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2일 일요일

세월호 유가족 형제자매, '너에게 보내는 편지'...

"다음 생에도 내 오빠로"... 광장 나온 희생자 형제자매

15.04.12 20:53l최종 업데이트 15.04.12 21:0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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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띄우는 편지... 얘들아 보고 있니' 12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유족 형제자매가 여는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부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열렸다. 사진은 참가자들의 모습.
ⓒ 유성애

12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은 향 냄새로 가득했다. 세월호 유족 농성장이 있던 자리에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분향소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영정사진이 빼곡히 붙은 분향소 뒷편 광장에 유가족 형제자매들이 섰다. 세월호 참사 후 1년, 이들 말대로라면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지금, 희생자 형제자매들 마음을 처음 표현하는 자리"였다. 

[3시 정각] 하늘로 편지를 띄운다, 돌아오지 못할 너에게

이날 열린 추모행사의 제목은 '너에게 보내는 편지(부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발신인은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와 온라인 사전 신청을 한,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행사 진행자는 "유족 형제자매들은 아직도 언론에 노출되는 걸 두려워 한다"며 "너무 가까이서 형제자매들을 촬영하거나 말을 거는 것은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3시, 형제자매들과 일반시민을 합쳐 총 48명이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섰다. 이순신 동상 앞에 ㄷ자 형태로 서되, 행인들이 사진을 잘 볼 수 있도록 바깥 도로 방향으로 섰다. 피켓에는 유족 형제자매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형·누나·오빠·동생에게 쓴, 눈물 젖은 편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오빠, 다음 생에도 나의 오빠로 태어나 줘. 그 땐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게, 더, 더욱더 잘해줄게!"
- 2학년 5반 고 이진환 학생, 동생


"단비 언니, 언니가 없는 밤이 너무나 외로워. 세월호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시간 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도 빼앗긴 것 같아서 너무 화가 나.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 매일은 아니지만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카톡 메시지 옆) 그 1이라는 숫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사춘기 핑계 대면서 말도 잘 안했는데, 언니가 먼저 다가와 줘서 너무 고마웠어. 너무 사랑해!"
- 2학년 10반 고 이단비 학생,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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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동생이어서 너무 좋았어"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유혜원 학생의 동생.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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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없어도 시간은 흐르고..."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권순범 학생의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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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내가 보낸 카톡 언제 읽을거야'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이단비 학생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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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윤아, 깜비가 기다려... 빨리 와" 실종자 허다윤양의 언니도 다윤이에게 편지를 썼다.
ⓒ 유성애

"호연아, 잘 지내고 있지? 널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서 너무 힘이 드네... 네가 옆에 있을 때 더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형이 누구보다 널 좋아하는 거 알거라 믿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내 동생이어서 고마웠고, 자랑스러웠어. 사랑한다."
- 2학년 4반 고 김호연 학생, 형


"수인아, 12년 동안 같이 지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네. 수인아. 니 몫까지 열심히 살고 니 몫까지 이모에게 신경쓰면서 살게. 그리고 네가 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게. 사랑한다 수인아."
- 2학년 7반 고 곽수인 학생, 사촌형
 

온통 "사랑한다", "보고싶다", "잘 지내"라는 안부인사로 채워진 편지였지만, 그 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들도 있었다. "저도 이런 큰 사고가 제 가족의 일이 될 줄 몰랐다, 외면하지 말아달라(2-1 고 김민희 학생의 언니)"거나, "노란색은 정치적 색이 아니라 기다린다는 의미다, 실종자가 모두 돌아올 때까지 '끝'이라고 하지 말아달라(2-6 고 권순범 학생의 누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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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없는 대한민국 떠나고 싶어요, 누나 살려내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사진은 고 정예진 학생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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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 정치적 아닌 기다림의 의미"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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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제게 이런 일 일어날 줄은..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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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도 댓글 다 보고 있어요... 특례법 원하지 않아요"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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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밝힌다고 동생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유족 형제자매들은 추모행사 '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희생자들과 국민을 향해 보내는 편지를 썼다.
ⓒ 유성애

"우리도 페이스북과 뉴스 댓글 다 보고 있습니다. 너무 심한 말이나 근거 없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대학 특례법 원하지 않아요. 우리 집엔 대학갈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다시는 이런 일이, 당신들에게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섯살배기 아들이 '삼촌 어디갔냐'고, '왜 죽었냐'고 물어보면 전 뭐라고 해야 하나요?"
- 2학년 4반 고 김건우 학생, 누나


"진실이 밝혀지면 동생이 돌아오나요? 안전한 사회가 되면 동생이 돌아오나요? 저희는 그저 저희같은 아픔과 슬픔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잘못된 일인가요?"
- 2학년 3반 고 최윤민 학생, 첫째 언니


[3시 10분~3시 30분] 눈시울 붉힌 행인들... "가해자는 어디가고, 피해자만"


사진을 보는 행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광장을 지나가다 멈춰서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를 훑어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는 여성도 있었다.

편지들을 읽으며 눈물을 닦던 안아무개(여, 36)씨는 행사를 위해 강원도 양양에서 3시간이 걸려 왔다고 했다. "진실이 밝혀져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 안씨는 결국 행사 중간에 피켓을 들고 참가자들 옆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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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보는 행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며 광장을 지나가다 멈춰서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상하다는 듯 위아래를 훑어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여성은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 유성애

외국인 친구에게 행사 내용을 설명하며 사진을 본 양아무개(24, 고려대 재학 중)씨는 "사실 한국인으로서, 친구에게 이런 일을 설명하는 게 창피했다"고 말했다. "그 커다란 배가 바다에 빠졌는데, 국가가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다 빠져 죽었다는 게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함께 온 미국인 필립(24, 성균관대 교환학생)씨는 "뉴스에서만 접했지 이렇게 본 건 처음"이라며 "실제로 보니 더 비극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인 박근화(여, 27)씨는 사진들을 훑어보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하도 울어 눈 주변이 빨갛게 물든 박씨는 기자에게 "아이들이 잘못한 게 아니지 않냐, 잘못한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숨어 있고, 피해자인 아이들이 나와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뭐라도 돕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3시 35분] 풍물패 공연에 더욱 모여든 사람들... 이어진 침묵의 시간

참가자들이 피켓을 드는 동안, 이들 뒤에서는 풍물굿패 '신바람'과 '우리마당' 등이 참여한 풍물 공연이 10여 분간 이어졌다. 한편에서는 직사각형 틀을 커다란 비닐로 감은 뒤, 비닐 위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오빠 진실을 밝혀줄게", "다음 생에도 보고 싶다"고 쓰는 문화 예술 행동도 펼쳐졌다.

꽹과리·장구 등 커다란 풍물 소리에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과 남녀 커플 등 행인들이 더욱 모여들었지만, 공연이 끝나자 이내 흩어졌다. 이후 광장에는 10여분간 정적이 흘렀다.

[3시 45분] "형제자매들의 슬픔 늦게 알아 죄송합니다" "손 잡고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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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을 너무 늦게 알아 죄송합니다" 행사 도중, 한 여학생이 종이를 들고 참가자들에게 인사했다. 종이에는 "형제자매분들의 슬픔과 고통을 늦게 알아 진심으로 죄송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라고 써 있었다.
ⓒ 유성애

오후 3시 45분. 조용한 광화문 광장에서, 갑자기 뿔테 안경을 쓴 여학생이 종이 한 장을 높이 들고 광장을 돌기 시작했다. 손에 든 A4용지에는 "형제자매분들의 슬픔과 고통을 늦게 알아 진심으로 죄송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하겠다"라고 써있었다. 여학생은 유족 형제자매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종이를 들어 보이며,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굳은 표정의 참가자들도 이에 고개 숙여 화답했다.  

