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3일 수요일

노점상 '노'는 이슬이다

최인기의 빈민스토리(1)
  •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승인 2019.02.14 09:42
  • 댓글 0
연재를 시작하며
노점상 단체가 만들어지고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노점상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건을 중심으로 소개됐지만, 총체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억압받는 자들에 의해 발전해 왔다면 도시빈민의 저항은 또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이어져야 한다. 집 앞에 우뚝 버티고 서있는 나무처럼 익숙하기에 어찌 보면 간과했던 노점상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노점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더불어 빈민 운동사에서 이들의 활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다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봤으면 한다.[필자 최인기]
▲ 2016년 12월 24일 광화문 촛불집회와 노점상[사진 : 최인기 제공]
1. 노점상 '노'는 이슬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히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하듯 도시도 항상 변한다.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것이 도시다. 그 변화의 속도에 맞춰 거리의 노점상들도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지기 때문이다.
“노점상의 어원을 찾아보니 ‘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 또는 그런 장수’라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노점상의 첫 번째 글자 길 ‘노(路)’로 알고 있는데, 이슬 ‘노(露)’자다 그러니까 노점상(露店商)이란 이슬을 맞으며 고달프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 철거민과 노점상 단체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김흥겸 선배의 이야기다. 그는 그때 위암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술은 먹지 않고, 풀어냈던 이야기다. 거리에서 이슬을 맞고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슬 노(露)자를 써서 노숙인(露宿人)이라 부른다. 종합해보자면 ‘이슬’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통된 상징이 된다.
2007년 11월 11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남편은 매일 매일 건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제가 파는 붕어빵 마차에 들렸습니다. 어제는 덩치 큰 여러 명의 용역반이 저를 둘러싸고 마차를 부수자 길가에 반죽이며 팔다 남은 붕어빵이 흩어졌어요. 이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습니다. 저와 남편이 바닥에 뒹굴며 단속에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하더군요. 그리고 남편은 평소와는 다르게 밤늦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보 미안해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다.’, ‘ 세상 살기 힘들다.’ ‘장사를 못하니 나라도 나가 막노동이라도 해야지…….’라며 유서를 써놓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의 붕어빵 마차가 단속당하는 것을 지켜본 고양시의 노점상 이근재 씨는 공원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던 것이다. 단속이라는 위협적인 상황에 놓인 노점상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일 것이다. 이미 이전에도 그동안 수차례 노점단속으로 시달려 온 상태였다. 당시 고양시는 노점단속 비용으로 31억이라는 혈세를 쏟아붓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나약한 노점상의 비관적인 자살이라고만 바라볼 문제인가? 누가 한 노점상의 가정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갔을까?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리의 문제설정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시각에서 노점상을 이해하고 이들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들이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봐야 한다. 개별적 시선을 넘어 붕어빵 노점상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난을 더욱 부채질하는 무차별한 노점단속 때문은 아닌지, 왜 노점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이를 먼저 보려 노력해야 한다. 어느 사업장이나 노동자들이 있듯이 한국사회속에서 노점상이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2. 노점상의 형성과 역사
노점상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오랜 예전부터 마을 장터를 중심으로 천민들이라 불리는 가난한 이들의 경제활동의 근거지가 되지 않았을까? 지방 나름의 특정 상품이 재배되고, 그 지방의 물품들이 자유롭게 거리로 나와 마을 장터가 형성되었다. 나아가 같은 품목이라 할지라도 지방마다 재배 되고 만들어지는 한정된 물품은 가격이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을 것이기에 더 큰 장터가 형성되고 점차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을 것이다.
▲ 조선후기 노점상[사진출처 : 서문당]
조선 초기 각 지방의 특산물, 농어물, 공산품들을 국가에 상납했지만, 중기 이후 세금을 쌀로 내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때문에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가 직접 혹은 지방관청을 이용해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마을 장터에서 지방 특산물이나 농작물, 공산품들이 유통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몇몇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장터가 발전된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유통 형태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자신의 신체 노동으로 전국을 활보하며 유통을 담당했던 보부상과 난전 상인 즉 지금의 노점상, 그리고 본격적으로 상업을 본분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서 장을 펼치던 상인으로 발전한다.
