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3일 토요일

서구의 침략민족주의와 제3세계의 민족주의


왜 다시 민족주의인가(5)
  • 박기민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 승인 2019.07.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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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 민족주의의 침략 제국주의로의 전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서구 진영에서 발생한 침략민족주의(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변질형태)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제3세계 저항민족주의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부르주아 민족주의 유형으로서 침략민족주의는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발생하여 그 전개방식에서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면서 오늘까지 존속하고 있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형태입니다. 침략민족주의의 본질은 대체적으로 백인우월주의,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 민족 배타주의로 나타납니다. 침략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득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 입장에서 동양, 혹은 제3세계 피식민지를 정치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문화적으로 정신과 의식을 식민지화하며 그들의 물리력으로 자국민과 제3세계 민족을 차별화시킵니다.
침략민족주의는 지국 내에서 민족주의(대국주의)를 선전하여 이런 이념을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기능면에서 두 가지 작용을 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자민족의 역사신화와 영광 만들기 작업, 조국의 위대성 선전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체제유지, 권력유지를 위한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국내 노자와 자본가간의 적대적 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활용합니다.
그 전형적 사례로는 팍스-브리타니아(대영제국), 팍스-아메리카, 19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등이 민족주의 선전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민족주의 열광은 프랑스 혁명기로서,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던 시기(1803-1815)가 되겠으며 유럽에서는 프로이센에서 피히테의 애국심의 분발 호소를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독일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부르봉왕조의 프랑스, 엘리자베스왕조의 영국보다 뒤떨어진 공후국과 도시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지지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 30년 종교전쟁으로 황폐화는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에게 정복되어 굴욕을 당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때 프러시아귀족들은 프레데릭 왕의 궁정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프랑스관리들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히테는 공격적인 민족감정을 독일국민에게 고취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시대에 와서 프러시아 민족주의가 독일민족주의로 정립되었을 때, 이런 독일 민족주의는 이웃나라들에 대한 침략적 복수감정으로 부국강병 기치를 내걸고 독일 게르만 민족이란 이름 아래 제1,2차 제국주의 식민지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독일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문화 후진성을 극복하자 팽창주의 길에 들어서며 침략민족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빌헬름 2세 때 독일 민족주의는 범게르만주의를 선전했습니다. 범게르만주의는 게르만 민족의 범민족 통합을 제창하면서 독일에 의한 유럽제패, 세계제패를 지향한 야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침략민족주의의 대내적 기능인 체제 유지는 민족주의 상징 조작을 통해 국민 에너지를 체제 유지의 방향으로 몰아갔습니다.
권력구조와 결합된 체제유지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의 민족 감정을 배타, 침략주의로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럽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모순에 의해 파생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습니다. 유럽 자본가집단은 민중의 지반을 잃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국의 번영, 민족의 영광 같은 관념에서 심리적 충족감을 얻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정치수단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였습니다. 이같이 강대국 침략민족주의는 민족국가들 간의 경쟁과 자국의 국익추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본가와 지배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역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서구의 침략민족주의는 자민족의 우월감을 고취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를 설교하는 인종 우월주의 관념에 뿌리는 두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구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이라고 선전하며 민족 이익이라는 간판 아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제 민족에 대한 침략과 약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런 인종적 민족우월주의의 최초의 사례는 영국의 팍스-브리타니아주의에서 나타났습니다. 영국인들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모방 계승하여 자신을 현세의 이스라엘인이라고 자처했고 앵글로색슨 족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선조가 해적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영국 앵글로색슨 족은 약탈을 우월민족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인종 우월주의는 미국인들에게 그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광신적 배타주의의 최초 사례는 프랑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민족주의는 쇼비니즘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 군대의 병졸이었던 쇼빈이 프랑스의 대외침략을 광신적으로 제창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쇼비니즘이란 용어는 프랑스 민족주의가 배타적애국주의, 광신적 배외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이기주의로 변질된 양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 민족주의의 자기 전개 과정의 다음 단계에서는 서구 민족주의가 침략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더욱 약탈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갔습니다. 개별국가의 성향으로 나타났던 인종 우월주의, 광신적 배타주의, 대국적 팽창주의, 침략전쟁주의는 서양에서 침략민족주의의 일반 속성으로 굳어지면서 유럽 내부에서 모순과 대립, 갈등이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식민지의 분할, 재분할이 강화되면서 침략민족주의는 식민지약탈과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법은 구미사회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 비유럽지역에서는 적용되지 않아도 된다는 관념을 생겼습니다. 서구진영은 비유럽지역에서는 유럽적인 법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무력을 행사하여 식민지지배를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침략민족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제국주의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무인지역에 대한 선점권을 행사하듯 침략을 자행했고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는 무제한적 침략전쟁을 벌렸습니다. 