한 대학원생은 이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쓴 뒤 같은 방식으로 광장을 돌았다. 추모행사를 지켜보던 대학원생 김아무개씨는 "훨씬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어"라며 "얘들아 서로 손 잡고 같이 가자, 형제자매 동생들 사랑해"라고 하트와 함께 쓴 A4용지를 들어보였다. 마스크를 쓴 참가자들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짓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4시 16분] 네가 떠난 시간, 우리도 침묵을 접을게

"지금은 아이들이 떠난 시간, 4시 16분입니다. '너에게 보내는 편지' 피켓 퍼포먼스를 종료합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켓을 든 지 한 시간이 넘은 시간, 고 최윤민 학생의 언니 최윤아(24)씨가 추모행사 종료를 선언했다. 행사 시작 당시 48명이던 참가자는 계속 늘어나 70명이 돼 있었다. 이어 참가 시민들과 유족 형제자매들이 모여 간담회를 열었다. 마이크를 잡은 최씨는 "사람들은 보통 세월호 참사 피해자로 생존자만을 떠올리지만, 유족 형제자매들도 많이 아프다"며 "그 마음을 알리고 싶어서 이런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참가자들에게, "행사 중간에 풍물놀이 공연했을 때 사람들 관심과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끼지 않았냐"고 물은 뒤 "그게 바로 사고 이후 저희에게 쏟아진 관심이었다, 그러나 풍물패가 떠났을 때 느껴진 허전함과 공허함처럼, 저희들도 같은 허전함을 느끼며 요즘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 날 참가자들은 다양한 연령대였지만, 특히 10, 20대 젊은 층이 많았다. 20대 중반의 남성 참가자는 "세월호 사건 터졌을 때 저는 군인이었고 지금은 전역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며 "저기(청와대) 높으신 분들은, 잊으라고 강요하진 않지만 잊혀지도록 놔둔다는 게 너무 화난다"고 말했다.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제가 들고 있던 피켓은 고 이장환 친구(의 동생 편지)였는데, 제가 장환이가 잠시 되어 본 느낌이었다"며 "유족이 된다는 건 이 시대 가장 큰 짐인데 오늘 짊어져 보니 (그 짐을) 같이 들 수 있겠다고 느꼈다, 제 스스로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고마워했다.

최윤아씨는 이후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사실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셔터 소리만 들려도 누가 날 사진 찍는가 싶어 깜짝깜짝 놀란다"며 "(그럼에도 유족 형제자매들이 나선 것은) 부모님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모님들께서 행진하고 삭발하고, 어디까지 하실지 몰라 겁이 났다"는 설명이었다.

최씨는 이날 행사 참가자들에게 특히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며 "왜 정치인들이 거짓말하고 약속 안 지키는 게 당연한가, 어릴 땐 모두 잘못된 거라고 배우지 않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씨는 "동생을 잃기 전까지 저는 '착한아이 증후군'에 걸린 것 마냥 어른들 말이면 다 옳은 거라고 봤다"며 "동생을 잃고서야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러분은 저처럼 너무 큰 걸 잃기 전에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추모행사는 4시 40분께 참가자들이 모두 박수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 편집|박순옥 기자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을 보호하는 일본시민들

‘안심하고 등교하라, 호위무사가 지켜주마’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을 보호하는 일본시민들
요코하마=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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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2  23: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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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 요코하마 역전에 나타나다
  
▲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응원단’이 4일 아침 일본 요코하마 역전에서 둥글게 둘러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등교를 보호하는 ‘호위무사’(護衛武士)가 지난 4일 아침 일본 요코하마에 나타났다.
이른바 재일동포 초등학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응원단’(응원단). 이들 ‘응원단’은 주로 일본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날은 일본에 있는 민족학교들이 일제히 개학을 하고 신입생들이 입학하는 날.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가 있는 요코하마역 앞 다카시마야(高島屋) 건물 앞에 오전 8시 30분경 30여 명의 ‘응원단’이 삼삼오오 모였다.
이들은 요코하마 YMCA 회원들 및 전문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북일 국교정상화를 지지하는 단체 성원,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단체 성원, 생협 담당자, 다문화교육네트워크 담당자, 국제교류재단 성원, 고등학교 현직교사, 시립도서관 사서 그리고 재일동포 2세를 남편으로 둔 릿교대학 박사과정에 있는 호주 여성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30여 명의 ‘응원단’은 한국의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처럼 주황색 리본을 왼쪽 가슴에 달아 동질감을 표시하고는 다카시마야 건물 앞에 둥글게 둘러섰다. 1년에 한 번 만나고 또 올해 경우 반 정도는 새로운 참가자라 서로 인사와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오렌지색 리본 달고 거리 행진
  
▲ ‘응원단’이 주황색 리본을 단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를 향해 도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자기소개에 이어 이날 행사와 관련한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응원단’은 주황색 리본을 단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를 향해 도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응원단’은 20분에 걸쳐 자유롭게 행진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 못다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 행진의 유래는 이렇다.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북한당국이 일본사람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실 인정’과 ‘진상 규명’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납치 문제’만 불거져 일본열도가 분노로 들끓었다.
일본인들은 연일 반북시위를 개최하고 재일동포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재일동포들은 공포에 떨고 기가 죽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일본사람들의 위협과 해코지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에 양심적이고 뜻있는 일본사람들이 나섰다. 이들은 골목골목마다 지켜 서서 재일동포 학생들이 학교까지 무사히 등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같은 전통이 벌써 12년이 지나 올해가 13년째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던 학생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쳐 올해 12년 만에 첫 졸업을 했다.
손님맞이 청소하는 학생들
  
▲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학생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교문 계단을 청소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응원단’이 학교에 도착하자 어린 학생들이 손님맞이를 위해 빗자루를 들고 교문 계단과 운동장을 청소하고 있었다.
입학식 날인 이날은 휴일인 토요일이라 학부모는 물론 모든 가족이 참석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눈에 띄고 형제자매들도 보였다.
올해 입학 신입생은 모두 11명. 학교 측은 올해 입학생 수가 줄었다고 밝혔다. 전체 학생은 70여명 정도.
  
▲ 가족사진을 찍고 있는 김진주(6) 학생 일가족.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재학생이 신입생들에게 이름표와 꽃을 달아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축제 분위기인양, 학교건물 현관에서 신입생 가족들이 입학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앞서 재학생 선배가 신입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이름표와 꽃을 달아주었다.
신입생들은 선배가 달아준 이름표와 꽃에 기뻐하며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가족사진을 찍고 난 김진주(6) 학생에게 입학 소감을 묻자 “긴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기뻐요”라고 답한다.
  