현재의 ‘떴다방’을 연상시키는 보부상의 역사적 문헌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물교환 형태의 소규모상인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고려 후반 조선 초부터 보부상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말이다.
‘봇짐장수'라고도 불리는 보상은 기술적으로 발달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더 나가는 잡화를 취급하여 보자기에 싸 들고 다녔다. ‘등짐장수’라 불리는 부상은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나무, 그릇, 토기 등과 같은 생활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판매를 하였다. 그들에게는 강력한 규율과 체계를 갖춘 ‘상단’이라는 조직이 제각기 존재했다.1) 주1)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난전’이란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현재의 ‘노점상’을 뜻한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로 뒤섞여 떠들어 댄다는 말의 ‘난장판’이라는 말은 난전에서 유래한다. 불법적인 거래로 상업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난전이 형성되는 장터는 상권이 만들어 지면서 공식적인 상인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론이 모이고 흩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의 노점상처럼 난전에 대한 단속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 ‘금난전권(禁亂廛權)’은 말 그대로 난전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난전’을 적발할 경우 폐쇄하고 판매하던 물건도 압수했다. 일부 공식적인 시전상인은 난전 단속을 위해 ‘자경단’과 같은 자체 조직을 거느리기도 했다. 정부 역시 직접 단속에 나서기도 했는데 적발한 물품은 벌금 명목으로 몰수했고, 물품이 벌금보다 적을 경우 난전 상인을 곤장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황평우에 따르면
▲ 조선후기 난전으로 불리던 노점상 [사진출처 : 서문당]
“1700년대(숙종 연간) 전쟁을 겪고 기후변화까지 겹쳐 피폐한 농민들이 한성으로 몰리자 남대문 근처에 가난한 사람들의 숙소가 형성되었다. 이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자신들의 물건을 사고파는 장이 형성되었다. 도시 상업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이때 본격적으로 가가(假家) 즉 임시로 지은 집인 ‘난전’이 생겨나며 상거래 행위가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결국 민중들이 스스로 만든 남대문 칠패 시장, 동대문 바깥에 이현시장 등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다.”고 전한다.
특히 노점상과 보부상인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가난한 천민들의 생존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 스스로 거리로 나와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소작농과 겸업 하면서 물건의 유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고 중시한 농본주의 사회였기에 상업을 억제했다. 백성들이 이문만 쫓고 농업은 등한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천시받는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상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커서 수도인 한성에서는 허가받은 상인만이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지정한 곳 외에 장을 개설하고 상거래 하는 것을 금지했다. 조선 후기 정부로부터 특권이 부여된 6개의 큰 시전이 종로 1가와 2가에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 종류를 다른 상인이 거래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 금난전권을 부여했다. 즉 육의전은 특권적 어용 상인의 단체들이었다.2) 주2) 네이버 [지식백과] 육의전 [六矣廛] (경제학사전, 2011. 3. 9. 박은태)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토록 막강한 상업적 특권을 시전상인에게 부여했던 것일까.
조선 시대 시전상인은 물건을 백성에게 판매하는 한편 일정한 형태의 국역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거래세에 해당하는 상세와 시전상점을 임차한 대가로 세금을 국가에 내야 했다. 또한 왕실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의무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정부에서 행하는 부역에도 참여해야 했는데 국가 차원의 행사, 공공시설의 조성 및 개·보수, 환경미화 등의 사업에 시전상인이 동원됐다. 즉, 정부는 재정적·행정적 이유에서 시전상인의 역할이 필요했다.3) 주3) 한국경제 [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시전상인의 독점권을 철폐한 신해통공(辛亥通共) (2016. 9. 2. 정원식)
이렇게 본격적으로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나고 국가는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해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지방에 국한되어 있던 상품들이 교통의 발달로 폭넓게 타지방으로 활발히 유통되거나 사재기를 통해 더 큰 이익을 보게 된다. 금속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발전을 더더욱 촉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접어들어 양반과 상민의 계급제도 붕괴를 가속하고 자본의 성장에 원인이 된다.
필자 최인기는 ‘민주노점상전국연합과 전국철거민연합’으로 결성된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수석부위원장’ 을 겸임하고 있다.
현장을 지키며 카메라를 드는 이유는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사진 책《청계천 사람들 : 리슨투더시티》외 도시빈민 관련된《가난의 시대 : 동녘 》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 동녘 》
《그곳에 사람이 있다 : 나름북스 》공저로《누리하제 : 노나메기》등의 책을 썼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webmaster@minplus.or.kr