이렇듯 침략민족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우월민족에 주어진 천부의 권리로 인정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략의 권리와 사명을 ‘메니페스트 데스티니’라 불렀습니다.(박성옥, 신민족주의론, 살림터,1997, 236쪽 참조) 메니페스트 데스티니는 미국이 원한다면 미국인은 대륙과 세계의 어떤 지역도 병합할 사명을 가졌다는 침략적 미국 민족주의의 논리입니다. 침략민족주의가 인류의 역사발전에 역기능한 최대의 과오는 침략민족주의가 파시즘과 결합된 때였습니다. 파시즘은 민족 또는 민족국가의 막중함을 명분으로 내세워 인간의 기본권과 모든 민주주의적 요소를 흔적도 없이 말살하였습니다. 파시즘의 시조인 무쏘리니가 ‘이탈리아 민족은 민족을 구성하는 분리된 개인이나 개인의 집단들에 우월하는 목적의식적 생활수단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이다.’라고 선포했을 때 세계는 독재자의 광신적 미신을 보았고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파시즘은 광신적 애국주의를 인종주의와 결합시켜 자기의 대외침략과 세계제패의 야욕을 정당화하였습니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아리아족의 피의 순결성을 이어 받은 독일민족만이 세계를 통치할 사명을 지녔다 하며, 일본 군국주의는 천황제와 우월적 야마도 민족이 아시아를 통치할 팔굉일우*의 사명을 지녔다고 선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반인류적 범죄를 민족주의 명분을 빌어 정당화했습니다.
* 팔굉일우(八紘一宇, 일본어: 八紘一宇 핫코이치우) :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든 일본 제국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로,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편집자 주)
제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파시즘의 패망은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종말과 함께 침략민족주의는, 뒤에 거론할 탈민족주의(초민족주의, 코스모폴리터니즘) 즉 세계주의, 국제주의,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변형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침략민족주의는 타민족나 구식민지에 대해서 영토적 지배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만, 경제 정치적으로 예속시켜 자국 자본가의 수탈과 착취한 용이한 제도를 구식민지에 이식시켜 간접 지배하는 신식민지 내용을 취하고 있습니다.
▲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
2. 저항민족주의
저항민족주의는 제3세계 식민지 해방민족주의, 피압박민족의 민족주의로 서구 열강의 침략민족주의에 의해 세계가 분할 지배되자 민족해방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입니다. 19세기 중반, 20세기 초반에 세계정치사에서 일련의 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세계는 종주국과 식민지(반식민지), 선진국과 후진국, 열강과 약소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식민지, 후진국, 약소국으로 전락한 나라들 경우 민족생존이 위협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와 침탈로 민족자주권의 박탈, 민족경제 파탄, 민족문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제3세계 식민지 민족 운명공동체가 자주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식민지에서의 저항민족주의의 기본특성은 식민지 침탈과 종속으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실현하고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민족적 저항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입니다. 식민지 지역의 민족주의가 아랍민족주의나 아시아민족주의 혹은 중남미민족주의 등으로 지역적 특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같은 유형의 민족주의로 분류된다 하겠습니다. 그 까닭은 영미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해방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입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주의 후진국, 약소국들이 서방 강대국들의 상품시장, 원료공급지, 노동력공급지로서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19세기에서부터 세계적 저항운동의 흐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 배경에서 출범한 사조이기 때문에 제3세계 민족주의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지향합니다.
식민 지배에 대한 민족 저항은 저항민족주의가 형성되는 역사적 바탕을 이루지만 그 속에서 민족주의가 정립되는 양상은 민족적,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민족형성과 민족국가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민족적 저항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념으로서 저항민족주의 담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듯 민족 저항은 역사 진보의 과정이었고 저항민족주의는 그 역사적 진보과정의 필연적 소산이었습니다. 민족적 저항이 민족생명의 자기 보존, 자주독립의 확보라는 목표하에 진행되고 사회의 기본세력인 농민과 함께 수공업자, 나라를 잃은 군인, 봉건지배세력까지를 포함한 여러 계층이 참가하였던 초기 저항민족주의에서는 민족보존과 국가수호, 국체수호 사상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1919년 조선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중국 5.4운동이 일어나는 등, 저항민족주의의 내외적 조건은 크게 변하였습니다. 민족해방투쟁의 강화로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가 뒤흔들리게 된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저변에는 식민지와 제국주의 간 모순이 첨예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민족전체를 수탈 대상으로 감행된 제국주의 침탈은 민족의 처지를 고통스럽게 하였으며, 그 부담은 노동자 농민 최하층민중이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광범한 민중이 저항에 참여하였고, 그것은 저항의 주체역량을 강화시켰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민족주의적 저항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담론이 흘러들면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노동자의 계급해방은 민족해방을 전제로 하는 만큼 사회주의운동이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20세기의 민족주의 전개과정의 외적조건에서 나타난 변화의 중요한 측면은 식민지지배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제국주의 지배방식에서 변화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지배방식에서의 변화는 우선 종전과 같은 폭력탄압 일변도에서 기만적 양보를 결합한 정책으로 이행한 것입니다.
식민지지배자는 식민지 민족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듯한 양보를 취하면서 회유 정책을 쓰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식민지에 자치와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기만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이 인도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대하여 식민지 총독 밑에 자치의회를 설치한 정책, 프랑스가 알제리에 실시한 본국의회에 식민지의원을 참여시키는 정책 등이 있습니다. 미국은 한술 더 떠서 윌슨주의를 통해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에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민족해방운동의 약체화를 겨냥한 제국주의정책입니다.