▲ 응원단의 깃발 호위를 받으며 선생님과 함께 입학식장으로 들어가는 신입생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그 사이에 응원단은 운동장에서 ‘입학 축하해요’라고 한글과 일본어로 쓰인 깃발을 조립했다.
이윽고 깃발 조립이 완성되자 응원단은 신입생 입학식이 열리는 체육관 입구 길 양옆에 깃발을 들고 마치 ‘호위무사’처럼 우뚝 선 채 또는 ‘수호천사’처럼 한없는 웃음을 머금은 채 신입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치 ‘신입생들이여 우리가 보호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등교하세요’ 하는 것처럼.
신입생이 주인인 입학식
  
▲ 입학식장 광경.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응원단이 입학식 모든 과정을 호위하듯 입학식장 맨 뒤에 깃발을 들고 앉아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오전 10시경 체육관 내에서 2015년도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입학식이 진행됐다.
무대 연단은 꽃장식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단식으로 된 무대에는 모두 11개의 의자가 있어 이날의 주인공들이 앉을 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엔 재학생들, 오른쪽엔 학부모들이 자리잡았고, 맨 뒤엔 ‘응원단’이 마치 오늘 입학식 전 과정을 보호하겠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깃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신입생들이 화환으로 된 터널을 지나 재학생들이 뿌리는 색종이 가루를 맞으며 학부모 등 참가자들의 세찬 박수 속에 보무당당히 입장해 단상에 올랐다.
  
▲ 이날의 주인공인 신입생들. 무대 중앙에 자리잡았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한 신입생이 교장 선생님한테 교과서 선물을 받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의 주인공인 11명의 신입생들이 무대 한가운데 자리한 가운데 입학식이 진행됐다.
개식 선언에 이어 축전 소개, 학교장 인사, 신입생 호명, 교과서 전달, 각계각층이 보내준 선물 전달 그리고 재학생 대표의 축하의 말과 신입생 대표의 입학 결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신입생들을 주인으로 놓고 진행됐다.
신입생들은 호명 소개 때 자기 이름이 불러질 때마다 한 명씩 일어나 “예”하고 크게 소리쳤으며, 교과서와 선물이 전달될 때마다 한 명씩 나와 내용물을 받곤 무대 아래 가운데 서서 참가자들에게 큰절을 하고 자리로 빙 돌아가는 수고스러움(?)과 활달함을 보였다.
  
▲ 재학생 대표들이 신입생들에게 꽃을 선물하자 장내는 참가자들의 환호 속에 절정에 달했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기념촬영. 신입생들이 깃발을 든 '응원단'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특히, 입학식 말미에 재학생 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며 비닐에 싼 조그마한 꽃을 선물하자 장내는 참가자들의 환호 속에 절정에 달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 소개는 한국이나 재일동포에게 있어 그 호기심은 마찬가지인 듯. 입학식 말미에 교장 선생님이 8명의 교사들과 함께 연단 아래로 나오자 식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교장 선생님이 각 학년 담임선생님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소개하자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 학부모들 참가들의 호응에 입학식은 피날레를 장식했다.
기념사진 촬영시간이 되자 신입생들은 선생님들, 학부모들 그리고 ‘응원단’과 함께 차례로 사진을 찍으며 이날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응원단’, 5월 운동회 때도 참가할 것
  
▲ 입학식 후 ‘응원단’과 학교 교장, 이사장과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입학식을 마친 후 ‘응원단’은 학교 응접실로 이동해 학교 교장, 이사장과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만물이 소생하는 4월 초순, 학교엔 온갖 꽃들이 활짝 피는 날 재일동포 학생들과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본시민들로 구성된 ‘응원단’과의 인연은 이렇게 한 번도 빠짐없이 13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편, ‘응원단’은 5월에 열리는 요코하마조선초급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며, 그 뒤 뒷풀이를 할 예정이다.
<미니 인터뷰> “응원단 운동은 ‘모든 운동의 입구’”
- OR란 이니셜로만 표기해 달라는 일본시민(여, 55세) ‘응원단’
□ 기자 : 응원단엔 언제부터 참가했나?
■ OR : 처음부터다. 2003년부터다.
□ 참가 이유는?
■ 일본사람으로서 재일동포의 차별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일동포들에게 왜 차별이 있는지 혼자 공부해왔다. 일본사람으로서 식민지 역사에 대한 기초교양과 지식을 가져야 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조선학교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응원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 응원단 운동의 의미는?
■ 이 운동은 아주 쉽다. 어려운 게 없고 그냥 참가하면 된다. 입학식을 보러오고 축하의 마음으로 오면 된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다른 운동으로, 조금 높은 차원의 운동으로 이어가면 된다. 매년 이런 식으로 참여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응원단 운동이 다른 ‘모든 운동의 입구’로 이해하면 된다.
□ 앞으로 계획은?
■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모르는 일본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재일동포 2세, 3세, 4세, 5세에 걸쳐 차별문제가 계속 있는 한 그 문제를 계속 고민하는 일본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재일동포 차별을 없애는 일을 할 것이다.
(후기 : 일본시민들도 사상, 정견의 자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터뷰이(interviewee)인 이 일본인 여성은 이름은커녕, 본인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사진도 삼가해 달라고 했다. 다만 이니셜은 가능하다고 했다. 일본시민들 중에는 이처럼 재일동포와 ‘우리학교’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같은 어려움 때문에 집회에도 참가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한홍구 "박정희는 공포와 욕망의 정치를 했다"


과거는 오늘의 교훈이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라 불리는 역사학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냉철한 비판에는 지난 역사의 교훈이 담겨 있다. 침묵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기형적 근대화 산물인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폭식투쟁, 냄비폭발물 투척, 언론의 마녀사냥 등 극단적으로 과잉된 행동이 '애국(愛國)'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되는 데는 분명 왜곡된 담론이 수용된 결과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터. 새도 좌우의 양 날개가 균형을 갖춰야 고공비행을 할 수 있듯 우리 사회의 왜곡된 좌와 우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야당성을 잃은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부재를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돈과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슬프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 즉 돈과 욕망의 지배 속에 살고 있다. 그는 룰을 강조한다.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중략)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장발장은 빵 한 조각 때문에 19년 옥살이를 했다. 바로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이야기다. 가난한 것도 죄라는 한탄이 쏟아지고, 가난이 곧 형벌인 현재가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최근 '장발장 은행'이 출범했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겐 자베르의 잣대는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돈이 없어 벌금형을 받고도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1년에 4만 명이 넘는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 시작할 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 거부로 수용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몇 명이나 징역을 살고 있나?'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600명이나 감옥에 있더라. 이들은 벌금 수십만 원이 없어 노역장에 간다. 그곳 하루 일당이 5만 원이다.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한가? 누구는 '황제 노역'이라 해서 하루 5억 원씩 깎아주고, 누구는 수십만 원이 없어 하루 5만 원씩 감옥살이하고….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있어, 훨씬 무거운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인권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한 눈길이 필요하다. 구치소 강연을 많이 다닌 서해성 작가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등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홍세화 선생님, 김희수 변호사, 도재형 교수 등 많은 전문가가 발 벗고 나섰다. 나는 그냥 이름을 올린 정도다. 우리 벌금 체계가 재벌이나 날품팔이, 실업자, 기초생활자나 다 똑같이 벌금을 매긴다. 이건 평등이 아니다. 소득에 따라 벌금도 차등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조선시대 학자 한백겸 선생의 14대손, 한치응(韓致應) 선생의 7대손, 독립운동가 한기악 선생님의 손자, '일조각(一潮閣)' 창업주이자 언론인 한만년 선생의 4남, 교육자 유진오 선생의 외손이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라, 어렸을 때 교육환경도 남달랐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출판사를 했는데, 상업적으로 큰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학술서적에 있어서는 권위가 있었다. 특히 한국사 분야는 거의 독점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책밖에 없어 책과 친숙하게 지냈다. 물론 표지나 목차 정도지만, 중고생 때부터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봐야 할 책을 다 봤다. 우리 세대 전체를 놓고 봐도 지금에 비해 그때가 청소년 입장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한 10살 때쯤부터 사학자(史學者)가 되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10살 때 하고 싶었던 것을 지금까지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역사가 재밌었고,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할 수 있다.  