군인·경찰, 손쉬운 표적 ‘아기·엄마’ 군사작전하듯 죽이고 성폭행

[단독]군인·경찰, 손쉬운 표적 ‘아기·엄마’ 군사작전하듯 죽이고 성폭행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입력 : 2019.02.14 06:00:02 수정 : 2019.02.14 11:45:54


[로힝야 학살 보고서②]ㆍ여성에게 더 잔혹했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맘타리(가명)가 성폭행 피해 등 자신이 겪은 미얀마 군대의 학살을 증언하며 울부짖고있다. 미얀마 군인이 민가에 방화하는 과정에서 맘타리는 얼굴 오른편에 화상을 입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뚤라똘리 마을 출신 맘타리(가명)가 성폭행 피해 등 자신이 겪은 미얀마 군대의 학살을 증언하며 울부짖고있다. 미얀마 군인이 민가에 방화하는 과정에서 맘타리는 얼굴 오른편에 화상을 입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뚤라똘리 마을 사망자 절반이 여성 
그중 절반, 성폭행 직후 살해당해 
2017년 8월30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 북쪽의 로힝야족 거주지 뚤라똘리 마을. 여성들이 강변의 민가로 끌려갔다. 4~5명씩 무리 지은 미얀마 군인과 경찰들은 한데 모아둔 여성들을 다시 5~7명씩 뽑아 민가로 데려갔다. 로힝야 남성들을 죽인 뒤였다. 살아남은 여성들을 민가에서 성폭행했다.
이 마을 출신 바시다(25·가명)도 이날 얻어맞고 장신구와 돈을 빼앗긴 뒤 강간당했다. 이때 그의 품엔 생후 28일 된 젖먹이가 안겨 있었다. 미얀마 군인들은 아이를 빼앗아 여러 번 집어던져 죽였다.
같은 마을의 맘타리(30·가명)는 남성 3명에게 오전 10시쯤 성폭행당했다. 다른 피해 여성들과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미얀마 군경은 먼저 남자들을 죽였고, 여자들을 민가로 데려가 돈과 장신구를 빼앗고 성폭행했다. 성폭행을 한 후엔 민가 문을 걸어잠근 뒤 불을 질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여성들만 빠져나와 도망쳤다. 맘타리의 얼굴 오른편엔 선명한 화상 자국이 남았다.
2017년 8월 말 로힝야 마을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은 여성에게 더 잔인했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인터뷰한 로힝야 난민들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함께 여성들에 대한 집단적인 성폭력을 증언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아디의 로힝야 5개 마을(뚤라똘리, 인딘, 돈팩, 쿠텐콱, 춧핀) 학살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단독]군인·경찰, 손쉬운 표적 ‘아기·엄마’ 군사작전하듯 죽이고 성폭행
■ 사망자 절반 이상은 여성 
가장 많은 집단학살 희생자(최소 451명)가 나온 뚤라똘리 마을에선 여성 사망자가 248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10~20대는 113명에 이른다. 사망한 여성 중 절반 가까운 123명이 성폭행 직후 살해당했다. 군인들은 여성들의 장신구를 빼앗은 뒤 성폭행하거나 살해했는데, 귀걸이 등을 가져가려고 귀를 자르기도 했다. 인터뷰에 응한 춧핀 마을 출신 40명 중 10명이 성폭행 피해자였다. ‘테러리스트 토벌’이 군사작전의 명분이었지만, ‘테러’와는 거리가 먼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춧핀 마을 출신 아누라(24·가명)는 학살이 일어나던 2017년 8월27일 라카인주에 사는 또 다른 소수민족인 라카인족 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라카인족은 당시 미얀마 군경과 함께 로힝야 학살에 가담했다. 당시 아누라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남성이 아이를 빼앗으려 하자 아누라의 아이들이 울었다. 아누라가 저항하자 남성들은 망고나무에 묶어놓은 뒤 그의 큰아들을 염소우리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누라를 성폭행했다. 
돈·장신구 빼앗은 뒤 성폭행 
문 걸어 잠그고 불 지르는 등
‘테러리스트 토벌’ 명분으로 악행 
우는 아이들은 총 쏘거나 불태워
아누라는 의식을 잃었다. 아누라는 “남성 2명이 현장에 있었지만 몇명이나 성폭행을 저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3시간가량 지나서야 한 이웃이 아누라를 구해주었다.
아누라처럼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였다. 미얀마 군인과 경찰, 학살에 가담한 민간인들은 젖먹이 아이를 서슴없이 죽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을 강간하려고 아이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죽인 것이다. 춧핀 마을에선 인터뷰에 응한 40명 중 23명이 아동 살해를 목격했다고 했다. 총을 쏘거나 불에 태워 아이들을 죽였다. 흉기를 휘둘러 죽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폭행을 막으려던 이들도 죽임을 당했다. 인딘 마을 출신 나후마(50·가명)는 2017년 8월25일 군경이 마을을 습격하던 날 사망한 이웃주민 후세인의 모습을 기억했다.
후세인은 나후마의 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나후마가 군경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가는데 미얀마 군인이 나후마의 딸을 붙잡았다. 붙잡힌 딸을 구하기 위해 후세인이 군인들 앞으로 달려갔다. 군인들은 흉기를 휘둘러 그를 죽였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바시다(가명)는 생후 28일된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상태에서 미얀마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목에 난 상처는 미얀마 군인들이 흉기를 휘둘러 난 것이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뚤라똘리 마을 출신 바시다(가명)는 생후 28일된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상태에서 미얀마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목에 난 상처는 미얀마 군인들이 흉기를 휘둘러 난 것이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제공
■ 난민캠프에서 이뤄지는 ‘자조모임’ 
아누라는 국제사회에 ‘정의’를 요구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성폭행을 겪어야 했던 그에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회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지만 당장 가해자 처벌은 요원하고, 난민캠프의 생활도 열악하다. 여성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자녀들을 돌보며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끔찍한 기억을 안고 있는 로힝야 여성들은 난민캠프에 머물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하지만 주변에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여성들의 피해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아디의 여성 조사관들이 나섰지만, 옆 텐트의 음성이 생생히 들리는 난민캠프의 특성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길 주저했다. ‘성폭행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했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은 또 다른 편견의 벽에 부딪혔다. 
‘성폭행 피해자’ 낙인찍힐라 쉬쉬 
살아남은 여성들은 ‘정신적 고통’
난민캠프서 심리지원 자조모임
 