지배방식에서의 변화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방식인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분할통치방식을 지능적 정책으로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민족 내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식민지 지배세력과 결탁을 강화하고 지식층을 식민지 제도 속에 편입시키며 토착자본을 매판 세력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외래자본 침탈의 안내자, 협조자로서 육성된 매판세력(식민지 부역 지배블럭- 한국의 친일 친미파)으로 하여금 민족주의의 슬로건을 내걸고 제국주의와 타협하도록 만든 것은 식민지통치자들에게는 ‘손 안대고 코푸는’ 식민지 통치술이었습니다. 또한 제국 식민주의자들은 민족사회의 내부를 이념적으로 분열시키기 위해 반공이념으로 민족 저항운동을 분열시켰습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의 저항민족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내외 조건의 변화상황은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를 뜻하는 동시에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새로운 도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매판자본을 중심으로 편성된 제국주의 부역세력이 제국주의 앞에 굴복하며 결탁, 협조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면 제국주의 타협세력은 개량적 방법으로 민족독립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반민중적 입장으로 전락하여 민족개량주의사조가 대두하였습니다. 민족개량주의의 본질적 성격은 겉으로는 민족독립을 표방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식민지통치하에서의 자치권을 내세워 민족적 저항의 청산을 꾀하고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반민족적 조류였습니다. 상해 임정의 안창호와 이광수의 경우를 보더라도, 민족개량주의는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얻어 보려는 사대주의로서 제국주의 반공정책에 동조하여 민족저항운동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밀어 넣는 민족운동의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민족개량주의같은 제국주의 타협세력은 중국 국민당 우파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 매판 자본가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 우파세력은 1927년 장개석으로 하여금 반공쿠데타를 감행케 하여 중국혁명에서 반제 노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통일중국건설이라는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중국을 민족의 내전으로 전화시켰습니다.
피압박민족의 민족적 역량은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와서 반파쇼전쟁에서 연합국 측이 승리를 획득하는데서 큰 역할을 할 만큼 커다란 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2차 대전은 민족해방운동발전에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5년 전쟁종결 후 민족해방운동의 획기적 발전은 그것이 세계적 범위로 확대된 데서 표출되었습니다. 동방아시아에 편재해 불타오르던 민족적 저항은 아랍동맹과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대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습니다.
저항민족주의는 제2차세계대전후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로 발전하였습니다. 제3세계를 중심으로 등장한 자주적 민족주의 흐름은 민족주의의 새로운 발전적 형태를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주민족주의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자주민족주의 성격은 선행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전개되던 시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정치의 틀 속에서 규정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침략민족주의의 구식민지적체계가 붕괴되고 피압박민족들이 민족독립을 성취하여 제3세계를 이루는 신생국가군이 출현하면서 식민지 체제는 무너져 갔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정치기류의 변화는 두 개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지난날 지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피압박민족, 피압박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주 지향세력을 이룸으로써 자주화의 흐름이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하게 된 변화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제3세계의 등장으로 인류공동체전체가 민족국가단위로 민족들이 생존 번영해 가는 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민족국가건설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안은 자주민족주의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정치의 틀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은 민족주의운동의 주도세력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민족주의의 성격변화에 영향을 끼친 요인입니다.
기존의 서구 민족주의는 봉건시대를 끝냈다는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그 발생시초부터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민족주의였습니다. 서유럽 근대민족국가의 산파역을 맡아 수행했고 서유럽민족주의의 발단을 열어놓은 세력을 주도한 것이 서구 부르주아지 세력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그들의 이익에서 출발해서 민족주의를 제국주의 위장물로 변질시켰습니다. 저항민족주의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본격적 전개는 민족자본의 형성과 연결된 민족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3세계 민족주의 시대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주도성이라는 역사적 한계성이 극복되어야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조건은 2차 대전 후 1960년대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체계가 무너지고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세계 피압박민족들이 민족적 독립을 성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3세계에서 제국주의의 실질적 지배와 수탈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나 형식적으로는 완료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민족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하였던 저항민족주의는 성취한 민족 독립을 공고화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신생국가군이 자기의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신생국들이 식민지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바로 후진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개화를 명목으로 자행된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는 식민지나라들의 사회발전 후진성을 새로운 경제 정치 예속된 형태로 더욱 세련되게 심화시켰습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경제와 사회 각 분야의 후진적 제 관계를 온존시켰고 세계자본주의경제권에 편입시켜 경제 잉여를 수탈하였습니다. 이식된 식민지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착취의 영토였고 근대화를 실현하려는 민족적 지향은 억제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식민지에서 벗어난 신생국은 여전히 후진국의 처지에 신식민지로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독립한 피식민지 나라들은 미영 서구 제국주의 종속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실현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과제로 요구되었습니다.
또한, 신생국가들이 민족의 통합과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중대한 민족적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생국가는 대체로 구식민지 시대의 국경선을 따라 독립하였던 까닭에 때로는 종족, 부족까지 분리되는가 하면 역사적인 단일민족이 분리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도의 경우, 제국주의 분할정책에 의해 종교적 기준으로 분리 독립되었고 언어, 종족, 종교, 풍속 등의 복잡한 구성을 그대로 안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나라들에서는 민족국가를 기본으로 해서 종족, 부족으로부터 민족을 형성하고 민족국가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보다 복잡한 과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미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복잡한 민족문제들을 안게 된 신생국들은 민족의 보존, 통합 내지 통일 이라는 민족적과제를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신생국가에서는 민족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대표세력이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1950년대까지 적지 않은 신생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 전통 엘리트의 지배는 민중적 지도세력에 의한 정치지배로 바뀌어집니다. 