-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일성 전문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금기다. 김일성을 연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만 30살이 안 돼 미국을 갔는데, 그때까지 공부하면서 느낀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사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보다 우리 또래가 현대사를 먼저 공부했다. 서중석 교수는 나보다 11년쯤 윗 학번인데, 이분이 학교 졸업 후 <신동아> 기자로 오래 있다 대학원을 들어왔다. 이보다 앞서 대학원에서 현대사를 해야 한다고 왔다갔다 설치고 다녔었다. 80년대엔 현대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현대사에 대한 수요가 폭발할 때였다. 당시 젊은 나이였지만, 여기저기 강연을 다녔다. 1987~88년 무렵엔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항상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였다. 이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적이 없다. 흔히 '주사파'라고 불리는 집단도 이보다 2~3년 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북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번질 때였다. 그때는 '북의 지도자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가 절박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절절한 호소력이 분명하게 있었다. '북한을 추종한다'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안 되지만, 북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었다. 그래서 김일성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게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그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박사논문에서 '김일성은 도대체 누구며, 항일무장투쟁은 무엇이고, 또 이것이 분단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 주간지 <한겨레21>에 2001년부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 현대사의 금기를 많이 고발했다. 어조가 굉장히 강했는데,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처음에는 현대사를 대중화하는 역할을 했다. 내가 민청련(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초대 의장을 지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약칭) 선전국 출신이라 대중화에 책임감이 있었다(웃음). 우리 현대사에서 꼭 짚어야 할 주제를 대충 50개 정도 뽑아서 연재를 시작했는데, 몇 번 연재하다 보니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생겼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고, 역사가 왜곡된 부분도 많다.

미국 유학 후 돌아오니, '호주제 폐지' 문제가 한참 논쟁이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토론자들이 TV 토론회에서 호주제와 관련해서 미풍양속이 어쩌고저쩌고하더라. 그런데 여성 쪽 토론자가 이 부분에 대해 방어를 잘 못 하더라. 호주제가 무슨 미풍양속이냐. 이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친일 잔재다. 이런 건 박살을 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시시각각 사건이 터지며 논쟁거리가 되다 보니 민족문제, 친일파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50가지 주제에 대해 차근차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현상을 역사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또 그런 요구도 생겼다. '시민사회에 내가 이걸로 기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연재했다.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말을 세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인데, 내가 이분들과 친하게 지냈다. 주간지에 몇 번 글을 쓰자, 그분들이 "한 박사, 그렇게 글 써도 됩니까.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몸조심하라"고 하더라.(웃음)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로 투고한 글을 묶은 책 <대한민국史>(한겨레출판사 펴냄)가 2008년 국방부 불온서적으로 지정돼 논란이 있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한 게 당시 내 책이 처음이었는데, 요즘은 책이든 온라인상에서든 이런 관점에서 쓴 글이 많아졌다. 당시만 해도 칼럼니스트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선일보사 펴냄)는 박정희에 대해 '백마 타고 온 초인', '고독한 철학자' 등으로 평가하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박정희의 젊은 시절을 기회주의자라고 해석한 것이 대중들에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은 사실 한발 늦은 학문이다. 다른 학문에 비하면 현실 대응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실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나름대로 재밌게 시도해볼 수 있었던 것이 <대한민국史>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불온서적으로 지정됐을 땐 한국 민주화의 취약성, "아! 세상이 아직 다 안 바뀌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밌었던 건,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으로 책이 훨씬 많이 팔렸다는 점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한민국 史>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데에는 약간의 비화도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 후배 대학생들이 책 보내주기 운동을 하면서 추천도서를 선정했는데, 그 도서 전부 금서가 됐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책이 왜 금서가 돼야 하나. 그런데 그 운동을 한 친구들이 조금 NL 쪽에서 학생운동 하던 친구들이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좌파들이 쓴 책이 오히려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주정책연구원 우석훈 부원장, 동양대 진중권 교수 등이 쓴 책도 빠져 있더라. 그들 중 몇몇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국방부를 야유했고, 불온서적 필자들은 그들을 보고 '축에도 끼지 못한다'라고 낄낄대기도 했다.(웃음)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불온(不穩)으로 낙인찍거나, 검열과 통제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벌어질 텐데, 되도록 이런 건 유쾌하게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물론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민주사회에 불온이라는 말이 어디 있나. 불온한 것이 역사를 발전시켰다.

- <대한민국史>에서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아니고 친일파에게 역으로 청산을 당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됐는데, 식민국에 빌붙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정의, 상식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일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 어떻게 하면 근원을 해결할 수 있나?

과거 청산은 과거의 영역에서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고 이겨도 무의미하다. 나는 과거 청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과거 청산을 잘하는 길은 현재(現在)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바로잡음으로써 과거에 잘못된 부분까지 역사적인 의미에서 바로 잡히는 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결국은 과거를 지배하게 된다. 지금 친일파는 현실적으로 다 죽었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예들이 여전히 현실을 잡고 있다. 친일파를 찬양하거나 그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태도가 지배적인 위치가 되지 않게 하려면, 현재가 바뀌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면 민주화 된 것으로써 친일문제를 청산할 수 있다. 그래야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늦었지만, 이제야 좋은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친일문제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개혁하거나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민주주의를 잘하면 친일문제를 제기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하려면 친일파, 그리고 그 후손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하는데 이것이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구를 그런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약자의 보호기구이면서도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는 것이 국가다. 극악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살인하면, 몇십 명이 죽는 것이지만 국가는 몇십만 명을 죽인다. 단위 자체가 다르다. 이런 국가를 유영철보다 나을 게 없는, 더 흉악한 이들에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그놈들이 국가를 장악하는 과정이 바로 민간인 학살이었다. 수십만 명을 죽이며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 지배했는데, 그나마 우리가 민주화해서 턱밑까지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의 해결은 과거로 돌아가 친일문제를 파헤쳐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바꿔 독립투사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야, 처절히 죽어간 독립투사들에게 "죄송합니다. 근 70년 걸렸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청산 작업을 했다면, 아주 관대하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을 밀고하고 체포하고, 학살한 놈들 빼고는 웬만한 건 다 봐줘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런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거다. 이런 놈들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합리적 보수들까지 다 잡아 죽인 거다. 합리적 보수의 씨가 마른 이유는 바로 악질 친일파가 합리적인 보수를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조차 빨갱이란 소리를 들었다. 장준하 선생 같은 극우파가 왜 재야의 원조가 됐겠는가. 친일파가 양심적인 보수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잡혀간 사람들도 좌파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였다. 해방 직후, 좌파 대부분은 북으로 넘어가고 5.10선거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세울지'를 고민하며, 공산당에게 넘길 수도 친일파에게 넘길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개혁해야 되고 개혁을 하려면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친일파가 진짜로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1946년 백범을 쏴 죽였다.