아디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힝야 여성 심리지원단’을 양성해 훈련하고 있다. 이 심리지원 활동은 집단학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자조(自助)모임’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성폭력 등 각종 피해를 입은 난민 여성이나,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난민캠프 안에서 훈련된 로힝야 여성 등 난민 여성들의 모임을 조직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디 관계자는 “종교성이 강하고 전통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탓에 로힝야 여성들이 겪은 참혹한 피해는 오히려 사회적 낙인이 될 우려가 있다”며 “여성들끼리 서로 보듬고 도와 자존감을 키워갈 수 있는 자생적인 모임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생자 대부분 테러리스트와 거리 먼 아이·여성·노인…“인종청소 노린 집단학살”
 
유엔 조사위서 책임 묻자 미얀마 군통수권자 “끝나지 않은 비즈니스”
이양희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한국, 인권유린 국가와 교류 중단해야”

 
 
시민단체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의 ‘로힝야 학살 보고서’ 인터뷰에 참여한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뚤라똘리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의 군복에 새겨진 휘장을 선명히 기억했다. 왼팔에 버마어(미얀마어)로 흰색 숫자 99가 적혔다. ‘제99경보병사단’이었다. 춧핀 마을에선 제33경보병사단의 마크가 목격됐다. 

마을 주민들은 인딘 마을에선 미얀마군 535대대, 쿠텐콱 마을에선 537대대가 학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돈팩 마을에서도 군인과 국경경찰대 등이 학살에 나섰다.
 
‘테러리스트 토벌’을 명분으로 내건 군경들은 주로 총칼을 휘둘렀다. 평소에도 로힝야족을 핍박해온 불교도 소수민족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이들은 소총이나 기관총, 칼 등을 소지한 채 마을로 진입했고,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죽였다. 하지만 보고서는 “학살이 벌어진 마을에서 테러리스트의 활동 징후가 포착된 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군경의 총칼에 숨진 이들은 대부분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이거나 여성 또는 노인들이었다. 성인 남성들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마을 한곳에 소집된 뒤 살해당했다.
 