즉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요구와 이익을 대변하는 민중적 지도세력에 의해서 탈종속의 과제, 민족 자주성을 구현하기 위한 과제의 해결이 제도화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생국 등장은 우로부터의 종속적 체제유지의 정치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민중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로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생국가군의 자주적 발전을 침해하는 제국주의에 의한 새로운 종속의 위험이 국제적 환경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제국주의는 그 모습을 달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후의 동서대결의 양극 구조 속에서 서방세계의 초 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자유수호란 명분으로 신생국을 미국의 국제질서에 편입, 종속시키기 위해 정치 간섭과 군사경제 원조정책으로 신생국들의 민족 자주권을 침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뿐 아니라 지난날의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서방 강대국과 일본도 자본의 자유화정책에 따라 과잉자본을 신생국 독립지역에 이동시켜 경제적 종속과 수탈을 감행하고 부등가교환에 의해 구 식민지 나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강대국중심의 국제 경제질서를 재정립하게 됩니다. 즉 직접 지배방식이 아닌 간접지배방식을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1945년 이후 구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나라들의 경제수탈, 정치 경제종속은 1945년 이후 새로는 제국주의의 세련된 특징으로 됩니다. 낡은 식민지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경제 수탈의 검은 손을 움직이는 신식민주의가 다시 활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생국가군은 탈바꿈한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반대하여 탈 종속을 위한 저항을 계속해야 했으며 새로운 종속의 위험으로부터 민족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신생국들의 반외세,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의 민족 저항은 또 하나의 역사적, 시대적과제로 부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생국가들은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한 국제 연대의 넓은 영역이 형성하게 됩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의 역사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은 국제 연대를 형성하였고 그 연대의 공통분모는 민족의 자주적 발전이었습니다. 이런 공통된 역사체험과 국가발전의 주객관적조건, 민족적과제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의 각 영역에서 자주성에 기초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하여 신생국들은 기존세계와는 다른 제3세계를 형성, 비동맹운동의 주되는 담당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역사적 조건들은 그것 자체로서 저항민족주의가 기존 민족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수준, 새로운 유형의 민족주의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3세계민족주의, 즉 저항민족주의는 민족국가가 세계의 보편적인 생활단위로 형성되고 민족과 민중이 역사창조의 주체로 등장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수렴하여 민족을 바로 인식하고 자주적으로 건설하려는 지향성에서 출발하는 민족주의로 정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과 민족국가의 자주적 발전, 민족사회의 자주자립적인 발전과 통합, 대소 민족국가가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점입니다. 저항민족주의는 그 이념의 공정성과 제3세계의 연대적 집단력에 의해 세계의 자주적 발전에 기여하는 현대 민족주의의 기본흐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주된 흐름은 민족주의일반이 아니라 자주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과 민중의 주체적 운동으로서의 저항민족주의인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저항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유형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대응
제2차 제국주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전쟁으로 피폐화된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 제1의 패권국으로 등장합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정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자체가 부정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부정된 자리에는 미국은 세계전략에서 이념으로서의 코스모폴리터니즘, 즉 세계주의를 내세웁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의 저변에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발톱이 숨겨져 있습니다. 세계주의는 약소민족에게 민족주의와 자주권을 말살시키고 약소민족의 대문을 열게 하여 유럽의 구식민지를 미국의 신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놓여 있습니다.
미국은 각 나라의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선전하며 부르주아 독재인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생활양식, 미국식 세계관을 퍼뜨렸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미국식 정치경제제도로 편입시키기 위하여 제3세계 나라들에게 교육, 종교, 언론 매체를 동원하여 이념 전파 기지로서의 상부구조 진지를 구축하여나갔습니다. 이것은 개별국가단위의 민족성이나 민족감정을 소거시키고 민족주의를 소멸시키려는 미국의 이념적 목표입니다.
미국의 후진국 문제 전문가들은 1945년 이후 독립한 민족의식이 강한 신생국 민중들이 사회주의의 길을 택한다는 것을 알고, 현재 조선(북한)과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를 악마화하듯,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을 악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유대전쟁자본가들의 사상은 ‘전 인민 소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공주의입니다.
미국은 지배계급 이념인 반공주의를 유포하기 위한 정치선전에 미 CIA(미국 중앙정보국)를 정치공작 선두에 세웁니다. 미 CIA는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 뉴욕카네기 재단 등 수많은 재단과 랜드연구소 등을 통해 제3세계 민족주의를 파탄 내고자 반공주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했습니다. 미 CIA는 이런 우익 민간 재단들을 통해 노조, 청년단체, 대학, 출판사 등에서도 비밀첩보 활동을 전개하며 구좌파를 동원하면 정치선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과거 사회주의 활동을 했거나 반소, 반스탈린 입장으로 돌아선 사람에게 생활비, 직장, 연구소, 출판사 등 자금을 지원하며 사회주의 나라와 자주적 민족주의 나라에 대하여 문화(이념) 전쟁, 즉 문화 냉전을 수행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 CIA 문화냉전의 포섭 대상은 과거 좌파 지식인, 유럽의 사민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 신좌파들이었습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문화적 냉전 CIA와 지식인들』, 그린비, 옮긴이 유광태 · 임채원)
스탈린 사후, 반 스탈린 공세가 고조되었는데 미 CIA의 최종 목표는 스탈린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각종 수정주의를 유포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 사회주의를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공격하며 세계의 민중들이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2차 제국주의 전쟁은 국가독점자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는 파괴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제국주의세력은 제2차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의 전쟁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전가시키며 제국주의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미국 역시 히틀러와 파시즘 배후에 국가 독점자본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했기에 미국 유대자본은 <쉰들러 리스트>같은 영화를 만들어 전쟁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전가시키며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덮고자 하였습니다.