이렇게 민족을 중시하는 진짜 보수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이 중 일부가 재야인사가 된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은 해방 직후의 기준으로 볼 때 진짜 보수적인 분 아니었나? 문익환 목사는 70년대 카터(Jimmy Carter)가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니, 주한 미군 철수 반대 서명 운동을 했다. 리영희 선생은 국군 장교였다. 김수영 시인은 반공 포로였다. 이들의 우산 밑에서 진보가 컸는데, 원래 진보는 아니었다. 해방 후, 진짜 진보는 전쟁 때 다 죽거나 북으로 갔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는 진짜 보수의 그늘서 컸다. 진짜 보수들이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젖을 물려준 거다. 진보는 진짜 보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 일간베스트(일베)나 서북청년단 재건 논란 등 금기시되어야 할 용어와 움직임이 다시 태동하는 것 같다.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인가.  

솔직히 이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다. '일베', '서북청년단' 같은 세력이 형성될 때 이에 기겁해 억누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수여야 한다. 유럽도 극우파의 등장을 제일 경계한 이들은 좌파가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였다. 한국 사회는 합리적인 보수가 없다. 사실 친일 청산할 때 친일파에게 청산 당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보수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가 너무 이상하게 형성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정말 큰 문제는 진보가 약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많이 복원됐다. 그러나 합리적인 보수는 복원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에 동의하는 합리적인 보수가 복원되어야 한다.

지금은 80년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보수는 책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진보는 책을 쓰고 읽긴 하지만, 자기들 책만 읽는다. 콘텐츠로도 비교가 안 된다.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제 한 몸을 바친 보수인사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보수인사, 찾을 수 있나? 참으로 슬프고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될 일이지만, 진보진영에는 공동선을 위해 분신하고 투신한 열사들과 관련해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나도 다 기억 못 할 정도로 열사가 많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보수를 보라.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보수가 어디 있나. 콘텐츠를 갖고 방향을 제시하거나 이 사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 헌신할 수 있는 보수가 없다. 보수 중에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다. 진보진영은 수감생활로 차마 군대로 끌고 가지 못한 사람 빼고는 거의 다 의무를 마쳤다. 백낙청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 입대하기 위해 귀국했다. 하지만,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하기 위해 귀국했다는 보수는 없다.

모택동의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고, 벤 플리트(Van Fleet) 미 8군 사령관 아들도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미군 고위직 아들 중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만 35명이라고 한다. 한국 장관이나 장성, 국회의원 아들 중에서 한국전쟁에서 희생됐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있었으면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3페이지 쓰고 전쟁박물관에 별도 공간도 만들었겠지만, 없지 않나. 우리 사회에 진짜 보수가 없다는 증거다. 건전한 보수가 있다면, '일베 현상'이 나올 수 없다. 건전한 보수가 없어 진보에 밀리다 보니, 한다는 게 폭식투쟁 등 턱도 없는 조롱만 하는 것이다.  

- 합리적 보수를 다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보수들이 진짜 각성하고 깨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보수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나라 보수의 역사를 스스로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보수의 계보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서북청년단 같은 자들이 아니라, 백범을 중심으로 또는 그도 아니라면 김성수나 방응모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재정리해야 한다. 김성수, 방응모가 친일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한 것도 사실이지만, 해방 직후 <동아>나 <조선>이 친일 신문이니 복간하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김성수는 친일한 게 맞지만 재평가해야한다. 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 지금의 수구꼴통과는 격이 달랐다.  

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

한국 역사의 복잡함 속에서 보수의 계보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진보를 실제 진보로 바꾸는 과정을 진보가 했나, 보수가 했나. 진보는 악을 썼고, 진보의 주장과 헌신적인 투쟁을 보면서 '세상이 바뀔 수밖에 없구나!'를 깨달은 보수가 그동안 범죄시 되고 탄압받던 진보의 주장을 제도화해 세상을 바꾸는 거다. 그런 역할을 보수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큰 문제는 보수파가 자신들의 진짜 족보를 모른다는 거다. 지금 진보에서 장준하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며 '재야의 큰 어른'이라고 하는데, 이 분은 사실 문창극보다 더한 보수다. 백범을 극우라고 얘기하지만, 장준하는 백범보다 훨씬 더한 극우였다. 백범의 수행 비서였던 장준하가 백범과 갈라선 이유는 백범이 남북협상에 대해 '빨갱이와 무슨 협상이냐'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우파가 뭐냐? 민족을 얘기하는 거다. 그런데 한국에는 글로벌스탠다드에 맞는 우파가 없다. 우리나라 우파는 '앞잡이 우파'다. 친일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들이 '반공'으로 갈아타면서 우파가 된 거다. 그러니 민족 대신 동맹을 얘기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민족을 얘기하면 잡아 죽였다. 진보당 조봉암 선생이 그렇게 죽었고, <민족일보> 조용수가 그렇게 죽었다.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 남조선해방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또 그렇게 죽었다. 한국의 자칭 우파들은 정말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고 자부심과 책임이 없다. 그러니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과 헌신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합리적인 보수가 있는 곳에는 일베나 서북청년단이 설 자리가 없다.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해서 댓글을 다는데도 보수는 침묵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을 막는데, 진보와 보수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걸 비판하면 '종북좌파'가 된다. 이런 구도를 만들어야만 서식할 수 있는 게 일베와 서북청년단이다. 그러니 이 환경이 무너질까 봐 통일도 반대하는 거다.  

- 책 <특강>(한겨레출판 펴냄)에서 "그들이 공포의 정치는 놓아버렸지만 욕망의 정치를 더욱 강화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향해 뛰고 있다. 공포의 국가에서는 무서워서 뛰었다. 하지만 욕망의 정치 속에서는 거기에 세뇌되어 우리 스스로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렵고 힘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현재 욕망의 정치, 돈을 숭배하는 마몬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여실히 드러난 관피아의 문제 역시 욕망과 마몬의 정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룰(rule)을 지키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구나, 룰을 어기면 망하는 거구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룰을 지키는 놈이 바보가 된다. 그러나 욕망을 거세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다들 수도승은 아니지 않나. 다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대중들이 정당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이 적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평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고 했는데,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9회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을 담당했던 유현 피디가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자신은 '독재자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간첩 만든 것을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보니 박정희의 더 큰 죄악은 부동산 투기에 올라타지 못한 채 그저 성실하게 일해 온 우리 숱한 아버지들을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죄악을 어떻게 씻겠느냐'는 얘길 하더라. 정말 명언이다. 1966년도 국민학교 입학식 때 '회풍각'이라는 집 앞 중국집 짜장면이 30원이었다. 이번에 평당 4억 원에 팔린 한국전력 부지 땅값이 그때 30원이었다. 짜장면값이 100배, 150배 오르는 동안 땅값은 수백만 배 뛰어버렸다. 성실한 아버지를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린 게 바로 부동산 투기다. 박정희가 한 건 바로 공포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다.

- 2013년 10월 한 인터뷰에서 "자칭 진보라는 민주당과 지식인, 언론이 손을 놓고 있었으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생을 도외시한 채, 그들만 '민주화'가 된 것이다"라며 야당이 야당성(野黨性)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야당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중도'라는 개념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에서 중도라는 용어는 미래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이념 사이에서 양자를 아우른 제3의 길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해 댓글을 다는데, 이런 짓을 하는 놈과 하면 안 되는 놈 사이에 중도가 어디 있나. 이건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포장하는 게 현재 한국 야당의 병폐가 됐다.  