로힝야에게 벌어진 일을 국제사회는 일반적으로 집단학살로 규정한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도 불리는 집단학살은 민족이나 종족, 인종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와 살인을 뜻하는 라틴어 ‘Cide’가 합쳐진 말이다. 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 전체나 일부를 고의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개념을 1944년 처음 정립한 국제변호사 라파엘 렘킨은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규정하기 위해 이 정의를 사용했다.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고,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위해를 가하며, 집단 내에 있어서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등”을 집단학살로 분류한다. 

아디가 만든 로힝야 학살 보고서는 마을 주민 증언을 통해 조직적인 인종말살을 입증하고, 체계적인 집단학살의 의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제작됐다. 

지난해 8월 유엔 진상조사위원회가 미얀마 군부 지도자들을 로힝야 학살 책임자로 규정한 보고서를 내놓자, 미얀마 군부의 통수권자인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어떤 국가나 조직, 단체도 한 나라의 주권에 개입하고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반응했다. 흘라잉 사령관은 앞서 2017년 9월 로힝야를 상대로 벌어진 군사작전에 대해 ‘끝나지 않은 비즈니스’라고 했다.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캠프 등을 방문 중인 이양희 유엔 미얀마 인권특별보고관은 지난 7일 경향신문과의 서면인터뷰에서 한국 정부 역시 미얀마에서 벌어진 로힝야 집단학살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얀마에서 벌어진 로힝야에 대한 학살은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며 “미얀마 군사령관은 로힝야에 대한 탄압을 ‘끝나지 않은 임무’라고 언급해왔고, 법과 제도 및 정책 등을 통해 수십년간 서서히 로힝야를 없애려 해왔다는 점을 보면 집단학살의 의도 역시 입증됐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과 국제사회는 인권을 유린하는 국가에 대한 지원과 교류를 중단하는 등의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 “주한미군,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는 주둔” 발언 ‘주목’

김원식 | 2019-02-14 10:03:4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에이브럼스 사령관 “주한미군,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는 주둔” 발언 ‘주목’
우리 정부, ‘주한미군은 동맹 차원·평화협정과 무관’ 입장과 상당한 뉘앙스 차이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오른쪽)은 12일(현지 시간)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앵커스 킹 상원의원(무소속, 왼쪽)이 주한미군 주둔 문제에 관해 질의하자,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는 주둔할 것”이라고 밝혔다.ⓒ미 의회 공개 동영상 캡처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주한미군사령관이 주한미군 유지 문제에 관해 “모든 당사자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는 주둔할 것”이라고 밝혀, 그 발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12일(현지 시간)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앵커스 킹 상원의원(무소속)이 주한미군 주둔 문제에 관해 질의하자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킹 의원은 청문회 말미에 추가 질의를 통해 “지금은 북한의 핵위협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역사상 한국에는 핵위협이 없고 재래식 위협이 있던 시절부터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면서 “이런 역사적인 관점에서 핵무기 위협이 제거되거나 감소한 후에도 남북의 재래식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을 안전하게 철수(remove)할 방안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질문했다.
이에 관해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전적으로 옳다”면서 베트남 전쟁의 예를 들면서 “우리 군대의 주둔과 한반도에서의 재래식 능력 유지는 근본적으로 북한(DPRK)의 재래식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킹 의원은 “아마도 (한반도에) 핵위협이 제거되거나 감소한 후에도 재래식 위협이 (남북) 동시에 있다면, (주한미군 주둔) 필요가 있지는 않으냐”고 재차 되물었다.
이에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평화협정(peace treaty) 체결 전까지는 그렇다. 우리는 정전협정(armistice) 상태에서 주둔할 것”이라면서도 “그 사이에 모든 당사자가 평화협정을 맺을 때까지는 그렇다”고 재차 강조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이 같은 언급은 그동안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은 한미동맹 차원에서 주둔하는 것으로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과 직접 관계는 없다는 입장과는 상당한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으로 향후 논란이 일 것으로 관측된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청문회 전체 발언의 맥락도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강조하는 뜻이지만, 그가 안전한 철수 방안 수립에 동의하면서 모든 당사자가 평화협정 체결 ‘전까지(until)’라고 유독 강조한 점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에 대한 재검토 여지가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부터 최근까지 끊임없이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는 지난 3일, 미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관해 “누가 알겠느냐”고 주둔 비용 문제를 제기하면서 부인하지 않았다.
또 지난해 1차 북미정상회담 다음날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병력을 빼내고 싶다.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면서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에 관해 워싱턴의 외교 전문가들은 종전선언과 이후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위상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으는 상황이다. 특히, 한반도 관련 당사국들이 모여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에는 주한미군의 주둔 명분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을 우선순위로 내세운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청문회 발언에 관해 13일,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킹 의원의 질문과 한미연합사령관의 답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면서도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면서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민중의소리’에 게재된 필자의 기사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299 

