. ❞
윤언이가 벽에 쓴 글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분노와 서글픔을 표현하고 있다. 저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삶의 회한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언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윤언이의 유언과도 같은 벽에 쓴 글을 보면서 역사의 쓰라린 교훈을 뼈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지나간 시간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이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뼈저리게 절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하여 살아줄 수 없듯이 겨레의 삶, 발자국 역시 이민족이 결코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고려시기 자주파인 「선배 ‧ 화랑파」와 사대주의파인 「유학파」의 생사를 건 쟁투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겨레는 뼈아픈 교훈을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그가 벽에 쓴 글은 표면상으로는 한 개의 불게(佛偈: 불교의 중이 쓴 글귀)와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주의(主義) 실천에 실패한 분노가 말 밖(言外)에 넘치고 있다. 한 사람이 잘 못 행동하여 여섯 위인(偉人)을 죽였으니(一不而殺六通), 아, 지극히 가슴 아픈 일이로다.
묘청이 비록 그 행동은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였으나, 그 주의(主義)상의 불후의 가치는 김부식 류에 비할 바가 아니거늘, 이전의 사서(史書)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말들만 있고 그의 뜻을 살린 말들은 전혀 없으니, 이는 공정(公正)한 논의가 아니라 할 것이다. ❞
자주파인 「선배 ‧ 화랑파」와 사대주의파인 「유학파」간의 고려중기 벌어진 투쟁에 대한 단재 선생의 역사적 평가를 결속지은 문장이다. 단재 선생의 글 속에는 자주파인 「선배 ‧ 화랑파」가 사대주의파인 「유학파」에게 패한 것을 매우 분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단재 선생은 그동안 묘청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공정치 못하다고 비판을 하고있으며, 단재 선생은 그간의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묘청에 대해서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단재 선생은 비록 묘청이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철저하고 치밀한 전술전략이나 인재들을 폭넓게 포용하여 거사를 완벽하게 성공시켰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사대주의파의 우두머리인 김부식일파에게 패한 것에 대해 통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가들이 많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역사적 판단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수학법칙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나간 역사지만 후세의 입장에서 새로운 평가와 비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재를 사는 겨레에게 있어서 역사적 교훈을 주고자 함이요, 또 그 교훈을 바탕으로 다시는 역사적 실패를 가져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사회과학에서는 1+1=2도 될 수가 있겠지만 1+1= (2+α)=큰 하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분석하는 방법론에 따라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서 달르게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 사회과학인 것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 역시 달라질 수는 없다. 우리 조상들이 오늘 날 남쪽의 사회와 같이 겨레의 얼과 넋이 깡그리 사라져버린 땅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자신의 얼과 넋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겨레의 얼과 넋을 이야기 하면 백안시 하는 어이없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 오늘의 이 땅이다.
이는 명백히 말 하건데 올바른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그 주요인이라고 단언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겨레의 얼과 넋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곱씹어보면서 자신들을 철저히 반성을 해야 한다. 그 반성의 토대위에서 우리겨레의 얼과 넋을 되살려야 우리겨레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6) 자주파인 「선배 ‧ 화랑파」와 사대주의파인 「유학파」간의 쟁투에 대한 맺음 말
우리역사 이야기 10회부터 이번 14회까지 단재 선생께서 우리겨레의 얼과 넋이라고 고증을 한 단군조선시기의 「선배」, 고구려의 「선배‧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과 고려의 「선배‧화랑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단재 선생은 「선배」=「선배‧ 조의선인」=「화랑」은 곧 배달겨레의 얼과 넋이라고 고증을 하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단재 선생의 고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하며 단재 선생의 논증 역시 몇 군데 논리적 모순을 보이는 것(전체적인 맥락을 허물지 않는 무시해도 좋을 모순)을 제외하고는 타당한 고능을 했다고 평가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겨레 결코 고려중기 이전까지는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사대주의를 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역사, 문화, 문명 역시 이민족을 선도했으면 했지 그들을 따라서 사대주의를 하지 않았다.
또 만약 적들이 우리겨레의 신성한 땅을 침략하면 결코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 삼한(여기서 삼한은 남쪽에서 말하는 진한, 변한, 마한을 말하지 않음. 남쪽에서 말 하는 삼한에 대해서는 후일 연재를 하면서 고증을 할 것이다) 말기 〈고두막한〉은 한(漢)나라가 침략하자 그들의 근거지까지 끝까지 쫒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주살을 하였다. 또 우리 겨레는 적들의 침략 앞에서는 절대 자신의 한 몸을 돌보려 도망치지 않았으며 한 몸을 서슴없이 던져서 사랑하는 겨레와 나라를 지켰다. 단재 선생 역시 이 부분을 일컬어 「선배정신」=「선배‧ 조의선인정신」=「화랑정신」이라고 고증을 하였으며, 이 정신이 곧 우리겨레의 【얼】과 【넋】라고 하였다.
우리겨레의 역사에 있어서 「선배정신」=「선배‧ 조의선인정신」=「화랑정신」이 펄펄 살아 숨쉬던 시기인 단군조선 → 삼한 → 후 삼한 →고구려‧백제‧신라 → 고려중기 까지는 온 누리 역사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를 유지하였으며, 그 문명과 문화는 온 누리를 선도하였다.
우리 겨레는 8천여년 전부터 이미 쇠를 이용하였으며, 종이, 인쇄술, 섬유산업(물론 가내공업이었지만 – 북한사회과학원 발행 〈고조선 력사개관〉에서는 이 시기 이미 가내공업수준을 뛰어넘는 집단적 수공업화까지를 언급하고 있다) 등등 온 누리를 선도하였다. 이에 대해서눈 후일 우리겨레의 문명사를 연재할 때 상세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리도 강성했고 또 온 누리에 그 존엄을 떨치던 우리겨레는 고려중기 외래 사상인 유학을 화하족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해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고려중기 이후 우리겨레는 외적의 침입에 국가적으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후조선시기는 우리겨레의 얼과 넋이 일반백성들에게는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왔기에 백성들 저변에는 남아있었으나 이를 국가적으로 결집하여 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운명으로 전락을 하고 말았다. 결국 우리겨레는 19세기말 세계사의 조류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외세의 발굽아래 떨어지고 말았으며 치욕적인 식민지백성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민족사 최대의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그 여파는 아직까지 우리겨레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즉 70여 년간 겨레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민족적 역량이 분산을 함으로서 우리겨레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민족족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재 선생께서 고증을 한 「선배정신」=「선배‧ 조의선인정신」=「화랑정신」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펄펄 살아있는 우리겨레의 얼과 넋으로 공고화시키는 길이 그 지름길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단기 4347년(2014년) 7월 120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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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부터는 단재 선생이 고증한 우리겨레의 상고시대의 ≪대외관계사≫를 연재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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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삼국사기(김부식 지음, 신호열 옮김. 동서문화사, 2판1쇄. 2007년 7월 20일)
삼국사기(원문)(김부식 지음. 강무학. 청화 1989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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