그리고 야당이 '486', '친노'라고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말만 세게 한다'는 거다. 물론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는 더 많이 얘기하지만, 선거 때 비정규직이 누구를 찍나? 새누리당을 찍는다. 왜냐하면, 야당이 말로만 떠들기 때문이다. 절박함이 묻어나지 않는 연설과 떠들지 말자는 중도를 표방하는 놈들은 싸우지 않겠다는 거다. 이걸 우린 옛날에 '사쿠라(さくら,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놈의 중도냐. '한국 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방향성의 중도를 얘기한다면, 그걸 누가 비판하겠는가. 이런 의미의 중도라면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대상이 될 수도, 서로 자극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자식들에게 차려질 것이다"고 했다.

한국 사회 대의정치는 정말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이 670만 명(2014년 통계청)이면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자가 국회에 적어도 2~30명은 있어야 하지 않나. 세상이 변하면서 호남이 가졌던 동력도 떨어졌다. 호남 출신 의원들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역 토호들의 이익을 대변하다 보니, 야당이 비리비리 맥을 못 추고 있다. 야당성과 투쟁성을 회복하고 야당이 야당다워야 한다. 현재 호남은 하나의 지역이지만, 6·70년대와 80년대 호남은 그냥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성격이 죽어버렸다. 호남 정치의 복원, 투쟁성의 복원을 해야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2년 남았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박근혜 하는 걸 봐라. 저렇게 못하는데, 저걸 못 바꾸면 바보 아아니냐." 그런데 야당이 하는 걸 보면, (정권)을 바꾼다고 바뀔 리가 없다. 박 대통령도 '어쩜, 저렇게 못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야당을 보면, 저들보다 훨씬 더 못한다. 박 대통령이 '축복받았다'라는 건 바로 이런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4년부터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밝힌 내용을 <한겨레>에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로 연재했다.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 '오욕'의 역사가 과거의 지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사법 체계와 판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사법부에 절망스러운 부분과 희망적인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 절망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 과거사 보고서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법부 얘기다. 과거사의 모든 심급이 결국은 사법부에 가서 판결을 어떻게 받느냐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할 수 있는 게 바로 '국정원 과거사위'다. 나로서는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한겨레>에 연재한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에 부제를 단다면, '바짓가랑이를 올려보라 하지 않은 죄에 관한 보고서'라고 하고 싶다. 그 사람들이 "여기 아직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고문당했다고 하소연하면, 사법부가 "거, 바짓가랑이 한번 올려보시오"라는 얘길 하지 않고 간첩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까? 정말 착잡했다. 그래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좋은 판결이 더 많이 나온다. 50년대 진보당 판결과 관련해 반공 청년들이 법원에 쳐들어가 '빨갱이 판사'를 때려잡자고 했고, 60년대엔 군인들이 법원 앞에 가서 왜 영장을 발부하지 않느냐며 데모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조금씩 다시 나타난 게 '미네르바 사건'과 강기갑 전 의원의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 'PD수첩 사건', '한명숙 전 의원 사건' 등의 판결을 앞두고 보수단체 회원들(일명 '가스통 할배들')이 사법부 앞에서 데모를 했다. 그만큼 사법부에서도 양심적인 판결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법부는 여전히 보수적인 구성이 지배적이지만, 그럼에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건강한 부분이 돋아난 것이다.  

사법부의 '회한과 오욕의 역사'를 쓴 탓인지 재판에 자주 불려 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피고로 여러 번, 또 전문가 증언으로 불려 갔다. '국가보안법 문제'와 '정수장학회 사건' 때도 그랬고, '이석기 사건'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아직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정말 시대착오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수 생활을 했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나라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이 참 대단한 나라다. 사형수를 17년 만에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난 미국에 있었지만, '아, 다시는 한국에서 내란음모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국민의 정부 이후 17년 만에 내가 내란음모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역사적으로 내란음모 사건이 많았는데, 대개 쇼였다. 보도 간첩, 보도 내란이란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내란죄로 일단 잡아서 기소할 때는 '소요죄(騷擾罪)'로 이름 붙인다. 내란죄에 비해 소요죄는 훨씬 약하다. 데모를 조금만 세게 하면, 소요죄 적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란죄는 다르다. 조직적인 무장동원 체계를 갖고 국가기관을 점거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있어야 내란인데, 내란으로 뻥튀기해서 걸어놨다가 막상 기소할 때는 '내란'을 슬그머니 빼고 기소할 때가 잦다.  

- 헌법재판소에 의해 결국 정당이 해산됐다. 역사적 의미를 따지자면?

우리가 어렵게 이룩한 민주화가 공안 세력들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대한민국을 국민의 것이 아니라 자기들 것으로 천년만년 누리고자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게 중심을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누리려고만 하는 자에게서 일반 국민 대중으로 옮겨야 한다. 통합진보당이 부당하게 해산됐을 때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이 보인 태도는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웠다. 우리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왜 당당하게 선언하지 못하나. 통합진보당이 여러 가지 잘못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 역시 이 문제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지난해 12월 19일 헌재의 통진당 해산 판결 후, <한겨레> 특별 기고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만이 얘기한 것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도 했고, 임시정부 헌법도 진보적 민주주의 기초위에 섰다. 지금 학교들에서 제헌헌법을 가르치지 않는데, 이유는 통합진보당의 강령보다 더 세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제헌헌법도 그동안 충실히 배우지 못한 것인가.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제헌헌법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 수능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유는 너무 빨갛기 때문이다. 이석기 전 의원의 항소심 증인으로 법정에 갔을 때도 얘기했다. "현행 헌법을 보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임시정부 헌법을 읽어본 적 있나?"라며,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 의사록과 선언문, 백범이 쓴 성명서 등을 제시했다. 1944년 개헌 이래, 임시정부의 헌법 자체를 역사적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에 기초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헌법 해설서'인 유진오 박사의 <헌법해의>를 보면, 대한민국 헌법은 경제 질서에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성격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한 것이라고 했다. <헌법해의>에는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흔히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고 여기에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더한 게 '진보적 민주주의'다. 경제 민주화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원래 제헌헌법에도 제기된 과제인데 친일파가 우리나라를 접수하면서 사라졌던 것이 뒤늦게 나온 것이다. 옛날 백범이나 임시정부에서 얘기한 내용과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 기본정신은 이거다. 제헌헌법이 이런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인데, 그 약속의 내용을 가르쳐야 할 것 아닌가. 이 큰 약속보다도 약한 약속(강령)을 내건 사람을 '헌법 위반'이라고 잡는 나라가 어디 있나. 이게 '반(反) 헌법'이고 '반(反)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법정에서 악을 쓰고 나왔다(웃음).