세계 제일 세포 축산기지를 가다

세계 제일 세포 축산기지를 가다<2>
김수복 6.15뉴욕 공동위원장 
기사입력: 2019/02/14 [10: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본 기사는 만플러스와 김수복 6.15뉴욕지역위 공동위원장의 동의를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세계 제일 세포 축산기지를 가다<2>


세포지구 생성내력은 화산이다지금으로부터 150만 년 전 현재의 세포군 성산리에 있던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린 재가 일대를 뒤덮으며 평평한 대지가 생겨났다화산재는 산성이어서 농사가 안 된다수만 년 억세 풀만 무성하던 버려진 땅이었다.

우리가 세포군에 도착하자 과학자돌격대원인 한윤철 박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농업과학원 사리원 축산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가 세포지구 건설에 지원해 온 한윤철 박사가 우리의 세포등판 안내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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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포군 성산리 축산기지종합지령실 앞에서 돌격대원 한윤철 박사와 함께

목장인지 무엇인지 분간이 안 되는 사방팔방이 확 트인 광활한 풀밭에 우리가 서 있다. “젊어지라 복받은 대지여” 라고 엄청나게 큰 글씨를 보고서야
우리가 드디어 목장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그 글자는 꽤 먼 거리인데도 내 사진기로서는 한 장에 잡을 수가 없어서 두 장으로 찍어야만 했다.

이렇게 수만 년 묵었던 세포지구에 대한 종합적인 개발이 김정은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2년 9월 22일에 세포등판 건설명령이 내려졌다.

성산리에 맨 먼저 종합지령실을 건설하고 5만 정보 전역을 작은 필지로 나누어 관리한다각 지역별 온도전염병풀 건강상태 등을 살핀다세포는 염소 방목이 주가 될 것인데 공사가 완성되면 50만 마리를 방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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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 커다란 돌덩이가 모여서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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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어지라 복 받은 대지여

자주 등장하는 돌격대란 말이 군사작전 용어이지만 북에서는 수력발전소건설물길공사간척지공사와 같은 험난한 대자연개조공사나 려명거리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공사장에서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작업을 군인 건설자들이 맡아서 하고 그 뒤에 돌격대가 따라간다.

세포등판 건설명령이 하달된 날인 9월 22일을 따서 만든 922돌격대가 전국의 각 도시군 직장별로 편성되었다이와는 별도로 국가 과학원 김책공업전문대학 김일성종합대학 등에서 나온 전문가 조직인 217일 과학자기술자돌격대는 종전부터 따로 있던 전문분야 조직이다세포등판 축산기지의 과학기술적 문제를 담당할 217일 과학자기술자돌격대원 50명이 상주할 고급건물이 성산리에 한창 건축 중이다.