1945년 이후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던 책은 2차 대전 중에 저술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었는데, 포퍼는 이 책에서 역사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는 플라톤 정치 철학에는 전체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비판을 시작으로 플라톤에서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는 계보가 20세기 전체주의의 뿌리라면서 소련 사회주의를 전체주의로, 폐쇄 사회로 규정하고 열린사회를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계보는 칼 포퍼 이전, 러시아 혁명기부터 있어왔던 입장으로, 카우츠키는 혁명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하였고 트로츠키 역시 『배반당한 혁명』 에서 스탈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동일한 현상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갈무리, 2018년). 이 책은 세계 최초 노동자국가인 소련이 혁명 이후 생산력 발전에서 무엇을 성취하였고 권력창출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승리했으며 관료집단이 어떻게 지배계급이 되어가는가에 대해 소련 관료제를 비판하며 해부한 책입니다).
미국은 제3세계 민족주의를 반 서구주의로, 반제 반미주의, 사회주의로 가는 사상으로 규정지었습니다. 미국과 서구 진영은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의 자주적 민족주의는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유지하는데 장애로 판단하여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주의)를 퍼뜨렸는데, 이것은 개인주의, 위아주의*, 고립주의를 내세우는 반공주의의 부드러운 얼굴이라 하겠습니다.
* 위아주의 : 자기본위로 생각하는 사상, 열자 양주편에 나온다.(편집자 주)
이런 식으로 저항민족주의를 부정하던 미국은 제3세계진영이 비동맹회의를 만드는 등 저항민족주의를 표방하자 패권을 유지하기위하여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즈음 나온 1960대의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런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증표가 된다하겠습니다.
미국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은 과학 기술 발전과 복지사회 등장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이론이며 정보 지식 탈산업사회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나라의 반인권 사태, 수정자본주의에 의한 복지국가 대두, 중산계급의 출현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벨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저술되었습니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노자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며 노동자들은 사회복지와 노사분쟁조정으로 개인에게 관심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1950년대 후반기에 나온 수렴이론(Convergency theory)으로서 립셋, 레이몽 아롱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수렴이론의 요지는 장차 사회는 이념보다 경제 기술적 요인이 중요하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국은 하나로 수렴된다는 것입니다. 탈산업사회는 과학지식, 전문기술을 소유한 테크노크라트 사회로서 이들 테크노크라트가 뷰로크라트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장차는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소련, 중국에서도 이데올로기보다는 기술적 기능이 우선시되므로 이데올로기는 정당성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발표하던 1960년대에는 이념과 민족주의라는 정념으로 세계가 불타던 항쟁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4.19의거, 6.3사태, 베트남 전쟁, 세계적 반미투쟁, 프랑스 1968.5월 항쟁, 일본의 전공투, 미국의 흑인운동 등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란 신생국 민족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 자본가들이 원하는 이데올로기의 재정립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곤경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맞추어 미국은 세계전략 속에서 ‘민족주의’를 다른 의미로 정립할 필요성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 새로이 정립한 민족주의이데올로기는 신생국 민족주의의 반미적, 반식민주의적 지향성을 거세하고 서방의 이념을 주입하여 서구 근대화로 민족주의를 탈색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식민주의적 지배를 민족주의로 위장하여 정착시키기 위한 책략인 신식민주의 지배를 위한 허구적 민족주의였습니다. 미국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주의 경향을 미국의 이익에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항민족주의를 방지하는 것이 미국의 지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목표였고, 미국은 서구 지향이 아닌 자주 지향의 민족주의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저항민족주의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항민족주의를 배타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 공격하고, 그것을 지난 시기의 독일나치즘이나 일본군국주의와 동일 계열로 체계, 범주화하는 이론적 왜곡을 하였습니다. 즉 조선(북한)이나 쿠바 시리아 이란 등의 저항민족주의는 봉건주의며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그 나라의 진보적 의미를 부정해 버렸습니다.
반미, 반제 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은 1982년 9월 리차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한국 민중의 자주적 민족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에서 나타났습니다. 워커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태 등에 대하여 미국이 한국에 가한 침략 지배행위와 내정 간섭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1980년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반미주의를 광신적 국수주의, 외국인 혐오로 비난하며 자주적 민족주의 의식은 가진 한국 민중들을 모욕하였습니다. 미국은 자주적 민족주의를 비이성주의, 비합리적인 인간의 충동으로 선전하였는데, 이런 미국의 태도는 민족주의를 세계전략을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려는 미국 대외 정책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21세기에 와서도 미국은 민족국가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계지배전략을 물리력으로 실현하여왔습니다. 미국의 21세기전략에서 주목되는 것은 세계제패를 위해 핵전략을 정책화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1970년대 초, 나토성원국들에 7,000여개, 태평양지역에 2,000여개의 핵무기를 배치하였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방대한 양의 핵무기를 사회주의권을 제외한 지역에 배치하고 있습니다.(월간조선, “지난 1월 3일 국제 통계조사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는 미국과학자협회(FAS) 자료를 인용해 전 세계 핵무기 보유량을 발표했다. 각국의 보유량은 러시아(6800개), 미국(6600개), 프랑스(300개), 중국(270개), 영국(215개), 파키스탄(140개), 인도(130개), 이스라엘(80개), 북한(20개) 순이었다.”고 보도했다. 2018.1.7기사)
미국의 21세기전략은 본질상 냉전시대의 핵전략을 그대로 유지하는 군사 패권전략을 바탕으로 한 달러패권 유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21세에도 여전히 자주를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핵전략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민족주의 저항 담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겠습니다.
( <마르크스 엥겔스 중기, 후기의 민족주의>는 다음 회에 올리겠습니다.)
박기민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  webmaster@minplus.or.kr