- <대한민국史>·<특강>·<유신>·<지금 이 순간의 역사>(한겨레출판 펴냄), <장물바구니>(돌아온산 펴냄) 등 다양한 책을 썼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금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아, 이 형 별 볼 일 없었네. 나랑 같은 과(課)네?'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역사 속 인물들을 친근하게 푼 '형과 누나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중근이 형', '봉길이 형', '봉창이 형'처럼 말이다. 요즘은 위인전이 너무 거룩하게만 쓰여 있다. 안중근이 지금 고등학교에 다녔다면 어떤 과였을까? 비범한 인물이었을까? 껌 좀 씹고, 다리 좀 떨고, 침 좀 뱉고, 삥 좀 뜯으며 어디선가 일진 노릇했겠지(웃음). 위인전을 보면 애들이 안중근을 따라 배우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고, 오색구름이 뜨고 등 안중근처럼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 한 몸 던져서 총을 쏘려면 등에 하다못해 별을 7개는 달고 태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만들어 놨다. 안중근도 삥도 뜯고 좌충우돌하며, 총도 뽑아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오각성해서 정의를 위해서 나선 거다. 안중근 어머니도 대단하다. "아들아, 더 살려고 하지 마라. 넌 이미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이런 얘기들이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김 알렉산드라(1885~1918)는 한국인 최초의 외국 장관이었다. 러시아극동인민공화국이라고 잠깐 세워졌다가 없어진 나라지만, 100년 전에 한국 여성이 외무담당 인민위원(외무부장)을 했다. 그녀가 사형당할 때 마지막 소원이 "8보(步)만 걷게 해다오" 였다고 한다. "왜 하필 8보냐?"라고 물으니,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8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에 조선에 살고 있는 민중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라고 하면서 죽었다. 얼마나 멋진가. 매일 영어 단어 외워야 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읽혀야 하지 않겠나.

또 과거사와 관련해 고문과 용공조작 등 '조작 간첩 사건'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 등 '반헌법행위자열전'을 쓰고 싶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거기서 나오는 국밥집 아들 진우가 현실에선 내 나이 또래다. 나중에 아들딸이 커서 영화를 보며 "아빠, 송 변호사는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면, "음…. 정의를 세우려고 왔다 갔다 하다가 잘못돼서 죽었어“라고. 또 "그럼 차동영은 어떻게 됐어? 감옥 갔어?"라고 물으면 "연금 또박또박 받아먹다가 얼마 전에 늙어 죽었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차동영이 하다못해 감옥에는 못 보냈지만, 국밥집에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했어."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고, 사죄를 안 한다면 현실 법정에는 못 세웠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 사람들의 자료를 모아서 전기를 써주려고 한다. 물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식을 구상 중이다.  

- 2011년 한 인터뷰에서 청년들을 향해 "지금 20대가 능력은 예전보다 뛰어난데, 패기와 저항정신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슬슬 자기 싸움을 시작할 때"라고 조언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은 젊은이들에겐 단군 이래 가장 야박한 사회다. 개인의 역량이나 세대를 놓고 보면 가장 능력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기가 죽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게 가장 적은 시대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내던질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 한홍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어렸을 때 김수영 시인을 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김수영 시집 하나만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중에 제일 이해가 안 되었던 시가 '푸른 하늘을'이었다. 김수영 시는 굉장히 난해하고 헷갈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푸른 하늘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득도(得到)하는 느낌이었다. 첫 구절이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시인)의 말은 修訂(수정) 되어야 한다"다. 당시 내가 고1 때였으니, 유신시대였다.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날면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라.

김남주 시인도 "싸울 때 자유로워진다"고 했듯이 정말 자유라는 게 싸움을 통해 꿈꾸는 것을 얼마만큼 밀고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만, 자유는 실천하는 것이다. 1974년에 '자유언론실천선언(自由言論實踐宣言)'에 참여했는데, 한국 언론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언론 자유를 수호하라"에서 "자유는 실천하는 거다"라고 전환한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성완종 ‘마지막 SOS’에 김무성 서청원 이완구 김기춘은…


등록 :2015-04-12 19:43수정 :2015-04-12 23:15
(왼쪽부터) 이완구 총리,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김기춘 전 비서실장, 이병기 비서실장.
청·여당 지도부에 “도움 달라” 전화
목숨 끊기 전 필사적 구명운동 드러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검찰 수사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필사적인 구명운동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성 전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힌 여권 인사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친박’(친 박근혜)계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이완구 국무총리 등 모두 4명이다.
김무성 대표는 12일 기자회견에서 “성 전 회장이 사망하기 4~5일 전께 통화를 했다”며 “본인(성 전 회장)이 ‘자원외교 비리와 관계가 없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해 내가 ‘검찰이 없는 일을 뒤집어 씌우겠느냐. 변호사 대동해서 잘 수사 받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성 전 회장과의 통화 사실을 공개했다.
같은 당 서청원 최고위원도 이날 충남 서산의료원 성 전 회장 빈소에 조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성 전 회장과 전화했고 만난 것도 사실”이라며 “(그가) 7일께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성 전 회장이 도움을 요청한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9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성 전 회장이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즈음 통화에서 결백을 호소하며 구명을 요청한 바 있다”며 “검찰 조사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해 검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설명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실장과 함께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국무총리는 지난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4월 4~5일께 성 전 회장과 통화했다”며 “(경남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가 총리 담화와 관계있는 게 아닌가 오해를 하고 있어, 내가 ‘검찰 수사는 총리 취임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내게 서운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구명 요청’ 연락 내용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시기별로 보면, 성 전 회장은 검찰수사가 시작된 지난달 중순께 가장 먼저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했고, 이어 검찰수사가 본격화되자 4~5일께 이완구 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구명 전화를 했고, 이어 7일께 서청원 최고위원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이 여당 지도부 등 현정부 실세에게 구명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1년째 ‘수취인 불명’ 남해의 부고… 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소설가 김훈 세월호 1년 특별기고] 1년째 ‘수취인 불명’ 남해의 부고… 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최종수정 2015-04-10 11:11