인공풀밭 조성작업은 다 끝났는데 아직은 맨흙이 보이는 곳도 있고 이제 막 풀싹이 올라오고 있는 곳도 있다여기저기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성산리 일대는 짐승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고 염소는 이미 방목공이 풀이 무성한 곳으로 몰고 가 이동한 뒤였다빈 우리와 길바닥에 깔린 윤기 있는 염소똥 더미만 보고 다음 일정을 계속했다염소와 상면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세포등판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5만 정보 구석구석의 필지별 토양분석 자료를 완성하는 것이었다그 자료에 근거하여 제일 먼저 소석회와 탄재 흙보산 비료 같은 유기질비료를 준비했다그리고 평강에 큰 소석회 생산공장을 세우고 후민산 비료생산기지도 세워서 토양의 영양물질함량을 결정적으로 늘리기 위한 작업을 우선 했다그 뒤에 방목공 살림집들과 학교집짐승우리인공수정시설수의방역시설축산학연구소축산물 및 먹이가공기지 등 수천 동의 건설을 시작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노래했던 유명한 가수 남진이 있다그는 사랑하는 연인 둘만의 보금자리를 노래했는데 여기 세포에서는 수만 명의 군인들과 돌격대가 하나같이 손잡고 대자연개조를 통한 미래를 그리며 우렁차게 노래하고 있다.
세포축산기지에서는 필요한 물과 전기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자립자강의 당정책은 각 지방의 말단 단위들에서도 원칙으로 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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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풍력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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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력양수기로 퍼올인 물을 담는 저류지들. 2층집은 염소우리이고 단층집은 방목공 살림집

필요한 물은 옆에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하고 개울물이 안 닿는 곳은 풍력양수기로 지하수를 뽑아 저류지에 저장한다전력은 중형 수력발전소가 완공되면 국가전력을 쓰지 않고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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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랙터만 빼고 자체제작한 풀밭 조성용 기구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농기구들도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쓰고 있다. 70년 계속되고 있는 제재 극복 수단으로서만 자력자강이 아니고항일빨치산 시기부터 자기 힘만을 믿고 나아갈 때에 반드시 승리한다는 귀중한 경험이 있기에 북의 자력자강 정책은 제재가 해제된 이후에도 당정책으로서 변하지 않고 집행될 것이라고 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바탕을 두고 무한 경쟁 속에서 승리한 독점적 기업만이 생존하는 체제가 아니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포등판 대자연개조의 1단계는 2017년 10월 27일에 완성되었다수수 천년 잠자던 갈대밭이 기름진 풀밭이 되고 동양 최대의 종합축산기지로 다시 태어났다후천개벽이 일어났다.

동영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150만 년 전에 솟구쳐 올라온 자연 화산은 이 땅을 불모의 땅으로 바꿨지만 김정은시대에 터져 오른 애국의 활화산은 어떻게 대지를 천지개벽시켰는지를 머지않아 세계는 볼 것이다.”

집짐승우리들마다에서 닭오리돼지의 배설물이 흘러나온다오리 배설물은 쓰레기가 아니고 발효시키면 훌륭한 돼지사료가 된다.

애국풀단백먹이풀은 물론 콩짚강냉이 짚과 같은 짐승이 먹을 수 없는 거친 재료도 토착미생물과 함께 발효하면 맛있는 집짐승 먹이가 된다알곡먹이를 대폭 절약하게 된다돼지 배설물은 유기농비료의 원천이 되고 유기농비료는 또 다른 진거름 퇴비흙보산비료와 함께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있다유기농복합비료는 화학비료의 흡수능력을 높여서 적은 양의 화학비료만으로도 큰 효과를 보기에 화학비료 사용량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다.

5만 정보 풀밭에 염소 50만 마리와 닭오리와 돼지소로 넘실거릴 것이다평강군에 자동화된 대형 고기가공공장과 짐승사료가공공장이 이미 작업중에 있다질이 높은 햄 통조림소세지요구르트산유우유치즈빠다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풀을 고기로 바꾸려는 당 정책을 실현하는 현장이다고리형순환생산체계에 의한 농축산방법을 전국으로 파급하는 본보기 공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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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당 염소 250마리 수용낮에는 방목장으로 나가서 비어있다창이 없는 윗 층은 건초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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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산발효 풀저림칸두터운 시멘트벽 흙을 높이 쌓아서 보온한다이제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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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 우리에서 배설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게 설계한 메탄가스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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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층 건물은 2.17돌격대 과학자기술자50명이 상주할 살림집


  https://youtu.be/mhBBHrPCVBU  이 것을 딸각 눌러 보세요.   

위 동영상은 세포지구의 천지개벽을 노래한다소요시간이 20분이다.
세포읍에 거주하는 81세인 양 옥희 할머니의 구수한 역사해설부터 돌격대 형성 과정과 건설현장에서 돌격대원들의 삶과 생각과 결의를 보여주는 좋은 동영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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