‘위안부 논쟁’에 공전의 대담함으로 도전하는 - 영화 『主戰場』

김종익 | 2019-07-12 10:50:36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 규제로 한일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문제’ 등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번 사태는, 이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극우 세력의 지지와 ‘평화 헌법 개정’을 달성하려고 하는 아베 내각총리의 정치적 계산에서 발단되었다는 것은 거의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름 한국 개봉을 앞두고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위안부’ 관련 영화 『主戰場』. 이 글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영화의 감독을 『世界』에서 인터뷰한 기사이다. 일본 개봉 후 쏟아진 관심에, 영화에서 감독과 인터뷰한 우익들이 감독을 고발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영화. 감독은 어떤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며,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평은 어떤 곳일까? - 역자 주
‘위안부 논쟁’에 공전의 대담함으로 도전하는 - 영화 『主戰場』- 잘 오셨습니다, 논쟁의 ‘주전장’에 -
Miki Dezaki
1983년생. 미국 출생.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 일본계 미국인 2세. 미네소타 대학에서 의학을, 죠치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강제 연행은 없었다” “성노예는 아니다” “20만 명은 거짓이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결렬하게 대립하는 의견과 의견. 일본계 미국인 2세 미키 데자키 Miki Dezaki 감독(35세)에 의한 다큐멘터리 『주전장』은, 이러한 ‘論戰’ 그 자체를 가시화하여, 그것이 어떤 문맥으로, 어떤 구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마치 파노라마처럼 묘사해 낸다. 보는 사람은 이 ‘논전’을 추체험하게 된다. 지난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래,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던 작품으로 폭 넓은 층으로부터 “새롭다” “이색적이다”라고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납득이 간다. 4월 말부터 일본 공개가 시작되어, 여름에는 한국 공개 예정. 일본 공개 전에, 감독에게 영화 제작에 이르는 과정과 생각을 물었다.
‘역사 수정’에 대한 집념은 왜?
- 첫 영화 작품이라고 하는 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뭡니까?
최초 계기는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가 ‘위안부’ 문제 기사와 관련하여 이른바 ‘인터넷 우익’으로부터 비방 중상을 당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저는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20만 명의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성노예를 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왜 일본과 한국에서 이것이 논쟁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의문으로 여겼던 거지요.
그래서 영화 모두에 제시했듯이, “왜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이렇게까지 역사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추구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실이 왜 말살되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를 되묻는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 영화에서는, 크게 세 가지 쟁점 “20만 명” “강제 연행” “성노예”가 제시되고, 역사 수정주의자·부정론자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연구자·활동가 등의 인터뷰가 속도감 있게 컷 분할되어 재구성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실제로 논쟁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는 서로 직접 만나서 논쟁하는 분들은 아니지요. 각각의 분들이 저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논쟁은 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인터뷰 대상은, 일본·미국·한국의, 이 논쟁의 중심인물들 약 30명. 사쿠라이櫻井 요시코(저널리스트), 켄트 길버트Kent Sidney Gilber(캘리포니아 주 변호사/탤런트), 스기타 미오杉田水脈(자민당 의원),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일본의회) 등 역사 수정주의자·부정론자, 와타나베 미나渡邊美奈(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필리스 킴(캘리포니아 코리안 미국인 협회) 등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활동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역사학), 나카노 고이치中野晃一(정치학), 아베 고우키阿部浩己(국제법학), 이나영(사회학) 등 연구자들입니다. 후반에는 의외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재미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파 인사들이 제가 만든 인종 차별을 다룬 You Tube 작품을 보고 있고, 저를 ‘反日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악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어요. 다만 이것은 우파로부터 인종 차별에 직면해 있는 재일 코리언이 아닌 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질문’과 편집 과정
-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을까요?
인터뷰만이 아니라, 병행하여 수많은 뉴스 영상, 역사적 자료 등의 리서치를 거듭하며, 제 자신이 보도를 통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론할 것이 제 내면에 없었어요. 그런데요 감정은 요동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어요. 예를 들면, ‘성노예’를 둘러싼 부분에서는, 와타나베 미나 씨도 말하듯이, “상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의 정의로 말한다”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성노예라고 하는 것은 국제법상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거기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또, “20만 명”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논쟁 부분은 복잡했습니다. 이것은 양 진영이 각각의 문맥으로 이용해 온 경위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제 자신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몇 번이나 ‘질문’을 들이대어, 검증하고 분석하며, 제작자들과 토론을 거듭해 갔습니다. 그리고 편집 단계에서 처음 확고한 무엇인가에 이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영화 제작 과정 가운데 편집 작업을 아주 좋아하지만, 이번은 혼자서 세 달에 걸쳐서 편집했어요. 이 영화를 보는 분들도, 잇달아 떠오르는 의문이나 ‘질문’을 소중히 여기며, 논전을 체험해 주셨으면 합니다.
- 아베 정권은 ‘한일 합의’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고, 매스미디어는 그 검증도 충분히 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한국 쪽에 원인이 있는 듯한 보도가 눈에 보입니다.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취급 방식, 말하자면 framing이나 관점입니다. 예를 들면, 각국에서 소녀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인은 분노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은 문맥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인 거지요. 왜 만들어지고 있는가라고 하면, 일본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가 지워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많은 일본인이 몇 번이나 사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에게는 반밖에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자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전체 속의 문맥이 결락되어 있는 것이 문제예요. 이 점에서는, 일본·미국·한국의 매스컴도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캐내어, 쌍방의 의견을 확실히 듣고, 명확하게 비교하여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도록, 두 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포괄적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 ‘한일 합의’를 둘러싼 미국의 책임에 대해, 구조 속에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점도 중요합니다.
제가 미국인인 것도 물론이지만, 처음부터 넣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요, 다양한 국제 분쟁에 대해서도 미국의 영향력은 크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감독은 2007년부터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중학교·고등학교에서 5년간 가르치고 있던 무렵에, You Tube로 미국과 일본의 차별 문제를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일본에는 인종 차별이 있습니까?』는 약 89만 회의 시청이 이루어져서, 이른바 ‘인터넷 우익’으로부터 상당한 공격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 작품을,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느꼈고, 그것은 『주전장』에 공통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 영화는 오락적인 요소라기보다, 교육 도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큐멘터리가 교육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관람한 사람으로부터는 오락적 부분이 있고 스릴 있는 전개로 재미있다는 등을 이야기해 주시지만, 미국적인 다큐멘터리와 비교하면, 그 정도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미국인에게는 특히 전반은 느리다고 들었습니다. 내레이션은 직접 했는데요, 속도를 올릴 궁리도 했었고, 또 음악은 감정을 조작하지 않고, 관객을 refresh시키면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성장과 의외의 경력
- 의사나 승려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개인사를 조금 들려주시지요.
저는 일본계 미국인 2세예요. 부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70년대로, 아버지가 고급  요리사로 알래스카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외교관이었습니다. 저는 1983년 테네시 주에서 태어났고, 한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플로리타 주에서 살았는데, 미국 남동부에 있는 플로리다 주는 인종 차별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처음 일본에 온 것은, 2003년, 교환 유학생으로 히로시마 대학에 온 스무 살 때였어요. 1년간 체재했는데, 그때는 일본 문화와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물론 원폭 자료관을 본 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미국의 사죄는 부족하고, 미국의 전쟁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 돌아가 의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의대에 입학해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명상을 권유받고, 시도하자마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명상을 통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승려 수행을 하러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한 번 일해 보고나서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일본에서 교사를 하기로 했던 겁니다. 교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사실이었는데, 일본은 태국에 가까워서 승려 수행 조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 무렵 합기도 철학에 매료되었습니다. 공격이 아니라, 수비 무술이며, 거기에서 파생하는 평화와 조화라는 것에 홀렸습니다. 그 후 1년간, 태국에서 승려로 지냈고, 2015년에 다시 일본에 와서 죠치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 관계학을 전공하고, 이윽고 영화를 찍기 시작하게 되었던 거지요. 이런저런 경험을 해 왔는데, 저의 일관된 생각은 “남의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습니까?
우선 일본과 한국의 일반 분들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한일 관계에 뭔가 도움을 준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만들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인터넷에 넘치고 있지만, 양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가의 정보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에는 역시 교육이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후, 대화가 가능하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건설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확신합니다.
-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일본 국내의 성폭력 피해 실태에 놀라서, 앞으로 성차별 문제에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번 작품으로는 복수의 구상이 있습니다. 『주전장』에 대한 반응도 보면서 생각해 가겠습니다. 성차별 영상을 만드는 것 자체는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죠치 대학에서 ‘입장의 심리학’이라는 수업의 교육 조교를 하고 있었을 때, 다수의 특권이라는 수업 중에 학생으로부터 가장 저항이 컸던 것이 성차별 문제였어요. 어떤 관점에서 몰두하는가, 보다 나은 관점을 찾게 될까 어떨까가 열쇠입니다.
-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주제이며, 많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95 