곡절 끝에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빚어낸 특별법 시행령… 국민은 이런 ‘정부 합동 허수아비’를 원하는 게 아니다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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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저녁 가라앉는 세월호. 구조와 수색의 조명은 밝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된 지금도 우리의 바다는 여전히 캄캄하다. 사진제공 세계일보
다시 4월이다. 꽃보라가 흩날리고 목련이 피어서 등불로 돋아나고, 여자들도 피어서 웃음소리가 공원에 가득하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나의 언설로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늙은이의 춘수(春瘦)는 어수선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바다는 반짝이는 물비늘에 덮여 있었다. 그 바다에서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장관 차관 이사관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데, 바짓가랑이들은 그 매달리는 손목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5월에 김영랑(金永郞·1903~1950)은 모란이 다시 피는 5월을 기다리듯이 나는 생명들이 바다 밑으로 뚝뚝 떨어져버린 4월에, 앞날에 다시 올 4월을 기다리면서 나의 악몽을 달래고 있다. 그러하되 그 새로운 4월은 봄이 오듯이 꽃이 피듯이 날이 흐려서 비가 오듯이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풍랑이 없는 바다에서 정규 항로를 순항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침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과 배경이 불분명한 사태는 망자(亡者)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 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삶은 무의미한 우연의 찌끄레기, 잉여물, 개평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거대한 구조 밑에 깔리는 티끌처럼 하찮고 덧없다. 이 사태는 망자와 미망자(未亡者)를 합쳐서 모든 생명을 모욕하고 있고, 이 공허감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 보호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무주의로 몰아가고, 그 집단적 허무감은 다시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선박 불법증축, 과적, 고박(固縛) 불이행, 평형수 부족, 급변침 등이었다는 정부의 조사결과 발표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배가 빠졌다는 것이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프고, 심장이 멎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사태가 선박의 복원력을 검증하는 물리실험이라면, 정부의 발표는 나무랄 데 없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는 물리실험이 아니다. 이 사태는 한 시대 전체의 도덕적 침몰과 국가기능의 파탄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지 1년이 되지만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가로막혀서 실무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능은 작동되지 않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 ‘특별법(2014.11.19 공포)’이 국회에서 입법되는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의 리더십은 파탄되었다. 이 파탄은 이미 침몰한 세월호가 다시 물속으로 끌어들인 제 2의 침몰이라고 할 만하다. 정부와 여야의 정치력은 진실을 밝혀서 분노와 슬픔을 조정하는 데 무력했고, 자신들의 존망과 안위를 챙기는 사활의 생존술로 중원무림(中原武林)을 할거했다. 이 ‘특별법’의 입법과정은 사태의 진상을 규명해서 ‘안전사회 건설’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십이 작동된 것이 아니고, 이 비극이 몰고 올 무서운 파괴력의 폭심(爆心)으로부터 도망치고 벗어나려는 정치세력들이 국민과 유족들의 아우성에 몰려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자 강고한 보호벽으로 자신들을 방호하면서 탈출구를 뚫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수사권, 기소권이 없이 조사권만을 갖는 한시적 기구로 발족되었다. 게다가 정부가 3월 27일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회의 조사권의 영역은 정부가 이미 시행해서 발표한 결과를 분석하고 재조사하는 범위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조사 실무를 지휘감독하는 실무 부서장과 그 휘하 직원들은 모두 행정부가 시한부로 파견하는 공무원들로 충원하게 되어 있다. 
이 시행령대로 위원회가 작동된다면 위원회는 정부의 조사결과를 추인하거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 사태의 핵심부와 주변부, 심층부와 수뇌부를 향해 기획력 있는 조사를 수행할 도리가 없고, 다만 해양수산부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서 사태를 뒤치다꺼리하고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과 요구사항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곤욕을 대신하는 바람막이가 될 것이 뻔하다. 이것은 국민이 원하는 ‘위원회’가 아니다. 이것은 ‘조사권’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 합동의 허수아비다. 이석태 특별조사위 위원장과 유가족들은 이 시행령을 거부했고 위원회는 작동 불능이 되었다.
‘시행령’을 들여다보면 이 사태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근원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태 초기에 정부는 우선 어쩔 줄 몰라서 갈팡질팡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태의 심층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노골화되었고, 그 두려움은 다시 그 사태로부터 달아나려는, 권력 방어적인 비겁함으로 발전했고,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이번에 ‘시행령’으로 명문화해서 입법예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4월에 남해바다 맹골수로에서 온 부고는 수취인 불명으로 팽목항에 되돌아갔으니 탈상(脫喪)의 날은 아직도 멀었고 유족들은 광화문과 팽목항에 모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4월이 왔다. 
거칠게 말해서, 나는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추이를 3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제 1사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 나라에 쌓인 적폐(積弊, 나는 이 말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가 세월호를 침몰시키기까지의 70년에 가까운 세월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2사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그해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의 7개월간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3 사태는 ‘시행령’ 이후 위원회의 활동과 인양이 논의되는 미래의 시간인데, 이 3개의 국면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며 원인으로 맞물려 있다. 그리고 제 2사태는 제 1사태에 잇닿은 또 다른 침몰이고, 제 3사태도 지금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이 나라의 돈은 오래전부터 가치의 저장이나 측정, 교환, 유통, 지불, 결제의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의 위상은 법의 보호를 받고 돈의 작동은 시장경제의 축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는 이 권력의 지배는 완벽하고도 철저해서 그 지배권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죽음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돈은 화폐라기보다는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DON으로 표기해야만 그 유일신다운 전능의 위상에 합당할 것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70년에 가까운 적폐는 이 DON과 거기에 붙좇는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연합세력이라는 사실의 흐린 윤곽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 연합세력이 어떤 인적, 행정적 지휘-복종과 공생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 배에 작동되어서 감히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깔아뭉갰던가를 시대사 전체 속에서 밝히는 것이 정부의 통상적인 업무기능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면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밝혀야 한다는 쪽으로 국민들의 뜻이 모아졌고, 국회는 파행을 거듭한 끝에 매우 허약한 권한만을 부여한 위원회법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다시 시행령으로 그 기능을 박탈하고 있으니 정부는 대체 무엇이 그토록 무섭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국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정치권력에 속아왔다. 불신은 사람들의 정치정서 속에서 허무주의로 자리 잡았고, 그 허무주의는 일상화된 악(惡)이 서식하는 토양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상화된 악의 폭발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거나 매우 빈곤하다. 고통은 늘 고통을 당하는 계층에게 전가되었고 기회와 정보와 우월적 지위는 늘 강하고 러키한 자들의 몫이었다. 이 불신과 고통분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빈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정부가 제시한 이 무력하고 자기방어적인 ‘시행령’은 갈등과 불신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는 꼴이다.
지금 정부는 공적 개방성을 상실하고 자장면협회나 상가번영회처럼 사인(私人)의 이익집단 같은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몇몇 고위 관리들이 문책 경질된 것은 책임을 지는 행위가 아니다. 고위 공직의 자리가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니고, 잘나가는 공무원의 물 좋은 취직자리가 아니며, 천하의 공물(公物)일진대 그 자리를 내놓는 것이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는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지게꾼이 지게를 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리를 내놓고, 감옥에 가고,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해서 지옥에 간들 이미 그 해악이 세상에 퍼져버린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말은 쫓겨났다는 뜻이고, 그 쫓겨남으로써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빈말이다. 그 공허함은 “세월호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침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로되, 하나마나한 말이다. “기업이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도 모두 그러한 것인데, 그 명석함에 가려진 폭력성이 세상의 강자로 행세하고 있다. 
지난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에서 여당의 세력이 커지자 이 비극적 사태에 오래 매달려 있는 것은 경기부양과 경제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논리가 언론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이 경제논리 역시 맞는 말이로되 하나마나한 말이고, 명석성으로 폭력을 위장하고 있다.
주어와 술어를 가지런히 조립하는 논리적 정합성만으로는 세월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이 사태를 객관화해서 3인칭 타자의 자리로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우리들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힐링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
국가개조(國家改造! 나는 이 말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는 안전관리와 구조구난의 지휘부와 조직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에 도달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좀처럼 개조되지 않는다. 다만 뉘우침의 진정성 위에서 자신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뭉개다가 무너질 뿐이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했다. 그 나라들은 대부분 반성하는 기능의 마비, 무책임, 무방비 때문에 망했고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망해가는 꼴을 보면서 그 뒤를 따라서 똑같이 되풀이하다가 망했다. 고통의 맨살, 죄업의 뿌리와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뉘우침의 진정성과 눈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젊어서 기자 일을 할 때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이름에 붙은 타이틀은 종교인도 철학가도 사상가도 아니었다. 그의 타이틀은 반체제인사였다. 그 반체제인사가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1977. 한길사 444쪽). 
쓰기를 마칠 때 정부가 세월호 선체를 인양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들을 제거하고 진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정치력으로 정치를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선체 인양이 이 사태의 희망적 국면을 열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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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에서. 김영훈(도서출판 안나푸르나 대표) 촬영.
김 훈

소설가, 자전거 레이서.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 중퇴.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신문 기자생활을 거쳐 마흔 넘어 소설 집필 시작. 장편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소설집 ‘강산무진’, 산문집 ‘선택과 옹호’ ‘자전거여행 1·2’ 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