조선 여자 축구 일본꺽고 세계 대회 우승

이정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7/14 [06:41]

조선 여자 축구 일본꺽고 세계 대회 우승

▲ 자료사진     © 자주일보

조선 여자축구단이 세게대회를 재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조선중앙통신은 13일 조선 여자축구단이 제30차 여름철 세계 대학생 체육 경기 대회(하계유니버시시아드)에서 제1위를 쟁취하였다고 밝혔다.

이로써 조선 여자 축구가 세계 축구의 강자임을 확인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탈리아에서 진행 되고 있는 제30차 여름철 세계 대학생 체육경기대회에서 조선 여자축구선수들이 제1위를 쟁취 하였다"고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지난 2일부터 12일까지(현지시간진행 된 이번 경기대회 여자축구 경기에는 조선과 중국로씨야브라질메히꼬를 비롯한 12개 나라와 지역의 대표단들이 참가하였다."고 전했다.

통신은 "조선 여자 축구 선수들은 조별 연맹전에서 카나다남아프리카 선수들을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이기고 준준결승 경기에서 이딸리아 대표를 4:1,준결승 경기에서 아일랜드 선수단을 5:0으로 물리쳤다."고 전했다.

그리고 "12(현지시간)에 진행 된 결승 경기에서 조선 대표 선수단은 일본을 2:1로 타승하였다"고 쾌거 소식을 강조했다.




서울 밤 하늘을 빛낸 외침 "조선일보 폐간하라"

'제1차 페미시국광장-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 집회 열려
2019.07.13 17:45:36




분노한 여성들이 다시 모였다. 정확히 <조선일보>를 겨냥했다. 12일 저녁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조선일보사 건물 옆면에는 '폐간하라', '고 장자연 배우에게 사죄하라', '수사 외압 언론 적폐' 등의 대형 문구가 빛을 발했다. 

350개 여성단체 연대체인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12일 서울시 동화면세점 앞에서 고 장자연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제1차 페미시국광장-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검찰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 장자연 사건 진상조사가 재수사 없이 종결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고 장자연 사건은 2009년 3월, 배우였던 장자연 씨가 소속사 대표의 술자리 접대와 사회 유력인사들의 성접대 강요 등을 고발하는 문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다. 당시 사회 유력인사가 연루됐다는 의혹과 부실수사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사건의 중심에 얽힌 것으로 추정돼 왔다. 장 씨가 당시 남긴 문건에 '(소속사 대표가) 2008년 9월 경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는 사람과 룸싸롱 접대에 불러서 잠자리 요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여성들의 주장이다.  

지난 3월,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진상조사가 시작됐고 지난 5월 20일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보고서는 수사가 미진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재수사를 권고하지는 않았다.

▲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 건물 옆면에 '폐간하라'는 문구가 떴다. ⓒ프레시안(조성은)
이날 집회의 여는 발언을 맡은 박인숙 고 장자연사건 관련 법률지원단 변호사는 "당시 술 접대를 받고 잠자리를 요구한 유력인사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유일하게 법원의 판단을 받은 것은 당시 기획사 대표 김 씨였으나 법원은 장자연 씨 폭행 사실만 인정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강요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었음에도 문건 내용이 모호하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진 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검찰이 2009년 당시 수사 문건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는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도 조사하지 않고,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 하 모 씨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불기소의 내용을 작성하기도 했다"며 "수사가 이뤄지지 않도록 은폐한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경기처장 조 모 씨를 찾아 '우리는 정권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등 압력을 행사한 사실도 드러났다"며 조선일보사가 장자연 사건에 깊숙이 연루된 의혹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박 변호사는 특히 "장자연 씨의 수첩과 다이어리 사본이 남지 않았"으며 "장 씨가 사용하던 분홍색 모토로라 휴대폰이 사라지는 등 의도적인 증거 은폐마저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고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두고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 것을 언급하며 "우리는 우리나라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사회 유력 인사들도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행위를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한다. 이런 사람을 비호하는 경찰 검찰들도 처벌 받는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일 서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제1차 페미시국광장' 집회에 참여한 참석자가 작성한 요구안 ⓒ프레시안(조성은)

익명을 요구한 눈사람 씨는 "조선일보사가 10년 전에도 피했고 이번 재수사도 피했지만 언제까지고 영원히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라며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하고 앞으로도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모리(가명) 씨도 "검찰인줄 알았는데 가해자였다"며 "여성을 마치 물건처럼 거래하고 착취한 권력형 범죄를 검경이 방조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여성도 동등한 국민의 위치에 있는 것인지 의심 된다"며 "범죄자가 아닌 남성도, 범죄를 처벌하는 위치의 권력도, 여성대상범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검찰에 대한 신뢰도가 왜 낮은지 검찰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미시국광장은 이날을 시작으로 8월 9일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김학의 사건, 버닝썬 등 여성 성폭력과 성 착취, 그리고 이에 유착 의혹을 받는 검경을 차례로 규탄할 예정이다. 

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쫌만 더 힘내

돌아온 심상정 대표 "한국당 퇴출시킨다"

19.07.13 18:18l최종 업데이트 19.07.13 20:08l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당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당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남소연

심상정 의원(경기 고양시갑, 3선)이 정의당 5기 대표에 선출됐다. 부대표에는 김종민·박예휘·임한솔 후보가 당선됐다.

정의당은 13일 오후 6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제5기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를 열고 당대표 결과를 발표했다. 심 의원은 총 16177표로 득표율 83.58%을 기록했다. 심 대표와 경쟁한 양경규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은 3178표(득표율 16.42%)를 얻었다.

심 대표는 당선 일성으로 "자유한국당을 역사의 뒤안길로 퇴출시키고 더불어민주당과 개혁경쟁을 넘어 집권경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심 대표는 "정의당은 더 이상 소금정당, 등대정당 역할에 머무를 수 없다. 1800만 촛불의 대표정당으로 발돋움해 총선 승리와 진보 집권의 길을 열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락연설 하는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 수락연설 하는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또 심 대표는 "총선에서 비례의석 한두 석 더 얻기 위해 대표된 것 아니다"라면서 "지역구 후보들의 출마와 당선을 위해 당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겠다. 지역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외롭게 싸우지 않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선거 전략, 홍보, 정책 모두 당이 책임지고 지원할 것"이라고 내년 총선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심 대표는 당장 국회에서 풀어야할 선거제 개혁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걸고 선거제도개혁을 기필코 완수하겠다"면서 "불공정한 선거제도를 바로잡아 민심이 살아 숨쉬는 국회, 국민주권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정의당 대표를 지낸 심 대표는 2년 만에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 대표직에 복귀하게 됐다. 심 대표의 복귀는 '힘 있는 진보정당'을 원하는 당원들의 선택이 집결된 결과로 풀이된다.
 
심상정 대표와 함께 선출된 정의당 부대표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차기 부대표들과 함께 손잡고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한솔·박예휘 부대표, 심상정 대표, 김종민 부대표.
▲ 심상정 대표와 함께 선출된 정의당 부대표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5기 정의당 대표단 선출 보고대회에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차기 부대표들과 함께 손잡고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한솔·박예휘 부대표, 심상정 대표, 김종민 부대표.ⓒ 남소연

3인을 선출하는 부대표 선거에서는 김종민·박예휘·임한솔 후보가 선출됐다. 선거 시작 전부터 '당대표보다 치열한 부대표 선거'라는 말이 돌 정도로 경쟁이 뜨거웠다. 총 7명의 후보가 나왔다.

김종민 후보가 37.10%, 6986표를 얻어 1위를 해 여유있게 부대표가 됐지만, 임한솔 후보는 14.85%, 2796표를 얻어, 3위인 이혁재 후보(2711표)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 4위는 2228표를 얻은 이현정 후보가, 5위는 2222표를 얻은 한창민 후보가, 6위는 1333표를 얻은 박인숙 후보가 차지했다.

정의당은 당헌 및 당규에 의거 부대표 3인 중 청년 및 여성 할당을 실현해야 한다. 박예휘 후보가 득표율 2.95%, 556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청년과 여성 할당을 동시에 실현한 것으로 인정받아 부대표가 됐다.

정의당의 이번 당대표 및 부대표 선거는 지난 8일부터 이날까지 당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투표를 취합해 발표된 결과다. 앞서 정의당은 8~11일 온라인 투표를, 12일에는 각 광역시도당 당사에서 현장 투표를 마쳤다. 이날 오전 10시30분과 낮 12시30분, 오후 2시에는 자동응답시스템(ARS) 투표를 실시했다. 당권자 3만213명 중 64.56%가 대표 선거에서 투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